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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1-13
요단을 건너라.
여러분은 국경을 건너본 적이 있습니까?
두 나라 사이를 경계짓는 국경을 넘어 다른 나라로 간다는 것은 항상 설레이는 일이며 또한 긴장되는 일입니다. 이스라엘에 가고 오는 것이 특히 그렇습니다. 이스라엘이 주변 아랍국가들과 사이가 좋을 때는 그래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사이가 나쁠 때는 국경을 통과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제가 처음 이스라엘에 간 것은 1991년이었습니다. 얼마나 기대에 차고 꿈에 부풀었는지. 네 식구가 며칠동안 잠을 자지 못했습니다. 그때는 이스라엘에 직항로가 없어 카이로를 경유해서 텔아비브로 들어갈 때인데 바로 얼마전에 걸프전이 있었습니다.
텔아비브 공항에 내리자 마자 분위기가 심상치 않습니다. 공항에 이스라엘 경찰이 쫙 깔려 있습니다. 그들은 눈을 번뜩거리며 한 사람 한 사람 검문을 시작합니다. 왜 이스라엘에 왔습니까? 왜 네 식구가 같이 왔습니까? 어느 학교에서 공부합니까? 입학허가서 있습니까? 왜 유럽을 통해 오지 않고 카이로에서 왔습니까? 카이로에서 아랍사람 만난 적 있습니까? 이스라엘에 아는 사람 있습니까? 누구입니까? 무엇합니까? 얼마나 꼬치꼬치 캐묻는지 몇 시간을 시달렸습니다. 여행용 큰 가방 네 개를 온통 뒤집어 놔서 다시 싸야 했습니다. 공항에서 몇시간 실갱이하다가 정신이 번뜩 들었습니다. 이스라엘은 환상의 나라가 아니라 현실의 나라였습니다. 그 나라에서 몇 년을 살 생각을 하니 앞이 캄캄했습니다.
그러나 어떻습니까? 그렇다고 돌아가야 합니까?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래도 통과해야 합니다. 국경은 가는 길을 막는 곳이 아니라 통과하는 곳입니다. 통과해야 새로운 세계가 있습니다. 요단강앞에 선 이스라엘 백성들의 심정이 그랬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지금 그들 앞에 넘실거리는 요단강을 보고 있습니다. 요단강을 보는 그들의 감회는 말로는 표현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40년을 기다려 왔습니다. 40년이 무엇입니까? 애굽에서 종살이한 때부터 계산하면 400년이 넘었습니다. 그 기나긴 세월, 남의 나라에서 노예생활하던 생각을 하면 끔찍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천신만고 사선을 넘어 여기까지 왔는 데 이제 마지막 관문이 남아 있습니다. 요단강입니다. 요단강만 건너면 가나안땅입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입니다. 그 땅을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요단강을 건너야 합니다. 요단강은 예나 지금이나 이스라엘의 경계였습니다. 헬몬산에서(그림 1) 흐르는 맑은 물이(그림 2), 갈릴리 호수로 흐릅니다(그림 3). 그러면 그 물이 다시 남쪽 사해, 아라바 계곡까지 흘러가면서 요단강을 이룹니다(그림 4). 직선거리로는 130Km이지만 실제 거리는 330km에 해당하는 긴 강입니다.
이 강의 지리적 특징은 이스라엘을 동서로 가른다는 것입니다. 동쪽은 지금의 요르단입니다. 서쪽은 이스라엘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만, 과거에 이스라엘 땅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이 강을 건너야 했습니다. 최초로 이 강을 건넌 사람은 아브라함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조카 롯과 함께 이 강을 건넜습니다. 아브라함이 이 강을 건너자 이 강은 단순한 지리적 경계에서 영적 경계로 바뀌었습니다. 이 강을 건너기 전 아브라함은 강 저편에 사는 아모리 사람이었습니다. 강을 건너자 아브라함은 강 이편에 사는 히브리 사람이 되었습니다. 강 저편은 우상을 섬기는 나라요, 강 이편은 건하나님을 섬기는 나라였습니다. 단순한 지리적 경계였던 강이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이방과 선민, 우상과 하나님, 세상과 천국을 가르는 영적인 강이 되었습니다. 400년 후, 또 다른 사람들이 이 강앞에 서 있습니다.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그들에게도 이 강은 애굽에서 떠나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강입니다. 노예의 삶을 청산하고 하나님 자녀의 삶을 시작하는 강입니다. 하나님없는 애굽에서 호화롭게 사느니 하나님이 다스리는 가나안에서 고난받으며 살기를 선택하는 강입니다. 운명의 강이요 사는 강이요 반드시 건너야 할 강이었습니다.
