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지막 심판에 대한 말씀
마 25:31-46
31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32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하여
33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34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35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36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37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38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39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40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41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
42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43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
44 그들도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하지 아니하더이까
45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46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마 25:31-46 / [마지막 심판] 인자가 영광에 싸여 모든 천사를 거느리고 와서 영광스러운 보좌에 앉을 때에 32) 모든 민족이 불려 나와 인자 앞에 모일 것이다. 그때 내가 마치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갈라 놓듯이 사람들을 갈라서 33) 양은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둘 것이다. 34) 그리고 왕인 나는 내 오른편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내 아버지께 복받을 사람들아, 와서 천지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한 이 나라에 들어가라. 35) 너희는 내가 배고플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 되었을 때에 너희 집으로 따뜻하게 맞아들였다. 36) 또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병들었을 때와 감옥에 갇혔을 때에 찾아와 주었다.' 37) 그때 그 의로운 사람들은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주님, 저희가 언제 주님이 배고프신 것을 보고 잡수실 것을 드렸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실 것을 드렸습니까? 38) 또 언제 주님이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도와 드렸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입을 것을 드렸습니까? 39) 언제 주님이 병드셨거나 감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찾아가 뵈었습니까?' 40) 그러면 왕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내가 진정으로 말한다. 너희가 여기 있는 내 형제 중에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곧 내게 해준 것이다!' 41) 그리고 나는 왼편에 있는 사람들을 향해서 이렇게 말할 것이다. `너희 저주받은 자들아 내게서 물러가 마귀와 그 부하들을 가두려고 준비한 영원한 불속으로 들어가라. 42) 너희는 내가 배고플 때에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 목마를 때에 마실 것을 주지 않았으며, 43) 나그네 되었을 때에 따뜻하게 맞아들이지 않았다. 또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지 않았고 병들었을 때나 감옥에 갇혔을 때에도 찾아와 주지 않았다.' 44) 그러면 그들도 대답할 것이다. `주님, 주님이 언제 배고프고 목마르셨으며, 나그네 되고 헐벗으셨으며, 병들고 감옥에 갇히셨던 일이 있었기에 저희가 보고도 돌보아 드리지 않았다 하십니까?' 45) 그때 왕이 말할 것이다. `내가 진정으로 말한다. 여기 있는 내 형제 중에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주지 않은 것이 곧 내게 해주지 않은 것이다.' 46) 그리하여 그들은 영원히 벌받을 곳으로 쫓겨날 것이고 바르게 산 사람들은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갈 것이다.'
예수님은 예수님의 재림을 준비하는 자세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31-33) 예수님은 이 세상에 존재했던 모든 사람들은 심판을 받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심판장은 세상의 그 누구도 아니고, 우리의 구속을 완성하신 우리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는 천군천사들과 함께 강하고 영광스런 분으로 오십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심판은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리하듯이 할 것입니다. 이것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모두 포함하는 세상의 모든 민족을 대상으로 합니다. 모든 민족들이 각각 오른편과 왼편으로 나누어질 것인데 오른편은 생명의 자리, 왼편은 멸망의 자리입니다.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리라(34-40) 오른편에 있는 자들이 천국의 상속자가 된 이유는 그들이 왕의 형제들에게 선행을 베풀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선행으로 천국의 상속자가 되었다는 이 비유의 사상이 오직 은혜와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다는 복음의 내용(엡 2:8, 9)과 모순되지 않는가라는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둘이 모순되지 않습니다. 결국 진정한 의미에서 선한 일은 믿음의 결과이며 하나님의 은혜로 하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생활에 선한 행위가 뒤따라오지 않는다면 그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약 2:26).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41-46) 악인들이 지옥의 판결을 받은 이유는 고통 받던 예수 그리스도의 형제들에게 선을 행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들이 목회자였다면 교회의 존귀한 자들에게만 선을 행하였을 것이고 만일 그들이 정치가였다면 재벌이나 권력자에게만 선을 행하였을 것입니다. 그러한 선은 기독교적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대가를 바라고 베푼 조건적인 선행이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선행에 대한 상급은 이미 지상에서 모두 받게 되기 때문에 부활 후 곧 내세에서는 아무런 상도 받지 못합니다. 진정한 선행은 마치 그리스도께서 아무 조건 없이 희생을 당해 주셨듯이 대가를 바라지 않는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엡 5:1, 2).
적 용 : 사람은 마지막 하나님 앞에 서는 날이 중요합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 기준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고 계십니까? 그렇지 않다면 다시 한 번 나의 신앙을 점검하는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부활 신앙은 함께 죽는 것입니다. 혼자 죽어서는 백 번을 죽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예수와 함께 죽어야 합니다. 예수와 함께 죽지 않고서는 새로운 존재가 되지 못합니다.
< 설 교 >
의로운 사람들
오늘 읽은 말씀은 마지막 심판에 대한 말씀입니다. 영광의 보좌에 앉아 우리를 심판하실 분은 우리 주님이십니다. 그 때가 되면, 세상의 모든 나라들이 그분이 앉아 계시는 심판대 앞으로 모이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친히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듯이 사람들을 나눌 것입니다. 양들은 오른편으로 서게 하고, 염소들은 왼편으로 서게 할 것입니다. 그 때까지도 사람들은 영문을 모르고 어리둥절할 것입니다. 내가 왜 주님의 오른편에 서게 되었는지, 내가 왜 왼편에 서게 되었는지 몰라 어리둥절할 것입니다.
