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종, 작가초상, 혼합재료, 20×26㎝, 2019.
제임스 조이스센터에서 포즈를 취한 김병종 작가.
제임스 조이스
■ 더블린 ‘제임스 조이스 센터’
기념관·문학관 아닌 ‘센터’ 명명
정신적·지정학적 중심지의 의미
소설 ‘더블린 사람들’로 이름나
곳곳에 작가 동상·화폐엔 초상화
‘율리시스’는 문자의 거대 악보
리듬 넣어 책 읽어주는 일 즐겨
센터내 각 나라말 낭독 서비스도
더블린.
늘 비현실적으로 화창하던 날씨였는데 오늘은 비가 내린다. 그러나 하늘 저쪽은 여전히 환한 빛.
문득 “비 내리는 오후를 어떻게 보내야 할지조차 모르는 사람들이 불멸을 꿈꾼다”며 비틀어 말했던 작가 수전 어츠가 생각나서 실소했다. 나야말로 그렇다. 더블린에서는 일부러 문학 쪽으로만 포커스를 맞춰놓고 따로 일정을 잡지 않았기 때문에 갑자기 남아도는 시간 때문에 오전 오후를 막론하고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쩔쩔 매게 되는 행복한 경험도 했다.
“땅이 어떻게 식물을 기르고… 하늘은 어떻게 빛과 공기를 품고… 공기는 또 어떻게 새들을 품는지…”와 같은 사물의 이치와 현상 쪽에 시선과 생각을 머무르게 하는 곳. 기다림, 인내, 영혼 같은 잊었던 단어들을 떠올리며 마냥 게으르게 그리고 한껏 느리게 살아도 될 것 같은 곳. 아일랜드의 대기 속에는 어떤 근원적이면서도 영적인 분자 같은 것이 녹아 있어서 시간을 부풀리거나 팽창시켜 버린 듯하다.
한번 물을 뿌리고 지나가듯 하늘이 맑아졌지만 우산을 챙겨 들고 이 나라 사람들이 그토록 떠받드는 제임스 조이스 센터를 찾아가기로 한다. 글을 써서 이 사람처럼 영광을 얻은 경우도 흔치 않았던 것 같다. 그런데 기념관이나 문학관이 아닌 제임스 조이스 센터라니 좀 우습다. 그만큼 그 이름은 이 도시에서는 정신적, 지정학적 중심지가 된다는 뜻일까.
하긴 곳곳에 세워진 그의 동상은 말할 것도 없고 화폐에까지 초상화가 박혀 있으며 그의 대작 ‘율리시스’를 기념한 볼륨의 날(6월 16일)이라는 것을 정해 축제를 벌일 정도니까. 거기에다가 율리시스 줄거리를 따라 현장을 걷기도 할 만큼 여행자의 필수코스처럼 돼 있다. 내가 묵고 있는 호텔 뒷길의 고요할 정도로 한적한 주택가에 있는 ‘제임스 조이스 센터’는 그러나 자칫 유심히 보지 않으면 지나칠 정도로 평범한 건물이었다. 그의 생가를 그대로 기념관으로 했기 때문이란다. 하지만 안으로 들어가니 아일리시 공공 문학관보다도 훨씬 럭셔리하고 정리가 잘돼 있었다.
그가 세상에 이름을 낸 첫 작품이 “더블린 사람들”이었는데 더블린이라는 도시를 알리고 드러내는 데에 이 소설만큼 크게 기여한 경우도 없을 것이다. 기념관에는 그의 흉상과 작품, 공연포스터들이 붙어 있다. 콘서트에서 직접 노래를 부르기도 했을 만치 음악을 좋아했다는 그였고 1904년에는 더블린의 자랑인 애비(Abbey)극장을 세우는 데 큰 역할을 했다는 기록도 나온다.
2층으로 올라가는 오래된 창으로는 지붕들이 보이는데 율리시스를 낭독해주는 소리가 열어놓은 창으로 음악처럼 나지막하게 울리며 퍼져나간다. 2층에는 피아노와, 그리고 넓은 홀에는 문학 콘퍼런스를 위한 용도인 듯 커다란 식탁이 있다.
다른 쪽에는 옛집을 그대로 꾸민 어둑하고 비좁은 방이 나오는데 작가의 소년 시대를 그대로 재현해놓고 있다. 양친과 함께 찍은 어린 시절의 커다란 흑백사진과 방마다 있는 피아노와 벽에는 악보들. 흡사 음악가의 집에 온 것 같다. 다시 아래쪽으로 내려와 벽난로 앞의 푹신하고 편안한 소파에 앉아 본다.
