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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월 28일 연중 제4주일(해외 원조 주일)
제1독서 : 신명 18,15-20
제2독서 : 1코린 7,32-35
복 음 : 마르 1,21ㄴ-28
카파르나움에서,
21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셨는데,
22 사람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
그분께서 율법 학자들과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23 마침 그 회당에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소리를 지르며 24 말하였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25 예수님께서 그에게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하고 꾸짖으시니,
26 더러운 영은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켜 놓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갔다.
27 그러자 사람들이 모두 놀라,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저이가 더러운 영들에게 명령하니 그것들도 복종하는구나.” 하며 서로 물어보았다.
28 그리하여 그분의 소문이 곧바로 갈릴래아 주변 모든 지방에 두루 퍼져 나갔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단 음식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달 것 같으면 손을 대지 않는 것은 당연하고, 눈길도 주지 않습니다.
누구는 너무나 먹음직스럽다고 말하지만, 달다고 생각되면 머리부터 아파오는 느낌입니다.
어떤 분께서 너무 맛있다면서 한 입만 먹어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단 것을 싫어하는 제게는 한 입 먹는 것이 괴로운 일이 되고 맙니다.
이 때문에 오해도 많이 받았습니다.
이 맛있는 것에 어떻게 손도 대지 않는다면서,
혹시 자기에게 불만이 있는 것이 아니냐고 하십니다.
음식에 대한 선호도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
성당에서 보니, 초콜릿을 싫어하는 아이도 있고, 계란을 싫어하는 아이도 있습니다.
저의 경우는 커피를 너무나 좋아하지만, 이 커피를 싫어하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자기 선호도가 다르다고 해서 틀렸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몸에 유익한 것이라면 어떨까요?
지금 아파서 약을 먹어야 하는데, 약이 써서 싫다는 아이를 존중해서
약을 주지 않는 부모가 있겠습니까?
음식의 선호도가 다른 것을 인정하기는 하지만,
필요하다면 선호도의 차이가 있어도 억지로 먹게 합니다.
어쩌면 사랑도 그렇지 않을까 싶습니다. 물론 사랑의 선호도도 다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사랑은 우리가 받아들이기 힘든 사랑이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너무 맛없어 보이는 사랑입니다.
어떻게 원수를 사랑하고, 오히려 상대에게 더 주는 사랑을 실천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이 사랑을 우리가 무조건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비록 겉으로 보기에는 그렇게 좋아 보이지 않지만,
우리에게 큰 도움이 되는 진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좋은 약이 입에는 쓰지만 몸에는 좋은 것처럼,
몸과 영혼을 건강하게 해주는 최고의 음식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권위는 오늘 복음에도 나오듯이
더러운 영을 쫓아낼 정도로 크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더러운 영은 예수님에 대해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을 세상에 증언하는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러나 주님께서는 마귀가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사랑은 악을 없애고, 선을 행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사랑을 실천하기 힘들다고 해서 피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순간의 만족을 위해 마귀와 타협해서도 안 됩니다.
마귀의 유혹은 항상 그럴싸합니다. 가장 좋은 길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철저히 주님의 사랑을 기억하며, 우리도 그런 사랑의 선호도를 갖춰야 합니다.
주님 안에서만 진정한 평화와 행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게 어찌된 일이야?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마르 1,27)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연중 4 주일입니다.
<제1독서>에서 모세는 자신의 삶을 마감하는 지점에서,
새로운 예언자가 오실 것을 예고합니다.
이는 이스라엘 역사에 등장하는 많은 예언자 가운데 한 예언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유일무이한 “한 예언자”(요한 1,21), 곧 메시아를 말합니다.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코린토 신자들에게
‘갈림이 없이 품위 있고 충실하게 주님을 섬길 것’을 권고합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이 잡히신 뒤에
갈릴래아에서 복음을 선포하기 시작하시고,
어부 네 사람을 제자로 부르신 후, 가파르나움으로 가시어 행하신
첫 번째 행적인 안식일에 회당에서 더러운 영을 쫓아내는 일을 들려줍니다.