그 때 영광의 보좌에 앉으신 우리 주님이 오른편에 선 사람들을 보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들은 내 아버지께로부터 복을 받은 의로운 사람들이다. 너희들은 내가 배가 고플 때 내게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마를 때 나에게 마실 것을 주었다. 내가 나그네로 있을 때 너희는 나를 초대해 주었고, 내가 헐벗었을 때 너희는 내게 옷을 입혀 주었고, 내가 아플 때 너희는 나를 돌보아 주었고, 내가 감옥에 있을 때 너희는 나를 찾아 주었다. 이리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한 이 나라를 차지하여라.”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이 사람들이 이렇게 우리 주님께 묻습니다. “주님, 언제 주님께서 배고프신 것을 보고 우리가 음식을 주었습니까? 언제 목마른 것을 보고 주님께 마실 것을 주었습니까? 언제 주님이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주님을 초대했습니까? 언제 주님이 헐벗으신 것을 보고 주님께 옷을 입혀 드렸습니까? 언제 주님이 감옥에 있는 것을 보고 우리가 주님을 찾아 갔습니까? 또 언제 주님이 아프신 것을 보고 우리가 주님을 돌보았습니까?” 그 때 우리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진정으로 말한다. 너희 중에 지극히 보잘것 없는 사람에게 한 일 곧 나에게 한 일이었다.”
이번에는 영광의 보좌에 앉으신 우리 주님이 왼편에 선 사람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저주받은 자들이다. 너희는 내가 주릴 때에 내게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 목마를 때에 마실 것을 주지 않았고, 나그네로 있을 때에 영접하지 않았고,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지 않았고, 병들어 있을 때나 감옥에 갇혀 있을 때에 찾아 주지 않았다. 너희 저주 받은 사람들이다. 내게서 물러가 영원한 불속으로 들어가라.” 그들이 깜짝 놀라 이렇게 묻습니다. “주님이 언제 배고프고 목마르셨습니까? 언제 주님이 나그네로 있었습니까? 언제 주님이 헐벗고, 병들고, 감옥에 갇히셨던 일이 있었습니까? 왜 저희가 돌보아 드리지 않았다고 하십니까?” 그 때 우리 주님이 단호한 음성으로 말씀하십니다. “여기 있는 내 형제 중에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주지 않은 것이 곧 나에게 해주지 않은 것이다.”
여러분은 오늘 이 말씀을 들으면서 무슨 생각이 드십니까? 저는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장차 우리가 주님의 보좌 앞에 설 때, 주님은 굉장한 일을 가지고 우리에게 문제를 삼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무슨 크게 실수한 일, 우리가 무슨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던 일들, 이런 일들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일상생활에서 얼마나 긍휼의 마음을 가지고 살았느냐 하는 것이 그 때 가서 문제가 됩니다. 우리 주변에 있는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one of the least of these my brothers and sisters) 하나를 소홀하게 대하고 보살피지 않았던 일들이 문제가 됩니다. “너는 그 때 그 사람을 우습게 보고, 관심을 두지 않았지만 그 사람이 바로 나였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전문가들은 끊임없이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개인주의적인 경향, 이기심, 이런 것들을 경고해 왔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경고는 별로 소용이 없었습니다. 이 사회의 전반적인 흐름이, 그리고 이 시대의 가치관이 극도의 개인주인적인 가치를 추구하게 되어 나 외에 다른 사람들의 문제를 가지고 고민하는 사람들이 없기 때문이니다. 개인만 존재하지 공동체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점점 소외되는 사람들이 늘어만 갑니다. 미국의 사회학자 데이빗 리스만(David Riesman, 1909-2002)이 "고독한 군중(The Lonely Crowd)"이라는 책에서 “군중 속의 고독”이라는 말을 처음으로 사용한 것이 1950년입니다. 벌써 그 때부터 전문가들은 사회의 문제들을 이렇게 진단하고 있었습니다.
