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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2월 3일 연중 제4주간 토요일
제1독서 : 1열왕 3,4-13
복 음 : 마르 6,30-34
그때에 30 사도들이 예수님께 모여 와,
자기들이 한 일과 가르친 것을 다 보고하였다.
31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오고 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었던 것이다.
32 그래서 그들은 따로 배를 타고 외딴곳으로 떠나갔다.
33 그러자 많은 사람이 그들이 떠나는 것을 보고,
모든 고을에서 나와 육로로 함께 달려가 그들보다 먼저 그곳에 다다랐다.
34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2001년 뉴욕 세계무역 센터 빌딩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비행기 테러로 자그마치 2,996명의 사망자와 6,000여 명의 부상자가 발생했습니다.
바로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인 알카에다가 일으킨 911테러입니다.
이때 시민들은 많은 연기와 함께 무너져 내리는
빌딩 속을 나와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탈출했습니다.
그런데 탈출하는 이들의 흐름을 거슬러서
오히려 무너지고 있는 빌딩을 향해 역주행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경찰관, 소방관 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위험하지 않을까요?
아닙니다. 이들이 비록 전문적인 교육과 훈련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그들도 똑같이 위험합니다.
그러나 한 생명이라도 더 구하기 위해서 죽음이 있는 곳으로 역주행했던 것입니다.
예수님도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
고통과 죽음을 향해 달려가셨음을 떠올려 보았으면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도 단순히 살기 위해 도망치는 삶이 아닌, 진정한 생명을 위해
세상의 흐름에 역주행할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남들 다 하는 것이라면서 죄를 범하는 사람들과 똑같이 사는 것이 아니라,
죄를 피하고 사랑을 실천하면서 세상에 주님을 증거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단순히 순간의 만족을 위한 삶을 살아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 더 큰 가치를 따르는 삶, 그래서 주님과 함께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사실 우리의 나약함으로 그런 용기를 내기가 참 어렵습니다. 그래서 협조자가 필요합니다.
함께함으로 용기를 내어 주님께로 같이 나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뽑으셨습니다.
특별한 능력과 재주가 있는 사람이 아닌, 지극히 평범한 사람을,
어쩌면 보통 사람보다도 더 부족해 보이는 사람을 제자로 뽑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제자들과 함께하면서 가르치셨고 세상에 전교 활동을 보내기도 하셨습니다.
이렇게 사도들을 뽑으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예수님 혼자서도 충분히 모두 다 하실 수 있으셨을 텐데도
제자들을 뽑으시고 함께하신 이유는
우리 역시 함께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들은 함께하면서 세상의 흐름에 역행하면서,
생명을 구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우리도 주님을 따르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세상의 흐름에 역주행하는 용기를 가지고 있을까요?
주님의 주 관심사는 오로지 사랑이었습니다.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고 성경은 계속해서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우리의 주 관심사는 무엇인가요?
가엾은 마음인 사랑을 간직하는 사람은 세상의 흐름에 맞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주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모습임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습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은 '참된 목자'이신 예수님의 마음을 세 가지로 그리고 있습니다.
첫째는 지친 제자들을 향한 ‘배려의 마음’이요,
둘째는 몰려든 군중들을 향한 ‘측은히 여기는 마음’이요,
셋째는 양들을 가르치는 ‘스승의 마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파견받았던 사도들이 돌아오자,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외딴 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마르 6,31)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을 만큼 군중이 몰려왔건만,
예수님께서는 지친 제자들에게 ‘가서 좀 쉬어라’고 배려하십니다.
“쉬어라”는 이 말씀에서 '하느님께서는 하시던 일을 모두 마치시고 이렛날에 쉬셨다.
하느님께서 이렛날에 복을 내리시고 거룩하게 하셨다.'(창세기 2,3)는
창세기의 울림을 듣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쉼'은 하느님께서 창조된 모든 것에게 ‘복을 내려주시고’, ‘거룩하게 하셨음’과 같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쉬게 하고, 그들이 한 모든 일에 복을 내리고 거룩하게 하십니다.
그리하여 ‘쉼’ 안에서 당신이 바로 ‘주님’임을 알게 하시는 일입니다.
