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의 전환기를 맞은
북아프리카를 가다
- 리비아, 튀니지, 모로코 순례기 -
2011년 1월 6일 ~ 1월 31일
제 1 부 오랜 유적과 석유자원이 풍성한 리비아
1. 두바이를 거쳐 트리폴리로
2. 오래된 고고학의 유물과 다양한 역사의 흔적을 찾아
3. 원주민들의 삶을 찾아서
4. 리비아 여정을 마치고 튀니지로
제 2 부 관광자원이 많고 개방적인 튀니지
5. 매력적인 휴양지, 제르바에서의 휴식
6. 사막에 비가 내린다
7. 시위사태로 중단된 일정
8. 반정부시위의 현장에서
9. 산골마을에서 수도 가까운 항구도시로
10. 이슬람 성지, 카이로완을 다녀오다
11. 악화된 상황, 하루 종일 호텔에 머물다
12. 수도 튜니스에 입성하다
13. 취소된 알제리 여행
제 3 부 녹지와 사막이 조화를 이룬 모로코
14. 튀니지를 벗어나 모로코로
15. 모로코의 영혼이 깃든 패스 (PES)
16. 로마유적지와 시골 장터가 볼만한 메크네스 인근
17. 카사블랑카에서 만난 한국인 근로자
18. 카사블랑카에 비가 내린다.
19. 남국의 정취가 물씬 풍기는 마라케쉬
20. 아틀라스 산맥을 넘어 다데스 계곡으로
21. 별이 쏟아지는 사하라의 밤
22. 사막의 일출을 감상하고 종일 달리다
23. 현지인에게 들은 모로코의 복지
24. 순례를 마치고 귀국길에 오르다
제 1 부 오랜 유적과 석유자원이 풍성한 리비아
1. 두바이를 거쳐 트리폴리로
2011년 1월 6일(목), 밤늦은 시간에 아랍에미레이트 항공편으로 인천공항을 출발하여 두바이를 거쳐 리비아의 수도 트리폴리에 이르는 북아프리카 순례에 나섰다.
눈발이 흩날리는 날씨 때문에 혹시 인천공항까지 가는 길에 지장이 있을까봐 오후 2시 50분, 광주역에서 출발하는 무궁화호 기차에 몸을 실었다. 오후 7시 40분에 용산역에서 내려 지하철을 이용하여 서울역에 도착하니 둘째아들이 플랫홈에서 기다리고 있다.
저녁 8시 16분에 지난 달 개통한 서울역 - 인천공항의 전철에 탑승하니 홍대역과 김포공항 등 몇 개 역을 거쳐 50여분 만에 인천공항에 도착한다. 저녁 9시 반의 집결시간에 27명의 일행이 빠짐없이 모여드는 것을 보며 베테랑 여행자들답게 시간을 잘 지키는 모습이 보기에 좋다. 일행 중에는 3년 전 중동지방 여행에 동행한 김화영 님이 눈에 띠어 반갑기도.
자정이 넘어 예정시각보다 약간 늦게 출발한 비행기는 열 시간의 비행 끝에 현지시각 새벽 5시 30분(한국보다 5시간 늦다.)에 두바이공항에 무사히 착륙하였다. 오전 9시 10분에 출발하는 트리폴리행 비행기를 기다리는 시간에 탑승장에 앉아 성경(잠언 7장)을 한글과 영문으로 두 세 차례 읽노라니 두어 시간이 지루하지 않게 흐른다. 일행 중에는 면세점에서 쇼핑을 즐기는 이도 있고.
두바이에서 트리폴리까지 4000km가 넘는 거리를 약 6시간 비행하여 트리폴리공항에 도착하니 오후 1시 40분(한국시간보다 7시간 늦다.), 입국수속을 하는데 1시간이 더 걸린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변수가 터졌다. 여권을 꼼꼼히 살피던 입국심사관이 27명의 일행 중 2명이 최근 이스라엘을 여행하였다는 이유로 입국을 거부하여 발길을 되돌리게 되었다. (부자간에 온 아들이 아버지와 함께 돌아가 결국 3명이 빠지게 되었다.)
이스라엘과 적대관계에 있는 중동의 여러 나라들이 이스라엘 여행자의 입국을 거절하는 사례가 있는 것을 알았으나 리비아도 그런 나라인지는 여행사도 미처 몰랐던 듯. 큰마음 먹고 북아프리카 4개국 순례의 길에 오른 이들이 시작부터 잘못되어 낭패를 당한 것이 마음에 걸린다.
트리폴리공항에 내리니 두꺼운 겨울옷이 덥게 느껴지는 화사한 날씨다. 입국수속을 마치고 나오니 현지 여행사 직원이 '북아프리카 4개국 여행 팀, 리비아 방문을 환영합니다.'라는 피킷을 들고 나와 반갑게 맞아준다. 공항에서 리비아 체류기간에 쓸 현지화폐를 교환하고 전용버스를 이용하여 트리폴리 시내에 있는 호텔로 향하였다.
일찍부터 지중해의 해상무역항으로 널리 알려진 트리폴리는 인구 170여만의 대도시인데 눈에 들어오는 도로와 건물들이 세련되고 화려한 현대도시의 모습과 달리 약간 우중충한 느낌이 든다. 막상 머무를 호텔에 이르니 외양과 내용이 낡고 허술하여 모두들 실망한 기색이 역력하다. 술을 즐기는 애주가는 청탁을 가리지 않는다니 여행베테랑들도 이에 신경 쓰지 말고 참아내는 것이 좋으리라.
