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라나 골프장 1번 홀

[바람처럼]

오늘은 날씨가 안 좋아서 골프가 안 되었다는 소리는 못하겠군, 집 근처에 있는 아카라나 골프 장에 들어서면서 나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푸른 하늘과 유유자적한 흰구름, 게다가 덥지도 춥지도 않은 날씨에 선선한 바람까지 그야말로 골프치기에는 완벽한 날씨였다. 그러고 보니 오늘이 24절기중 하나인 청명(淸明)이었다. 하지만 여기는 뉴질랜드, 굳이 절기를 따지자면 찬 서리가 내리는 날 한로(寒露), 하긴 아침 저녁으론 이제 제법 선선하다. 차를 주차하고 트랜들러에 골프백을 싣고 스코어 카드를 뽑으러 프로 샾으로 가면서 오늘 함께 라운딩 할 강가(姜家)와 최가(崔家), 그리고 이(李) 선생님을 찾았다. 늘 늦는 강가는 역시 아직이고 독사 같은 최가는 그린에서 자그마한 이 선생님은 숏게임 연습장에서 당신 키만한 벙커턱을 넘긴다고 애쓰고 있었다. 우린 일주일에 한 번, 속된 말로 대가리 터지게 붙는다. 남자들은 다 커도 노는 거는 그저 애다.

디봇 수리용 샌드 바스켓을 트랜들러 옆에 매달고 오늘 쓸 공에 파란색으로 두 줄을 그어 표시를 했다. 드라이버 티와 아이언 티, 볼 마커 동전, 수건, 그리고 거리측정기 등등을 하나 하나 챙기고 마지막으로 얼굴에 썬크림을 발랐다. 자 이제 몸만 풀면 된다. 기분 좋은 긴장감에 몸은 살짝 경직되었고 얼굴도 약간 달아올랐다. 날씨 탓이였을까, 몸을 푸는데 미당(未堂)의 시에 곡을 부친 송창식의 ‘푸르른 날’이 절로 나왔다.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그리운 사람을 그리워 하자/저기 저기 저, 가을 꽃 자리/초록이 지쳐 단풍 드는데”, 음 그리워 할 그리운 사람이라… 하긴 나도 있었지, 다감한 목소리로 “시경(詩經)”의 ‘갈생(葛生)’을 속삭여 주던 그녀가 생각났다 “여름의 긴 낮, 겨울의 긴 밤, 백 년이 지난 뒤라도 나 그대 곁에 돌아가리” [夏之日, 冬之夜, 百歲之後, 歸于其居] 하지만 이어서 떠오르는 송창식의 목소리에 나는 황급히 고개를 흔들며 1번홀로 갔다. 오, 노No, 죽기는 왜 죽어… 이거 오늘 혹시 오비나 로스트 볼 나오는 거 아냐?   

오늘 같은 날은 미리미리 모든 것을 다 잘 챙겨서 허둥대지 말아야 하고 행여라도 부정 탈 말이나 행동, 심지어는 생각까지도 하지 말아야 한다. 골프는 실력도 실력이지만 일단 정성이 기본이다. 1번 홀 옆에서 이 모임의 장형(長兄) 뻘 되는 이 선생님이 반갑게 손을 잡아 주셨다. 단단한 체구에 나와 갑장인 최가는 그저 슬쩍 입꼬리를 올리며 박가(朴家), 왔나? 한다. 건주 아빠는 아직이지? 이 선생님은 물으나 마나한 이야기를 하며 티를 손가락으로 튕겨 하늘로 던진다. 누가 먼저 칠 지 순번이 정해졌다. 이제 가장 긴장되고 중요한 순간이 왔다. 절대 희희덕거리거나 떠들면 안 된다. 적어도 내가 칠 때까지는 경건함을 유지해야한다. 살짝 눈을 감고 호흡을 가다듬는다. 주위가 고요해졌다. 이제는 익숙해졌지만, 처음 이민 왔을 때 내가 가장 힘들어 했던 것은 고요함이었다. 특히 주택가의 고요함. 밤에는 가로등도 별로 없던 어둡고 적막 같던 동네, 하루 이틀도 아니고, 내가 중이야? 고요함이, 적막감이 공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고 그래서 아내와 나는 매일 일찍 잤다.

