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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월 31일 수요일 성 요한 보스코 사제 기념일
제1독서 : 2사무 24,2.9-17
복 음 : 마르 6,1-6
그때에 1 예수님께서 고향으로 가셨는데 제자들도 그분을 따라갔다.
2 안식일이 되자 예수님께서는 회당에서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많은 이가 듣고는 놀라서 이렇게 말하였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
그의 손에서 저런 기적들이 일어나다니!
3 저 사람은 목수로서 마리아의 아들이며, 야고보, 요세, 유다, 시몬과 형제간이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우리와 함께 여기에 살고 있지 않는가?” 그러면서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4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5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그곳에서 몇몇 병자에게 손을 얹어서
병을 고쳐주시는 것밖에는 아무런 기적도 일으키실 수 없었다.
6 그리고 그들이 믿지 않는 것에 놀라셨다. 예수님께서는 여러 마을을 두루 돌아다니며 가르치셨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예전에 갑곶성지에 살 때는 식복사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식사 준비를 비롯한 주방 일, 빨래, 청소 등을 모두 저 스스로 해야만 했습니다.
주방 일이나 빨래는 할 만했고, 또 재미있었습니다. 하지만 청소는 정말 힘들었습니다.
자매님들이 이런 말씀 종종 하시지요.
“치워도 티가 나지 않고, 치우지 않으면 금방 표시가 난다.”
저 역시 청소를 아무리 열심히 해도 청소한 것 같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청소하지 않으면 어떨까요?
실제로 바빠서 청소하지 않으면 어느 순간부터
먼지가 방 안에서 굴러다니는 것을 볼 정도로 지저분해집니다.
사랑도 그렇지 않을까 싶습니다.
사랑을 실천한다고 해서 티가 팍팍 나는 것이 아닙니다.
누가 알아주지도 않고 오히려 이 사랑을 어리숙함으로 평가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사랑을 실천하지 않으면 티가 많이 납니다. 사람들의 평가도 곧바로 나오지요.
이기적이고 욕심이 너무 많다면서 각종 비판이 쏟아집니다.
이 비판을 받는 사람은 억울합니다. 왜 자신이 실천한 사랑은 알아주지 않느냐고 합니다.
사랑의 실천은 앞서도 말했듯이 눈에 잘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행하는 사랑은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소홀히 보지 않는 분이 계십니다.
바로 주님이십니다.
우리의 모든 사랑을 보고 계시고, 당신께서 갚아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티가 나지 않는다고 쓸데없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청소도 티가 나지 않아도 반드시 해야 하는 것처럼,
사랑도 티가 나지 않는다고 포기할 것은 아닙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내 영혼이 엉망진창으로 바뀌고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도 머물지 못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을 말씀하셨고,
당신 몸으로 사랑을 직접 실천해서 우리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를 못마땅하게 여깁니다.
특히 그래도 예수님을 잘 안다고 할 수 있는 고향 사람들이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것이 나쁜 것이 아니지요.
또 병자를 고쳐 주시고 마귀를 쫓아내신 것 역시 나쁜 것이 아닙니다.
그 모두가 사랑을 보여 주시고, 또 실천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왜 이렇게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여겼을까요?
예수님의 사랑을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에 집중한 것이 아니라 자기들이 더 낫다는 교만함이 더 컸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복음은 우리에게 이렇게 전해줍니다.
“몇몇 병자에게 손을 얹어서 병을 고쳐 주시는 것밖에는 아무런 기적도 일으키실 수 없었다.”
예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곳에서만 은총이 가득히 흘러넘치게 됩니다.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예수님의 은총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마르 6,3)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회당장 야이로의 집에서 나와
고향 나자렛으로 가시어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십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놀라워했습니다.’(마르 6,2)
그러나 그분을 받아들이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마르 6,3)
그런데 그들은 왜 놀라워하면서도
그분을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못마땅하게 여겼을까요? 사실 그들은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
그의 손에서 그런 기적들이 일어나다니!”(마르 6,2) 하면서
'그분의 지혜와 기적의 힘'에는 놀라워했지만,
실상 그 지혜와 힘이 어디에서 온지는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결국 그들이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은 자신들의 ‘무지’,
곧 그분의 지혜와 힘의 원천을 알지 못하는 자신들의 무지를 인정하지 않은 까닭이었습니다.
