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2013년 다해 10월28일 성 시몬과 성 유다(타대오) 사도 축일
[수원] 거룩한 교환 -
수원 교구 오산 성당 전 삼용 요셉 신부
† 제1독서 : 에페 2, 19 - 22
† 복음 : 루카 6, 12 - 19
시몬 성인과 유다 성인은 열두 사도의 일원이다. 시몬 사도는 카나
출신으로 열혈당원이었다가 제자로 선택되었다. 그는 주로 페르시아
지역에서 선교한 것으로 전해진다. 유다 사도는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 이스카리옷과 구별하여 ‘타대오’라고 불리기도 한다. 신약 성경
‘유다 서간’의 저자인 유다 사도는 유다 지역에서 선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두 사도는 예수님의 친척일 가능성도 있다. 예수님의 형제로
언급되는 복음 구절에 같은 이름이 나오기 때문이다.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라고 하지 않나? 그리고 그의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가 아닌가?”(마태 13,55)
★ 바오로 사도는 에페소의 신자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그들이 더 이상
하느님 백성인 이스라엘 공동체와 떨어진 존재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 나라의 시민이 되었다고 선포한다(제1독서).
★ 예수님께서는 밤새워 기도하신 뒤 제자들 가운데에서 열둘을 사도로
뽑으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의 내용을 사도들의 처지에서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어느 날 예수님께서 산에 오르시더니 밤새워 기도하셨습니다. 그다음
날 많은 제자들을 불러 세우신 뒤, 그 가운데에서 열둘만 뽑으시어
‘사도’로 임명하셨습니다. 이렇게 뽑힌 사도들은 얼마나 흥분되었겠습니까?
‘다른 제자들보다 그다지 잘난 것도 없는데 왜 하필 나를 뽑으셨을까?’ 하는
의구심도 있었을 것이고, 영광으로 여기는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더 나아가 의기양양해진 사도들은 평지에 내려와서 더욱 흥분했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몰려왔고,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질병을 고쳐 주시고,
더러운 영들도 쫓아내셨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열둘은 ‘사도’라는 자리에
오른 만큼, 예수님의 이러한 놀라운 능력을 전수받을 것이라 기대했을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이 능력으로 무언가 큰일을 하시면 그 일의
결과를 자기들도 함께 누릴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들의 삶은 그들의 인간적인 흥분과 기대와는 너무나
달랐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삼 년 동안 지내면서 집도 없이 살아야 했고,
결국 스승님의 죽음을 지켜보아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을 목격한 뒤에는 성령의 능력에 힘입어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사도들이 애당초 가졌던 기대와 실제의 삶은 아주 다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불행해진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하느님께서 뜻하신
삶을 그대로 산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혼인 때의 생각과 실제의 삶은 차이가 많을
것입니다. 사제들의 서품이나 수도자들의 서원 또한 받기 전과 실제의
삶이 그렇습니다. 그러나 사도들처럼, 우리도 기대와는 다르게 전개되는
삶이라 할지라도 그 속에 담긴 주님의 뜻을 찾는 노력을 기울여야
하겠습니다.
- 매일 미사 -
◈ [청주] 참된 스승과 제자 / 반영억라파엘 감곡매괴 성모성당 신부님
2013년 다해 10월28일 성 시몬과 유다(타대오)사도 축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 가운데에서 열둘을 뽑아 사도라고 부르셨다.>
+ 루카 6,12-19
참된 스승과 제자
축일을 맞이한 모든 이에게 축하의 인사를 드리며 굳건한 믿음과
사도적 열성을 더해 주시길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 가운데에서
열둘을 뽑으셨습니다. 그냥 뽑으신 것이 아니라 밤을 새우시며 기도한
다음 뽑으셨습니다. 그 기도의 열매는 확실했습니다. 열혈당원이라
불리는 시몬과 세리 마태오를 비롯하여 배신자 유다까지도 그 대열에
속해 있었습니다. 시몬과 마태오는 서로의 위치가 대립적입니다. 일제
강점기의 독립군과 친일파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했던 베드로도 있습니다. 시몬 베드로는
“모두 스승님에게서 떨어져 나갈지라도, 저는 결코 떨어져 나가지 않을
것입니다.”(마태26,33)하고 장담했지만 죽음 앞에서는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오”(마태26,72)하고 세 번씩이나 부인하였습니다. 개별적으로
볼 때 별 볼 일없는 사람들이 뽑힌 것입니다. 이것이 밤새껏 기도한
결과입니다. 그냥 뽑았으면 잘나고 똑똑한 사람들이 뽑혔을 텐데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헤아렸기에 장차 당신을 배신할 배반자들까지도
뽑으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너희의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있게 하려는
것이다.”(요한15,16). 이것이 스승의 참 모습입니다. 그분의 품에
들어가지 못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다만 내가 그분의 품을 떠날
뿐입니다.
