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방일: 2023.01.05(목)
탐방지: 아차산역4출구(어린이대공원후문)-서울어린이대공원
어린이대공원에 '반달' 노래비가 있다는 정보를 얻어 귀가 길에 나서보지만 눈에 띄지않아 주변사람들 한테 물어봐도 명확하게 알려주는 사람이 없다...
♡동영상이 나오지 않으면 나갔다가 다시 들어오면 볼 수 있습니다.
어린이대공원 지하철역이 있지만 다른 호선으로 갈아타야 하는데 맞은편의 아차산역이 어린이대공원 후문이라 시간절약..
팔각당을 넘어~
어린이대공원 정문 부근...
포기하고 다음 목적지로 향하려는데 노래비가 시야에 들어온다...
반달(우리 민족의 노래)
일제강점기인 1924년에 발표된 우리나라 최초의 창작동요!!!
윤극영 선생님이 작사, 작곡한 동요로서 우리나라 창작동요의 효시가 되는 곡이죠.
나라를 빼앗긴 일제강점기의 불행한 어린이들에게 꿈과 용기와 희망을 주는 동요임을 알 수 있죠. 오늘날에도 잊혀지지 않는 민족의 노래로 남게 되었어요.
(가사)
1
푸른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엔
계수나무 한나무 토끼 한마리
돛대도 아니달고 삿대도 없이
가기도 잘도 간다 서쪽나라로.
2
은하수를 건너서 구름나라로
구름나라 지나서 어디로 가나
멀리서 반짝반짝 비치이는건
샛별이 등대란다 길을 찾아라
반달
1924년 윤극영은 나라를 잃고 방황하는
민족적 비운을 그린 동요 ‘반달’을 창작하였다.
1924년에 동요‘반달’은 조선 최초의 아동가요로
일제강점기 나라를 잃은 민족의 애환을 달래주었으며
조선반도는 물론 중국에 있는 조선인들에게도
재빨리 보급되여 나이 구별이 없이
아동이거나 성인이거나를 물론하고
모든 이들이 널리 애창하는 동요로, 유행가로 되었다.
세계명곡 200수까지 기록된 동요 ‘반달’이
창작된 계기는 다음과 같다.
윤극영의 어린 시절에 나이가 10년 이상 되는
누님 한분이 경기도 가평군으로 시집갔다.
째진 생활난으로 하여 누님은 10년이 퍽 넘도록
한번도 집에 오지 못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병으로 세상떴다. 그때 누님의 나이는
30세밖에 안되었다. 윤극영은
그토록 보고 싶던 누님의 죽음으로 하여
밤새도록 울고 또 울었다. 너무도 울어
퉁퉁 부은 두 눈으로 멍하니 밤하늘을 쳐다보고 있던
윤극영은 은하수 같은 엷은 구름너머에
반달이 걸려있고 그 멀리로 새별이
반짝이는 것을 보았다. 그때 윤극영의 머리에는
‘반달’ 악상이 떠올랐다. 윤극영은 즉시 가사를 써내고
곡까지 지어냈다. 그는 21세 어린나이에
천재적 음악재질로 최초의 가요를
세계명곡으로 탄생시킨 것이다.
한국의 『아동문학사전』에는
“돛대도 아니 달고 삿대도 없이…우리 민족의
망국의 설음과 타향살이의 슬픔을 그린 이 동요는
그 시대가 안겨준 음률이었다.”고 적혀있다.
그는 1926년 조선 최초의 동요곡집 『반달』을
출간함과 동시에 같은 제목의
음반을 출판하기도 하였다. 1926년 1월, 윤극영은
일본의 간섭과 집탈이 심해지자 간도(지금의 연변)
용정에 건너와 동흥중학, 광명중학,
고등여자학교 등에서 음악교원으로 있으면서
약 10년간 음악을 가르쳤다. 1936년, 윤극영은
다시 서울로 돌아가 음악활동을 하다가 1937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음악공부를 하면서
극장가수로 취직하기도 하였다.