우리도 자주 이 강 앞에 섭니다.
우리가 선 요단강은 지리적 강은 아닙니다.
매일 선택하고 결단해야 하는 실존의 강입니다. 어느날 갑자기 몸이 아픕니다. 병원에 가 보았더니 정밀검사를 받으라고 합니다. 갑자기 생명의 위협을 느끼며 삶과 죽음사이에서 고뇌합니다. 삶과 죽음의 강 앞에 선 것입니다. 가정이 언제부터인가 병들었습니다. 집에 들어가면 대화가 없고 썰렁합니다. 같이 밥먹고 살지만 부부간에 사랑이 없습니다. 그냥 살 것인가? 그만 둘 것인가? 위기의 강앞에 섭니다. 잘 나가던 사업이 경제 쇼크로 휘청거립니다. 경제 수지가 악화되고 기름값이 올라가고 사업이 부도직전입니다. 그대로 두면 망합니다. 사업파탄의 강앞에 섭니다. 그렇게 믿었던 대학 떨어지고 그렇게 친하던 친구 떨어지고 그렇게 잘되던 기도줄 막히고 그렇게 은혜스럽던 찬송 끊기고 어느날 보니 요단강 앞에 서 있습니다. 인생을 산다는 것은 매일 요단강앞에 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이 강을 매일 믿음으로 건넌다는 것입니다. 안 건널 수도 없습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어떻게 해야 인생의 강, 영적인 강, 위기의 강을 건널 수 있습니까? 오늘 말씀은 이런 고민을 안고 있는 사람들에게 드리는 해답입니다.
말씀을 통해 힘을 얻고 넉넉히 요단강을 건너기 바랍니다.
요단강 건너는 첫 번째 단계는 준비의 단계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요단강앞에 섰을 때 하나님이 가장 먼저 요구하신 것은 마음의 준비였습니다.
1절을 보십시오. 수3:1, “여호수아가 아침에 일찍이 떠나 요단에 이르러서는 건너지 아니하고 거기 유숙하니라”.
이스라엘 백성은 아침 일찍 길을 떠나 요단강앞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요단강앞에 왔으면 건너야 하는 데 건너지 않습니다. 거기서 사흘간이나 더 머뭅니다.
2절을 첫 마디를 보세요. 수3:2, “사흘 후에”. 왜 이스라엘 백성은 행동을 취하지 않고 요단강 가에서 사흘간이나 시간을 보냈을까? 오래 머물수록 피곤하고 양식만 축냅니다. 수백 만이 사흘을 더 먹고 마시려면 엄청난 음식, 물이 필요합니다. 마음은 급하고 바쁩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 백성은 꼼짝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여러분, 급할 때 돌아가라는 말을 아십니까? 준비의 실패는 실패의 준비라는 말도 아십니까? 언제나 인생은 빨리 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잘 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비행기를 조종하는 한 남편이 비행중에 급하게 아내에게 전화했습니다. 아내가 깜짝 놀라 전화를 받았습니다. “여보, 웬일이예요. 비행중에”. 남편이 말했습니다. “당신에게 급하게 두 가지 소식을 전화했소. 하나는 좋은 소식이고 다른 하나는 나쁜 소식이요. 좋은 소식부터 전하겠소. 지금 우리 비행기는 너무 빨리 잘 가고 있소. 나쁜 소식이요. 우리 비행기는 지금 바다로 떨어지고 있소. bye”. 몇 초 후에 꽝하는 소리와 함께 비행기는 바다로 떨어졌습니다. 빨리 가는 것은 좋지만 바다를 향해 빨리 가면 죽는 수 밖에 없습니다.
이스라엘백성은 요단강에서 사흘동안 무엇을 했을까? 왜 하나님은 바쁜 사람들의 발목을 잡고 거기 있게 하셨는가? 준비 때문입니다. 마음의 준비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요단강을 건너기 전에 가나안은 하나님이 약속한 땅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기억하게 하셨습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앞에는 출렁거리는 요단강이 있습니다. 요단강이 큰 강은 아니지만 강은 강입니다.
