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주간지가 공개한 북한 소녀 사진은 의문투성이… ‘동경발’ 뉴스 악용한 옛 정보당국의 습성
‘KAL기 폭파범’ 김현희의 새로운 사진이 일본에서 공개돼 또다시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 일본의 <요미우리 위클리>는 최근 발매된 신년호에서 김현희의 어릴 적 사진을 공개하고 “김현희가 북한공작원임이 확실하다”고 주장했다. 이 기사는 ‘KAL기 폭파=북한테러’임을 확신하고 있는 세력들에겐 호재 중의 호재가 아닐 수 없었다. 2003년 말부터 또다시 일고 있는 이 사건 관련 의혹을 잠재울 수 있는 폭발력을 가진 뉴스였다.
△ 진짜 김현희는 사진 속에 있을까. 전 <아카하타> 평양 특파원 하기와라 료가 찍은 사진(A,위) 속에는 김현희를 닮은 소녀가 없다. 북한 당국은 새로운 사진(B,아래)를 제시하며 김현희가 자신이라고 지목한 소녀는 정희선이라고 주장했다.
사진 속 인물 두고 ‘남북 여인대결’
아니나 다를까. 이 사건 발생 때부터 초지일관 안기부(현 국정원)의 ‘대변인’ 역할을 하고 있는 <조선일보>가 이 기사를 대서특필했다.
<조선일보>는 2003년 12월31일치 신문에서 이 사진을 게재한 뒤 “<요미우리 위클리>는 최근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KAL기 폭파범 의혹 논란과 관련, 1972년 11월2일 평양 교외의 헬리콥터 공항에서 손에 꽃을 들고 한국대표단을 기다리는 북한 소녀들의 컬러사진(사진C-인용자)을 공개하면서 이 사진에 나오는 세 번째 소녀가 김현희가 틀림없다고 보도했다”고 전했다.
그러나 이 사진은 필자가 보기엔 이상한 점이 많다.
사진(C)의 출처 경위와 사진 감정인의 불순한 의도를 볼 때 사진 속의 세 번째 소녀를 김현희로 확신할 수 있는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
먼저 출처 경위부터 살펴보자.
1972년 11월 일본 공산당 기관지 <아카하다>의 평양주재 특파원이었던 하기와라 료는 남북조절위원회 남쪽 대표단에게 꽃다발을 증정하러 걸어가는 한 소녀(사진A의 네 번째)를 “단정하고 유난히 기품 있는 모습”으로 기억하고 있다가, 1988년 1월15일 안기부의 KAL기 사건 수사발표장에서 김현희가 언론에 모습을 나타내자 “16년 전의 그 소녀와 그대로 빼닮았다. 99% 김현희로 확신한다”며 자신이 찍은 사진(A)을 1988년 3월 초 일본 <그라프 곤니치와>라는 사진잡지에 공개했다.
이에 대해 김현희는 “당시 내 모습이 분명하다”며 “어떻게 이 사진을 구했느냐”고 신기해했다고 안기부는 전했고,
이 소식은 1988년 3월6일치 국내 신문에 일제히 보도됐다.
그런데 열흘쯤 지나 북한에서 반대쪽 각도에서 찍은 같은 화동들의 사진(B)을 제시하며 “하기와라가 김현희라고 적시한 소녀는 평양에 살고 있는 정희선”이라고 반박하고 나섰다.
사진 속의 한 인물을 두고 서로 자기 모습이라고 우기는 ‘남북 여인대결’이 벌어진 것이다.
사진을 둘러싼 공방은 하기와라가 펴낸 <서울과 평양>(도서출판 다나·1990년)에 상세히 소개됐는데, 그는 나중에 자신의 오보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사진 속에는 김현희를 닮은 소녀가 단 한명도 없었기 때문이다.
<월간조선>은 2001년 3월호와 11월호에서 하기와라의 사진과 비슷한 사진을 늘어놓고 “누가 봐도 한눈에 김현희임을 알 수 있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하지만 누가 봐도 김현희라고 단정할 수 있는 소녀는 사진 속에 없었다.
그럼에도 국정원은 2001년 11월14일 <한겨레>에 “이미 당사자(김현희)가 1988년 당시 (사진A의 네 번째 인물이) 자기 얼굴이라고 확인한 내용이므로, 지금 상황에서 더 밝힐 게 없다”고 밝혔다.
과연 사진만으로 사람의 신원을 파악할 수 있을까.
컴퓨터그래픽과 사진합성 기술이 발달한 요즘에는 사진조작은 아무것도 아니다.
KAL기 사건 발생 당시 국내의 한 신문을 보면,
‘김현희, 미모완 달리 무쇠주먹’이라는 기사에서 굳은살이 박힌 주먹을 부각시킨 사진이 실려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섬섬옥수 고운 손이다.
김현희를 무시무시한 테러리스트로 인식시킬 필요가 있었고, 그 필요에 따라 조작된 것이다.
