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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 안식을 고대하십시오
23: 10-13
10. 너는 육년 동안은 너의 땅에 파종하여 그 소산을 거두고
11. 제 칠년에는 갈지 말고 묵여 두어서 네 백성의 가난한 자로 먹게 하라 그 남은 것은 들짐승이 먹으리라 너의 포도원과 감람원도 그리 할찌니라
12. 너는 육일 동안에 네 일을 하고 제 칠일에는 쉬라 네 소와 나귀가 쉴 것이며 네 계집 종의 자식과 나그네가 숨을 돌리리라
13. 내가 네게 이른 모든 일을 삼가 지키고 다른 신들의 이름은 부르지도 말며 네 입에서 들리게도 말찌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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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한 달 동안 그리고 지난주일 성령 강림절에 대한 절기 설교를 하느라 중단했던 출애굽기 강해 설교를 계속하려고 합니다.
일본에서는 지난 5년 동안에 135명의 시장이 과로로 숨졌다고 합니다. 1년에 27명의 시장이 과로사를 한 것입니다. 일본 전국에 2천명의 시장이 있기 때문에 약 7%의 시장이 5년 동안에 격무에 시달려 죽은 꼴이라고 합니다. 일본의 자치단체장들이 해마다 이처럼 20여 명씩 과로로 숨져간다는 사실은 그들이 그만큼 바쁘게 뛰고 있다는 얘기가 됩니다. 시장만 과로사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일본에서는 해마다 4천명 이상의 근로자들이 과로로 숨지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도 과로로 사망하는 사람이 점차 늘어나고 있는 실정입니다.
고등어는 생선 가게 생선들 중에서 빠르기가 일등이라고 합니다. 헤엄치는 고등어는 바다의 총알과 같다는 것입니다. 매끈하고 탄탄한 몸매도 알고 보면 이렇게 빠른 수영으로 단련된 결과라고 합니다. 하지만 고등어는 불쌍한 물고기라고 합니다. 쉴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 탄탄한 몸매와 많은 근육은 산소를 더 많이 필요로 한다고 합니다. 그 때문에 쉬지 않고 헤엄치면서 신선한 물이 계속 아가미에 흐르게 해야만 합니다. 가만히 있으면 아가미에 산소가 부족해서 숨을 쉴 수가 없습니다. 고등어는 헤엄을 멈추는 순간 숨을 헐떡거리며 죽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살기 위해서는 멈출 수 없는, 쉼이 없는 불쌍한 물고기가 고등어라고 합니다.
인간들 중에는 고등어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빨리 다니기 위해 차를 샀지만 이제는 차를 유지하기 위해 빨리 다녀야만 합니다. 능력 있게 보이기 위해 집을 샀는데 이제는 집값을 갚기 위해 능력 있어야만 합니다. 더 좋아지기 위해 이것저것 다 사다 놓고 이일저일 다 벌여 놓지만, 사 놓은 것과 벌여놓은 것 다 유지하기 위해 더 힘들게 살아야만 하는 악순환 속에서 허덕입니다. 잘 살기 위해 이것저것 마련하느라 허둥대는 모습이 고등어와 같습니다. 잘 살기를 멈추면 허덕이다 죽을 수밖에 없는 모습이 고등어와 다를 바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들 대다수는 정신없이 일주일을 보냅니다. 현대인은 늘 바쁘고 항상 피곤합니다. 그래서 몇 달 동안 푹 쉬었으면 하는 생각도 해보지만, 치열한 생존경쟁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마음대로 쉴 수도 없습니다.