동시에 그분에 대해 자신들이 알고 있는 ‘앎’을 내려놓지 않은 결과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로서 마리아의 아들이며, 야고보, 요세, 유다, 시몬과 형제간이 아닌가?
그 누이들도 우리와 함께 여기에 살고 있지 않는가?”(마르 6,3)하고,
자신들이 알고 있는 것을 고집할 뿐입니다.
곧 자신들의 선입관과 고정관념을 내려놓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결국 ‘자신들이 안다’고 여기는 자기 생각이 완고함과 불신을 불러오고,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했던 것입니다.
자신들의 생각을 믿고 섬기고 따른 우상숭배에 빠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고집부리는 사울을 꾸짖을 때,
사무엘의 입을 통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고집을 부리는 것은 우상을 섬기는 것과 같습니다.”(1사무 15,23)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 우상을 벗어나야 예수님을 진정으로 만나게 됩니다.
‘믿음’은 자기에게서 빠져나와 하느님께로 가는 것이지,
하느님을 자기의 좁은 지식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곧 ‘믿음’은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뛰어넘어
‘있는 그대로’의 그분의 인격을 받아들이는 것이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이 비록 자신이 알고 있는 그러한 분이 아니라 할지라도,
주님으로 받아들이는 일인 것입니다.
그래서 리지외의 데레사 성녀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 사랑을 위하여 저는 가장 낯선 생각들도 받아들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자신의 앎’에 대한 완고함으로부터 벗어나고,
오히려 ‘자신이 알지 못한 낯선 앎’에 개방되어야 할 일입니다.
사실 그것은 모르는 것에 대한 믿음이요 받아들임입니다.
그러니 ‘믿음’은 하느님을 끌어당기는 자석과 같고,
‘완고함’은 불신의 씨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마르 6,4)
주님!
스승을 곁에 두고도 존경하지 않은 저는 수술을 받아야 살 수 있는데도
의사를 믿지 않아 수술을 받지 못한 어리석은 환자입니다.
제 앎을 뛰어넘는 당신을 믿지 못하는 저는
안다는 제 생각을 섬기고 따르는 우상 숭배자입니다.
주님, 존경을 겸손의 표지로, 믿음을 응답의 표지로 드러내게 하소서.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오늘 사제평의회가 열리고 서울대교구 인사이동이 있을 예정입니다.
인사이동의 대상이 되는 신부님들은 어디로 가게 될지 궁금할 것입니다.
교구에서는 인사이동을 하면서 몇 가지 원칙을 지키고 있습니다.
첫째는 출신 본당으로 임명하지는 않습니다.
두 번째로 같은 곳에 두 번 보내지는 않습니다.
세 번째로 같은 신부님과 두 번 지내게 하지는 않습니다.
따뜻한 신부님, 사랑이 많은 신부님, 강론을 정성껏 준비하는 신부님,
미사시간 30분 전에 고백성사를 주는 신부님,
함께 사는 수도자와 신부님들과 잘 지내는 신부님,
성체조배를 자주 하는 신부님,
합리적으로 본당의 재정을 관리하는 신부님,
직원들의 마음을 이해하는 신부님,
가난하고 외로운 이들을 먼저 찾아가는 신부님이 떠나면 아쉬움의 눈물을 흘릴 것입니다.
그런 신부님은 어디로 가셔도 사랑받는, 존경받는 신부님으로 지낼 것입니다.
그런 신부님들은 어디로 가도 그 자리가 꽃자리가 될 것입니다.
도연명은 歸去來辭에서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이미 지난 일은 돌이킬 수 없고, 앞으로 다가올 일은 추구할 수 있음을 알았노라.
사실 길을 잘못 들기는 했으나 아직 멀리 벗어나지는 않았고,
지금이 옳고 예전이 틀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농부가 내게 봄이 왔다고 알려주니, 장차 서쪽 밭에 할 일이 생기겠구나!
부귀는 내가 바라는 바가 아니요, 천국은 기약할 수는 없는 것이거늘.