곧 “하늘나라가 왔다.”는 복음을 선포하신 다음,
그 “하늘나라”의 실현을 구체적으로 ‘악마의 추방을 통해 보여주십니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혀로 하와를 속인 악마의 ‘혀 놀림’을 중지시킵니다.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마르 1,25)
그러자 악마는 그 사람에게서 나갔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자, 말씀하신 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사실, 인간은 범죄 하여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후, 악의 지배 아래 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악마가 혀로 하와를 속인 것으로부터 비롯되었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하와를 속였던 악마의 그 혀 놀림을 중지시키며,
그에게서 쫓아내십니다. 곧 에덴으로의 회복입니다.
따라서, 더러운 영을 쫓아내는 이 ‘첫 번째 행적’은
악마의 지배로부터 인간에게 자유를 되찾아 주는 구원의 표징입니다.
사실, 악마를 쫓아내는 일은 전혀 새로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히브리 구마사들도 그러한 일을 해 왔습니다.
사람들이 놀라워했던 것은 그분의 권위 있는 “말씀”이었습니다.
“이게 어찌된 일이야?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저이가 더러운 영에게 명령하니 그것들도 복종하는구나.”(마르 1,27)
그렇습니다. 놀라웠던 것은 그분의 “권위”였습니다.
그분의 가르침에는 ‘권위’가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가르치는 이라 하여 누구나 다 권위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권위”를 나타내는 ‘exusia’라는 단어는 ‘힘’이란 뜻으로,
하느님께만 사용되는 단어라고 합니다.
곧 예수님의 말씀에는 ‘하느님의 힘’이 실려 있어서
말씀하신 대로 이루어지게 되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악령을 쫓아내시면서 당신 스스로 명령하실 뿐,
다른 누구의 이름도 부르지 않으십니다. 당신이 바로 구원자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가 유의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는 마귀를 죽이거나 제거해 버리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서 마귀는 언제든지 또다시 침범하고 괴롭힐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어쩌면, 우리는 완전한 문제 해결을 바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단지 물러가게 할 뿐입니다. 마귀는 또다시 찾아올 것입니다.
이는 단지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당신의 권능에 의탁하라’는 의미를 품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늘 당신 안에 머물라.’는 말씀입니다.
당신과의 관계 맺음을 유지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악령은 예수님께 말합니다.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마르 1,24)
그러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단지 마귀를 쫓아내는 데에 있기보다,
그분과 친교와 유대의 관계를 유지하는 데 있음을 말해줍니다.
곧 빛이신 당신의 권능 안에 머무는 일입니다.
그러면 더러운 영은 더 이상 침범하지 못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우리 안에서 우리를 교란시키고 분열시키는
온갖 거짓의 혀 놀림을 멈추고, 어둠을 내몰아 내어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늘 빛이신 주님 안에 머물러야 할 일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우리 주님의 “권위 있는 말씀”을 통해서,
그분의 힘이 우리 안에 들어오고, 우리 안에서 우리 주님의 빛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일입니다.
다른 한편, 마르코복음에서는 ‘선포하다’와 ‘가르치다’라는 용어가 구분되어 사용되는데,
복음을 선포하는 주체는 예수님은 물론, 세례자 요한과 제자들이고,
나아가 그리스도교 공동체까지도 될 수 있는데 반해,
가르치는 것은 오직 예수님께만 유보되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제 자신을 점검해 봅니다.
‘나는 선포하는 사람인가? 가르치는 사람인가?’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마르 1,24)
주님!
진리를 알게 하소서.
진리를 받아들이고 믿는 자 되게 하소서.
진리를 따르며 받드는 당신의 제자가 되게 하소서.
진리로 거룩하게 하시고 새로 나게 하소서.
주님이신 당신을 믿사오니,
제가 관계 맺는 모든 것 안에서, 당신의 거룩한 이름이 빛나게 하소서!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백조가 우아하게 호수를 다니기 위해서 물속에 있는 다리는 쉼 없이 움직이기 마련입니다.
겉으로 보기에 화려하고, 아름다워 보이는 것들은
사실 그렇게 되기까지 뒤에서 수고하는 이들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88 서울 올림픽’이 개최될 수 있도록 수고했던 분들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1981년 대한민국은 올림픽 개최 도시로 서울을 신청하였습니다.
