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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생명 말씀(2020.6.21.) 말씀/ 빌립보 4:11-12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행복 "11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12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지난 주 오행언 목사님이 와서 주일 설교를 해주셨습니다. 과거에는 양 이었고, 동역자 였는데 이렇게 모교회에 와서 설교를 하는 것을 들으니 감회가 새로웠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가? 제목으로 설교을 하였지만 핵심은 복음의 본질은 자유이고 행복이라는 것입니다. 여러 이야기를 들으며 저는 주안에서 누리게 된 자유와 행복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사실 ‘자유’와 ‘행복’은 믿는 자가 누릴 수 있는 최고 의 특권입니다. 어떤 형편에 서 있던 그리스도인은 스스로 자신에게 이렇게 질문해보아야 합니다. “나는 정말 예수님 때문에 자유한가? 나는 정말 행복한가?” 옥에 갇혔어도 자유하고 죽을 것 같은 가난 속에서도 행복하다고 할 수 있는가? 이에 사도 바울은 어떻게 대답했습니까? 사도 바울은 Yes!입니다. 실제로 그는 복음을 전하다 옥에 갇혔지만 감사를 하였고, 실라와 함께 옥중에서 찬송을 했습니다. 말씀 외에는 매이는 것이 없다고 고백을 했습니다. 그는 사슬에 묶였으나 풀렸으나 언제나 자유했습니다. 고린도 후서 11: 23-27장을 보면 그리스도를 인해서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번 죽을뻔하고,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번 맞았고, 세번 태장으로 맞고 한번 돌로 맞고 세번 파선하는데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번 굶고 춥고 헐벗기도 하였지만 그는 언제나 주 안에 자유했습니다. 주님이 주신 자유를 아무도 빼앗을 수 없었습니다. "11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12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빌립보 4:11-12) 이 두 귀절의 말씀을 읽으면 바울이 얼마나 자유한 자이며 또한 행복한자신가를 느낄 수 있습니다. 자족했다는 것은 만족했다는 것입니다. 찢어지게 가난한 삶이라도 부요한 삶이던지. 아니며 비천한 자가 되던지 풍부함에 이르던지 상관없이 자유하고 행복했다는 고백입니다. 70년대 가난하던 대학시절 저는 성경공부하며 예수님을 만나고 부르심의 길을 갔습니다. 광주에서 1년만 다니다 다시 서울로 올라가 신학을 하려했지만 1:1 목자님의 사랑과 관심에 붙잡혀 그냥 눌러 앉았습니다. 여기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그 때 자취를 하였는데 형님이 보내주시는 적은 생활비로 매끼니를 걱정하며 궁핍한 생활을 하였습니다. 나중에는 거의 센타 중심으로 생활을 하였습니다. 매기 라면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밥에 김치 하나 그리고 아침이 되면 새벽기도, 센타 청소, 연탄 갈기, 캠퍼스 피싱, 1:1 공부, 리더미팅 쉴 틈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처음 센타에 오는 사람은 상담도 해주었습니다. 한번은 전주에서 가출을 한 한 자매가 선교 센타 간판을 보고 스스로 들어와서 상담을 요청했습니다. 어떻게 오셨냐고 하니 선교회 간판을 보고 들아왔답니다. 제가 센타를 지키고 있었기에 안으로 들어오라해서 상담을 해주었습니다. 그런데 이야기가 다 끝나고나서 저보고 친구해줄 수 있냐고 물었습니다. 센타에서는 목자와 양 관계 인데 친구는 좀 묘했지만 그래도 친구하면서 도와주면 되지 하고 그러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또 만나기로 하고 헤어졌습니다. 그런데 밖에서 자매를 만나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눈들이 의식되었습니다. 당시에 얼마나 눈들이 많은지 처음부터 길에서 이옥기 목자님에게 들키고 말았습니다. 대충 양이라고 말하고 다방에서 간단히 만나 이야기하고 헤어졌습니다. 당시는 핸폰도 없어서 잠깐 누구를 만난다는 것도 쉽지 않았습니다. 얼마 후 그 자매는 전에 본 공무원 시험 합격통지를 받고 다시 전주로 가게 되었고 터미널까지 바래다주었습니다. 그리고 편지만 교환하였습니다. 전주에 한번 놀러 오시면 제가 안내를 해준다는 내용의 편지가 왔습니다. 한번 가보고 싶은데 달력을 꺼내 시간표를 보니 도저히 빠져나갈 시간이 없었습니다. 일요일은 주일 예배 아침부터 준비하고, 토요일은 언제나 리더 미팅이 있고, 평일은 학교 수업이 있고, 간간히 공휴일이 있긴 했지만 그런 날은 어김없이 소풍이나 운동회 등 교제스케줄이 꽉 짜 있었습니다. 더군다나 그 때 4학년 최고 리더였으니 이유 없이 빠지는 것도 불가능하였습니다. 