지난 1월 12일 아이티(Haiti)를 강타한 강도 7도의 강력한 지진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정부에서 미처 손을 쓸 틈이 없어, 시체가 썩는 냄새 때문에 견딜 수 없는 시민들이 거리에 방치되어 있는 시체들을 불에 태우고 있다는 뉴스를 보았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에 100만불을 구호금으로 내 놓았다가 여론의 호된 질책을 받고 1,000만불을 내 놓았다고 합니다. 도와줄 때는 그냥 도와주면 되는데 외교부의 차관 한 사람이 “우리가 1,000만 달러를 지원하기로 한 것은 6.25 전쟁 당시 어려운 형편에도 불구하고 구호물자를 제공한 아이티에 진 신세를 60년 만에 갚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저는 그 뉴스를 보면서 6.25 전쟁 때 아이티가 우리를 어떻게 도왔는지 기록을 찾아 보았습니다. 아이티가 직접 참전 군인들을 보낸 것이 아니고, 물자를 보낸 것도 아니고, 아이티 정부가 그 때 돈으로 2,000불을 보내온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아이티는 형편 없게 가난하지만, 그 때는 더 가난했다고 합니다. 그 때 돈 2,000불이면 지금은 약 800만 달러 정도 된다고 합니다. 아무튼 놀라운 사실 아닙니까? 그 때는 지금하고 달라서 국가 간의 교류도 없고, 정보도 부족했던 때입니다. 그런 때에, 우리가 이름도 잘 모르던 아이티라는 나라에서 2,000불을 보내 온 것입니다. 아이티도 우리나라를 몰랐을 것입니다. 몰랐지만, 전쟁 중에 있는 불쌍한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에서 2,000불을 보내 온 것입니다. 우리는 잘 몰랐지만 그들에게 이렇게 사랑의 빚을 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한국에서도 아이티를 돕자는 운동들이 여기저기서 일어나고 있다고 합니다. 그 중에 한 교회에서 1,500만원을 후원금으로 내 놓았다고 합니다. 그 교회 목사님이 핵심을 찌르는 말씀을 했습니다. “교인들이 직접 현장에 가지는 못하지만 마음만이라도 아픔을 함께 나누자는 취지에서 모금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이번 지진 사태를 통해 인류의 양심이 깨어나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는 지금 아이티 참사를 통해서 우리들의 양심을 테스트 받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국가도 그렇고, 개인도 그렇고 모두 남을 돌아볼 줄 모르는 풍조 속에서 중남미에 있는 아이티라는 작은 나라, 세상에 많이 알려지지 않은 가난한 나라에서 일어난 이 엄청난 재난, 죽은 사람만 200,000명이 넘는 불행을 인류가 어떻게 볼 것인지 테스트 받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그들의 문제라고 냉냉하게 돌아 설 것인지, 아니면, 모두들 가슴 아파하면서 나의 불행으로 알고 도움의 손길을 뻗칠 것인지 우리는 지금 테스트 받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우리는 지금 인류의 미래가 과연 희망적인지, 아니면 불행한 종말을 가져 올 것인지 테스트 받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저는 목사로서 아이티가 당한 불행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왜 아이티가, 그것도 가난하고 가난한 나라가, 이 엄청난 불행을 당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의 의미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결코 쉽게 답이 주어지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압니다. 그런데, 제 머리 속에는 자꾸 이사야 43:3 말씀이 떠 올랐습니다. 그 말씀을 한번 보시지요. “내가 이집트를 속량물로 삼아 너희를 구했고, 에티오피아와 스바를 몸값으로 넘겨 주어 너희를 내 것으로 삼았다.” 현대어 성경에는 이 말씀이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나는 너를 해방시켜 주는 값으로 애굽과 구스와 스바 등 온 아프리카를 모두 다 바사에게 넘겨 주었다.”
참,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미스테리 같은 말씀입니다. 바빌로니아 포로로 잡혀 갔던 유대 사람들이, 바빌로니아가 망하고 페르시아 왕국이 세워지면서 고레스왕의 칙령으로 유대인들이 고국으로 돌아 온 줄로 알았는데, 그 이면에 이런 일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유대인들을 해방 시키는 대가로 애굽과 이디오피아와 아프리카 전체를 페르시아에게 넘겨 준 것입니다. 유대인들을 해방 시켜 주는 대가로 아프리카 전체가 페르시아의 지배 밑에 들어간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프리카를 희생 시키면서 자기 백성들을 고국으로 돌아와서 나라를 재건하도록 했습니다.
누가복음 13장에도 미스터리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갈릴리에 불행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는 무고한 갈릴리 사람들이 로마 총독 빌라도에게 희생 당한 것입니다. 빌라도가 아주 잔인한 일을 저질렀습니다. 몇 명인지는 모르지만, 갈릴리 사람들을 학살해서 그 피를 그들이 바치는 희생 제물에 섞어 바치게 했습니다. 무슨 말씀인지 아시겠지요? 갈릴리 사람들은 성격이 급하고 격정적이어서 누가 선동하면 쉽게 흥분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갈릴리에서 여러 번 구데타가 일어났습니다. 빌라도는 갈릴리 사람들에게 강력한 경고를 할 필요성을 느끼고, 갈릴리 사람 몇 몇을 학살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피를 그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희생제물의 피에 섞어서 드리도록 했습니다. 또 하나의 사건은, 실로암에 있는 탑이 갑자가 무너지는 바람에 18명이나 죽었습니다. 이 실로암 탑 붕괴 사건은 성경에 자세하게 나와 있지 않아서 어떻게 된 일인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 갑자기 탑이 붕괴되는 바람에 그 밑에 앉아 있던 무고한 사람들이 18명이나 깔려 죽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두가지, 갈릴리에서 일어났던 불행한 사건을 언급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런 고난을 당했다고 해서 이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죄가 많아서 그런 일을 당했다고 생각하느냐? 또 실로암 탑이 무너져 죽은 18명의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사는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악한 죄인이라고 생각하느냐? 그렇지 않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이와 같이 망할 것이다.” (누가복음 13:1-5) 예수님의 이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회개해야 한다는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하시기 위해서 갈릴리 사람들이 당한 불행을 사용하셨다는 뜻 아닙니까?
