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외서리
아마도 초등학교 4∼5학년 때 일 것이다. 전깃불이 없던 때라 참으로 불편한 것이 많았지만 그런 생각은 전혀 못했고 내남없이 그저 배만 부르면 최고의 행복으로 여기던 시절이었다. 한여름에는 먹을 것이 변변치 않았다. 저녁엔 대부분 칼국수나 아욱죽 이었기에 돌아서면 허기가 돌아 먹거리를 찾곤 했다.
밤이면 강둑에 멍석을 피고 조무래기들이 모였다. 아리잠작한 꼬맹이들 이었지만 하는 짓은 올되었다. 마른 풀에 쑥대를 꺾어 모깃불을 피우며 서로의 하루일과를 나누었다. 대부분 옥수수나 감자로 간식을 했는데 그것도 여의치 않은 날은 참외서리를 모의했다. 물레방앗간이 있는 아랫동네 참외밭에 다행히 밤이면 할아버지께서 지키신다. 우리들은 머리를 맞대고 그럴싸한 작전을 세우고 실행에 옮긴다. 대기조는 이곳 본부에 남아 아무일 없는 듯 연기를 하고, 연락조는 강둑을 어슬렁거리며 망을 보다 긴급상황 발생시 휘파람이나 새소리로 신호를 보낸다. 서리조는 그날의 영웅으로 먼저 위장을 한다. 옷을 벗고 논흙으로 얼굴과 팔뚝 그리고 등에 바르고, 남폿불이 졸고있는 원두막 반대편의 담배밭이나 고추밭 이랑을 넘어 살금살금 침투한다. 낮은 포복으로 참외골을 다니며 크고 반질반질한 것으로 서너개씩 따서 품에 안고 약속장소에 나타나면, 연락조가 받아들고 본부로 돌아온다. 그리곤 기쁨의 환성을 지르며 모두 물속으로 뛰어든다. 땀과 흙이 범벅이된 몸도 씻고 참외도 씻기 위해서다. 그 때의 기쁨을 무슨 말로 표현하리. 작은 입이 찢어지도록 참외를 물어 뜯는다. 딸 때는 잘익은 줄 알았는데 막상 먹어 보면 덜 익어서 두어입 베어먹고 물에 버리는 것이 더 많았다. 그렇게 허기도 채우고 목욕도 하고 나면 여름밤은 금세 깊어 간다. 홑이불을 덮고 조잘거리던 무용담도 스르르 잠에 빠진다.
한데서 밤을 세워 본 일이 있다면 밤은 또다른 신비로운 세계라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잠꼬대로 뒤척이는 물고기들의 소리, 나뭇가지나 풀잎이 자라나는 듯이 수런거리는 소리, 이름 모를 풀벌레들의 소리 위로 은하수를 따라 총총한 별들이 수 많은 참외가 되어 운행하고 있다. 알퐁스 도데에 나오는 프로방스의 별들도 아마 이런 모습일 것이다. 주인 아가씨에게 밤하늘의 별을 설명해주던 목동의 마음으로, 그 날의 참외서리는 아주 오랫동안 가슴속에 살아 있다.
덜익어 버려진 참외들이 물에 떠내려가다 아랫동네 보에 걸려서 식전에 빨래하던 아줌마들의 입방아에 동네가 떠들썩했고, 결국 우리는 범인으로 지목되어 야단도 맞았다. 그래도 그 때엔 이정도는 애교로 넘어 갔고 우리의 참외서리는 영원히 추억속에 남게 되었다.
세월은 많이 흘렀고 세상은 더 많이 변했다. 지금은 그 참외 원두막 자리에 펜션이 들어서서 수시로 고급 차들이 들락날락 한다. 그 강둑도 하천 정비공사로 버드나무도 없어지고 아카시아 나무도 베어지고 도로포장까지 되었다. 땀이 차서 미끄러지던 고무신이 거추장스러워 맨발로 참외서리를 하던 친구들도 모두 고향을 떠났다.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키가 작아진 앞산과 오염된 물을 안고 신음하는 강물이 전부다. 시골 중학교를 졸업하며 청운의 꿈을 안고 출세를 하겠다고 하나 둘씩 도시로 떠났지만, 촌놈들에게 세상은 그리 호락호락 하지 않았다. 나를 비롯한 대부분의 친구들이 이 모양 저 모양으로 힘들게 살다 보니 서로 만나기도 쉽지 않고 설령 만난다 해도 속내를 들어내 놓고 이야기도 못한다. 너무 변해버린 세월의 때 앞에 그 날의 순수함을 이야기 할 용기도 못낸다.
많은 사람들이 고향을 노래하고, 순수했던 동심을 그리워하지만 돌아가기가 쉽지 않은 것도 이와같은 이유가 아닐까? 너무 욕심을 부리고, 바쁘게 살아가다 보니 우리 스스로가 그 길을 막는 것이 아닌가 싶다. 얼마의 세월이 흐르면 이 풍경도 또 변할 것이다. 더 많은 펜션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고 도로도 확장되어 대형버스가 쌩쌩거리며 달리겠지만, 그럴수록 그 때의 참외서리는 더욱 새록새록 피어나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 있다.♧
♬ : 비목,신영옥
첫댓글
참외서리 ㅎ
재미난 추억이지요
그 시절 시골에선 누구나 있을법한 추억이지요
그런데 논산에 전깃불이 없었어요
아름다운 인생 역사를 봅니다
우리들의 인생 추억이지 싶습니다
비목 무척 좋아해서 흥얼거렸는데...
@행운
댓글 이미지에
하루의 안부가 다 있네요
이미지 가져 갑니데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