이렇게 고달픈 인생을 가리켜 성경은 말씀하기를 “우리의 년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수고와 슬픔뿐인 인생, 불안과 공포 긴장과 고통으로 가득 차 있는 인생, 피곤한 인생들에게, 안식을 주시기를 매우 원하시는 분이 바로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본문 12절에 “너는 육 일 동안에 네 일을 하고 제 칠일에는 쉬라. 네 소와 나귀가 쉴 것이며, 네 계집종의 자식과 나그네가 숨을 돌리리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십계명 중 네 번째 계명인 안식일 규례를 다시 한 번 강조하신 것으로, 이 규례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가르쳐 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토록 안식일 규정을 강조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사람은 자신의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산다는 것을 깨닫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사실 세상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다른 사람들이 일주일 내내 일을 할 때 하루를 쉰다면 그만큼 소득이 적어지고 뒤쳐진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인간적인 계산 방법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역사는 이런 인간적인 계산이 하나님 앞에서는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거 해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서 안식일을 잘 지켰을 때는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주변 민족들보다 훨씬 풍요한 축복의 삶을 누렸습니다.
그런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에 의해 멸망당한 이유 중 하나가 무엇인 줄 아십니까? 바로 안식일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의 삶은 자신의 힘과 노력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께 달려 있음을 증거 해주는 것입니다. 오늘날과 같은 숨 가쁜 경쟁 시대에 남들이 일주일 내내 일할 때 하루를 쉰다는 게 남에게 뒤쳐지지나 않을까 하는 불안을 가져다 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의 생각이지 성도들의 생각이어서는 안 됩니다. 성도들은 오히려 주일을 쉬지 않고 일주일 내내 일함으로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남들보다 뒤쳐지지 않을까 하는 염려를 해야 합니다. 인간 삶의 힘과 축복의 원천은 바로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리고 안식일은 그 삶의 힘과 축복을 받는 날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일이 있어도 주일을 거룩하게 지켜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주일에 일한 사람들보다 훨씬 크고 넘치는 복을 베풀어 주실 줄 믿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육 일 동안 일하고 제 칠일에는 쉬라는 안식일 규례를 주신 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로 산다는 것을 깨닫게 하실 뿐만 아니라, 휴식을 통해 지친 육체를 회복시키기 위한 목적도 있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육체 건강에도 지대한 관심을 갖고 계심을 보여 줍니다. 따라서 우리는 영혼뿐 아니라 육체의 건강을 지키는데도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특별히 성도가 육체의 건강을 지켜야 하는 이유는, 우리의 몸은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시는 거룩한 성전이며,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이룰 도구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몸은 우리 개인의 것이기 이전에, 하나님의 전으로서 하나님의 소유이며 하나님의 뜻을 이룰 도구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자신의 몸이라고 해서 자신의 뜻대로 함부로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성도는 자신의 몸을 성령이 거하시고 하나님께서 사용하시기에 부족함이 없도록 잘 보존해야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성도가 술과 담배를 멀리 해야 할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성도가 술과 담배를 멀리하는 것이 마땅한 이유는 술과 담배가 성도의 육체의 건강을 해치고, 나아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명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게 하는 신앙상의 중대한 문제가 되기 때문입니다.
성도의 영혼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듯이, 우리의 육체 또한 하나님께로부터 왔으며, 육체가 건강할 때 영적인 일에도 매진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과 육체가 모두 건강하고 온전하기를 바라는 성도라면 주일을 온전히 잘 지키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따라서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 가운데 하나인 것입니다. 육신을 가진 우리 인간의 심신은 피곤해지기 쉽기 때문에, 안식과 회복이 필요함을 창조주 하나님께서 너무도 잘 아시고, 이레 중 하루를 쉬게 한 것입니다.
‘탈매지’는 말하기를 “우리들의 육체는 칠일 괘종시계와 같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태엽을 감아 주는 것과 같은 일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만일 괘종시계의 태엽을 감아 주지 않을 경우 그 시계는 곧 멈추고 말 것입니다. 인간의 육체도 괘종시계와 마찬가지여서, 누구든지 계속해서 안식을 범하게 될 때 그는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건강을 유지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안식일 다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어진 명령은 안식년에 대한 규례입니다.
본문 10-11절에 “너는 육 년 동안은 너의 땅에 파종하여 그 소산을 거두고 제 칠년에는 갈지 말고 묵여두어서 네 백성의 가난한 자로 먹게 하라. 그 남은 것은 들짐승이 먹으리라. 너의 포도원과 감람원도 그리하라.”고 하였습니다.
