점심때가 이미 기울어 현지 음식점 소개를 부탁하자 걸어갈 만큼 되는 거리의 백족음식점인 ‘이헝판디안(益恒飯店)으로 안내하였다. 여성멤버들은 중국음식점의 관례에 따라 인원수대로 7가지 음식을 골고루 시켰는데 참으로 배 터지도록 먹고 마셨다. 물론 빼갈도 빼지 않았고. 특히 깍두기 같은 김치는 입에 잘 맞았다. 그래서 백족이 고구려 유민의 후예라고도 하나 보았다. 음식값이 총 247 위안이니 우리 돈으로 4만원쯤. 대박이었다.
식사 후 K사장의 안내로 따리고성 관광을 시작하였다.
북에서 남으로 뻗은 웬시앤루(文獻路)를 를 따라 걸으며 이국풍물에 호기심을 풀어놓았다. 문헌로는 아마 웬시앤밍방(文獻名邦)이라는 따리의 별칭에서 따온 듯하였다. 따리의 유구한 역사와 찬란한 운남문화의 발상지라는 자부심이 묻어나는 이름이기는 하였다. 하지만 중원에서 먼 이민족의 변방, 따리! 그들의 당당한 자부심에 앞서 알아주십사 하는 소외된 자의 강변 같은 느낌이 들었다. 가난한 양반이 찬물 먹고 이빨 쑤시는 자존심! 러시아의 모스코바에서도 가졌던 느낌.
거리는 활기찼다. 관광객도 많았다. 주민들 표정도 여유가 있었다. 호객꾼도 없었다. 햇살도 강했고 그늘도 짙었다. 오래된 기와 위에는 시든 풀이 성긴 머리칼처럼 났다. 은세공 손길도 볼거리였다. 불교, 도교, 회교 등 각종 사원도 이웃하고 있었다. 과일도 풍부하고 먹음직스러웠다. 春城답게 가로수마다 핀 분홍 벚꽃이 나그네 마음을 흔들어 갑자기 가족생각이 났다.
양인가(洋人街)를 가로질러 남문 옆으로 성벽에 올랐다.
한눈에 얼하이부터 시내가 조망되고 서문 멀리는 숭성사의 삼탑이 보였다. K사장이 개괄적인 설명을 하였다. 따리의 역사부터 얼하이, 창산, 백족 등등, 그러나 뭔가 2% 부족하였다. 대표적인 것이 얼하이(洱海)이었다. 공부한 바로는 얼하이는 중국 7대 딤수호로 길이 46km, 둘레 110km, 폭 6~9km 깊이 10~20m인데 길이가 110km라 하였다. 아마 km 단위면 둘레를, 아니면 길이를 100리로 표현한 것을 착각한 것 같았다.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니었으나 상주하는 관광 가이드 겸 GH업을 하는 사람은 너무 아니었다. 폭넓은 인문, 지리, 역사, 사회, 자연 등의 지식과 정확한 정보를 가져야 한다. 하지만 ‘얼하이가 밀물과 썰물이 있다든가, 따리국의 후예로서 바이(白)족이 갖는 자부심은 리지앙 등 타지의 옛 피지배족에 대한 하시 및 천대로 배타성이 있다, 숭경사의 삼탑 중 70m로 제일 높은 천심탑은 단 한 개의 돌로 된 중국 보물 1호’라는 등은 들어본 일이 없었다.
따리고성은 내외구조로 지금도 웅장한 성곽을 많이 보존하고 있는데 쿠빌라이의 단 한번 공격에 여지없이 무너졌다. 따리국이 믿었던 히말라야의 끝자락인 4000m급 창산은 새도 넘기 힘든데 쿠빌라이는 거길 말을 타고 넘어왔다. 세계 역사상 알프스를 넘은 한니발이나 나폴레옹과 견줄 수 있을 것이다. 창산과 얼하이를 낀 천험의 요새도 인간의 의지를 막을 수 없나 보았다.
성곽을 내려와 군 훈련소를 지나 우화루(五華樓) 근방에 오니 그림자가 길어졌다.
작은 고성 내에 넓게 자리한 군부대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가입을 앞둔 따리에겐 계륵 같은 존재일 것이다.
