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삼각 지붕을 얹은 노란 집 행와재는 모악호수마을에서도 가장 눈에 띈다. 이 집에는 정신과 의원 원장인 김형일, 병원상담소 소장 이가영 부부와 여덟 살 김준형, 일곱 살 김시형 형제가 살고 있다.
완만한 모악산 산등성이에 포근히 안긴 완주군 구이저수지 둘레, 주택들이 하나 둘씩 형태를 갖춰 이제 막 공동체를 이뤄가는 마을이 있다. 곧 1백60가구의 보금자리가 될 모악호수마을은 2010년부터 완주군에서 계획ㆍ조성해 분양한 마을이다. 벽돌을 차곡차곡 쌓아 기와를 얹은 집, 묵직한 목조 주택, 노출 콘크리트 방식으로 지은 현대식 건물… 어느 집 하나 똑같은 모양 없이 개성을 뽐내는 이 마을에 멀리서도 유난히 눈에 띄는 집이 있다. 눈ㆍ코ㆍ입이 달린 듯한 삼각 지붕과 생동감이 살아 있는 노란 색상이 돋보이는 행와재行臥齋. 그 야말로 ‘귀엽다’는 형용사가 절로 나오는 이 집에는 김형일ㆍ이가영 부부와 김준형ㆍ김시형 형제, 네 식구가 산다.
1 뒷마당과 주방을 연결해서 가족이 뒷마당의 테이블 공간을 좀 더 자주 사용할 수 있도록 설계했다. 2 현관에 다다르기 전에 지나가는 주차장. 본래 차를 주차하기 위해 만든 공간이지만 실제로는 동네 아이들의 놀이터나 다름없다.
건축주의 꿈과 건축가의 야심이 담긴 프로젝트
행와재는 10개월 동안 해외로 파견 근무를 떠난 집주인과 카톡으로 대화하며 ‘이보재’를 지은 김동희 소장이 설계했다. 김형일ㆍ이가영 부부는 작년 9월 즈음 ‘카톡으로 지은 집’ 이보재와 전라북도 건축문화상 준공 부분 은상 수상작인 익산의 ‘티 하우스’를 보고 김동희 소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당시 티 하우스를 보고 연락한 사람이 워낙 많았기에 김동희 소장은 수화기 너머 들리는 목소리의 진심을 의심했다고 한다. 그런데도 그가 통화를 끝내고 부부를 만나기 위해 전북 완주군으로 곧장 달려간 건 어쩌면 행와재의 운명이었는지 모른다. 가는 길에서도 의뢰인의 진실성에 반신반의하던 김동희 소장은 진심을 다해 자신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부부의 모습 앞에서 의심이 눈 녹듯 사라졌고 건축주와 건축가는 그 자리에서 계약을 맺었다.
훌륭한 건축물이 탄생하려면 건축가와 건축주의 궁합이 좋아야 하는 게 당연지사. 거기에 비용과 시간까지 넉넉하다면 금상첨화다. 행와재는 첫 번째 조건을 안고 태어났다. “잘 진행되는 프로젝트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만약 건축주가 부부라면 부부 중 한 사람만 주도해서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것이죠.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가듯이 한 명이 이끌고 다른 한 명은 자신이 원하는 몇 가지만을 정확히 요구할 때 가장 원활하게 일이 진행됩니다. 이번 프로젝트는 남편분이 한 발짝 물러서고 아내분이 주도하는 모습에서 첫 느낌이 좋았습니다. 특히 부부의 통쾌한 결단력, 건축가를 믿고 맡겨주는 모습이 마음을 움직였어요. 그래서 이건 일이 아니라 건축가로서 정말 잘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1 2층 아이 방 안에 있는 침실. 집을 지을 때 자작나무 합판으로 2층 침대를 제작했다 .
2 건축가는 주방과 거실 사이에도 골목처럼 좁은 복도를 만들었다. 창문 밖으로 앞마당이 보인다.
김동희 소장이 말한대로 행와재 프로젝트는 아내인 이가영 씨가 키를 잡았다. 중학교 과학 교사를 지낸 그는 작년에 교직을 떠나며 퇴직금을 받자 가장 먼저 네 식구가 살 집을 지어야겠다고 결심했다. 평소 건축에 관심이 많아서 이런저런 관련 서적을 들춰보곤 하던 그에게 영감을 준 것이 김동희 소장이 설계한 이보재와 익산의 티 하우스다. “작년에 <행복>에 나온 이보재 기사를 보았는데, 건물 2층이 공중에 떠 있는 구조부터 색감 등 모든 게 좋더라고요. 그러다가 어느 날 지인이 익산에 유명하다고 알려준 집을 인터넷으로 검색했는 데 정말 멋있더라고요. 알고 보니 이보재를 지은 김동희 소장이 설계한 집이었어요.” 건축에도 스타일과 취향이 있다면 김동희 소장이 설계한 집은 어떤 공통 지점에서 이가영 씨를 잡아당기는 매력이 있는 게 분명했다.
