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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월 26일 금요일 (성 티모테오와 성 티토 주교 기념일)
제1독서 : 2티모 1,1-8 또는 티토1,1-5
복 음 : 루카 10,1-9
그때에 1 주님께서는 다른 제자 일흔두 명을 지명하시어,
몸소 가시려는 모든 고을과 고장으로 당신에 앞서 둘씩 보내시며,
2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3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4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
5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먼저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 하고 말하여라.
6 그 집에 평화를 받을 사람이 있으면 너희의 평화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고,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되돌아올 것이다.
7 같은 집에 머무르면서 주는 것을 먹고 마셔라.
일꾼이 품삯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이 집 저 집으로 옮겨 다니지 마라.
8 어떤 고을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받아들이면 차려 주는 음식을 먹어라.
9 그곳 병자들을 고쳐주며, ‘하느님의 나라가 여러분에게 가까이 왔습니다.’ 하고 말하여라.”
조명연 마태오 신부
2023년 10월 초, 미국의 자선가 찰스 프렌시스 척 피니가
92세의 나이로 샌프란시스코의 작은 임대 아파트에서 숨을 거뒀습니다.
그는 생전에 자신에게 아주 엄격했습니다.
10달러짜리 플라스틱 시계를 차고 다녔으며,
그의 옷은 기성복으로 헤질 때까지 입고 다녔습니다.
호텔은 항상 저렴한 곳을 찾았고, 옷도 호텔방에서 직접 빨아 입었습니다.
비행기는 이코노믹석만 고집했습니다.
가난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평생 80억 달러, 우리 돈으로 약 10조 8,000억 원을
여러 곳에 기부할 정도로 부자였습니다. 그러나 그 모두를 익명으로 했습니다.
모든 사업에 성공했지만, 그 성공을 자기의 편안하고 안락함을 위해 쓰지 않았습니다.
소비와 사치를 누려도 누가 뭐라 하지 않을 정도의 위치였지만,
검소한 생활을 하면서 사랑을 실천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누구도 한 번에 구두 두 켤레를 신을 수 없어요.
필요한 사람들에게 도움을 줘 그들이 스스로 일어서게 하는 것만큼
세상에 가치 있는 일은 없습니다.”
척 피니는 전 재산을 남김없이 세상에 기부했고, 이로써 그의 재단은 2020년에 해산했습니다.
이런 그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 각자의 삶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합니다.
우리는 세상에 가치 있는 일을 하고 있나요?
주님의 일은 자기 혼자만 잘 사게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보다 모두 잘살게 하는 것, 단 한 명의 예외 없이 구원의 길로 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기만 잘 되면 그만이라는 생각으로 살아갑니다.
다른 이가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고, 그가 힘든 삶을 사는 것은
잘못했기 때문이라고 쉽게 단정합니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라고 말씀하시면서
주님의 일을 하는 사람이 많아져야 한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 일꾼의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세상에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보여 주십니다.
즉,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섬김을 받는 삶이 아닌, 섬기는 삶을 살아야 주님의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기쁜 소식을 세상에 전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척 피니의 모습을 기억하면서, 세상에 가치 있는 삶을 사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세상 안에서 화려하고 넉넉한 삶을 살 수는 없겠지만,
예수님의 참 평화를 선물로 받을 수 있게 됩니다.
하느님 나라에 당당하게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예수님께서는 일흔 두 제자를 파견하시면서 제자들에게
‘하지 말아야 할 것들’과 ‘해야 할 것들’을 당부하십니다.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은 이렇습니다.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도 말고,
이 집 저 집으로 옮겨 다니지 말라”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라” 함은
걱정에 빠지지 말고, 오직 목자이신 당신께만 의탁하라는 말씀입니다.
곧 돈주머니 대신 당신께 대한 ‘믿음의 주머니’를 차고,
여행 보따리 대신 ‘희망의 보따리’를 매고, 자신의 발에 맞춘 신발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신발’을 신으라는 말씀입니다.
곧 ‘자신의 방식’이 아니라, ‘복음의 방식’으로 복음을 전파하라는 말씀입니다.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도 말라” 함은
머뭇거리거나 다른 곳에 신경 쓰지 말고, 오직 복음 선포에만 열중하라는 말씀이요,
“이 집 저 집으로 옮겨 다니지 말라” 함은
더 좋은 집과 대우를 위해 찾아 나서지 말라는 당부입니다.