호텔에 여장을 풀고 5시 반에 호텔을 나서 지중해를 끼고 있는 해변의 광장과 성채, 독립문 등을 돌아보고 대형 슈퍼에 들러 며칠 리비아에 머무는 동안 필요한 과일과 물 등을 산 후 슈퍼 안의 음식판매점에서 케밥을 사 먹는 것으로 저녁을 갈음하였다.
광장에서 만난 현지취업 한국인은 리비아를 단체로 여행하는 한국인을 만나기는 처음이라며 반가워한다. 해진 후의 노을이 아름답고 야자나무 사이로 서편에 걸린 초승달, 그 위에 총총히 비치는 샛별을 바라보며 한국인의 행적이 드문 리비아에서 북아프리카의 첫 밤을 운치 있게 맞이하였다. 장시간 비행과 시차로 모두 피곤할 터, 잘 자고 내일부터 시작될 본격적인 순례에 영광 있으라.
2011년 1월 7일 밤
리비아의 수도 트리폴리에서
2. 오래된 고고학의 유물과 다양한 역사의 흔적을 찾아
1월 8일(토), 날이 밝기 전에 이슬람 사원에서 웅장하게 울려 퍼지는 마이크의 기도소리가 나그네에게 이곳이 이슬람국가인 것을 일깬다. 이에 맞춰 일어나 세수를 하고 호텔 식당에서 빵과 우유, 커피의 간단한 메뉴와 어제 사온 과일을 곁들여 아침 식사를 끝낸 후 8시 반에 버스편으로 호텔을 출발하였다.
5분여 만에 도착한 곳은 박물관, 9시에 문 열기를 기다려 한 시간여 고고학적 유물과 페니키아, 그리스, 로마, 비잔틴, 트루크제국의 지배를 거쳐 근대 독립에 이르는 다양한 역사의 흔적은 물론 생활과 자연에 이르기까지 리비아의 참모습을 한꺼번에 살필 수 있는 좋은 관람이었다. 리바아의 실질적인 통치자는 1969년, 27세 때 육군대위로 쿠데타를 일으켜 집권한 아우므르 카다피인데 거리, 식당, 호텔 등에 독특한 의상을 걸친 그의 초상이 걸려 있다. 박물관 4층의 근세 역사 전시장 입구에 예의 초상화가 크게 자리 잡고 있어서 그가 리비아의 강력한 절대권력자임을 실감하게 된다. 그는 유목민 출신으로 국내에서는 물론 외국 출장 중에도 천막에서 기거하기를 선호하는 괴짜로 알려져 있다.
박물관에서 나와 한 시간여 주변을 산책하다가 카페에서 차를 마시며 느긋한 시간을 가지기도. 주변을 돌아보며 살피니 주차장이나 거리에 한국의 현대, 기아의 중고차들이 의외로 많이 눈에 띤다. 현지 가이드는 자기 차가 기아제품이라고 자랑하고 차량에 동승한 여행사 직원도 한국의 봉고 승용차가 얼마쯤 하는지 집요하게 케묻는다.(한국에서 7,8백만 원쯤 할 것이라고 말하니 리비아에서는 1,200만 원 정도라야 구입할 수 있단다.)
11시에 트리폴리 동쪽으로 한 시간 반 거리에 있는 지중해지역 최고의 고고학 유적지이며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도시, 렙티스 마그나로 향하였다. 왼쪽으로 지중해를 끼고 달리는 경관이 아름답고 주변에는 천년 이상 자란다는 올리브 밭, 이 지역 특산이라는 오렌지를 비롯한 노변 과일상들이 눈길을 끈다.
12시 반에 렙티스 마그나에 도착하여 인근의 깨끗한 음식점에서 점심을 들며 시원한 그늘에서 휴식을 취하기도. 예년에는 비가 오는 우기인데다 겨울철이라 기온도 낮다고 하는데 금년에는 오래 동안 비가 오지 않고 평년보다 무더운 날씨란다.
오후 1시 반부터 5시까지 렙티스 마그나의 로마시대 유적지를 돌아보며 하드리안 목욕탕, 시장과 공회당으로 이용된 거대한 포럼, 재판정으로 사용한 바실리카, 전차경기장인 하드리아누스, 3,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극장과 16,000명이 참관할 수 있는 검투경기장 등을 살피니 세계 여러 곳에서 본 유적지보다 규모가 크고 흔적이 뚜렷한 곳이어서 볼만하였다. 각급 도면과 사진을 곁들인 현지 가이드의 설명도 좋았고.
여러 나라와 지역을 다니면서 아내가 늘 '이 세상에 만만한 사람은 없다.'고 말하는 것을 인용하여 '세상에 만만한 나라나 도시도 없다.'고 강조하였는데 오늘 리비아 박물관과 렙티스 마그나를 돌아보며 잘 알지 못하는 리비아도 훌륭한 고고학적 유물과 굵은 역사의 한 자락을 움켜쥐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오후 5시 반에 렙티스 마그나를 출발하여 호텔에 돌아오니 저녁 7시 20분, 일행 중 많은 이들이 시내 야경감상을 겸하여 밖에서 저녁 식사하러 나가는데 컨디션도 조절할 겸 호텔에 남아 간단히 저녁을 들고 글을 적는다.
