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정의 이해 - ㉠출생 및 생애
1908년 1월 11일 강원도 춘성에서 출생하여 서울에서 성장하였다. 서울 재동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휘문고보를 거쳐 1930년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했으나 곧 제명처분을 당했다. 이듬해 보성전문학교에 입학했으나 다시 퇴학당했다. 1933년 서울에 올라가 「산ㅅ골나그네」와 「총각과 맹꽁이」를 발표했다. 193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소낙비」가 당선되었으며, 『조선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노다지」가 가작으로 입선되었다. 같은 해 구인회(九人會) 후기동인으로 가입하였다. 1937년 3월 29일에 사망했다. 김유정은 짧은 문단활동에도 불구하고 「동백꽃」, 「봄봄」, 「땡볕」 등 30여 편의 소설과 10여 편의 수필을 발표하는 왕성한 활동력을 발휘하였다. 그
의 작품들은 본질적으로 희극적인 해학성을 특징으로 한다. 즉 등장인물들의 우직함과 의외의 행동, 해학의 정신에 투철한 서술자의 시선, 육담과 구어적인 속어 감각 등으로 조형된 독특한 세계를 구축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특이한 해학적 방법을 동원해 작가는 당대의 어둡고 삭막한 농촌의 현실과 그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농민들의 생활 양식을 담아낸다. 따라서, 그의 작품이 불러일으키는 웃음은 비참한 현실에 대해 분노하거나 눈물을 흘리는 직선적인 반응이 가져올 상처를 미리 예방해 주면서, 피동적인 위치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인간 정신의 자유를 강조하는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또한 여러 인물들이 보여주는 우스꽝스런 행위 역시 겉으로는 비록 우둔하게 보일지라도 가혹한 사회적 환경을 극복하고자 하는 하층민들의 끈질긴 생명력을 보여준다고 할 것이다. 그러므로 김유정은 식민지 체제 아래에서 농촌이 안고 있는 구조적 모순을 희극적인 해학미로 구조화한 독특한 소설세계를 창조하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김유정의 이해 - ㉡고향 그리고 어머니
김유정은 1908년 1월 11일 강원도 춘천부 남내이작면 중리(실레 마을)에서 팔남매의 막내로 태어났다. 고향 실레 마을은 김유정 문학의 산실이다. 그의 대부분의 작품들은 농촌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봄봄」「동백꽃」「산ㅅ골나그네」「만무방」등은 모두 실레 마을의 풍경과 인물들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김유정은 그의 고향을 이렇게 설명한다.
나의 고향은 저 강원도 산골이다. 춘천읍에서 한 이십 리 가량 산을 끼고 꼬불꼬불 돌아가면 내닫는 조그만 마을이다. 앞 뒤 좌우에 굵직굵직한 산들이 빽 둘러섰고 그 속에 묻힌 아늑한 마을이다. 그 산에 묻힌 모양이 마치 떡시루 같다하여 동명을 실레라 부른다. 집이래야 쓰러질 듯한 헌 초가요, 그나마도 오십 호밖에 못되는 촌락이다.
-「내가 그리는 신록향」에서
김유정의 집안은 천석지기의 지주였고, 서울에도 백여 칸 되는 집을 가지고 있을 정도로 부유했다. 하지만 일곱 살 때 어머니를, 아홉 살 때는 아버지를 여읜 뒤로 가세가 기울기 시작한다. 더욱이 집안을 책임지고 있던 큰형의 방탕한 생활로 말미암아 가세는 급격히 기울어갔다. 다른 한편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잃은 뒤, 김유정은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에 사무쳐 했으며, 그것은 커서까지 계속되었다. 자신이 말하는 ‘그리움’ 이란 모두 ‘어머니에 대한 환상’ 이었다고 말했을 정도였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그는 점차 혼자만의 세계로 빠져들었고, 오랫동안 말더듬이 증상을 보이기도 했다. 문학평론가 김윤식은 “이같은 언어 장애 현상 속에 김유정 특유의 표현 의욕이 잠재해 있었을 것” 이라고 말한다.
