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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월 27일 연중 제3주간 토요일
제1독서 : 2사무 12,1-7ㄷ.10-17
복 음 : 마르 4,35-41
35 그날 저녁이 되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호수 저쪽으로 건너가자.” 하고 말씀하셨다.
36 그래서 그들이 군중을 남겨 둔 채,
배에 타고 계신 예수님을 그대로 모시고 갔는데, 다른 배들도 그분을 뒤따랐다.
37 그때에 거센 돌풍이 일어 물결이 배 안으로 들이쳐서,
물이 배에 거의 가득 차게 되었다.
38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계셨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우며,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 하고 말하였다.
39 그러자 예수님께서 깨어나시어 바람을 꾸짖으시고 호수더러,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 하시니 바람이 멎고 아주 고요해졌다.
40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하고 말씀하셨다.
41 그들은 큰 두려움에 사로잡혀 서로 말하였다.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
조명연 마태오 신부
아마존의 어느 원주민 부족은 구슬 목걸이를 만들 때
일부러 흠집 난 구슬을 한 개씩 끼운다고 합니다.
그들은 이것을 ‘영혼의 구슬’이라고 부릅니다.
영혼을 지닌 어떤 존재도 완벽할 수 없다는 생각에서입니다.
고대 페르시아의 카펫 직조공들 역시 카펫을 짤 때
정교하고 아름다운 문양에 의도적으로 흠을 하나씩 남겼다고 합니다.
오직 신만이 완벽하며,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를 ‘페르시아의 흠’이라고 합니다.
많은 이가 부족함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습니다.
실수하지 않고, 빈틈도 보이지 않는 완벽한 삶만이 행복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실제로 그럴까요? 어떤 사람이 더 인기가 많았는지를 떠올려 보십시오.
약간의 실수도 하고 부족한 사람에게 오히려 호감이 갑니다.
이런 사람이 훨씬 편하며 이 사람 역시 관대함을 지니고 있음을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로써 함께할 수 있게 됩니다.
실수 없이 살아가려니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부족하고 나약한 존재가 완벽해지려고 하니 당연합니다.
이렇게 완벽에만 온 힘을 쏟다 보면 다른 이와 함께하기 힘듭니다.
그래서 때로는 일부로라도 부족한 모습을 보일 필요도 없습니다.
자기 마음도 편안해지고, 남도 나를 도와주려고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이는 주님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완벽함만을 추구하는 사람은 완벽함을 만들어 주지 못하는 주님께 불평불만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함께하는 삶을 원하시는데, 많은 이가 자기 혼자의 삶만을 요구합니다.
당연히 주님과도 함께하지 못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배 안에서 주무시고 계십니다.
그런데 거센 돌풍이 일어 물결이 배 안으로 들이쳐서,
물이 배에 거의 가득 차게 됩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우며 말합니다.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
제자 중에는 어부 출신이 많습니다.
따라서 이런 상황을 그 누구보다도 잘 대처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러나 자기 힘으로도 전혀 대처할 수 없음을 알았나 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깨웠던 것이지요.
예수님께서는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라고 명령하십니다.
이렇게 바람과 호수까지도 복종하게 만드는 큰 힘을 가지신 분임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런 분과 같은 편이 되고 또 함께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려면 주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그것도 고개를 뻣뻣이 들고서 마치 맡긴 것을 찾으려는 사람의 모습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면서 겸손의 삶을 살아야만 합니다.
그때 주님의 그 큰 힘으로 우리가 원하는 것이 아닌,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을 해주실 것입니다.
“호수 저쪽으로 건너가자.”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비유들을 통해서 하늘나라에 대해 가르치시고,
저녁이 되자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호수 저쪽으로 건너가자.”(마르 4,35)
저녁이 되어 어둠이 닥쳐오는데도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탈출할 때도 저녁이었습니다.
그리고 ‘호수 저쪽으로 건너가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렇습니다. 이는 새로운 출애굽을 말해줍니다.
그런데 어둠을 가르고 나아가는 이 여행에 거센 돌풍이 일고, 물결이 배 안으로 들이쳤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가지만, 동시에 온갖 환란과 위험과 함께 갑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계십니다.