그리고 ‘해야 할 것들’은 이렇습니다.
“어떤 집에 들어가든 먼저 평화를 빌어주며, 받아들여 차려 주는 음식을 먹으며,
병자를 고쳐주고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라”
‘해야 할 일’의 첫 번째는 ‘기도하는 일’입니다.
곧 “어떤 집에 들어가든 먼저 평화를 빌어주라” 함은
빈부귀천 없이 어느 집에든지 평화를 빌어주되
자신의 평화가 아닌 하느님 나라의 평화를 빌어주라는 말씀이요,
인사를 받으려 하지 말고 겸손하게 먼저 인사를 나누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루카 복음에서는 “평화”는 하늘에서 내려온
기쁜 소식의 첫 번째 선물임과 동시에 부활의 첫 번째 선물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실 때, 천사들은 목동들에게 말합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루카 2,14-15)
또한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제자들에게 주신 것도 평화입니다.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루카 24,36)
또 “받아들여 차려주는 음식은 먹어라” 함은
음식물에 대한 유다적 관습에 매여서 복음을 선포하는 일에 방해받지 말고 친교를 나누며,
동시에 이는 “차려주는”대로 먹으라는 혁명적인 선언입니다.
곧 유대 율법에 따라 식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을 받아들이는 이방인들이 차려 주는 대로 음식을 받아먹으라는 말씀입니다.
동시에, 일꾼으로서 삯을 받음이 정당함을 말해줍니다.
또 “병자를 고쳐주고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라” 함은
예수님께서 메시아로 오심을 전파하고 증거하는 것이 소명임을 말해줍니다.
사실, 우리 역시, 예수님으로부터 파견받은 자들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말씀을 통해 파견의 본질과 당부 말씀을 새겨들어야 할 일입니다.
‘무엇이 해야 할 일’인지, ‘무엇이 하지 말아야 할 일’인지,
그리고 ‘무엇이 본질이고 우선’이며, ‘무엇이 부차적이고 부수적인지’를
잘 분별하여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먼저,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하고 말하여라.”(루카 10,5)
주님!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
먼저 해야 할 일과 나중 해야 할 일을 알게 하소서.
제가 하고자 하는 일보다, 당신께서 하시고자 한 일을 깨달아 알게 하소서.
먼저 인사하고, 먼저 다가가며, 먼저 사랑하게 하소서.
먼저 신뢰를 두고, 먼저 평화를 빌게 하소서.
먼저, 당신의 나라와 의로움을 구하게 하소서.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2013년 11월 24일 교황권고 ‘복음의 기쁨’을 발표하였습니다.
복음의 기쁨은 현대를 살아가는 신앙인들에게 ‘등불’과 같습니다.
교황님은 복음의 기쁨에서 ‘첫걸음’이 중요하다고 하였습니다.
그 첫걸음의 시작은 창세기 12장의 ‘아브라함’ 이야기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정든 고향과 친족을 떠나 새로운 곳을 향해 출발하였습니다.
이 첫걸음은 이웃을 향해서 내디뎌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가장 헐벗고, 가장 굶주리고, 가장 아픈 이에게 해 준 것이 곧 나에게 해 준 것이다.”
이웃을 향해 내딛는 첫걸음이 우리를 영원한 생명에로 이끌어 주기 때문입니다.
첫 걸음은 공동체를 향해서 내디뎌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가 나의 형제요, 어머니냐?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은 모두 나의 형제요, 어머니다.”
율법학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가 강도당한 이의 이웃이 되어주었느냐?”
율법학자는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강도당한 이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도 가서 그렇게 하여라.”
공동체를 향해서 내딛는 첫걸음이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어 주기 때문입니다.
공동체는 인간을 넘어 함께 살아가야 할 모든 생명, 어머니인 지구를 포함하는 것입니다.
2024년 새해를 시작하면서 우리도 주님을 향해, 이웃을 향해,
공동체를 향해 첫걸음을 힘차게 내딛으면 좋겠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우리가 내딛는 첫걸음에 몇 가지 원칙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 첫 번째는 ‘시간은 공간보다 위대하다.’입니다.
공간에 대한 소유가 시간과 전진에 대한 관심을 압도할 때 비극이 시작됩니다.
공간에 대한 소유가 시간과 전진에 대한 관심을 압도할 때 전쟁과 폭력이 시작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창고에 물건을 가득 쌓아놓고 기뻐하는 부자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다고 하셨습니다.
