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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 (예레미야애가 3장 25-26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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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선하신 분이십니다. 선하다는 의미를 사실 가장 효과적으로 표현하기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하나님의 선하심의 긍극적인 실체를 제대로 깨닫고, 경험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존 파이퍼 목사님은 예레미야 3장에 대해 설교 하면서,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해 이렇게 설교를 했습니다.
“인생은 힘겹고 하나님은 선하시다(Life is hard and God is good), 이것이 예레미야애가의 의미이고 욥기의 의미이며 성경의 의미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내가 여전히 죄인 이라는 것과, 나 때문에 피 흘림의 대가가 필요 했다는 것과, 내가 여전히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함으로 인해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이 내게 찾아 오실 수 밖에 없었던 상황을 온전히 받아 드려야 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매일 같이 죄와 불순종에서 헤매이고 있음을 자각 하실 수 있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비하심으로 긍휼을 베푸시려 하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발견하실 수 있을 겁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대하시면서, 칭찬하시고, 인정해 주시기도 하지만 분노 하시고, 징계하실 때도 분명히 있습니다.
여러분의 인생 가운데 좋은 상황이나 나쁜 상황에 있을 지라도 그럴 때마다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고 계시다면, 하나님은 변함 없이 여러분에 대해 자비와 긍휼의 손길을 내밀어 주실 겁니다. 항상 긍휼과 자비로 나를 대하여 주시는 하나님을 발견할 때 비로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이해 하실 수 있을 겁니다.”
참으로 깊게 묵상하며 새겨 볼 만한 말씀입니다. 존 파이퍼 목사님의 설교 요지는, 하나님의 선하심은 이해 하는 것이 아니라 발견하고 경험하는 것임을 강조한 말씀입니다. 우리는 평안 가운데서나 고난의 아픔 가운데서나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발견하고 경험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신앙생활 하면서 내가 잘하고 있을 때나, 잘못하여서 징계를 받을 때에나, 곤고한 상황에 부딪칠 때나, 하나님의 선하신 행동은 우리를 향하여 일관되게 자비와 긍휼로 상대해 주신 다는 것을 수시로 깨달을 수 있어야 선하신 하나님과 진짜 동행의 관계를 이루어 가게 됩니다.
오늘 본문이 있는 예레미야 3장 위에 제목을 보시면, 진노, 참회, 소망 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이 바벨론에게 멸망 당할 때 활동하였던 선지자였습니다. 예루살렘 성이 불타고, 백성들이 무참히 죽임 당하고, 짐승처럼 쇠 사슬에 묶여서 포로로 끌려가는 참혹한 지경을 두 눈으로 전부 목격했습니다.
예레미야가 목격한 이스라엘의 최후를 우리의 인생으로 비교해 보면 정말 다시는 재기할 수 없을 것 같은 최악의 상황을 맞이한 것입니다. 그런데 앞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설명 드리면서, 하나님은 우리 인생을 징계 하실 때에도 일관되게 긍휼과 자비를 앞세우신다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이 철저하게 멸망 당한 상황에서도, 우리 개인의 인생이 철저하게 무너진 때에라도, 그것이 불법과 불순종으로 인해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따른 무서운 징계에 의한 것이라고 할 지라도, 여전히 하나님은 긍휼과 자비 하심으로 그들에게 참회와 용서의 기회를 주시고자 합니다.
예레미야가 이런 참담한 순간을 목격한 이후에 취한 행동들을 살펴 보면 다시 살길을 찾을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나라가 멸망 당하는 살육의 현장을 보면서 가슴이 찢어지는 상황 속에서도, 예레미야 자신을 포함한 모든 백성들이 지금 당장 해야 할 것은 철저한 참회 뿐이니 정신차리고 회개부터하자고 부르짖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 앞에서 땅을 코에 대고 납작 엎드리는 자세를 취하고, 하나님의 선하신 긍휼과 자비에 기대어 눈물 흘리며 기도하기를 멈추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새로운 기회와 소망을 주실 것이라는 위로의 말을 전했습니다. 참담하고 비통한 상황에서 하나님의 선하신을 찾으라고 외쳤던 예레미야야 말로 진정한 선지자 였고 난세의 영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의 이러한 비통한 심정들이 잘 담긴 탄식과 눈물의 기도의 내용이 예레미야 3장이고, 그래서 제목을 진노, 참회, 소망으로 요약해 놓았습니다. 예레미야는 불법과 불순종이 극에 달한 패악한 시대에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굳게 믿었던 거의 유일한 선지자이며, 거의 유일한 백성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예레미야가 얼마나 눈물을 많이 흘렸으면 그를 ‘눈물의 선지자’라고 불렀겠습니까. 그는 지금 슬픔 가운데 울고 있었지만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완전히 버리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의 입술에서는 자신이 알고 있는 선하신 하나님을 이렇게 불렀습니다. 25절을 읽어 드립니다.
