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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택 신부의 금쪽같은 내 신앙] (120) 가장 작고 약한 것의 가치
힘없고 초라한 존재를 돌보는 마음
일전에 ‘쓸모없음의 쓸모 있음’이라는 글을 쓴 적이 있는데, 장자(莊子) 잡편(雜篇)에 ‘무용지용(無用之用)’이라는 우화가 있음을 후에 알게 되면서 복음과 동양의 고전이 서로 통하는 부분이 있음을 새삼 확인하였다.
살면서 가장 괴로울 때 중 하나가 자기가 한 일이 제대로 인정받지 못할 때일 것이다. 혹은 자기가 이뤄놓은 일이 허망하게 무너져내릴 때일 것이다. 자기가 이룬 업적에 자신도 모르게 도취되고 욕심이 생겨 열정이 과욕이 되고, 그것이 잘 되지 않을 때 도리어 큰 짐으로 돌아오는 경우가 적지 않다. 살아가면서 자신이 쓸모없는 존재가 되어가는 것처럼 느껴져 서글픔을 경험하기도 한다. 나이가 들면서 힘이 빠지고 정신이 흐려져 자신감을 잃게 되며, 나를 찾는 사람이 없어지고 불필요한 존재가 되어가는 것 같아 우울함을 느끼기도 한다.
사실 자신이 쓸모없는 존재임을 인정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반대로 자신이 쓸모없는 존재임을 인정하는 순간 큰 자유를 경험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 의미에서 인생이란 자기가 쓸모없는 존재임을 배우는 학교가 아닐까.
함께 이탈리아 성지순례를 다녀오신 한 수녀님께서 마음이 복잡하고 무거운 순례 여정 중이셨는데, 문득 클라라 성녀께서 선종하신 침대의 소박한 모습을 보고 희망과 자유를 느끼셨다고 했다. 진정한 희망이란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진 것, 집착을 버릴 때 선물처럼 주어지는 것이 아닐까.
내가 가진 것이 없고 이룬 것이 없어도, 그저 있는 그대로의 나를 소중히 여기시고 사랑스럽게 바라보시는 하느님을 만날 수만 있다면, 그 누구도 관심을 두지 않는 초라한 나이지만, 그런 나를 눈여겨보시고 마음에 두시는 주님을 만날 수만 있다면, 나는 그것으로 만족할 것이다요즘 가장 작고 약한 것을 마음에 두고 보살피시는 하느님의 마음을 종종 묵상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 예수님의 이 말씀은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가장 약한 이를 돌보고 보살피는 것임을 일깨워 주신다.
가장 작고 약할수록 가장 큰 돌봄과 보살핌을 받아야 한다. 이는 ‘이념’이 아닌, ‘마음’에서 비롯한다. 우리는 가장 작고 약한 것을 볼 때 연민을 느끼며, 지켜주고픈 마음이 생긴다. 이것이 우리 마음속에 각인된 ‘하느님의 모상’이기 때문이다.
태아를 보며 나도 태아였던 때가 있었음을 떠올린다. 무기력한 존재, 돌봄 없이는 생명의 위협 속에 있을 수밖에 없는 존재인 인간은 태어나 성장하고 나이 들어 죽기까지 끊임없는 돌봄과 보살핌을 필요로 한다. 예수님도 인간의 모든 것을 경험하셨다. 처녀인 마리아의 몸에 잉태되어 돌에 맞아 사라질 뻔하셨다. 구유에 누워 계실 때 온갖 위협에 노출되셨고, 헤로데의 폭정으로 희생당할 뻔하셨다. 공생활을 시작하시며 그분께서는 가장 작은 이, 가난하고 병든 이에게 다가가셨다. 가장 작고 약한 이들을 돌보시기 위해서다.
하느님께서는 가장 힘없는 존재를 돌보라고 우리에게 생을 허락하셨다. 우리 생은 아주 작고 미약한 상태에서 출발하여 아주 미약한 상태로 마감한다. 힘이 있고 건강할 때, 우리가 할 일은 바로 우리의 과거요 미래요 현재의 모습인 가장 작고 약한 이를 돌보는 것이다. 그리고 생을 마감하여 주님 앞에 다시 섰을 때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으면 좋겠다.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루카 17,10)
[문학과 그리스도교 영성] (11) 「햄릿」 : 불확실성과 섭리
‘죽느냐 사느냐’ 삶의 갈등 내려놓고 마주한 ‘하느님의 섭리’
셰익스피어의 대표작 「햄릿」에서 주인공이 아버지의 복수를 자꾸 미루게 되는 이유가 그의 나약함 때문이라고도 하지만, 사실은 복수에 대한 불확실성 때문이다. 아버지의 죽음을 둘러싼 정황과 복수의 윤리적 측면의 정당성에 대한 확신을 찾지 못한 햄릿은 복수를 계속 지연시킨다. 주인공의 내적 갈등을 고조시키는 불확실성은 비극의 중요한 역동성이다.