턱을 살짝 당겨 얼굴을 든다. 어깨에서 편안하게 손을 늘어뜨리고 작은 새를 움켜 잡듯이 조심스럽게 그립을 잡는다. 좀 더 안정된 무게중심을 위해 무릎을 살짝 굽히고 두 발은 하늘을 떠받치는 기둥 마냥 굳게 세운다. 어디서부터였을까? 어떤 힘이, 아니, 움직임이 일어났다. ‘불이 처음 시작되듯, 샘이 처음 나오듯’, 그 무엇이 살짝 왼쪽으로 튼 히프의 턴과 함께 오른쪽 허벅지 안쪽을 향해 밀려가고 위에선 동시에 왼 어깨가 섬섬옥수 고운 손에 스르르 이끌리듯 오른쪽으로 돌아가자 두 팔이 왼 어깨에 눌려 조금 밀려 가더니 밑에서 위로 커다란 원호를 그리면서 하늘로 달아나고 그러다 순간 접혀지는 오른손에 멱살을 잡히듯 붙잡혀 이제 저 혼자 하늘로 치닫던 드라이버 헤드는 더 이상 달아 날 수 없게 되자 저 하늘을 향해 소리 없는 아우성을 칠 때 일순, 짧은 멈춤이 있더니 또 어디선가의 움직임이 시작되며 이번에는 거세게 소용돌이가 일며 아래로 밀려간다. 어깨와 팔이, 뒤이어 드라이버가 호호탕탕 노도와 같이 아, 세상을 뒤집고 산을 뽑아 버릴 그 힘과 기세가 4.27센치미터 작은 공에 작렬할 때, 몸 속에선 무언가 번쩍하고 전율이 일더니 갑자기 모든 것이 쑥 빠져나간 듯 텅비고 허전하다. 쏜살같이 하늘로 날아가는, 아 나도 저 공이 되고 싶다. ‘’향단(香丹)아, 그넷줄을 밀어라/머언 바다로/배를 내어 밀 듯이,/향단아” (서정주의 ‘추천사(鞦韆詞)’ 중에서)

역시 고수다. 핸디 4의 최가의 드라이버 샷은 언제나 묵직하고 단단하다. 순번에 의해 마지막으로 그가 친 티 샷은 아카라나 1번홀 오른쪽 페어웨이 벙커 쪽을 향해 하늘 높이 치솟다가 정점에 다다르기 조금 전부터 마치 수줍은 새댁이 시댁식구 몰래 조심스레 당기는 서방 옷깃처럼 조금씩 조금씩 왼쪽으로 당겨지더니 땅에 내려서자 마자 줄행랑을 놓았다. 한편 올 해부터 출근하지 않는 공무원이 된 이 선생님은 직분에 맞게 짧지만 안전하게 보냈고, 늘 그렇듯 허리춤에 옷이 반쯤 걸친 상태로 또 혹시 가발 떨어질 까봐 한 손을 머리에 대고 달려와서도 어김없이 어니 엘스 스윙을 보여주는 건주 아빠 강호동은 이번엔 너무 힘을 줘서 당겼는지 볼이 왼쪽으로 감겨서 나무들 속을 뚫고 9번 홀로 가버렸다. 내 공은 오른쪽 페어웨이 벙커 옆에 섰는데 나무가 옆에 있어 세컨 샷이 좀 불편한 상황이었다.

