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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 순간에도 지구상에는 끊임없이 전쟁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충돌은 2년째 멈추지 않고 있고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미국과 서방에 러시아 본국으로 공격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조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충돌로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세계 곳곳에는 이스라엘 지지자와 하마스 지지자들 데모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지구상에는 국가 간에, 정치적인 이념의 충돌, 경제적, 군사적인 충돌, 종교간 충돌, 영토의 충돌, 문화적 충돌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세상에는 보이는 세계만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도 끊임없이 충돌하고 있습니다. 이 충돌이란 바로 갈등을 말합니다.
미국의정치학자인새뮤얼헌팅턴이쓴‘문명의충돌’이란유명한베스트셀러에서말하기를
(1) 세계에서 문명과 문명의 충돌이 세계 평화의 가장 큰 위협이라고 했습니다.
(2) 지난 세기의 냉전 체제에는 정치적 이념의 충돌이었다면(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지금은 문명과 문명의 충돌(기독교 문명과 이슬람 문명)이라고 했습니다.
(3) 문명에 바탕을 둔 국제 질서만이 충돌을 막는 방어 수단이라고 했습니다. 그 국제 질서가 무엇이며, 어떤 형태로, 누가 어떻게 질서를 세우느냐, 그 의지와 방법이 오히려 갈등의 원인이며 충돌하게 하고 있습니다. 보이는 인간 세계의 영원한 문제요 숙제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문명의 충돌보다 더 무서운 갈등이 있다면 영적 충돌입니다. 인간의 내면 속에는 육체적인 것과 영적인 것이 끊임없이 충돌하고, 사람의 뜻과 하나님의 뜻이 충돌합니다.
사도바울은 육신의 생각과 영의 생각이 충돌한다고 했습니다.(롬8:6-7)
우리의 속사람과 겉 사람의 법이 충돌하고 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롬7:22-23)
지금 우리 속에서도 육적인 것과 영적인 것, 선과 악이 끊임없이 충돌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이런 영적 충돌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요?
오늘 말씀에 보면 두 갈래 길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성령을 좇아 살아가는 길이 있고. 둘째는 육체의 소욕을 따라 살아가는 길이 있습니다.
이 두가지의 길, 성령과 육체의 소욕은 끊임없는 충돌이 일어납니다. 이런 충돌을 내적 갈등이라고 합니다. 영적인 전쟁입니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16)
육체의 소욕과 성령이 서로 대적합니다. 어디에서요? 바로 우리 내 안에서 말입니다. 내 안에는 육체의 소욕과 성령이 함께 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고 은혜로 구원받았으면 내 안에는 성령이 거하시므로 소욕은 사라져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
그러면서 내가 믿음으로 살고자 하는데도 수시로 육체의 소욕을 따라서 죄를 먹고 마시고, 죄 속에 허우적거리는 나를 보면서 ‘내가 예수 믿는 사람이 맞나’ ‘내가 이렇게 사는데 구원 받을 수 있는가?’ ‘성령님이 나에게서 완전히 떠나신 것이 아닌가?’하는 의문이 막 생깁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요 14:16-17)
바로 성령님이 우리와 영원토록 함께 해 주신다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믿는 자에게는 성령님이 결코 떠나지 않으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성령님은 범죄하는 내 안에서 무엇을 하고 계신다는 말입니까?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은 믿는 사람이 죄를 범하면, 성령님께서는 떠나가시는 것이 아니고 그 속에서 근심하십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은 죄가 들어왔다는 사실 때문에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불편해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는 자가 죄를 지으면 나도 불편하고, 내 속에 계신 성령님도 불편해 하십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엡 4:30)
성도 여러분, 성령님은 우리 안에 영원히 거하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그 순간, 주님의 영인 성령님께서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성령님은 우리 안에 한 번 오시면 영원히 떠나지 않으십니다.
