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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2월 1일 연중 제4주간 목요일
제1독서 : 1열왕 2,1-4.10-12
복 음 : 마르 6,7-13
그때에 예수님께서
7 열두 제자를 부르시어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고,
둘씩 짝지어 파견하기 시작하셨다.
8 그러면서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9 신발은 신되 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고 이르셨다.
10 그리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어디에서나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그 고장을 떠날 때까지 그 집에 머물러라.
11 또한 어느 곳이든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고 너희 말도 듣지 않으면,
그곳을 떠날 때에 그들에게 보이는 증거로 너희 발밑의 먼지를 털어 버려라.”
12 그리하여 제자들은 떠나가서, 회개하라고 선포하였다.
13 그리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고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부어 병을 고쳐 주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흥미로운 조사 결과를 본 적이 있습니다.
독일과 이탈리아의 교통사고에 대한 조사였습니다.
독일에서 교통사고가 나면 대형 사고이지만,
이탈리아의 도로에서 사고가 나면 그냥 사소한 교통사고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에 대해 어디에 중심을 두고 있느냐를 말하고 있었습니다.
독일은 원칙을 중심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규칙을 어기면 큰 사고로 이어졌습니다.
그에 반해 이탈리아는 원칙을 존중하지만,
사람을 중심으로 여유 있게 사회가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탈리아는 극심한 혼란 한가운데서도
사람 안전을 위한 일종의 거리를 둘 줄 알기에
그들은 혼란의 순간에 상황을 꿰뚫어 보고
지혜롭고 올바른 결정을 내릴 줄 안다고 합니다.
원칙이 중요할까요? 아니면 사람이 중요할까요? 당연히 사람이 중요합니다.
원칙도 역시 사람을 위해 존재할 뿐입니다.
그러나 원칙이 사람보다 위에 설 때가 많습니다.
원칙을 지켜야 사람을 편하게 할 수 있다고 말하지만,
원칙이 중심에 설 때 오히려 사람이 소외됩니다.
예수님 시대의 종교 지도자들은 원칙 중심이었습니다.
자기 원칙에 의하면, 안식일에 병자를 고쳐 주는 것은 있어서 안 될 일이었습니다.
그 병자의 고통은 전혀 보지 않으면서 원칙을 왜 지키지 않느냐며
그래서 예수님을 제거할 대상을 보지 않았습니까?
사람이 중심이 되는 세상이 되길 예수님께서는 원하십니다.
원칙이나 자기 사상보다 더 우위에 두어야 하는 것은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이 중심이 되는 삶이 바로 사랑의 삶입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부르신 뒤 둘씩 짝지어 파견하십니다.
제자들은 회개하라고 선포하였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고 병자들을 고쳐 주었습니다.
이 모두는 사람을 위한 행동이었습니다.
하느님 나라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회개해야 했고,
마귀에 의해 힘들어하는 사람을 위해 마귀를 쫓아냅니다.
또 병에 의해서 힘들어하는 사람에게 기름을 부어 병을 고쳐 주면서
사람의 어려움을 없애주었습니다.
이를 위해 그 어떤 것에도 신경 쓰지 못하게 합니다.
길을 떠날 때 지팡이 외에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하셨으며,
신발은 신되 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고 이르십니다.
오로지 사람에게만 집중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 중심으로 전교 활동을 해야 하고, 이것을 하느님 아버지께서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답답할 때가 참 많습니다.
특히 사람 중심이 되지 못하고, 원칙과 사상을 내세워서
오히려 사람을 힘들게 하는 경우가 그것입니다.
입으로는 사랑을 말하지만, 자기 욕심과 이기심을 내세우는 삶 안에서
예수님의 사람 중심의 사랑을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요?
‘길을 떠날 때는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가지지 말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은 열두 제자의 파견 장면으로, '말씀 선포의 사명'에 대한 것입니다.
이는 세 장면으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첫 장면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기에 앞서,
'열 두 제자를 부르시어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십니다.(마르 6,7)
곧 미리 준비시키고 무장시키십니다.