3 아이 방에서 보이는 안방 입구. 낮은 계단을 사이에 둔 아이 방과 안방은 거의 하나의 공간이나 마찬가지다.
4 이 집에 있는 모든 창은 철저하게 계산해 설계했다. 아이 방에 있는 가로 창문 밖으로 모악산의 완만한 산등성이 보인다.
5 왼쪽에서 바라본 행와재 외관. 건물 뒤 주차장 안으로 들어가면 오른쪽에 빨간 현관이 나타난다.
골목을 지나 담장 사이로 마주한 행와재
부부가 김동희 소장에게 요구한 것은 ‘골목 사이 집’과 ‘후정後庭’, 단 두 가지였다. 나머지 부분은 모두 전문가인 건축가에게 맡겼다. 담장을 지나 정원 사이로 들어가는 집을 짓고 싶다는 부부를 위해 김동희 소장은 건물 앞이 아닌 뒤에 현관을 만들어 담장처럼 건물을 돌아 집 안으로 들어가도록 설계했다. “사실 행와재는 주택 설계의 정석을 한참 벗어났어요. 현관이 건물 뒤로 쑥 들어가서 한참 찾아야 하죠. 이건 골목을 통해 들어가는 집이면 좋겠다는 건축주의 바람을 은유적으로 실현한 겁니다.” 건물 뒤에 승용차 한 대가 들어갈 만한 주차 공간이 있고 좀 더 들어가면 콘크리트 담장 오른쪽으로 빨간 현관문이 나 있다. 집 안에도 골목처럼 좁은 복도를 만들었는데, 거실과 주방을 연결하는 복도 한 면에 큰 유리창을 설치해 밖으로 앞마당의 정원이 시원하게 보인다.
1 1층에서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벽을 부부와 아이들의 책을 보관하는 수납장으로 활용했다.
2 다락방은 2층에서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야 닿을 수 있는 숨은 공간이다. 아이들은 이곳에서 천체망원경으로 하늘을 관찰한다.
현관을 들어가서 바로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앞마당 자리에는 낙상홍을 심었다. 빨간 현관문을 열면 눈앞에 펼쳐지는 빨간 열매 나무. 어릴 적 추억은 사진 한 컷처럼 어렴풋한 이미지로 남는다고 생각한 김동희 소장이 두 아이에게도 그런 기억을 심어주고 싶다며 제안한 아이디어다.
꽃과 나무를 키우는 걸 좋아하는 이가영 씨가 단독 주택을 짓겠다고 결심하고 꿈꿔온 것은 무엇보다 정원이 있는 마당이다. 부부가 일부러 남북으로 길쭉한 땅을 골라 구입한 것도 그런 이유. 앞마당과 뒷마당을 만들어 해가 넘어가며 그늘진 뒷마당에서 좀 더 시간을 보낼 수 있기 때문이다. “후정은 건축주가 원래 요구한 부분입니다. 그런데 제 나름대로 독특하게 만들어주고 싶었어요. 이 집이 마을에서도 위치가 정말 좋아요. 바로 옆에 다른 집이 지어져도 후정에서는 집과 집 사이로 구이저수지가 보이거든요. 저녁에 바비큐를 해 먹으면서 풍경을 감상하기도 좋은 자리죠.” 그래서 건축가는 후정을 만들면서 자신의 욕심을 드러냈다. 경골 목구조 주택에 뭔가 새로운 것을 보여주겠다고 작정하고 목구조에 노출 콘크리트 방식을 접목했다.
3 아이들이 밖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길 바란다는 부부는 이사를 오면서 거실에 텔레비전을 놓지 않았다.
4 2층 아이 방 창문을 열면 지붕 끝으로 구이저수지가 보인다.
예산이 넉넉지 않은 데도 나무와 콘크리트를 함께 사용해서 작업하는 건 비용 측면에서 일종의 도전이다. 김 소장은 현관문 맞은편에 건물 2층을 지탱하는 벽, 후정의 바닥과 ‘ㄱ’ 자 테이블을 콘크리트로 제작했다. 이는 부부가 가장 마음에 들어 하는 부분이자 이 집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몇 가지 포인트 중 하나다. 한편 뒷마당에 콘크리트 테이블이 있다면 앞마당에는 ‘사색의 의자’가 있다. LED 조명등이 달려 있는 이 콘크리트 벤치는 캄캄한 한밤중에도 이 집을 밝혀주는 보디가드다. 행와재는 다락방이 딸린 2층짜리 주택이다. 1층에는 거실과 주방, 2층에는 아이 방과 안방을 두어 부부는 아래층과 위층의 생활 패턴을 확실히 구분하고 싶었다. “낮에는 1층에서 마음껏 뛰어놀고 저녁에는 2층에서 가족끼리 오붓하게 모여 휴식을 취하기 위해 공간을 둘로 나누었어요.” 2층의 안방과 일곱 살, 여덟 살 형제가 함께 쓰는 아이 방은 계단을 사이에 두고 거의 한 공간에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5 행와재의 입구. 골목으로 들어가 정원을 지나서 들어가는 집이면 좋겠다는 건축주의 바람대로 김동희 소장은 건물 뒤 주차장 끝에 담장을 만들고 빨간 현관을 건물 깊숙이 넣어 설계했다. 6 2층 안방에 있는 테라스에 나오면 구이 저수지가 보인다. 왼쪽 벽을 뚫어 경관을 즐길 수 있도록 했다.
