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리포 나무들] 호랑가시나무와 애기동백이 지어내는 수목원 겨울 숲의 절창
[2010. 1. 6]
새해 들어 첫 편지, 올립니다. 쏟아진 큰 눈으로 힘드신 일 많으셨으리라 생각되는 새해 벽두입니다. 조금만 덜 했어도 그저 반갑기만 했을텐데, 워낙 많은 양의 눈이 한꺼번에 쏟아지는 바람에 적잖이 고생들 하셨겠습니다. 찻길을 다니셔야 했던 분들이라면 훨씬 큰 고생을 하셨겠지요. 하긴 걷기도 그리 쉬운 것은 아니었습니다. 버스 타고 내릴 때의 아슬아슬함도 그랬고요.
이 겨울 시작될 무렵, 가슴 졸이며 보았던 기상청의 장기 예보가 떠오르네요. 올 겨울에는 엘니뇨 현상이 두드러지면서, 갑자기 추워졌다가 따뜻해지기를 수시로 거듭할 것이고, 눈이 온다면 지역적으로 폭설이 쏟아질 가능성이 높다고 했던 예보였지요. 이번 눈은 전국적으로 쏟아졌지만, 앞으로 얼마나 많은 눈이 더 올 것이고, 또 기온은 얼마나 더 떨어질 지도 걱정입니다.
호랑이가 올해의 주인공이긴 합니다만, 자연 상태로 살아있는 호랑이는 이제 멸종 상태 아니던가요? 그림으로, 혹은 겨우 동물원에 가서야 볼 수 있으니, 백수의 제왕이라는 말도 무색합니다. 호랑이가 다시 살아날 수 있는 때가 되면, 엘니뇨같은 이상 기후 현상도 줄어들텐데, 언감생심일 듯합니다.
호랑이와 잘 어울리는 나무를 꼽으라면 아무래도 소나무부터 꼽아야 하지 않을까요? 호랑이가 등장하는 우리의 옛 그림의 배경에 가장 많이 그려진 게 소나무 아닌가 싶어서 드는 생각입니다. 또 짐승 중의 제왕이 호랑이라면, 나무 중의 제왕을 소나무라고 생각해왔던 게 우리 민족이었으니, 그럴 법하지요. 우리 옛 그림 가운데 최고의 걸작이라고 꼽는 단원 김홍도의 송하맹호도(松下猛虎圖) 역시, 소나무를 배경으로 호랑이가 위엄을 갖추고 서있는 그림이잖아요.
나무 이름에 호랑이 이름이 들어간 식물로는 호랑가시나무가 먼저 떠오릅니다. 살펴보면, 떡버들의 변종인 호랑버들도 있긴 합니다. 호랑버들은 겨울에 맺히는 겨울눈이 호랑이 눈을 닮았다 해서 붙은 이름이죠. 하지만 이 나무의 전체적인 분위기에서 호랑이 이미지를 떠올리기는 쉽지 않을 듯합니다.
하긴 호랑가시나무라고 해서 전체적인 수형(樹形)에서 호랑이 이미지가 떠오르는 건 아니겠지요. 호랑가시나무는 잎 가장자리에 난 날카롭고 억센 가시가 날카로운 호랑이 발톱을 닮았다 해서 붙은 이름일 뿐이지요. 또 호랑가시나무의 가지를 그러모아 엮으면, 호랑이처럼 거친 피부를 가진 짐승의 등긁개로 쓰기에도 알맞춤하다 해서 우리나라의 일부 지방에서는 호랑이등긁개나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이 겨울은 바로 호랑가시나무가 유난스레 돋보이는 계절입니다. 무엇보다 잎 겨드랑이에 맺히는 새빨간 열매 때문이지요. 그걸 겨울의 잔치 가운데 하나인 성탄 축제 때의 축하 카드에 많이 그리기 때문이기도 할 겁니다. 짙은 초록의 두툼한 잎과 새빨간 열매, 그 위에 폭신하게 쌓인 흰 눈까지 더하면 더 없이 아름다운 광경일텐데, 눈길에 발이 묶여 돌아보지 못하네요.
천리포수목원은 호랑가시나무와 인연이 깊은 곳입니다. 우선 우리 수목원의 설립자인 고 민병갈 님이 호랑가시나무를 좋아해서, 다양한 종류를 잘 수집한 것으로 유명하지요. 목련, 동백, 무궁화와 함께 우리 수목원을 대표하는 식물이 호랑가시나무입니다. ‘솔숲 편지’에서도 호랑가시나무 이야기는 자주 전해드렸습니다.
또 고 민병갈 설립자는 완도호랑가시(Ilex x wandoensis)라는 특별한 품종을 발견해 세계식물학회에 등록하기도 했습니다. 완도호랑가시는 자연상태에서 호랑가시나무와 감탕나무가 혼인을 이뤄 생겨난 자연교잡종으로 우리나라의 완도지역에서만 자생하는 나무입니다. 우리 수목원에서는 완도호랑가시를 포함해 수백 종의 호랑가시나무 품종을 심어 가꾸고 있습니다. 열매는 모두 똑같지만, 호랑이 발톱을 떠올리는 잎사귀는 제가끔 다른 모습이어서 재미있습니다.