실제로 제자들은 이 본문의 마지막 구절을 보면,
'많은 마귀를 쫓아내고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부어 고쳐'주었습니다.(6,13)
둘째 장면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둘씩 짝지어 파견'하십니다.
이는 진리가 검증되기 위해서는 두 사람 이상의 증인이 있어야 한다는
당시의 고대 근동의 관습에 따른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하느님 나라가 이미 ‘그들 안에’ 실현되어야 함을 요청합니다.
곧 ‘파견받은 자들’ 사이에 이미 형성된 하느님 나라를 보여주는 것이
바로 ‘복음 선포’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파견받은 자’는 먼저 복음화되어야 하고, 하느님 나라에 대해서 선포하면서,
동시에 하느님 나라가 되어야 하고, 하느님을 선포하면서 동시에 하느님과 만나야 할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먼저, ‘복음 선포자’가 갖추어야 할 조건과 자세로
‘증거자’가 되어야 함을 말씀하십니다.
곧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신발도 옷도 두 벌을 가지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그 자체가 증거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지팡이는 가져가라고 하셨을까요?
‘지팡이’는 여행자에게 있어 들짐승을 쫓는 무기이기도 하지만,
우리는 모세의 ‘지팡이’를 떠올릴 수 있습니다.
양치기 모세에게는 단순히 평범하고 보잘것없는 지팡이였지만,
말씀과 함께 바다를 내려치면 물결이 갈라지고,
바위를 두드리면 물이 솟아나고, 병든 이들이 쳐다보면 살아나게 하는 ‘구원의 지팡이’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지팡이’로 인류 구원과 사랑의 역사를 펼치셨습니다.
바로 그 ‘지팡이’에 매달려 있는 ‘십자가의 말씀이신 그리스도’(1코린 1,23)로 말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그 집에 머물고,
받아들이지 않으면 신발의 먼지를 털고 그곳을 떠나라.’고 하십니다.
곧 받아들이고 받아들이지 않은 그들의 처신에 따른 결과가 주어지게 될 것임과 동시에,
‘파견 받은 자’의 사명이 그들의 환대에 의존되지 않고 자유로워야 함을 말해줍니다.
곧 자신을 받아주든 받아주지 않든 중요한 것은 ‘복음을 선포하는 사명’이라는 말씀입니다.
셋째 장면에서는 그들이 파견받고 가서 한 일입니다.
곧 '회개하라고 선포하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고 많은 병자를 고쳐'주었습니다.(6,12-13)
이는 파견 받은 자는 파견하신 분의 뜻을 선포하고 증거하는 일을 하되,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그분의 주신 능력으로 하는 것임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받고 파견받은 우리는 지금 파견하신 분께 매여 있는지,
그리고 그분 권능의 지팡이인 ‘말씀의 지팡이’를 꼭 붙들고 있는지를 보아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마르 6,8)
그렇습니다. 주님!
길을 떠나면서 그 어느 것도 가지고 가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가져야 할 것을 이미 가진 까닭입니다.
말씀이신 당신과 당신의 권한을 지닌 까닭입니다.
저의 능력으로 당신의 권한을 가로막지 않게 하소서.
저의 말이 당신의 말씀을 덮지 않게 하소서.
저의 무능함과 허약함 안에서 당신의 선하신 뜻을 이루소서.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2월의 첫날입니다. 어제 서울대교구에서 사제 인사이동이 발표되었습니다.
저는 교구의 인사이동에 따라서 ‘달라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짧은 것 같았는데 어느덧 5년이 지났습니다.
모건 프리먼은 이런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우리는 3개의 감옥에 갇혀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걱정하는 감옥, 지난 과거에 집착하는 감옥,
변화를 두려워하는 감옥입니다. 당신의 마음을 바꾸십시오.
당신의 삶을 바꾸십시오. 세상 모든 일은 마음먹기에 달렸습니다.”
돌아보면 지난 5년 동안 감사할 일이 참 많았습니다.
