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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2월 2일 금요일 주님 봉헌 축일(축성 생활의 날)
제1독서 : 말라 3,1-4
복 음 : 루카 2,22-40
22 모세의 율법에 따라 정결례를 거행할 날이 되자,
예수님의 부모는 아기를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올라가 주님께 바쳤다.
23 주님의 율법에 “태를 열고 나온 사내아이는 모두 주님께 봉헌해야 한다.”고 기록된 대로 한 것이다.
24 그들은 또한 주님의 율법에서
“산비둘기 한 쌍이나 어린 집비둘기 두 마리를” 바치라고 명령한 대로 제물을 바쳤다.
25 그런데 예루살렘에 시메온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이 사람은 의롭고 독실하며
이스라엘이 위로받을 때를 기다리는 이였는데, 성령께서 그 위에 머물러 계셨다.
26 성령께서는 그에게 주님의 그리스도를 뵙기 전에는 죽지 않으리라고 알려 주셨다.
27 그가 성령에 이끌려 성전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아기에 관한 율법의 관례를 준수하려고 부모가 아기 예수님을 데리고 들어오자,
28 그는 아기를 두 팔에 받아 안고 이렇게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29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30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31 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으로
32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
33 아기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아기를 두고 하는 이 말에 놀라워하였다.
34 시메온은 그들을 축복하고 나서 아기 어머니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35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
36 한나라는 예언자도 있었는데, 프누엘의 딸로서 아세르 지파 출신이었다.
나이가 매우 많은 이 여자는 혼인하여 남편과 일곱 해를 살고서는, 37 여든네 살이 되도록 과부로 지냈다.
그리고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다.
38 그런데 이 한나도 같은 때에 나아와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예루살렘의 속량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그 아기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
39 주님의 법에 따라 모든 일을 마치고 나서, 그들은 갈릴래아에 있는 고향 나자렛으로 돌아갔다.
40 아기는 자라면서 튼튼해지고 지혜가 충만해졌으며,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노잣돈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노잣돈은 사망한 고인이 저승길을 떠날 때 여비 하시라고 관에 지참금을 넣는 것으로,
고인의 수의 가슴이나 허리춤에 끼워 놓습니다.
도시에서는 이 모습이 사라졌지만, 지방에는 아직도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사실 이는 우리나라만 있는 전통이 아닙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죽은 자의 입에 뱃삯으로 동전을 넣었습니다.
통행료를 내야 죽은 자의 나라로 들어가는 강을 건널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또 고대 사람들은 무덤에 음식을 넣기도 했습니다.
저승에 가는 동안 배고픈 고통을 느끼지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죽음 이후의 시간을 아무도 모르기에 이런 행동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나라에 들어갈 때 아무것도 가져가지 못한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영생을 위해 한 가지 화폐만이 가치 있다고 하셨습니다.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으로만이 영원한 생명을 얻는 여정을 떠날 수 있다고 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인간은 이웃에게 자신의 보물을 선물한 만큼만 저쪽으로 옮길 수 있다.”
사랑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도 사랑만을 말씀하셨던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 오신 예수님이시기에, 구원의 길에서 사랑 없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당신이 먼저 당신 몸 전체로 사랑을 실천하면서 그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 모범을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주님 봉헌 축일을 통해서 볼 수 있습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이시기에 굳이 갓난아기의 모습으로 오실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와 똑같이 태어나시고, 또 똑같이 생활하시면서 우리와 같은 삶을 사십니다.
당신 삶 전체로 모범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이것 자체로도 충분한 봉헌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 스스로 낮추셨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주님의 사랑은 단순한 봉헌만으로 멈추지 않지요. 자기 생명까지도 봉헌하십니다.
이를 오늘 복음에 등장한 시메온 예언자는 알아차립니다.
그래서 어머니인 마리아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 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구원을 위해 당신의 생명과 삶을
온전히 하느님 아버지께 봉헌하신 주님을 바라보면서
우리 역시 사랑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쓸데없이 ‘노잣돈이나 두둑하게 준비하지.’라는 세속적인 생각을 버리고,
더 사랑하며 살면서 사랑이라는 화폐를 내놓고
당당하게 하느님 나라에 입장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에 부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성탄을 지낸 지 벌써 40일이 지났습니다.
이날 성모님께서는 모세의 율법에 따라 정결례를 치르시며, 예수님을 성전에 봉헌하셨습니다.