그러다가 힘들다는 내용의 편지가 왔지만 아무런 반응 없는 저에게 실망했는지 그 후 모든 소식이 뚝 끊어지고 말았습니다. 그 때 나의 행동인 주님을 버리고 세상 욕망을 취하던지, 욕망을 버리고 사명의 길을 다던지 둘 중에 하나를 해야 하는데 주님을 버릴 수 없었습니다. 아쉬웠지만 그것으로 끝이었습니다. 사명의 길이란 주님 때문에 욕망을 버리고, 낮아짐을 택하고, 가난을 택하고, 주님 때문에 비천에 처하지 않으면 안 되는 길이었습니다. 당시 사도바울의 고백이 얼마나 위로가 되고 힘이 되었는지 갈등을 하면서도 저는 사명을 끝까지 붙들 수가 있었습니다. 저는 아에 짐을 센타로 옮겨서 센타 중심 먹고 자고 먹고 자고 했습니다. 그리고 소감을 발표 했습니다. 모든 꿈을 버리고 주님의 삶을 닮고자 바울처럼 살고, 장막치는 아브라함처럼 살겠다고 했습니다. 너무 추워서 큰 비닐 봉투를 구해서 그 속에 들어가서 잠을 자다 습기 때문에 벌떡 일어나던 일, 매일 삼계탕을 매일 끓여 먹던 일...의아하는 표정들입니다. 아니 목자가 매일 삼계탕이라니. 오해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삼양 라면에 계란을 넣은 것을 삼계탕이라 합니다. 모두 배꼽을 잡았습니다. 그런데 그 자매 이야기는 부끄러워서 목자 체면에 도저히 쓸 수가 없었습니다. 속으로 회개하고 나중에는 믿음의 결혼에 무조건 예스했고. 제주도 개척 방향에 allways yes로 순종하였습니다. 제주 가서도 화장터를 개조한 센터에서 아이들 기르면서 열심히 제자 양성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지금 스텝 인 마가 목자, 헝가리 안드레 선교사님, 선교헌금 10만원식 후원하는 오요한 집사님, 카스토리 종종 보는 이두인 형제가 그 당시 양들입니다. 양들과 함께 장막 생활을 하면서 함께 식사를 하고, 함께 기도 하고, 구보를 하며 의욕으로 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7년 째 모든 것을 내려놓고 무안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또 오토바이에 사모 아이들 둘을 싫고 젊은 열정을 불태웠습니다. 그 시간이 지내놓고 보니 30년이 지났습니다.
그러나 그동안 실제적 삶속에서는 오늘 말씀이 이야기하는 그 '자유', 그 '행복'을 잡기까지는 수많은 날들을 갈등과 고민해야 했고, 제도와 율법과 자기 생각의 틀에 갇혀서 힘든 날을 많이 보내야 했습니다. 이제서야 깨닫지만... 그 자유 행복은 내가 결단하고, 내가 희생함으로 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역사가 일어나고 양들이 자라는 것을 볼 때는 자유하고, 행복을 맛보았지만 조금만 후퇴하고, 무너질 때는 여지없이 평강이 깨지고 속으로 절망과 좌절을 하였습니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참된 자유와 평강 행복은 모든 율법의 요구를 완성 하시고 내 모든 죄 값을 치루신 주님 안에서 누리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자유와 행복은 그 무엇으로도 빼앗을 수 없는 것 이고, 주님이 주신 것이기에 불변한 것이라는 것 이었습니다. 우리는 세상 모든 것을 얻어도 주님을 떠나서 자유하지 못합니다. 로또 확률에 당첨되어 많은 돈을 쥐었어도 행복할 수 없습니다. 나를 중심으로 할 때 그렇습니다. 내 열심 내 노력 내 모든 것이 많은 것을 성취했어도 그렇습니다. 누가복음의 탕자의 비유는 우리가 어떻게 자유와 행복을 누릴 수 있는가를 잘 보여줍니다. 어떤 아버지에게 두 아들이 있습니다. 맏아들과 둘 째. 두 아들이 성격과 스타일이 달랐습니다. 둘째는 자유와 행복을 찾아 집을 떠납니다. 아버지에게 잡혀 산다는 것, 집안에 갇혔 있다는 것이 답답하고, 불행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는 미리 아버지의 재산 상속을 받아 먼 나라로 떠납니다. 목표는 한가지입니다. 자유롭게 마음대로 살며, 행복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막상 세상에 나가보니 그 어디 에서도 자유와 행복을 누릴 수 없었습니다. 세상은 그에게 아무것도 주지 않았습니다. 그의 돈을 탐내고, 그의 약점을 이용해서 궁핍할 때까지 부려먹었습니다. 돼지치는 일을 했지만 돼지가 주는 주엄열매도 주지 않았습니다. 완전 거지가 되게 만들었습니다. 반면 맏 아들은 그 풍족한 아버지 집에서 한 번도 명을 어김없이 성실히 살았습니다. 역시 자기 율법에 갇혀 자유가 없었고 열심히 하면서도 주어진 행복도 누리지 못했습니다. 두 아들의 비유는 자유와 행복은 환경이 아니라 우리 마음의 문제 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주안에서 나는 자유자이며, 행복자임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는대로 그렇게 사는 것 입니다. 물론 처음에는 불안 할 수 있습니다. 이래도 되는 것일까? 아무것 한 것도 없는데 행복해도 되는 것인가? 많은 문제들이 있는데 자유할 수 있는지? 의문도 들 수 있습니다. 집을 나갔던 탕자는 아버지의 품꾼이라도 써달라고 부탁해야지...