시편 작가는 말합니다.
“너희는 멈추고(곧 쉬고) 내가 주 하느님임을 알아라.”(시편 46,11)
또한 두 번씩이나 반복되는 “외딴곳으로 가서”라는 말씀을 들으면서, 우리는
“이제 나는 그 여자를 외딴곳 광야로 데리고 가서 다정히 말하리라.
~너는 나를 ‘내 남편’이라 부르리라.
~내가 너를 아내로 삼으리니, 네가 주님을 알게 되리라.”(호세 2,16-22 참조)는
호세아서의 울림을 듣습니다.
그러니 '외딴곳'에서 벌어질 일은 바로 이 일입니다.
당신을 낭군이라 부르게 되고, ‘주님’을 알게 되는 일입니다.
한편, 예수님께서는 피곤함에 지친 제자들은 쉬게 하시면서도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습니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과 같았기 때문입니다.(마르 6,34)
이는 민수기(27,15-17)의 표현을 연상시켜줍니다.
거기서 모세는 하느님 백성이 '목자 없는 양처럼'(민수 27,17; 1열왕 22,17) 되지 않도록
한 사람을 세워달라고 간청합니다.
목자의 주요 업무 중 하나는 양떼를 위한 음식을 마련하는 것이고,
모세는 광야에서 만나를 공급하고(탈출 16장),
엘리사는 백 명을 먹이기 위해 빵의 양을 늘렸듯이(2열왕 4,42-44),
예수님께서도 이제 그러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먹을 음식을 마련하기에 앞서,
먼저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기 시작하였습니다.(마르 6,34)
그들이 진정으로 굶주리고 목말랐던 것은
바로 ‘진리’인 생명의 말씀이었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양들을 '진리'로 인도하는 이가 바로 '참된 목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먼저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참된 양식’을 받아먹는 ‘양’이어야 합니다.
오늘 진정 우리가 그분의 ‘양’이라면,
우리를 ‘측은히’ 여기시는 그분에게서 ‘진리’인 말씀의 양식을 얻을 것입니다.
그리고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마르 6,31)
주님!
저를 외딴곳, 당신의 거처로 데려가소서.
당신 안에 쉬게 하소서.
그 쉼 안에서 사랑에 젖게 하소서.
당신 사랑을 알게 하소서.
그 사랑 안에서 당신을 낭군이라 부르게 하소서.
오, 주님!
당신만이 진정한 쉼이오니, 당신 사랑의 속삭임 안에 쉬게 하소서! 아멘.
이 혼돈의 시대, 우리는 얼마나 자주 봐왔습니까?
지혜가 결핍된 지식, 겸손이 사라진 학덕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극단적으로 양분화되고 복잡다단한 사회 속에 살아가면서
정말이지 우리에게 필요한 덕목이 한 가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지혜로움을 바탕으로 한 균형 잡힌 식별력입니다.
특히 우리 그리스도인들, 그중에서도 지도자들, 나이 든 사람들은
얼굴에는 자애로운 미소를, 가슴에는 지혜를 품고 살아가며,
이 무분별한 시대 균형추 역할에 충실해야 할 것입니다.
이 혼돈의 시대, 우리는 얼마나 자주 봐왔습니까?
지혜가 결핍된 지식, 겸손이 사라진 학덕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나라의 이 슬픈 현실을.
좋은 머리에, 강한 학구열, 그에 못지않은 출세욕에, 줄까지 잘 서 승승장구하며,
그래서 이 나라 전체를 쥐었다 놨다하는 집단 권력으로 자리매김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서 집단 지성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습니다.
기본적인 양심이나 상식, 예의범절도 없습니다.
오랜 세월 쌓아 올린 자신들의 견고한 성을 지키기 위해 파렴치한 일까지 마다하지 않습니다.
마치 먹잇감을 찾아다니는 하이에나 떼처럼 전락해 버렸습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 모두 선왕 다윗을 이어
이스라엘의 왕좌에 앉는 솔로몬이 보여준 태도를 눈여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느님께 제사를 드리러 기브온에 간 솔로몬의 꿈에 하느님께서 나타나셔서 물으셨습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하느님께서는 그 어떤 소원이라도 들어주실 기세입니다.