소유에 집착하는 부자가 하늘나라에게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를 지나가는 것이 더 쉽다고 하셨습니다.
무릇 종교의 가르침은 공간보다 시간을 우선시 합니다.
부처님은 생로병사의 고통 중에 있는 중생들에게 집착을 버리라고 하였습니다.
욕망을 버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하면 ‘해탈’에 이른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에는 공간과 소유가 차지할 자리가 없습니다.
공자도 진리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때’가 중요하다고 하였습니다.
공자는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나는 열다섯에 학문에 뜻을 두었고, 서른 살에 섰으며, 마흔 살에 미혹되지 않았고,
쉰 살에 천명을 알았으며, 예순 살에 귀가 순했고,
일흔 살에 마음이 하고자 하는 바를 따랐지만, 법도에 넘지 않았다.”
공자의 이 말로부터, 15세를 지학(志學), 30세를 이립(而立), 40세를 불혹(不惑),
50세를 지천명(知天命), 60세를 이순(耳順), 70세를 종심(從心)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이는 모두 시간이 공간보다 강하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2024년 새해를 시작하면서 공간에 대한 집착보다 시간의 가치를 먼저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두 번째는 ‘실재가 생각보다 더 중요하다.’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참된 믿음이 아닙니다.”
요한 사도도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이웃을 사랑하지 않으면 그것은 참된 사랑이 아닙니다.”
백번 묻는 것보다 한번 보는 것이 낮다고 합니다.
백번 보는 것보다 한번 행하는 것이 더 낮다고 합니다.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참된 양심이 아닙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자기 안위만을 신경 쓰고, 폐쇄적이고 건강하지 못한 교회 보다는
거리로 나와 다치고 상처받고 더럽혀진 교회를 저는 더 좋아합니다.
저는 중심이 되려고 노심초사하다가 집착과 절차의 거미줄에
갇혀버리고 마는 교회를 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더러 ‘주님, 주님’하고 부른다고 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갈 수 있다.”
2024년 새해를 시작하면서 하느님의 뜻을 이 땅에서 먼저 실천하면 좋겠습니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그곳 병자들을 고쳐주며, ‘하느님의 나라가 여러분에게 가까이 왔습니다.’ 하고 말하여라.”
근본에 충실하라.
반영억 라파엘 신부
예수님께서는‘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루카10,4)고 하셨습니다.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라 하시며 홀로서기를 바라셨습니다.
‘인사는 왜 하는가? 사랑과 존경에서 합니다.
인사를 통해 상대방과의 관계를 형성합니다.
그러나 그 본래의 의미를 잃을 때가 많습니다.
잘 보이려 하고, 인정받으려 하며 그로부터 무엇인가를 기대하고 또 청하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근본은 잃은 채 껍데기에 매달릴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인사까지 하지 마라.’는 것은
한마디로 ‘한눈팔지 마라.’,‘양다리 걸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주님의 부름을 받았으면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에 마음을 쏟아야지
어디 다른 것에, 마음을 빼앗기면 되겠는가? 하는 의미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은 지체되어서는 안 됩니다.
언젠가 익명의 편지를 한 통 받았는데 그 내용은
‘김대건 신부님께 의탁하며 기도하라고 하시며 신자들과의 관계를 끊으라’는 말씀이었습니다.
복음을 전하려면 더 많은 관계를 맺어야 할 텐데 ‘끊어라!’는 말씀을 하셨을까?
오로지 주님 안에 머물라는 사랑의 충고였음을 생각하며 감사한 마음을 간직합니다.
인사를 하다 보면, 다시 말해, 사람에게 매이다 보면
진짜 해야 할 것을 하지 못한다는 일깨움을 주십니다.
사람이 정에 매달리다 보면 근본을 잃게 됩니다.
하느님으로 만족해야 하는데 사람에게 잘 보이려고 합니다.
사람에게는 인기가 오르는 것 같은데 주님의 눈 밖에 납니다.
“주님을 생각하면 나의 마음은 기쁘고,
나의 하느님 생각만 하면 나의 가슴은 뛰노라”(이사61,10 공동번역).
하느님만을 갈망하고 즐거워해야 하지만 인간적인 욕망은 그칠 줄을 모릅니다.
바오로 사도는 외쳤습니다.