드라마는 햄릿의 아버지가 아들에게 유령의 모습으로 나타나, 자신은 동생인 클로디어스에게 암살당했다고 알려주면서 시작된다. 당시 영국은 헨리 8세의 종교개혁 이후 성공회를 국교로 삼고 있었다. 개신교는 연옥 교리를 믿지 않았기 때문에, ‘연옥의 불 속에 갇혀’ 지내고 있는 유령은 가톨릭 신앙을 암시한다. 마틴 루터가 공부하였던 위텐버그로 유학을 다녀온 햄릿은 신교도 시각에서 이 유령의 진실성에 대해 확신할 수 없다.
그러나 주인공은 놀랍게도 개신교의 가르침을 넘어서는 반응도 보인다. “그대가 그렇게 의심스러운 모습으로 나타났으니, 그대를 햄릿으로, 왕으로, 아버지로, 덴마크 왕으로 부르겠다.”
마침내 유령과의 대화를 마치고, 호레이쇼가 왔을 때, 이렇게 말한다. “호레이쇼, 천지간에는 자네의 학문으로는 상상도 못 할 일들이 있다네.” 아버지의 죽음과 유령에 대하여 주인공은 구교의 가르침과 신교의 가르침 사이에서 불확실성을 겪게 된다.
선왕의 죽음에 뭔가 수상쩍은 면이 있다는 것은 알겠지만, 유령의 존재를 완전히 믿을 수는 없다. 계속해서 질문하고, 분석하고, 의심할수록 불확실성의 고통은 더해간다. 그 유명한 ‘죽느냐 사느냐’의 독백이 주인공의 자살에 대한 충동으로 알려졌지만, 사실은 불확실성에 대한 고민이 자살과 죽음에 대한 영역에까지 이르렀음을 보여준다. 즉, 고통스러운 현실 안에서도 죽지 못하는 이유는, ‘죽음 이후에 겪을 어떤 것에 대한 두려움, 어떤 나그네도 돌아오지 못한 곳, 그 미지의 나라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또한 주인공은 복수 자체에 대한 윤리적 정당성의 불확실성과도 맞닥뜨리게 된다. 경당에서 홀로 기도하고 있는 클로디어스를 죽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았지만, 칼을 거둔다. 왜냐하면 기도하는 동안 죽게 되면 ‘천국에 갈’ 것이기 때문이다. 앵글로색슨 문화의 전통적이며 정당한 복수와 자비를 강조하는 그리스도교 사이에서 윤리적 모호성은 복수를 지연시킨다.
중세 시대 전통적 복수극은 안정되게 확립된 도덕 질서가 있었다. 복수의 명분과 정의는 명확하였다. 가족의 복수라는 상황에서, 질문과 의심은 필요 없었다. 그러나 셰익스피어의 「햄릿」은 그러한 명확성을 붕괴시키고 있다.
제5막 1장에서 햄릿은 묘지를 거닐다가 무덤을 파고 있던 인부들이 던진 해골 하나를 발견한다. 해골의 주인은 그가 어릴 때 궁정에서 일하던 광대 요릭이다. 자신이 ‘셀 수 없을 만큼 자주 키스했던 그 입술이 달렸었던’ 자리를 쳐다보며 ‘구역질이 날 것 같다’고 말한다. ‘천 번도 넘게’ 자신을 ‘등에 태워주었던’ 요릭의 해골 앞에서 주인공은 깨달음을 얻는다.
“호레이쇼, 아는가? 알렉산더 대왕도 무덤 속에선 이 꼴일까? 우리가 죽어 흙이 되면 무슨 천한 용도에 쓰일지 상상 좀 해봐! 알렉산더 대왕의 고귀한 흙을 추적해 보면 술통 마개가 되어 있는 것을 발견할 수도 있지 않겠나?” 주인공은 모든 사람은 죽어서 결국 흙으로 돌아간다는 진리를 깨닫는다. 여러 작가가 언급한 “죽음은 위대한 평등자다”라는 말처럼, 아름다움도, 지식도, 권력도, 재산도, 모두 궁극적으로 동일한 물질적 종말을 맞이한다.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한스 홀바인의 명작 <대사들>이라는 그림은 인간의 위대한 업적을 묘사한다. 과학기술, 음악, 화려한 의상, 다양한 학문을 지닌, 유학을 다녀온 르네상스 인물인 햄릿도 인간의 “이성은 고결하고 그 능력은 무궁무진하다”고 언급한다. 그러나 홀바인의 그림 한구석에는 굴절된 해골의 이미지가 숨겨져 있다. 너의 죽음을 기억하라는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다.