당시 대한민국의 경쟁 국가는 일본이었습니다.
일본의 개최 도시는 나고야였습니다.
일본은 이미 1964년에 동경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개최한 경험이 있었습니다.
한국은 경제적인 이유로 이미 개최하기로 했던 아시안 게임을 포기했던 경험이 있었습니다.
객관적인 면에서 대한민국은 올림픽 개최를 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일본의 힘이 강했고, 우리의 힘은 약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올림픽 유치위원회의 위원장인 고 정주영 회장은
유치단을 이끌고 독일 바덴바덴으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88 올림픽 개최 장소를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당시 독일에는 한국에서 파견된 광부와 간호사들이 있었습니다.
광부와 간호사들은 올림픽 유치를 위해서 헌신적으로 도움을 주었다고 합니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마라톤 금메달을 수상했던 손기정 선생님도,
당시 독일에서 선수로 활약했던 차범근 선수도 올림픽 유치를 위해서 함께 했다고 합니다.
여러 가지로 불리한 상황에서 우리 유치단은 올림픽 위원들을 만났습니다.
영국, 프랑스, 독일과 같은 선진국 위원들을 만날 때는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일본은 지금 경제성장을 이루면서 곧 선진국이 될 것입니다.
그러면 아마도 여러분의 나라보다 더 강한 나라가 될 것입니다.
그러니 대한민국을 도와주십시오.”
선진국의 위원들은 우리의 말에 점차 수긍하였다고 합니다.
아프리카나 아시아의 개발도상국 위원들을 만날 때는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우리도 여러분과 같이 개발도상국입니다.
대한민국이 올림픽 유치를 하면 이제 곧 여러분의 나라도 올림픽을 유치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개발도상국이 위원들은 우리의 말에 점차 수긍하였다고 합니다.
일본은 올림픽 위원들에게 일본의 기술의 상징이었던 ‘소니’ 시계를 선물했다고 합니다.
대한민국은 올림픽 위원들의 방 앞에 꽃다발을 갖다 놓았다고 합니다.
당시 바덴바덴에 있는 꽃집의 꽃들을 대부분 사들였다고 합니다.
이렇게 일본은 ‘시계’로 대한민국은 ‘꽃’으로 올림픽 위원들의 마음을 얻으려고 했습니다.
1981년 올림픽 위원회 사마린치 위원장은
1988년 하계올림픽 개최지로 ‘서울’을 선포하였습니다.
대한민국의 위상을 전 세계에 알린 ‘88 서울 올림픽’은
이렇게 헌신적으로 노력했던 분들의 땀과 눈물 위에서 개최될 수 있었습니다.
이냐시오 성인은 영신수련 23항 ‘원리와 기초’에서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말해주고 있습니다.
‘원리와 기초’입니다.
원리와 기초는 4단계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첫째는 사람이 태어난 목적입니다.
‘사람은 하느님을 믿고 알아서 구원을 받고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태어났다.’라고 말을 합니다.
시계는 시간을 알려주는 것이 중요하듯이, 종은 소리를 내는 것이 중요하듯이,
사람은 왜 이 세상에 태어났는지를 알아야 한다고 말을 합니다.
둘째는 세상의 재물입니다.
‘이 재물은 모두 하느님께서 만드셨고 사람들은 이 재물을 사용할 수 있다.
하지만 하느님을 찬미하는데 유익하면 쓸 것이고,
하느님을 찬미하는데 유익하지 않으면 버릴 것이다.’라고 말을 합니다.
세상의 모든 재물은 하느님을 찬미하는데 사용하면 된다고 합니다.
나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남을 해치기 위해서,
양심을 속이면서 사용하면 안 된다고 말을 합니다.
셋째는 삶의 기준입니다.
‘이제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부귀보다 가난을 택할 수도 있고,
건강보다 질병을 택할 수도 있고, 장수보다 단명함을 택할 수도 있다.’라고 말을 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분들도 이 부분에서는 자신 없어 합니다.