“기다리는 자들에게나 구하는 영혼들에게 여호와는 선하시도다” 아멘.
여호와는 선하시도다, 여호와는 선하시도다, 예레미야가 하나님을 향한 외침에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가장 중요하게 선포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포함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다리는 자가 되기를, 구하는 영혼들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했습니다.
그런데 예레미야가 이런 말을 선포한 실제의 상황은 광란과 살육판이 벌어지는 현장 이었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포악한 바벨론 군대가 예루살렘 성에 침공해서 남녀노소를 닥치는 대로 죽이고, 살아남은 자는 쇠사슬에 묶어 짐승처럼 끌려 갔고, 성전 보물들은 다 약탈 당했고, 다시는 이스라엘이 재건하지 못하도록 성을 전부 불태워 졌습니다.
이런 끔찍하고 참혹한 지경에, “우리는 소망을 가지고 기다리겠습니다. 우리는 영혼의 평안과 구원을 위해 기도를 열심히 하겠습니다. 긍휼과 자비를 베푸시는 하나님은 선하십니다!” 이런 기도가 제대로 나올 리가 있겠습니까?
아마도 당장 죽임 당할 것 같은 극도의 공포감 속에서 이런 멸망의 결과가 나온 것에 대해 뒤늦게 후회하며 발등을 찍고 싶은 극심한 자책감에 빠졌을 겁니다.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자도 있었을 것이며,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끌려가면서 정신이 혼미하여 그 어떤 생각도 못하는 지경이었을 겁니다.
이런 공황 상태에서도 예레미야는 정신줄을 놓치 않았습니다. 그가 가장 먼저 한 것은 죄와 불법과 불순종에 대한 인정, 그리고 그로 인한 징계와 고난 받음에 대한 당연함을 고백하는 일부터 였습니다. 이런 내용입니다.
“내가(우리 민족과 나라가) 지금 고난 당하며 매를 맞는 것은 오로지 여호와의 진노 때문입니다. 나는 어둠 안에 갇혔고 빛 가운데 걸어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진노의 매는 종일토록, 자주 자주 나를 치고 있습니다. 나는 살과 가죽이 벗겨지고 뼈가 꺾여지는 고통 속에 있습니다. 나는 죽은자 같이 움직이지 못하며 쇠사슬에 묶여 있습니다.
여호와는 내가 부르짖는 기도를 듣지 않으시고 내가 걸어갈 길은 돌담으로 막으셨습니다. 곰과 사자는 은밀하게 다가와 내 몸을 찢어 버립니다. 내몸은 과녁이 되어 화살들이 날아와 박히고 있습니다. 나는 조롱거리거 되었고 내 강하던 이빨은 돌로 부러트렸습니다. 내 심령에서 평강과 복을 빼앗아 가시고 여호와에 대한 소망을 끊어내셨습니다”
이렇게 징계나 고난 받음에 대한 극한의 고통을 호소 하며, 이 모든 것이 나와 민족과 나라가 하나님을 배반하고 말씀을 불순종하고 성령이 인도하심을 거부했기 때문임을 인정하고 또 인정했습니다. 입에 침이 마르고 입술이 뽑혀 나갈 만큼 부르짖으며 참회하고 또 참회 했습니다.
이런 내용이 1~24절에 나와 있습니다. 이렇게 진정한 참회의 부르짖음 가운데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선하심,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마음이 깊은 절망의 낙심가운데 있었지만, 소망의 하나님을 바라며 무릎꿇고 간절히 기도하기에 열심을 낼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징계와 고난의 채찍은 정말 고통스럽습니다, 예레미야는 살 소망이 끊어질 만큼의 극심한 인간적인 고통에 대해 호소하면서 애통하는 심정을 애절하게 구구절절 담겨 있습니다.
우리가 꼭 깨달아야 할 것은, 징계나 고난 받음의 아픔 가운데에서 정신을 차리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찾고 발견하는 통로를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통로를 찾는 길은 죄와 불순종에 댜한 인정과 참회 밖에 없습니다. 그 다음에 오직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하나님의 선하심을 선포해야 합니다.