내 핸디는 지금 9, 라이프 베스트는 이븐까지 해봤고 종종 싱글도 친다. 한 때는 최가와의 핸디를 2개까지 쫓아갔지만, 병아리 때 쫓기면 장닭 되서도 쫓긴다더니 최가에게는 늘 주눅이 든다. 나도 꼴에 남자라고, 유튜브 골프 레슨 동영상을 야동 보듯 눈이 벌게지도록 보고 연습장 가서 손에 물집 잡히도록 채를 휘둘러보았지만 세상에는 해도 안 되는 것들도 많다는 걸 새삼 알았다. ‘하면 된다!’ 고 누가 외치면 나는 ‘그럼 골병 든다’고 해주겠다. 누가 ‘목숨을 걸고 둔다’는 천재 바둑기사 조치훈을 말한다면, 나는 그가 바둑에서 항상 목숨을 걸었다면 그는 죽었어도 수백번을 죽었을 거라고 말해주겠다. 누가 재능 있는 사람은 노력하는 사람을 못 이기고, 노력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을 못 이긴다고 한다면, 나는 그냥 아 네네, 말하고 속으로 댁은 그렇게 사세요, 라고 하겠다. 하긴 나도 울컥했던 순간이 있긴 했다. 영화 ‘군도 -민란의 시대’에서 악덕 지주이자 조선 최고의 무인 조윤(강동원 분)이 자신을 둘러싼 이들에게, “너희들 중 타고난 운명을 바꾸기 위해 생을 걸어본 자가 있거든 나서 보거라, 내 그 자의 칼이라면 받겠다” 라고 했을 때였다. 그러나 영화는 영화일 뿐이다.

예기치 않은 행운은 나처럼 소심한 이에게는 양날의 칼이다. 나 같은 놈에겐 이런 일이? 이거 혹시 오늘 운이 여기서 끝나는 거 아냐? 주면 감사히 받을 일인데, 참 지랄도 가지가지한다 더니 오늘은 내가 그 짝이었다. 나무 근처에 있기는 했지만 그런대로 백스윙을 낮게 빼면 될 것 같아 3번우드로 친 샷이 정타로 맞으면서 그린 앞 30미터까지 날라갔다. 힘 빼고 툭 친다고 쳤는데 허리가 잘 들어가면서 힘이 실렸다. 내 샷을 보고 힘이 들어갔나? 최가는 155미터 세컨샷이 오른쪽으로 밀리면서 벙커에 들어갔고 이 선생님도 서드 샷이 같은 벙커로 들어갔다. 핀까지 50미터, 자신 있는 샌드 웨지 샷 거리다. 붙이면 버디다! 약간은 흥분된 마음으로 마크를 하고 공을 집어 닦으며 강가 놈은 어디 있는 거야? 초보도 아니고, 라며 속으로 중얼거릴 때, 포어!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그린 왼쪽 큰 나무에 볼 맞는 소리가 들렸고 왼쪽 벙커 앞으로 강호동의 볼이 떨어졌다. 저 친구도 오늘 운이 좋군.     

백스윙 크기를 점검하며 연습스윙을 할 때 뒤쪽에서 두런두런 말이 들렸다. 선생님, 송창식의 ‘푸르른 날’이 서정주의 시 맞죠? 참 노래말이 좋아요, 오늘하고 딱이네요. 그렇죠, 하지만 난 시를 가져와서 만든 곡으론 정지용의 ‘향수’가 더 좋아요. 그 소리를 듣자 갑자기 아까 묻어 두었던 불길함이 확 올라온다. 그린 앞 왼쪽 벙커 앞에는 나만큼이나 강호동도 신중하다. 내가 좀 꾸물거려선가, 그는 제가 먼저 칠께요 하고 치더니 서드 샷을 그냥 핀에 붙여버렸다. 그리고선 앗싸! 하며 얼굴이 벌게진 채 먼저 쳐서 미안하다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 환장하겠군, 최가와 이선생님의 축하 박수소리를 들으며 나는 나도 일단 치고 축하라도 건네야지 하며 나름 부드럽게 쳤다. 그러나 뒷 땅, 공은 5미터 정도를 갔다. 평소에 자신 있는 거리였기에 더 열불이 치밀어 올랐다. 다들 아무 말도 안하고 있지만 속으론 쾌재를 부르고 있을 것이다. 더군다나 최가 놈은 아드레날린이 팍팍 솟을 게다. 아니나 다를까, 최가는 벙커에서 멋지게 탈출해서 오르막 1.5미터 버디 퍼트을 남겨 놓았다. 항상 불길한 마음은 현실로 나타났다. “내가 죽고서 네가 산다면!/ 네가 죽고서 내가 산다면?” 애써 묻어 두었던 구절이 송창식의 시원한 목청으로 내 귀를 두드렸다.