유대인들을 페르시아에서 해방시키기 위해서 아프리카 전체를 희생 시킨 하나님, 회개하지 않으면 무서운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서 무고한 사람들의 희생을 감수하시는 하나님, 그 동일하신 하나님께서 이번에 아이티 지진 참사를 통해서 우리에게 전달하시고자 하는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아이티 참사는 잠자는 인류의 양심을 깨우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잃어 버렸던 긍휼의 마음을 찾아 주고 있습니다. 세계 각국에서 아이티를 돕자는 구호 운동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 나라에도 가난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가난한 사람들이 아이티를 돕는 운동에 참가하고 있습니다. 아이티를 돕는 방법도 다양해지고 있습니다. 미국의 휴대전화 문자메시지 기부가 1,000만 달러를 넘어섰습니다. 워싱턴의 비영리 기부단체 “모바일 기부재단”은 아이티 피해를 돕기 위한 기부 문자 메시지가 초당 1,000개씩 쇄도해 현재 1,000만 달러 이상이 모였다고 합니다. 휴대전화 이용자들이 미국 적십자사에 “아이티'”라는 문자를 보내 한 번에 5달러에서 10달러를 기부할 수 있도록 아이디어를 낸 것입니다. 전화 회사에서 문자 사용료가 나오겠지요.
이제 인류는 공동 운명체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경제난을 심각하고 겪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아이티 지진 참사가 신문, 방송, TV, 인터넷을 통해서 전 세계에 신속하게 전해 짐으로써, 이제 남의 불행이 나의 불행이고, 남의 행복이 나의 행복이라는 또 하나의 교훈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강도를 만나 가진 것을 다 빼앗기고, 칼을 맞아 상처를 입고 피를 흘리며 죽어가고 있는 사람을 보면서도 제사장은 길을 피해 다른 길로 돌아갔습니다. 이 광경을 본 레위인도 피해 갔습니다. 누가복음 10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속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들이 제사장들입니다. 우리들이 레위인들입니다. 죽어가는 사람을 보면서도 불쌍한 마음이 들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 사람의 불행이지 나의 불행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비유 속에 마지막으로 사마리아인이 등장합니다. 사마리아인은 유대인들과는 상종하지 않습니다. 서로 말도 하지 않고, 거래도 하지 않습니다. 길에서 만나면 서도 얼굴을 돌리고 지나갑니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이 사마리아인이 부상당한 사람을 치료해 준 것입니다. 그는 다른 것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마리아인과 유대인들이 반목하게 된 역사적인 배경 같은 것은 그에게 관심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는 다만 죽어 가는 한 생명을 살리려고 하는 긍휼의 마음을 가진 것뿐입니다.
우리에게서 긍휼의 마음이 사라져갑니다. 이 마음을 되찾아야 합니다. 잃어버린 긍휼의 마음을 회복해야 합니다. 그래야 인류에게 희망이 있습니다. 불행을 당한 아이티 사람들이 우리에게 긍휼의 마음을 찾아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God blesses those who are merciful, for they will be shown mercy., 마태복음 5:7)” 언제가 우리가 베푼 긍휼로 우리가 하나님이 긍휼하심을 입게 될 것입니다.
양과 염소의 비유
1. 양과 염소를 분별함같이 하실 것
주님의 공의로운 보좌 앞에 모여든 모든 민족은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 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심판은 철저하고도 공의롭게 진행될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고 승복할 수밖에 없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위엄 앞에 굴복하고 말 것입니다.
예수님의 비유 중에는 이렇듯 최후의 날에 신자들을 반드시 둘로 분리하실 것이라는 교훈이 많음을 볼 수 있습니다. ‘가라지 비유’를 통해서는 심판 날에 알곡과 가라지와 같은 신자로 분리될 것을 경고하셨고, ‘그물 비유’를 통해서는 좋은 고기와 못된 고기와 같은 신자로 분리될 것을 경고하셨으며, ‘열 처녀 비유’에서는 미련한 다섯 처녀와 슬기로운 다섯 처녀와 같은 신자들로 분리 될 것을 분명히 경고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같은 예수님의 비유를 상고하면서 정말 정신을 차려야 할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가라지와 같은 신자, 못된 고기와 같은 무가치한 신자, 미련한 다섯 처녀와 같은 신자는 세상 끝날 결국 비참한 운명이 되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2. 양과 같은 신자는 오른편에 세우신다.
1. 양은 온유한 자의 상징입니다.
양은 순합니다. 양은 다투지도 않습니다. 온유란 말은 그저 온순한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온유는 본래 야생마같이 거칠지만 훈련된 인격으로 잘 다듬어진 성품을 의미합니다. 온유한 마음은 예수를 오래 믿었다고, 세례 교인이라고 해서 저절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본 받고 성령의 감화를 통해서만 얻어질 수 있습니다.
2. 양은 순종하는 자의 상징입니다.
양은 목자의 음성을 알고 있습니다. 목자가 양 우리에서 양들을 불러 세운 후 목자가 앞서서 가면 양들은 그 뒤를 따라갑니다. 제멋대로 가지 않습니다. 목자가 가라는 대로 인도하는 대로 따라갑니다. 양들은 타인의 음성을 들으면 따르지 않고 오히려 도망합니다. 양은 목자만 따르고 순종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순종하는 자들을 주님은 구원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자야말로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3. 양은 자기의 연약함을 아는 자의 상징입니다.