2011년 1월 8일 밤
리비아의 트리폴리에서
추신,
1. 로마가 목욕으로 망했다는 말이 있거니와 엄청난 규모의 목욕탕에는 남녀가 같이 들어가는 대형목욕탕, 냉탕과 온탕, 사우나 시설 등이 갖추어져 있고 대리석으로 다듬어진 화장실에서는 서로 대화를 나누며 일을 볼 수 있게 만들어졌다.
2. 곡식의 부피를 재는 됫박, 기름의 용량을 재는 종아리모양의 석조 도량형, 사창가로 들어가는 여러 문양의 표시가 거리 모퉁이마다 세워져 있다.
3. 검투장에는 검투사들이 싸우다가 이기는 자가 들어가는 승리의 문, 죽은 자가 실려 들어가는 죽음의 문이 있는데 관중석에서 결투장까지 내려갔다가 가까운 문 밖으로 나오니 일행 한분이 죽음의 문으로 나왔느냐고 묻는다. 산 자가 어찌 죽음의 문을 두려워하랴.
3. 원주민들의 삶을 찾아서
1월 9일(일), 호텔 조식 메뉴에 삶은 계란이 추가되어 모두들 좋아한다. 어제 보다 혹시나 메뉴의 질이 나아지기를 기대하였는데 작은 것에서 얻는 기쁨이 크다.
오전 8시, 트리폴리 남쪽의 사막과 고원지대를 향하여 출발하였다. 가는 길에 보이는 카다피 국가원수의 저택에는 삼엄한 경비가 펼쳐지고 어느 곳에서는 수십 명의 외국인 근로자들이 일용노동자로 뽑히기를 바라며 서 있는 모습이 안쓰럽다.
트리폴리 시내를 벗어나니 좌우로 낙타풀들이 듬성듬성 나 있는 사막지대가 나타나고 길 옆에 양가죽을 걸어놓은 집들이 늘어서 있는데 양고기를 파는 정육점이라고 28세의 젊은 현지 여행사 사장이 설명해 준다.(첫날 안내를 맡은 직원이 아프다며 사장이 직접 따라나섰다.)
오전 11시 경에 도착한 곳은 베르베르인(이스라엘 인근의 중동지방에는 베두인 유목민이 많이 살고 있는데 북아프리카의 유목민들은 대부분 베르베르인이다.)의 대형 창고건축물인 카스 알 하지(Qasr Al Haj), 3층의 원형으로 지어진 웅장한 건축물은 마을 전체가 곡식저장창고로 사용하던 원래의 모습이 잘 보존되어 있다. 한 시간여 이곳을 둘러본 후 베르베르인들이 전통을 고수하며 살아가고 있는 자발 나푸사(Jabl Nafusa)고원으로 향하였다.
100여 년 전까지 주민들이 살았다는 고원 정상부근의 원주민 마을에서 내려다보는 평지의 사막이 아스라이 펼쳐지고 정상을 지나 여러 개의 마을로 이루어진 고원지대는 또 다른 평원이 넓게 이어진다. 고원 외딴 곳에 별장처럼 지어진 건물에 들러 닭고기와 스파게티를 겻들인 도시락으로 점심식사를 한 후 한 시간여 고원지대의 여러 마을을 거쳐 다다른 곳은 여러 가구가 한 데 어울려 사는 모습을 간직한 시범지하주택이다. 사막지대에서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하게 보낼 수 있게 지어진 지하내부의 각 방들이 여러 종류의 방석과 옷가지들로 장식되어 있는 것을 카메라에 담느라 일행들의 발걸음이 분주하다. 몇 달 전 TV에서 방영된 중국서쪽의 실크로드 주변에 있는 지하주택의 모습이 떠오르고.
오후 4시 경에 자발 나푸사 고원을 출발하여 트리폴리 시내로 돌아오니 5시가 약간 넘는 이른 시간이다. 호텔에 가방을 내려놓고 해변이 가까운 녹색광장으로 10여명(대부분 어제 저녁에 나가지 않았던 이들로 남자는 나 혼자다.)이 함께 이동하여 시민들이 붐비는 시장을 한 시간여 돌아보며 현지인들의 생동하는 삶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왕언니는 옷가지를 사기도 하고.
시장을 벗어나서 대로변으로 나오니 맞은편에 도복을 입은 청소년들이 수련하는 광경이 눈에 띤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니 내부가 꽤 넓은 태권도장이다. 도장 안에는 세계태권도연맹이라는 한글글씨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고 수련하는 이들의 도복에는 'TAEKWONDO'라고 쓴 알파벳이 뚜렷하여 반가운 마음이다. 사무실에 들르니 남자직원이 친절하게 맞으며 아랍어로 인쇄된 태권도교본을 건네주며 태권도종주국의 한국인들이 들른 것을 반긴다. 주변의 광장에 주차된 차들의 절반 가량은 현대와 기아의 중고차들이고 새로 짓는 호텔 여럿을 대우건설이 시공하는 등 멀리 리비아에서 세계로 뻗어가는 대한민국의 자랑스런 모습을 자연스럽게 확인하게 된다.
리비아는 인구 600여만 명의 적은 수가 남한의 17배가 넘는 170여만 평방km의 넓은 땅에서 세계 4위의 석유매장량으로 국민들은 외형적인 소득수준보다 경제적인 여유를 지니고 비교적 풍요롭게 살아가는 것을 확인한 것도 이번 여행에서 얻은 산 지식이라 하겠다.