제자들의 위험에 수수방관으로 그냥 침묵하고 계십니다. 제자들이 죽게 되었는데도 말입니다.
대체, 예수님의 이 침묵은 무엇을 말하는 걸까?
예수님의 이 침묵은 믿음이 흔들리는 순간이지만,
동시에 믿음이 요청되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사실 풍랑 속에서 주무신다는 것은 아버지께 대한 전적인 신뢰를 나타냅니다.
<시편> 작가는 노래합니다.
“자리에 들자마자 단잠이 깊사오니 든든히 살게 하심 홀로 주님 덕이오이다.”(시편 4,9).
그러니 이는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신뢰하지 못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전적으로 아버지께 신뢰를 두고 계시는 당신의 모습을 보여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사실, 잠들어 있는 이는 예수님이 아니라, 바로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현존에 깨어있지 못하고 있는 제자들이 바로 잠들어 있는 이들인 것입니다.
그러니, 막상 깨어나야 할 이들은 제자들인 것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하느님께서 우리의 청에 응답해 주지 않으신다고 투덜대기도 합니다.
그러나 바로 그때가 우리가 잠들어 있을 때임을 알아야 할 일입니다.
바로 그때가 현존하신 그분께 의탁하고 믿음으로 응답해야 할 때임을 말입니다.
시편 작가처럼, 주님께서
“뒤끓는 바다를 호령하시고 솟구치는 물결을 붙잡으시는 분”(시 88,9-10)이심을
믿고 의탁해야 할 때입니다.
그것은 언제 어디서나, 어떤 상황에서나,
주님께서 ‘함께 계시며 동행하심’에 대한 믿음과 의탁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불신을 깨우쳐 주시고, 당신께서 하느님이심을 드러내 보이십니다.
곧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마르 4,39)하시며 광풍을 잠재웁니다.
우리의 온갖 두려움과 걱정과 불신을 잠재우시고, 믿음으로 깨우십니다.
새로운 출애굽을 통해 어둠을 건너, 새로운 생명으로 이끄십니다.
사실, “예수님의 침묵”은 나에 대한 믿음과 신뢰를 의미합니다.
마치 십자가에서의 “아버지의 침묵”이 예수님께 대한 믿음과 신뢰였듯이 말입니다.
바로 이 믿음이 예수님께서 그 거센 돌풍 속에서도 간직할 수 있었던 평화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마르 4,40) 하시며
제자들의 믿음을 일깨우십니다.
그러니 우리도 <시편>작가처럼
‘함께 계시는 주님’께 믿음의 노래를 불러야 할 일입니다.
주님,
“비록 죽음의 그늘진 골짜기를 간다해도,
당신 함께 계시오니 무서울 것 없나이다.”(시 22,4).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마르 4,40)
주님!
잠들어 있는 이는 당신이 아니라, 저 자신입니다.
깨어나야 할 이는 당신이 아니라, 저 자신입니다.
당신이 함께 계시건만, 불신으로 제가 두려워합니다.
주님, 풍랑을 맞아 가라앉으면서야, 비로소 제가 키잡이가 아님을 봅니다.
풍랑 속에서 잠들어 계셔도 바람과 호수를 복종시키시는 분,
당신이 저의 주님이십니다.
당신은 주무셔도 주님이시오, 깨어 계셔도 주님이십니다.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매주 수요일에 ‘직원회의’가 있습니다.
보통은 업무보고를 하고, 저의 일정을 이야기하면서 회의는 30분 안에 끝나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가끔 현안에 대한 토론을 할 때가 있습니다.
매년 조금씩이라도 급여를 인상해야 하는데 코로나 팬데믹 여파로 급여를 삭감하였고,
대신에 근무시간을 단축했습니다.
편집기의 시스템이 불안정해서 신문제작에 문제가 생기곤 하는데
아직 새 편집기를 구매할 엄두를 못 내고 있습니다.
회계업무 간소화를 위해서 ‘퀵북(Quick Books)' 프로그램을 사용해야 하는데
그것도 쉽지가 않습니다.