그리고 정말 간절한 마음으로 “나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내게 자비를 베풀어 주옵소서” 부르짖으며 가슴을 찢으며 엎드려야 합니다. 이런 겸비(낮추는)한 태도를 취할 때, 하나님은 부르짖는 자의 고통과 신음을 감찰하시게 될 것이며 긍휼과 자비하심으로 용서와 회복의 은혜로 새롭게 역사 하실 겁니다.
예레미야는 1~24절 까지 이러한 선결 과제들(인정과 참회)을 충실히 이행한 후에 “기다리는 자들에게나 구하는 영혼들에게 여호와는 선하시도다” 라는 호소를 드린 겁니다. 어느 누구라도 예레미야처럼 인정하고 참회하고 소망을 간구하며 부르짖는 자에게 하나님은 반드시 선하심으로 나타나실 겁니다. 어느 누구라도 선하신 하나님을 발견하고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가 거짓과 불의함을 분별하여 물리치고 죄를 짓지 아니하여서 징계나 고난을 받지 않게 하는 것이 최고의 삶이겠지만, 그토록 크고 많은 은혜를 받은 이스라엘이 멸망 당한 것을 보면, 우리 인간들의 교만함음 하나님을 거부하고 배반하는 일을 언제든지 저지를 수 있습니다.
징계나 고난을 받음이 멸망의 끝이 아니라 징계나 고난을 받는 그 사람에게 있어서 다시 올 수 없는 일생일대의 구원의 확신을 붙잡는 기회가 되게 하시는 것이 악을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의 강력한 역사 하심의 방법입니다.
성경에서 요셉이 그러한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요셉은 자기를 죽이려고 했고 노예로 팔아 버린 형들에게 얼마든지 보복할 수 있는 권력이 주어졌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형들을 안심시키면서 자기에게 주신 고난이 선을 악으려 바꾸려 하려는 하나님의 계획 이었음을 고백했습니다. 요셉도 고난 가운데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발견하고 긍휼과 자비 가운데서 소망을 찾았던 겁니다.
하나님은 정말 미워하는 자에게는 무관심으로 대응 하시지만 정말 사랑하는 자에게는 매부터 드십니다. 사랑하는 자에게 강한 채찍을 휘두르십니다. 하나님은 죄를 미워 하시지 사람을 미워하시지 않습니다. 우리 연약한 인생 들을 긍휼히 여겨 주십니다.
눈물이 쏙 빠지도록 무섭게 징계나 고난을 받게 하시지만, 그 모든 것을 잊어버리게 하실 만큼의 하늘의 평안과 소망으로 나아가게 하십니다. 징계나 고난 가운데서 하나님을 찾고 발견하는 자가 진정한 승리자입니다. 고난 받는 것이 내게 유익이라는 사도 바울의 고백이 왜 나왔는지 이해가 됩니다.
예레미야는 이스라엘 모든 백성들이 자기와 같은 심정이기를 바랐습니다. 인정하고, 참회하면서, 하나님께 고통을 호소하는 일을 멈추지 않기를 바랐습니다. 결국에는 이스라엘 민족과 나라가 기디라는 자, 영혼을 구하는 자들이 되어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발견하고 경험하게 되기를 바랐습니다.
그 회복의 시간이 70년이었지만 예레미야의 호소와 간구는 결국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으로 인하여 다시 회복과 평안의 기회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진정으로 선하시고 긍휴과 자비가 풍성하신 분이십니다.
사사기의 역사 구조를 보면, 백성들이 하나님께 순종하여 평안으로 살다가 - 불순종 하여 진노를 사게 되고 - 징계를 받아 압제를 당하게 되고- 참회하고 긍휼을 구하며 부르짖자 다시 사사를 보내 구원에 주시는 순환구조가 반복되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은 죽을 때까지 사사기 구조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죄와 악과 거짓과 불순종은 늘 우리 곁에 가까이 있습니다. 징계와 채찍도 언제든지 일어납니다. 그 쳇바퀴처럼 돌아가는 구조 가운데서 인정하고 참회하여 다시 순환 구조 안에 머물며 평안을 지켜 가느냐, 아니면 하나님의 선하심을 발견하기를 거부하고 구조 밖으로 튕겨 나가 영원히 멸망의 길로 가느냐는 순전히 우리 각자의 믿음의 분량대로 되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죽는 순간까지 긍휼과 자비를 베푸시는 선하신 하나님 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와 불순종의 고리를 끊어 내시려고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셨습니다. 성령님은 우리가 다시는 죄와 불순종으로 인하여 이스라엘의 멸망과 같은 무서운 징계의 대상이 되지 않도록 지켜 주십니다.