양은 목자가 없으면 이리저리 흩어져서 결국 들짐승의 밥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이리떼가 쫓아오면 싸우려고 몸부림치는 것이 아니라 목자만 바라보고 따릅니다. 자신이 약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어리석게 보이지만 현명한 처사입니다.
인간도 재산이나 지식이 있다고 해서 다른 사람보다 좀 뛰어나다고 해서 자랑할 것이 못됩니다. 슬기로운 처녀나 미련한 처녀나 모두 깊은 잠에 빠졌던 것처럼, 인간은 모두 연약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께 자신의 연약함을 고백하고 주님의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심판주가 되시고 임금이 되신 주님께서는 오른편에 있는 자들을 향하여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 된 나라를 상속하라”고 하셨습니다.
밤하늘의 별들을 관측하는 천문학자들은, 이 지구를 가리켜 은하계의 푸른 진주라고 부르며 극찬을 아끼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아무리 새로운 생명체를 찾아 별들을 관측해 보아도 지구만큼 완벽하게 모든 조건을 갖춘 곳을 발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푸른 하늘과 바다, 산과 강, 온갖 동물과 식물들로 채워진 이 아름다운 지구도, 또한 밤하늘의 빛나는 저 별들도 단지 6일 만에 창조되었다고 성경은 증거 합니다. 그런데 단지 6일 만에 창조된 이 지구와 우주도 이토록 아름답고 완벽하다면, 창세로부터 준비하고 예비하신 하나님의 나라와 그 축복은 얼마나 놀랍고 아름답겠습니까?
그러므로 여러분은 이러한 사실을 생각하면서 이 세상에서 무슨 일을 만나든지 결코 낙심하거나 슬퍼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은혜로 천상의 가장 깊은 곳까지 볼 수 있었던 사도 바울은 오늘 이 땅을 살아가는 모든 성도들을 향하여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라고 증거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미래에는 이처럼 놀라운 준비를 하시면서 기다리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어떤 고난과 어려움을 당하더라도 용기와 소망을 잃지 않는 굳건한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창세로부터 예비 된 나라를 상속받는 양들은 어떤 삶을 산 사람들입니까? 그들은 이웃이 주릴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가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다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이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한결같이 불우한 환경 가운데 놓인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모두 다 인생고의 늪 속에 빠져 신음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천국을 상속받은 사람들은 모두 이 불행한 사람들에게 마음을 쏟고 살아 온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시간과 재물을 바쳐 이웃의 불행에 동참하는 삶을 산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기들이 한 봉사에 대하여 별로 기억을 하고 있지 아니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말하기를 우리가 어느 때에 그런 일을 했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여기에 우리가 본받아야 할 봉사의 정신이 있습니다. 이웃의 불행에 동참하는 희생적인 봉사를 하고서도 기억하지 않는 것, 그것이 복음적인 봉사입니다. 주님께서는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 말씀하신 그대로 주님께서는 자신의 생명까지도 인간을 위해 내어 주시며 봉사하셨습니다.
봉사자의 눈은 낮은 데에 있는 사람들에게 있어야 하고, 봉사자의 마음은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 손이 모르게 하는 데 두어야 합니다. 그런 눈과 마음속에 하나님은 계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선한 사람들을 향하여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주님의 획기적인 인간관을 발견하게 됩니다. 인간을 주종관계, 지배자와 피지배자, 강자와 약자, 부한 자와 가난한 자, 고용주와 피고용자의 관계로 파악하지 아니하고, 형제 또는 자매로 파악한 것은, 기독교 2천년 역사가 남긴 가장 위대한 유산 중의 하나입니다. 인간을 형제로 보는 것은 인간은 평등한 존재라는 것이며, 사랑의 관계라는 것이며, 피차간에 결코 타인이 아니라는 사상이 거기에 담겨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부한 자에게 아첨하고 가난한 자를 무시하는 그리스도인, 강한 자에게 비굴하고 약한 자를 멸시하는 사람, 그러한 사람은 이미 참된 그리스도인이 아닌 것입니다.
3. 염소와 같은 신자는 왼편에 세우신다.
왼편은 저주와 형벌을 의미합니다. 왼편으로 가려진 사람들은 주님을 떠난 사람들로서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 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하는 판결을 받게 됩니다. 그러면 과연 염소는 어떠한 동물일까요?
1. 염소는 사납고 싸우기를 잘하는 자의 상징입니다.
양은 뿔이 없으나 염소는 뿔을 가지고 들어 받는 버릇이 있습니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어린양은 순진하고 어진 것이 특징입니다. 그러나 멸망 받을 염소는 사나운 것이 그 특징입니다. 염소는 아무에게나 겁 없이 들이받습니다. 때로는 주님께도 또는 주님께서 보내신 기름부음을 받은 종들도 들이받습니다. 그러나 시 105:15절에는 “나의 기름 부은 자를 만지지 말며 나의 선지자를 상하지 말라.”고 경고하신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2. 염소는 불순종하는 자의 상징입니다.