호랑가시나무의 품종들이 앞다퉈 이 겨울에 맺는 빨간 열매는 수목원 숲에 사는 온갖 종류의 새들에게 좋은 먹이가 되기 때문에, 좀 지나면, 열매는 다 떨어집니다. 지금이 한창 보기 좋을 때입니다. 여러 종류의 호랑가시나무 가운데 수목원의 게스트하우스인 초가집 앞의 울타리 역할을 하며 무리지어 자라고 있는 호랑가시나무가 가장 아름답습니다.
자연스레 호랑가시나무 열매의 빨간 색을 탐하게 되는 이 계절에 함께 보게 되는 나무는 애기동백(Camellia hiemalis 'Chansonette')입니다. 아직 동백이 꽃을 피우기에는 이르지만 애기동백은 이미 붉은 꽃을 피웠습니다. 애기동백에도 여러 종류가 모두 꽃을 피운 건 아니지만, 몇 그루의 성급한 나무들이 지난 12월부터 꽃을 피웠지요.
종류에 따라 꽃 피어나는 시기는 조금씩 다릅니다. 어떤 종류의 애기동백은 목련 꽃 피는 3,4월 되어서야 꽃을 피우기도 하지요. 동백이 그런 것처럼 애기동백에도 종류가 많아서 일괄적으로 애기동백의 꽃이 어떻다고 이야기하기는 쉽지 않네요. 대개의 애기동백이 동백보다 먼저 피어나고, 꽃의 크기나 전체적인 수형이 동백에 비해 조금 작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꽃의 색깔이나 생김새는 동백과 닮았습니다. 이른 겨울 수목원의 나무들을 관찰할 때에 빼놓을 수 없는 식물이 바로 이 애기동백입니다. 빨간 꽃 송이와 그 안쪽에 노랗게 돋아나는 꽃술들이 일궈내는 원색의 잔치가 재미있습니다. 어쩌면 애기동백 없는 수목원의 겨울 숲을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천리포수목원을 상징하는 나무가 바로 애기동백이라 해도 될 겁니다.
사진의 꽃들은 우리 수목원에 생태교육관을 짓기 전까지 사무실로 쓰던 건물 앞의 화단에 있는 애기동백입니다. 개인적인 이야기이지만, 십여년 전 제가 처음 우리 수목원을 찾았던 그 겨울에 가장 먼저 제 눈에 뜨였던 꽃이기도 합니다. 아무리 수목원이지만, 겨울에 피어나는 꽃이 있겠느냐 싶었는데, 지금처럼 화려한 몸단장으로 활짝 피어났던 게 생생히 기억납니다.
표찰은 있지만, 한글 이름 없이 학명만 적혀있는 터여서, 그때는 그냥 Camellia 라고만 기억했던 나무입니다. 해마다 겨울 되면 가장 먼저 찾게 되는 꽃이 바로 애기동백의 꽃입니다. 물론 살펴보면 다른 식물들에서도 꽃은 피어납니다. 그러나 제게 가장 먼저 놀라움을 주었던 꽃인 까닭인지, 이 애기동백에는 유난히 관심과 애정을 갖게 됩니다.
옛 사무실 앞 화단의 애기동백은 비교적 개화기가 길어서 1월 중에도 이 꽃을 볼 수 있지요. 이 꽃을 보고나면 이 꽃을 따라 입을 여는 애기동백을 더 찾아가게 되지요. 그 중에는 아마도 앞에 말씀드렸던 초가집 앞의 호랑가시나무 울타리에서 측백나무 집으로 가는 좁다란 길목의 애기동백이 가장 예쁜 꽃을 피우지 않나 싶네요.
겨울 수목원 숲에서 때 아닌 붉은 꽃을 보는 즐거움은 아마도 봄이나 여름에 여러 종류의 꽃을 한꺼번에 즐기는 것 이상으로 좋은 경험 아닌가 생각됩니다. 오가는 길 좀 나아지면 애기동백, 호랑가시나무 찾아보러 다시 길 위에 오르겠습니다.
눈 쌓인 도시의 길을 걸었습니다. 인도 위로 쌓인 눈더미를 뚫고 겨우 한 사람 지날 정도의 좁은 길이 나있었습니다. 비틀 미끄러지면 쌓인 눈 속으로 빠지게 돼 신발 속으로 찬 기운이 스며들지만, 오랜만에 걷는 눈길이어서인지, 그냥 웃음부터 나왔습니다. 쌓인 눈 위로 어느 한 가족이 드러누운 자국이 허수아비처럼 누운 채로 함께 웃네요.
‘솔숲편지’의 사진을 조금 더 크게 보여드리려 편지지를 키웠습니다. 어딘지 어설퍼 보입니다만, 차츰 고쳐가며 더 좋은 사진 전해드리도록 애쓰겠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라고 지난 해 말에 인사 올렸지만, 새해 들어 다시 큰 절 올립니다.
새해 큰 복 많이 많이 받으세요.
고규홍(gohkh@solsup.com) 올림. |
첫댓글 천리포 수목원 지난여름 가보았습니다 환상이었습니다 겨울 호랑가사나무와애기동백 모습 정말멋지내요 잘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저도 올해는 꼭 가 볼 작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