“무릇 육을 따르는 자들은 육에 속한 것을 생각하고,
성령을 따르는 이들은 성령에 속한 것을 생각합니다.
육의 관심사는 죽음이고 성령의 관심사는 생명과 평화입니다”(로마 8,5-6).
그는 감옥 안에서도
“하느님의 힘에 의지하여 복음을 위한 고난에 동참하십시오”(2티모테오 1,8).하고 권고합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위한 고난에 동참한다는 것을 기쁨으로 여기며
인간적인 것들에 매이지 않는 삶을 갈망하는 오늘을 겸손하게 봉헌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를 전하고, 복음을 ‘지금 여기서’ 산다는 것이, 우리의 기쁨입니다.
믿음의 고백이 단순한 입의 고백이 아니라 가슴을 거쳐 손발에서 이루어지길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에게 맡겨진 양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고 있습니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베드로 사도와 함께 초세기 교회의 공동 수장 역할을 하셨던 분이 바오로 사도였습니다.
두 분 사이에는 일종의 업무 분담이 있었습니다.
베드로 사도께서 주로 유다인들을 대상으로 복음을 선포하신 반면,
바오로 사도는 주로 이방인들을 대상으로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이곳저곳 유랑선교를 하시던 바오로 사도는 당신이 개척하신 교회 책임자로
제자이자 협조자들을 선택하여 임명하셨는데, 그들이 곧 티모테오와 티토 주교였습니다.
교회 최고책임자요 일종의 공동 교황이셨던 바오로 사도께서
협조자요 주교였던 티모테오와 티토에게 보낸 서한의 내용은
얼마나 형제적인지 얼마나 절절한지, 접할 때마다 큰 감동의 물결이 밀려옵니다.
높은 사람이라고 어깨에 힘 딱 주고, 폼 잡고, 낮은 사람이라고
어떤 사람처럼 95도로 고개 숙여 인사하고... 절대 그런 법이 단1도 없습니다.
바오로 사도와 티모테오와 티토 주교 사이의 그 친밀하고 따뜻한 관계는
오늘 우리가 맺는 관계 맺음방식에 진지한 성찰을 하도록 초대합니다.
스승과 제자 사이, 주교와 사제 사이, 원장과 평 수도자 사이,
부모와 자녀 사이가 어떠해야 하는지? 아주 좋은 모범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사용한 표현들, 문장 하나하나를 보십시오.
끈끈한 동지애와 형제애, 그리고 깊은 신앙과 겸손의 덕이
오늘 우리의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무엇보다도 바오로 사도의 서한에는 제자들을 향한
극진한 사랑과 따뜻한 가족 정신이 충만합니다.
그들을 향해 아들이라는 칭호를 사용합니다.
그리고 그냥 아들이 아니라 사랑하는 아들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의 사도가 된 바오로, 사랑하는 아들 티모테오에게 인사합니다.”
“나 바오로가 같은 믿음에 따라 나의 착실한 아들이 된 티토에게 인사합니다.”
그리고 착한 목자 바오로 사도는 제자이자 협조자인 주교들을 향해
간절히 기도하던 스승이었습니다.
이 시대 우리 목자들에게도 꼭 필요한 노력입니다.
우리는 틈만 나면 성찰에 성찰을 거듭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맡겨진 양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고 있습니까?
“나는 밤낮으로 기도할 때마다 끊임없이 그대를 생각하면서,
내가 조상들과 마찬가지로 깨끗한 양심으로 섬기는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나는 그대의 눈물을 생각하면서 그대를 다시 볼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렇게 된다면 내가 기쁨으로 가득 찰 것입니다.”
주님으로 인해 받게 된 끝도 없는 박해와 수모,
셀 수도 없이 겪은 죽을 고비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중심으로 한 가족애로
똘똘 뭉쳐 서로 격려하고 서로를 위해 기도하는 모습이 참으로 감동적입니다.
“그러므로 그대는 우리 주님을 위하여 증언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그분 때문에 수인이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하느님의 힘에 의지하여 복음을 위한 고난에 동참하십시오.”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
티모테오는 사도 바오로에게는 가장 사랑하는 제자였다.
아마 티모테오는 바오로 사도의 첫 선교여행 중에 개종한 것 같다.
티모테오는 바오로와 같이 두 번째 여행과 세 번째 여행을 함께 하였다.
바오로 사도는 그에게 여러 상황에서 여러 가지 일을 맡겼다.