우리 모두가 평안의 상황이거나 곤고한 상황이거나, 어떤 상황 앞에서도 예레미야와 같은 심정으로 선하신 하나님 앞에 온전하게 나아가셔서 회복과 용서를 잠잠히 기다리는 자들이 되시고, 내 영혼의 구원과 평안을 어느 누구에게도 절대 빼앗기지 아니하고 오직 우리 주님과 동행하며 소망의 길로만 나아가실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본문 마지막 절인 26절을 읽어 드립니다. “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 아멘.
잠잠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속성 가운데 하나입니다. 하나님은 온 우주 만물을 다스려 가시고 질서를 유지시켜 가시면서도 시끌벅적 소란스럽게 일하시지 않습니다. 세상을 어떻게 다스려 가시는지 아무도 의식하지 못할 정도로 아주 잠잠히 일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루가 멀다하고 “죽을 것 같다, 짜증 난다, 말도 안 된다, 미칠 것 같다” 소리 소리를 지르면서 살아갑니다. 하나님은 시끌벅적한 우리의 소리들을 시끄럽다고 물리치시지 아니하고 한 사람 한 사람의 인생사를 너무나 세밀하게 살피시고 이끌어 가십니다.
그러면서도 정작 하나님은 자신은 여전히 잠잠히 계십니다. 하나님은 잠잠한 가운데 우리 인생을 감찰 하시고, 우리 인생의 앞길을 선한 길로 인도해 가십니다. 만약 하나님이 잠잠 하시지 않고 매 순간 우리에게 잔소리를 하신다면 우리는 어마어마한 팩트 공격을 당해서 견뎌내지 못할 겁니다.
하나님의 잠잠 하신 성품은 그의 아들 예수님에게서 잘 나타 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님에 대하여 예언하면서 “그는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사 42:2)라고 하였고,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사 53:7)에는 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많은 말씀을 남기셨지만, 결정적인 장면에서는 잠잠하며 참으며 기다리셨던 분이셨습니다. 이와는 반대로 악한 자들, 즉 예수님을 모함 하고 시기하고 비방하는 자들은 늘 잠잠하지 못하고 시끄러웠습니다. 자기들의 불의와 거짓을 훤히 드러내시는 예수님의 입을 막으려면 더 큰 목소리로 사람들에게 외쳐야 했기 때문입니다.
군중들(대다수의 사람들)은 진리만을 말씀 하시며 거짓과 비방과 모함에 대하여 일체 잠잠하신 예수님을 죽이라고 하였고, 수 많은 군중들은 그들 편에서 동조하고 동참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조용히 잠잠한 가운데 가시 면류관을 쓰시고 채찍을 맞으시고 십자가의 길을 묵묵히 가셨습니다.
예수님이 걸어가신 십자가 고난의 길에서 확인 할 수 있듯이, 하나님은 진리를 거스르는 자들 앞에서는 어떤 말씀도 섞지 않으시고 오직 잠잠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구원이 강력하게 역사하는 장면에서는 시끄러운 말이나 소란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잠잠하시다는 것은 좋은 일이든 무서운 일이든 무언가 벌어질 것 같은 폭풍 전야와 같은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잠잠하심을 하나님의 구원과 연결시켜서 말합니다.
홍해 바다를 가르시는 엄청난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선포 합니다.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출 14:13,14) 아멘
아마 최대 다수의 인원이 동시에 목격한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사건이 홍해 사건일 겁니다. 이 사건을 앞둔 모세는 하나님 앞에서 모든 백성들이 가만히 있으라고 선포했습니다. 사실 소리를 내고 싶어도 홍해 바다가 갈라지는 광경에 압도되어 아무 말도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모세 앞에서 서로 불평과 원망을 쏟아내며, 시끄럽게 말만 앞세우고, 악과 불의를 행하고, 거짓과 불법을 일삼는 자들은 하나님이 이루시는 구원의 역사 앞에서 입이 닫혔을 겁니다.