주어진 천명을 즐길 뿐 다시 무얼 의심하랴!”
뉴욕에서 5년을 지내고 있습니다.
정들었던 사제들이 소임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갔습니다.
어느덧 4명의 사제가 돌아갔습니다. 이제 저도 ‘귀거래사’할 날이 올 겁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인은 어디에 있느냐를 생각하기보다, 어떻게 사느냐를 생각해야 합니다.
계절은 이렇게 다시 바뀌고 세상의 모든 것들은 봄을 맞을 준비를 합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하느님께로부터 왔으니,
하느님께 돌아가야 함을 늘 잊지 말고 살아야 할 것입니다.
저는 ‘바람과 해님’의 이야기를 좋아합니다.
사나운 바람은 나그네의 옷을 벗기지 못했지만,
따뜻한 햇볕은 나그네 스스로 옷을 벗게 했다는 동화입니다.
어릴 때, 이 동화를 읽으면서 감동을 했고, 늘 이 동화는 제게 영향을 주었습니다.
하지만 우리 사회가 건전하게 성장하기 위해서는
공정한 감시와 비판이 있어야 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권력을 잡은 세력은 늘 방송과 언론을 장악하려는 유혹에 빠지곤 합니다.
그렇게 하면 국민의 눈과 귀를 가릴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부정과 부패를 가릴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는 없습니다.
‘방송과 언론’은 사회적 약자를 위한 배려를 해야 하고,
정부의 잘못된 정책 수행에 대해서도 엄격하게 비판을 해야 합니다.
이와 같은 감시와 비판의 기능이 약해지면 당장의 정책 수행에는 도움이 될지 몰라도,
우리사회는 점점 병들게 되고 어디가 잘못되었는지도 모르는 사회가 될 수 있습니다.
비판과 비난은 비슷한 면이 있지만 커다란 차이가 있습니다.
독일의 철학자 칸트는 ‘순수이성 비판’이라는 책을 통해서
비판은 사상의 발전에 반드시 필요한 요소라고 말했습니다.
비판은 공정하고 사심이 없는 가운데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가난하고, 약한 이들에 대한 배려를 생각합니다.
비난은 공동체를 분열시키고 사회 발전에 도움을 주지 못합니다.
비난은 질투와 사적인 감정에서 시작합니다.
다윗은 충실한 부하 우리아를 전쟁에서 죽게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아의 아내를 취하였습니다.
나탄 예언자는 다윗왕의 잘못에 대해서, 잘못한 일에 대해서 비판을 하였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전했고, 다윗왕은 자신의 잘못을 뉘우칠 수 있었습니다.
요한복음 8장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부정한 여인을 앞에 놓고 비난을 하였습니다.
모두 손에 돌을 들고, 유대인들의 법을 들어 돌로 쳐야 한다고 비난의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러분 중에 죄 없는 사람이 먼저 저 여인에게 돌을 던지시오.’
오늘 복음은 비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
그의 손에서 저런 기적들이 일어나다니!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뒷담화만 하지 않아도 천국에 갈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공정하고 올바른 비판은 받아들일 줄 아는 겸허함이 있어야 합니다.
질투와 사적인 감정에서 나오는 비난은 하지 않는 절제가 있어야 합니다.
1월의 마지막 날입니다.
고칠 수 있는 것은 개선할 수 있는 용기를 청하고,
고칠 수 없는 것은 받아들이는 겸손함을 청하고,
고칠 수 있는 것과 고칠 수 없는 것을 식별할 수 있는 지혜를 청하면 좋겠습니다.
고향에서는 예언자라도 존경을 받지 못한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
예수님은 당신의 고향 나자렛으로 가신다.
안식일이 되어 회당에 들어가셔서 가르치셨을 때,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 같았는데
다섯 가지 의문을 제기하면서 부정적인 반응을 보인다(2-3절).
예수님은 고향 사람들 사이에 장인으로 통했다.
목수, 미장이, 석공, 대장장이 일을 두루 다 하신 기술자였을 것이다.
그리고 한동네에 살았기 때문에 누구의 아들인지도 알고 있다.