(흑흑) 참회의 마음으로 돌아왔는데 아버지는 전혀 자신의 생각과 달랐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살아 돌아 온 것만도 기뻐하고, 재산을 다 탕진하고 염치없음에도 금가락 끼워주고 새 옷과 새 신을 신겨주는 것이 아버지 마음 이었습니다. 주님의 마음은 곧 아버지의 마음이다."아빠는 네가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해. 건강한 것 더 바릴것 없어. 집에 있는 아빠의 모든 것이 네 것이니 마음 것 누리거라" 주님의 마음을 모르면 자유할 수 없습니다. 주눅 들려 행복할 수 없습니다. 잘했나 못했나 늘 눈치를 봅니다. 아버지의 마음을 알 때 자유할 수 있습니다. 저는 딸 둘에 아들 하나입니다. 결혼해서 주님만 위해 산다고 아이도 낳지 않겠다고 한 것이 셋이나 되었습니다. 그런데 나의 꿈이 될 아들이 지적장애로 태어났습니다. 다행히 자폐적 기질이 치유되고 온순해지고, 자기 몸 건사하는 정도가지 되었습니다. 그런데 무엇을 먹으면 절제를 못합니다. 한꺼번에 다 먹어치웁니다. "그렇게 하지 말라 그만 먹거라. 조금씩 먹거라" 늘 이런 잔소리가 오고 갑니다. 한번 두 번 책망 듣고 그러다보니 그 후부터 과자봉지를 숨기는 버릇, 거짓말 하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장롱 위, 뒤, 온장 속, 어디든지 물건을 정리하다보면 보이지 않는 구석에 과자 봉지들이 나옵니다. 누가가 과자를 먹고 은폐시킨 것입니다. “ 나 안 먹었다” 하는 것입니다. 이곳에 있을 때는 서울에 있을 때가 똑같습니다. 엄마하고 들이 있으면서도 과장 봉지를 숨긴다고 합니다. 급기야 사건이 터졌습니다. 카스에는 이야기 못했지만 어느 날 편의 점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자꾸 물건들이 없어지는 것이 이상한 편의점 주인이 cc tv를 켜보았는데 누가가 찍힌 것입니다. 자기가 먹고 싶은 음식을 슬쩍 한 것입니다. 이 사건을 처리하기 위해서 누가는 매형을 이야기한 것 같습니다. 가서 이야기를 해보니 없어진 물건이 20여 만 원어치라고 합니다. 피해보상가지 150만원인가 요구했습니다. 사위가 100원에 합의를 보았습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가슴이 너마 아팠습니다. 도적질은 다른 것이 아니라 사랑의 궁핍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아빠의 마음은 그게 아닌데...저는 마트에 가서 맛난 것들을 5-6만원어치를 골고루 잔뜩 사서 택배로 보냈습니다. 마음것 먹으라고 했습니다. 물론 엄마는 살찌니 안 된다 고하지만 또 먹고 싶은 것 있으면 얼마던지 사주겠다고 했습니다. 사실 많이 누리고 써서 자유이고 행복은 아닙니다. 아버지의 마음만 알아도 자유 이고, 나를 얼마나 아끼고 사랑하시는지 그 마음만 알아도 행복입니다. 그 아버지의 마음을 대게 잘 모릅니다. 그러면 먹어도 먹어도 속이 고픕니다. 누군가 물을 겁니다. "그럼 목사님은요?" 이런 상황에서요? 그래도 행복하고 자유요? "주안에 얻은 자유, 주안에 누리는 행복 저는 더이상 빼앗기지 않을 것 입니다" 그것은 상황 조건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행복은 우리의 노력으로 열심히 취하여 얻은 것이 아닙니다. 주님으로부터 얻은 것입니다. 신명기 33:29절에서 이렇게 말 합니다.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자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 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뇨.. 이 행복은 하나님께 얻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죽음으로도 빼앗길 수 없습니다. 그리고 자유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로마서 8:1-2절은 이렇게 말 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 정철 영어 God's plan of salvation을 보면 이런 글이 있습니다. His blood washed our sin. His blood washed set us from satan. By his blood we are saved!. 그의 피가 우리의 죄를 씻고, 그의 피가 우리를 사단에서 자유케하고, 그의 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주님이 주신 행복 자유, 불면한 것입니다. 사명, 충성 ,헌신, 봉사도 그 후입니다. 저와 여러분들 모두 아버지 마음을 알고 주님의 주신 자유와 행복을 누리는 자들 되시기를 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 자유 어떻게 쓰시겠습니까? 갈리디아 5:13은 이렇게 말 합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 저와 여러분들 모두가 신앙의 본질인 이 자유와 행복을 모두에게 알리는 자들 되시기를 기도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