일행 중 나이가 많은 왕언니(69세)는 어제 밤 택시에 가방 열쇠가 든 지갑을 놓고 내려 낭패였는데 한참 뒤 택시기사가 호텔 방 까지 찾아와 두고 내린 지갑을 돌려주어서 감사하였다고. 오늘은 저녁시간에 우리를 안내한 길잡이 미야 씨가 저녁식사를 마치고 식당에서 나오다가 카메라 뚜껑이 없어진 것을 알고 당황하였다. 시장에서 잃었으면 찾을 길이 없겠지만 혹시나 태권도장에 떨어뜨렸을지 모른다며 그곳으로 가는 길에 조금 전 우리를 반갑게 맞이하던 직원과 맞닥뜨렸다. 그가 반색하며 카메라 뚜껑이 사무실에 있다고 알려주어 모두들 기대하지 않았던 분실물을 되찾게 되어 기뻐하였다.
아침 식당에서 작은 기쁨을 얻더니 마지막 순간에도 작은 기쁨으로 마칠 수 있어서 즐거운 하루였다.
2011년 1월 9일 밤
트리폴리에서
추신,
룸메이트인 김훈기 교수는 밤늦게 들어왔는데 한국에서 5년간 유학한 리비아인을 시내에서 우연히 만나 대화한 일, 현지인들이 즐기는 물담배를 피워본 색다른 체험들을 들려준다.
4. 리비아 여정을 마치고 튀니지로
1월 10일(월), 오전 8시 반에 사흘간 머물던 트리폴리의 낡은 호텔을 뒤로하고 아침에 문을 여는 수산시장으로 향하였다. 한국에서도 큰 항구도시의 수산시장을 둘러보지 못하였는데 멀리 리비아의 수도에서 어시장을 둘러보게 된 것이다. 한쪽은 화물차에 상자째로 거래하는 도매시장이고 다른 쪽은 한 두 마리씩 판매하는 소매시장인 듯. 아름드리나무 몸통만큼이나 큰 고기를 잘라서 진열해 놓은 것도 볼만하고 길이가 2m도 훨씬 넘는 큰 물고기를 표본이 아닌 실물로 보는 것도 처음이라서 흥미로웠다.
20여분 여 수산시장을 둘러보고 어제 저녁에 돌아본 광장주변을 거닐다 보니 학교건물이 보인다. 초등학생들이 재잘거리는 교문 앞에서 사진을 찍고 학교 안으로 들어가니 젊은 남자 선생이 자기 클라스로 안내한다. 수업중인 어린이들의 해맑은 모습을 지켜보며 순수하고 활기가 넘치는 동심의 세계에 흠뻑 빠지는 즐거운 체험을 하였다. 동행한 정미정 선생이 아이들에게 흥미와 관심을 유발시키는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였고.
10시 조금 전에 트리폴리를 출발하여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사브라타 유적지로 향하였다. 한 시간여 달리는 차안에서 24명 일행들의 자기 소개가 있었다. 대학생을 제외하고 가장 젊은 여성(39세)이 여행 출발 전에는 자기가 나이 든 축에 속할 줄 알았는데 가장 어린 나이여서 놀랐다나, 여행 경비는 대출받아서 왔다고 웃기기도.
11시 넘어 사브라타 유적지에 도착하여 현지 가이드의 안내로 두 시간 넘게 고대 무역항이며 곡창지대로 번창한 로마시대 사브라타 유적지의 여러 신전과 포럼, 목욕탕, 극장등의 잔해를 살펴보며 2000년전 도시의 화려한 흔적들이 선명하게 남아 있음을 감탄하였다. 멀리 이집트의 아스완에서 가져온 화강암, 이태리에서 싣고 온 대리석 등 거대한 건축자재를 어떻게 운반하고 시공하였는지 궁금해하며.
오후 1시 반에 사브라타 유적지를 출발하여 다음 여행지인 튀니지로 향하였다. 도중에 길옆의 가게에서 핫도그로 점심을 갈음하고 국경지대에 이르니 오후 4시, 헌 사간여 출국과 입국 수속을 마치고 튀니지 땅에 들어서니 리비아보다 약간 녹색식물이 많은 도시가 나타나고 수입물품을 가득실은 체 리비아 쪽으로 향하는 대형트럭의 행렬, 싣고 갈 물품들을 가득 쌓아놓은 국경인접도시의 거리풍경이 이채롭다.
국경을 통과하여 두 시간 넘게 아스라이 펼쳐지는 지평선을 뚫고 튀니지의 동남부 가베스 만에 자리한 위락휴양지 제르바 섬의 호텔에 당도하니 저녁 9시가 넘었다. 광활한 지평선으로 넘어가는 일몰의 아름다운 풍경을 감상하며 황혼에 접어든 노후의 삶도 이처럼 아름다웠으면 하는 느긋한 마음이 들기도 하더라.
제르바 휴양지의 리조트호텔시설은 트리폴리의 낡은 호텔과 비교하니 너무나 대조적이다. 삶의 과정에도 역경이 있는가 하면 찬란한 날들도 있기 마련, 빈천에도 비굴하지 않고 부귀에도 자만하지 않는 삶을 누릴 수 있으면 좋으리라.
2011년 1월 10일 밤
튀니지의 휴양지 제르바에서
추신,
1. 리비아의 트리폴리에서 튀니지의 제르바 섬까지 우리를 태워다 준 버스기사와 여행사 직원은 밤늦은 시간에 트리폴리까지 되돌아간다고 한다. 그들의 친절과 성실함이 고맙다. 여행기간 내내 우리를 밀착경호(감시)하던 정부파견근무자(25세 청년)는 국경에서 헤어지고.