양은 성질이 순해서 수천마리 일지라도 목자가 인도하는 데로 따라 갑니다. 그러나 염소는 제멋대로 가기에 목을 매어서 잡아 당겨야 강제로 끌려갑니다. 염소의 특징은 고집입니다. 염소는 고집이 셉니다. 앞에서 목에 걸린 줄을 끌면 두 발로 버티고 서서 오지를 않습니다. 아무리 당겨도 순순히 따라오는 법이 없습니다. 오히려 이리 뛰고 저리 뛰고 도망쳐서 주인의 의도대로 따라 주지 않는 것이 염소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이런 자들이 있습니다. 말씀대로 하지 않고 자기 뜻대로 하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다른 사람의 의견에 대해 안하무인격이고, 자기의 주장대로 좌우충돌합니다.
3. 염소는 교만한 자의 상징입니다.
염소를 묶어 놓으면 말뚝을 뽑기 위해 달음질하다가 줄에 걸려 넘어지고 또 달음질하다가 넘어지곤 합니다. 그러다가 혹시 줄이 풀리거나 말뚝이 뽑히면 쏜살같이 달려 가장 높은 지대로 올라가 소리를 지르는 습성이 있습니다. 다른 동물들이 자기를 쳐다보도록 하는 것입니다. 별 볼품도 없는 모습을 자랑합니다. 어린양 같은 신자는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 앞에서 겸손한 것이 특징입니다. 그러나 염소와 같은 신자는 그 언행이 항상 교만합니다.
본문에는 염소로 구별된 사람들이 어떤 삶을 산 사람들이며, 그 삶의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가가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양과 같은 신자들과는 전혀 반대되는 삶을 살았습니다. 양과 같은 신자들은 불우한 이웃들에게 봉사한 자기들의 일이 주님께 한 것인 줄 모르고 있었던 사람들이었는데 비하여, 염소 같은 신자들은 주님께서 어려운 일을 당하실 때 우리가 언제 공양치 아니했습니까? 하고 항의를 하였습니다. 그들은 주님은 그런 어려운 일을 당하실 분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며, 다른 이웃들을 위하여 봉사한다는 것은 전혀 관심 밖의 일이었습니다.
그러면 왜 그들은 이웃을 위해 봉사하거나 이웃의 아픔에 동참할 수 없었습니까?
1) 죄에서 해방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죄 아래 있는 인간의 본성은 이기주의에 입각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자기 중심적이며 그들에게 있어서 이타주의는 위선입니다. ‘인간이 어떻게 이타주의자일 수가 있는가? 그것은 거짓이다. 이기주의야말로 인생의 진실한 삶의 모습이다.’ 이것이 그들의 공통된 인생관입니다. 이것이 죄에서 해방되기 이전의 인간의 모습입니다. 속죄의 은총을 입지 못한 사람은 결코 남을 위하여 희생하고 봉사할 수 없습니다. 기독교 2천년 역사의 모든 위대한 봉사자들은 모두 다 속죄의 감격이 그들로 하여금 자기희생의 봉사자가 되게 한 것입니다.
2) 혈연에서 해방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죄에서 해방되지 못한 사람은 혈연에서도 해방될 수가 없습니다. 그들의 관심은 오로지 자기와 자기 가족들뿐입니다. 가족들을 사랑하는 그 사랑도 따지고 보면 자기 사랑의 연장에 불과합니다. 동물들이 새끼를 사랑하듯 그들의 가족사랑은 동물적인 것이며 본능적인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의 혈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결코 동물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고, 타인에 대한 봉사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영을 받을 때로부터 비로소 다른 사람을 위한 진정한 봉사자가 될 수 있습니다. 독일사람 ‘슈바이처’가 아프리카 흑인들의 친구로서 평생을 봉사한 것도, 영국사람 ‘윌리암 캐리’가 인도의 첫 선교사가 된 것도, 벨기에 사람 ‘다미엔’이 하와이 모록카이 섬에서 문둥이의 친구가 되어 일생을 헌신한 것도, 우주적 가족에 대한 사랑 때문인 것입니다. 동양에는 위대한 정복자는 있어도 위대한 봉사자는 별로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동양 사상이 자기 가족과 가문에만 집착하게 한 까닭입니다. 그러나 성도 여러분! 사람은 타인을 생각하는 만큼 주님을 닮아 간다고 하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3) 물욕에서 해방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죄에서 해방되지 못한 사람은 혈연에서 해방될 수가 없으며, 따라서 물욕에서도 해방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웃을 위한 봉사가 불가능합니다. 인간이 성령을 통하여 거듭나기 전에는, 결코 물욕의 노예에서 자기를 해방시킬 수가 없습니다. 물질 혹은 재물은 땀의 결정이며 삶의 열매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남을 위해 사용할 수가 있겠습니까? 인간의 생각으로는 전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으로서는 가능합니다. 성령이 충만해지면 그것이 가능해집니다. 초대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은 오순절 날 성령의 충만을 받았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재물을 주신 것은 봉사의 기회를 주심이요, 봉사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심인줄 알아야 합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분명히 다시 오십니다. 재림하시는 주님은 심판주로서 모든 민족, 모든 신자들을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리시키듯 분리하십니다. 그 때에 참 성도는 비로소 최고의 영광과 안식과 택함 받은 자의 특권을 누리게 됩니다. 따라서 성도들은 현세에 있어서 건강이나 물질의 축복만을 간구하는 소극적이고 근시안적인 기복적 신앙보다는, 훗날에 누리게 될 안식과 기쁨을 고대하는 참되고 소망적인 신앙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 같은 참된 믿음을 가진 성도들은 그 같은 믿음의 증거로, 어떤 모양으로든지 이웃을 위한 아름다운 사랑의 봉사를 실천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마지막 날 주님으로부터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 된 나라를 상속하라. 내 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하는 말씀을 다 듣게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작은 이들의 벗이 되는 교회
예수님은 훌륭한 나라, 대형나라에 오신 것이 아니라 가장 작은 나라 이스라엘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훌륭한 도시로 오신 것이 아니라 시골 베들레헴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높은 자리로 오신 것이 아니라 가장 낮은 말구유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권력자로 오시지 않고 목수의 아들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화려한 예루살렘에 사시지 않고 나사렛에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좋은 옷 입으시지 않으시고 몸만 가리면 되는 옷을 입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화려한 곳에서 사역하지 않으시고 가장 낮은 갈릴리와 벳세다와 두로와 시돈에서 사역을 감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취하려 오신 것이 아니라 주러 오셨습니다. 생명의 떡으로 말입니다.
