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이 싱그러운 견훤산성에 올라 一周 후, 정교한 축성술에 감탄하는 野草, 海山, 樂山 의 모습...11:43:14
지난번 첫 산행(2019.10.04. 野草, 海山, 樂山, 牛步 4명)이 4년반이 흘렀네요...
野草의 수고로 화북면 장암리 문장대 가는 초입에 새로 조성한 넓은 주차장에 주차후,
칠형제 바위를 배경으로 樂山과 野草의 모습...09:43:56
주차장에서 신축한 교량( 첫 산행2019.10.04 때는 공사 중)을 건너서 도로로 나아간다...09:44:48
* 도로변 곶감생산지 건물과 뒤편에 신도비와 묘비(金海金 中始祖 51世 牧卿 金寧君)가 보인다.
"견훤산성 700m(계속 가파른 오르막 길)" 안내판을 따라 계단 길을 오르기 시작한다....09:47:01
좌측 아래 산소는 둘레를 사각 석조물로 설치하여 산짐승 피해도 막고, 관리에 편의를 가져온다...09:47:40
金寧君 順天金公諱秀漢之墓 配孺人昌寧曺氏合窆(합폄) 子 侊熙 鉉熙 挽熙 孫 憓鉦 珉珠
진달래 꽃 봉우리가 내밀어서 봄을 기다리는 마음을 알아준다....09:56:58
우측의 공간에서 편히 앉아서 따뜻한 차로 숨을 고른다....09:58:32
野草가 발견한 산소 위의 이끼에 붉은 꽃이 피어, 처음보는 모습이 신기했다....10:10:20
지름길을 "등산로 폐쇄(閉鎖)"로 막아 놓아서 야자 멍석을 깔아 놓은 우회 길로 올라간다...10:22:57
( 등산로 폐쇠는 폐쇄의 誤記)
급경사지대의 바닥에 깐 야자 멍석은 폭우로 인한 굴파를 방지하기 위한 것 같다.... 10:25:23
급경사 위쪽에 대형 바위를 감쌓고 축조한 거대한 "견훤산성"의 높은 성벽이 보인다....10:29:00
앞 서서 오른 野草와 樂山이 "견훤산성"을 올려본다....10:30:30
거대한 바위가 "견훤산성" 입구의 돌출한 망대 부분이다....10:34:31
바위의 글씨 : 北便 有 三重大匡 金寧君 金海金公 諱牧卿之墓(북편 유 삼중대광 금녕군 김해김공 휘목경지묘)
* 三重大匡 (고려시대 일품 벼슬)
견훤산성 안에 있는 양지바른 "김녕군( 金海金 중시조 51세) 산소에서 野草, 海山, 樂山의 모습.....10:45:24
* 海山은 金海金 74세...산소에 참배함.
망대에 올라서 바라 본 "청화산"의 웅장한 모습과 계곡의 장암리 마을 모습....10:52:13
망대에서 내려 본 "시루봉과 장군봉"의 능선과 우측의 승무산의 모습....10:52:38
망대에서 바라 본 "도장산과 갈령 고개", 우측의 시무산과 화북면 소재지 풍경....10:53:07
가파른 성벽을 따라 낙엽을 밟으며 올라간다...10:58:48
성벽으로 둘러 쌓인 대형 저수용 공간 같다....10:59:19
속리산의 칠형제봉을 배경으로 망대 안쪽에서 봄날을 몸으로 느끼는 野草, 海山, 樂山의 모습....11:12:59
허물어진 망대에 올라 속리산 칠형제봉에 흠뻑 젖은 海山의 미소....11:13:50
* 野草 촬영
"견훤산성"을 돌아서 처음 들어선 입구 방향의 망대에서 간식을 하며 탁월한 선택인 오늘 산행에 감사하고,
자연 암반을 기둥으로 정교하게 쌓아 올린 축성술에 감탄한다.....11:21:27
항상 우리를 이끌어주는 등산대장 樂山의 강건한 모습....11:44:23
多情多感 산행 회장 겸 총무일에 노고가 많은 野草의 모습....11:44:42
오랜만에 다시 찾은 견훤산성을 온몸으로 즐기며 미소짓는 海山....11:45:16
"견훤산성" 중에서 가장 정교하게 쌓은 높은 산성이 보존되고,
근간에 보수를 통하여 옛 모습을 갖추어 가고 있다...11:45:55
대형 자연석을 입구의 망대로 이용한 "견훤 산성"의 모습.....11:48:54
견훤산성(甄萱山城) 경상북도 기념물 소재지 : 경북 상주시 화북면 장암리 산42
장바위산(해발541m) 정상부를 에워 싼 테뫼식 산성으로, 견훤이 쌓았다 해서 견훤산성이라 부른다. 견훤(甄萱)은 상주 가은현(지금의 문경시 가은읍)에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신라의 비장(裨將)으로 있다가 효공왕(孝恭王) 4년인 900년에 완산주(完山州, 지금의 全州)에 후백제를 세웠던 인물이다. 산성은 대체로 사각형을 이루고 있는데, 산세와 지형을 따라 최대한 활용하여 천연절벽과 성벽의 조화를 이룬다. 성의 둘레는 650m정도이며, 성문이 있었던 터인 문지(門址) 2개소, 성벽에서 적이 접근하는 것을 관측하기 위한 치(雉) 3개소. 물을 모으기 위한 시설물인 집수지(集水址) 1개소가 있다. 이 산성은 보은의 삼년산성(사적 제235호)과 쌓은 방법이 비슷한데, 정교하게 쌓은 우리나라에서 보기드문 삼국시대 산성의 하나이다.