토론을 토론으로 받아들이면 되는데, 서로 다른 의견이 있으면 그것을 존중하면 되는데
성격상 그것이 그리 쉽지 않습니다.
이야기를 경청하면서도 마음이 편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마치 아이들이 원하는 것을 다 들어주지 못하는 엄마의 심정 같기도 합니다.
저도 어릴 때 어머니에게 원하는 것들을 말하곤 했습니다.
어머니는 다음에 해줄게.라고 하시기도 하고, 있는 것 일단 사용하라고 하시기도 하였습니다.
그때는 야속했지만, 지금은 충분히 어머니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신문사에 애정을 가지고 문제를 해결하려는 직원들의 마음을 고맙게 생각합니다.
2024년에도 신문홍보과 광고를 통해서
신문자의 재정을 안정적으로 이끄는 것이 저의 책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의 대기업은 주로 가족들이 경영권을 승계하지만
미국의 대기업은 ‘전문경영인’이 기업을 운영하는 곳이 많습니다.
장단점이 있겠지만 기업의 규모가 커지면 전문경영인체제가 좋을 것 같습니다.
전문경영인은 경험도 많고, 잘못되었을 경우에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검증된 전문경영인이 운영하면 기업은 더 많은 투자를 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시작하신 교회는 예수님과 함께 지냈던 사도들이 이끌었습니다.
사도들의 열정과 헌신은 교회를 성장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박해라는 시련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런 교회에 제자가 아닌 전문가가 등장하였습니다.
그는 유대인이지만 그리스어에 능통하였습니다.
당시 강대국이었던 로마에서 공부하였고, 로마의 시민권도 있었습니다.
그는 유대의 율법은 물론 그리스의 철학에도 조예가 깊었습니다.
그의 판단에 교회는 유대의 율법과 전통을 위협하는 세력이었습니다.
그래서 적극적으로 교회를 박해하는 편에 있었습니다.
그런 어느 날 그는 놀라운 체험을 하였고,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되었습니다.
갑론을박이 있었지만, 초대교회는 그를 교회의 지도자로 받아들였습니다.
그의 열정과 헌신으로 교회는 예루살렘을 벗어나 아시아로 확장할 수 있었습니다.
그의 신학과 교리는 교회 조직의 토대가 되었고,
그가 보낸 서간은 지역교회의 문제를 해결하는 처방전이 되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직접 만난 적은 없지만 확신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억울하게 십자가에서 죽었지만, 다시 살아났다는 부활의 믿음입니다.
그 십자가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희생이었고, 그의 죽음은 하느님
의 의로움이 드러나는 표징이었다는 것입니다.
누구든 그 십자가를 받아들이고,
예수님을 믿으면 부활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믿음으로
예루살렘 교회가 세계교회가 될 수 있도록 기초를 놓았습니다.
그의 이름은 바로 사도 바오로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예언자 나탄은 다윗 왕은 잘못을 예리하게 지적하였습니다.
다윗 왕이 자신이 권력을 이용해서 충실한 부하를 억울하게 죽음으로 몰았기 때문입니다.
다윗 왕이 나탄의 말을 무시하고, 자신의 뜻대로 살았다면
다윗 왕은 잊혀진 왕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 왕은 나탄의 이야기를 경청하였고, 자신의 잘못을 깊이 뉘우쳤습니다.
다윗은 하느님의 판결을 받아들였고,
이스라엘의 위대한 왕으로 거듭 날 수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풍랑을 만나 두려웠습니다.
호수에 빠질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에도 늘 풍랑이 불기 마련입니다.
‘교만, 나태, 시기, 탐욕, 인색, 탐식, 욕정’의 바람입니다.
그 바람 앞에 자유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불렀던 것처럼 우리도 주님을 불러야 합니다.
그 시작은 바오로 사도가 회심했던 것처럼, 다윗 왕인 회개했던 것처럼
우리의 마음을 하느님께로 향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부르면, 하느님께 우리의 마음을 돌리면
자비로운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으로 품어 주십니다.
“구원의 기쁨을 제게 돌려주시고, 순종의 영으로 저를 받쳐주소서.