중세 시대 신 중심에서 벗어나 인본주의를 추구했던 르네상스의 또 다른 정신은 역설적으로 인간의 유한함에 대한 성찰이었다. 재의 수요일에 드리는 기도처럼, 결국 모든 것은 먼지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그러나 불확실성과 싸우며, 요릭의 해골을 보며 죽음의 냉엄한 진리를 대면한 주인공은 허무주의나 체념주의에 빠지지 않고, 신의 섭리에 의탁한다.
죽음의 통찰이 자신을 괴롭히던 불확실성을 해결해 주지는 않았다. 여전히 복수에 대한 불확실성이 주인공을 사로잡고 있다. 그 유령(가톨릭 신앙)이 진실일까? 복수는 정당화(그리스도교의 자비) 될 수 있을까? 혹시라도 나 자신이 지옥 불에 떨어지지는 않을까? 계속되는 질문과 의심은 햄릿의 행동을 마비시켰다.
하지만, 인간이 죽음의 진리를 피할 수 없는 것처럼, ‘우리의 삶도 우리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흔한 참새 “한 마리도 너희 아버지의 허락 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마태10,29 참조)는 성경 말씀처럼, 햄릿도 ‘참새 한 마리가 떨어지는 데에도 특별한 섭리가 있는 법’이라고 엄숙히 말한다.
신의 섭리에 맡긴다는 것은, 삶의 통제권을 신에게 드리는 것이다. 햄릿이 불확실성으로 고통받았던 핵심적인 이유는 자신의 삶을 통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버지 유령을 만난 후부터 자신의 행동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삶의 주도권을 상실한 것이다. 비록 여전히 불확실성은 남아있지만, 주도권을 신에게 넘김으로써, 불확실성이라는 불안의 감옥으로부터 해방된다.
가브리엘 천사의 소식을 듣고 마리아는 ‘몹시 놀라고 두려워’하며, ‘곰곰이 생각’하고 질문한다. 결혼도 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아이를 갖는다는 말인가. 처녀의 몸으로 아이를 잉태했다는 소식이 알려지면 자신의 목숨을 잃을 뿐만 아니라, 공동체에서 가족은 죄인이라고 낙인찍힐 것이다.
천사의 설명이 자신의 목숨과 가족의 명예가 위태로울 수 있는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을 완전히 해소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Let it be)를 바랍니다”라며 하느님의 뜻에 순명한다.
우리의 삶을 하느님의 섭리에 맡기면서 불확실성을 살아간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하느님 뜻대로 될 것이니, 그냥 그대로 두면 된다는 체념적 수동의 삶이 아니다. 비록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고, 결과를 통제할 수 없지만, 신의 섭리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삶의 행위가 적극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레어티스와의 결투가 위험할 수 있으니 피하라’는 호레이쇼의 충고에 햄릿은 멈추지 않는다. 확실성이 없이는 행동하지 못했지만, 이제는 불확실성의 문제에 빠져들지 않고, 적극적으로 삶의 행위에 나선다. 이제 햄릿에게 ‘순리를 따르는’ 것은 바로 때가 왔을 때, 적극적인 행동으로 나아가도록 ‘마음을 준비해’ 두는 것이다.
마리아도 천사의 소식에 순명한 후, 그냥 수동적으로 머무르지 않았다. 제일 먼저 ‘서둘러’ 산악 지방으로 올라가 엘리사벳을 만난다. ‘마리아의 노래’를 통해 적극적으로 하느님의 목소리를 대변한다. 예수의 탄생, 성전에서 예수를 잃어버린 사건, 카나의 혼인잔치, 십자가 아래서 아들을 바라보는 어머니 등에서 미래의 불확실성이라는 감옥에 갇히지 않고, 적극적인 헌신, 식별, 용기의 삶을 드러낸다. 이 모든 것은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절대적 신뢰를 바탕으로 한다.