그래도 마음을 다잡고 52도 웨지로 45미터 샷을 한 게 좋았다. 스핀도 그런대로 먹어 홀을 살짝 지나치긴 했지만 1미터 남짓. 충분히 파로 막을 수 있는 거리다. 이 선생님은 벙커에서 무난히 나오며 10미터 정도의 파 퍼트를 남겼고 예상대로 보기로 홀을 마쳤다. 그 동안 흥분이 좀 가라 앉은 강호동은 삐죽이 나와 있던 윗 옷을 정리하고 깃대를 들고 내 쪽으로 다가왔다. 홀 뒤쪽에 와서 라이를 살피던 최가가 버디 퍼트를 위해 어드레스에 들어가자 그는 계속 내게 좀 미안했던지 손으로 입을 가리며 아주 작은 소리로 형, 저거 만만치 않은 거리야, 한다. 그러나 그 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또르륵’ 소리가 났다. 나이스 버디! 이 선생님이 주먹으로 부딛치는 축하인사를 건네고 나도 가볍게 축하, 라고 말하며 헤벌쭉 웃으며 축하인사를 건네는 강가의 가발을 지긋이 보았다. 그래, 약간 내리막이긴 하지만 1미터 남짓, 평소라면 눈감고도 넣을 수 있는 거리다. 이미 세컨 샷을 치고 오고 있는 뒷 조를 보며 이 선생님과 최가를 먼저 2번 홀로 보내고 내리막이니 약간 못 미치게 치자, 하고 툭 쳤다. 라이를 따라 잘 가던 공이 홀 컵에 반바퀴를 남기고 서 버렸다. 나는 조금 기다려 보다 그냥 공을 집었다. 조용히 보기, 라고 말하고 홀아웃을 하는 순간 머리속에 황순원의 짧은 시 ‘공’이 떠올랐다. “지구와/외접한/이/구체의/굴잖는/기적을 /보아라”

[석운]

바람처럼 님, 참 대단한 이야기꾼이시군요. 경이롭습니다. 골프 1번홀을 치면서 이렇게 많은 이야기 거리를 만들어내는 그 입담과 묘사, 시와 노래와 영화에 시경 까지 등장하는 깊고 다양한 지식에 찬탄할 따름입니다. 18번 홀 끝내고 나올때엔 대하소설 한 편이 완성 될것 같습니다. 새로운 경지의 멋진 글 잘 읽었습니다. 부디 자주 올려주세요.

[바람처럼]

과분한 칭찬이지만, 감사드립니다 ^^

[여심은]

골프라는 운동이 생각을 많이 하게 하는 운동이라 실은 골프를 친 게 아니라
글쓰기 골프라는 생각이 납니다. 버디 보다 더 멋진 이 한편의 글을 얻었으니
무에가 부러우랴!!!

[바람처럼]

하하, 글쓰기 골프 맞습니다, 선생님.
하지만 골프 부분은 거의 사실에 가깝습니다^^

[따뜻한 얼음]

바람처럼 님 글, 반갑게 읽었습니다.^^
골프를 못치는 저도 바람처럼 님의 생생한 골프 단상 묘사에 그릴듯, 흥미롭고 의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시인과나]

한마디로 와우.입니다.
김용옥 못지 않은 종횡무진한 글에 놀랐습니다.
무림의 고수를 만난 듯한 느낌입니다.

다음 작품을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