사실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께서는 죄 아래에 있는 사람들에게 적용되었던
모세의 이 율법규정을 지키지 않으셔도 되셨지만,
율법 아래에 있는 이들을 속량하시려고 굳이 율법의 관례를 준수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관습에 따르면, 부모는 아이를 성전에 있는
나이 많은 랍비에게 데려가 복을 빌어주게 합니다.
세례자 요한이 할례를 받고 나자, 즈카르야가 노래를 불렀듯이,
예수님이 할례를 받은 후에 시메온이 찬미합니다.
(라틴어 성경 첫 단어를 따서 ‘눈크 디미티스’(Nunc Dimittis)라 부른다).
“이제는 떠나가게 하소서.”로 시작되는 이 노래는
이사야서(40,5;42,6;46,13;49,6;52,9-10)를 반영하고 있는데,
전통적으로 성인들이 세상을 떠날 때 불리기도 하고,
주로 동방교회에서는 저녁기도 때, 서방교회에서는 끝기도 때 바쳐집니다.
시메온은 '아기를 두 팔에 받아 안고' 노래합니다.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루카 2,29-32)
“이제야”라는 말은 ‘현재’가 ‘구원이 성취된 시대’임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라는 구절은
이사야서(40,5)의 “모든 육체가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는 말을 반영해 줍니다.
이 말을 들은 아기 예수님의 부모는 '놀라워하는데', 시메온은 마리아에게 말합니다.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루카 2,34-35)
이는 더러는 예수님을 믿었지만, 대부분은 배척한 사실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반대 받는 표징'이 될 것임을 밝혀줍니다.
또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겪게 될 마리아의 고통을 암시해 줍니다.
사실 성모님은 가정을 꾸려 나가면서도 칼에 찔리는 고통을 당하셨을 것입니다.
요셉과 마리아와 예수님의 가정은 경제적으로 부유했거나,
혹은 근심 걱정이나 고통이 없는 가정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오히려 문제 가정이었을 것입니다.
아기를 낳자마자 쫓겨 다녀야 했고, 자신의 아기 때문에 많은 무죄한 아기들이 죽어야 했으며,
혼인 전에 아기를 낳은 까닭에 이웃들의 따가운 눈총을 받으며 살았을 것입니다.
남편 요셉은 일찍 세상을 떠났고, 마리아는 이해할 수 없는 아들과 함께 살아야 했고,
아들마저 세상을 먼저 떠나보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분명 행복한 가정이었음에는 틀림없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고통이나 어려움이 없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성모님께서 예수님의 운명에 동참하셨다는 것,
그리스도의 속죄의 고통과 구원의 길에 참여했음을 말해줍니다.
그토록 예수님과 함께 구원의 동반자요, 협조자요, 반려자로 사셨던 것입니다.
사실 하느님께서는 시련을 통해서도 우리를 복 받을 사람으로 만들어 줍니다.
아니, 오히려 시련을 통해서 복을 내려주기도 하십니다.
그러니 ‘봉헌의 삶’, ‘축복의 삶’은 어려움과 시련이 없는 생활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축복하시는 그분의 뜻에 봉헌하고 사는 일일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반대를 받는 표징” (루카 2,34)
주님!
반대 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게 하소서.
비난받고 모욕당하기를 두려워하지 말게 하소서.
미움받을 용기를 주소서.
욕먹지 않으려 불의에 타협하지도 말게 하소서.
당신 때문에 기꺼이 반대 받을 줄을 알게 하소서.
나쁜 사람으로 취급당할 줄을 알게 하소서.
반대와 고통 속에서도 사랑할 줄을 알게 하소서. 아멘.
봉헌의 여정
-한결같은 하느님 중심의 삶-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오늘은 주님 봉헌 축일입니다.
주님 성탄후 40일째 되는 2월2일 성모님께서 모세의 율법에 따라
성전에서 아기 예수님을 하느님께서 봉헌하는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는 이날을 ‘축성 생활의 날'로 제정하여
특히 주님께 자신을 봉헌한 수도자들을 위한 날로 삼았습니다.
오늘 성전에서 봉헌되는 주님의 모습을 말라키 예언자는 다음과 같이 묘사합니다.
그대로 오늘 봉헌 축일 미사전례 은총을 보여줍니다.
“너희가 찾던 주님, 그가 홀연히 자기 성전으로 오리라.