[영성의 샘] “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십시오”
저는 어렸을 때 요즈음 학생들처럼 학원을 많이 다녔습니다. 아들이 잘되기를 바라는 어머니의 욕심인지 배려인지 모르겠지만, 저는 초등학교 3학년 때 바이올린, 피아노, 그림, 컴퓨터, 웅변 등등 5~6개의 학원에 다녔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중 잘하는 게 하나도 없는데 굳이 그랬어야 했느냐는 생각이 들긴 합니다.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와 컴퓨터 학원에서 가서 과제를 수행하던 중 문득 ‘아, 엄마랑 아빠가 돌아가시면 어떻게 하지?’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누가 뭐라고 한 것도 아니고 당시에 신입 복사로서 본당에서 활동은 하였지만, 그다지 신앙적으로 열심한 편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 저는 1남 2녀 중 막내로, 큰누나와 작은누나랑 각각 10살, 9살 나이 차가 납니다. 어머니께서 당시 조금 늦은 나이인 36세에 저를 낳으셨기에, 또래 친구들 부모님보다는 거의 10살 차이가 났습니다. 어려서부터 그런 상황이다 보니, 은연중에 그것을 염두에 두고 있었나 봅니다. 갑자기 눈물이 났습니다. 과제고, 가방이고 내팽개치고, 울면서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집에 계신 어머니께 저는 눈물, 콧물 짜면서 물었습니다. “엄마! 엄마, 아빠 죽으면 나는 혼자 어떻게 해?”
그때 어머니는 지금 제 나이 즈음 되셨을 텐데, 웃으시고 안아주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천국에서 엄마, 아빠가 우리 아들 올 때까지 기다리면 되지.” 당시의 저는 어렸기에 막연히 죽음에 대한 두려움, 혼자가 된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 가까운 가족이 나를 떠난다는 두려움이 있었나 봅니다. 아이가 울면서 그러한 두려움을 느끼는 것을 엄마가 위로해주고 잘 마쳤으면 아름답게 끝났을 텐데, 그때부터 어머니의 공격이 시작되었습니다.
어머니는 그때 무슨 성모님에 대한 신앙 특강을 들으셨는지 아니면 성인전을 읽으셨는지, 엄마가 없으면 성모님을 어머니로 모시면 된다고 말씀하시며, 성모상을 보고 어머니라고 불러보라고 하시고, 레지오 협조단원으로 제 이름을 넣으셨습니다. 솔직히 그때 당시 누나들이 협조단원이 되어 묵주기도와 까떼나를 바치는 것을 보고, 나는 안 해도 된다는 안도감과 누나들을 골탕 먹이는 걸 재미있어했는데 막상 그 대상이 제가 되고 나니 무척 피곤했습니다. 밤마다 졸린 눈을 부여잡고 어머니의 협조단원이 되어서 묵주기도 5단을 바치고 까떼나를 바쳤습니다. 학교 다니느라, 5~6개 학원 다니느라 피곤한 애를 붙잡고 성모님을 어머니로 모시라는 압박에 피곤했던 날을 몇 달간 보내었습니다.
30년이 지난 어머니와의 추억(?)이지만, 아직도 제 기억에 선명하게 남아 있는 이야기입니다. 자녀가 느끼게 된 죽음에 대한 두려움, 이 세상에서 홀로 된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어머니께서는 성모 신심으로 아들에게 풀어주고 싶으셨던 마음이 있으셨나 봅니다.
사실 모든 사람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우리는 땅 위에서 생명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지만, 우리의 종착점이 어디인지 알고 있습니다. 단지, 그것이 멀다고 느낄 뿐, 언젠가는 죽음이라는 종착점에 이른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히 살 수 있다는 희망으로 이 세상을 기쁘게 살아야
모든 종교는 인간의 죽음 다음의 세상에 대한 교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슬람교, 유대교, 그리스도교, 불교 모두 현세 다음의 세상에 대한 대답을 저마다 냅니다. 가톨릭교회는 천국과 지옥 그리고 연옥으로 지상에서의 삶이 끝난 다음의 세계를 바라봅니다. 당연히 우리는 천국, 즉 하느님 나라의 일원이 되기를 꿈꾸며, 가톨릭 신앙 안에서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십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메시아시며, 하느님 나라에 이르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요한 14, 6)입니다. 그분께 희망을 두고, 그분을 소유하며 살아갈 때 우리는 이 땅에서 하느님 나라를 느끼고, 하느님 나라에 대한 희망 속에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만일 우리 삶의 끝이 죽음에서 끝난다면 허무함 속에서 아무런 희망도 가질 수 없고, 이 세상에서 사랑을 전할 이유도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 나라의 일원으로 영원히 살아갈 수 있다는 희망으로 이 세상에서 기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레지오 활동으로 성모님의 힘이 되고자 하는 이유 또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이토록 귀한 선물을 독점하는 것이 아니라 이 기쁜 선물을 더 많은 사람이 알고 누리게 하는 데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기쁜 선물은 다른 사람과 나눈다고 해서 내 몫이 적어지거나 사라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다른 사람과 나눌 때 성모님께서는 기뻐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느님 나라의 자녀가 될 사람이 더 많아지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십시오(필리 4, 4)”라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과 같이 죽음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느끼기보다 우리는 항상 주님의 선물 속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기억하며 기쁘게 살아가도록 합시다.