만일 제가 솔로몬이었다면, 현실적인 측면을 고려해서
주변 강대국들에게 당당히 맞설 강력한 군사력,
이를 바탕으로 한 천년 왕국을 청했을 것입니다.
그도 아니라면 왕으로 살아가는 동안 백성들 모두 굶주리지 않고,
전쟁도 겪지 않고 평화로운 태평성대를 청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솔로몬의 대답을 보십시오. 참으로 지혜롭습니다.
뿐만 아니라 지극히 겸손하기까지 합니다.
“저는 어린아이에 지나지 않아서 백성을 이끄는 법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니 당신 종에게 듣는 마음을 주시어 당신 백성을 통치하고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솔로몬의 대답이 너무나 마음에 흡족하셨던 주님께서는 더 큰 것을 선물로 주십니다.
“네가 그것을 청하였으니, 곧 자신을 위해 장수를 청하지도 않고,
자신을 위해 부를 청하지도 않고, 네 원수의 목숨을 청하지도 않고,
그 대신 이처럼 옳은 것을 가려내는 분별력을 청하였으니,
자, 내가 네 말대로 해 주겠다. 이제 너에게 지혜롭고 분별하는 마음을 준다.
또한 나는 네가 청하지 않은 것, 곧 부와 명예도 너에게 준다.”
오늘 이 땅의 지도자들과 너무나 달라 슬픈 마음까지 듭니다.
오늘 우리는 과연 주님께 무엇을 청하고 있는지 깊이깊이 성찰해 볼 일입니다.
그들은 목자 없는 양과 같았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31절)
제자들은 예수님께 파견을 받고 나갔다가(6,6-13) 돌아와서
그들이 한 일을 보고하고 있다.
그때 예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한적한 곳으로 가서
조용하게 쉬면서 그 보고를 듣고 싶으셨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조용히 쉴 시간이 없었다.
군중들이 많아서 그들은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었다.
주님 안에서는 항상 휴식이란 없음을 보여준다.
하여간에 사도들은 다시 배를 타고 따로 한적한 곳을 찾아 떠나지만(32절),
군중들은 그 배가 이미 어디로 갈 것을 알고는 육로로 예수님의 일행을 앞질러 그곳으로 갔다(33절).
예수께서 배에서 내리시면서 그 군중들을 보시고는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여러 가지로 가르쳐 주셨다(34절).
그들을 불쌍히 여기신 것은 “목자 없는 양과 같은”(34절)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우리는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다.
신앙인의 삶이란 조용한 곳에서 하느님 앞에 머무르는 것과
사람들 속에서 사람들에게 봉사하는 것이
서로 엇갈리는 삶을 조화롭게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믿음을 가졌다고 하면서 많은 사람이 잘못하는 것은
하느님 앞에 조용히 쉬며 머무르는 시간을 가지지 않기 때문이며,
또한 예수님과 함께 휴식하며 받을 힘을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들이시지만 가끔 하느님 아버지와의 조용한 시간,
즉 기도의 시간을 자주 가지셨던 것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 기도를 통하여 더욱 아버지와 하나임을 확인하시고
기도를 통하여 당신의 사명을 더 잘 완수하실 수 있었다.
우리에게도 이러한 시간이 필요하다.
그분과의 일치를 체험함으로써 더욱 다른 사람들에게 훌륭한 가르침을 전할 수 있을 것이다.
세상살이 바쁜 속에 그럴만한 시간이 어디 있느냐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어디서나 몸과 마음의 휴식을 주님 앞에 가질 수 있는 여유는 가져야 한다.
우리가 기도를 게을리한다면 활동의 의미를 잃을 수 있다.
이때 우리의 삶은 달라질 수 있으며 주님은 그때 우리에게 필요한 지혜와 힘을 주실 것이다.
이로써 영적인 갈망에 젖어있는 사람들에게 진정한 삶의 지혜를 가르쳐줄 수 있을 것이다.
참 휴식은 주님과 더불어 사는 것입니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
사람은 때때로 ‘쉬고 싶다’ 는 생각을 합니다.