극한 상황에서도 하느님의 영광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넷째는 모든 것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삶이라고 말을 합니다.
자는 것도, 사는 것도, 먹는 것도, 사람을 만나는 것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고 말을 합니다.
이와 같은 단계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피정을 하는 것이고,
이와 같은 삶을 추구하는 것이 바로 신앙인의 길입니다.
오늘의 성서말씀도 바로 이런 원리와 기초의 삶을 말하고 있습니다.
혼인을 한 사람도, 혼인을 하지 않은 사람도
삶의 중심에는 ‘하느님의 영광’이 있어야 한다고 말을 합니다.
혼자 사는 것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니면 내세울 것도 아닙니다.
혼인 생활을 해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면 아름다운 것입니다.
서울에서 부산으로 가는 길에는 여러 방법이 있습니다.
비행기로 가는 길, 기차로 가는 길, 자동차로 가는 길, 걸어서 가는 길이 있습니다.
어떤 길로 가든지, 중요한 것은 부산이라는 목적지입니다.
비행기로 가도 목적지가 다르면 소용이 없습니다.
걸어간다 하더라도 목적지가 같으면 언젠가는 도착하게 돼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권위 있는 가르침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원리와 기초’를 중심으로 한 가르침입니다.
환자를 치유하는 것도, 기적을 행하는 것도, 악령을 내쫓는 것도
모두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 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거짓 예언자는 자신의 권위와 자신의 영광이 드러나도록 말을 합니다.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 동족 가운데에서 나와 같은 예언자를 일으켜 주실 것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야 한다.
오늘 주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너희 마음을 무디게 하지 마라.”
예수께서는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
오늘 복음의 주제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담긴 새로움과 권위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권위 있게 말씀하시고 가르치신다는 사실이다.
예수님은 신명기에서 약속된 모세의 뒤를 이어 봉사할 예언자(신명 18,18)와 연결되고 있다.
요한복음에서는 빵의 기적 후에 군중들이
"이분은 정말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그 예언자시다."(요한 6,14)라고 하고 있다.
복음에서 군중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의 행동을 통해 놀라운 체험을 하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행동과 말씀이다.
사람들이 놀라는 것은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가르치고 계신다는 사실과 가르치시는 방법에서 시작된다.
"그분께서 율법 학자들과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다."(22절)
예수님은 랍비 학교에 다니지 않았는데도 권위 있게 말한다는 사실 때문이다(참조: 요한 7,15).
예수님께 느끼는 권위는 예수님의 마음 깊은 곳에서 불처럼 타올라
사람들에게 제시되는 새로운 요구에 근거한다.
새로운 것은 당신의 말씀과 행동이 일치되어 있으며,
우리 신앙인들에게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게 하는 가르침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가르침이 권위가 있다는 또 다른 이유는
그분의 말이 즉시 새로운 사건을 만들어 내고,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는 것을 드러내며,
또한 사탄의 세력을 없애버리기 때문이다.
회당에서 악령 들린 사람은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하고 꾸짖으시니,
더러운 영은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켜놓고 큰소리를 지르며 나갔다"(24-26절).
이것은 예수님께서 처음으로 공개적으로 사탄의 세력과 격렬하게 맞서신 사건이다.
사탄은 예수님의 말씀 위력에 눌려 즉각적인 반응을 보인다.
사탄은 즉시 예수를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고백하며 소리친다.
이 칭호는 후에 베드로 사도에 의해 고백 된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주님께서 하느님이 보내신 거룩한 분이심을 믿고 또 압니다."(요한 6,69).
거룩하신 하느님께서 인간 생활에 들어오심은
인간에게 인간 자신의 죄스러움을 알게 하고, 자신의 본 모습을 발견케 한다.
여기서 예수님은 사탄의 고백을 허락하지도 받아들이지도 않으신다. 진실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고백하지만, 예수님과 자신 사이에 장벽을 쌓기 때문이다.
사탄은 예수님을 자신의 왕국을 파괴하러 오는 원수로만 느낄 뿐이지,
사랑으로 자신을 기쁘게 복종시켜야 할 주님으로는 느끼지 않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예수님은 사탄에게 나가라고 명령하신다.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하고 꾸짖으시니,
더러운 영은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켜 놓고 큰소리를 지르며 나갔다."(25절)
예수님은 당신의 권위 있는 말씀으로 악령 들린 사람을 치유해 주신다.