예수님은 죽이러 오신 것이 아니라 살리러 오셨습니다. 생명의 보혈로 말입니다.
예수님은 의인을 위하여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구원하러 오셨습니다.
그래서 하신 말씀이 오늘 본문입니다. 주님이 심판주로 오시면 심판을 어떻게 하시느냐를 가르쳐주신 말씀이 오늘 본문 말씀이 담긴 25장입니다. 심판을 하실 때 오른편과 왼편으로 구분하신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오른편에는 어떤 사람들이 가는 곳인가? 오른편에 있는 자들을 향하여 하신 말씀이 오늘 본문 34절입니다.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하나님으로부터 복 받을 자들이라고 하셨습니다. 예비된 나라, 즉 천국을 상속받으라고 하셨습니다. 이런 엄청난 복을 받을 사람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들인가요?
35-36절입니다. 주님이 주릴 때에 먹을 것을 준 사람입니다. 주님이 목마를 때에 마실 물을 준 사람입니다.
주님이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던 사람입니다. 모시고 들어와 자기 집에 재워주고 입혀주고 먹을 것을 준 사람입니다. 주님이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혀주었던 사람이요, 주님이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던 사람입니다. 주님이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면회를 해 준 사람입니다. 바로 이런 사람들이 천국을 상속받는다고 하는 말을 듣고는 이들이 예수님에게 되물었습니다.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37-39절).
이때 다시 심판자가 대답합니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40절).
다시 41절에 보면, 주님이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
그러면 왼편에 있던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42-43절 말씀, "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
왼편에 있던 사람들이 주님의 말씀을 닫 듣고는 되묻습니다.
주여, 우리가 언제 주께서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하지 아니하더이까?
왼편의 사람들이 한 질문에 대해서 다시 주님은 대답하십니다.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45절) 하시면서 다시 그들에게 영벌에 처하고 작은 이들의 벗된 삶을 산 사람들인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잘 살았다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겠습니까? 적어도 주님으로부터 인정받는 삶은 어떤 삶이어야 할까요? 오늘 말씀에서 분명히 해답을 주고 있습니다. "작은 이들의 벗된 삶"이어야 함을 말입니다. 작은 이들의 벗이 되는 경우가 무엇입니까?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참된 이웃에 대한 정의를 하신 것을 보면 여리고성을 지나가다가 강도만난 사람을 도와준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 사람은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참된 그리스도의 벗이 되려면 작은 이들의 벗이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작은이들을 돌보는 삶을 의롭게 보시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 예수님의 삶 33년이 어떤 삶이었습니까? 물론 공생애 3년 외에는 잘 나타난 기록이 없습니다. 그러나 3년동안 찾아다닌 사람들이나 만나서 행한 모습을 보면 예수님이 어떤 사역을 감당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삶을 좋아하시는가도 알 수 있습니다.
금년도에 우리교회가 지향해나갈 표어가 "성령의 능력받아 작은이들의 벗이 되는 교회"입니다. 그렇다면 작은이들의 벗이 누군가? 구체적으로 구분하면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겠지만 다 나열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교회는 여섯 유형의 사람들을 정했습니다. 작은이들을 지칭하는 말씀을 찾아볼까요? 우선 오늘 주신 말씀을 봅시다.
배고픈 사람, 나그네, 헐벗은 사람, 병드신 사람, 감옥에 갇힌 사람 등입니다. 그리고 레위기 19장에 보면, 근로자, 장애인, 재판받는 자, 원수, 동포 등입니다. 이를 종합하여 우리는 크게 여섯 유형을 생각하면서 중점적으로 돌보고 그들의 벗이 되고자 합니다.
가난한자, 장애인, 탈북자, 외국인근로자, 다음세대들, 그리고 미자립교회 등입니다.
그런데 성도 여러분, 제일 어려운 일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저는 감히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나눔이라고 말입니다. 남을 돕는다는 것이 쉬운 일 같아 보여도 실제적으로 해보면 쉬운 일이 아닙니다.