지금 그 강이 일년중 가장 물이 많을 때입니다. 요단강의 수원지는 헬몬산입니다. 헬몬산은 겨우내 눈으로 덮혀 있다가 3월부터 날이 더워지면서 눈이 녹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5월, 보리 수확때쯤 물이 절정이 됩니다. 문제는 이스라엘 백성이 어떤 자세를 가지느냐입니다. 언제나 몸은 마음을 따라가고 마음은 믿음을 따라갑니다.
무엇을 믿느냐가 곧 행동을 결정합니다.
출렁거리는 강을 바라 보고 있는 한 이스라엘 백성은 강을 건널 수 없습니다. 강을 건너려면 강보다 멀리 바라보아야 합니다. 풍랑을 바라보는 한 풍랑을 이길 수 없습니다.
풍랑을 딛고 오시는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풍랑을 이깁니다. 우리가 자주 실수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앞에 놓인 장애물과 싸우려고 합니다. 우리앞에 놓은 경제와 싸우고 우리앞에 놓은 시련과 싸우려고 합니다. 그러나 싸워보면 안됩니다. 눈에 보이는 것과 싸웠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은 장애물과 먼저 싸워야 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은 두려움과 싸우고 눈에 보이지 않은 마음의 적과 먼저 싸워야 합니다. 단지 싸우기만 해서는 안됩니다. 바라 보아야 합니다. 현실보다 큰 미래를 바라보아야 현실을 이깁니다. 요단강보다 요단강 넘어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를 통해 약속하신 것을 기억하십니까?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나님은 땅 한 평도 없이 나그네로 출발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습니다.
출3:8, “내가 내려가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곡 가나안족속, 헷족속, 아모리족속, 브리스족속, 히위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데려가려 하노라”.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아직도 노예생활하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네게 주리라. 네가 너와 네 자손에게 이 땅을 주리라”.
이스라엘 백성이 요단강가에서 다시 한번 기억해야 했던 것은 이 약속입니다. 약속을 믿어야 약속이 이루어집니다. 약속을 붙잡아야 현실의 한계를 뛰어넘습니다. 약속을 붙잡아야 희망이 생깁니다. 언제나 우리를 이끄는 힘은 희망입니다. 요단강을 바라보면 절망입니다. 나를 바라보면 실망입니다. 환경을 바라보면 낙망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바라보면 희망입니다. 희망의 재고량이 많아야 고난을 이길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를 읽다가 거기 있는 많은 희망을 발견했습니다.
히6:18절, “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하지 못할 사실로 말미암아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난처를 찾은 우리에게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
“앞에 있는 소망”, 희망의 본질은 앞에 있는 것입니다.
“희망은 지나간 것에 감사하고 앞에 올 것을 긍정할 때 온다” 전 유엔 사무총장 함마슐드의 말입니다.
희망은 항상 우리 앞에 있습니다. 그래서 희망을 찾으려면 앞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뒤를 바라보면 절망입니다.
히7:19에 또 있습니다.
“율법은 아무것도 온전하게 못할지라. 이에 더 좋은 소망이 생기니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가느니라”.
희망은 하나님께 나아가게 하는 힘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절망이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 있는 희망이 문제입니다.
우리는 희망 때문에 하나님께 나아가고 하나님께 가면 희망을 얻습니다.
히10:23에 또 있습니다.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며 굳게 잡고”.
희망은 신실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붙드는 데서 나옵니다. 희망은 나나 환경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에게서 나옵니다. 희망의 원천이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습니까?
하나님이 아브라함, 야곱, 모세, 여호수아를 통해서 여러분에게 하신 약속을 굳게 붑잡습니까?
인생의 요단강을 건널 때 여러분의 힘에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의 약속으로 믿고 건너겠습니까?