[한민택 신부의 금쪽같은 내 신앙] (107) 사람이 죄보다 소중하다
죄를 탓하기 전에 안아주시는 분
우리는 하느님을 자비로운 분이라고 고백하지만, 실제로는 우리 생각과 기준에 맞춰 임의대로 무자비한 하느님을 생각하고, 그에 따라 세상과 사람을 판단하고 재단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와 생각이 다른 사람, 결점 있는 사람, 잘못을 저지른 사람, 기대에 어긋난 행동을 하는 사람들을 보고 우리는 손가락질하고 경멸한다. 그러는 동안 우리는 스스로를 아무런 때도 묻지 않은 의인이라고 자처하고 있지는 않은지.
오래전 한 젊은 사제의 면직 소식을 접하고 한숨을 쉬며 비판했던 기억이 있다. 그때 옆에 있던 한 후배 사제가 혼잣말로 되뇌는 것을 들었다.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렇다. 나는 당사자의 입장에서 그 사제가 겪었을 마음고생은 생각지도 않고, 그저 보통 사람의 잣대로 나의 형제를 손가락질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어떤 변명으로도 자신이 지은 잘못을 가릴 수는 없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부족하고 죄 많은 인간을 보시며 혀를 차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로 인해 겪었을 자녀의 마음고생에 더 마음을 쓰시는 분은 아닐지 생각할 필요가 있다. 인간은 죄를 지어 서로에게 상처를 남기지만, 양심이 있는 한 스스로 잘못했음을 깨닫고 괴로워하는 존재이기도 한 것이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루카 15,11-32 참조)에서 가산을 탕진한 작은아들이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그를 손가락질하거나 문전박대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그가 돌아오기를 노심초사 기다렸고, 그를 보자 아무것도 묻지 않고 안아주었다. 아들은 이미 알고 있었다. 자신이 얼마나 큰 잘못을 지었는지를 깨닫고 마음 깊이 뉘우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아버지가 그저 안아주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간음하다 붙잡힌 여자’(요한 8,1-11 참조) 이야기에서도 예수님은 여인에게 죄를 묻지 않았다.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 이 이야기를 풀어 설명하신 한 은사 신부님의 강론 말씀이 떠오른다. “여인아, 너는 죄보다 더 소중하다. 용서로 새로 시작하는 삶에 주님의 축복이 함께하기를!” 그렇다. 인간은 죄보다 소중하다. 죄를 지어 상처를 입고 상처를 입히는 존재이지만, 우리는 죄가 아니다. 하느님의 자비로 용서받을 수 있고, 새로 시작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자비하신 하느님을 알고 있는가? 죄나 잘못으로 인해 혹은 다른 이유로 괴로워하고 있다면, 그 감정에 파묻혀 헤매지 말고, 작은아들처럼 고개를 들고 다시 아버지께 돌아가자. 아버지는 이미 알고 계시다. 우리가 얼마나 괴로움 속에 살고 있는지, 그리고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말이다. 용서와 평화! 그리고 이미 그것을 주셨다!
살다 보면 괴롭고 고통스러운 일이 생기기 마련이며, 도저히 헤어나올 길이 없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다. 그럴 때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께 하셨던 마지막 말씀을 떠올려보자.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루카 1,37)
그렇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 우리 눈에 살 길이 막막하고 미래가 암울해 보이지만, 하느님께서는 분명 해결책을 갖고 계신다. 그리고 우리에게 필요한 그 일을 이미 이루고 계신다. 다만 시간이 걸릴 뿐, 반드시 이루어내신다. 그렇기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시간 안에서 견딜 수 있는 인내심이며, 주님의 계획을 헤아릴 수 있는 지혜일 것이다.
삶의 길에서 지치고 힘들 때, 혼자라고 느껴질 때, 스스로에게 말해보자. “나는 죄보다 소중하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
[한민택 신부의 금쪽같은 내 신앙] (100) 희망을 찾는 법
죽은 이가 산 자에게 남긴 유산
2025년 희년 ‘희망의 순례자들, 희망을 찾아 떠난 순례길에서 우리는 과연 어디쯤 와 있나? 사람들은 구체적으로 묻는다. 위기의 시대에 희망을 어디서, 어떻게 찾아야 하는가?
이에 대해 신앙이 알려주는 답은 무엇보다 죽은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것, 그들이 살았던 삶과 신앙을 회상하며 그들이 간직하려 했던 희망이 어떤 것이었는지 찾는 것이다.