제자들은 부족함 투성이였지만 예수님을 만나 새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과거 없는 성인 없고 미래 없는 죄인 없다”는 진리를 깨우쳐 주었습니다.
잘못을 범한 베드로는 으뜸제자로서 역할을 다하고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열혈당원 시몬은 늘 투쟁만을 생각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투쟁과는 상관없는 예수님의 사랑을 살았고
또 전했습니다. 죄인 취급 받던 마태오도 예수님과 함께 음식을
나누었습니다. 세관장 자캐오를 생각하면 재산의 반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주고 남을 속여먹은 것은 네 곱절로 크게 갚아주고 구원의 기쁨을
누렸습니다. 세리마태오도 그랬을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유다는
잘못은 뉘우쳤지만 죄책감을 극복하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습니다. 변화된 삶을 살면 행복이 오고, 변하지 않으면 끝이
불행합니다. 주님의 자비를 믿으면 미래가 열리고, 믿지 못하면 그
자체가 영벌입니다.
일상의 삶을 봅니다. “여자는 결혼 후 남자가 변하길 바라지만 남자는
변하지 않는답니다”. 아니 오히려 기대와는 반대로 변한답니다. 또한
“남자는 결혼해도 여자가 변하지 않길 바라지만 여자는 변한답니다”.
여자도 역시 남자가 기대하는 바와는 다르게 변한답니다. 집에서는
체육복을 입고 그야말로 아줌마가 된답니다. 서로 서로 부족함을
채워주는 방향으로 끊임없이 변해야 하는데 부족함에 대해 서로
잔소리만 늘어가면 불행합니다. 변하되 상대를 바꾸려 하지 말고 내
자신이 먼저 변해야 하겠습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 입니다. 세례전이나 세례 후나 변한 게 없으면
불행합니다. 세월이 갈수록 예수님과의 만남이 깊어져야 행복합니다.
사도들이 주님을 만나 새 삶을 살았듯이 우리도 새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참된 스승 앞에 참된 제자로서 살아갈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만물을 당신께 복종시킬 수도 있는 그 권능으로, 우리의
비천한 몸을 당신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필리3,21). 사랑합니다.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 [인천] 알아야 더 큰 은총안에서 살 수 있습니다.
어제 인천의 어느 본당에서 미사를 봉헌하던 중에 좀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글쎄 9시 미사가 다 끝나지도 않았는데 영성체만
모신 뒤에 다들 밖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이런 분들에게 원칙을
말씀드려야 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에 11시 미사 때 이러한 말씀을
드렸습니다.
“우선 평일 미사에 참석하기 위해 왔는데 직장이 늦게 끝나서 복음을
다 읽은 뒤에 들어왔습니다. 그렇다면 영성체를 할 수 있을까요?
없을까요?”
그러자 의견이 분분합니다. 이에 대해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평일미사는 신자들에게 의무가 아니기 때문에, 성체를 모실 마음의
준비만 충분히 한다면 영성체를 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곧바로 이런 질문도 드렸지요.
“그럼 주일 미사입니다. 주일 미사인데 게으름을 피우다가 독서를 할 때
들어왔습니다. 영성체를 할 수 있을까요? 없을까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할 수 있을까요? 사실 원칙적으로는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일 미사는 가톨릭 신자들에게는 의무로 참석해야
하는 미사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냥 미사 중에 한 부분만을 참석했다고,
미사 참례를 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아니지요. 미사의 시작부터 끝까지
전 부분을 참석해야 미사 참례를 했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처음
시작 성가부터 마침 퇴장 성가까지 부른 뒤에야 주일 미사 참례의 의무를
다 한 것입니다. 하지만 피치 못할 사정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그래도
최소한 복음 전에는 들어오면 영성체 할 수 있다고 신부님들이 말하는
것이지요.