탁자 위에는 그의 책들이, 일부러 그렇게 해 놓은 듯 어지럽게 펼쳐져 있다. 그 위로 책 읽어주는 여인의 음성이, 흘러나온다.
예컨대 귀로 듣는 ‘율리시스’다. 그렇게 독일어로, 불어로, 중국어로 읽힘으로써 관람객들의 귀를 열어 주고 있단다. 하지만 그곳에 머무르는 시간 동안 기다려도 한국어가 나오지 않아 아쉬웠다. 작가 자신도 저렇게 리듬을 넣어 책 읽어주는 것을 즐겼다고 하는데 어찌 보면 율리시스는 하나의 대하소설이자 거대한 문자의 악보라고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을 만치 음악적 리듬과 함께 음악 얘기가 많이 나온다. 물론 부지기수의 음란한 대목도, 낭독자의 목소리는 홀에 가득 퍼지는데 문득 니체가 “모든 예술은 음악의 상태를 지향한다”고 했던 말이 생각난다. 그의 문학 역시 음악적 비상을 하고 싶었을지 모른다. 3층에는 완전한 프라이빗 공간을 재현해 놓았는데 여기에도 쓰다만 듯한 원고들이 펼쳐져 있다.
그는 1차 세계대전이 터지던 해에 처음 율리시스 집필을 시작했다고 한다. 누군가 전쟁이 터졌을 때 “너는 무얼 했느냐”고 물었더니 율리시스를 쓰고 있었다고 당당히 대답했단다. 그만큼 자신이 하는 일에 자부심이 컸던 듯싶다.
어쨌거나 이 집은 공간 속에 한 생애를 압축해 담아놓았다는 느낌이다. 2층 한쪽의 어둑하고 비좁은 그의 소년 시대의 방에서 걸어 나와 1층 벽난로 앞 소파에서 파이프 담배를 문 노년의 작가 모습이 그대로 그려진다. 푹신한 소파에 앉아 있자니 금방이라도 왼편의 하얀 문이 열리며 그가 나타날 것만 같다.
고국에 돌아오지 못하고 일평생 부랑의 삶을 산 작가였지만 적어도 이 집에서만은 현존(現存)이었다. 그런 점에서 집 이름, 아무래도 완당 선생이 썼던 ‘귀로재(歸老齋)’로 불러봄 직하다고 생각했다.
김병종 화가, 서울대 명예교수, 가천대 석좌교수
■ 제임스 조이스는 누구
쿠바의 ‘굴뚝없는 산업’ 체게바라처럼 아일랜드 ‘국민영웅’…지식·관광 자원
쿠바에서 체게바라를 “굴뚝 없는 산업”이라고 일컫듯 아일랜드에서도 제임스 조이스(1882~1941)는 “지식 산업” “관광 자원”으로 일컬어진다. 발표 당시 난해하고 난삽한 데다 음란하기까지 하다며 비평계와 학계, 종교계 할 것 없이 일제히 지탄받았던 작품 율리시스로 인해 아일랜드는 세계 문학 대표도시 중의 하나가 됐다. 특히 단 하루 동안에 더블린에서 일어난 이야기인 율리시스로 기념비적인 문학의 금자탑을 쌓았다는 평가를 받아 조이스는 불멸의 국민영웅 반열에 오른다. 하지만 발표 당시의 사정은 전혀 달라서 조국 아일랜드에서는 물론 영국, 독일 등지에서도 일제히 출판을 거부당해 1922년 파리의 ‘셰익스피어 앤드 컴퍼니’ 서적에서 불어판으로 출간됐다.
역설적이게도 생전에 아일랜드에서는 유독 조이스에 대한 멸시와 핍박이 심해 그는 조국을 떠나 프랑스와 영국 등지를 떠돌며 유랑의 삶을 살아야 했다. 아버지의 음주와 폭력, 실직에 따른 가난 등으로 방황하던 청소년기를 보내면서 14~15세 때부터 사창가를 드나들었고 그때의 통제하기 어려운 성적 욕망의 체험과 종교적 죄의식 등이 그대로 율리시스에 투사돼 있다.
호텔에서 하녀로 일하던 노라 바나클을 만나면서 안정감을 얻었지만 여전한 고국에서의 냉대와 배척으로 결국 만년에는 거처를 스위스로 옮겼고 다시 더블린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율리시스의 2년 동안이나 계속된 음란 출판물 소송이 끝나고 초판 출간 후 10여 년이 지난 1934년과 1936년 영어 출판을 하게 됨으로써 비로소 문학적 승리를 얻게 된다. 녹내장의 악화로 한쪽 눈의 시력을 거의 잃게 된 그는 병고 끝에 1941년 스위스 취리히에서 눈을 감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