팬데믹 어려움 중에도 자리를 지키면서 신문을 만들어 준 직원들에게 감사합니다.
낯선 뉴욕에서 자리를 잡을 수 있도록 함께 해 준 동료 사제들에게 감사합니다.
제가 가는 길에 기꺼이 동행해 준 봉사자들에게 감사합니다.
매주 미사에 함께 해 준 브루클린 한인 성당 공동체에게 감사합니다.
성지순례를 다닐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5년 동안 무탈하게, 건강하게 지낼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이번에 이동하면 14번째 인사이동입니다.
8년은 보좌신부로, 8년은 본당신부로, 8년은 교구청에, 8년은 해외에 있었습니다.
이제 해외에서 있는 시간이 더 길어질 것 같습니다.
앞으로 제게 주어지는 시간들을 걱정이라는 감옥에,
과거라는 감옥에, 두려움이라는 감옥에 가두고 싶지는 않습니다.
변화를 기쁘게 받아들이려고 합니다.
주님께서 함께하심을 믿으며, 새로운 만남을 설레는 마음으로 받아들이려고 합니다.
다행히 전임 신부님들은 제가 사랑하고, 존경하는 동창 신부님들이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아폴로와 나는 주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정해주신 대로,
여러분을 믿음으로 이끈 일꾼일 따름입니다.
나는 심고 아폴로는 물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자라게 하신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그러니 심는 이나 물을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오로지 자라게 하시는 하느님만이 중요합니다.
심는 이나 물을 주는 이나 같은 일을 하여, 저마다 수고한 만큼 자기 삯을 받을 뿐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협력자고, 여러분은 하느님의 밭이며 하느님의 건물입니다.”
전임 신부님들이 씨를 뿌리고, 물을 주었느니, 저는 영적인 거름을 주면서
하느님의 사랑이 꽃피는 공동체가 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고 싶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당부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어떻게 복음을 전해야 하는지, 어떻게 행동을 해야 하는지 알려 주십니다.
복음을 전하는 이들은 신념이 있어야 하고,
복음을 전하는 이는 자기 자신의 욕심을 버려야 하고,
복음을 전하는 이는 희망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주신 사명을 충실하게 실천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은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떠나가서, 회개하라고 선포하였다.
그리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고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부어 병을 고쳐 주었다.”
주님께서는 이제 새로운 곳으로 가는 제게도 같은 당부의 말씀을 하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 아픈 이들과 함께 하는 것,
가난한 이들의 친구가 되어 주는 것입니다.
“주 네 하느님의 명령을 지켜 그분의 길을 걸으며,
또 모세 법에 기록된 대로 하느님의 규정과 계명, 법규와 증언을 지켜라.
그러면 네가 무엇을 하든지 어디로 가든지 성공할 것이다.
열두 제자의 파견
조욱현 토마스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도의 사명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채비에 대해 말씀하신다.
최상의 준비는 소박한 음식과 인간의 허약한 몸을 가리고 덮어줄 옷 한 벌처럼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 이상을 바라지 않는 것이다.
사도들은 길을 떠나며 주님의 말씀대로 전대도 지니지 않았고 여벌 옷도 없이 떠났다(8-9절).
또한, 배를 채울 양식이 부족할까 염려하며 내일을 걱정하지 말라고 하신다(마태 6,34 참조).
하느님의 섭리는 사도들에게 필요한 양식을 마련해 주실 것을 믿으라고 하신다.
이러한 주님의 말씀은 말씀을 전하는 사람들에게
그 말씀을 통하여 완전해지려는 자들에게 하신 말씀이며
그 말씀을 듣는 이의 의지에 맡겨 두셨다.
낯선 여행자에 대한 손님 접대는 그들의 의무였다.
여행자를 후하게 대접하는 것은 곧 하느님의 천사를 대접하는 것이고,
하느님께 축복을 받을 기회가 주어진다고 여겼다.