관례에 따르면 “요셉의 아들”(마태 13,55 참조)이어야 하는데
“마리아의 아들”(3절)로 표기하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그곳에서 몇몇 병자에게 손을 얹어서
병을 고쳐주시는 것밖에는 아무런 기적도 일으키실 수 없었다.”(5절)
나자렛에서 어떤 기적도 행하실 수 없었던 것은 그들의 불신 때문이었다(6절 참조).
치유되기 위해서는 환자에게는 믿음이 있어야 하고 치유하는 분에게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그러니 상대방이 없으면 기적을 행할 수가 없다.
그분의 은총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막혀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당신 고향인 나자렛에서 고향 사람들의 불신앙을 이상히 여기신다.
예수께서는 그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배척한 예언자들과 당신을 비교하시면서(4절)
당신 자신도 결국 백성들에게 배척을 받게 되리라는 것을 암시하신다.
그분이 기적을 행하실 수 없었던 것은 그들이 신앙이 없었기 때문이다.
기적이란 신앙이 있거나 적어도 믿으려고 하는 자세가 되어있을 때,
하느님께서 보여 주시는 자유로운 행위라고 하였다.
신앙이라는 배경이 없으면 기적이란 무의미하며 불가능하다.
믿음이 있어야 기적의 혜택도 있는 것이다.
우리도 많은 경우에 다른 사람을 외모로만 판단하고 그 사람을 안다고 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마음이나, 내적인데 볼 줄도 모르고 보려고도 하지 않는다.
외적인 것도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내 멋대로 판단을 하는 것이 문제이다.
외모로만 판단하여 예수님을 믿지 않았던 나자렛 사람들의 잘못을 우리도 저지르고 있다.
좀 더 이웃의 장점을, 내적인 면을 볼 수 있고 사랑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나에게 영혼을 달라. 다른 모든 것은 다 가져가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오늘은 청소년의 아버지요 스승, 특히 가난하고 도움이 필요한 청소년들의 착한 목자였던
성 요한 보스코 사제(1815~1888)의 축일입니다. 줄여서 돈보스코라고도 부릅니다.
돈보스코가 평생토록 추구했던 모토요,
그가 생애 내내 일관되게 지니고 살았던 화두가 하나 있는데,
그것은 ‘청소년들의 영혼 구원’이었습니다. 그는 수시로 부르짖었습니다..
“나에게 영혼을 달라. 다른 모든 것은 다 가져가라!”
그가 살아생전 직접 창립한 세 단체의 명칭을 통해 돈보스코란 인물을 어느 정도 파악할수 있습니다.
① 남자 청소년들의 교육사업을 위해 창립한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회
: 그는 여타 수도회와는 달리 자신이 창립한 수도회에 자신의 이름을 걸지 않았습니다.
대신 자신이 각별히 존경했을뿐 아니라 청소년 사목자로서 자신이 추구하고자 노력했던
롤모델이었던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의 이름을 수도회 명으로 선택했습니다.
프란치스코 살레시오는 교회 안에서 매력 넘치는 성인, 온유와 친절의 대명사로 유명합니다.
돈보스코는 자신이 시작한 청소년 교육사업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재물이나 권력, 힘이나 조직도 필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이 교육자의 마음가짐이라는 것을 잘 파악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돈보스코는 평생토록 강조했습니다.
체벌이나 폭력은 결코, 용납할 수 없습니다.
인내와 사랑, 온유와 친절만이 청소년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주님께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
이른바 사랑의 교육학, 예방 교육을 창시한 것입니다.
② 도움이신 마리아의 딸 수녀회
: 줄여서 살레시오 수녀회라고도 합니다.
동시대를 살았던 성녀 마리아 도메니카 마자렐로 수녀와 함께
여자 청소년들을 위한 살레시오 수녀회를 창립하였습니다.
돈보스코는 살아생전 자신이 수행하고 이룩한 위대한 교육사업에 대해
세상 사람들이 극찬하고 박수를 보낼 때마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습니다. 모든 것은 도움이신 성모님께서 다 하셨습니다.”
그는 언제 어디서든 도움이신 성모님께서
항상 자신의 인생 여정과 교육사업 안에 굳건히 현존하심을 믿었습니다.
이렇게 돈보스코는 강하면서도 균형 잡힌 성모 신심의 소유자였습니다.