이렇게 말씀드린 뒤에 11시 미사가 거의 끝날 때에 어떠했을까요? 9시 미사
때와 마찬가지로 영성체 끝나자마자 나가는 분들이 많았을까요? 한 명도
나가지 않았습니다. 강론이 길어서 미사가 1시간 30분 동안 봉헌되었지만
신자들은 그 누구도 자리를 떼지 않았습니다. 이제까지 몰랐기 때문에 그런
행동을 했던 것이지요.
알아야 주님께 올바른 모습을 보여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냥 자신의
판단만을 내세워서 마치 자신의 뜻이 주님의 뜻인 양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과연 내 뜻이 주님의 뜻이 될 수 있을까요?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바라봅니다. 그들 역시 처음에는
자신의 뜻을 내세우기에 급급했습니다. 그러나 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통해
점점 변화가 되지요. 자신의 뜻을 내세우는 것보다 주님의 뜻이 펼쳐지는 것이
더 중요함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주님의 뜻이 세상에 펼쳐질 수 있도록
자신의 목숨까지 내어 놓았던 것입니다.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들 역시 잊지 말아야 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내 뜻이
아닌 주님 뜻이 세상에 펼쳐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반드시 행해야
할 것은 주님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과 교리를 통해 주님을 알아야
주님의 뜻대로 온전히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많은 은총과 사랑을 주시는 주님을 더욱 더 잘 알 수 있는 우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알아야 더 큰 은총 안에서 살 수 있습니다.
너무 많이 믿으면 남에게 속을 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믿지 않는다면
날마다 고뇌 속에서 살 것이다(프랭크 크레인).
성 시몬과 유다(타대오). 오늘 축일 맞이하신 모든 분들 측하합니다.
공감과 웃음
오늘도 어떤 책에서 읽은 부분을 그대로 옮겨봅니다. 사실 오늘 너무
늦어서 새롭게 글 쓸 시간이 없네요. 죄송합니다.
어느 집에 강도가 침입했다. 딸들이 비명을 질렀고, 그 비명은 젊은 강도를
더욱 자극했다.
“입 다물어! 다 죽여버릴 거야!”
그러자 가장인 아버지가 나섰다.
“괜찮다 얘들아. 너희가 무서운 것처럼 이 젊은이도 무서울 거야. 양주
한 병과 잔 좀 가져오너라.”
그러더니 양주를 따라 한 잔 마시고 강도에게도 한 잔 권했다.
“자, 한 잔 받게. 마음이 좀 진정될 걸세. 나도 젊었을 때 어려웠던 적이
있었지. 남의 집이라도 털고 싶었어.”
인간적으로 대하며 솔직하게 대화를 시작하자 젊은이도 속내를 털어놓았다.
“그래, 수입은 얼마나 되나?”
“그냥... 월급쟁이 정도는 됩니다.”
그렇게 대답을 하고 나니 자기가 한 말이 우스워 도둑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자 집주인도 따라 웃고, 그 웃음에 딸들도 웃었다.
“숨어 있는 장점이 많은 젊은이군. 앞으로 인생 목표는 무엇인가?”
“돈이 모이면 조그만 가게를 열려고요.”
그러더니 젊은이가 갑자기 일어나 큰절을 하며 사과했다. 그리고 최선을
다해 인생을 살겠노라고 다짐하면서 집을 떠났다. 공감과 웃음이 강도를
진정시킨 것이다.
- 인천교구 성소국장 조 명연 마태오 신부 -
◈ [기타] 세례명의 의미.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당신의 세레명은 단순한 이름이 아닌 소중한 선물입니다.'
2013년10월28일 연중 제 30주간 월요일 복음묵상
“그들을 사도라고도 부르셨는데, 그들은 베드로라고 이름을 지어 주신 시몬,
그의 동생 안드레아, 그리고 야고보, 요한, 필립보, 바르톨로메오, 마태오,
토마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열혈당원이라고 불리는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 또 배신자가 된 유다 이스카리옷이다.” (루카6,13-16)
---
타대오(마태오10,3)라고도 불려지는 성 유다와 열성당원이었다고
알려진 성 시몬의 축일을 맞이해 12사도의 이름이 나온 구절이 복음으로
선정되었다. 이들 중 이스카리옷 유다를 제외한 모두는 사도로서의 삶을
완수한다.
12사도들의 이름을 보면서, 문득 가톨릭 신자라면 가지고 있는 세례명에
대한 생각이 떠오른다. 생각이 난 김에,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세례명에 대해
묵상해보는 시간을 가져보고자 한다.
