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동 감독, ‘박하사탕’
방금 박하사탕을 보았다.
몇 번이고 봐도 지겹지 않는 영화다.
영화 속, 남자 주인공 설경구의 시간과 나의 시간은 정확히 일치한다.
각각 시간의 사건과 대사들은 마치 내가 겪은 듯 생생하다.
과거 늘 보아왔던 주변인들의 사실들이 마치 내가 그랬던 것처럼 실감난다.
이야기의 결말에서 시작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방식으로 영화가 진행된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플래시백이 특징으로 한국현대사의 비극과 맞물린 개인의 불행을 첫사랑의 기억, 박하사탕의 맛, 광주 민주항쟁에서의 오발 사고, 타락해 가는 자신의 모습을 시간적 역순으로 배치하여 독특한 플롯을 짜고 있는 최고의 한국 영화중 하나라고 말하고 싶다.
각각의 심각했던 사건들을 희화 할 수 있는 이창동의 소설가로서의 면모를 보여준다.
20년만의 야유회가 열리던 날. 느닷없이 설경구가 나타난다.
그는 이미 실성한 모습이다. 의아한 눈길로 설경구를 바라보는 친구들. 설경구의 광기는 더욱 심해지고 급기야는 철교 위에 올라 울부짖는다.
거꾸로 가는 기차를 따라 시간을 거슬러 가면 설경구와 나의 과거가 펼쳐지는 것 같다.
자살할 수 밖에 없는, 구원 받을 수 없는 인간에서 점점 순수한 모습으로 돌아간 설경구는 박하사탕 싸는 일을 하는 문소리를 처음 만나 그녀가 건넨 박하사탕을 먹는다.
둘은 첫사랑을 느낀다.
박하사탕의 색깔과 맛 같은 첫사랑의 순수한 시간인 것이다.
<박하사탕>은 20년의 시차를 두고 순수한 청년에서 파괴당한 중년으로 변질된 설경구의 인생 유전을 단계별로 여행한다. 1999년 IMF 외환위기에서 출발해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으로 귀결되는 역 연대기의 궤도를 탐험한다.
<박하사탕>은 한국 사회가 군사독재에서 현대 자본주의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거쳐간 정치적 사건들과 사회적 문제, 폭력, 타락의 기원을 모두 보여준다.
시간은 앞으로 가지만 스토리 시간은 뒤로 흘러가는 시간의 역설을 형상화한 내거티브 설계 안에서 설경구의 반응과 행위는 현대의 관점에서 역사적 사건들을 재평가할 기회를 제공한다.
이 같은 시간의 뒷걸음의 플롯은 한국 영화의 뿌리 깊은 자연주의 전통을 파기하면서 역사와 픽션이 엇물린 새로운 한국 영화의 시대를 열었다.
문소리가 설경구의 면회에 실패하고 돌아오는 길, 군인들의 야유에 슬쩍 미소짓던 모습이 아른 거린다.
아마 지금 같았으면 성추행으로 고소 당했을 터지만,
과거의 여자들은 그런 것들 조차 애교스럽게 남자들을 용서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