이를 잘 엿볼 수 있는 대목이 마리아 도메니카 마자렐로 수녀와
수녀회를 공동 창립하면서 지은 수녀회의 이름입니다.
성모님께 드리는 살아있는 감사의 기념비라는 뜻으로
수녀회의 이름을 도움이신 마리아의 딸 회로 지었습니다.
③ 살레시오 협력자회
: 돈보스코는 자신이 개척한 선구자적인 교육사업이 성공하기 위해
수도자들만으로는 부족함을 절실히 깨달았습니다.
예방 교육이라는 자신의 교육 이념에 뜻을 같이하는 평신도들과의 협력을 위해
살레시오 협력자회를 창립했습니다.
살레시오 협력자회는 세상 속의 살레시오 회원들, 수도원 담 밖의 살레시안들이라고 부릅니다.
그들은 세상 속에서 살아가지만, 돈보스코의 정신과 영성,
그의 마음과 그가 지녔던 사랑으로 세상 안에서 기쁘게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오늘날 살레시오 회원들은 전 세계 방방곡곡 진출 안 한 나라가 거의 없을 정도입니다.
특히 가장 가난한 지역, 분쟁 지역, 청소년들이 심각한 학대와 착취를 당하는 나라에서
돈보스코께서 하셨던 바로 그 일을 계속해 나가고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수확할 것을 많은 데 일꾼이 심각하게 부족합니다.
돈보스코가 지녔던 그 따뜻한 마음으로,
그의 청소년 구원 사업에 기쁘게 참여할 일꾼들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돈보스코의 이름으로 창립된 단체들은 32개 단체가 있으며, 회원 숫자는 40만명에 달합니다.
살레시오회 회원만의(사제 및 수사) 현재 숫자는 1만 4천 명가량이니,
돈보스코 영성의 보편성이 얼마나 광범위한 것인지 잘 확인할 수 있습니다.
현재 돈보스코의 이름과 영성으로 한국에서 활동 중인 단체들은 아래와 같습니다.
예수의 까리따스 수녀회는 살레시오 회원이 창립한 수녀회입니다.
돈보스코 여자 재속회는 세상 안에서 수도자처럼 생활하는 단체입니다.
성소 문의
살레시오회: 010-6221-3520, http://www.ibosco.net
살레시오 수녀회: 010-2894-8958, http://salesiansisters.or.kr
살레시오 협력자회: 010-9060-4091, https://asscc.kr
돈보스코 여자 재속회: 0507-1306-1505, http://isvdb.creatorlink.net
예수의 까리따스 수녀회 서울 관구: 010-5830-3217, http://icaritas.or.kr
예수의 까리따스 수녀회 광주 관구: 010-8566-1865, http://icaritas.or.kr
예수의 까리따스 수녀회 수원 관구: 010-7273-5983, http://icaritas.or.kr
저 사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그곳에서 몇몇 병자에게 손을 얹어서
병을 고쳐 주시는 것밖에는 아무런 기적도 일으키실 수 없었다.
그리고 그들이 믿지 않는 것에 놀라셨다.”
오늘 복음은 주님께서 당신 고향에 가셨는데 믿지 않는 사람이 많아
몇몇 병자에게 밖에는 아무 기적을 일으키실 수 없었다고 하며
믿지 않는 것에 놀라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사람들이 믿지 않는 것에 놀라셨다고 하는데
저는 주님께서 기적을 일으키실 수 없었다는 사실이 놀랍습니다.
주님도 하실 수 없는 것이 있다는 말인데
진정 주님도 하실 수 없는 것이 있습니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이렇습니다.
산천초목과 삼라만상에게는 주님께서 하실 수 없는 것이 없지만
인간에게만은 인간의 협력 없이 하실 수 없는 것이 있고,
인간의 협력 없이는 전능하신 하느님도 구원하실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협력이란 믿는 것인데
주님의 능력과 사랑을 믿지 않으면
아무리 전능하셔도 하실 수 없습니다.
적절한 비유가 될지 모르지만 아무리 명의일지라도
환자가 믿지 않으면 어떤 처방이나 진료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고,
그럴 때 그에게는 명의도 명의가 아니고 아무 치료도 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사실 의심도 기적을 불가능하게 하는데
불신은 더더욱 기적을 불가능케 합니다.