김유정의 이해 - ㉢금광 그리고 병마
고향에 있을 당시 김유정은 충청도 광업소(금광)에서 몇 달 동안 현장 감독을 한 적이 있었다. 또 고향 실레에서 오 리 정도 떨어진 ‘물골’ 에서는 사금이 나오고 있었는데, 그곳 개울 바닥은 온통 파헤쳐져 성한 곳이 없을 정도였다. 이러한 체험을 바타으로 김유정은 금을 찾아 횡재를 노리는 인간 군상을 그려낼 수 있었다. 작품「금 따는 콩밭」「노다지」「금」등이 바로 그러한 체험에서 우러나온 것이다.
1933년 다시 서울로 올라온 김유정에게는 폐결핵이라는 치명적인 병마가 엄습했다. 의사의 말로는 얼마 살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주야로 원고와 씨름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대부분의 작품은 이 시기에 병마와 싸워가면서 만들어졌다.
1937년 3월 29일 김유정은 병마를 이기지 못하고, 삼십여 편의 작품을 남겨놓은 채 세상을 떴다. 경기도 광주의 누님댁에서 누님과 매형이 지켜보는 가운데 쓸쓸하게 임종을 맞았다. 그의 시신은 유언대로 화장되었고, 유골은 한강에 뿌려졌다.
문학적 특징 - ㉠현실인식과 모순수용
김유정의 소설에서 두드러진 특징은 우선 예리한 현실인식과, 이를 정확하게 표출하기 위한 작가와 세계와의 사이에 엄격한 객관적 거리 두기이다. 달리 말하면 그는 당시대의 모순을 알아보고 있었기에, 자기 보존을 위해서라면 그것이 설사 모순된 방법의 것이라 할지라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소외된 계층들의 살아가는 이야기를 능청스럽게 풀어 나간다. ‘님도 좋지만 밥도 중’ 함을 인정한다. 어떤 덕도 자기 보존의 노력에 앞설 수 없음을 그는 작품 속에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따라서 그의 소설 속에 나타난 가난은 절망의 문제라기보다는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살아보려는 사람들’의 존재에 얽힌 문제임을 보여 주는 것이다.
다음으로 김유정의 소설에서 주목되는 것은 모순된 관념의 수용과 그 표현에 있다. 그의 자전적 소설 「형」에서 병든 아버지가 방탕한 형님을 향해 칼을 내던지는 순간, 김유정은 형님이 보여 준 효자와 불효자 모습의 겹쳐짐을 경험한다. 이후 김유정은 이들 모순된 관념을 그의 작품에 다양하게 차용한다.「소낙비」「산ㅅ골나그네」를 비롯한 아내 팔기 모티브의 소설에서 열녀와 불열녀를, 자전적 소설에 나타난 누님의 상반되는 모습을, 「노다지」에 나타난 은혜와 배신, 「두꺼비」에서 감성과 이성, 기대와 기대의 배신들이 그것이다. 김유정은 이들 모순을 그대로 수용하고 가감 없이 해부하고 제시한다. 판단은 독자의 몫으로 돌려진다.
김유정은 그의 삶에서 또 작품에서 그 지향점이 철저하게 상식을 거부한다. 거부된 상식과 그 드러냄이 우리를 경악시킨다. 우리들의 습관적 삶과는 또 다른 형태의 세상과 삶이 있음에 우리는 경악하게 되고, 또 그들에 대해 무한 ‘낯섬’을 느끼면서 그들의 존재를 껴안지 않을 수 없다. 김유정은 이들 모순의 관념을 통해서 우리에게 다양한 삶을 살게 한다. 우리의 세계를 넓혀 주는 것이다.
문학적 특징 - ㉡들병이 철학
아무런 가책도 없이 들병이 생활에 나서는 농민들, 그들은 살기 위해서 아내의 몸을 팔지 안을 수 없다. 식민지 농촌의 현실이 그들을 그러한 길로 내모는 것이다. 김유정 자신은 들병이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내가 하는 말은 자기의 아내를 대중의 구경거리로 던질 수 있는가 그것이다. 극진히 애지중지하는 자기의 아내를 대중에게 봉사하겠는가 말이다. 이것은 모든 가면과 허식을 벗어난 각성의 행동이다. 아내를 내놓고 그리고 먹는 것이다. 애교를 판다는 것도 근자에 이르러서는 완전히 노동화하였다. 여기에는 아무도 이의가 없을 것이다. 이것이 들병이다.