한강 작가는 노벨문학상 수상 강연에서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비롯한 굴곡진 한국사에서 희생된 이들이 오늘의 대한민국을 구하고 있음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말이었다. 믿는 우리는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죽은 모든 이는 우리를 ‘희망’이라는 근본적인 물음 앞에 서게 함으로써 오늘을 새롭게 살도록 한다고.
오늘은 어머니께서 하느님 품으로 돌아가신 지 3년째 되는 날이다. 모친께서는 2017년 췌장암 판정을 받으시고 수술 후 건강을 회복하시다 암이 재발되어 2년여의 항암치료 끝에 2022년 예수 승천 대축일에 하느님 품으로 돌아가셨다. “딱 5년만 더 살았으면 좋겠어”라고 하시더니, 정말로 5년 후 돌아가셨다. 필자는 농담 삼아 말한다. “우리 어머니는 아무 날에나 안 돌아가셔요. 예수님과 함께 하늘에 오르시려고 그 날을 선택하신 것 같아요.”
“골롬바야, 나는 좀 억울하다, 억울해.” 한 지인에게서 전해 들은 어머니의 이 말씀에는 삶에 대한 강한 애착이 담겨 있다. 병고로 인한 괴로움 중에 이런 말씀도 하셨다. “신부님, 야속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엄마는 빨리 가고 싶어. 하느님께서 빨리 데려가 주셨으면 좋겠어.” 그러시다가도 “아직까지 살려놓으신 걸 보면 무슨 뜻이 있으신가 봐”라고도 하셨다. 병고로 인해 어머니의 희망은 시련을 겪었지만, 그로 인해 어머니의 믿음과 희망이 더 단단해지는 것을 느꼈다.
필자의 권유로 어머니는 수술 후 일기를 쓰기 시작하셨다. 어머니 선종 후 장롱 서랍 속에 고이 간직하신 일기장 더미를 발견하고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일기장에는 수술 후부터 돌아가시기 얼마 전까지 어머니께서 사셨던 삶의 이야기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병으로 인한 괴로움과 두려움도 있었지만, 대부분 소소한 일상을 찬란히 살아가며 바치는 기도였다.
“잠은 모자랐지만 그 시간이면 일어나는 습관으로 나 자신이 괴롭다. 정리를 하고 빨래를 개고 나간다. 그래도 식사하고 원안리 밭을 다녀와 쌍봉산을 가는 데 좀 힘이 든다. 둘레길을 돌며 나무 사이사이 아름다움 어쩌면 하느님께서는 우주 만물을 그렇게도 철마다 옷을 갈아입히며 창조하셨는가? 그래서 우리 눈에 띄게 하시고. 감탄도 나온다. 그래서 앞에 누가 있든지 없든지 노래가 나온다.”
어머니와 함께했던 마지막 시간들과 어머니께서 남기신 마지막 말씀들은 내가 교회로부터 받은 희망이 어떤 것인지 묻게 하였다. 죽음을 목전에 둔 상황에서도 우리는 희망할 수 있는가? 희망은 산 사람들만의 것은 아닌가? 곧 죽을 사람에게 희망이란 과연 어떤 것인가?
이 질문들은 죽은 사람이 살아있는 이에게 남겨준 보석과도 같이 소중한 유산이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으며 우리는 아직 발견하지 못한 희망, 돌아가신 분들이 그토록 애타게 바랐고, 찾았던 희망이 무엇인지 헤아려보게 된다. 그리고 발견한다. 바로 지금 이 순간이 그들이 그토록 살고자 희망했던 내일이었음을 말이다.
이에 필자가 어머니에게 배운 교훈을 나누고자 한다. “삶이 얼마나 찬란한 것인지 알고, 지금 바로 그 삶을 찬란하게 살아라.”
[한민택 신부의 금쪽같은 내 신앙] (90) 좌(左)도 우(右)도 아닌 하느님 나라
대립 · 분열 대신 화해 · 대화로 이루는 평화
악마가 광야에서 예수님께 행한 세 번째 유혹은 세상의 모든 나라와 영광에 관한 것이었다. 예수님께서 답하신다. “사탄아, 물러가라.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마태 4,10)
한 지인이 현 시국에 대해 걱정하면서 탄핵 정국이 어떻게 될 것인지 물으셨다. 옆에 있던 한 동료 사제가 답했다. “하느님께서 바라시고 계획하시는 대로 다 잘될 거라 확신합니다.” 참으로 지혜로운 답변이었다.
