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극.
비극, 삶 이것은 이음동의어. 멋들어진 비싸고 탐욕스러운 명품 시계 바늘도 언젠가는 멈춘다. 잠잠하고 고요하게 나마 울리던 시계 초침 소리는 어느 순간 두렵고 괴이할 정도로 무에 다다를 것이다. 시간이 흐른다면 그 침묵만이 그 시계를 설명할 것이다.
인류의 비극은 어디에서부터 시작 되었나. 우리는 이런 질문에 대해 고찰해봐야 한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이 이 비극을 전개 시킴에 있어서 방향을 잡는데 도움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저 하염없이 푸른 하늘만을 보며 살 것인가, 혹은 그 하늘에 닿으려 사다리를 쌓을 것인가. 이 갈림길 중 하나로 들어가는데 참고할 만한 결론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아담과 하와에서부터 였나? 속임수 많은 뱀에서부터 였나? 혹은 순례의 길을 벗어난 악귀인가? 신들 앞에서 범죄한 죄 많은 영웅인가? 누가 인류의 역사를 그저 비극의 줄거리로 추락시켰나. 벗어날 수 있는 영역에 속하였는지 혹은 도저히 어찌 할 수 없는 불가지한 것인지 궁금한 것이 당연하다. 그 시작이 만약 인간에게서 였다면 어째서 그 극복은 인간에게 불가지한 것이겠는가. 희망을 잡으려 한다면 답은 인간에게서 시작 된 것이다. 인간에게서 시작 된 것이라면 인간으로써 무마할 수 있을 것이니. 만약 이 비극의 첫 문장이 하늘에 의해 써진 것이라면 이것은 참으로 좌절 밖에는 없구나. 그 씁씁하면서도 참을 수 없이 고통스러운 감정을 우린 오이디푸스, 그의 이야기를 통해 깨달을 수 있다. 그렇기에 우리의 비극은 반드시 나의 힘에 권한으로 생겨나고 사라져야만 한다. 인간으로써 발생시키고 완화할 수 있어야 한다. 만약 신에 의한 것이라면, 신도 어찌할 수 없는 운명에 관한 것이라면 나는 비극에서 벗어날 수 없기에 도망칠 수도 없고, 도망칠 수 없기에 살아갈 수 없다. 그저 불길을 기다리며 푸른 하늘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렇기에 조금이라도 희망을 가지고 살아가기 위하여 우리는 이 비극을 우리 탓으로 돌릴 필요가 있으며 그로 인해 우리 힘으로 다시 벗어날 수 있다고 믿을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그 비극은 무엇인가. 삶과 비극이 같아 일컬음을 받는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가 어찌 오이디푸스가 겪은 그 힘든 경험을 공감할 수 있으리. 아비를 죽이고, 어미의 남편이 되어 자식으로써 자식을 낳는 그 고통을 어찌 공감할 수 있으리. 견딜 수 없는 고통의 구렁텅이 속에 자신의 모든 것을 파괴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자해하는 이 감정을 어찌 공감할 수 있으리. 그의 영웅적인 과거도 공감할 수 없지만 비참한 최후 또한 그만큼, 혹은 그보다 더욱 공감할 수 없으리. 다만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것이 있으니 바로 죽음이라 불리는 종지부, 삶이라는 희곡을 비극의 장르안에 가두는 역할.
누가 죽음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 이것이야 말로 우리가 최소한 오이디푸스에게 공감할 수 있는 요소임이 틀림없다. 벗어날 수 없는 운명, 자세히 말하자면 괴롭고도 견딜 수 없는 감당치 못할 운명. 내가 그처럼 두 눈을 잃을 수는 없어도 평생의 모든 생각과 활동, 나의 신체와 철학을 전부 잃을 수 있다. 내가 그처럼 평생 자신에게 내려진 신탁으로부터 벗어나려 애쓰며 고통속에 살수는 없어도 평생을 피할 수 없는 것이 확실한 필연-죽음 앞에 생각이 절여져 매순간 공포를 느끼고, 비참한 최후에서 벗어나지 못하다는 사실을 인지한체 살수는 있다.