그 사람은 완전히 자신의 모습을 되찾게 되었다. 사탄이 그 사람의 인격을 분열시켰다.
사탄에게 매여 있다는 것은 하느님과의 관계가 멀다는 것이고,
이 때문에 그 사람과 같이 인격이 분열된 것과 같다.
이것은 하느님의 말씀과 실천을 통해 치유되고 하느님께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이제 군중들은 깜짝 놀란다.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저이가 더러운 영들에게 명령하니 그것들도 복종하는구나!"(27절).
이는 그리스도가 누구냐는 데 대한 질문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 사건으로 예수께 대한 관심이 점점 증대되고 있다.
"그리하여 그분의 소문이 곧바로 갈릴래아 주변 모든 지방에 두루 퍼져나갔다."(28절).
사도 바오로는 새 교훈으로 동정성을 제시하고 있다. 이것은 순전히 영성적이다.
결혼한다면 마음이 갈라질 수 있지만,
동정을 지키면 마음이 갈라지거나 정신이 흐트러짐 없이
자신의 모든 것과 전 존재를, 사랑을 온전히 주님께 바칠 수 있기 때문이다.
동정을 지키는 것은 아내나 남편이나 자기 형제들에게만이 아니라,
모든 형제에게 베풀어야 할 더 큰 사랑을 자유롭게 선택하는 것이다.
때문에 동정성은 마음을 더 넓게 해주는 것이지 결코 더 좁게 해주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말을 받아들일 만한 사람은 받아들여라."(마태 19,12) 하셨다.
우리는 예수의 가르침 안에서 새로움을 느끼고, 그분의 권위 앞에 신앙을 고백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하느님 말씀의 대변자이며 선포자의 역할을 지상과제로 삼는 교회 공동체의 일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참으로 권위가 있게 말씀을 증거해야 한다.
그 권위는 다양한 지식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구체적인 삶에서 나오는 것이다.
말과 행동이 일치한 가운데 참된 봉사를 통하여 나오는 것임을 알고 그렇게 살아가야 한다.
율법학자들과는 달리 말씀과 업적으로 당신의 가르침을, 복음을 전하신
예수님을 따라 권위 있게 복음을 전할 있어야 하겠다.
오늘 우리가 사용하는 말에는
어느 정도 권위와 힘이 있는지 진지하게 성찰해 봐야겠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카파르나움은 예수님의 복음 선포 여정에 베이스캠프로 유명한 장소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다른 그 어떤 도시보다도 더 자주 들르셨으며 많은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당연히 많은 사람이 카파르나움으로 몰려왔습니다.
예수님께 카파르나움 회당은 이미 익숙한 장소였습니다.
안식일이 되자 예수님께서는 자연스럽게 회당으로 들어가셔서 가르치기 시작하셨는데,
회당 안에는 예수님 눈길을 사로잡는 특별한 사람이 한 명 앉아 있었습니다.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
더러운 영이 들렸으니, 일단 외양이 남달랐을 것입니다.
더러운 영에 시달리다 보니 얼굴도 초췌했을 것입이다.
눈동자도 충혈되고 행동거지도 남달랐을 것입니다. 다들 그를 슬슬 피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를 유심히 바라보십니다.
마치 징그러운 벌레라도 바라보는 듯한 다른 사람들의 시선과 달리,
예수님의 시선을 더없이 부드러웠고 따뜻했습니다.
한없는 측은지심과 연민으로 가득했습니다.
참으로 특별한 순간이었습니다.
고귀하고 아름다운 창조주 하느님의 시선과
망가질 대로 망가진 한 비참한 인간의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시선이 점점 더 가까이 다가갈수록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극단의 신성함 앞에 극단의 사악함이 굴복하기 시작하는 순간이었습니다.