돌아오는 길은 지름길을 통하여 내려와서 "등산로 폐쇄" 안내판으로 나왔다....11:52:55
도로에서 올라오는 초입의 "순천김씨" 산소를 금방 내려왔다(16분 소요, 오를 때 45분).... 12:04:11
주차장에 내려와서 멀리 골짜기를 가로 막은 멋진 "칠형제봉"을 다가가서 보니 아기자기하다...12:09:53
주차장에 도착하여 신발 속을 털어내고 출발 준비....12:10:14
장암리 " 문장대 회 가든"에서 송어회로 중식을 하고, 오복동으로 간다....
귀가 길에 농암 통로 변에 유명한 동천암( 상주시 화북면 용유리 산14번지 )을 탐방한다.....13:13:06
동천암(洞天岩) : 바위에 쓰인 글씨가 동천(洞天)이라고 동천암이라고 하며, 바위와 글씨 획의 길이가 똑같이
오장(五丈)이어서 오장비(五丈碑)라고도 한다. 동천이란 신선들이 사는 세계라는 의미로, 신선들이 살만한 명산계곡의 승경(勝景)을 이르는 말이다.
* 장( 丈) : 한자(尺)의 열 배로 약 3m * 승경 (勝景) : 뛰어난 경치
동천암(洞天岩) 옆에 세운 " 牛腹洞" "鄕土史蹟碑"를 둘러 보고 있다....13:14:23
우복동(牛腹洞) 향토사적비(鄕土史蹟碑)
천지가 剖判할제 別有乾坤하였으니 즉 속리산 우복동이다. 백두대간이 種精(종정)하고 洛東과 漢 錦江 三波가 발원한 명승이다. 예부터 군자가 은덕하고 고승이 수도하여 인걸이 끊이지 않는다. 城邑國家時代에 壯巖山城을 쌓아 요충이 되었으며 신라 때는 원효가 원적사를 창건하고 의상이 청화산에서 설법하여 의상대가 되었으며 천황봉에는 왕비암이 있어 주봉과 조화를 이루었다. 고려시대에는 장각동에 대찰을 창건하여 당시에 쌓은 칠층석탑이 문화재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중기에 김령군 김목경이 퇴거하였으며 그의 묘소가 장암산성 안에 있다. 조선에서는 세조가 行幸하여 文莊臺 侍御洞 御臨臺 등이 得名하였고 이 山의 葛에 二品松과 같은 기적이 생겼으며 名筆 楊士彦이 洞天을 써서 五丈碑가 되었고 늑천 宋明欽이 甁泉精舍에 隱居하여 山水에 聲色을 더했다. 韓末에는 志士들이 抗日하는 地方이 되어 義士 李容曄(이용엽)은 殉國하였고 도창의대장 李康秊(이강년)의 屍身은 李聖範과 李元宰에 의하여 제천에서 乻峙(얼치. 늘치)로 移奉하였으며 만세사건으로 李聖範 李容晦(회)는 옥고를 겪었다. 한편 후진의 교육을 위해 李重哲이 同志와 함께 華東講習所를 개설하여 中堅을 養成하였다. 광복 후에는 地方有志 李容元 李聖範 李騵植 李世伯 林鶴植 宋晟澤 禹鐘泰 崔善璣 등이 三大事業期成會를 결성하여 개발을 주도하고 鄭在元 校長과 朴鐘浩 面長이 협력하며 白壽永이 中學校, 市場, 支署의 敷地를 喜捨하여 中學校를 창립하고 시장을 개설하며 쌍룡도로의 개통을 추진하는 등 업적이 많았다. 또한 難民事業이 三峯江邊億石洞 貴賓來同에 實施되어 근백호가 정착함으로써 시장이 발전하고 농지가 확장되었다. 민국초기는 未曾有의 수난기로 좌우익이 鬪爭하면서 지서가 被襲全燒되어 치안이 혼란하였고 동란 때는 갈령에서 月餘(한달 남짓)나 격전을 벌렸으며 收復時는 龍華에서 彼我攻防이 치열하여 많은 殺傷을 내는 悲劇이 있었다. 