긴 시간 속 그저 잠깐 반짝일 뿐인 우리의 비극은 책 속의 한 단어, 그 속의 자음만도 못한 것이다. 그렇게 멀리에서 봤을 때에 우리의 삶과 죽음은 마치 하나와 같아서 삶이 곧 죽음이고, 죽음이 곧 삶이다. 행복한 삶이란 것이 존재하지 않는 이유는 행복한 죽음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저 산다는 것이 죽음이고 죽는 다는 것이 삶일 뿐이다. 그러니 과연 누가 행복하다 할 수 있겠는가? 영웅인 오이디푸스도 그 최후에 모든 것이 무의미와 고통으로 돌아갔는데 일반적에게 고통속에서 사는 우리에게 죽음이라는 최후는 이 삶의 모든 의미와 즐거움을 한순간에 앗아갈 것이 분명하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현재를 사라가지 않겠냐고, 이 시간 느끼는 이 즐거움과 행복을 누가 부정할 수 있겠냐고, 그러니 지금 이 시간을 즐기며 살아가야 하지 않겠냐고. 현재에는 현재만 있는 것이 아니다. 과거의 추억과 미래에 대한 생각이 공존하는 것이 인간이 느끼는 현재이다. 과거의 대한 후회와 미래에 대한 걱정이 있는 것이 인간이 느끼는 현재다. 미래에는 죽음이 있다. 그 견디기 힘든 걱정 속에 현재를 온전히 즐기는 것이 가능한가? 가능하다면 그것은 진실을 외면한 체 자신을 세뇌하는 짓일지 모른다. 그럼, 굳이 생각하려 애쓸 필요 없지. 그럼, 세뇌를 당해서라도 현재를 즐기는 것이 가장 최선의 선택일지 모르겠다. 과연 이런 것이 가능할까? 가능하다면 그 기간은 어느정도 인가. 평생? 확신할 수 있다 평생은 불가하다. 길어도 한 분기일까? 아니면 한 시간일까? 그 시간이 끝나면 뒤 늦게 밀려오는 파도 같은 후회감은 어떠할까? 즐기기 위하여 서로 무대를 짜 맞추고 연습한 연극이 끝난 후 메이크업을 지운 체 하얗게 열정을 불태우고 더 이상 아무런 감정을 들지 않는 그 눈동자를 서로 마주 볼 때에 느낌은 어떨까. 다시 담배 연기나는 길거리를 걸을 때에 이질감은 어떠할까?
미래에는 걱정이 과거에는 후회가. 무슨 후회일까. 결과가 정해져 있는 극에서의 전가 과정이 무엇이 중요하리, 결국은 결론을 극대화할 뿐 아니겠는가. 죽음이라는 결론에서 많이들이 각기 다른 과정은 전개할 것이다. 이것들을 정리해보자면 열심 살다가 죽고, 힘들게 살다가 죽고, 즐겁게 살다가 죽고, 막 살다가 죽고, 분노에 가득 빠져 살다가 죽고, 불행히 살다가 죽고, 복에 겨워 살다가 죽는 것이다. 이것보다는 저것이 더 낫다고 할 수 있지만 죽음은 이 모든 과정을 초월한다. 그러니 점점 자신의 결론과 가까워 질때에는 후회밖에는 남지 않는 것이다. 조금 더 놀았더라면, 조금 더 열심이었더라면, 조금 더 복이 있었다면, 조금 다른 길을 갔었더라면... 끔찍하게 두렵지만 벗어날 방도가 없는 죽음 앞에 사람은 그렇게 핑계 거리를 하나씩 늘려 가는 것이다. 만약 그 원하는 데로 희곡의 전개를 바꾸어도 결국은 비극인 것은 변함이 없다.
오이디푸스의 이야기를 들으라. 모든 것이 협력하여 결국 무엇을 이루는가. 우리는 무엇을 향하여 살며, 모든 삶의 순간이 협력하여 무엇을 이루는가. 죽음이라 불리는 운명의 장난, 삶의 모든 의미를 무로 만드는 장본인 아니겠는가. 태어나 처음 숨을 쉴 때, 어쩌면 그 전부터 죽음으로 이어지는 그 얇고 기나긴 절대 끊어지지 않을 선. 그 선은 너무 얇아 굳이 의식하지 않으려면 쉽게 넘어갈 수 있어 보일 수도 있다. 내 삶에 가끔 생겨나는 조금 더 굵고 날카로운 선에 더욱 주목하여 살 수도 있다. 그렇게 나의 인생이 그런 보다 더 굵고 빛나는 선을 따라 사는 것 같고, 나의 행동으로 인하여 피하고 싶은 선은 피하고 얻고 싶은 선은 얻은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결국 으 모든 선이 사라지고 은은하게 항상 내 곁을 맴돌던 저 얇고 긴 선만이 남은 것을 보고 모든 이들은 개탄할 수 밖에 없으리. 지금까지 쌓아 올렸던 모든 순간이, 지금까지 모아온 모든 것들이, 지금까지 자신의 삶을 희생하고 협력하여 이룬 결과물이 다시 전부 협력하여 결국 죽음이라는 서늘한 선을 만들어 내는 것을 보고 그저 회의감만이 가득하리다. 여태까지 삶에서 여러 가치를 쫓고 또한 성취하며 나아갔더라도 더이상 쫓을 것이 죽음 밖에 없는 그 상황, 성취해 나갈 것이 죽음 밖에 없는 상황은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자신의 모든 성취가 그 죽음 앞에 넘어져 아무것도 남기지 못하고 산산아 부셔지는 것을 보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죽음이라는 결론 앞에 그 인물이 주연인지 조연인지, 영웅인지 악당인지 무슨 소용이겠는가. 모든 것이 무로 돌아가버릴 텐데. 이 비극에서는 모두가 오로지 한 역할만을 부여 받았다. 필멸자.
누가 행복하다 일컬음을 받으리요? 누가 의미 있는 인생을 살리요? 긴 한순간의 즐거운 추억으로 전 인류의 비극적인 운명을 대체할 수 있으리요? 필멸자들이여 그대들이 무에서 무로 가는 여정 중에 얻은 모든 것이 무슨 유를 낳으리요? 결국 무에서 무 유 같은 희망은 이 비극과는 안 어울리는 것입니다. 그러니 받아 드리길 그대의 무를. 이 인간이 벗어날 수 없는 비극적인 무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