저는 악인들에게 당신의 길을 가르치리니, 죄인들이 당신께 돌아오리이다.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우리는 영성생활의 길잡이
오상선 바오로 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들에서 우리는 영성생활의 길잡이를 만날 수 있습니다.
"호수 저쪽으로 건너가자"(마르 4,38).
예수님 주변에 아직 군중이 남아 있지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호수를 건너가자고 하십니다.
아직 예수님의 말씀과 손길이 필요한 이들이 있는데도
떠남을 선택하신 그분이 다소 냉정하게 느껴지기도 하지요.
그런데 비록 스쳐 가는 언급이지만 여기에는 매우 중요한 메시지가 들어 있습니다.
하느님의 일을 하다 보면
때로는 "하느님"보다 "일"에 더 몰입될 위험이 항상 도사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쁘게 돌아가는 세상에서 고요히 주님 앞에 머물기가 더 어려운 이유입니다.
"일"과 "사람"에 파묻혀 있으면,
온전히 마무리되지 않은 현장을 떠나는 게 마치 직무유기처럼 느껴지기 십상입니다.
식별이 필요하지만, 대개는 절박해 보이는 일거리를 눈앞에 펼쳐놓고
'나 아니면 안 돼, 일단 끝내고 보자, 하느님은 나중에 잠시...' 하는
생각을 불어넣는 유혹일 확률이 크지요.
악의 바람은 오직 하나, 우리를 하느님에게서 떼어놓는 것뿐입니다.
"다른 배들도 그분을 뒤따랐다." (마르 4,36).
제자들은 군중을 남겨 둔 채 예수님을 모시고 갑니다. 그러자 다른 배들이 뒤따르지요.
우리가 "일"을 끊고 "하느님"을 선택할 때
군중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스스로 따라오도록 돕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이를 통해 군중은 자기 자리에서 예수님 말씀과 손길을 기다리던 수동성에서 벗어나
능동적으로 주님을 선택해 따르는 체험을 하게 된 것이지요.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마르 4,38)
그런데 하필 거센 돌풍이 불어 물이 배에 들이칩니다.
방금까지 으쓱했던 군중과의 교감에 미련이 남은 제자들에게
'이러느니 그들에게 봉사하며 뭍에 더 눌러있는 편이 나을 뻔 했다'는
불만과 후회가 몰려들기도 했을 겁니다.
제자들은 지금 내적 외적으로, 안팎으로 돌풍에 휩싸인 겁니다.
말하자면 통제가 안 되어 당황스런 상황에서 마음도 들쑤셔진 것이지요.
그러니 천하태평 주무시는 예수님이 못마땅하고 원망스럽기까지 했을 겁니다.
제자들의 말 안에는 "당신께서 하라시는 대로 했다가"라는 볼멘 후회가 행간에 스며 있는 듯합니다.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 하시니 바람이 멎고 아주 고요해졌다." (마르 4,39).
외부적 상황은 물론 내면의 소용돌이도
내가 아무리 되씹고 곱씹은들 해결이 안 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이때 치료가 필요한 경우와 믿음이 필요한 경우는 구분되어야 합니다.
내적 고통이 후자에 해당한다면 이를 잠잠히 만들 수 있는 힘은 주님의 현존뿐입니다.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마르 4,40)
말씀으로 외부적 상황을 잠재우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내면에 대고 안타까움을 토로하십니다.
그 안에는 "내가 너희와 함께 있는 데도..."하시는 속뜻이 들어 있습니다.
이제 제자들은 안팎으로 고요를 체험합니다.
언제 그랬는지 싶게 모든 격정이 가라앉았습니다.
하느님과 가까워질수록 우리를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게 만들려는 시련과 유혹이 없을 수 없습니다.
늘 담담하고 자신만만하다면 이미 성인 경지에 든 것이거나,
아예 영성생활을 시작조차 못 한 것이지요.
나약한 우리가 아무리 마음을 단단히 먹어도, 내외적으로 폭풍에 갇히면
그간 주님과 쌓은 신뢰와 경험도 백지처럼 되어버려,
번번이 두려움에 전복되어 휘청대고 무너집니다.
제1독서에서는 하느님께서 다윗 임금의 숨은 죄악을 예언자 나탄을 통해 들추십니다.