마침내 참다못한 더러운 영은 두 손 두 발 다 들고 소리 소리를 내질렀습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이윽고 능력과 권위로 가득 찬 예수님의 말씀이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의 심연 깊숙한 곳에 꽂힙니다.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마르코복음 1장 25절)
예수님의 말씀 한마디에 더러운 영은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켜 놓고
큰소리를 지르며 줄행랑을 놓았습니다.
카파르나움에서 있었던 더러운 영의 추방 사건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 말씀의 폭발적인 역동성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분의 말씀 한마디에 더러운 영은 순식간에 힘을 잃었고,
더러운 영에 들렸던 사람에게서 튕겨져 나와 내동댕이쳐집니다.
오랜 세월 더러운 영의 횡포와 올가미에 묶여
옴짝달싹 못하고 있던 이를 자유롭게 해주시는 예수님의 권능에 찬 모습에,
카파르나움 사람들은 입을 다물지 못하고 외친 것입니다.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저이가 영들에게 명령하자 그것들도 복종하는구나.”
단 한마디 말씀으로 예수님께서는 역사상 그 누구도 행할 수 없었던
전무후무한 기적과 치유를 행하시니
카파르나움 사람들이 깜짝 놀란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사용하는 말에는 어느 정도 권위와 힘이 있는지 진지하게 성찰해 봐야겠습니다.
우리가 매일 사용하는 말은 이웃을 살리는 말인지
아니면 죽음으로 몰고 가는 말인지 반성해 봐야겠습니다.
서공석 요한 신부
오늘 복음은 어느 안식일에 카파르나움의 회당에서 일어난 일을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이 회당에서 가르쳤고, 사람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놀랐습니다.
마침 그 회당에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하나 있었는데, 그가 소리를 질렀습니다.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거룩한 분이십니다.’
더러운 영이 예수님의 身元에 대해 고백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함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더러운 영을 내어 쫓아서 그 사람을 치유하셨습니다.
그 사실을 본 사람들은 모두 놀라고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라고 경탄하였습니다.
이 이야기는 일어난 사실을 그대로 보도하는 오늘의 신문 기사와 같은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은 정신질환자를 지칭합니다.
복음서들이 기록된 시대에는 자기 사상을 전하고자 하는 사람은
이야기를 만들어 그 안에 자기가 전하고 싶은 사상을 담았습니다.
사람들은 그 이야기를 듣고, 또 다른 이들에게 옮기면서,
그 이야기 안에 있는 저자의 사상에 공감하고
자기 것으로 삼기도 하고, 거부하기도 하였습니다.
오늘의 이야기도 마르코 복음서를 기록한 공동체가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은 그리스도 신앙을 담아서 각색한 것입니다.
마르코 복음서는 그 시작에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는 초기 신앙인들이
믿고 있는 복음을 시작한다는 말입니다.
이 복음서는 예수님의 생애를 끝내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시자,
“예수님을 마주 보고 서 있던 백인대장”이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15,39)고 신앙고백을 한 것으로 기록하였습니다.
이 복음서는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이라 말하는 신앙고백을
그 시작과 그 마지막에 두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복음서를 기록한 사람들의 의도는 분명합니다.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는 신앙이
어떤 것인지를 기록하겠다는 의도로 저술한 복음서입니다.
인간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지대한 관심을 보이는 문제들을
흔히 生老病死라는 단어로 요약합니다.
사는 것, 늙는 것, 병고 그리고 죽음, 인생의 네 가지 현실입니다.
그것은 인간이 대단한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일들이지만,
不可思議하여 인간 번뇌의 원인이기도 합니다.
불교에서 釋迦世尊으로 추앙받는 고오타마 싯달다 太子가
일찍이 왕위를 버리고 出家하여 修道를 시작한 것도
이 네 가지 번뇌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인류 역사가 있으면서 각양각색의 종교들이 발생하고 번창한 것도
바로 이 네 가지에 대한 해답을 인류는 꾸준히 찾았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해를 보고, 혹은 달을 보고 빌기도 하였고,
정화수를 떠 놓고 정성을 바치기도 하였습니다.
모두가 이 불가사의한 주제들에 대한 해결 혹은 극복을 원한 것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복음 이야기의 무대는
유다인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모이는 회당입니다.