그런가 하면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여전히 성령의 소욕와 갈등하는 육체의 소욕도 여전히 함께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내 욕심을 변화시켜서 다 성령의 생각으로 바꿔 주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내 욕심, 내 옛 성품을 그냥 두신 채로 우리 안에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새로운 갈등의 시작입니다. 문제가 다 해결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으면 더 심각한 갈등이 시작됩니다. 바로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이 내 안에서 갈등하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내가 예수님을 믿지 않을 때는 아무런 의식도 없이 행했던 것들을 예수님을 믿음으로 인해서 그 똑 같은 일을 행함에 있어서 불쾌하고 추악스럽게 여겨집니다. 왜 그렇습니까? 내 안에 계시는 성령님이 기뻐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예수님 믿는 성도는 육체의 소욕과 갈등해야 합니다. 문제의식을 가지고 도전해야 합니다. 좋은 것이 좋다고… 대세에 맡기는 것이 아닙니다. 고민하고, 갈등하고, 각을 세우고 싸워야 할 때는 싸워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육체의 욕심을 이루게 됩니다(16). 성령을 거스립니다(17). 그 결과로 육체의 일을 하게 됩니다(19). 그것이 무엇입니까?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19-21).
여기에 육체를 따라 살면 육체의 일을 하게 됩니다. 15 가지가 나옵니다. 이 15 가지의 육체의 일을 3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도덕적인 것, 종교적인 것, 사회적인 것입니다.
첫째로, 도덕적이고 감각적인 죄상을 보십시오.
“음행, 더러운 것, 호색, 술취함, 방탕”
요즘, 한국 뉴스에 핫 이슈 중의 하나가 인기 가수 김호중씨의 음주 운전 사고입니다. 제가 자세히 모르나 초저녁부터 3차 4차 음주를 하고 운전하다가 사고가 났습니다. 일을 마치고 지인들과 한 두잔 술을 마시는 것이야 어떻게 시비를 걸겠습니까? 육신의 소욕에 따라 술을 먹고, 사고를 치고, 거짓으로 덮으려 하다가 결국 구속되었습니다.
둘째로 미신적인이고 종교적인 죄상입니다.
“우상 숭배, 술수, 이단”
하나님보다 더 사랑의 대상은 우상입니다. 술수는 마약, 현실 도피를 추구합니다. 이단은 잘못된 교리 가운데 현실 도피를 추구합니다. 결국은 도덕적 영적 피폐한 결말을 낳게 하는 것입니다.
셋째로 관계적이고 사회적인 죄상입니다.
“원수 맺는 것, 분쟁, 사기, 분냄, 당 짓는 것, 분리함, 투기”
오늘 우리에게도 흔히 드러나는 것들입니다. 타인의 소유를 탐내는 시기, 자기의 노여움을 억제하지 못하여 폭발하는 분냄, 자기의 보신을 위해 파벌을 형성하는 ‘당 짓는 것’ 다른 사람이 잘 되는 것을 시기하는 투기 등등
바로 육신의 소욕을 따르므로 우리에게 일어나고 있는 열매들을 보십시오.
(1) 하나님과의 교제를 가로막습니다.
하나님과 교제가 막히고, 마음의 편안을 잃고 안식이 없습니다. 나아가 하나님의 지혜가 떠오르지 않고, 성령의 인도를 받지 못해 허덕이는 삶의 연속입니다.
(2) 신앙의 자리에서 떠나 사탄의 도구가 됩니다.
육체의 소욕들을 자세히 보면, 하나하나가 어둠의 영이 들어오는 통로임을 알 수 있습니다.
(3) 정신과 영혼과 삶을 부패하게 만듭니다.
(4) 영적인 삶을 무너트리는 요소들입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됩니까?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21)
얼마나 불쌍한 영혼이 되는 것입니까?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아니 성령님께서 내가 육체의 소욕에 따라 육체의 일을 시도할 때마다 나를 확 바뀌어 놓으시면 되지 않으시냐?”
예, 나도 그렇게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성령 하나님은 우리를 그렇게 하시지 않습니다. 이것이 창조주 하나님께서 인간을 향하신 사랑 방법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에덴 동산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심어 놓으시고, 아담과 하와에게 먹지 말라고 했습니다. 자유를 주셨습니다. 그 실과를 먹지 못하도록 프로그래밍하지 않으셨습니다. 자기가 선택하고 결정하도록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법이었습니다. 죄에 대한 방지보다도 인간의 자유를 더 중시하셨습니다.
그래서 지유의지의 선택권을 가진 존재이기에 내 안에 끊임없이 일어나는 영적 전쟁(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갈등)에서 선택하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이기는 삶, 승리의 삶을 기대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신 소원을 이루기 위해서 권면합니다.16절에 “성령을 따라 행하라” 18절에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를 따르라”고 권하고 있습니다.
