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전 손재형은 1903년 전남 진도군 진도읍 교동리 향저에서 옥전(玉田) 손병익(孫秉翼)의 손(孫)이자
영환(寧煥)의 유복자로 출생하였다. 본관은 밀양이고 아명(兒名)은 판돌(判乭)이며, 아호(雅號)는 소전, 전옹(翁),전도인(道人) 등이며,
당호(堂號)는 옥전장(玉田莊), 봉래제일선관(蓬萊第一仙館), 존추사실(尊秋史室)등을 썼으며 이 밖에도 취향에 따라 자유롭게 쓰셨으며, 추사
이래의 대가로 추앙받을 정도로 우리나라 서예계에 뚜렷한 발자취를 남기면서 한자 문화의 정수인 서예를 오늘날에 이어 온 서예계의 거목이다.
당시 3천석군을 자랑하던 부유한 가정에서 유복하게 자란 그는 5살 때부터 할아버지인 옥전(玉田)
손병익(孫秉翼)의 슬하에서 한학과 서법의 기본을 익혔으니 어릴 적부터 서예에 남다른 재질을 가졌다. 독창적 서체를 개발한 업적을 남긴 소전을
가르켜 흔히 앞으로 1세기 안에 나타나기 힘든 서예가라는 말을 한다.
1924년(당시 22세)부터 1931년까지 매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하고 제 1회 조선서도전에서 특선하는 등
나이 30전후에 특선을 마치고 곧 이어 국내 규모의 심사위원을 맡아 국전이 시작되면서 계속해서 9회나 단 한번 심사에 참여하지 않은 때가
없었다. 뿐만 아니라 아홉차례 심사위원을 지낸 뒤에는 두차례에 걸쳐 국전 고문을 지냈고 국전 심사위원장 한번, 국전 운영위원장 두 번, 예총회장
두 번, 대한민국예술원회원(’54~’81) 등을 지내 그가 활동하던 40년간 선전이나 국전에 그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은 때가 없었다는 것은
앞으로 그 기록이 좀처럼 깨뜨려지지 않을 것이다.
일제시대 말기에 이르러서 우리 국어는 말살 당하고 민족문화로서 민족서예는 그 존재성마저 잃게 되었으나
8ㆍ15해방을 맞으면서 소전은 일본에서 통용되는 서도(書道)라는 용어 대신 서예로 할 것을 들고 나왔다. 이것은 일본에서 통용되는 불쾌한 기억을
씻어 보자는 의미도 있지만 동양적 서예관에서 서즉화(書卽畵), 화즉서(畵卽書)라는 전통적 의미와 함께 현대의 예술성을 띄고 새로운 서예운동에
적극 참여한다는 민족적 의지의 표징이다. 그리하여 오늘날 서예라는 용어가 통용되고 있는 것이다. 또한 그는 1945년 조선서화 동연회(同硏會)를
창립 선전이 없어진 문화적 공백기를 메웠으며 그것이 국전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흔히 소전을 서예가로만 인식하지만 학남(鶴南), 산정(山亭)같은 제자들은 『선생님이 남긴 80여점 중에는 선생의
글씨보다 더 높이 평가할 그림이 있다.』고 화가로서의 소전을 평가한다. 장년기에 들어 소전의 글씨는 더욱 원숙해졌다. 자획과 구성에 무리가 없고
문기가 넘치는 그의 글씨는 보는 이의 저항감을 전혀 일으키지 않는데 특색이 있으며, 수차에 걸쳐 중국에 다녀와 중국적인 스타일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독특한 서체를 확립하여 이른바 소전체라 불리는 서체를 만들어 냈다.
특히 극치를 이룬 것은 1956년 고향인 고군면 벽파진에 세워진 우리나라 최초의 국ㆍ한문 혼용비인 이충무공
전첩비문이다. 점, 선, 횡획, 종획 등의 변화무쌍한 조화를 이루며 전체적인 리듬이 금세의 역작을 이루고 있는데 이는 선생의 재질과 노력이
민족문화에 대한 깊은 애정과 어울려져 결집된 소전예술의 정점이라 할 수 있다. 이 밖에 대표작으로 진해 해군 충효탑 비문(예서체), 서울 사육신
비문(육체) 등이 꼽힌다. 그 외에도 의암 손병희 선생 묘 비문, 안중근 의사 숭모비문, 육군사관학교의 화랑대, 불국사 관음전 현판 등이
있으며, 출품 작으로는 “애착춘산병” “임지여묵” “곡병일대” “대연” “人言” “行書一對” “筆硏精良人生一樂”등이 있으며, 제4대 민의원
의원과 제8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되기도 하였다.
그는 제자를 사랑했다. 그가 길러 낸 제자들은 원곡(原谷) 김기승(金基昇), 학남(鶴南) 정환섭(鄭桓燮),
경암(景岩) 김상필(金相筆), 서봉(西峰) 김사달(金思達), 장전(長田) 하남호(河南鎬), 평보(平步) 서희환(徐喜煥), 금봉(金峰)
박행보(朴幸甫), 우죽(友竹) 양진니(楊鎭尼) 등 한국 서예의 기둥들이 즐비하다. 구철우는 『우리나라 서예가들 두어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그의 제자라고』말하였다. 해학이 넘쳐흐르고 많은 사람을 웃기면서 사귀는데는 천재란 평을 받는 소전은 예술에 대한 고집은 대단해서 종종 적을 사는
때가 있었다. 그는 예술가의 기본적인 인간성과 생활태도를 중시해 『멋과 풍류도 좋다 그러나 가정의 평화를 깨뜨리는 축첩은 삼가자』고 제자들을
가르쳤다. 그는 글씨를 대부분 새벽 4시에 일어나 쓰는 정성을 들였으며, 『역시 글씨는 마지막 10%가 신운(神韻)이다』고 곧장 말하면서 기분
내키지 않는 때면 수없이 썼다가 찢어 버리고 낙관을 않는 성미였다.
서울 홍제동에 세운 그의 집은 처음 국회의원에 당선되던 해 착수했다. 대원군 이하응의 별장인 석파정(石坡亭)
사랑채를 사들여 옮겨 짓고 옥전장과 문옥루 등은 33년전에 지은 효자동의 그의 집을 옮겨 왔다. 소전은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쳐 이 집을
예술의 정수로 완성하려 하였으나, 16년간이나 계속하고도 완성하지 못한 채 병석에 쓰러지더니「소전체」를 확립한 추사이래의 대가 소전은 1981년
79세의 나이로 끝내 운명하고 말았다.(옮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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