어릴 때 시골에 비가 많이 오면 냇가에 다리를 놓습니다. 다리가 대개 나무로 되어 있기 때문에 흔들거리고 곧 무너질 것 같습니다. 다리 밑으로로는 시커먼 북정물이 흐릅니다. 한번 빠지면 살아 나올 수 없습니다. 한번은 동네 어른을 따라 가는 데 아슬 아슬합니다. 다리 위에서 다리 밑을 바라보니 도무지 건널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때 동네 어른이 소리쳤습니다. “밑을 보지 말고, 내 손 잡아”. 어른의 손을 잡고 건넜더니 무사히 건널 수 있었습니다. 어려운 때, 다리 밑을 바라보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손을 붙잡고 앞만 보고 가십시오. 요단강 푸른 물을 바라보지 마십시오. 요단을 넘어 가나안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바라보십시오. 안되는 현실을 바라보지 마십시오. 잘 되게 되어 있는 약속의 미래를 바라보십시오. 그것이 마음의 준비입니다.
마음의 준비를 시킨 하나님은 드디어 백성들에게 진군 명령을 내립니다.
3절입니다. 수3:3, “백성에게 명령하여 가로되 너희는 레위 사람 제사장들이 너희 하나님 여호아의 언약궤 메는 것을 보거든 너희가 있는 곳을 떠나 그 뒤를 따르라”.
하나님이 내린 명령은 제사장들이 언약궤를 메고 앞서가면 백성들은 그 뒤를 따르라는 것입니다. 절대 언약궤보다 앞서지 말고 그것을 따라가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명령했을까요? 언약궤는 모세가 시내산에서 만든 법궤입니다. 그 속에 세 가지가 있었습니다. 십계명 돌판, 아론의 싹난 지팡이, 그리고 만나 담은 항아리입니다. 이것들은 모두 하나님의 임재, 곧 하나님 자신을 상징했습니다, 십계명 돌판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아론의 싹난 지팡이는 하나님의 통치권입니다. 만나 담은 항아리는 하나님의 사랑의 공급입니다.
“언약궤를 따르라”.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신앙은 결국 순종이라는 말입니다. 신앙은 순종에서 시작해서 순종으로 끝납니다. 현대인들에게 순종은 결코 호감이 가는 말이 아닙니다. 순종이란 항복, 굴복, 양보, 복종등의 의미로 쓰인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순종하지 않으면 얻을 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전능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순종하지 않으면 한 발자국도 나갈 수 없습니다. 우리는 내일 일을 모르고 살기 때문입니다. 순종은 내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힘으로 살겠다는 것입니다. 내 주관, 내 철학, 내 상식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지시, 하나님 진리, 하나님 관점으로 살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보다 앞서지 않고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만 따라가겠다는 것입니다. “자, 나를 따르라. 나를 앞서 절대 가지 말라. 내가 사령관이다. 내가 작전을 짜고 내가 명령하고 내가 지시하겠다. 오직 나를 따르라”.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그렇습니다. 요단 앞에 선 사람들은 하나님보다 무엇도 앞세우지 않기로 결심해야 합니다.
하나님보다 어떤 판단도 주장도 앞세우지 말아야 합니다. 교회안에 제직회, 당회 다 필요합니다. 그러나 어떤 회의의 결정보다 하나님의 지시가 더 중요합니다.
모든 판단의 근거는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아니라
“하나님이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느냐?”입니다.
신앙생활하면서 조심해야 할 말투가 있습니다.
“내 생각으로는”, “내 상식으로는”, “내 판단으로는”, “내 경험으로는”, 교회에서는 이런 말을 조심해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하시기를”, “성경에 의하면”, “성령께서 감동하시기를”로 바꿔야 합니다.
교회에서는 누구나 자기의 생각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말을 절대화시키지 말아야 합니다. 교인들은 모두 주인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나 교회 주인은 아닙니다. 교인들은 교회 일에 참여해야 합니다. 그러나 일하기 위해 교회 나온 것은 아닙니다. 교회는 회의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회의보다 기도가 앞서야 합니다. 회의에서 나오는 소리보다 기도에서 나온 소리가 커야 합니다. 기도소리가 커서 망한 교회는 없지만 회의소리가 커서 망한 교회는 역사적으로 많습니다.