들병이의 남편은 배후에서 아내를 지휘 조종하며 간접적으로 주객을 연락해야 한다. 아내는 근육으로 남편은 지혜로, 이렇게 공동 전선을 치고 생존 경쟁에 처한다.
들병이는 추수하는 가을에 결사적으로 영업을 시작한다. 영업이라야 적수공권으로 유랑하며 아무 술집이고 유숙하면 그만이지만 그러다가 춘궁기가 되면 그들은 고향으로 돌아가 다시 농민 생활로 돌아간다. 그리고 다음 가을을 기다린다.
이러한 들병이의 생활을 빈궁한 농민을 갉아먹는 독충이라 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일면만을 관찰한 편견에 지나지 않는다. 들병이에게는 그 해독을 보상하고도 남을 큰 기능이 있다. 시골의 총각들이 처를 얻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결혼 비용을 마련하려면 삼사 년 간의 머슴살이의 고역을 참아내야 한다. 이러한 사정은 총각들에게 독신자 생활을 강요하고 정열의 포만상태를 안겨준다. 이것을 주기적으로 조절하는 완화 작용을 들병이의 역할이라 하겠다.
들병이는 어떻게 판단하든 물론 정당한 노동자다. 그러나 때로는 불법 행위가 없는 것도 아니니 그런 때에도 우리는 증오감을 갖기보다는 일종의 애교를 느끼게 된다. 왜냐하면 그 법식이 너무 단순하고 솔직하고 무기교하고 해학미가 따르기 때문이다.
-서간문 「병상의 생각」 부분
1920년 재동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면서 시작된 학업은 1930년 서울의 연희전문 문과에 입학하였다가 곧 그만두고 고향에 돌아오면서 중단된다. 고향집은 큰형의 방탕한 생활로 집안의 전재산이 탕진된 상태였는데, 그때 그는 마을의 주막집을 드나들며 집시와 같은 생활을 하고 들병이들과 어울린다. 이러한 경험은 김유정의 문학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들병이는 남편 있는 여인이 시골 주막으로 돌아다니며 술과 몸을 파는 것을 말한다. 들병이의 남편은 아내를 매음시켜 생계를 꾸릴 뿐 아니라 그것을 즐기기조차 한다. 이러한 남편의 의식, 즉 ‘들병이 사상’ 이 김유정 문학의 출발점에 놓여 있는데, 그것이 드러난 작품으로 「봄봄」「동백꽃」「안해」 등을 들 수 있다.”
-김윤식,「들병이 사상과 알몸의 시학」 부분
문학적 특징 - ㉢언어와 문체
김유정 소설이 시대를 넘어서는 높은 문학성을 획득하여 오늘의 감각으로 읽어도 부족함이 별로 느껴지지 않음은 그의 우리말에 대한 남다를 관심과 탁월한 언어감각에 힘입은 바 크다고 믿어진다. 우리의 정조를 살리기 위한 우리말의 적절한 구사, 그것이 김유정의 소설 언어 선택의 비결이었던 것이다. 자신이 선택한 소설 언어가 많은 대중을 한 끈에 꿸 수 있는 능청을 현실희화를 가능하게 할 수 있다는 그 회심의 신명으로 그는 소설을 썼던 것이다. 그의 타고난 언어감각은 우선 소설의 제목짓기에서도 확인된다. 31편의 소설 중 순 우리말로 된 제목은 「소낙비」 「노다지」 「떡」 「만무방」 「솟」 「봄봄」 등 16편이며 이외에도 「산ㅅ골나그네」 「총각과 맹꽁이」 「금따는 콩밭」등은 비록 한자어거나 혹은 순 우리말에 한자어가 붙어 합성된 말이지만 거의 한자(漢字)를 사용하지 않은 것들이라 순 우리말 영역에 넣어도 좋은 것들이다. 순 우리말 제목 중 「노다지」 「만무방」 「봄ㆍ봄」 「따라지」 「땡볕」 등은 그가 선택한 언어가 바로 작품의 얼굴이며 그 성격임을 다잡아 드러내주는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김유정의 소설 문장에는 한자가 없다 31편의 소설에서 5편의 작품 제목이 한자 표기로 된 것 외에는 본문에 한자가 들어간 경우는 거의 없다. 한국어의 한 특징은 부사어ㆍ형용사어의 활용빈도가 높다는 것인데 대체로 주어가 많이 생략된 서술부 중심의 김유정의 소설 문장이야말로 부사어ㆍ형용사어가 제 역할을 하기에 가장 적합한 것이었다. 