마케도니아의 테살로니카와 코린토의 공동체들을 맡겼다.
사도는 그에게 신약에 정경이 된 적어도 두 서간을 남겼다.
티모테오는 바오로 사도가 첫 번 감옥에 있는 동안 가까이 있었고
그 후에 에페소에서 주교직을 행하였다.
감옥에 갇힌 바오로는 두 번째로 로마의 가는 길에 동행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바오로 사도의 또 다른 협력자인 티토는 이방인 가정의 출신이었다.
사도는 그도 사도의 첫 여행 중에 개종시킨 것으로 보인다.
티토는 바오로와 바르나바를 예루살렘까지 동행하였다.
티토는 코린토와 사도 사이의 중개자 역할을 하였다.
바오로가 남긴 서간에서 이미 크레타의 사목자로 나타난다.
성 바오로는 그에게 간곡한 부탁을 하면서 에피로에 있는 니코뽈리와 일치하라고 적고 있다.
그는 달마치아에서 특별한 모습으로 존경을 받았을 것이다.
오늘 복음에 보면 주님께서는 일흔두 제자를 뽑아 둘씩 짝을 이루어 당신에 앞서 보내셨다.
왜 그랬을까? 이 두 사람은 이리 같은 세상에 은총이 되도록 보내신 것이다.
두 제자는 그들 가운데 주님을 모시고 간 것이다.
사랑으로 모신 하느님께서 그들을 지켜주실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진정으로 은총이 되게 하시려고 둘씩 짝을 지어 보내신 것이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자기 일에 충실해야지 사소한 일에 관심과 마음을 빼앗겨서는 안 된다.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4절)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현세적인 어떤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복음의 전파만을 위하여 주님께 의지하며 헌신하는 것임을
예수님께서는 가르쳐 주신다. 그런데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2절) 분부하신다.
그러면 우리는 오늘 똑같은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어떠한 일꾼을 얼마나 많이 가지고 있는가?
여기서 말하는 일꾼은 누구를 위해 일하는 것이며,
무엇을 위해서 일하는 사람들일까?
어느 사람만이 아니라 우리가 모두 서로의 축복과 구원을 위해 일할 사람이고,
그런 일꾼으로 부름을 받은 것이며 현세적인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이 전파되도록 일해야 한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모든 사람이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도록 하는 사업이다.
이 구원사업을 위해, 우리 가운데서, 우리 공동체 안에서
더 많은 훌륭한 일꾼이 나오도록 하여야 한다.
우리는 끊임없이 그 일꾼들을 위해, 또한 더 많은 일꾼이 나오도록
미래의 일꾼들을 위해서도 기도하고, 우리 가운데서 배출해야 한다.
우리 자신부터 먼저 투신하면서 현재와 미래의 일꾼들을 위해 기도하여야 한다.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을 격려하십니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을 격려하십니다.
"몸소 가시려는 모든 고을과 고장으로 당신을 앞서 둘씩 보내시며"(루카 10,1)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견하십니다. 당신이 가시려는 곳으로 제자들을 먼저 보내시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말씀과 치유로 환대의 분위기를 형성하신 데가 아닌, 불모지로 가라는 뜻입니다.
거기서 제자들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모르고,
그러니 제자인 자기들이 누군지 더더욱 모르는 사람들 틈에서 그분이 오실 길을 준비해야 합니다.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루카 10,3)
예수님은 제자들이 거기서 겪을 일을 모르시지 않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세상에는 믿는 이들의 신앙과 헌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지요.
하지만 그렇다고 예수님이 제자들을 금이야 옥이야 당신 품에만 끼고 계시지는 않습니다.
이 세상에 성자를 파견하실 때의 성부 마음처럼,
예수님도 각별히 아끼시는 제자들과 사랑의 기회를 공유하시는 겁니다.
사랑에 자신의 목숨을 던지는 공동 운명이 파견에서 파견으로 이어집니다.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루카 10,5)
낯선 곳에 들어서는 제자들에게는 이렇다 할 자기방어 수단이 없습니다.
정말로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지는 양의 처지인 셈입니다.
제자들은 그저 신뢰하는 순수한 마음으로 다가가 먼저 평화를 내밀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평화는 참 신비스럽고 매력적입니다.
평화를 빌어 준 곳에 평화를 받을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에게 평화가 머무르고,
그렇지 않으면 평화를 인사한 제자에게 되돌아온다니 말입니다.