2. 알제리에서 만나기로 한 알제리인으로부터 22일(토) 11시에 알제에서 만나자는 메시지가 길잡이를 통하여 들어왔다.
제 2 부 관광자원이 많고 개방적인 튀니지
5. 매력적인 휴양지, 제르바에서의 휴식
1월 11일(화), 난방이 잘된 쾌적한 방에서 숙면을 취하니 심신이 가쁜하다.(리비아의 호텔은 난방이 안되어 추웠다.) 호텔의 아침 식사가 풍성하여 모두들 만족스런 표정이다.
10시에 옆방의 일행들과 4명이 택시를 타고 섬의 중심부로 나가서 두 시간여 시장과 번화가를 돌아보고 제르바의 민속박물관에 들러 섬의 역사와 문화를 익혔다. 제르바 섬은 호머의 서사시 '오딧세이'에 나오는 율리시즈와 그의 부하들이 머물렀다는 신화 속의 섬이자 2008년 여행 정보싸이트 '트립어드바이저'가 선정한 2008년 떠오르는 여행지 1위를 차지한 세계적인 휴양지로 알려졌다. 박물관의 자료에 의하면 인구 15만여 명의 작은 섬이지만 섬 안에는 기원 수백 년 전에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면서 이주한 유대인의 마을이 두 개나 있고 독립을 원하는 독특한 역사적 배경을 지닌 곳으로 기록하고 있다.
오후 1시 조금 지나 호텔에 돌아와서 많은 식량과 부식 등 45kg의 수하물을 챙겨 온 이석춘 님이 호텔 방에서 조리한 음식으로 맛있는 점심을 들었다. 1년에 서너 차례나 배낭여행을 즐긴다는 이 석춘 님은 여러 사람이 먹을 수 있도록 넉넉하게 식사재료를 준비해 와서 이처럼 베풀기를 좋아한다며 여럿이 둘러 앉아 한 가족처럼 먹는 모습을 기뻐한다.
식사 후 한 시간여 방에서 휴식을 취한 후 호텔주변의 바닷가로 산책을 나가니 일행 중 여러 명이 모래사장에 놓여 있는 의자에 앉아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다. 주변에는 나이든 유럽인들이 포커놀이를 하거나 일광욕을 즐기고 있고. 일행들과 함께 바닷가를 거닐다가 수평선으로 떨어지는 낙조를 바라보는 등 페키지 여행 때 분주하게 지내던 것에서 벗어나 모처럼 여유로운 시간을 가지며 모두들 즐거워한다.
2011년 1월 11일
신화와 전설이 깃든 제르바에서
추신,
1. 길잡이의 설명으로는 이번 여행 중 이곳 숙박시설이 가장 좋은 편이라고 한다,. 독일에서 온 한국교포 3명은 8일 동안 이곳에 머물며 휴가를 즐길 계획이라고 말한다, 섬 전체가 관광위락시설로 꽉 찬 듯하다.
2. 룸메이트 김훈기 교수는 오전 9시에 호텔을 나서 저녁 7시 반에 돌아왔다. 혼자서 돌아다니면 많은 사람들이 말을 건네며 다가와서 더 다양한 체험을 하게 된다며 여러 사람과 만난 이야기를 사진과 함께 들려준다. 박물관에서 살핀 유대인 공회당에 들른 일, 수백년 전 해적 일당이 수천 명의 스페인 군사들을 섬멸한 요새가 있는 곳, 현지인들이 율리시즈와 그 부하의 후손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들을 해주어서 제르바 섬의 여러 사항을 간접으로나마 현지에서 확인할 수 있어 좋다.
6. 사막에 비가 내린다
1월 12일(수), 아침에 일찍 일어나니 하늘에 구름이 끼어 있다. 일출을 보기위하여 해변으로 나가니 일행 중 김화경 님이 먼저 나와 잔잔한 바다를 응시하고 있다. 구름 속으로라도 떠오르는 해를 맞이할 수 있기를 기대하며 30여분간 해변을 산책하노라니 동쪽하늘의 구름이 붉게 타오르기 시작한다. 이윽고 옅은 구름사이로 밝은 태양이 솟아오르며 찬란한 광채가 빛난다. 뒤에 나온 정미정 님은 연거푸 셔터를 누르고.
장엄한 낙조와 광명의 일출을 연이어 감상할 수 있음을 기뻐하며 식당으로 향하였다. 일행들과 식사하는 자리에 나이든 한국여성 한 분이 다가오며 반가운 인사를 건넨다. 어제 독일에서 온 교포 가운데 한 사람이다. 50여년간 독일에서 살았다는 광부출신 남성과 간호사출신 여성이 부부이고 이들과 가까이 지내는 친구가 동행하였다는데 낯선 휴양지에서 만난 조국의 동포들이 무척 반가운 표정이다.
다음 행선지로 12시에 출발하기로 한 버스가 한 시간여 뒤늦게 도착하였는데 24명이 타기에는 비좁은 소형이다. 앞으로 8일 동안 이용할 터인데 불편하게 여겨져 대형으로 바꾸도록 실랑이를 벌였으나 결국은 그대로 탑승하기로 결론이 났다. 두 세명이 보조의자에 앉고 수하물은 지붕위에 실은 후 2시경에 호텔을 출발하여 네 시간 거리의 사막지대에 있는 마트마타로 향하였다.