배도 출출할 즈음, 아까부터 거리 음식을 맛보자 할 때 맛있는 집이 있으니 참으라던 K사장이 드디어 코너 한 가게 앞에서 맛보라 권하였다. 이름하여 ‘루산’ 따리 3대 명물로 ‘삼도차’와 쌀떡인 ‘얼콰이’ 그리고 이 ‘루산’이 꼽히는데 이집이 원조란 설명이었다. ‘루산’은 우유를 끓일 때 올라오는 거품으로 만드는데 치즈맛이 나고 안에 소스를 넣어 꼬치에 둘둘말아 주었다. 쫄깃하나 그닥 인상적인 맛은 못 느꼈다. ‘루산’은 燒乳扇이라 표기했는데 말인즉 ‘우유를 가지고 불에 구어 부채처럼 만든 것’이란 뜻 같았고 값이 2위안인가 하였다.
가게 주위는 아주 번화가였는데 길가에선 스프레이 제품을 쌓아놓고 팔고 있었으며 젊은이들의 손에는 장식한 사과가 들려있었다. 사과는 크리스마스 ‘이브’를 기념하는 상징이고 스프레이는 내일 인공눈을 연출할 문건들이었다. 이브 밤은 이곳을 중심으로 주민과 관광객들이 한데 어울려 스프레이를 뿌리며 광란의 멋진 축제로 성탄을 축하한다고 하였는데 낮에 떠나는 우리에겐 섭섭한 일이었다.
런민루(人民路)로 접어들자 어디보다 음식점이 아연 활기를 띠었다.
날것, 익힌 것, 구은 것, 지진 것, 말린 것, 살아 있는 것, 고기, 수산물, 채소, 과일...... 등등 온갖 식재료와 요리가 박물관을 이루고 있었다. 물론 거리에는 좌판도 즐비했고. 학생들이 많았다. 식당마다, 거리에 넘쳤다. 얘기를 들어보니 급식이 없고 늦게까지 공부를 하기 때문에 이 시간에 저녁을 사먹으러 한꺼번에 나왔기 때문이었다. 오나가나 그 놈의 공부라는 족쇄.
잠시 후 허름한 골목길을 따라 오른쪽으로 들어갔다.
그 유명한 따리 성당을 구경하기 위해서였다. 따리성당은 1927년 중국식 아니 바이족 전통양식으로 지어진 중국 최초의 성당이었다. 이 성당의 처마장식에서 바이족의 독특한 건축양식을 볼 수 있었다. 성당은 5개의 용, 봉황, 호랑이, 코끼리, 물고기가 층층이 장식하고 있는데 민가에서는 맨 위 장식의 종류에 따라 주인의 성별을 구분한다. 예를 들면 용이면 남자가 주인, 봉황이면 여자가 주인 식으로. 옆 민가에선 3개의 장식도 있었다. 입구 벽 흑판에 분필로 쓰고 그린 공지가 재미있다. 정면에는 날아갈 듯한 처마를 가진 3층 기와집 성당이 자리 잡고 꼭대기부터 마당까지 붉은 천에 금빛 글씨로 ‘구원의 큰 은혜를 바랍니다’ ‘예수님 성탄을 축하합니다’라고 썼다. 문 위에는 가로로 ‘예수님 성탄을 열렬히 경축합니다’라는 프랭카드로 걸었다. 케럴송 한 번 듣지 못한 12월 한국보다 그나마 성탄 분위를 느낄 수 있었다. 올해부터 한국인 신부가 와서 봉사를 하시고 아마 K사장도 왕래를 하는 모양 같았다.
따리의 과일은 싸고 정말 맛있었다.
여성 멤버들은 풍성한 과일을 샀다. 다음 날 리지앙으로 떠날 때도 따리에서 사가기로 하였다. 그곳은 물가는 물론 과일값이 무척 비싸다는 정보를 보았다.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GH로 와서 잠시 K사장과 담소를 나눴다. 이번에는 그의 개인사도 비추어 조금 엿볼 수 있었다. 그의 따리 정보가 긴가민가하고 놀라웠다. 일례로 고성 내 전통가옥 값이 엄청나게 올랐다고 하였다. 한 30평 돼 보이는 GH 건물이 무려 우리 돈으로 대략 18억 정도라니..... 아울러 지난 10월 1일부로 모든 관람료, 입장료 등이 대폭 올랐다.