지금 하는 일과 환경에서 벗어나 자유를 누리고자 합니다.
그런데 맘먹고 쉬려고 하면 꼭 일이 생기고 맙니다.
그러니 때로는 지금 있는 자리를 떠나는 것이 필요하고,
어느 특정한 날을 정하여 쉬는 것보다, 일상 안에서 쉬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도 좋지만,
지금 하는 일을 즐기는 법을 터득해야 오래도록 지치지 않을 것입니다.
20세기 위대한 별이었던 슈바이처는
“현대인이 하루에 단 몇 분이라도 밤하늘을 쳐다보며 우주를 생각한다면
현대 문명이 이렇게 병들지는 않았을 것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창조를 마치시고 이렛날에 쉬셨으며
이렛날에 복을 내리시고 그날을 거룩하게 하셨습니다(창세2,2-3).
휴식은 꼭 필요합니다. 재충전의 기회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이 바쁘게 지내다가
휴식을 취하기 위해서 배를 타고 외딴곳을 찾아 떠났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예수님과 제자들이 가는 곳에 이미 도착하여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배를 타고 이동하였는데 모든 고을 사람이 육로를 통해 이동하였다는 것은
어떤 어려움도 기꺼이 감당하였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동시에 그들의 적극적인 태도를 엿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고을에서 나왔다는 것은 자기들의 삶의 현장을 떠났다는 것을 말해 주는 데
그만큼 예수님의 인기가 좋았습니다. 스스로 내 세워서가 아니라 사람들이 그분을 둘러쌌습니다.
바깥에 있으려 해도 사람들이 그분을 중심에 모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보시고 측은한 마음이 드시어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습니다.
가르쳐 주셨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고기를 잡아 일시적으로 먹여 주시는 것이 아니라
고기를 잡는 방법을 알려주셨다는 것으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가르침을 통해서 영적인 갈증을 채우게 된다는 것입니다.
세례를 받으면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난 것처럼 지내시는 분이 많은 데 사실은 이제 시작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고 또 부족한 것은 다시 배우고 …….
주님께서 가르쳐 주셔야 할 것도 많고 우리가 배워야 할 것도 많습니다.
한 번에 모든 것을 이룰 수는 없는 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주변에 사람이 많아서 너무 고달프셨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사랑이시고 우리에 대한 사랑이 크시기에
모든 수고로움을 수고로움으로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측은한 백성과 함께할 수 있음이 오히려 기쁨이요, 행복입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사랑에 불타는 영혼은 조금도 피로하지 않고
또 남을 피로하게 만들지도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원동력은 외딴곳에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에 들어가 밤을 새우시며 기도하셨고(루카6,21),
이른 새벽, 동트기 전 외딴곳에서 당신을 파견하신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는 시간을 결코 소홀히 한 적이 없으십니다.
주변에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되셨던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바쁘다는 핑계로 기도를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너무 바빠서 기도하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진정한 휴식은 주님과 더불어 사는 것입니다.
무슨 일을 해도 내 일을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일을 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11,28).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지도자들은 물론 사람들의 필수 덕목
-섬김과 배움, 자비와 지혜-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제가 참 좋아하는 우리말 둘이 “섬기다”와 “배우다”이고
명사형으로 하면 “섬김”과 “배움”이 되겠습니다.
비단 지도자는 물론이고 참된 삶을 지향한다면 두 기본적 삶의 요소가 섬김과 배움일 것입니다.
둘은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하나로 연결되었음을 봅니다. 섬기는 것도 배워야 한다는 것이지요.
섬김뿐 아니라 기도도 사랑도 믿음도... 모두가 평생 배워야 할 것들입니다.
그래서 깨달은 겸손한 이들은 기도든 믿음이든 사랑이든 늘 초보자라고 고백합니다.
농사짓든 이들을 대해도 늘 초보자라는 말을 듣습니다.
그러니 무엇이든 배우는, 공부하는 겸손한 자세가 기본임을 깨닫습니다.
말 그대로 “배움의 여정” 중에 필요한 모든 덕목을 배우는 우리들입니다.