예쁜 집보다는 편한 집
행와재에는 가구가 열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로 적다. 아파트에서 단독 주택으로 이사하면서 짐을 최소한으로 줄여 살겠다고 결심한 부부는 가구를 새로 구입하기는커녕 쓰던 가구도 웬만하면 처분했다. 몸집이 큰 가구는 주방의 식탁, 거실 소파, 피아노, 침대와 책상 등이 전부다. 두 아이의 장난감이나 책을 보관하는 수납공간은 집을 지을 때 자작나무 합판으로 붙박이 책장을 만들어 해결했다. 몇 안 되는 살림살이로 단순해진 집 안에 색색의 창문이 장식품 역할을 한다. 태양의 위치와 조도에 따라 실내에 들어오는 빛의 느낌이 천차만별이다. 반대로 어두운 밤에는 집 안을 밝히는 조명이 색유리를 통해 알록달록하게 뿜어 나와 멀리서도 눈ㆍ코ㆍ입이 달린 삼각형 집이 눈에 들어온다. 그래서 부부는 캄캄한 밤에 빛을 밝히는 행와재를 본 동네 주민들에게 칭찬 아닌 칭찬을 자주 듣는다고 한다.
이보재에서 색을 넣은 유리창을 처음 사용한 김동희 소장은 값비싼 재료를 사용하지 않고 건축가의 아이덴티티를 가장 효과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것이 빛이란 걸 깨달았다. 교회나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처럼 유리를 투과해 들어오는 빛은 사람을 무아지경에 빠뜨리기도 한다. 언뜻 보면 행와재의 창문이 무분별하게 뚫린 듯하지만 김동희 소장은 이 집에는 쓸모없는 창문이나 장식은 하나도 없다고 말한다. 정확히 어느 시각에 어떤 지점으로 빛이 맞닿는지, 사람 눈높이에 맞춰 잘 계산한 결과다. 앞마당에 심은 낙상홍처럼 방 안으로 내리쬐는 노랗고 빨간 빛의 따스한 느낌이 아이들이 성인이 된 후에 행와재를 기억할 수 있는 단편적 이미지가 될 것이다.
건물 정면에는 사색의 의자를 놓은 행와재 앞마당이 있다. 건물 왼쪽을 돌아 들어가면 현관에 다다른다.
사교적이고 성격이 유난히 밝고 긍정적인 이가영 씨는 이 동네에서 ‘땡글이’로 통한다. 현관문, 세탁실 문, 주방 문… 외부로 통하는 문이 한두 개가 아닌데도 문단속을 일일이 하지 않고 쏘다닐 정도로 마을 사람들끼리 친분이 두텁다. 음식을 나눠 먹고 니 집 내 집 할 것 없이 드나들며 아이들을 돌봐준다. 부부는 두 아이가 행와재로 이사 온 후 “행복하다”라는 말을 서슴지 않고 표현해서 자신들이 되레 행복을 곱으로 느낀다고 한다. 동네 아이들과 자유롭게 뛰어다니는 아이들을 보며 행와재를 짓기 참 잘했다고 거듭 생각한다고. 행와재는 이가영 씨가 직접 붙인 이름이다. 한자 풀이 그대로 ‘행하고 눕는 집’ 인 행와재는 열심히 일한 후에 누워서 쉬는 집이다. 집이라면 응당 갖춰야 할 기본 조건에 충실히 따라 지은 이름이다.
“집은 자고로 기능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평생 살 수도 있는 집인데 예쁘기만 하고 불편하다면 아무 소용이 없잖아요. 행와재도 집의 기본 역할에 최대한 충실하게 설계했습니다.” 김동희 소장 역시 집에 관해서는 부부와 철학이 같다. 아마도 김형일ㆍ이가영 부부가 김동희 소장이 설계한 집들에 끌린 남모를 이유가 여기 있을 터. 김동희 소장 역시 행와재는 건축도, 그곳에 사는 집 주인도, 자신의 기억에 오래 간직할 집이라고 말한다. 찰떡궁합인 건축주와 건축가가 만나서 탄생한 행와재. 이곳에서 유년 시절을 보내는 두 아이 역시 집에 대한 행복한 추억을 키워갈 것이다.
건축가 김동희는 건축사무소 케이디디에이치(02-2051-1677)의 소장이다. ‘카톡으로 지은 집’ 이보재와 전라북도 건축문화상 준공 부분 은상 수상작인 익산의 티 하우스, 청원의 라온재 등 다수의 주택을 설계했다. 젊은 건축가를 양성하기 위한 전시와 창조적 주택 공간에 대한 세미나 등을 기획하고 진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