부사어 중에서도 의성ㆍ의태어, 첨어의 빈도 높은 구사는 김유정 소설에 현장감과 활기를 불어넣는 데 적격이다. 관용어 혹은 관용어구는 작가들이 문학어로서의 기능을 별로 인정하지 않은 죽은 언어라고 할 수 있다. 모처럼 선택한 관용어로 해서 문장의 참신성이 떨어진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작가들은 되도록 관용어 사용의 빈도를 제한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관용어는 비록 생명력이 없다고는 하나 활용되는 동안의 언어적 기능 수행의 오랜 역사를 갖고 있는 전통이라는 이니셔티브를 갖는 동시에 엄연히 그 당대의 일상용어로서 그것이 적절히 구사될 때의 표현 효과는 매우 높다는 이점을 가벼이 할 수 없을 것이다. 김유정 소설에서 관용어의 사용빈도가 높은 것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그린다는 작가의 의도적 장치로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되도록 서민의 일상용어를 자신의 소설 언어로 활용함으로써 사물을 있는 그대로 그려내는 재생 효과를 얻고자 하는 것이 그의 작가적 욕심이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익살과 탈놀음의 그 흥겨움으로 그가 선택한 관용어는 당대 서민들의 삶 그 자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그것은 끈질긴 생명력을 가진 만무방들의 애정 표현의 반어적 입심이며 그 목소리였다고 생각된다. 이것이 바로 작가 김유정이 자기 주변의 사물을 긍정적 시각으로 희화한 하나의 예라고 할 수 있다. 김유정 소설 속 이름도 당대 농투성이들이나 도시 따라지 서민들에게 흔히 찾을 수 있는 그런 것들로, 그 작품의 배경이나 인물의 성격에 걸맞아 동자에게 친근감을 준다.
김유정 소설 언어에 나타나는 또 하나의 특징은 준말이 많다는 것이다. 김유정 소설에 준말 사용빈도가 높은 것도 일상어에서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운율적 억양과 그 톤을 자신의 소설 말투로 빌어 썼기 때문일 것이다. 만무방들의 일상 어투에 대한 이러한 관심과 그 육화(肉化)야 말로 그네들에 대한 김유정의 애정 표현의 한 방법이었다고 봄이 좋을 것이다. 또한 김유정의 소설은 지문과 대화의 구별이 거의 없는 문장으로 해서 가장 이야기다운 서술방식을 보여 주고 있다. 방언과 비속어(卑俗語)는 물론이고 표준어까지도 소리나는 대로 표기된 것이 지문 속에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이것은 자신의 소설 문장을 철저하게 구어로 구사하겠다는 창작태도와 무관하지 않은 것이다. 그의 소설 문장에 뜻이 잘 통하지 않는 어휘가 많이 발견되는 것도 당대 사용되는 방언이나 속어를 소리나는 대로 쓴 현상일 뿐 그것을 조어(造語)로 보는 견해는 옳지 않다. 소설 문장의 관례를 깨면서 대화가 아닌 소설의 지문 속에 자유자재로 구사된 방언은 작품의 토속성 획득에 적중했으며 비속어는 해학과 아이러니를 유발하는 가장 직접적인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김유정의 언어는 머리에 의해 선택된 것이 아니라 머리에 올라가기 전 가슴에서 그대로 분출되어 나온 것으로 거의 본능적ㆍ원시적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따라지 혹은 만무방 인생들의 가슴에서 나온 감정언어다. 감정의 지배를 받는 언어는 그 분출이 자유분방하여 기존 언어의 음운이나 어휘 체계, 문법, 통사 등의 어법을 일탈함으로써 권위와 체면치레의 닫힌 가슴을 여는 에너지로 작용한다.