결국 배우다 세상을 떠날 것입니다.
우리의 사부 성 베네딕도 역시 자신의 공동체를 주님을 섬기는 학원으로 정의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을 섬기는 학원을 설립해야 하겠다.
우리는 이것을 설립하는데 거칠고 힘든 것은 아무것도 제정하기를 결코, 원치 않는다.
그러니 결점을 고치거나 애덕을 보존하기 위하여 공정한 이치에 맞게 다소 엄격한 점이 있더라도
즉시 놀래어 좁게 시작하기 마련인 구원의 길에서 도피하지 마라.”(머리45-48)
참 아름다운 규칙서 내용으로 수도생활의 핵심을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을 섬기는 학원인 배움터라는 것이요,
여기서 평생 주님과 이웃을 섬기는 것을 배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섬김과 배움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참으로 마음의 눈만 열리면 섬김의 삶을 추구하는 자들에게는 온통 배움의 대상입니다.
학원보다는 순수한 우리말 배움터가 좋습니다.
마산 트라피스트 수도원 정문에는 “주님을 섬기는 배움터”로 쓰여 있습니다.
배움터, 쉼터, 샘터, 일터 순수한 우리말이 참 정겹습니다.
주님의 배움터, 쉼터, 샘터같은 미사시간입니다.
참으로 섬기는 지도자는 물론 사람들에게 기본적으로 배워야 할 바
두 필수적 자질이 자비와 지혜일 것입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자질인 자비와 지혜를 고스란히 이어받은 오늘 복음의 예수님입니다.
예수님뿐 아니라 불자들도 부처님의 자비와 지혜를 말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면 예수님의 자비와 지혜가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한 실재의 양면임을 봅니다.
참으로 자비로운 연민의 사람이라면 저절로 지혜로운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자비심에서 샘솟는 지혜이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이 예수님께 모여와 자기들이 한 일과 가르친 것을 다 보고했을 때
예수님의 분별의 지혜가 빛을 발합니다.
사도들의 피곤한 처지를 한눈에 직시한 배려와 공감의 자비하신 주님은
지혜롭게도 이들에게 관상적 휴식을 명하십니다.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일터에서 외딴곳의 쉼터로 옮기라는 것입니다.
관상과 활동의 균형과 조화는 건강한 영적 삶을 위한 리듬입니다.
참으로 참된 영적 삶을 위해 구체적으로 외딴곳의 장소와 시간 마련은 필수입니다.
이어 전개되는 내용이 또 흥미롭습니다.
외딴곳에 도착하니 이미 영육으로 굶주린 이들이 장사진을 치고 있는 것입니다.
착한목자 주님은 유연하게 현실의 필요에 임하시니 새삼 사랑은 분별의 잣대임을 깨닫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
그림 같은 장면이 눈에 선합니다.
군중들의 절박한 요구에 응답해 휴식을 포기하고 이들의 구원 활동에 전념하는
자비로우시고 지혜로우신 주님입니다.
가엾이 여기는, 측은히 여기는, 불쌍히 여기는 연민의 마음,
자비심은 그대로 하느님의 마음,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흡사 오늘 복음의 구조가 미사전례를 상징하는 듯합니다.
말씀의 전례 후에 이어질 오늘 복음에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은
그대로 성찬전례를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새삼 하느님의 자비와 지혜의 결정체 같은 최고의 선물이 성체성사 미사임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를 주님을 닮은 섬김과 배움의 겸손한 사람들로,
또 자비와 지혜의 사람들로 만들어 줍니다.
오늘 열왕기 상권에서 지금까지 맹활약했던 다윗 임금은
역사 무대에서 퇴장하고 그 후계자로 솔로몬이 등장합니다.
하느님께서 다윗에 대해 베풀었던 애정이 그대로 솔로몬에게 계속되니
이것은 순전히 부왕 다윗 덕분입니다.
주님의 솔로몬을 향한 물음은 그대로 우리를 향한 물음처럼 들립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과연 무엇이라 대답하겠습니까?
솔로몬의 대답은 통쾌할 정도로 정확했고 지혜로웠습니다.