안식의 제일 첫 번째 대상은 사람입니다.
그 다음이 사람에게 속한 만물입니다.
사람이 복을 받으며 환경도 복을 받게 됩니다. 사람이 쉬니까 짐승도 쉬게 됩니다. 그러나 사람이 저주를 받으면 땅도 아울러 저주를 받게 됩니다.
창 3:17에 보면 “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베푸시는 안식의 복을 사람에게 속한 땅도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의 배려가 안식년 제도 속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믿지 않고 탐욕의 노예가 되니까 사람과 땅 모두가 안식을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여 토지의 안식년 제도를 실천할 때 이것이 토양에 아주 좋은 양약이 될 수 있습니다. 농부들은 토양을 윤택하게 만들기 위해 여러 가지 퇴비를 뿌리고 객토를 하기도 합니다.
그래야 병충해도 방지하면서 많은 소출을 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노력도 병행하여야 하지만 경작지의 안식년을 지킨다면 더 좋은 경작지 더 풍성한 수확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안식년 다음에 주신 제도가 있었는데 그것은 희년이라는 것입니다.
레 25:10에 “제 오십년을 거룩하게 하여 전국 거민에게 자유를 공포하라. 이 해는 너희에게 희년이니 너희는 각각 그 기업으로 돌아가며 각각 그 가족에게로 돌아갈찌며”라고 하였습니다.
희년이란 안식년이 7번 지난 후 다음해로서 50년마다 돌아오는 해를 가리킵니다. 희년에는 전국에서 나팔을 불어 희년을 알렸는데 희년이라는 말은 나팔을 의미하는 '요벨'에서 온 것입니다. 희년의 기점은 칠월 십일이며 이는 이스라엘민족의 명절에 해당하는 속죄일이었습니다. 속죄일에 나팔을 크게 불면 종으로 묶여있던 자들이 자유를 얻고 각기 자기가족과 기업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이날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명절이 주는 즐거움과 함께 자유를 만끽하는 기쁨이 날이었습니다.
이렇듯 희년은 자유가 공포되는 해였습니다.
“각각 그 기업과 각각 그 가족에게로”로 돌아간다는 것은 바로 희년에 일어나는 노예해방과 토지회복을 가리킵니다. 이렇듯 희년에는 가난 때문에 고달픈 노예 생활을 했던 사람들이 해방되어 가족에게로 돌아갈 수 있었으니 그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그래서 희년은 자유의 해였으며 기쁨의 해였던 것입니다. 희년은 50년에 한번 돌아오는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마련해 주신 최상 최고의 해였습니다. 정상적인 수를 누리는 사람이라면 평생 동안 한 번이나 두 번 참여케 되는 축제의 해였습니다.
이렇듯 안식일, 안식년, 희년에 대한 교훈을 요약해 보면, 우리는 중대한 하나의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데,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에게 안식을 베풀어주시기를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죄가 가져온 비극이 무엇입니까? 한마디로 말하면 하나님의 안식을 상실했다는 것입니다. 땅은 끊임없이 가시와 엉겅퀴를 내어 우리 인간들을 찌릅니다. 근심이 찌르고, 병이 찌르고, 상처가 찌르고, 스트레스가 찌르고, 모든 원수가 우리를 찌릅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죄요, 불행이요, 이것이 심판이요, 이것이 바로 저주요, 이것이 바로 인간의 비극이라는 것입니다.
“인생은 어부가 되어 시간의 강물에서 낚시질 하지만 인간들이 그곳에서 낚는 것은 오직 한줌의 연기뿐...”이라고 영국의 방랑시인 데이비스는 탄식하였습니다. 인생이라는 어부는 끊임없이 흐르는 강물이라는 시간 속에서 행복의 고기를 낚아 보려고 했지만 낚는 것은 죽음뿐이었다는 절망적인 말입니다.
인간이 죄로 말미암아 잃어버린 안식을 회복시켜주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그 아들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주셨습니다.