교회는 언제나 민주적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아닙니다. 민주주의는 더 많은 사람이 지지한 것이 옳다는 가치관입니다. 그러나 많다는 것과 옳다는 것은 항상 같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이 지지하기 때문에 옳다면 출애굽은 옳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 누구도 출애굽을 원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많아야 하기 때문에 옳다면 이스라엘은 절대 가나안에 들어가지 말았어야 합니다. 12정탐꾼중에 10명이 반대했기 때문입니다. 많기 때문에 옳다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은 것도 옳아야 합니다. 수많은 유대인이 예수를 죽이라고 소리쳤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순종입니다. 잘 따라가야 따라 잘 이끌 수 있습니다. 좋은 추종자가 되어야 좋은 리더가 됩니다. 장군이 되기 전에 먼저 사병이 되어야 합니다. 한국교회의 문제는 팔로우쉽보다 리더쉽을 먼저 가르쳤다는 것입니다. 서점마다 리더쉽으로 넘쳐나고 교회마다 리더쉽 강의로 충만합니다. 그런데 팔로우쉽은 안 가르칩니다. 잘 따라가지도 못한 사람에게 리더쉽을 가르치니까 얼치기 리더가 나옵니다. 리더가 되기 전에 추종자가 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앞장서기 전에 잘 따르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래서 염려되는 것이 잘못된 평신도 운동입니다. 평신도 운동은 본래 평신도도 만인제사장으로 목회자와 함께 하나님을 섬기는 자로 세움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한국교회 일부 평신도들이 목회자의 일을 대신하는 것이 평신도 운동이라고 오해하는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평신도가 평신도의 자리에 겸손히 서 있지 않고 마치 목회자가 된 것처럼 행세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한국교회 여러분, 저는 평신도도 하나님안에서 다 똑같은 제사장으로 목회자와 함께 존귀한 하나님의 자녀요 소중한 하나님의 일꾼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평신도의 자리에서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자리를 떠나지 마십시오. 하나님보다 앞서지 않을 뿐 아니라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보다 앞서지 마십시오. 제사장도 인간이지만 그가 하나님의 법궤를 메고 있는 한 그는 하나님을 대신하여 일합니다. 그를 힘들게 하지 마십시오. 그가 힘들어 법궤를 떨어뜨리면 하나님의 일은 그리치는 것입니다. 그와의 거리를 이천큐빗쯤 되게 하십시오. 잘 따르십시오. 잘 따르는 것은 굴복이 아니라 행복입니다. 항복해야 행복합니다. “나는 평생 하나님만 따라가리라. 나는 평생 하나님외에는 어떤 지시도 명령도 받지 아니하리라. 평생 하나님을 따르고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절대 순종하리라”. 이것이 요단강을 건너는 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오늘 말씀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
그것은 제사장의 역할입니다.
하나님은 제사장을 세워주셨지만 동시에 책임도 맡기셨습니다.
8절을 보십시오. 수3:8, “너는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요단 물가에 이르거든 요단에 들어서라”.
여러분은 제사장의 수고를 상상할 수 있겠습니까?
제사장들은 긴 시간 동안 결코 가볍지 않은 언약궤를 메고 앞서 가야만 했습니다. 뒤에 따라오는 백성들이 편하게 강을 건널 수 있도록 그들은 온 힘을 다해 언약궤를 메고 행진했습니다. 무엇보다 어려움은 제일 먼저 요단강에 들어가야만 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제사장들이 언약궤를 메고 요단강 앞에 섰을 때 요단강은 전혀 갈라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는 것을 아십니까?
홍해처럼 요단강은 꿈쩍않고 그 자리에 그냥 있었던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제사장은 요단에 들어서라”했을 때 여러분 같으면 들어갔겠습니까? 쉽지 않은 일입니다.
누가 강이 갈라진 다음에 못 들어가겠습니까?
누가 강물이 끊겨 양쪽에 물벽을 이루고 강이 마른 육지처럼 된 후에 건너지 못하겠습니까?
15절과 16절을 보십시오.
수3:15-16, “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이 물가에 잠기자 곧 위에서부터 흘러내리던 물이 그쳐서 사르단에 가까운 매우 멀리 있는 아담 성읍 변두리에 일어나 한 곳에 쌓이고 아라바의 바다 염해로 흘러가는 물은 온전히 끊어지매”.
그들은 강이 갈라진 후 건넌 것이 아니라 아직도 철렁 철렁 물이 흐르는 데 믿음으로 저벅 저벅 건넌 것입니다. 흐르던 물이 그치고 쌓이고 끊어졌습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으로 들어갈 때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10절을 보십시오. 수3:10, “살아계신 하나님이 너희 가운데 계시사”.
하나님이 믿음을 가진 제사장들을 통해 역사하셨습니다. 언약궤 자체가, 제사장이, 그들의 발이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이, 믿음이, 순종이 기적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문제는 누가 이 제사장이 될 것인가입니다.