근래 새마을 운동으로 근대화의 물결이 드높을 때 庚申 大洪水로 산천이 陸夷하여 從來의 僻地로 되돌아갔다. 그러나 官民이 이를 轉禍爲福의 契機로 하여 尙州槐山間 도로를 확장하고 咸昌報思線을 개통하며 속리산과 도장산국립공원 및 용화온천의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고, 알찬 개발을 위하여 1989년 갈령을 경계로 화남을 분할하였으며 忍濟는 文藏寺 大伽藍을 創建하고 있다. 이제 21세기를 목전에 두고 우리 모두의 자각으로 침체에서 벗어나 새 역사를 창조할 때가 되었다. 역사는 기록하는 것이라 했다. 이 비가 華東勝覽과 함께 향토사의 첫걸음이 되어 앞날 이 故庄이 發展하는 과정을 계속 기록하여 영원히 빛나는 향토사가 되도록 하는 것이 오늘에 사는 우리들의 염원이며 이 비를 세우는 뜻이라 하겠다.
西紀 1997年 10月 日 前 化北面長 金子相 謹撰 明倫會長 宋秉俅 謹書
* 謹撰 (근찬 : 삼가 짓다) 謹書(근서 : 산가 적다)
"계산 시비" 민선 화북 면장. 화북학원 설립. 성균관부관장 계산 박종호(1913~1986)
성균관에서 보내다 광복 때
운이 우리나라에 돌아와 뭇 백성 소생하니 광복을 맞아 원통함이 풀렸네.
온 나라 문물은 정숙을 되찾고 단군의 긴 역사 다시 밝아 오네.
외래 문무는 무기를 숭상하는데 나라 안에 어진 산하 철옹성 같다.,
이로부터 세상이 한 이치로 뭉치는데 여러 사람의 뜻은 어찌 갈피를 못 잡는고
"농포 시비" 초대 화북면장, 화북학원 설립 농포 이용원(1894~1966)
첫댓글 籠巖 雙龍터널 지나면 化北이다.面所在地 壯巖里에서 俗離山으로 가는 널찍한 道路를 따르면 右測으로 봉우리가 눈에 들어온다.登山客들은 스쳐 지나가지만 壯바위산(541m)에 甄萱山城이 있다.'甄萱山城 700m'라 쓰여진 標識板을 따르면 산길이 始作부터 傾斜가 가파르다.風景은 마사토에 소나무 우거진 典型的인 野山 모습이다.숨이 턱 끝까지 차 오를 무렵이면 나뭇가지 사이로 城壁이 눈에 들어오고,東壁에 올라서게 된다.山城은 出入口에 該當하는 東壁이 原型 그대로 復元됐고,나머지는 옛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頂上을 中心으로 둘러쌓은 테뫼식 山城이기에 反時計方向으로 한 바퀴 돌았다.標高에 比하여 展望과 眺望이 매우 뛰어나서 이곳은 疊疊山中의 中心임을 單番에 느낀다.東-僧舞山과 시루봉,南-道藏山과 靑溪山,西-俗離山과 文章臺.-北-白岳山과 淸華山의 壯快한 延陵이 넋을 잃게 한다.특히 成佛寺 뒤로 이어지는 七兄弟바위와 文章臺로 向하는 岩陵地帶는 金剛山이 聯想된다.旣存 自然石의 原形을 살려둔체 造成한 山城은 直四角形 조금 磨耗된 강돌을 規則的으로 配列한 築城術은 記憶에 오래 남을 遺蹟이다.마침 地自體에서 史蹟 指定을 위한 學術大會를 한다고하니 期待하는바가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