너희가 좋아하는 계약의 사자, 보라, 그가 온다.
그는 은제련사와 정련사처럼 앉아, 레위의 자손들을 깨끗하게 하고,
그들을 금과 은처럼 정련하여, 주님에게 의로운 제물을 바치게 하리라.”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주님은 우리의 봉헌을 날로 새롭게 함으로
말 그대로 봉헌의 기쁨을, 봉헌의 행복을 살 수 있게 하십니다.
오늘은 주님의 봉헌 축일이자 수도자들은 물론
우리 믿는 이들 모두의 봉헌 축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봉헌의 축복에 대해 깊이 묵상할 수 있는 절호의 날입니다.
세상에 봉헌보다 아름다운 말마디는 없을 것입니다.
믿지 않는 이들은 봉헌이란 말마디의 깊은 의미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살지 않고는 결코 이해 할 수 없는 말마디가 봉헌입니다.
봉헌의 깊이는 하느님의 깊이이며 봉헌은 믿는 이들의 모두이자 삶의 의미이기도 합니다.
봉헌의 사랑, 봉헌의 기쁨, 봉헌의 행복, 봉헌의 축복, 봉헌의 아름다움,
봉헌의 자유, 봉헌의 평화 등 봉헌의 은혜는 끝이 없습니다.
그러니 이런 봉헌의 행복을 체험해 보지 못하고 아까운 인생 헛되이 마친다면
얼마나 억울하고 허전하고 쓸쓸하겠는지요!
봉헌의 삶에서 저절로 솟아 나오는 주님 사랑의 고백입니다.
“주님, 당신은 저의 모두이옵니다.
저의 사랑, 저의 생명, 저의 희망,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와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당신과 함께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하루이옵니다.”
봉헌의 삶을 통해 존엄한 품위의 인간 존재임이 잘 드러납니다.
오늘 축성생활을 맞아 한국 남자수도회 사도 생활단
장상협의회 회장 유덕현 아빠스의 담화문 중 주목되는 일부 내용을 인용합니다.
“요즘 나이 많은 수도자들이 수도회를 떠나는 일이 증가하고 있다.
전에는 이런 일이 수도회에 거의 없었다.
그들이 떠나는 이유 중 큰 하나는 자신의 존재가치를 느낄 수 없고,
수도회 안에서 쓸모없는 사람으로 취급받고 행복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 모두 하루하루, 날마다, 평생, 봉헌을 새롭게 하는 것이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참으로 내 소중한 성소를 날마다 가꾸고 돌보는 노력을 다해야 한다는 것이니
또한 영적훈련이요 영적전쟁에 속합니다.
한두 번 봉헌이 아니라, 하루하루 날마다 평생 하느님 중심의
‘봉헌의 여정’을 살아가는 우리들이니 매일이 봉헌 축일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봉헌의 절정은 죽음이요 언젠가의 갑작스런 거룩한 죽음의 봉헌이 아니라
하루하루 크고 작은 일상의 봉헌의 여정에 충실할 때
참으로 거룩하고 아름다운 봉헌의 죽음이라는 것입니다.
봉헌 축일이 되면 떠오르는 두 편의 시가 있습니다.
“당신이 꽃을 좋아하면
당신의 꽃이
당신이 별을 좋아하면
당신의 별이
당신이 하늘을 좋아하면
당신의 하늘이
되고 싶다
늘 당신의 무엇이 되고 싶다”-1998.12.25.
늘 주님이신 당신의 무엇이 되고 싶은 목마름과 배고픔이, 갈망과 열망이,
마르지 않는 봉헌의 샘이자, 지칠 줄 모르는 성소의 원동력이 됩니다.
얼마 전 세상을 떠난 어느 자매님이 살아생전에
작은 꽃 한 송이를 선물했을 때 드린 짧은 자작시도 잊지 못합니다.
“꽃이
꽃을 가져오다니요?
그냥 오세요.
당신은
꽃보다 더 예뻐요!”
삶자체보다 더 좋은 봉헌은 없습니다.
사랑하는 좋은 사람은 빈손으로 와도 반갑듯이 날마다 사랑의 봉헌의 삶을 사는 분들이라면
하느님께는 그 삶자체로 최고의 봉헌이 될 것입니다.