김유정의 소설쓰기는 당대의 지식인으로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할 말’을 전달하려는 의도와는 먼 거리에서 출발하고 있다. 그는 오직 이야기를 하는 신명에 취해 있을 뿐이다. '나는 이야기꾼이다. 이야기를 누구보다 잘하고 싶다'라는 장인의 그 신명으로 독판쳤던 것이다. 시치미를 뚝 떼고 이야기를 잘 하는 것이 작가가 아니냔 반문이 그의 소설을 다 읽고 난 독자의 몫으로 남겨진다. 김유정의 소설의 경우는 작가가 소설 속에서 아예 사라져 버리거나 작중화자로 혹은 그냥 지나가는 나그네 정도로 변신해 버리기 때문에 독자들이 작가를 전혀 의식하지 않게 된다. 독자들은 자신이 읽고 있는 소설 속에 그 작가를 의식하지 않을 때만 작가 이상의 상상력이 발휘되고 작품의 감동 속으로 깊숙이 파묻힐 수 있다. 즉 그 작가와 작중화자의 동일시 현상은 독자가 그 작품 속을 즐거운 마음으로 여행할 수 있는 여유를 찾았다는 의미로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김유정의 소설에는 작가가 있으면서 동시에 없고, 화자가 있으면서 그 화자가 어느 순간 다른 사람으로 바뀌기도 한다. 때로는 독자가 그 소설 구연에 스스로 끼어들어 한몫을 하기도 한다.
김유정 소설의 문체는 보여주기, 연출하기, 연기하기, 감동하기가 뒤섞여 일어나는 특징을 보인다. 그것은 곧 작가의 작중화자, 등장인물, 그리고 독자가 함께 어울어져 돌아가는 시점의 입체성을 보인다. 김유정의 문장은 리드미컬하다, 가면극의 연희자가 장단 가락에 맞춰 관객의 흥을 유도하듯 작가 김유정은 역동적 운율의 말투로 독자를 사로잡고 있기 때문이다. 글의 흐름에 운율이 느껴지는 것을 그것이 정적묘사가 아닌 동적인 묘사에서 더욱 분명하게 느껴진다. 강원도 깊은 살골짜기를 흘러내리는 물은 넓은 들을 유장하게 흐르는 물과 달라서 그 흐름이 변화무쌍하여 지난 세월을 돌이켜보거나 주변 풍광에 넋을 빼앗기는 그런 사색의 여유를 주지 않는다. 김유정 소설은 또한 대개 현재 진행형으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산ㅅ골나그네」의 경우 과거형 종결어미로 끝나는 문장은 55개에 불과하다. 과거형이라고 해도 그것은 이미 사살을 알리는 종결어미거나 어떤 상황을 화자가 설명하는 경우에만 사용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과거에 일어난 일을 서술하는 작품에 있어서도 그 이야기는 현재 진행되는 상황으로 그려지고 있다. 「산골」에서 서울로 떠난 도련님을 생각하는 이뿐이가 도련님과 늙은 잣나무 아래서 있었던 일을 회상하는 장면도 과거일이지만 현재에 일어나고 있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현재 진행형 문장은 그 속도의 완급에 따라 현장의 생동감으로 독자를 긴장시킨다. 특히 김유정이 구사한 진행형의 문장은 독자의 시각과 청각이 두루 동원되는 움직이는 그림을 눈 앞에 펼쳐낸다. 이처럼 김유정의 문장은 인과의 과거 회상적 서술이 아니라 어떤 상황이 지금 막 눈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처럼 재현해 보이는 데 역점을 두고 있다. 그것은 독자가 왜-하고 물을 수 있는 여유를 주지 않는다. 