그곳에서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예수님을 보자 소리를 지르며 고백합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함구령을 내리면서 그 더러운 영을 그 사람에게서 쫓아내셨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은 나았습니다.
이 복음서는 이 이야기로 더러운 영이 지배하던 세상에
하느님이 보내신 거룩하신 분, 곧 예수님이 오셨다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지만, 더러운 영은 벌써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가 계신 곳에는, 사람들이 더러운 영의 지배를 받지 않습니다.
이 믿음이 근거가 되어 오늘의 세례 성사 의례 중
마귀를 끊어버린다는 신앙고백을 하는 관습이 생겼습니다.
하느님이 아니면서 사람을 지배하는 모든 것을 세례에서 끊어버리고,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겠다는 고백입니다.
오늘 복음에 예수님은 더러운 영에게 함구령을 내렸습니다.
마르코 복음서는 함구령을 자주 언급합니다.
더러운 영들에게, 혹은 기적적으로 치유된 이들에게,
또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함구령을 내리십니다.
이 복음서는 사람이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 메시아 혹은 거룩하신 분 등
신앙고백의 성격을 지닌 말을 할 때마다,
예수님이 함구령을 내리신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시자 이 복음서는
백인대장으로 하여금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고백하게 합니다.
십자가의 죽음을 모르면서, 예수님에 대해 올바른 신앙고백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올바른 인식은 십자가의 죽음을 시야에서 잃지 않을 때, 비로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이 복음서는 십자가를 포함하여 예수님을 인식해야 하고,
그 인식을 기반으로 그분을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예수님의 생애를 요약하는 상징입니다.
사람들을 보살피는 일에 당신 스스로를 내어주고 쏟으신 결말이 십자가였습니다.
마르코 복음서는 그 사실을 모르면, 예수님에 대해 말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는 것은
십자가에서 끝을 맺은 그분의 삶이 하느님의 생명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 주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전능하시고, 지극히 높으시다는 우리의 통념에서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예수님 혹은 하느님을 믿어서 인간이 더 잘 살 수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신앙은 더 많은 재물과 더 존경스런 지위를 얻도록 해주지 않습니다.
그것은 인류 역사가 하느님을 생각하며, 계속 품었던 염원입니다.
그 염원은 인간을 자유롭지 못하게 하는 더러운 영에서 오는 것입니다.
그런 염원을 성취해 주는 것이 신앙이라고 망상하는 것은
예수 귀신의 힘으로 팔자 한 번 고쳐보겠다는 인간의 염원에서 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이라 고백합니다.
생로병사의 인간 현실을 살면서 이웃을 보살피는 섬김을 위해
당신 스스로를 내어주고 쏟은 예수님입니다.
그분의 실천에서 참다운 인간의 자유를 읽어내고, 그것을 배우는 그리스도 신앙입니다.
그것이 재물이든, 지위든, 자기 한 사람 잘될 것을 약속하는 더러운 영이 물러나는 곳에,
예수님이 가르친 하느님의 생명을 사는 신앙의 길이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 회당에 모인 사람들은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라고 말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생명이 하시는 일을 실천하며 살아,
그분의 자녀가 되게 하는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라는 고백입니다.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예수님께서는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다.
이승화 시몬 신부
하느님의 말씀은
성경과 전통을 통해 전해집니다.
성경은 전통 안에서 기록되어 전달되었고
전통은 성경을 통해 재평가되면서 적용됩니다.
그러는 과정 중에 우리는 권위를 느낍니다.
성경 말씀을 잘 아는 만큼 권위를 느끼고
현실에 적용하며 이끌어 주는 만큼 권위를 느낍니다.
이 권위는 인정에서 오는 것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얼마나 깊이 알고 있는지에 대한 인정과
세상 안에서 그 말씀을 얼마나 조화롭게 적용하는지에 대한 인정,
그리고 하느님께로 우리를 얼마나 인도하느냐에 대한 인정입니다.
이러한 인정은 인간의 힘으로만 이루어지지는 않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찾고 하느님께로 인도하며
하느님 안에서 양육하기 때문에
우리는 하느님께 의탁해야 합니다.