평화를 갈망하던 이에게는 그대로 전해지고,
거부하는 이에게는 그를 거쳐 다시 제자에게 되돌아오니,
결국 이 세상에 주님께서 주신 평화의 총량은 사라지거나 감소하지 않습니다.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티모테오에게 용기를 북돋워 줍니다.
"우리 주님을 위하여 증언하는 것을 부끄러워 말고,
그분 때문에 수인이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하느님의 힘에 의지하여 복음을 위한 고난에 동참하십시오." (2티모 1,8)
신앙이 밥 먹여 주는 게 아니고 권력과 재물과 명예를 보장하지도 않습니다.
어쩌면 세속적 성공과는 반대의 길을 향한다는 표현이 더 맞을지도 모르겠네요.
게다가 세속의 눈에서는 스승의 약함이 곧 제자의 수치일 수 있으니,
사형수로 비참하게 돌아가신 예수님이나, 연이어 투옥되고 순교하는 사도들이나
믿음이 약한 이들에게는 의혹과 부끄러움의 이유도 될 수 있습니다.
믿지 않는 이들이나 신앙이 악세사리 정도인 이들 앞에서
죽음으로 사랑을 완성하신 분의 길을 따르는 제자의 모습은
자칫 사회부적응자나 웃음거리로 치부될 수 있습니다.
이 또한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지요.
사도 바오로는 그런 인간적 한계를 모르지 않으면서도,
되레 더 단단해지라고 촉구합니다.
부끄러움을 가지지 않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고,
오히려 거기서 성큼 더 나아가 복음을 위한 고난에 동참하라고 초대하지요.
"하느님의 은사를 다시 불태우십시오."(2티모 1,6)
성령으로 받은 은사는 열정을 일깨워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우고 뜨겁게 합니다.
마음 안에 심어진 사랑의 불이 꺼지지 않으려면,
사랑의 상태, 곧 관상의 상태에 머물러 있어야 하지요.
복잡하고 험난한 세상 안에서도 기도의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분의 제자인 우리는 불이신 주님과 연결된, 불이 되어야 합니다.
낯선 이에게, 또 자신과 반목하는 이에게 평화를 건네는 힘은
주님의 불로 정화된 뜨거운 마음에서 우러납니다.
나약하고 냉소하는 마음에서 나오는 건 평화가 아니라 외면이거나 무관심이지요.
평화는 선과 정의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오해와 가난과 모욕에도 흔들리지 않는 힘입니다.
평화의 군왕이신 예수님이 보여 주신 힘이고,
복음의 고난에 동참하는 제자들을 통해 우리에게까지 전달되어 세상 곳곳을 흐르는 힘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벗님이 주님에게서 받은 은사를 불태우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복음의 고난에 동참해 뜨겁게 사랑하는, 평화의 전달자인 벗님을 축복합니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이승화 시몬 신부
하느님의 일은
하느님 홀로 하실 수 있으십니다.
전지전능하신 분이니 당연한 말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자유로운 참여를 원하시기에
우리가 회개하여 내면에서부터 하느님을 찾길 원하시기에
주님은 우리를 기다려 주십니다.
그러니 바오로는 도와주는 협력자에게 감사를 표했습니다.
티모테오와 티토가 그런 이들이었고
이들은 또한 가족들의 도움을 통해
하느님의 일을 할 수 있는 준비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한 사람이 하는 일이 아닌
많은 이들이 참여할 때 비로소 하느님의 일이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이 지명한 일흔두 명의 제자는
이집트로 넘어간 야곱의 자손들의 숫자를 의미합니다.
곧 이스라엘 백성 모두를 상징하죠.
이들을 통해 하느님의 뜻이 이어지고
하느님의 일이 이루어지길 바라는 마음이었습니다.
이렇게 많은 이들이 있음에도
예수님은 수확할 것은 많은 데 수확할 일꾼이 적다고 하십니다.
더 많은 이들을 하느님께 초대하기 위해서
우리 모두의 참여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해 주겠지.라는 마음이 아니라
내가 먼저 나서려는 마음이 있을 때
이 정도는 괜찮겠지.라는 나의 생각이 아니라
하느님이 바라시는 뜻을 위해서 나아갈 때
우리는 그분의 제자가 되어
그분의 일에 동참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마음을 살피고
주님 안에서 제자가 되어 그분의 뜻을 수행하는
그런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출처: [시몬 신부의 신앙이야기] https://frsimon.tistory.com/1605
이 보나벤뚜라 수녀
오늘 제1독서(2티모 1,1-8)과 복음을 함께 묵상하다가
두 본문에 나란히 언급된 '평화'에 눈길이 머물렀다.