과거의 한이나 매듭은 갇혀 있는 물과 같은 것인데 김유정의 문장을 통해서는 그 한과 매듭이 물처럼 술술 풀려 나오기 때문에 굳이 과거를 길게 돌아보며 한숨지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언어의 선택 방식, 서술의 톤, 그리고 문장의 구조와 수사적 장치가 한 작가의 문체를 결정하는 기본 요소라고 볼 때 전통적 우리의 정조를 바탕에 깔면서 당대 서민들의 그 무지와 궁핍한 삶을 해학적으로 재구성해 내되 서설 문장에서만은 허식의 미문의식을 단연코 배제했던 김유정의 장인정신이 낳은 그 문체는 높이 평가받아 마땅하다고 본다. 김유정의 소설 언어 선택은 한국어의 특징인 형태부 중심의 종결어미의 다양한 구사와 부사어, 형용사어의 적절한 활용과, 특히 의성ㆍ의태ㆍ첩어를 생동감 있게 삽입하여 당대 서민의 언어를 문학어로 승화시키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특히 소설 지문 속에 방언과 비속어를 그대로 쓰는가 하면 같은 의미의 어휘를 작품 속에서 뒤섞어 쓰는 등 서민들의 자유분방한 일상의 언어 현장을 그대로 재현하는 구연(口演)의 문체를 통해 사물 객관화의 희화적 능청부리기로 글쓰기의 신명을 획득했던 것이다. 당초 민생들의 열린 언어를 독특한 자기 체취로 선택하여 신명나게 능청을 떤 김유정의 소설쓰기는 기법이 내용이고 내용이 곧 기법이 됨으로써 그 작품은 시대를 뛰어넘는 높은 문학성을 획득할 수 있었던 것이다.
작가연보
1908년 1월 11일 강원도 춘천부(春川府) 남내이작면(南內二作面) 증리(甑里-실례) 427번지, 지금의 강원도 춘천군 신동면 증리에서 부친 김춘식(金春植) 모친 청송(靑松) 심씨의 2남 6녀 중 일곱째이자 차남으로 출생, 10대조 김육(金堉)은 대동법(大同法)을 실시한 실학(實學)의 선구자였으며, 9대조 김우명(金佑明)은 현종(顯宗)의 국구(國舅 : 임금의 장인)였고 숙종(肅宗)의 외할아버지였다.
고조부 김기순(金基恂) 때 춘천 실레 마을로 이주했다. 증조부 김병선(金秉善)은 실레 마을에 화서학파(華西學波)의 거유(巨儒)인 김평묵(金平默)을 초빙, 학당(學堂)을 열고 자제들을 교육케 했다. 화서학파의 위정척사(衛正斥邪) 학풍(學風)을 이어받은 조부 김익찬(金益贊)은 춘천 의병(義兵)봉기의 배후 인물로 재정 지원을 했다.
조부때 6천석 추수를 하는 춘천의 명가(名家)가 되었다. 음직(陰職)으로 도사(都事)벼슬을 제수 받았다. 김유정이 탄생하는 그 해에 춘천의 2차 의병봉기로 정미의병(丁未義兵)의 기세가 드높았다
1914년 11월 26일 도사(都事)벼슬을 했던 김유정의 조부 김익찬(金益贊)사망.
이때부터 부친 김춘식(金春植)을 참봉으로 호칭. 이해 겨울에 한양(漢陽 : 지금 서울)의 종로구 운니동(당시 진골)에 대저택을 마련, 가족이사. 춘천에 집을 그냥두고 소작농으로 하여금 농사를 짓게 함.
1915년 7세. 3월 18일 어머니 청송 심씨 사망. 춘천에 내려갔던 형 유근(裕近)이 미처 오지 못하자 홀로 상주가 됨
1917년 9세. 5월 23일 아버지 김춘식 사망. 고아가 됨. 형님과 형수 누님의 사랑을 받음. 운니동(雲泥洞)에서 관철동(貫鐵洞)으로 이사. 1919년 봄까지 3년 동안 한학과 붓글씨를 익힘. 김유정 작품에 나타나는 동양 고전지식은 이때 익힘
1920년 12세 재동공립보통학교(齋洞公立普通學校)에 입학. 1921년 13세 3학년으로 월반
1923년 15세 재동공립보통학교 4년 (제16회)졸업. 4월 9일 휘문고등보통학교(徽文高等普通學校)를 검정(檢定)으로 입학. 숭인동(崇仁洞) 80번지로 이사.