바지선으로 바다를 건넌다는 선착장에 도착하니 많은 차량들이 길게 늘어서 있는데 30여분이 지나도록 움직이자 않는다. 언제 승선할지 기약할 수 없어서 꽤 많이 돌아간다는 연육교 코스로 행로를 바꾸었다.
한 시간 여를 달려 제르바 섬을 벗어나니 광활한 모래벌판에 일정한 간격으로 줄을 세워 심은 꽤 넓은 올리브 밭이 눈길을 끌고 상당히 높은 산길을 휘돌아 오르는 경관이 볼만한데 갑자기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사막에 비가 내리니 기뻐할 일이지만 버스지붕위에 덮개도 없이 실은 가방들이 젖을까 걱정이다. 잠시 비가 그친 사이에 펼쳐지는 무지개가 아름답고 산악주변의 황량한 경관들이 어둠에 싸여 신비롭다.
해가 진후에 빗줄기가 더 굵어지고 간간이 번개도 치며 제법 많은 비가 내린다. 사막에 비를 몰고가는 일행들은 가방이 좀 젖더라도 메마른 대지에 단비를 내리게 한 것으로 위안을 삼아도 좋을 듯.
예정보다 늦게 출발하고 선착장에서 지체하는 등 시간이 늦어져서 점심 먹을 시간도 없이 계속 달렸다. 각기 소지한 사탕, 과일, 빵조각 등을 나누어들며 좁은 공간에서 쉬지 않고 웃음꽃이 피는 차안의 분위기가 따뜻하다
호텔에 도착하여 버스 위의 가방들을 내리는데 일손이 부족하다. 연장자인 김종년 선생이 솔선하여 올라가서 운전기사와 함께 단단히 묶은 끈을 풀어가며 무거운 가방을 하나씩 내려놓는 수고에 모두들 큰 박수로 감사의 뜻을 표하였다. 수십 년간 배낭여행으로 120여 나라를 섭렵한 김 선생은 여행마니아인 동시에 미술품수집 등 다양한 방면의 취미활동을 하고 있다고.
비가 주룩주룩 계속하여 내리는 가운데 호텔식당에서 브릭, 스프, 치킨, 쿠스코(조밥) 등 푸짐한 메뉴의 저녁 식사를 하고나니 싸늘한 밤공기에 몸도 고단하여 서둘러 글을 쓰고 곧바로 잠자리에 들다.
2011년 1월 12일 밤
튀니지의 사막지대 마트마타에서
추신,
오후에 동생이 문자메시지를 보내왔다. 건강한 가운데 마트마타까지의 여정이 순탄하기를 기원한다며. 까마득이 먼 이국땅까지 손쉽게 소통할 수 있는 통신망처럼 모든 나라와 민족, 종교 간의 선린, 우호가 증진되면 좋으리라.
7. 시위사태로 중단된 일정
1월 13일(목), 북아프리카 순례길에 오른 지 어느새 일주일이 지났다.
아침 8시에 호텔을 나서 사방이 산으로 둘러쌓인 사막지대의 작은 도시 마트마타 일원을 돌아보았다. 마트마트는 달 표면과 같은 황량한 느낌과 독특한 경관 때문에 지난 날 인기 있던 SF영화 스타워즈 촬영지로 유명한 곳이다. 먼저 베르베르인들이 뜨거운 태양과 더위를 피하기 위하여 지면을 파서 만든 지하주거지를 살펴보았다. 리비아의 자발 나푸사 고원에서 보았던 지하주거지와 비슷한 모양인데 한 곳에 여러 개의 지하주거지가 모여 있어서 더 생동감이 느껴진다.
30여분간 이곳을 둘러본 후 마트마타를 벗어나 사막지대로 들어가는 길 주변에서는 천막과 지하주거지가 함께 있는 곳에서 힘차게 울어대는 수탉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베르베르 여인이 제공하는 따뜻한 빵조각도 맛보았다. 사방을 둘러봐도 삭막한 광야인 것을 확인하며 이육사의 시 '광야'를 떠올리기도.
광야
이육사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하던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을
부지런히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나리고
매화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千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超人)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 놓아 부르게 하리라
그곳에서 잠시 더 나가니 디아르 아모르 뮤제(DIAR AOMOR MUZZE)라고 적힌 작은 박물관이 눈에 띤다. 이곳에서 차를 멈춰 30여 분간 차 한 잔 마시는 사이(왕언니 이행경 여사가 샀다.) 아래 쪽에 있는 지하주거지를 살펴보니 집안에서 베르베르 여인이 어린 아이와 함께 밖으로 나온다. 코흘리게 아이에게 한국의 홍삼 사탕을 쥐어주니 얼른 받아들며 흘러내리는 코를 훔치는 모습이 귀엽다.
다시 버스에 올라 고개 위에 이르니 광활한 사막의 모습이 원형으로 펼쳐진다. 이곳에서 운전기사가 한참동안 어디론가 통화를 하더니 길잡이에게 전화를 건네준다. 사연인즉 사하라 사막에 가까운 지역에서 반정부시위가 벌어져 사망자가 발생하는 등 치안이 불안하여 우리가 가고자 하는 도우즈 쪽으로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다.
현지여행사가 행선지를 바꾸어 다른 사막지역으로 가라고 권하는 것을 따라 한 시간 반가량 지평선으로 이어지는 사막지대를 가로질러 목적지에 이르니 무성한 야자나무 숲이 울창하게 우거진 큰 규모의 오아시스가 눈에 들어온다.