그 사람이 얼마나 하느님의 뜻을 따라가는지는
그가 맺은 결실을 통해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이 모습은 독서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모세를 통해 백성에게 하느님의 말씀이 전해졌습니다.
또 하느님께서는 모세와 같은 예언자를 일으키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 예언자가
하느님을 잊고 자신이 하고 싶은 말과 행동을 할수록
하느님은 그를 떠나게 됩니다.
말하라고 명령하지도 않은 것을 주님의 이름으로 말하거나
다른 신들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이는 권위를 바라는 이들이 빠지는 유혹을 말해줍니다.
사람들이 나에게 다가오는 이유는
내가 하느님을 전하고 하느님 안에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목적 배려 혹은 이왕이면 다홍치마라는 말로
하느님이 아닌 다른 가르침을 전하거나
다른 우상을, 비유를 들어 하느님처럼 말한다면
우리는 그만큼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됩니다.
유혹에 빠진 한 사람 때문에 수많은 이들이 고통을 받게 됩니다.
그러니 하느님을 따르는 이들
특히 봉사자들과 권한이 있는 사목자와 수도자들은
세상 유혹을 경계하고 하느님 안에 머물고자 노력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일을, 하느님과 함께 할 때
우리는 흔들리지 않고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약간의 이익을 추구하는 유혹 때문에
문제는 점점 더 커져 버리게 될 뿐입니다.
오히려 유혹에 빠진 이들은 하느님을 더 잘 알고 있습니다.
더러운 영이 예수님을 알아본 것처럼
그들은 하느님을 더 잘 알기 때문에 더 많은 유혹에 빠지게 됩니다.
무엇이 더 중요한지 알지만
무엇이 더 편한지도 잘 알기 때문입니다.
그런 이들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실 것입니다.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우리 안에 유혹을 경계해야 합니다.
인간의 나약함에 숨기보다
인정하는 가운데 하느님께 의탁하며
하느님의 일에 동참해야 합니다.
그럴 때 비로소 하느님의 뜻이 세워짐을 기억하며
오늘 우리 마음을 돌보고 하느님께 나아가는
그런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출처: [시몬 신부의 신앙이야기] https://frsimon.tistory.com/1605
김 오틸리아 수녀
오늘의 복음 말씀에서 새롭게 다가오는 두 구절이 있습니다.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과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 입니다.
첫 번째 구절에서는
‘어떻게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회당에 있는 거지?’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천사도 마귀도 모두 영적인 존재이니까
회당(성당)에 천사가 있을 수 있다면 마귀도 있을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으로 정리가 되었습니다.
항간의 소문(카더라 통신ㅋ)에 의하면,
거룩한 곳에 악마가 득실거리고,
거룩한 사람에게 그의 성덕을 방해하기 위해
마귀가 더 많이 다가간다는..
두 번째 구절에서는
‘권위’라는 말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권위(權威: 권세 권, 위엄 위)는
1. 남을 지휘하거나 통솔하여 따르게 하는 힘.
2. 일정한 분야에서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고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위신. 을 뜻합니다.
(※ 위엄 : 존경할 만한 위세가 있어 점잖고 엄숙함, 또는 그런 태도나 기세.)
율법 학자들에게는 없었던, 예수님께 가지고 있으셨던 권위는
지금의 세상을 다스리는 사람들이 지닌 권위(권력+위협)와도 다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권위는 권능과 위엄으로,
죄 빼고는 인간과 똑같으셨던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이
아버지 하느님께로부터 받으셨고,
그것을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 지니셨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새로운 가르침으로 다가오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뭔가 설명이 복잡하게 되었습니다만, 요지는!
하느님께 받은 나의 모든 것을
하느님의 뜻,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선용할 때
나의 말과 행동에 힘이 생기고,
놀라운 일을 하게 되는 주님의 도구가 될 것입니다.
내가 가진, 하느님께 받은, 많은 재능과 능력,
자연과 공간, 인간관계, 오늘을 살아갈 생명을 주심에 감사드리며
오늘도 기쁘고 행복한 날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출처 : 툿찡포교베네딕도수녀원 http://www.benedictine.or.kr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