바로 그 봉헌의 모범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을 성전에 봉헌하던
예수님의 부모인 마리아와 요셉이요, 의롭고 독실하게 살면서 봉헌된 삶에 항구하다
성전에서 아기 예수님을 만난 시메온입니다.
또 여든네 살이 되도록 과부로 지내면서도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기던 한나 예언자였습니다.
우리가 끝기도 때마다 바치는 참 아름다운 시메온의 노래는
정말 날마다 정성을 다해 바친다면 선종의 죽음을 맞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타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
새삼 우리 베네딕도회 정주 영성이 참 반갑고 고맙습니다.
바로 정주의 삶은 봉헌의 삶, 성화의 삶이요, 정주의 여정은 봉헌의 여정, 성화의 여정이요,
정주의 축복은 봉헌의 축복, 성화의 축복이기 때문입니다.
하루하루 정주의 삶, 봉헌의 삶, 성화의 삶이 깊어 가면서
우리 모두 날로 주님을 닮아감으로 참나의 실현도 이뤄지겠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 말미의 묘사처럼 봉헌의 축복은 예수님의 성장 과정을 통해서도 분명히 드러납니다.
믿는 이들의 자녀가 모두 이랬으면 좋겠습니다.
“아기는 자라면서 튼튼해지고 지혜가 충만해졌으며,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봉헌의 축복은 끝이 없습니다.
그러니 끝까지, 한결같이, 살아있는 그날까지, 날로 주님을 닮아가면서
참나의 실현을 이뤄주는 정주의 여정, 봉헌의 여정, 성화의 여정에 항구하도록 합시다.
바로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전례 은총이 우리 봉헌의 여정에 결정적 도움이 됩니다.
끝으로 봉헌생활을 압축한, 늘 바쳐도 늘 새로운 제 좌우명 기도로 강론을 마칩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일일생(一日一生), 하루를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평생처럼 살았습니다.
저희에겐 하루하루가 영원이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살았고 내일도 이렇게 살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아멘.
주님의 구원을 제 눈으로 보았습니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
오늘은 주님 봉헌 축일이다.
맏배는 모두 하느님께 바쳐야 한다는 율법을 지키는 것은
언제나 하느님 앞에 먼저 우리의 모든 것을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살아야 함을 가르치고 있다.
마리아께서 예수님을 성전에 봉헌하신 행위는 바로 우리에게도 좋은 교훈이다.
우리의 삶 속에서 작은 것이나 큰 기쁨, 심지어 아픔까지도
그분 앞에 겸손하게 바칠 수 있어야 한다.
거기에서 우리는 더욱 큰 기쁨을 누릴 수 있다.
우리가 하느님께 그 영광을 돌려드리지 못하면,
그 기쁨은 오래가지 못하고 무엇 때문에 그렇게 하는지 의미마저 잃게 될 것이다.
성모님과 요셉은 아기 예수를 성전에서 봉헌하신다.
율법에 “씨를 받아”(레위 12,2 칠십인 역) 아이를 낳은 여인은 부정한 몸이 되었으므로,
일정 기간이 지난 뒤에 낳은 자식과 함께 하느님께 희생제물을 바쳐야 깨끗해진다고 한다.
이 율법과 “태를 열고 나온 사내아이는 모두 주님께 봉헌해야 한다.”(23절)는 율법을 따르기 위함이었다.
의인 시메온은 아직 아기를 보고서도, 위대한 신성을 지니신 분임을 알아보았다.
시메온은 그분을 마음으로 보고 아기가 누군지 알아보았다.
그리고 동정녀에게서 태어난 하느님의 아들을 품에 안고 기도했다.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29-30절)
그 아기는 믿지 않는 유대인들은 쓰러지게 하고 믿는 다른 민족들은 일어나게 하실 분이다.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34절)
십자가가 바로 그 반대를 받는 표징이다.
구세주의 모든 것이 반대를 받고 있다.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속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35절)
마리아는 당신의 평생 아드님 때문에 많은 고통을 겪으셨다.
그리고 아드님께서 수난을 당하실 때 모두 겪으셨다.
하느님의 아들이신 아드님이 죄인으로 몰려 죽어가는 모습을 보았을 때,
어머니의 가슴은 칼에 꿰 찔리듯 아마 그 이상으로 아팠을 것이다.
시메온의 뒤를 이어 여 예언자 한나가 등장한다.
한나 역시 성전에서 봉헌되는 구세주 아기 예수가 누구신가를 알아보고
기뻐하며 다른 이들에게 그 아기에 대하여 증언하였다.