풀 한 포기 없는 광활한 사막지대에 이처럼 커다란 오아시스가 있는 것이 신기한데 잠자리 천막과 식당, 휴게시설 등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아 선뜻 이곳에서 머물고 싶은 생각이 나지 않는다. 다수 의견이 도시지역으로 이동하기를 원하여 그곳에 머물기를 강력하게 권유하는 운저기사의 뜻을 뿌리치고 어제 묵었던 마트마타로 되돌아가기로 결정하였다.
여러 사람이 내놓은 비상식량으로 점심을 가름하고 갔던 길을 되짚어 마트마타에 돌아오니 오후 3시 반, 묵었던 호텔에 여장을 풀고 마트마타 시내를 돌아보는 등 자유시간을 가졌다. 번화가 쪽으로 나아가서 이슬람 사원, 과일. 채소가게, 이발소, 찻집 등을 지나 튀니지 국기가 나부끼는 깨끗한 건물에 다가서니 우체국이다. 아능로 들어가니 막내 엄지연 님이 그림엽서에 편지글을 써서 국제우편으로 부치려 하는데 엽서 한 장의 우편요금이 0,6디너(우리 돈 약 500원)로 싼 편이다. 환전도 할 수 있어서 유로를 현지화폐로 바꾸기도 하고.
아래로 내려오니 룸메이트 김 교수와 진주에서 온 권봉주 선생이 차를 마시다가 손을 흔들며 반기어서 합석하여 차를 마시는데 가게 안에서 당구치는 소리처럼 쿵쾅거린다. 궁금하여서 안을 들여다보니 여러 테이블에 서너 사람씩 앉아서 주사위 모양의 놀이기구를 이용하여 게임에 열중하는 모습이다.
찻집에서 일어나 호텔로 오는 길에 수퍼에서 빵을 사려는 신양희, 홍기례 님을 만났다. 팔뚝만큼 큰 빵 두 개에 0,5디너(약 400원)라니 매우 저렴하다. 수퍼에서 나오니 사막의 모래산 너머로 뉘엿뉘엿 석양이 기운다. 길 맞은 편 약간 높은 곳에 서서 서서히 저물어가는 일몰을 지켜보고 호텔에 돌아오니 5시 반, 잠시 쉬었다가 식당으로 내려가 13명이 한데 모여 어제 저녁과 같은 메뉴의 저녁식사를 맛있게 들었다.
호텔에서 한국의 젊은 남녀들을 만났다. 독자적으로 3주간 튀니지를 배낭여행 중이라는데 어떻게 그룹을 이루어 함께 왔느냐며 반가워한다. 치안이 불안하더라도 모두들 안전한 여행할 수 있기를 빈다.
2011년 1월 13일 저녁
튀니지의 사막도시 마트마타에서
추신,
1. 튀니지의 벤 알리 대통령은 23년째 장기집권하며 가족들의 부정부패로 국민들의 원성이 높다고 한다. 북아프리카의 동쪽에서부터 이집트의 무바라크, 리비아의 카다피 등 장기집권자들이 철권통치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은 현상이라 여겨진다.
2. 왕언니 이행경 여사가 현지인들이 많이 입고 있는 롱코트 모양의 지르바를 한 벌 사 입었다. 김종년 선생은 멋있는 목도리를 사서 두른 기념으로 저녁 식사시간에 음료를 사기도.
3. 호텔 방 앞의 큰 나무가 참새들의 보금자리인가 보다. 오가는 길에 깜짝 놀라 푸들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안면방해를 하는 것 같아 미안하다.
8. 반정부시위의 현장에서
1월 14일(금), 아침 8시에 호텔을 출발할 예정이었는데 반정부시위의 파장이 확산되어 10시가 지나도록 행선지를 정하지 못하고 현지경찰서까지 찾아갔으나 상황이 불확실하다.
일단 처음에 묵었던 휴양지 제르바에 가까운 도시에서 현지여행사 직원과 만나기로 하여 10시 반이 넘어서야 그제 넘어온 산악지대를 지나 11시 반에 중간도시에서 현지여행사 에이전트와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으나 결론을 내리지 못한 채 비교적 치안이 안전한 제르바로 향하였다.
일행 중 일부는 현지 여행사의 의견에 따르지 않고 독자적으로 여행일정상의 목적지로 가기를 원하였으나 현지 사정에 어두운 외국인들이 책임 있는 당사자들의 의견을 배제하고 위험한 상황에 도전하는 것은 무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오후 2시 넘어 제르바에 도착하여 현지 여행사와 협의한 결과 수도인 튜니스에 가까운 도시 수스까지 현지 여행사 가이드가 동승하여 안내하기로 하고 성깔이 있는 운전기사도 바꾸어서 오후 3시 반에 제르바를 출발하였다.
제르바에서 TV를 통하여 시위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확인하였고 버스 안에서 현지가이드가 수시로 상황을 체크하여 계엄령이 선포되고 군인이 동원된 것을 알게 되었다. 몽둥이를 든 시위군중이 집결하여 있는 것을 목도하기도 하였고 무장군인들이 공공건물 앞에 서 있는 것을 확인하며 과연 튀니지 일정을 마치고 알제리로 출국할 수 있을지도 불확실한 상황인 것을 느끼게 되었다.