1940년에 다시 중국에 온 윤극영은
북간도(지금의 흑룡강성) 하얼빈에
예술단을 설립하고 만주(지금의 동북3성) 지역과
서울 등지에서 공연활동을 벌리려고 하였으나
일제놈들의 잔혹한 탄압으로 결국 해산되고 말았다.
더는 예술단을 경영할수 없게 된 윤극영은 다시
용정에 돌아와 아동가요를 창작하고 학생들에게
음악을 가르치면서 광복을 맞이했다.
“하늘에는 예측하기 어려운 풍운이 있고
사람의 인생은 조석으로 뒤바뀐다.”고
일본이 관여하는 협화조직에 가입한 것이 죄가 되여
1946년 겨울에 그는 경비대에 체포, 용정에서
비판 투쟁을 받고 사형판결까지 받게 된다.
이 대목 이야기는 연변에서 촬영사로 활약하셨던
황범송 선생이 2005년 여름 한국에 갔을 때
저명한 작사자이며 작곡가인 가수
반야월(원명 박창오, “번지 없는 주막”,
“울고 넘는 박달재”, “유정천리” 등의 작곡가)
선생에게서 들은 후 옮겨놓게 된 것이다.
황선생은 반야월선생과 함께 기념사진도 찍고
그의 집에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첫 이야기로 윤극영에 대해 문의하였다.
반야월선생은 “윤선생이 간도에 오래동안 계셨으니
모두 알고있나봐요. 세상뜬지
10년이 많이 넘었습니다.”라고 하면서
광복후 룡정에서 있은 사형집행전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친일파로 당장 사형에 처하게 된
윤극영은 마지막 유언을 이렇게 남겼다.
“나는 생활난으로
일제를 위한 노래도 많이 지었고 상도 많이 타다보니
죽을 죄를 졌습니다. 그러니 무슨 할말이 있겠소만은
지금 와 보면 공산당을 위해서도 공로를 세웠습니다.
한가지 남기고 싶은 말이라면 내가 죽은 후에도
내가 작곡한 동요들을 계속 불러준다면
너무나 감사하겠습니다.”
한 사형집행자가 “당신은 공산당을 위해
무슨 좋은 일을 했는가?”라고 묻자
윤극영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동북인민의 해방의 봄이 왔네’ 이 노래도
내가 지은것입니다.”
당시 용정현 현장으로 지내던 문정일선생은
사형장에서 사형수들의 명단을 하나하나 검토하던 중
윤극영이 노래 ‘반달’과 ‘동북인민의
해방의 봄이 왔네’의 작곡가임을 확인하고
사형결정을 당장에서 취소하였다.
윤극영은 3년 도형을 받고 연길감옥에서
수감생활을 하다가 얼마후 보석으로 풀려나왔다.
그 후 윤극영작곡가는 한국에 살면서
자기의 생명의 은인 문정일선생을 늘 외웠다고 한다.
1950년대 북경에서 김정평과 김철남 부자간이
‘반달’을 중국어로 번역 편곡하여
음반을 내기도 하였고 1979년에 ‘반달’은
‘하얀쪽배’(小白船)라는 제목으로
중국의 (한문)통용 음악교과서에까지 수록되였다.
아동가요 선구자중의 한 사람인 불멸의 작곡가
윤극영은 1988년 11월 15일에 86세를 일기로
세상을 뜨셨다. 윤극영선생은 비록
우리 곁을 떠났지만 그가 작곡한 노래는
우리 민족 어린이들과 어른들 할 것 없이
영원히 즐겨 부르는 명곡으로 울려 퍼질 것이다.
/길림신문(2017.3.31)
아차산을 바라보며 첫번째 목적달성으로 개운한 기분으로 다음 목적지로...
첫댓글 대 공원도 많이 변했네요. 우리가 어린이 일 때 불렀고 외웠던 노래 가사들이 정겹네요.벌써 60년 전(前)이 되어버렸네요. 좋은 사진 잘 보았습니다.
명확한 위치를 몰라 헤매다가 찾게되었습니다...
오랜만입니다 은둔고수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