한나는 일찍이 사별하였지만, 성전에서 일생을 봉사와 기도로써 살 수 있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한나는 인류를 구원하러 오시는
구세주 아기 예수를 두 눈으로 볼 수 있는 기쁨을 맛보게 된 것이다.
나이를 먹고 기운이 없어져도 오늘 복음의 한나처럼 믿음 안에서
주님께 봉사하며 기도하는 속에서 구세주 그리스도를 찾고 만나는 삶을 살 수 있어야 한다.
하느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
반영억 라파엘 신부
오늘은 성모님께서 모세의 율법대로 정결례를 치르시고
아기 예수님을 성전에서 하느님께 봉헌하신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모세의 율법은 “태를 열고 나온 사내아이는 모두 주님께 봉헌되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봉헌은 하느님께서 주신 모든 것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온전히 쓰임 받기를 원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을 섬기는 일에 봉헌되었듯이
우리도 매 순간 자신을 주님께 봉헌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며 우리를 위한 주님의 사랑에 감사하고,
제단의 초를 바라보며 자신을 불태워 빛을 밝혀야 하는 사랑의 응답을 일깨워야 합니다.
십자가를 사랑하면 할수록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되고,
우리를 위해 모두를 내어주신 그분처럼 행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초는 자신을 녹여야 빛을 발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자신을 내어놓는 희생과 헌신을 통하여,
더 큰 사랑을 통하여 세상은 새롭게 될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사는 시메온 이라는 사람은 의롭고 독실한 사람으로서
‘주님께서 약속하신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않으리라’는 성령의 알림을 받았고,
이스라엘에 내려질 위로, 곧 메시아가 가져다줄 구원을 기다렸습니다.
많은 예언자들이 메시아, 구세주가 장차 오리라고 선언하였지만,
시메온은 메시아를 직접 보았습니다.
이사야서를 보면
“주님께서 모든 민족들이 보는 앞에서 당신의 거룩한 팔을 걷어붙이시니
땅끝들이 모두 우리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이사52,10).고 기록하고 있는데
바로 이 예언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시메온은 의롭고 독실하였고 흔들리지 않고
끝까지 기다릴 줄 알았으며 마침내 주님을 직접 뵈었습니다.
시메온은 성령께 순명하였기에 성령께 이끌려 성전으로 들어갔고
아기 예수님을 두 팔에 받아 안고 하느님을 찬양할 수 있었습니다.
시메온은 기다림의 열매 앞에서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안히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으로,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루카2,29-32).하고 고백하였습니다.
이 고백은 세상의 빛이신 주님을 만났으니, 이제는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옛말에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도 주님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을 간직하고,
희망하는 대로 살아감으로써 ‘죽어도 여한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백 년을 살든 천년을 살든 중요한 것은 하느님을 깊이 알아서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신앙의 목적도 바로 구원입니다. 영원한 생명의 나라에 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세상의 권력과 부가 아니라 주님을 차지해서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는 삶을 살아야 하고,
하느님의 나라에 대한 열망이 있다면 열망이 있는 만큼
하느님의 뜻에 걸맞은 삶으로 기다림을 간직해야 합니다.
“사람이 하느님에게 바칠 제물은 감사하는 마음이요,
사람이 지킬 것은 지존하신 분에게 서원한 것을 갚는 일”(시편50,14).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봉헌은 우리의 봉헌을 재촉하고 있으며 그 봉헌은 삶의 자리에서 이루어집니다.
의롭고 독실하게 살아온 시메온은 성령과 함께 기다림의 삶을 살아왔고
그 안에서 위로와 구원이 이루어졌으니,
지금 내 삶의 자리가 바로 천상과 연결되고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 줍니다.
천상을 갈망하는 만큼‘지금, 이 순간’을 잘 살아야 합니다.
‘지금, 이 순간’이야말로 마지막 기회일 수 있고,
내가 살고 있는 삶의 자리가 구세주가 찾아오는 자리이며,
그 자리를 가꾸는 것은, 우리 각자의 몫입니다.
지금 삶의 자리에서 이 순간을 사랑할 수 있기를 희망하며
날마다 순간마다 주님으로 만족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형제 여러분, 내가 하느님의 자비에 힘입어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느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이것이 여러분이 드려야 하는 합당한 예배입니다”(로마12,1).