바오로 사도는 아들과도 같은 티모테오에게 은총과 자비와 평화가 내리기를 빈다.
복음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어느 집이든지 가면 먼저 평화를 빌어주라고 말씀하신다.
이 두 표현은 유대인들의 일상적 인사 표현 “샬롬!” 정도로 우선 이해된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평화가 너희와 함께”라고 인사하신다.
이렇게 일상적인 인사려니 하고 그냥 묵상을 접을 뻔했건만,
바로 그 뒤에 예수님이 덧붙이신 조건이 흥미롭다.
평화를 빌어준 집에 평화를 받을 사람(직역: 평화의 아들)이 있으면
제자들의 빌어준 평화가 그에게 머문다.
그렇지 않으면 그 평화가 그것을 빌어준 제자들에게 돌아온다.
이건 뭐 착불 택배 거부도 아니고?
루카 복음사가는 ‘평화’를 유독 좋아한다.
루카 복음에 ‘평화’라는 단어가 열네 번 나오는데 마태오가 네 번, 마르코가 한 번,
요한이 여섯 번 사용한 것에 비하면 출현 빈도가 높은 편이다.
루카 복음사가가 쓴 사도행전에도 일곱 번 나온다.
루카는 이 ‘평화’를 통해 구원된 결과 혹은 구원된 상태를 묘사하는 것으로 보인다.
구원자 예수님이 오실 길을 준비할 세례자 요한 탄생 때에 그의 아버지 즈카르야는
예수님이 하실 일을
“어둠과 죽음의 그늘 밑에 앉아있는 이들을 비추고
우리 발을 평화의 길로 이끄시는”(루카 1,79) 것이라고 찬양한다.
태양처럼 떠올라 우리를 찾아오시는 분이 그 일을 하신다.
그분에 의해 어둠과 죽음에서 끌어내어지는 것과, 평화의 길로 인도 되어지는 것은
곧 구원이며, 이 구원을 내다보며 즈카르야는 기뻐한다.
예수님의 탄생 소식을 전하면서 천사는
“하늘높은 곳에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 사랑하시는 이들에게 평화!”(루카 2,14)라고 노래한다.
예수님의 탄생은 우리 역사에 개입하셔서
우리를 구원으로 이끄시는 주체인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사람들에게 그 구원은
예수님의 복음 선포와 십자가 사건과 부활을 통해 도달하게 될 평화인 것이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을 보며 하신 말씀도 마찬가지다.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루카 19,42)
구원을 가져다주는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구원 자체이신 당신을
받아들이기 거부하는 이들에 대한 안타까움이 묻어나는 탄식이다.
이렇게 살짝 생각해 보기만 해도 루카 복음이 의미하는 평화는
예수님을 구세주 주님으로 믿고 받아들이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최종상태와 연관이 깊다.
평범한 인사말인 “평화!”가 예수님 덕분에 이런 깊은 의미를 내포하게 된다.
그렇다면 오늘 복음에서 말하는, 평화가 제자들에게 되돌아오는 경우도 이해가 된다.
구원의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 그에 따라 복음을 선포하는 제자들을 맞아들이는 사람은
구원의 결과인 평화를 받을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그분의 복음을 헛소리로 치부하고 제자들을 맞아들이지 않는 이들에게는 구원과 평화란 없다.
그걸 아무리 나누어 주고 싶어도 수취인이 거부한 탓에
제자들이 덤탱이로 가지고 있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다.
새해에도 계속되고 있는 전쟁과 분쟁 때문에
‘평화'라는 표현이 어느 때보다도 우리 간절한 염원을 드러낸다.
예수님의 평화, 당신 스스로 인간의 비참함과 죽음의 막다른 곳까지 내려오셔서
인간을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로 회복시켜 주신 바로 그 평화를 묵상해 본다.
남을 죽이고 파괴하고서라도 이루어야만 하는 야욕이 빚어내는 전쟁들 앞에서,
참된 평화를 위해 자신을 비우신 예수님을 바라본다.
출처 : 툿찡포교베네딕도수녀원 http://www.benedictine.or.kr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