"네가 나를 무시하고 "(2사무 12,10).
"몹시 업신여겼으니"(2사무 12,14).
하느님께서 인간의 죄를 이렇게 정의하십니다.
특히나 더 사랑하고 총애하는 이의 죄이기에
당신 스스로 무시당했고 업신여김 받았다고 느끼시는 겁니다.
사람에게 범하는 죄가 결국 하느님께 범하는 죄임을 알겠습니다.
"내가 주님께 죄를 지었소." (2사무 12,13).
다윗의 범죄를 옹호하려는 것이 아닙니다만,
이 한마디로 모든 내외적 폭풍이 사그라집니다.
다윗에게 퍼부으시는 하느님의 격노는 물론
다윗 내면에서 들끓던 오염된 양심의 불안도 잠잠해집니다.
자신을 겸손히 낮추는 죄의 고백은 하느님과 자신의 관계를 다시 되돌리는 것입니다.
이로써 사람과의 관계도 자연히 질서를 찾게 됩니다.
사랑하는 벗님!
살다 보면 폭풍을 만나기 마련입니다.
외부적으로도 내면적으로도 피할 수 없습니다.
질병, 실직, 이별, 사고, 손실, 박해, 오해, 소외, 상처, 두려움...
그런데 고통이 나름, 이유 있는 사건을 통해 오는 것 같더라도,
많은 경우 하느님을 오롯이 향하고 사랑하려는 우리를 시련하는 힘일 수 있습니다.
이럴 폭풍에 휩싸여 죽을 지경이 된 우리보다 주님이 더 안타까워 애태우십니다.
그분은 결코 손 놓고 우리를 방관하지 않으십니다.
우리 안에서 함께 출렁대며 고통을 겪고 계십니다.
폭풍을 잠재우고 고요를 회복하는 힘은 주님 현존입니다.
주님의 말씀과 우리 믿음의 콜라보입니다.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
건너고 나면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평온하고 고요하지만,
폭풍 한가운데에선 늘 처음인듯 두렵고 힘겹게 마련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무의식까지 주님의 이 말씀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어떤 돌발 상황에서라도 기억나도록 영혼 깊숙이 새겨두어야 합니다.
풍랑을 가라앉히시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
“호수 저쪽으로 건너가자.”(35절).
여기서 저쪽이라고 하면 地上의 것에서 天上의 것으로,
現在의 것에서 未來의 것으로 건너가자는 말씀이다.
하느님의 것은 당신을 따르는 이들을 덕을 향하게 하므로,
호수 저쪽으로 건너갈 필요가 있다.
“물이 배에 거의 가득 차게 되었다.”(37절)
“예수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계셨다”(38절).
주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는 동안에도 제자들을 시험하신다.
주님께서 깨어나시어 호수를 꾸짖으시자, 돌풍이 잔잔해졌는데,
호수를 꾸짖으신 분은 피조물이 아니라, 창조주시다는 사실을 드러내고 있다.
이렇게 그들이 구원되어 주님의 기적을 증언하고 있다.
주님께서는 주무시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분은 우리와 함께 계시며 구원해 주시는 분이다.
예수님은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신다.
그 모습은 아무 힘없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무덤에 묻히신 분을 연상케 한다.
무덤에 묻히신 예수께서 다시 살아나시리라고 제자들이 믿기는 너무나 어려웠다.
예수님의 모습과 아우성을 치는 제자들의 모습은 대조적이다.
잠에 짓눌리셨지만(참조: 마태 8,24; 마르 4,38; 루카 8,23),
바다 위를 걸으실 만큼 가벼우셨고, 바람에 명령하셨으며,
베드로가 물에 빠졌을 때 건져주셨다
(참조: 마태 8,26; 14,25-32; 마르 4,39; 6,48-51; 루카 8,24; 요한 6,19-21).
그분은 그들을 두려움 속에 내버려 두신 채 주무신다.
닥쳐올 일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도록 그들의 감각을 날카롭게 하려는 뜻이었다.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39절). 그러자 “바람이 멎고 아주 고요해졌다.”(39절).