세례를 받을 때 성인들의 이름을 받아 자신의 세례명으로 쓰는 관습은
13세기부터 보편화되기 시작했고, 교회법으로 정해졌다.
보통 성인(成人)세례의 경우는 자신이 좋아하는 성인(聖人)의 이름을
선택하거나, 먼저 신앙생활을 한 이들의 권유로 본인이 정한다.
유아세례인 경우는 부모나 사목자가 지어주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리고 임종에 처한 이들을 위한 대세(代洗)의 경우는 보통 대세를 주는
이가 떠오르는 성인의 이름을 붙여준다.
재미난 이야기 하나 소개하고 싶다.
한국 천주교회는 전통적으로 세례명을 본명(本名)이라 하였다.
그리고 부모님이 지어주신 이름을 세속명(世俗命)이라 하였다.
어렸을 적부터 가족들은 호적에 오른 이름보다 사베리오라는 본명으로
나를 불러주었다. 국민학교(초등학교)에 입학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어떤 선생님께서 본명이 뭐냐고 물으셨다.
당연히 주저함 없이 사베리오라고 대답해드렸다.
선생님께서 의아하다는 듯이 쳐다보시던 모습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국어사전에 나오는 본명(本名)의 의미와 한국 천주교회만의 용어인
본명의 의미를 구별하지 못하던 나와 선생님 사이에서 생긴 해프닝이었다.
교회가 세례명을 갖게 하는 데는 커다란 이유가 있다.
말 그대로 세례와 관련된 이유이다.
세례란 새로운 삶으로의 전환을 의미한다.
과거의 악습과 잘못된 가치관을 끊어버리고,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삶을 살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그래서 성인의
이름을 자신의 진짜 이름으로 하여, 그 성인의 삶을 닮고자 하는 소망을
갖게 된다.
한국 천주교회가 세례명을 본명이라고 한 것에는 세례의 의미를 한층 더
강조하기 위함이다.
세례가 새로운 삶이며, 그를 위한 결단이라 할 때, 그에 응당한 인식을
더욱 튼실히 하기 위함이다.
부모님께서 지어주신 이름을 세속명으로 돌리고, 세례명을 본명으로
하겠다는 것은 한마디로 의지와 결단을 드러내는 것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교회는 또한 본명으로 정한 성인이 수호성인이 되어 보호해준다는 아름다운
전통을 가지고 있다.
이처럼 가톨릭 신자에게 있어서 세례명은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는
선물이다. 자녀들이나, 신자들을 세례명으로 부르는 것은 지켜야 할
아름다운 전통이라 생각한다. 이러한 전통 안에서 커갈 수 있는
자녀들이라면 자연스럽게 신앙이 온 몸 온 마음에 스며들어 자리하게
된다. 이러한 전통 안에서 관계를 이루는 신자들이라면 자연스럽게
자신들의 정체성을 의식하는 삶을 살게 된다.
소중한 선물인 우리의 세례명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져보았으면 한다.
- 사이타마 교구 오타(太田)본당 주임
김 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
https://www.facebook.com/WithfatherPinetree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 [서울] 성 시몬과 유다(타대오) 사도 축일
2013년 다해 10월28일
“어느 날 성당에 다니는 신자가 산에 가다가 호랑이를 만났다고
합니다. 신자는 하느님께 ‘주님! 호랑이가 잡아먹지 않도록 도와주세요.’
라고 기도했습니다. 이번에는 신자인 호랑이가 이렇게 기도했다고
합니다. ‘주님! 일용할 양식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어떤
기도를 들어 주셨을까요? 하느님께서는 신자의 청원기도보다는
호랑이의 감사기도를 더 들어주셨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는 한 주간이 되면 좋겠습니다.
‘청소년 보호지역’이 있습니다. 학교 앞이나, 주택가에는 ‘유흥업소,
오락실’같은 것들이 들어서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학생들은 아직
판단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그런 유혹 앞에 쉽게 흔들리기 때문입니다.
‘청소년 출입 금지 구역’이란 것도 있습니다. 성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업소들에 학생들이 출입하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학생들에게 ‘술,
담배’를 팔지 못하도록 하는 것도 비슷한 이유입니다.
신앙인들은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가서는 안 되는 곳들이 있습니다.