현재 한국 사회는 극도의 분열과 갈등으로 갈라져 있고, 이는 고스란히 교회 안에도 자리하고 있다. 한편의 신자는 교회가 더 적극적으로 정치적·사회적 사안에 개입하고 목소리를 높여야 한다고 하고, 다른 한편의 신자는 시국선언을 하는 사제단을 보며 교회를 떠날 결심을 하기도 한다. 지금 시국의 전개를 보고 교회는, 그리고 신자 개개인은 어떤 입장을 가져야 할까?
교회는 어떤 정당의 입장과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다. 공공연히 어느 정당을 추종한다고 말하지도 않는다. 교회가 추구하는 것은 하느님 나라이기 때문이다. 하느님 나라라는 기준 앞에서 교회는 지상의 정치적·사회적 사안에 대해 입장을 표명하는 것이다.
신앙인은 어떤 정치적 입장을 기준에 두고 그에 따라 신앙을 선택하는 것이 아닌, 신앙의 눈으로 세상에 하느님 나라가 실현되기를 희망하며 복음을 위해 투신하는 사람이다. 만약 전자에 속한다면, 자신의 신앙에 대해 진지하게 되물을 필요가 있다.
이런 이야기가 있다. 가톨릭과 개신교 신자들이 축구시합을 하는데, 가톨릭 쪽에서 골을 넣으니 관중석에서 예수님께서 환호하신다. 이어서 개신교가 골을 넣으니 예수님께서 또 환호하신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어떤 관중이 “당신은 누구 편이요?”하고 물으니 예수님께서 “둘 다입니다”라고 답하셨다. 그랬더니 그 관중이 하는 말. “흥, 무신론자로군!”예수님께서는 열두 사도단 안에 오늘날 소위 극좌와 극우에 해당하는 사람을 모두 뽑으셨다. 세리도 있었고, 정치적 혁명을 꿈꾸던 이도 있었다. 그들이 한데 어우러져 공동체를 이루며 살도록 배려하셨다. 진정한 평화는 내가 싫어하는 사람들을 제외한 채 나와 뜻을 같이 하는 나머지 사람들과만 이루는 것이 아니다. 나와 뜻이 다르고 생각이 다르다고 하여도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서로를 인정하고 존중하며 함께 살아갈 때 진정한 평화가 가능하다.
지금 우리 사회의 가장 큰 적은 대화나 화해를 거부하고 대립과 분열을 선동하며 서로를 헐뜯고 싸우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흐름에 편승하기보다 화합과 일치를 외치며 그러한 화합과 일치의 삶을 교회 공동체 안에서 몸소 살아야 할 것이다.
탄핵심판 선고 결과가 나의 뜻에 반대된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뜻을 잠시 접어두고 하느님 뜻이 어떤 것인지 헤아리며 하느님 나라 실현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진정한 신앙인의 자세이다. 정의는 분명 이루어진다. 평화도 분명 실현될 것이다. 모두가 다 하느님의 크신 계획 안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거기까지 가기 위해 마주치는 시련은 마땅히 거쳐야 할 산고의 시간이다.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회개란 그동안의 갈등과 분열, 미움과 증오의 관계를 청산하고, 우리 모두 부족하고 연약한 사람임을 고백하며 화해와 일치의 길로 나아가기 위해 마음을 모아 기도하는 것이다.
우리 사회가 여전히 희망을 가질 수 있는 이유는 평화의 장인(匠人)들이 있기 때문이다. 바로 우리 신앙인이 갈등과 분열을 넘어 화해와 일치를 이루는 평화의 장인이 되어야 한다.
[영성의 샘] 온전한 봉헌
본당에 오랜만에 부임하여 사목 생활을 하며 좀 더 깊이 예수님을 발견하고, 안전하고도 티 없는 길이 무엇인지 고민한 적이 있었다. 그런 가운데 레지오 훈화를 준비하면서 “레지오 마리애의 정신은 성모 마리아의 정신이다.”(‘레지오 교본’ 제3장)라는 대목을 접하며 ‘왜 성모님의 군단에게 꼭 성모 마리아의 정신이어야 하는가?’라는 물음이 강력하게 다가왔다. 그러면서 성모 마리아의 ‘깊은 겸손’, ‘온전한 순명’, ‘천사 같은 부드러움’, ‘끊임없는 기도’ 등의 성덕이 어디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일까 하는 생각에 머물렀다.