손님을 거절하는 것은 하느님을 거절하는 것이며,
하느님을 거절하는 행위는 바로 이방인들이나 하는 행위가 되고,
그로 인해 무서운 심판을 받게 된다고 여겼다.
그래서 발에 묻은 먼지를 턴다는 것은,
하느님의 사람을 받아들이지 않음으로써 하느님의 심판을 경고하는 것이었다.
“너희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이고”(루카 10,16),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맞아들이는 것이다”(마르9,37).
이것은 사목하는 성직자나 수도자들에게 잘해 주라고 하는 것만은 아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모상을 지닌 우리 이웃들에게 하여야 할 바를 말씀하시는 것이다.
하느님의 모상인 인간을 사랑하면서 우리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께 사랑을 드릴 수 있으며,
그분께 진정한 찬미와 감사를 드릴 수 있다.
이러한 삶으로 주님께 영광을 드리고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우리 되도록 하여야 한다.
우리는 주님 앞에 나 자신이 진정으로 복된 삶을 살며,
참으로 하느님 안에 사는 행복을 누려야 한다.
우리의 복된 삶으로 세상에 하느님의 나라를 이루어야 한다.
복된 삶이란, 바로 하느님의 말씀을 살아가며 말씀이신 주님께서
우리 안에, 우리 가정 안에, 나의 삶 속에 구체적으로 태어나시도록 하는 삶이다.
주님이 가신 길을 따라 우리도 하느님의 자녀로 살아가려 노력할 때,
주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사명을 잘 수행할 수 있다.
주님께 의탁하며 순간을 살아내며, 이웃을 통하여
우리의 본모습인 하느님의 모습을 완성해 가는 구원받은 자의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이다.
우리 손에 잔뜩 들려있는 비본질적이고 부차적인 것들을 내려놓읍시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부끄럽게도 언제부턴가 소임 이동 때 짐이 많아지기 시작했습니다.
혈기 왕성하던 젊은 수도자 시절, 원칙대로 살아보려고 발버둥 칠 때는
정말이지 이삿짐이 딸랑 가방 두 개였습니다.
소임 이동하는 날, 양손에 가방 하나씩 들고, 정들었던 공동체를 뒤로하고
버스로 이동하던 시절의 그 홀가분함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안타깝게도 모아놓으면 한 짐입니다.
아무리 줄이고 줄인다 해도, 가방이 대여섯 개이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차량의 도움을 받아야만 합니다.
돌아보니 아무것도 없이 살던 수도 생활 초년병 시절, 행복지수가 훨씬 높았습니다.
손에 쥔 것이 아무것도 없다 보니, 잡 생각하지 않고,
딴 데 쳐다보지 않고 오로지 아이들만 바라봤습니다.
하느님만 생각했습니다. 가난이 가져다주는 은총인가 봅니다.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마라.
신발은 신되, 옷도 두 벌을 껴입지 마라!”
가만히 생각해 보니 조금은 너무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장거리 도보 여행을 하다 보면 별의별 일이 다 생길 텐데,
적어도 비상금이라든지 비상식량은 챙겨서 떠나야 되는데,
한 마디로 ‘몸만 가라’, ‘맨땅에 헤딩’하라는 말씀입니다.
지팡이는 왜 들고 가라고 하시는가 봤더니 당시 여행객들에게 지팡이는 필수 품목이었답니다.
광야나 들길을 걷다 보면 뱀이라든지 전갈이라든지, 들짐승을 만나곤 했는데
비상시 호신용으로 다들 지팡이 하나씩을 들고 다녔답니다.
그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지니지 말라는 예수님 당부였습니다.
그런데 곰곰이 더 묵상해 보니 예수님 말씀이 백번 천번 지당합니다.
수도자로 살아보니 최소한의 것만으로 살 수가 있었습니다.
죽었다 깨어나도 마트나 시장 한 번 안 가고 살 수도 있었습니다.
더 높은 이상향을 추구하고, 더 영적인 삶을 갈구하다 보면
세상의 좋은 것들로부터 자연스럽게 초월할 힘이 본인도 모르게 생겨났습니다.
