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리명고(千里命稿)
위천리 서문(序文)
록명(祿命)의 학문은 그 유래가 깊다. 수리(數理)학자, 천문(天文)학자, 자평(子平)학자의 말대로 자평의 책에 모두 기록이 된 자료를 근거로 하여 일반적인 도리로 예측을 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무룻 팔자를 믿을 수가 없다고 주장는 사람들이 있다. 장평전쟁에서 함정에 빠진 일개 병사의 운명은 그의 운명이 아니다. 만약 전쟁이 발생하지 않았다면 그는 평범하게 살아 갈 수 있었을 것이며 전투중에 적군을 살해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함에도 어찌 전쟁으로 인해 발생한 공분(公憤)으로 그가 책임을 지고 형을 당해야 한단 말인가? 또한 난양의 귀인이라고 해서 반드시 육합귀인을 다 만나는 것은 억지이다라고 반문을 한다. 그래서 팔자는 믿을 수가 없다고 주장하였다. 남사(南史)의 기록이 된 경험에 의하면 성공하고 실패하는 운명을 미리 알 수 있다면 10년 공부가 헛되지 않다고 말을 하였다. 고로 공자(孔子)는 50세에 천명(天命)을 알았고 맹자(孟子)가 말하길 정리(定理)를 따르면 명(命)이 아닌 것이 없으니 이것이 바로 천명(天命)을 아는 것이다라고 단언(斷言)하였다. 그러한 즉 명(命)이란 정말 믿을 만한 것인가 아니면 미신(迷信)에 불과한 것인가. 이러한 복잡한 논쟁을 놓고 토론하는 사람을 막다른 길로 몰지 말라고 하였는데 깊고 오묘함을 통한 사람이라도 이것에 대한 답변은 진실로 말하기 쉽지 않다. 우리들은 명리를 연구하기 위해 옛 사람의 책을 읽는다. 단지 세상에 우연히 만난 것들이 모두 순조로와서 명운(命運)이 잘 소통되기를 바랄 뿐이다. 본연의 위치에서 운명이 등을 돌리지 않는다면 굳이 허리를 굽혀 남에게 머리 숙이면서 몸을 닦을 필요는 없다. 따라서 그런 사람은 주변 사람들로부터 귀에 좋은 말만 듣고 인생을 누리게 되니 인정(人情)이 각박하게 변한다. 그러나 막상 자신의 생활이 궁핍해지는 징조가 나타나면 그 때부터 운명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다만 자기의 과실(過失)만 면하길 바라며 추길피흉(推吉避凶)에 더 집착하여 급한 일도 제쳐 두고 운명을 갈구(渴求)하게 된다. 그러면서 감히 정해진 명(命)이라 단언하지 못하고 단지 명을 추리(推理)할 뿐이라 말들을 하는데 내가 거슬러 올라가 살펴 보면 부귀(富貴)한 명(命)으로 보이는 사람은 단호히 많고 빈천(貧賤)의 명(命) 또한 적지 않았다. 이에 백여 가지 규칙을 특별히 선집(先集)하였고 주석(注釋)을 추가하여 짧고 긴 비평을 논(論)하고 변천해 온 과정도 추가로 설명하여 이에 뜻을 같이하는 사람에게 공개하였다. 모든 고전을 충실히 절충(折衷)하였다고 생각하는데 만약 내가 개인적으로 창작을 하였다면 어찌 내가 규범에 맞는 사람이라 말하겠는가. 다만 분명한 것은 내 글이 명확하여 직설화법(直說話法)을 구사하는 문장을 사용하면서 더 나가서 교육적인 내용이 많아서 정말로 다행으로 여긴다.
민국(民國) 을해년 여름철 절강성의 가흥시 춘신에 거주하는 위천리 삼가
韦千里自序
禄命之学。由来已久。如言数理者。言星辰者。言子平者。以常情测之。佥依据于了平一书。夫命不可信乎。唐吕才有言。长平坑卒。曷尝共犯三刑。南阳贵人。未必尽逢六合。命不可信乎,南史沈攸之尝言。早知穷达有命。恨不十年读书,故孔子五十而知天命。孟子曰莫非命也。顺受其正。是以知命者。不立乎严墙之下。然则命之可信与否。其精微奥妙。寂静感通。诚不易言也。吾侪读古人书。研摩命理。无非求际遇之顺利。声誉之畅达。素位而行。有从不背。要皆修身之一助耳。丁兹人心浇薄。世道衰微。讲求命运。更应趋吉避凶。免非就是。为常务之急。余不敢谓之命。只谓推命而已。溯行道以还。所见富贵之命固多。贫贱之命。实亦不少。兹特先集百余则。公诸同好。并加批注。籍为研究之资。至因革损益。论短评长。皆折衷于典籍。若云创作。则吾岂敢。如莹巨硕宏文。进而教之。更幸甚矣。
民国乙亥夏日浙江嘉兴韦千里谨识于春申寓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