성령을 따라 행하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으라고 합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삶의 주체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쉽게 말해서 내가 인생을 살아갈 때에 내 힘이나 의지로만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인간이 최선을 다한다고 해도 한계를 만납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힘으로도 안 되고 능으로도 안 되나 나의 영으로 된다”(슥4:6)
‘영’ 이란 히브리어로 ‘루아흐’ 라 하는데, ‘하나님의 영’ 곧 성령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은 하루 하루 순간 순간을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며 살아갑니다. 그럴 때에 육체의 소욕을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사도행전을 묵상하고 있습니다. 초대 교회에 성령의 물결이 충만하게 일어났습니다. 사도들이 한 번 설교를 하면 수천 수백의 사람들이 회개하고 믿고 돌아오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사도들이 성령에 인도하심을 받을 때에 일어나는 일을 보십시오.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는 현장에도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우리가 바라는 것과는 다른 현상들이 일어났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저 하늘에 붕붕 떠다니는 것 같은 기쁨 충만 은혜 충만한 그런 것이 아닙니다.
보십시오. 사도들은 오해를 받기도 하고, 감옥에 갇히기도 했습니다. 그런 와중에도 성령의 이끄림을 받은 사도들은 달랐습니다. 자기 자신과 상황에 메여서 자기 안위 속에 숨어드는 것이 아니라 목숨을 내어놓고 예수 이름을 전했습니다.
성령이 일어나서 교회가 부흥할 때에도 인간의 소욕은 여전히 인간 마음에서 작동했습니다. 헬라에서 온 과부들이 구제에서 빠지자 불평이 일어납니다. 문제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사도들은 문제를 하나님 앞에서 지혜롭게 풀어갔습니다. 사도들은 말씀과 기도에 전념하고 집사들을 세워서 교회의 짐을 사로 나누었습니다. 교회는 은혜로와졌습니다.
서로 서로 물건을 나누고 구제하는 가운데도 서로 높아지려는 육체의 소욕이 일어나서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죽음을 맞이하는 슬픔을 교회는 보기도 했습니다.
성령이 임하자 하루에도 수천 수백의 사람들이 교회에 모여들었습니다. 이때에 성령은 에디오피아 여왕의 재정을 맡은 내시 한 사람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기 위해서 빌립 집사를 광야로 내몰았습니다. 성령은 많은 대중도 중요했지만 한 생명 한 영혼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교회는 날마다 부흥을 거듭했으며 복음은 땅끝으로 흘러갔습니다.
세계적인 설교가 스펄젼은 말하기를 “성령에 도움 없이하는 것은 목회자에게 욕이 된다.” 고 했습니다. 목사에게 심한 욕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목사가 밉고 싫을 때에 할 수 있는 가장 심한 욕은 “성령의 인도하심 없이 목회나 해라”입니다. 그러면 목회가 고역이지요.
여러분은 교회 일을 어떤 마음으로 하십니까? 교회 일은 노동이 될 수 있고, 사명이 될 수 있습니다. 교회의 일이 억지로 하면 노동(사역)이 되고, 즐거워서 하면 사명이 됩니다. 즐거운 사명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믿음의 사람들이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을 때에 어떻게 되었는지를 보십시오.
(1) 주의 일을 할 때 기쁘고 즐겁게 했습니다. 힘들어도 힘들지 않았습니다.
사도들이 매를 맞고 박해를 받아도 예수 이름을 위하여 고난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김을 받는 것을 기뻐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를 만난 후 복음을 전하는 일에 조금도 부끄럽게 생각지 않았습니다.
그의 고백을 보십시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행20:24)
(2) 그들에게도 문제가 없는 게 아니라, 문제가 있지만 문제로 인하여 좌초되지 않고 승리했습니다.
(3) 이 모든 것은 인간의 힘과 재주만 믿고 나간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아시아에서 복음을 전하려 계획하였는데 예수의 영(성령)이 허락지 아니 하시거늘 포기하였습니다(행16:6-7). 한 사람의 구원을 위해서 기꺼이 광야로 나아가기를 순종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의 하루 하루도, 순간 순간도 내 힘과 재주로 최선을 다하되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도록 하십시다. 성령을 좇아 행동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성령께 길을 물으며 성령의 도우심을 요청하십시오.
이것이 성령님과 동행입니다.
성령께서 수시로 일어나는 육체의 욕심을 이길 수 있게 힘을 주실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도 영적 전쟁이 우리 안에, 우리의 상황 속에 계속되고 있습니다. 육신의 소욕이 아닌 성령을 좇아 행하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고 승리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찬송 / 불길 같은 성령이여(184, 1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