이렇게 한 개인의 신원을 확인하는 데 사진 감정은 충분한 역할을 하지 못한다. 그래서 사담 후세인 전 이라크 대통령을 검거한 미군도 사진만 가지고는 본인임을 확인하기 어렵기 때문에 DNA 검사를 했던 것이다.
사진 감정을 믿을 수 있을까
사진 감정보다는 오히려 ‘정황 증거’가 진위를 판단하는 데 더 유용하다.
김현희 사진에 대해 북한의 정희선은 당시 함께 찍힌 주위 학생의 이름을 전부 댔다.
1번은 창전중학교 박옥심, 2번은 자신과 같은 금성중학교 남금석, 3번은 종로중학교 김송희라는 것이다.
반면 김현희는 주위 학생 이름을 한명도 대지 못했다.
사진 B속의 3번 소녀를 <월간조선>에서는 김현희라고 했지만, 북한의 정희선은 김송희라고 했다.
<요미우리 위클리>에서 인용한 하시모토 교수의 감정 결과는 과연 신빙성이 있을까.
이번 감정은 1972년의 소녀 사진(C의 3번)과 1993년의 김현희 사진(D)을 놓고 동일인 여부를 따졌다.
필자는 신문에 실린 증명사진 크기의 사진 두장만 가지고 이번 감정 결과에 의견을 내놓기가 조심스럽지만, 석연치 않은 부분이 한두 군데가 아님을 발견했다.
하시모토 교수는 “입술의 오른쪽에 나 있는 종기 흉터가 일치해 동일인이 틀림없다”고 단정했으나, 필자가 다수 확보하고 있는 김현희의 대형 컬러 화보(사진)들을 보면 흉터 자체가 없다.
일반적으로 얼굴에 꿰맨 자국도 아닌 종기, 여드름 흉터라면 20년이 넘으면 육안으로 식별하기 어렵다. 흉터가 남아 있어도 화장하면 감출 수 있다.
△ <요미우리 위클리>가 새로 제시한 사진(C,위) 속의 3번 소녀는 김현희의 최근 모습(D,한겨레,아래)과 닮아 보인다.
하지만 사진 판독만으로는 김현희임을 확인할 수 없다는 게 전문가들의 견해다.
1993년 사진(D)은 화장한 김현희의 사진이다.
필자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흉터보다도 얼굴의 검은 점이다.
1988년 1월15일 텔레비전 회견시 김현희의 얼굴에는 팥알만한 점이 있었다.
보통 점은 화장으로도 가려지지 않는다.
동일인 식별은 얼굴의 점이 쉬울 텐데 왜 일본인 교수는 이에 대해 언급하지 않고, 식별하기 어려운 흉터만 거론했을까
물론 감정을 의뢰한 쪽에서 점을 뺀 사진을 제공하면 어쩔 수 없다. 사진 감정이란 이렇게 취약한 것이다.
그 밖에도 김현희의 얼굴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문제가 됐던 ‘칼귀’는 제외하고도, 아래턱뼈(下顎骨)가 완만한 W자 형태를 띠고 있다.
하시모토 교수는 두 사진의 치아 모양을 비교 관찰하여 동일인이라고 결론을 내렸는데, 문제의 사진 속에서는 치아가 잘 보이지 않는다.
반면 아래턱뼈는 잘 보일 텐데 이 교수는 그에 대한 언급은 하지 않았다.
김현희의 사진에 대한 논란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일본은 1988년 3월 김현희와 정희선의 진위 논란이 일었을 때 수사기관이 나서서 사진 감정을 했다.
1988년 3월28치 일본 경찰청 조사과 내부문서를 보면, 우리나라의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해당하는 일본 경찰청 소속 과학경찰연구소에서 안면을 형태학적으로 검사한 결과, 김현희가 맞다고 결론을 내렸다.
이 얼마나 황당한가.
사진 A, B의 네 번째 동그란 귀의 소녀를 칼귀 모습의 김현희라고 ‘사기’ 친 것이다.
일본 수사기관도 이 모양인데 일개 대학교수의 감정을 믿을 수 있겠는가.
왜 사건의 실마리를 일본에 의지하나
필자가 이 사건을 추적해오면서 가장 안타까웠던 것은 이 사건의 실마리를 일본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인이 희생됐고, 우리 비행기가 사라진 의혹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자료는 일본에서 구해야 했다.
물론 일본 자료도 70%가 선정적이고 유언비어에 가깝다.
과거 국내 정보·수사 당국은 이런 처지를 교묘하게 이용했다.
찜찜한 뉴스거리는 미리 일본 언론에 흘려, ‘동경발’이라는 ‘접두사’를 붙여 국내에 역류하도록 만들었다.
이 수법은 기만과 공포의 이미지로 국민의 신뢰를 잃은 정보당국이 잘 써먹던 수법이다. 자신에게 유리한 정보를 외국을 거쳐 국내에 유포시켜 객관성과 신뢰성을 가장하고, 나중에 들통이 나도 ‘나몰라라’ 내뺄 수 있는 방법이다.
이런저런 이유로 필자는 일본으로부터 유입된 최근의 <요미우리 위클리> 사진도 신뢰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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