“당신 종에게 듣는 마음을 주시어,
당신 백성을 통치하고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경청과 분별의 지혜를 청하는 것이 주님 보시기에 좋았고,
이어 주님은 엄청난 축복을 약속하십니다.
자신을 위해 장수를, 부를, 원수들의 목숨을 청하지도 않고
분별력을 청한 솔로몬에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솔로몬에 대한 편애가 지나칠 정도입니다.
“나, 내가 네 말대로 해 주겠다. 이제 너에게 지혜롭고 분별하는 마음을 준다...
나는 네가 청하지도 않은 것, 부와 명예도 너에게 준다.
네 일생동안 임금들 가운데 너 같은 사람이 없을 것이다.”
솔로몬이 참으로 지혜로웠다면 부와 명예는 단연코 사양했을 것입니다.
부와 명예의 유혹에서 벗어날 사람은 거의 없기 때문이며
이들은 사람들을 타락과 부패로 이끌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전개되는 솔로몬의 삶에서 보다시피 그의 타락과 부패로 인해
다윗이 이루어 전해준 성취는 서서히 무너지고 물거품이 되고 맙니다.
“세우기”는 평생이지만 “무너지기”는 순간입니다.
만약 제가 솔로몬이었다면 하나가 아닌 넷만 청했을 것입니다.
주님의 한결같은 “섬김과 배움”의 겸손한 자세,
주님의 한결같은 “자비와 지혜”의 자질만 청했을 것입니다.
섬김과 배움, 자비와 지혜, 이 넷이야말로 지도자들은
물론 참사람이 되기 위한 우리 모두의 기본적, 필수적 덕목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날로 주님을 닮아
섬김과 배움, 자비와 지혜의 사람들로 변모시켜 주십니다. 아멘.
그들은 목자 없는 양들 같았다.
이승화 시몬 신부
하느님과 인간은 근본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하지만
우리가 가진 힘은 한계가 있죠
그래서 더 중요한 것을 식별해서 선택해야 합니다.
솔로몬이 청한 지혜가 바로 이 역할을 합니다.
만약 지혜를 청하지 않으면
모든 일에 바쁘게 활동하다가
결국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기 쉽습니다.
더 좋은 일을 하고 있지만
죄책감을 얻으며 더 하지 못함에 아파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외딴곳에 가서 쉬라고 하십니다.
주님께서는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지만
제자들에게는 쉬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알려줍니다.
이렇게 신앙생활은 성실함도 중요하지만
적절한 휴식이 없으면 안 됩니다.
자신의 한계를 잘 알고
더 중요한 것을 선택하여 행동할 수 있을 때
우리는 하느님과 함께 기쁜 소식을 전할 수 있습니다.
솔로몬이 지혜를 청한 것처럼
우리 역시 하느님께 지혜를 청하면 좋겠습니다.
해야 할 일을 하되
완급조절을 통해 더 기쁜 일을 할 수 있는
그런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출처: [시몬 신부의 신앙이야기] https://frsimon.tistory.com/1605
박 마리안젤로 수녀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마르코 6,31)
전교여행을 다녀와 오고 가는 사람이 많아 음식을 먹을 겨를도 없던 사도들에게
예수님을 외딴곳으로 가서 쉬자고 말씀하십니다.
지친 당신의 제자들을 배려하는 주님의 마음입니다.
그렇게 배를 타고 떠났지만,
배에서 내리자, 육로를 달려 먼저 도착해 있는 많은 군중이 있었고,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려 그들은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습니다.
수도자의 삶을 살며 얼마나 많은 순간
저에게 주어진 상황과 사람을 마주할 때,
연민의 마음에 앞서 저의 평안을 생각한 제 자신이 부끄럽습니다.
오늘 복음은 이렇게 끝나지만, 예수님의 이 가엾은 마음은
결국 오천명을 먹이신 기적으로 이어집니다.
저 또한 저를 찾는 이들을 먼저 마음에 담는다면...
그들과 저 자신에게 주님은 기적의 순간을 선물해 주실 것을 믿습니다.
출처 : 툿찡포교베네딕도수녀원 http://www.benedictine.or.kr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