“예수님을 통하여 언제나 하느님께 찬양 제물을 바칩시다.
그것은 그분의 이름을 찬미하는 입술의 열매입니다”(히브13,15).
온 마음으로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도구가 될 수 있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최정훈 바오로 신부
주님 봉헌 축일인 오늘 교회는 성전에 봉헌되신 예수님을 기념하고,
특별한 방식으로 주님께 자신을 봉헌하며 축성 생활을 하는 이들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더불어 세례와 함께 주님의 자녀가 된 모든 그리스도인
또한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하여야 함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봉헌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봉헌은 단순히 어떤 결심이나 서원과는 다른 더 근본적인 행위입니다.
결심은 어떤 일을 하겠다고 앞서 생각하는 것입니다.
물론 하느님을 향하려는 결심도 있지만,
결심이라는 행위 자체는 결심한 것을 향하여 ‘나’를 잘 가다듬고,
결심한 바를 실천으로 옮길 ‘나’에 대해서 생각하면서 ‘나’ 자신에게 집중합니다.
그러나 봉헌은 ‘나’에게서 벗어나, ‘봉헌 받는 분’에 집중하는 것이고,
마음이 ‘나’에게서 떠나 ‘다른 분’에게로 넘어가는 것입니다.
서원은 자신에게 엄격한 ‘의무’를 부과하면서, 하느님께 특정한 일을 하겠다는 ‘약속’입니다.
물론 그 약속의 궁극적 목적이 자신을 하느님의 사랑에 맡기는 봉헌이 될 수는 있겠지만,
서원 자체는 어떤 객관적인 일을 하는 ‘의무’를 받는 것입니다.
봉헌은 결심이나 서원처럼 사랑이 자라나고 확인할 수 있는 어떤 일을 하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봉헌은 직접 마음에서 마음으로, 인격에서 인격으로 사랑 자체가 자유롭게 흐르는 것입니다.
봉헌은 아주 순수하고, 아주 명료하며,
아주 진지하게 나를 다른 이에게 주는 사랑의 행위입니다.
(칼 라너, 『기도의 절실함과 그 축복에 대하여』 참조).
주님께 나 자신을 봉헌한다고 하면서도 ‘봉헌받는 분’이 아니라
봉헌하는 ‘나’ 자신을 더 중요하게 여기지는 않는지,
또는 ‘봉헌’의 행위보다 봉헌을 위한 개별적인 ‘수단’이나 ‘일’에
더 마음을 많이 쓰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제 눈이 주님의 구원을 보았습니다.
이승화 시몬 신부
성탄대축일 다음 사십 일째가 되는 날
우리는 주님 봉헌 축일을 보냅니다.
사십이라는 숫자가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는 정화의 시간이자
하느님 뜻을 내 안에 담아가는 시간임을 기억한다면
하느님께 봉헌한다는 의미를 생각하게 합니다.
세상에 창조된 인간은
그 자체로 축복받았습니다.
하지만 축복받은 인간임에도
자유라는 선물을 받았기에
더 의미로운 선택을 위해 성찰해야 합니다.
세상의 아름다움을 담기 위해서
이를 감당할 수 있는 그릇을 만들어 가야 합니다.
축복받은 인간이 축복을 담을 수 있도록
그리하여 축복을 전하는 통로가 되기 위하여
성찰하고 정화하는 시간을 거치게 됩니다.
영적 여정을 걸어가는 사람들만이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며 그분께 동참할 수 있습니다.
성탄의 기쁨을 함께했던 우리는
봉헌 축일을 통해 하느님 부르심을 돌아봅니다.
이를 위해 초를 축복하며
그리스도인의 삶이 바로 초와 같음을 깨닫게 됩니다.
스스로 빛을 내지만
이 빛은 하느님의 태양 빛을 닮고자 합니다.
빛을 내기 위해 자신을 태어나가지만
더 큰 사랑을 위해 자신을 사랑에 내어줍니다.
부족한 존재이지만
세상 안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는 빛이며
그리스도를 닮아 더 큰 사랑에 내어주는 삶
바로 봉헌된 이들의 자세이며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오늘 주님의 봉헌을 기념하며
부르심에 응답하는 우리의 자세를 성찰하는
그리하여 세상에 빛을 전하는
그런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출처: [시몬 신부의 신앙이야기] https://frsimon.tistory.com/1605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