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7월 7일 일요일
평소에도 가보고 싶었던 수원의 화성으로 출발했습니다.
시간을 체크하면서 출발하고 부평역에서 구로까지 급행 전철. 또 구로에서도 천안 가는 급행 전철을 탓는데 정말 좋더군요.
가산디지탈단지 서고 안양, 안양에서 논스톱으로 수원까지.... 그러는 바람에 서실에서 수원까지 1시간 반 걸렸네요.
수원역앞에서 택시 타니 3000원 좀 더 나오드라구요.
택시에서 내리니 화성행궁의 분위게 어울리게 여민각이 떡하니 버티고서서 반겨주었습니다.
與民閣
"세계문화유산 '수원화성'의 중심부에 자리잡은 종각(鐘閣)은 조선22대 정조대왕께서
실학과 효의정신으로 새롭게 만든 도시인 수원을 수도(首都)와 같은 지위의 도시로 만들기위해 설치하였다네요.
이 종각은 일제강점기에 소실되었다가 '수원화성'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1997년12월)된 이후
'수원화성' 복원사업의 일환으로 추진하였으며 경기도의 예산을 지원받아 2008년 10월에 중건.
종(鐘)의 4면에는 수원시민 모두 화합하여 즐겁고 집집마다 부유하여 충만하고
수원시를 근본으로 세계로 창성하고 번화하라는 기원의 뜻으로
'人人和樂 戶戶富實 水原爲本 世邦昌華'를 새겼으며
종각의 이름은 시민들의 의견에 따라 '더불어 사는 행복한 도시'의 의미로
여민각(與民閣)이라 하였답니다"
정조대왕의 글씨체. 힘있고 멋지지 않나요??? 지금 이시대에 전문 서예가가 보아도 감탄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마침 일요일이라 그런지 행사 준비가 한창이다. 비가 오는 궂은 날씨인데도 아랑곳 하지 않고 행사 요원들 입장이다.
화성 행궁 교대식과 군졸의 훈련사항을 왕이 직접 참관하는 장면 입니다. 아직 성문이 열리지 않은 상태
준비를 알리는 포소리와 북소리가 울려 퍼지며 포연이 자욱한 장면이다.
출연진들~ 행사요원들의 진지한 표정들..
이 행사와 훈련에 정조대왕께서 친이 참관 하고 군사들을 독려 하고 국민을 위하는 마음으로 일일이 참관 관광객들과 악수도 하는 모습이 내가 타임머신 타고 정조대왕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듯 하였다.
대궐문 앞에서의 행사를 마치고 난 궁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정갈하고 깨끗했고 관리가 참 잘됐다란 생각이 들었다. 사람이 살지 않고 쓰지 않는 마루가 반들반들 윤기 나는걸 보면 말이다.
안으로 안으로 들어가는데 정조대왕께서 사진을 찍자고 하신다.
관광객을 위하여 잠시 사진 찍을 기회를 주는것 같다. 내가 마지막으로 정조대왕은 포토존에서 퇴장.
잠시 정조대왕 옆에서 함께 포즈를 취해 봤는데 역시 어색하지요??
송파샘이 원래 사진은 잘 않찍는데 정조대왕의 령이라...ㅎㅎㅎ
중양문을 거처 봉수당으로 들어가는 중입니다.
이 봉수당은 정조대왕께서는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칠순 잔치를 이곳에서 열었습니다. 그 상황을 그림으로 그린 것이 '봉수당진찬도'입니다.
정조대왕께서 책을 읽고 계시네요???
그때도 스마트 폰이 있었다면 책보다 스마트폰??ㅎㅎ
비가 오는 모습이라 우산들랴 사진 찍으랴 좀 고생 이 되네요....
잠시 비를 피하는 사람들...
落南軒(낙남헌)-연회장 같은 넓은 마루네요.
풍화당
궁궐 뒷켠에 핀 접시꽃....
비에 흠뻑 젖어 처량해 보이기 까지 하네요.
비가 주룩주룩
오밀조밀 정교하게 꾸며진 궁궐 전각들.... 그리고 전각 사이사이
책읽는 궁녀.