그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할렐루야!
주님께서는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를 너무도 잘 아셨습니다. 인생은 한 마디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인생들입니다.
솔로몬은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와 마음에 애쓰는 것으로 소득이 무엇이랴. 일평생에 근심하며 수고하는 것이 슬픔뿐이라. 그 마음이 밤에도 쉬지 못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고 탄식을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쉬도록 허락하신 밤조차 인간은 얼마나 많이 번민하고 고통하며 지새우고 있습니까! 이러한 인생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안식입니다. 누가 우리의 이 필요를 채워줄 수 있습니까? 우리의 잃어버린 안식을 회복시켜주실 수 있는 분은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주님은 우리에게 쉼을 주시기 위해서 오신 분입니다. 우리가 그 분 앞에 오는 순간, 그분을 삶의 주인으로 모시는 순간 우리는 죄의 용서를 경험합니다. 그리고 우리 안에서 평안이 회복됩니다. 그는 진실로 안식의 주인이 되시는 분이십니다. 안식을 잃어버렸습니까? 다시 그 분 앞에 오십시오. 그리고 그 분을 내 삶의 주인으로 인정하십시오. 그분의 은혜 안에 거하십시오. 그 풍성하신 은혜 그리고 그의 그 넓은 평안 안에 거해 보십시오. 내 안에서 그 안식이 회복되는 놀라운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안식과 쉼은 다만 현세적인 목표만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 사모해야 할 안식은 영원한 쉼입니다. 성경은 이것을 우리에게 확실하게 말씀해 줍니다. 계 14:13에 “자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가라사대 그러하다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라고 하였고, 히 4:10에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 일을 쉬심과 같이 자기 일을 쉬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쉼은 이 세상적 삶의 쉼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즉 숨쉼의 그침입니다. 이 그침을 통하여 하나님은 이 세상의 질고와 수고와 번뇌로부터 쉬도록 하십니다. 이것은 영원한 해방이요 자유입니다. 이 쉼은 영원한 멈춤이나 중단이 아니라 영원한 안식의 성취입니다. 따라서 이 안식은 곧 영생이요, 천국의 세계입니다. 성도의 영원한 안식이야말로 인간을 향하신 하나님의 총체적 은총의 복음인 것입니다.
따라서 안식일, 안식년, 희년은 천국의 영원한 안식을 상징하고 예표하기 위하여 인간에게 주어졌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안식일, 안식년, 희년을 통해서 우리 인간들에게 가장 주시기를 원했던 것이 바로 영원한 하늘 안식이었습니다. 이것을 계시의 점진성이라고 합니다.
옛날 미국 남부 지방의 노예들은 이런 노래를 불렀습니다.
♪“언젠가는 곧 모든 날들이 주일이 되려니♪
날마다 채찍을 얻어맞으며, 피땀 흘려 일하던 불쌍한 노예들에게 있어서, 주일은 무거운 짐을 벗고 매를 맞지 않아도 되는 편히 쉴 수 있는 날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불쌍한 노예들은 모든 날들이 주일과 같은 천국 생활을 고대하며 살았습니다.
어떤 사람이 인생을 '한통의 눈물편지'로 표현했습니다.
어찌 보면 인생은 눈물 바가지 입니다. 질병, 실패, 이별, 죽음...등등으로 흘리는 인간의 눈물을 다 합치면 태평양만큼 많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눈물은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는 날 끝나게 될 것입니다. 괴롬과 죄악이 관영한 세상에서 우리의 일생이 다 할 때, 우리는 위에 있는 하나님의 집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안식일, 안식년, 희년과 같은 안식의 제도야말로 하나님께서 피조물에게 주시는 최고의 선물입니다.
애 3:33에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며 근심하게 하심이 하나님의 본심이 아니시로다.”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루하루의 삶이 힘들고 고달프시지요? 안식일, 안식년, 희년을 통해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영원 안식을 고대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모두 영원한 안식을 세세무궁토록 누리며 살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