이렇게 하느님의 능력을 갖추신 분이 누구신지를
제자들은 이 풍랑의 기적에서 읽을 줄 알아야 한다.
인간을 죽음의 위협에서 구출해 주실 수 있는 분이시다.
이처럼 교회와 신앙인은 끊임없이 위협을 받는다.
우리는 모든 삶의 모든 사건 안에서 하느님의 손길을 느낄 수 있어야 하고,
그분의 현존과 그분의 능력을 읽을 수 있는 눈이 필요하다.
많은 경우 우리는 우리에게 닥치는 조그만 풍랑에도
절망하며, 원망하고 그분을 찾으려고 하지 않는다.
이러한 자세가 아니라,
주님께 우리 자신을 맡기고 그분을 의지하는 마음이 필요할 것이다.
세상만사를 섭리하시고 보살피시는 우리 주님이심을 굳게 믿고
거듭 밀려오는 고통 속에서도 기쁘게 살아야겠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그때에 거센 돌풍이 일어 물결이 배 안으로 들이쳐서, 물이 배에 거의 가득 차게 되었다.”
가끔 우리 인생 여정에도 거센 돌풍이 일 때가 있습니다.
때로 그 돌풍은 허리케인이나 토네이도처럼 강력한 타격을 우리에게 끼칩니다.
그로 인한 끔찍한 고통과 상처가 우리 공동체 안으로, 우리 가정 안으로,
내 영혼 안으로 밀려 들어와 우리를 큰 슬픔과 근심에 잠기게 만듭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계셨다.”
그런데 정말 안타깝고 답답한 일은 우리의 구세주요 의지처이신 주님께서
그토록 힘겨운 순간 도무지 우리를 도와주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외칩니다.
“대체 주님은 어디 계십니까?
주님이 계신다면 어찌 우리에게 이토록 혹독한 고통을 겪게 하십니까?”
넘실거리는 파도로 인해 배 안으로 물이 가득 들이차게 되자,
잔뜩 겁에 질린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우며 외칩니다.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
아이러니하게도 생사의 주관자, 만물의 창조주,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의 외아들이 승선해 계시는데도 제자들은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우리 역시 주님 품 안에 푹 안겨서 더 이상 행복할 수 없는 상황인데,
매일 주님을 모시고, 그분과 접촉하며, 그분이 내 안에 거처하시고 현존하시는데도,
대체 주님은 어디 계시나? 대체 뭐하시나? 라고 울부짖습니다.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우리네 인생 여정뿐 아니라 우주 만물, 삼라만상을 주관하시고 지배하시는 우리 주님이십니다.
매일 밀려오는 근심 걱정들, 의혹과 불안함을
그때그때 자비하신 주님 손길에 맡겨드려야겠습니다.
세상만사를 섭리하시고 보살피시는 우리 주님이심을 굳게 믿고
거듭 밀려오는 고통 속에서도 기쁘게 살아야겠습니다.
두려움과 고요함의 교차
박상대 마르코 신부
우리는 지금까지 마르코 복음 4장에 기록된 4편의 비유설교를 들었다.
모두가 하느님 나라의 신비에 관한 비유였다.
예수님의 도래로 말미암아 하느님 나라는 땅에 심겨진 씨앗처럼 아무도 모르게,
그러나 확실하게 그 완성을 향하여 자라나고 있다.
마치 작은 씨앗과도 같이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을 통하여 자라나고 있는 것이다.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께서 스스로 예수님과 함께 이 땅에 세우시는 나라이며,
그분 스스로가 다스리시는 나라이다.
하느님의 통치가 아들 예수께서 행하시는 표징을 통하여 드러나며,
거꾸로 이 표징들을 통하여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통치를 현존시키신다.
예수께서 행하시는 쵸징을 통하여 하느님의 통치를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이
마르코는 비유설교에 이어 네 가지 기적사화(4,35-5,43)를 준비하고 있다.
그것은 풍랑을 가라앉힌 기적, 게라사의 악령 들린 사람의 치유 기적,
하혈병 여인을 고치신 기적, 그리고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신 기적이다.