▶ 성경 속에서 위대한 인물, 세계 역사 속에서 위대한 인물, 아니 우리나라 역사에서 훌륭한 인물로 인정받는 사람들 중에 흔히들 말하는 재물의 부자가 있습니까? 별로 없습니다. 구약성경에서 부자로서 하나님의 부름 받아 쓰임 받은 인물이 누굽니까? 욥의 경우를 보면 부자가 되었고 가난하게 되었으나 믿음을 지킨 사람입니다. 그가 부자로 있을 때 부름 받았다기 보다는 하나님을 잘 경외해서 부자가 된 사람입니다. 물론 이삭과 야곱이 거부가 된적은 있지만 이미 선택된 백성의 삶을 살면서 얻은 복이었습니다. 그러면 신약시대에는 누가 있을까요? 예수님의 무덤을 제공했던 아리마대의 사람 요셉을 "부자 요셉"이라고 지칭하고 있습니다. 사실 삭개오가 부자일 때 부름을 받고서는 예수님을 영접한 후에는 가난한 사람으로 스스로 내려앉았습니다. 재산 절반을 잘라 주었습니다. 토색한 것 네배나 갚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유한한 재물을 가지고 영원한 것을 얻는 지혜로운 자였습니다.
그래서 잠언 23:4에 "부자 되기에 애쓰지 말고 네 사사로운 지혜를 버릴지어다"고 하셨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하여 주신 말씀 9:23절 말씀, "지혜로운 자는 그의 지혜를 자랑하지 말라 용사는 그의 용맹을 자랑하지 말라 부자는 그의 부함을 자랑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교회 모든 성도들이 작은이들의 벗이 되도록 합시다. 그들의 친구가 됩시다. 그들의 삶에 들어가서 함께 울고 함께 웃는 삶이 되도록 합시다. 예수님이 그런 삶을 보여주시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래서 떡을 나누어주면서 "이것을 받아 먹으라 내가 너를 위한 생명의 떡이라"고 하셨습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나누어 주었습니다. 자신이 누릴 영광을 다 나누어준 분들은 영원히 아직도 우리곁에 맴돌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켰던 1인분의 도시락, 전 재산인 향유 한 옥함을 깨뜨렸던 마리아, 자신의 전 재산이라 할 수 있는 동전 한 잎을 드렸던 여인, 자신이 묻힐 무덤을 주님을 위해 내어놓았던 아리마대 사람 부자 요셉 등입니다.
얼마나 가졌느냐 보다는 어떻게 얼마나 어디에 사용하였는가가 더 중요하지 않습니까? 그것이 물질만은 아닙니다. 당신의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 때문에 작은 이들의 마음을 추스르며 아울이다가 속이 상해 다 썩어 문드러지더라도, 다른 사람들의 삶이 회복되고 생명이 살아난다면 그것을 기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비록 보잘 것 없는 작은 것이라 할지라도 나눌 때에 위대한 역사를 일으킵니다. 예수님이 당신의 것을 다 나누었을 때에 온 인류가 구원받게 되는 통로가 열린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오직 주님만 위하여 살았을 때 세계에 복음이 증거되어 오늘 우리에게까지 이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 마산에 치과병원을 운영하는 박윤규 원장이 있습니다. 철도고등학교를 졸업하여 철도공무원으로 취직해서 근무하던 중 5개월이 지났을 때 사고를 당해 다리가 잘려나갔습니다. 그러나 비관하지 않고 4년 동안 열심히 준비하여 치의대에 들어가 공부하여 치과의사가 되어 병원을 차린 것입니다. 그는 지난 2011년도 7월에 아름다운 납세자로 표창을 받았지만 그 보다 더 아름다운 일을 많이 하는데 그것은 곧 나눔의 삶입니다. 이윤의 극대화 대신 나눔과 배려의 길을 선택한 그는 충만한 도덕적 실천 의지를 살려 더불어 사는 세상을 구현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치과 경영 외에도 마산대학 치기공과 외래교수로 후학을 양성하면서 16년째 지역사회에서 따뜻한 봉사활동을 펼쳐왔습니다. 또한 경제적인 문제로 치과 진료를 받지 못하는 저소득 계층 장애인들에게 진료비를 지원해주고, 15년간 매년 4명의 대학생에게 장학금을 지급하며 꿈과 희망을 심어주었습니다. 이 외에도 교도소 재소자들에게 무료 틀니 시술을 진행했으며, 지속적으로 국내외 의료봉사활동을 전개하며 질 높은 의료 서비스를 제공해왔습니다. 박 원장은 의료 환경이 열악한 베트남 오지에서 봉사활동을 펼쳐 지역민들의 건강을 증진시키는 데 기여하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나누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박 원장은 "자원봉사와 나눔은 최고의 가치이고 시민사회의 중요한 기반"이라면서 "사회적 책임을 다하기 위해 내가 가진 달란트를 최대한 활용해서 나눔에 대한 인식을 개선하고, 건강 사회를 이룩하는 데 일조하겠다"고 피력했습니다. 이런 자세는 기독교인이 가졍야 할 기본적인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작은 이들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고, 작은이들에게 하지 않는 것이 곧 내게 하지 않은 것이다’오늘 성찬의 나눔을 통해 우리도 예수님처럼 나눔의 삶을 삽시다. 그래서 반드시 우리 모두는 주님의 심판대 앞에 섰을 때 오른편에 서는 자들이 다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