그런 면에서 이 극단적 물질만능주의와 천박한 자본주의 앞에서
수도자들의 증거 생활이 그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돈 없이도, 최첨단 문명의 이기 없이도, 번쩍번쩍 빛나는 자동차 없이도
충분히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을 수도자들이 보여주고 있으니 말입니다.
몸에 지닌 것이 많을수록, 통장에 잔고가 많을수록 거기에 신경 쓰이기 마련입니다.
더불어 서로 비교하게 되고, 그로 인해 분노하고 실망하게 되고,
점점 본질보다는 비본질적인 것들에 마음이 쏠리고,
정작 가장 중요한 것들을 놓치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 한 세상 살아가면서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 생각해 봅니다.
물질이, 돈이, 명예가, 건강이 전부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보다 훨씬 더 가치 있고 아름다운 것들이 있더군요.
이 세상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하느님이 계십니다.
우리를 생명의 길로 나아가게 하는 성경이 있습니다.
세상의 가치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진리의 길이 있습니다.
형제들 사이에 오고 가는 끈끈한 우정이 있습니다.
우리 손에 잔뜩 들려있는 비본질적이고 부차적인 것들을
내려놓지 않는 이상 우리 눈은 흐려져 있는 상태입니다.
정작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식별할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토록 중요한 것이 버리는 것입니다. 내려놓는 것입니다. 버리고 떠나는 것입니다.
私心 없는 청정한 마음으로
박상대 마르코 신부
모처럼 찾아간 고향에서 푸대접을 받았다하여 氣가 꺾이실 예수님이 아니시다.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고향 방문과 나자렛 사람들의 불신을 뒤로한 채
예수님의 복음 선포는 오늘도 계속된다.
오늘은 예수께서 친히 뽑아 내세우시고 가르치시고 돌보아 오신
12명의 제자들을 둘씩 짝지어 파견하신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뽑아 세우신 것은, 그들로 학교나 수도원을 꾸려가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들로 하여금 당신처럼 사람들에게 다가가 복음을 선포하고 더러운 악령들을 쫓아내고
병자들을 고쳐 주며 도래한 하느님 나라를 실현시키기 위함이었다.
그들을 ‘사람 낚는 어부’로 세상에 보내시는 것이다.
이에 오늘 복음은 예수께서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이에 마땅한 능력을 주신 것과
그들에게 훈시한 여장 규칙과 선교 방법을 전해주고 있으며,
마지막에 가서 파견된 제자들의 활동상을 들려준다.
12제자의 파견 사실과 여장 규칙 및 선교 방법에 대해서는 공관복음 모두가 전하고 있으며,
그 내용은 거의 비슷하다.(마태 10,1. 5-10; 루카 9,1-6)
마태오는 따로 편집한 파견 설교(10장)를 조직적으로 꾸미기 위해
파견 사실과 12제자의 명단을 서두에 배치하였다.
루카복음의 여장 규칙과 오늘 마르코 복음의 여장 규칙을 비교하면 흥미로운 차이점이 발견된다.
마르코는 전교 여행 중에 지팡이와 신발을 허용하고 있는 반면, 루카는 이를 금하고 있다.
루카는 마르코의 원전을 옮겨 쓰면서 지팡이의 휴대를 금하고 있으며,
신발 이야기는 아예 삭제해 버렸다.
마르코와 루카는 둘 다 자루, 먹을 것, 돈, 그리고 두 벌의 속옷 휴대를 금하고 있다.
선교사의 생명과도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이런 것들을 휴대하지 말라니 예수님의 의도는 무엇이겠는가?
아무것도 지니지 말고 즉 있는 그대로 가라는 것이다.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는 자는 자신의 모든 것을
철저하게 하느님의 보살핌과 안배에 의탁하라는 뜻이다.
예수님 당대의 사람들이 여행을 다닐 때의 모습을 한 번 그려보자.