학적부에는 가족 11명, 형제 2명, 재산 5만원, 성질을 질박, 키는 5척. 이름을 김나이(金羅伊)로 고쳐 집에서 부름. 소설가가 된 안회남(安懷南)과 같은 반으로 각별히 친하게 지냄.
1926년 18세 휘문고보 3학년을 마치고 휴학 1927년 19세 휘문고보 4학년에 복학1928년 20세형 유근가족 춘천 실레로 이사. 유정은 봉익동 삼촌집에 얹혀 지냄.
인간문화재 박록주(朴綠珠) 공연을 처음 관람
1929년 21세 휘문고보 5년 졸업(제 21회). 삼촌댁에서 사직동 둘째 누님 유형(裕瀅)집으로 거처를 옮김(누님은 이혼 후 양복공장 근무)
1930년 22세 연희전문학교(延禧專門學交) 문과에 입학하였으나 6월 24일 학칙 제 26조에 의거, 제명처분 당함. 하지만 김유정은 더 배울 것이 없어 자퇴했다고 함.
박록주를 짝사랑했으나 끝내 거절당함. 춘천 실레에 내려와 방랑생활. 들병이와 친해짐. 늑막염 재발. 안회남의 권고로 소설을 씀
1931년 23세 4월 20일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 상과에 다시 입학. 그 후 자퇴함(퇴학자 명단에만 있을 뿐 상세한 기록은 없음). 실레 마을에 야학당(夜學堂)을 열다. 농우회, 노인회, 부인회 조직. 농우가(農友歌) 지어 부름
1932년 24세 야학당을 금병의숙(金屛義熟)으로 넓히고 간이학교로 인가 받음. 느티나무를 식목함. 6월 15일 처녀작 단편 심청(深靑)을 탈고.(4년 뒤인 1936년 『중앙』에 발표) 충남 예산 등지의 금광을 전전함
1933년 25세 서울에 올라와 사직동에서 누님과 함께 기거. 폐결핵 발병진단. 1월 13일 「산ㅅ골나그네」탈고, 안회남의 주선으로 『제1선』지 3월호에 발표. 8월 6일 「총각과 맹꽁이」를 탈고, 『신여성』 9월호에 발표. 공식적으로 발표된 작품으로 처녀작은 「산ㅅ골나그네」가 됨. 사직동 시대 유정은 톨스토이가 되고자 함. 이석훈(李石薰), 채만식(蔡萬植), 박태원(朴泰遠), 이상(李箱) 등을 만남.
1934년 26세. 누님이 사직동 집을 처분. 혜화동 개천가에 셋방을 얻어 밥장사. 8월 16일 「정분」탈고. 9월 10일 「만무방」탈고. 12월 10일 「애기」탈고. 「노다지」, 「소낙비」를 12월에 탈고.(1933년의 「따라지의 목숨」을 1934년 「흙을 등지고」로 개작, 신문사와 협의 「소낙비」가 됨) 안회남이 대신 신춘문예 응모작으로 부침
1935년 27세 조선일보 신춘문예 현상문예 현상모집에 「소낙비」 1등 당선. 조선중앙일보 신춘문예 현상모집에 「노다지」가작 입선. 1월 20일 아서원에서 신춘문예현상 1등 당선 축하회. 6월 3일 백합원서 조선문단사가 주최한 문예좌담회에 참석. 김유정은 안회남(安懷南), 김남천(金南天), 이학인(李學仁), 박영호(朴英鎬), 이선희(李善熙), 함대훈(咸大勳), 이헌구(李軒求), 이석훈(李石熏), 김환태(金煥泰), 이무영(李無影), 한인택(韓仁澤), 서항석(徐恒錫), 정지용(鄭芝溶), 김희규(金憘奎), 이하윤(李河潤), 김광섭(金珖燮), 방인근(方仁根), 최정오(崔定吾) 와 함께 연회에도 참석했다.