의심이나 불신은 기적의 문을 걸어 잠그게 하기 때문입니다.
의심하거나 불신하는 사람에게는 문을 잠그고
믿는 사람에게만 문을 열어주지 않습니까?
그런데 고향 사람들은 왜 주님을 믿지 못했습니까?
그리고 왜 주님을 못마땅해했습니까?
그것은 주님을 자기들과 똑같이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자기들과 똑같이 한 인간인데 그런 능력이 있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고,
자기들과 똑같은 인간인데 자기들에게는 그런 능력이 없고
주님께는 있다는 사실이 화나고 시기 질투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들과 똑같은 인간인데 어디서 그런 능력이 왔을까
그런 것이나 따지고 있습니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
저 사람입니다.
저분이 아니고,
스승도 아니고,
주님도 아니고 저 사람입니다.
주님을 저 사람이라고 하고,
주님께 인간적인 것을 들이대면
주님도 저 사람일 뿐 아무것도 내게 하실 수 없습니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이승화 시몬 신부
다윗의 이야기를 들으면
하느님이 바라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바로 내적 회개입니다.
자신이 나약하며 완벽하지 않은 존재라는 것을 명심하며
언제든 잘못을 후회하고 하느님께 돌리는 자세입니다.
이 자세가 있을 때
우리는 매일 흔들리더라도
다시 하느님 품 안에서 머물 수 있습니다.
인구조사를 한다는 것은
하느님께 의탁하기보다
인간의 힘을 믿는다는 뜻입니다.
더 효율적인 통치를 위한 행동이지만
하느님보다 인간의 힘을 더 바라보게 만드는 유혹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화를 내시며 벌을 주려 합니다.
이때 다윗은 자신이 모든 것을 감당하려 합니다.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내적 회개를
우리는 지혜라고도 부를 수 있습니다.
하느님과 함께하는 이에게 주어지는 지혜는
더 중요한 것과 덜 중요한 것을 식별하게 도와줍니다.
누구나 잘못할 수 있지만
자신의 나약함을 인정하고 하느님께 돌아설 때
더 큰 은총이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알려고 하지 않는 이들은
결국 예수님을 멀리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받아들이는 마을을 돌아다니며
더 많은 가르침과 은총을 주셨습니다.
이처럼 내적 회개의 자세가 있을 때
더 많은 은총이 주어짐을 기억하며
오늘 주님을 찾고 더 중요한 것을 선택하는
그런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출처: [시몬 신부의 신앙이야기] https://frsimon.tistory.com/1605
인 도미니카 수녀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
그의 손에서 저런 기적들이 일어나다니! •••그러면서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나의 마음을 몹시 불편하게 하는 말씀이다.
내 안에 나와 이웃에 대한, 어쩌면 주님께 대한
선입견, 교만이 있다는 것을 건드리기 때문이다.
무엇이 있는 그대로를 바라보지 못할까?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깨어 살펴보십시오!>에서 나를 성찰 하게 해주신다.
”그들이 온순하고 겸손합니까?
공동체 구성원 사이에 권력 다툼이나 시기심 어린 싸움이 있습니까?
헐뜸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 공동체는 예수그리스도의 길을 따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공동체의 평화는 너무나 중요한 특징입니다.
왜냐하면 악마는 언제나 우리를 분열시키려 하기 때문입니다.
악마는 분열의 아비로 시기심을 통해 분열을 조장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평화와 사랑의 길을 볼 수 있도록 하십니다.“
오늘도 공동체와 함께 예수님을 닮아가는 수행의 길을 걷는 구도자로서
내 안에 갇혀있는 어둠 속에서 벗어나
“교회 안에서 수도자는 예언자로서 예수님의 지상 생애를 그대로 보여 주며
하느님 나라가 얼마나 완전한지 드러내는 예언자의 삶을 살도록 부름 받은 것“이라는
정체성을 살아가기를, 은총을 내려 주시길 기도한다.
출처 : 툿찡포교베네딕도수녀원 http://www.benedictine.or.kr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