사람들은 키톤(chiton)이라는 속옷(루카 3,11)을 입었는데,
이는 머리와 양팔만 들어가는 긴 부대와 같은 옷으로서
한 장의 천을 접어 한쪽만을 바늘로 꿰맨 것도 있고, 혼솔 없이 통으로 짠(요한 19,23) 것도 있었다.
그 위에 히마티온(himation)을 입었다.
이는 上衣의 겉옷(루카 6,29)으로 보통 두 장의 천으로
체격보다 크게 만들어 머리 위에 올려 입기도 하고 어깨에 걸쳐 입기도 하였다.
밤에는 이 겉옷이 바로 모포가 된다.
허리춤에는 띠를 매는데 이는 체격보다 큰 겉옷이 끌리지 않게 하여 행동을 용이하게 한다.
그 띠에 전대를 매달아 돈이나 귀중품을 넣었다.
머리에는 강한 햇빛에 머리와 얼굴을 보호해 줄 수건을 둘렀고,
발에는 들길과 험한 길로부터 발을 보호해 줄 신발을 신었다.
이 신발은 가죽으로 만든 카르파티나(carpatina)라는 것인데
신발 바닥 양쪽에 가죽끈을 달아 발목에 매어 신고 다녔다.
어깨에는 주머니를 매고, 손에는 통상 지팡이를 짚고 있다.
주머니에는 하루나 이틀의 양식이 될 빵과 건포도, 올리브와 치즈 등이 들어있을 것이고,
지팡이는 맹수나 뱀, 강도의 침입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도구였다.
물론 이런 것들은 가장 기본적인 것이다.
때에 따라 더 가지고 다닐 수도 있고 덜 가지고 다닐 수도 있다.
먹을 것도, 자루도, 돈도, 속옷 두 벌도, 안 된다.
있는 그대로 제자들은 예수님 곁을 떠나야 한다. 선교는 여행이 아니다.
물론 다시 돌아와 스승이신 예수께 활동 보고를 드려야겠지만,
언젠가는 돌아와도 그분이 계시지 않을 것이다.
지금은 예수님의 훈시에 따라 그분이 명하시는 대로,
지금껏 스승의 동반자와 증인으로 보고 들은 것을 세상에 가져다주어야 하는 것이다.
아무런 私心 없는 淸淨한 마음으로 말이다.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예수님께서 그들을 파견하기 시작하셨다.
이승화 시몬 신부
다윗이 세상을 떠날 때
후계자인 솔로몬에게 한 말은 하나입니다.
오직 하느님의 규정과 계명, 법규와 증언을 지키라는 유언
이는 권력을 어떻게 쟁취하고 유지하라는 것보다
하느님을 온전히 따라가며 의탁하는 삶이
더 중요함을 알려 줍니다.
이런 가르침이 우리에게 중요한 건
누구나 태어나면 죽음을 향해 나아가고
살아 숨 쉬는 동안 행복을 찾기 때문입니다.
참된 행복을 깨달은 이들은
다윗의 유언처럼, 하느님께 온전히 의탁할 수 있습니다.
깨닫지 못한 이들은
세상 안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지만
그 행복은 스쳐 지나가는 아픔이 될 뿐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르시어 하신 말씀은
단순히 제자로서의 삶을 말하는 건 아닙니다.
불가능한 무엇을 요구한 것도 아닙니다.
먼저 하느님을 깨닫고
그분만으로도 충만함을 느낄 때
비로소 제자로서의 길을 걸어갈 수 있음을 알려 주십니다.
불안할수록 많은 것을 준비합니다.
그러나 희망이 있고 안정된 사람일수록
주어진 것에 감사하면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추구하는 것이 많을수록
세상 안에서 하느님이 아닌 다른 것을 많이 챙길수록
우리가 가진 불안함을 보여줄 뿐입니다.
그러니 오늘 다윗의 유언을 통해
예수님 말씀의 의미를 살펴볼 수 있길 바랍니다.
하느님만으로 충만함을 깨달을 수 있는
그런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출처: [시몬 신부의 신앙이야기] https://frsimon.tistory.com/1605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