단편 「금따는 콩밧」 『개벽』 3월호, 「금」발표지 미상, 1월 10일 탈고, 「떡」『중앙』 6월호, 「만무방」 『조선일보』 7월, 「산골」 『조선문단』 7월호, 「솟」 『매일신보』 9월, 「정분」의 개고작(『정분』이 『솟』으로 개작되었다), 「봄봄」 『조광』 12월호 등을 발표한다. 이 한해에 소설 9편과 수필 「잎이 푸르러 가시든 님이」 『조선』 『중앙일보』 3월 6일, 「조선의 집시-들병이 철학」 『매일신보』 10월, 「나와 귀뚜람이」 『조광』 11월호 등, 3편을 발표, 6월 3일 『조선문단』이 주최한 문예좌담회에서 이태준(李泰俊)에 대해 깊은 관심을 보임. 구인회(九人會) 후기 동인으로 참여. 이상과 깊은 친분을 가짐. 「안해」를 『사해공론(四海公論)』 12월호에 발표하여 문단의 찬사를 받음
1936년 1월부터 8월까지 9편의 소설과 4편의 수필을 발표.
단편 「심청」 『중앙』 1월호, 「봄과 따라지」 『신인문학』 1월호, 「가을」 『사해공론』 1월호, 「두꺼비」 구인회 동인지『시와소설』 3월호, 「봄밤」 『여성』 4월호, 「이런 음악회」 『중앙』 4월호, 「동백꽃」 『조광』 5월호, 「야앵」 『조광』 7월호, 「옥토끼」 『여성』 7월호 가 각각 발표됨. 미완의 장편소설 「생의 반려」는 『중앙』 8, 9월호에 연재됨.
수필 「오월의 산골작이」, 「어떠한 부인을 마지할까」, 「전차가 희극을 낳어」, 「길」 등을 5월에서 8월 사이에 발표하고 「행복을 등진 정열」은 여성지 10월호에, 「밤이 조금만 짤럿드면」은 『조광』지 11월호에 발표.
단편소설 「정조」는 『조광』지 10월호에, 「슬픈이야기」는 『여성』지 12월호에 발표.
마지막 여인 박봉자를 짝사랑하였다.
1937년 병이 깊어져 김문집이 병고작가 구조운동을 벌임.
서간문 「문단에 올리는 말슴」을 『조선문학』 1월호에 게재.
수필 「강원도 여성」 『여성』 1월호, 「병상 영춘기」 『조선일보』 1월 29일∼2월 2일 발표. 2월 조카 진수에 의지하여 경기도 광주군 중부면 신상곡리 100번지의 매형 유세준의 집으로 옮겨와 요양 치료함.
소설 「따라지」 『조광』 2월호, 「땡볕」 『여성』 2월호, 「연기」 『창공』 3월호 발표.
서간문 「병상의 생각」을 『조광』지 3월호에 발표하고, 세상뜨기 11일 전인 3월 18일 「필승전」으로 되어 있는 마지막 편지를 안회남에게 보냄.
3월 29일 오전 6시 30분에 30세의 나이를 다 채우지 못하고 경기도 광주군 중부면 산상곡리 100번지 매형 유세준의 집에서 사망함. 서대문 밖(홍제동 화장터)에서 유해는 화장되어 한강에 뿌려짐.
이 해의 사후 발표작으로 수필 「네가 봄이런가」 『여성』 4월호, 단편소설 「정분」 『조광』 5월호, 번역동화 「귀여운 소녀」 『매일신보』 4월 16일∼21일, 번역 탐정소설 「잃어진 보석」 『조광』 6월∼11월호 발표됨
1938년 단편집 「동백꽃」(三文社) 발간됨
1939년 사후 발표된 소설로 「두포전」『소년』 1∼5월호, 「형」『광업조선』 11월호, 「애기」『문장』 12월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