그때 문득 나의 마음속에서는 단순한 봉헌이 아니라 ‘온전한 봉헌’이라는 마리아의 삶이 그려졌다. 사실 교회 안에서 봉헌의 근본적인 목적은 무엇인가? 그것은 언제나 ‘하느님께 대한 흠숭’이다. 그분을 마음 깊이 받아들이며 그분께 모든 것을 봉헌할 수 있는 구체적인 믿음 말이다. 그래서 나약한 인간은 봉헌의 삶을 통해 하느님의 최상의 이끄심을 인정하고, 하느님께 은혜를 청하며 감사를 드린다.
첫째로, 성모 마리아의 온전한 봉헌의 삶은 하느님의 계획 속에서 시작되었다. 늙은 요아킴과 안나는 가장 예쁜 나이의 귀여운 딸을 봉헌해야 했다. 교회는 바로 이날을 마리아가 주님께 봉헌된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로 지낸다. 이렇게 마리아는 태어나면서부터 하느님의 손길에 의해 봉헌되도록 맡겨졌다. 자녀를 하느님께 봉헌하는 이러한 유대인들의 전통은 자녀들을 인간의 소유가 아닌 하느님의 것으로 돌려드림으로써 주님의 도구로 사용되도록 구원 계획에 맡겨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은 처음에는 인간인 부모에 의해서 태어나지만 그 이후에는 주님의 손길이 거두어 주신다.
둘째로, 성모 마리아 자신의 봉헌도 마찬가지이다. 성경에서 성모님의 자기 봉헌이 가장 잘 드러나는 부분은 어디일까? 그 대목은 단연코 ‘예수님의 탄생 예고(루카 1,26-33)’ 장면이다. 인간적으로 보아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상황 속에서 하느님의 구원 계획 앞에 온전히 자기 자신을 봉헌하는 마리아의 모습은 참으로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신앙인의 모범이라고 할 수 있다.
마리아의 삶은 가브리엘 천사를 통해 하느님의 뜻이 전해졌을 때, 말씀하신 그대로 이루어지리라며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온전한 순종의 봉헌이었고, 십자가 위에서 심장이 찔릴 아들을 성전에 봉헌하실 때 당신 심장도 이미 꿰찔리시며 아들을 인류를 위해 내어주신 봉헌이었다. 어머니 마리아는 당신 아들을 온전히 자신과 함께 인간에게 내어주신 것이다.
셋째로, 마리아의 온전한 봉헌에서 아름다운 모습의 본질이 나온다. 화가들이 그리는 마리아의 모습은 누구보다도 젊고 아름답고 빛나는 성모님의 모습이다. 18세기 이탈리아 나폴리의 화가 사르넬리의 작품으로 몬테까시노 분도 수도원에 소장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모님’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아름다움의 기준은 사람마다 모두 다르겠지만 보통 그렇게 표현한다. 다만 성모님의 아름다움은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에서 유래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앞에 온전히 봉헌된 모습, 아들 예수님의 말과 행동을 마음에 깊이 품고 묵묵히 따르는 모습, 아드님의 죽음 앞에서도 하느님의 구원이 이루어짐을 믿고 바라보는 모습에서 드러나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 눈에 보이는 성모님의 모습은 외적인 모습이 아니라 하느님을 향한 그분의 믿음과 하느님 앞에 온전히 봉헌된 인간의 모습을 표현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온전한 봉헌’의 삶은 하느님의 부르심과 은총에 의해 신성한 것이 돼
이처럼 모든 신심 가운데에서 우리를 예수님께 가장 잘 봉헌하게 하고, 친밀하게 일치시키는 신심은 바로 마리아의 온전한 봉헌의 신심이다. 그래서 마리아에게 봉헌하면 할수록 예수 그리스도께도 봉헌하는 것이 된다. 참으로 모든 피조물 가운데 마리아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와 가장 친밀하게 일치하셨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완덕은 마리아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고, 그분과 일치하고, 그분께 온전히 삶을 봉헌하는 데에 있다.
저 자신도 사제 생활을 처음 시작하며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의 상본과 함께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1요한 4,16)”라는 말씀을 성구로 삼아 항상 봉헌의 삶을 살고자 약속했었다. 그러나 십자가 안에서 온전히 자신을 바치는 예수님을 닮고자 하지만 바치기는커녕 오히려 나 혼자 살아남기 위해 더 몸부림친다. 그래서인지 요즘 더욱더 마리아처럼 나 자신을 하느님께 온전히 봉헌하는지 깊이 되돌아보며 신앙의 철이 들어간다. 그리고 나의 봉헌 생활이 오로지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임을 분명하게 기억하며 살아가는지도 성찰한다.
그렇다. 우리의 ‘온전한 봉헌’의 삶은 하느님의 부르심과 은총에 의하여 신성한 것이 된다. 이것이 바로 성모님의 군단이 ‘마리아의 정신’으로 살아가야 하는 근거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