궁궐을 다 돌아 보고 팔달산으로 걸어 올라가는 중에 비에 흠뻑 젖은 단풍 나무
그리고 숲에서 비를 맞고서도 꽃잎을 오므리지 않고 피어난 나리꽃
수원 화성 팔달산에도 남한산성 같은 적송이 많다. 소나무 군락지.
서장대
세계 문화유산인 수원 화성의 여러 건물 중 하나인 서장대가 20대 남자의 방화로 불탔다. 서장대는 1996년에도 화재로 소실된 바 있다.
장대는 말 그대로 장수가 올라가 전투를 지휘하는 곳으로, 서장대는 서쪽에 있는 장대다. 보통 성안 가장 높은 곳에 자리잡는 장대는 대개가 누각으로 지어져 경관이 좋고 건축미도 빼어나다. 남한산성의 서장대(수어장대)와 진주성의 남장대(촉석루), 수원 화성의 서장대(화성장대)와 동장대 등이 유명하다.
화성 서장대에는 조선 후기 문화중흥을 이뤘던 정조(1776~1800년)의 부국강병 꿈과 효심이 서려 있다.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양주에서 수원 화산으로 옮긴 정조는 1794년 자립적인 혁신 새도시 화성 건설에 나선다. 성곽과 행궁, 주거지뿐만 아니라 농업 기반시설인 만석거(저수지)도 만들었다. 그는 세자가 15살이 되면 왕위를 물려주고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와 함께 화성에서 살겠다는 뜻을 여러차례 내비쳤다.
화성의 윤곽이 어느 정도 드러난 1795년 윤 2월 정조는 어머니를 모시고 여드레 동안 화성에 행차했다. 행차 나흘째이자 혜경궁의 회갑연 전날 낮과 밤 두차례에 걸쳐 친위군인 장용외영 소속 군사 3700여명의 훈련을 실시한다. 서장대에서 훈련을 지휘한 정조도 갑옷과 투구를 썼다. 북과 나팔, 함성, 포성이 진동했으며, 야간에는 성 전역에 횃불을 켰다. 효자로 소문난 정조는 행궁에 머물고 있는 혜경궁이 놀랄까봐 포성이 높지 않은 포탄을 쓰도록 하고, 그것도 행궁에서 멀리 떨어진 서북쪽으로만 쏘도록 했다.
일제와 6·25를 거치면서 유실됐던 서장대 등은 1975년 복원공사로 원형을 찾았다. 화성 건축의 전말을 기록한 ‘화성성역의궤’ 덕분이다. 성곽이나 건물의 형태, 특징뿐 아니라 공사 자재, 심지어 감독관과 일꾼들의 이름, 출신지, 품삯까지 자세하게 기록돼 있다. 기록의 승리다.(펌)
김종철 논설위원 phillkim@hani.co.kr">phillkim@hani.co.kr
서장대에서 내려다 본 수원시내.
서장대에서 내려다본 화성행궁
서노대
화성의 서노대는 팔달문 정상 서장대 뒤에 있는 시설물이며 구조는 팔각형으로 약 3m 정도의 여장을 쌓아 만들어져 있다. 서노대에 오르면 주변이 모두 한 눈에 들어오며 특히 군사 지휘소인 서장대를 적의 공격으로부터 효과적으로 보호할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다.
노대란 누각이 없이 전돌을 쌓아 높은 대를 만든 시설물로 적의 공격을 항상 감시해서 대와 성 전체에 오방색 기로 신호를 하며 적이 근접했을 때 쇠뇌를 쏠 수 있도록 만든 군사 요새이다. 화성에는 사진에 보이는 서노대와 동북공심돈 오른쪽에 자리한 동북노대 등 2개의 노대가 만들어져 있다.
화양루 입구
서남암문
아쉽지만 이것으로 마무리 하고 탐방을 마무리 했다. 다리도 아프고 힘도 들었기때문에...
아래로 내려와서 택시로 수원역으로 향했고 수원역 앞에서 부평 오는 버스정거장을 물은 후에 버스에 몸을 실었다.
전철보단 시간이 30분은 더 걸렸지만 시원한 에어컨에 편안하게 앉아서 오고 싶어 버스를 택했다.
다음에 또 가서 보지 못했던 화서문 일대. 장안문 일대. 화홍문 일대를 또 둘러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