해서는 안 되는 행동도 있습니다. 우리가 악의 유혹을 쉽게 뿌리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것들 중에는 그 유혹이 크기 때문에 중독에
빠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도박, 오락, 술, 담배’와 같은 것들은 우리의
말초신경을 자극하기 때문에 쉽게 ‘중독’이 되기 쉽습니다.
우리를 하느님께로 이끌어 주는 것들은 ‘기도, 희생, 나눔, 봉사’와 같은
것들입니다. 그런 것들은 말초신경을 자극하지 않아서 재미있지는
않지만 우리 영혼을 맑게 하고, 세상의 어둠을 밝게 비추는 빛이 됩니다.
기도는 향기가 되어 지친 이들에게 위로가 됩니다. 나눔은 알찬 열매를
맺어 더 큰 축복으로 돌아옵니다. 사랑은 깊은 샘물 같아서 할수록 더
큰 사랑이 솟아납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여러분은
이제 더 이상 외국인도 아니고 이방인도 아닙니다. 성도들과 함께 한
시민이며 하느님의 한 가족입니다. 여러분도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거처로 지어지고 있습니다.’ 마치 연어가 모진 고생을
하면서도 다시금 삶의 원천인 강가로 돌아오듯이 우리는 험한 세상을
살아가지만 그리스도께서 맺어주신 그 사랑으로 살아가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돌아가야 할 곳은 하느님의 사랑이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사도 시몬과 유다 성인의 축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불러 주셨던
제자들은 모두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길을 따라 갔고, 주님의 품을
그리워하며 거친 세상에서 빛과 소금이 되었습니다. 사랑하고 살기에도
부족한 인생입니다. 나누고 살기에도 바쁜 인생입니다. 늘 감사드리고,
항상 기도하고, 언제나 기뻐하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 서울 대 교구 성소국장 조제형 가브리엘 신부 -
◈ [서울] 저도 밤새 기도할 날
2013년 다해 10월28일 성 시몬과 성 유다(타대오)사도 축일
저도 밤새 기도할 날
밤새우며 놀아본 적 있고 시험공부한 적, 작업해본 적은 흔히 있습니다.
밤새우고 난 다음날 중요한 결정을 하기란 어려운 일이지만,
결정할 일을 생각하며 밤새 기도해본 사람은 아마 별로 없을 것 같네요.
중요한 일의 결정을 위해 밤새 기도할 수 있는 신앙이 생기면 좋겠습니다.
적어도 신부인 저는 여태 그런 적 없는 걸 보면 대개가 그러리라 생각합니다.
예수님께 ‘예수 형님’ 죽기 전에 저도 밤새 기도할 날 있겠지요? 해봅니다.
“그 무렵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려고 산으로 나가시어,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 그리고 날이 새자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 가운데에서 열둘을 뽑으셨다.(루카 6,12~13)”
- 이기정 사도 요한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거룩한 교환
2013년 다해 10월28일 성 시몬과 성 유다 타대오 축일
< 예수님께서는 제자들 가운데에서 열둘을 뽑아 사도라고
부르셨다.>
복음 : 루카 6,12-19
< 거룩한 교환 >
얼마 전에 끝난 ‘주군의 태양’이란 드라마가 있습니다. 인물 설정은
이렇습니다. 태양은 여자인데 귀신을 보는 능력이 있습니다. 죽은
사람들을 보는 것은 너무 무섭고 고통스러운 일이라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합니다. 옥탑 방에서 불쌍하게 살아가던 태양은 우연찮게 주군을
만납니다. 어렸을 때 사랑했던 여자로부터 배신당했던 상처를 안고
있는 주군은 커다란 백화점의 사장입니다. 인간관계에 대해선 관심이
없고 사람도 돈 때문에만 상대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제일 싫어하는
것은 누가 자신의 몸에 손을 대는 것입니다.
그런데 태양이 귀신에게 쫓기다가 주군과 부딪히게 되었는데 쫓아오던
귀신이 갑자기 사라지는 것입니다. 인간몰골이 아닌 태양이 자신의 몸에
닿는 것을 소름끼칠 정도로 싫어하는 주군은 다시는 태양이 자신의 몸에
손을 대지 못하게 하지만, 태양은 주군의 몸을 만지거나 손을 잡으면
귀신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편안하게 잠도 한 숨 잘 수 있는 것입니다.