누가 흐르는 요단강에 첫발을 디디는 제사장이 되겠습니까?
모든 사람이 자기 생에 기적이 나타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자기가 직접 기적의 주인공이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많치 않습니다.
요단강을 여는 사람을 따라갈 수는 있어도 자기가 요단강을 열려고는 하지 않습니다. 뒤에서 요단강에 첫발을 내딛는 사람이 잘못될 때 언제나 도망갈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은 약속의 땅의 주역이 될 수 없습니다.
길은 두 가지입니다.
길을 찾거나 만드는 것입니다.
있는 길을 찾는 것도 훌륭합니다.
그러나 길이 없다면 길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미국의 시인 에머슨의 말을 좋아합니다. “길이 이끄는 곳으로 가지 말고 길이 없는 곳에 흔적을 남겨라”. 또 거창고등학교 전영창교장의 말도 좋아합니다. “길이 있는 곳으로 가지 말고 길이 없는 곳으로 가라”.
역사는 길이 없는 곳으로 갔던 사람을 선구자라 부릅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선구자였습니다.
그는 한번도 가본적이 없는 약속의 땅을 향해 560킬로의 긴 모험의 길을 떠났습니다. 믿음은 모험입니다. 다 알고 가는 것이 아니라 믿고 가는 것입니다. 확실한 환경을 보고 가는 것이 아니라 확실한 하나님을 믿고 가는 것입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하나님만 우리 길을 아십니다.
그래서 코리텐 붐이 말했습니다. “믿음이란 잘 아는 하나님 때문에 잘 모르는 미래에 대하여 불안해 하지 않는 마음이다”.
아브라함이 그 믿음으로 없던 길을 열었습니다.
세례요한도 선구자입니다.
제사장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제사장의 안락한 삶을 버리고 빈들로 들어갔습니다.
무엇인가 버리는 것이 없이는 얻는 것도 없습니다.
믿음은 작은 것을 버리고 큰 것을 얻는 것입니다.
믿음은 오늘을 버리고 내일을 얻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로 선구자였습니다.
그는 그의 생애 가장 큰 실수로 이 선구자가 되지 못할 뻔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실수를 딛고 일어나 초대교회의 기둥이 되고 믿음의 반석이 되었습니다.
어제의 실수에 속박되어서는 내일의 자유를 얻을 수 없습니다.
잘 모르는 미래를 잘 아는 현재와 바꾸기를 두려워 하는 자는 내일의 주인이 될 수 없습니다.
인생은 사소해지기에는 너무 짧습니다. “Life is too short to be little". 영국 수상 디즈레일리의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인생은 너무 짧아 우리가 우리 문제를 끌어안고 스스로 자기 연민에 빠져 울고 소심하게 살 시간이 없습니다.
누가 출렁거리는 요단강 최전방에 서서 물속으로 발을 들여놓겠습니까?
지난 금요일, 비가 쏟아지는 데 이 일을 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입주 첫날, 전도를 위해 현장으로 달려간 자랑스러운 전도대원들입니다.
그들은 비가 오는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믿음으로 요단강에 발을 들여놓은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 때문에 가나안 땅은 약속의 땅이 되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되는 것입니다.
지난 목요일에는 한 환우가 기도가운데 담대히 수술의 자리로 나갔습니다.
큰 병에 걸려 절망가운데 있었지만 그는 요단강의 무서운 파도를 바라보지 않고 요단강 넘어 치료의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를 위해 간절히 기도했을 때 그가 말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이제 담대히 하나님의 치료를 향해 강을 건너겠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치료하실줄 믿습니다.
사람들이 안된다 안된다 말하는 경제 위기속에서도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믿음으로 요단강에 발을 내딛는 사람입니다.
어려운 취업란 속에서도 끝내 직장을 찾는 사람, 안 되는 사업환경 속에서도 마침내 성공한 사람들, 어려운 목회환경에서도 끝내 부흥하는 목회현장, 이들은 모두 요단강에 믿음으로 발을 내딘 사람들입니다.
8절, ”요단에 들어가라“.
10절, “하나님이 너희 가운데 계신다”.
17절, “모든 백성이 마른 땅으로 건넜더라”. 이 나라와 한국교회와 우리 모두가 이 믿음으로 승리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