구원 받아야 할 죄인들이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 앞에서 무슨 할 말이 그렇게 많겠습니까? 구원의 은혜 앞에서는 그저 긍휼과 자비를 베푸시는 하나님 앞에 엎드리기만 하면 됩니다.
만약 홍해 사건 전에 모세의 입을 통하지 않고 하나님이 직접 말씀 하셨다면, 이렇게 말씀 하셨을 겁니다.
“너희들 중에 나 여호와 하나님의 권능과 공의 앞에 감히 그 누가 얼굴 들고 큰 소리로 불평과 원망을 말할자가 있겠느냐, / 나는 죄와 악을 멸하고 불법과 불순종을 심판하는 여호와 하나님 이니라, 너희들은 내 앞에서 영원히 잠잠하라, / 내가 이루어 가는 구원 앞에서 스스로의 언행을 조심하라, / 나는 너희가 행한대로 심판을 행하는 너희의 구원의 하나님 이니라” 아멘.
제가 이 문장을 몇 번 반복해서 읽는 가운데, 구원 앞에 잠잠하라는 이 말씀이 무섭고, 두렵고, 감격되고, 정말 잘 살아야 겠다는 복잡한 심정이 밀려 왔습니다. 하나님은 잠잠하신 가운데 때로는 은혜와 성실로 역사하시고, 때로는 공의를 발하셔서 무서운 심판과 징계를 행사 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성경은 나무나 명확하게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잠잠히 계시다는 것은 죄를 저지르고 불순종하는 우리들을 징계 하시기 위해서 이기도 하시지만, 우리를 버리시려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연약한 인생들에게 다시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가시기 위해 때를 기다리시는 시간이라는 것을 기억 하십시오. 우리는 하나님이 회복시켜 주실 때를 기다리는 가운데, 좋은 마음(참회와 순종)이 되도록 내 마음과 생각을 바로 잡으며 기다리고 또 기다리기를 게을리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들이 행한 일들, 행하고 있는 일들, 그리고 앞으로 행하고자 하는 일들을 다 기억하고 계시고, 그 마음의 생각까지도 훤히 알고 계십니다. 부르짖는 소리든, 세밀하게 속삭이든 소리든 그 소리가 모함과 불법의 소리든, 참회와 간구의 소리든 하나도 놓치지 아니하시고 다 들으시는 분이십니다. 다 기억 하시고, 다 들으신다는 것을 참으로 두렵게 여겨야 합니다.
“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 하나님이 잠잠하고 계시는 동안 우리는 잠잠히 하나님의 구원 하심만을 기다려야 합니다. 참회로 기다려야 합니다. 인내로 기다려야 합니다. 용서로 기다려야 합니다. 사랑으로 기다려 합니다. 열매로 기다려야 합니다. 무엇 보다도 진실하게 기도함으로 하나님과 좋은 관계, 친밀한 화목의 관계를 이루어 가야 합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해서 말씀 드립니다. 우리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시지 사람을 미워 하시지는 않습니다.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리라고 주어진 시간에, 말씀 그대로 내 영혼의 구원을 위해 전심으로 하나님만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리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지인 목사님이 페이스북에 이런 글을 올렸습니다. “가장 행복한 자는 죄로 죽을 인생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 용서함 받고 천국 삶을 살게 되는 은총을 입은 자입니다” 이 말이 진실한 믿음으로 고백되어지고, 만인 앞에 공개되어진 글(말)이 되기까지 이 목사님은 진실로 잠잠히 보내는 시간을 가지셨다고 생각합니다.
예수 십자가 구원, 다 알 수 있을 법한 내용이지만, 이것을 다 알지 못하고 죽는 사람이 너무나도 많은 시대입니다.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며 안일하게 시간을 허비하는 사람이 너무나도 많은 시대입니다. 다 알고 있다고 착각하고서 성령이 말씀 하시고 인도하시는 것을 경험하지 못하고 시끄럽게 내 목소리만 높여가는 사람이 너무나도 많은 시대입니다.
“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 이 말씀이 내 인생의 꺼지지 않는 등불 같은 말씀이 되어서, 내가 지나온 인생의 시간들을 되돌아 보고, 오직 잠잠히 구원의 하나님만을 바라며, 참회하고, 간구하고, 소망하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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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아버지! 우리 인생에 단 하나의 소원은 오직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리는 것이 되기를 원하오니, 죄와 악과 불법과 거짓을 분별하며, 일생동안 참회와 긍휼을 구하며 하나님의 선하심을 발견하며 살아가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