우리는 복음서에 수록된 기적사화를 크게
치유⋅구마기적(이적) 사화와 자연기적(이적) 사화의 두 가지로 나눈다.
치유⋅구마기적 사화는 사람을 병이나 신체의 불편함이나
악령으로부터 구제하는 기적을 보도하는 것이다.
자연기적사화는 죽음 사람이나 사람이 아닌 생물이나 자연물을 대상으로
예수님의 神的 능력을 드러내는 기적이다.
자연기적사화에 관한 대표적인 예로는 蘇生의 기적,
빵, 물고기, 포도주의 기적과 물 위를 걷는 기적, 풍랑을 잠재운 기적 등이 있다.
그러나 어떤 모양으로든 이러한 기적들이
예수님의 神性을 증명하려는 수단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예수님의 의도가 그런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사람들로 하여금 기적을 통하여
신성에로의 신앙을 강요하실 의도가 없으셨고,
오히려 함구령을 내려 자신의 신성과 메시아성을 되도록 감추려고 하셨다.
이는 무지하고 단순한 당대의 사람들에게나
비판적이고 과학적인 사고를 탐구의 기본으로 삼는
현대인들에게나 똑같이 적용된다.
예수께서 바라시는 것은 믿음이다.
여기서 믿음은 예수께서 행하시는 기적이라는 사건 속에서
인간과 자연에게 말을 건네시는 하느님의 현존에 대한 수긍이다.
하느님의 세상에 대한 관심과 통치에 대한 믿음인 것이다.
비유 설교를 마치신 예수께서 타고 계시던 배를 돌려
호수 건너편으로 가자고 하셨다.
에수께서 호숫가에 모여든 군중을 배에 앉혀 가르치셨던 곳은
가파르나움 근처로 갈릴래아 호수의 북쪽이다.
잠시 갈릴래아 호수에 관하여 살펴보자.
갈릴래아 호수는 그 모양이 고구마 같기도 하고,
구약성서에서는 하프와 비슷한 모양이다 하여
‘겐네사렛 호수’(민수 34,11; 신명 3,17; 여호 12,3)라고 불렀고,
신약시대에 와서는 갈릴래아 호수,
겐네사렛 호수(1마카 11,67; 마태 14,34; 마르 6,53; 루카 5,1)로,
요한복음에서는 티베리아 호수(요한 6,1; 6,23; 21,1)로 불린다.
갈릴래아 호수의 호면은 지중해의 해수면보다 낮은 –212m, 50m,
가장 긴 폭은 남북으로 22km,
동서로 14km, 둘레는 53km, 호수 면적은 170㎢에 달한다.
사람들은 이 호수를 바다라고도 한다.
예수께서 호수의 건너편으로 가신다고 함은
호구 북쪽에서 남쪽이 아니라, 동편 골란 지방을 말한다.
(이에 대하여는 다음 복음에서 다루겠다.)
오늘 복음은 이렇게 예수님과 제자들을 태운 배가
호수 동편으로 항해하던 중에 일어난 일이다.
배를 파산 직전으로 몰아붙인 세찬 바람과 풍랑은
북쪽 헤르몬산(2,814m)에서 형성된 골란고원에서 불어오는 돌풍으로
갈릴래아 호수에 종종 있는 일이다.
12제자 중에 4명(시몬, 안드레아, 야고보, 요한)은
前職이 뱃사람들이라 이에 능통했을 일이지만,
다른 제자들에게는 그야말로 풍전등화의 위기였으리라.
돌풍이 몰아치고, 풍랑이 일어 배에 물이 차서
사람의 목숨이 寸刻을 다투는데 예수님은 뱃고물을 베개 삼아 주무시고 계신다.
지나치게 과장된 표현이지만, 난리와 태평, 두려움과 고요함,
불신과 신뢰의 극적인 交叉를 충분히 실감할 수 있는 장면이다.
예수께서는 마치 마귀가 들린 사람에게서 악령을 쫓아내시듯,
바람과 바다를 향하여 호통을 치셨고, 이에 그들은 잠잠하고 고요해졌다.
예수님의 권위에 바람도 바다도 복종한 것이다.