일행은 태양열과 전기로 덥힌 시원찮은 시설로 대충 씻고 커피 한잔을 하며 밤 20시에 하는 야외공연 ‘希夷之大理’(희이지대리)를 보기 위해 대기하였다. 커피 얘기가 나왔으니 맏언니께선 커피를 많이 챙겨 왔는데 일행은 생수통의 온수를 이용하였다. 커피란 놈이 원래 이 정도 온수로는 제 맛이 날 수 없었고 급기야 끊인 물을 찾았는데 K사장은 묵묵부답이었다. 아마 5위안짜리 GH 커피를 안 이용해서였을까.... 맏언니는 다음 날은 무슨 수를 쓰던지 제대로 커피맛을 보겠다고 결의 다졌다.
19시가 넘어 픽업차가 왔다.
곧 공연장인 ‘대리지안 몽환대극장’(大理之眼 夢幻大劇場)이 빨간 네온 간판을 달고 위용을 자랑하였다. 입장을 하자 거대한 무대가 나타났다. 원래 베이먼(北門) 저수지 위에 세워진 엄청나고 현대적인 야외무대는 역시 중국인다운 모습이었다. 배를 띄울 수 있는 수상에 5계단의 다층무대를 꾸미고 영상을 같이 상영하는 조명탑이 아치형태로 무대를 가로질러 설치되어 있었다. 무대의 물에 창산이 비치고 숭경사 삼탑이 무대 배경이 된다는데 무대 공사 초기부터 자연환경 훼손과 공연소음 공해의 논란이 많았다는 기사를 보았다.
밤 날씨는 급격히 추워졌다. 나름대로 중무장을 하고 나섰다.
공연은 한 30여분 남았는데 너무나 추웠다. 빼갈을 조금 마셔도 추위는 가시지 않았다. 손을 비비고 발을 굴러도 몸은 점차 떨려 왔다. 게다가 썰렁하게 1000여석의 좌석에 기껏해야 40~50명 정도만 채우고 있었다. 이때 나온 말이 ‘전세관광여행’이었다. 바람돌이 멤버의 절묘한 멘트였다. 할 수 없이 입장구 건물로 들어가니 그곳은 나름대로 볼거리가 많았다. 첸카이커 감독의 포스터, 다양한 목각제품, 무엇보다도 대리석 표구작품은 감탄을 자아냈다. 참 대리석의 대리다웠다. 그 중 작품가격이 5천만원에 이르는 것도 있었으니 눈이 호강을 한 셈이었다.
공연은 ‘시어즈 따리 ’망부운‘(希夷之大理 望夫雲)으로 영화 ’무극‘으로 잘 알려진 ’첸카이커‘ 연출 작품이었다. 운남의 백족 설화를 모티브로 삼았다. 줄거리는 공주가 사냥꾼을 사랑하여 출궁하였으나 마법사의 마법에 걸려 모두 죽음을 맞는다는 가슴 아픈 비련이었다. 흔한 줄거리나 150여명에 달하는 출연진이 웅장한 무대를 배경으로 춤추고 뛰고 구르고 배 띄우고 한편에선 영상이 돌아가고...... 큰 감동을 줄 무대 같은데 개인적으로는 별로 그러하지 못했다. 아마 무대가 너무 크고 여기저기 시선을 빼앗겨 집중력이 떨어지고 줄거리를 음미하게 하질 못해서였던 것 같았다. 추위도 한몫했나 보았다. 감동이 적다보니 추운 밤에 물에까지 들어가면 열연하는 연기자들이 오히려 안쓰러웠다. 또한 출연진보다 한참 적은 관람객들이 다 퇴장할 때까지 인사를 하는 그들에게 미안했다.
希夷는 찾아보니 도덕경에 나오는 말로 자연, 무위자연을 뜻한다 하나 ‘希夷之大理’는 ‘따리의 자연’ 쯤 되나?
‘시어즈따리’ 공연은 우리팀의 ‘문화관광’의 시작이었다.
쿤밍의 ‘운남영상’은 이미 표를 예매해놨고 따리의 ‘망부운’에 이어 리지앙에서는 장이모의 ‘인상 리장’을 관람할 예정이니 문화여행에 손색없었다.
천천히 걸어서 돌아오는 길은 한적하였다.
돌아와서 곧바로 잠들지 못하고 여성방의 거실에서 얼하이문의 야경을 보며 얘기꽃을 피웠다. 야간 조명을 받은 동문은 화려했는데 촌티(?)도 지울 수 없었다.
잠자리에서 두 분의 빼갈은 다시 바닥을 드러냈다.
첫댓글 대국답네요^^
마음 맞는분들과의 여행 참 행복하셨겠습니다.
중국음식 침넘어가네요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