주군의 상처는 차차 태양의 발랄함과 사랑에 의해 치유되는데, 그럴수록
태양은 주군의 품 안으로 들어올 수 있습니다. 결국 주군은 태양에게
자신의 몸을 맡기는 것이 자신의 오랜 상처로부터 치유되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이런 설정은 ‘받아들임’이란 것이 다른 사람을 치유하는 능력이 있음을
알기는 하지만, 내가 풀어내지 못한 상처가 있다면 누군가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매우 어렵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또한 그 상처는 누군가의 사랑을
통해 치유될 수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저도 얼마 전에 저희 성당 청년 하나가 희귀한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죽을 고비를 넘기고 있을 때 중환자실로 병자성사를 주러 간 일이
있었습니다. 처음 보는 바이러스 감염 환자의 모습은 충격적이었습니다.
온 몸이 부어 있었고 눈두덩이도 부어 있어서 눈을 제대로 깜빡일 수도
없었고 눈은 검은자보다 흰자가 더 많이 보였습니다. 그런데 그 청년에게
병자성유를 바르는데 얼핏 바이러스가 옮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살이 닿지 않는다면 어떻게 성유를 바를 수
있겠습니까? 살이 닿는다는 것은 상대의 것이 나에게 옮겨올 수 있다는
것을 감수할 수 있어야하는 것입니다. 주기 위해 필연적으로 상대의
것을 받아들일 준비도 되어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군중들은 모두 예수님께 손을 대려고 했다고 합니다.
병자가 예수님께 손을 댄다는 것은 물론 그들은 치유의 은총을 얻겠지만
예수님은 부정한 사람이 됨을 감수하시는 것입니다. 12년 동안 하혈병을
앓던 여인이 예수님의 옷자락을 잡아 병이 치유되었는데 이 역시 예수님은
부정한 여인에게 몸을 닿았기 때문에 유다인들의 법으로는 부정한 사람이
된 것입니다.
이런 것을 신학에서는 ‘거룩한 교환’이라고 합니다. 내가 지닌 좋은 것을
주고 다른 사람이 지닌 나쁜 것을 대신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뒤집어쓰시고 대신 당신의 거룩한 은총과 생명은 우리에게 주신
구원의 신비가 ‘거룩한 교환’인 것이고 미사 때 가끔 들을 수 있습니다.
한 번은 정신이 오락가락 하시는 병자에게 병자영성체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그 때는 정신이 없으셔서 성체를 인지하지 못하셨습니다.
오물오물하기는 하는데 넘기지 못하셨고 급기야는 고춧가루와 함께
섞여서 뭉개져버린 성체를 뱉어내셨습니다. 성체이기는 하지만 역겨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옛 신부님들은 결핵 환자들이 모시다가 뱉은 성체도
그 자리에서 영하셨다는 말씀이 생각나 그것을 제가 모셨습니다. 몇
시간 동안 속이 거북했습니다. 그러나 마음속에서 솟아나는 평화는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아마 예수님께서도 우리를 위해 우리 죄들을
당신 것으로 하실 때는 너무도 역겨우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를
살리시고 아버지 뜻을 따르셨다는 생각에 마음에서는 평화가 샘솟았을
것입니다. 이것이 거룩한 교환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평화인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사촌 형제로 여겨지는 유다 타대오와 독립 운동가였다가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 시몬의 축일입니다. 여러 전승이 있지만 유다
타대오는 페르시아에서 전쟁용 도끼에 맞아 순교했다고 전해지고,
시몬은 톱에 몸이 잘려 순교했다고 전해집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거룩한 교환을 잇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죽어야하는 이들을 위해 그
죽음을 내가 대신 받으며 내 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의 불을 전해주는
것. 내 안에 있는 좋은 것들을 지키려고 하면서 어떻게 그 좋은 것을
동시에 줄 수 있겠습니까?
선거철에 시장 사람들을 좋아한다며 악수를 하고 다니다가 한
아주머니가 손을 잡으려고 뛰어오니 자신의 손을 뒤로 감추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내가 더럽혀지지 않는다면 내가 손해 보지
않는다면 무엇으로 이웃을 깨끗하게 하고 부유하게 하겠습니까?
우리도 거룩한 교환의 삶을 살아가며 이웃의 더러움과 가난을 나의
것으로 하고, 또 나의 깨끗함과 부유함을 이웃에게 주도록 합시다.
오산 성당 홈페이지 : http://cafe.daum.net/ca-osan
- 수원 교구 오산 성당 전 삼용 요셉 신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