그러나 막상 중요한 것은, 기적보다 제자들에게 ‘아직도 없는 믿음’(40절)이다.
같은 배를 탔다면 우리도 그랬을 것이다.
그리 길지는 않지만, 막 태동한 그리스도 교회가
바다 위의 배와 같이 돌풍과 풍랑에 시달리는 모습을
마르코 복음사가가 미리 내다본 것일까?
잊지 말아야 할 점은
그 배 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함께 승선하여 계시다는 것이며,
바람도 바다도 모든 자연도 하느님 통치의 손길 안에 있으며,
이들도 하느님 현존의 공간이라는 것이다.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도대체 이분이 누구 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
이승화 시몬 신부
그리스도교는 평정심을 강조합니다.
기쁘고 슬플 때 웃고 울지 말라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이기에 감정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감정을 통해 하느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다만 평정심을 강조하는 이유는
좋은 일이 있을 때에도 하느님을 바라보며
교만이나 허영의 유혹에 빠지지 않는 것입니다.
슬픈 일이 있을 때에도 하느님을 바라보며
슬픔과 분노에 잠겨 자신을 잃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분명 삶에서는 다양한 상황이 벌어지고
우리는 그 상황에 적응하면서 헤쳐 나가게 됩니다.
때로는 혼자 힘으로는 어려울 수 있습니다.
그럴 때에도 하느님이 함께하고 있음을 기억한다면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놓치지 않는다면
우리는 나 자신을 잃지 않을 수 있습니다.
아무리 어두운 밤이라도
작은 불빛에서 희망을 발견할 수 있듯
우리는 흔들리지 않고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럴 때 더 많은 결실과 충만함으로
내일을 희망하며 오늘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물론 쉽지 않습니다.
다윗이 빠졌던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던 것은
예언자가 전한 하느님의 말씀 덕분이었습니다.
제자들이 거센 돌풍에서도 의지할 수 있던 것은
주님이신 예수님이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감정적으로 흔들릴 수 있음을 알기에
기도 도구와 성경을 주변에 두고 있다면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감정에 흔들릴 수 있는 것처럼
반대로 감정을 통해 중심을 잡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오늘 주님의 말씀과 기도 도구를 통해 하느님을 기억하고
하느님께 희망을 둘 수 있길 바랍니다.
그리하여 더 기쁜 선물을 받을 준비를 하는
그런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출처: [시몬 신부의 신앙이야기] https://frsimon.tistory.com/1605
기 여호수아 수녀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과 제자들이 배를 타고 호수를 건넙니다.
그 과정에서 거센 돌풍이 일어 물결이 배 안으로 들이쳐서
물이 배에 거의 가득 차게 되는 상황에 놓입니다.
그러는 중에도 예수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계십니다.
그러나 인간적인 약함에 휩싸인 제자들은
예수님을 깨우며 우리가 죽게 되었다고
걱정이 되지 않으시냐고 질문을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바람과 호수를 꾸짖으시니 바람이 멎고 아주 고요하게 되었지요..
오늘의 복음을 묵상하며 우리의 인생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의 인생은 예수님과 함께하는 여정입니다.
예수님과 늘 함께하는 제자들이지만
언제나 고요하고 잔잔하지만은 않았지요.
그러나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거센 돌풍으로 물이 배에 들이닥쳐도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을 기억하고
그분께 청하면 됩니다.
처음에 이 복음을 보면서 호수와 바람을 꾸짖으시는 예수님께서
걱정을 한다고 믿음이 없다고 제자들도 꾸짖으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러나 바람을 꾸짖으시고 제자들에게는 말씀하신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두려움에 휩싸일 때는
정신을 못 차리고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곡해할 때도 많지요.
그때 예수님처럼, 예수님과 함께 잠시 고요히 머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이 상황이 어떠한 상황인가 이때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예수님께 여쭙고 도와 달라고 청하며
걱정을 내려놓게 해 달라고 믿음을 굳건하게 해 달라고 지혜를 달라고...등
예수님께 기도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분께서는 늘 우리와 함께하시는 임마누엘 주님이십니다.
출처 : 툿찡포교베네딕도수녀원 http://www.benedictine.or.kr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