오후 6시, 잠시 휴식을 취하는 사이에 상황이 더 불안하게 진행되어 수스로 가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현지여행사 기이드의 판단에 따라 어제 묵었던 마트마타로 다시 돌아가기로 결정하였다. 마트마타에 도착하니 저녁 7시 반, TV에서는 대통령이 물러나겠다는 의사표시로 상황이 반전되었다는 뉴스가 흘러나오는데 우리의 통행이 가능할 지는 미지수.
튀니지는 1881년부터 프랑스의 지배를 받다가 1956년에 독립하여 1957년에 왕정에서 공화국이 되었다. 초대 대통령 부르기바가 1987년 고령으로 물러나고 벤 알리 총리가 대통령에 취임한 이래 지금까지 권좌를 유지하다가 시민들의 불만이 폭발한 것이다.
1960년 4.19혁명의 진행과정을 연상시키는 일련의 상황을 역사의 현장에서 지켜보며 장기집권의 권력자들이 민중의 봉기에 의하여 몰락하는 정치사회적 현상을 온몸으로 체험하는 것도 여행에서 배우는 귀중한 소득이라 할 것이다.
4.19혁명은 이승만 대통령의 장기집권을 부정선거에 항의하여 전국에서 산발적으로 일어난 항의시위가 1960년 4월 19일, 서울의 대학생들이 본격적인 시위에 앞장서고 시민들이 호응하면서 더욱 확산되어 4월 26일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성명을 발표함으로 진정되었다. 당시에 경찰의 발포로 200여명이 숨졌고 계엄령이 선포되어 군이 동원되었으나 강제진압에 소극적으로 임하여 친시민적인 입장을 취하였고 미국도 이승만 정부에 우호적이지 않은 터에 4월 25일 대학교수들이 시위에 참여함으로써 민심이 떠난 것을 확인한 이승만이 물러서기로 결심한 것이다.
갑작스런 상황변화에 대처하는 방식을 놓고 갑론을박이 벌어졌으나 위험상황에서 만용은 금물, 결과적으로 현명하게 대처할 수 있음이 다행스럽다. 우리를 인솔한 길잡이 미야 씨가 크게 수고하였고.
2011년 1월 14일 저녁,
사흘째 사막도시 마트마타에 묵으며
추신,
1. 리비아에서 우리를 안내했던 여행사 직원 하디가 길잡이 미야 씨에게 문자를 보내왔다. 튀니지 상황이 불안한데 아무쪼록 무사히 여행 잘 하시라고. 성실한 인상을 안겨주었는데 끝난 뒤까지 챙겨주는 마음이 고맙다.
2. 바뀐 운전기사가 미남이라고 여성들이 기뻐한다. '신사는 미녀를 좋아한다.'고 하였는데 '숙녀는 미남을 좋아한다.'로 바뀌어야 할 듯.
3. 마트마타에서 제르바를 오가는 길에 차창으로 바라보는 경관이 심란한 마음 때문인지 심드렁하다. 그래도 황혼이 짙어가는 이국적 풍광을 마음에 담아두자.
9. 산골마을에서 수도 가까운 항구도시로
1월 15일(토), 사흘째 갈길이 막연하여 모두들 불안한 표정이다. 일찍 아침식사를 마치고 가방을 챙겨 로비에 모였으나 운전기사와 현지가이드가 나타나지 않는다. 튀니지 사태가 국내뉴스에도 보도되어 가족과 친지들이 안부를 살피는 전화들이 걸려오고.
그제 도착한 한국청년들은 어제 하루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지 않고 상황을 지켜보는데 오늘도 대중교통수단이 쉽지 않은 터라 걱정스런 모습이다. 3주간의 일정이면 아직도 많은 날이 남아 있는데 공교롭게 어려운 상황에 빠져 든 셈이다. 혜초여행사 그룹은 튀니지 일정을 하루 앞당겨 몰타로 빠져나갔다는 소식이다.
9시경에 일단 어제 가기로 예정하였던 항구도시 수스(sousse)로 향하였다. 사흘간 묵었던 마트마타로 다시는 돌아오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을 안고. 한 시간을 지나 약간 큰 도시로 나오니 군인들이 교도소 건물 앞에 진을 치고 있는데 우리 일행을 보며 손을 흔들기도 하여서 약간 마음이 놓인다.
12시 반에 알젬이라는 도시에 도착하여 세계 여러 곳의 로마유적 원형경기장 중에 세 번 째로 크다는 경기장 앞에 버스를 세웠다. 공교롭게 공휴일(튀니지는 다른 아랍국과는 달리 금요일은 일하고 토, 일요일에 쉰다.)에는 경기장이 문을 닫는 날이라서 안에는 들어가지 못하고 밖에서 사진을 찍으며 주변을 한 바퀴 도는 것으로 관람을 갈음하였다.
점심으로 양갈비를 먹자고 의견이 모아졌으나 마땅한 음식점을 찾지 못하여 수스의 호텔까지 직행하기로 하였다. 도중에 점심을 해결하기 위하여 휴게소의 카페테리아에 들렸으나 음료 외에는 팔지 않아 각기 챙겨 온 비상식량으로 떼우고.
수스의 해변에 자리잡은 호텔에 도착하여 여장을 푸니 4시가 다 되었다. 일부는 시장 등을 돌아보겠다며 외출하였으나 가게들이 모두 문을 닫았고 5시부터는 군인들이 거리를 지키며 외출을 통제하여 호텔 경내의 바닷가 쪽 잔디밭을 산책하다가 돌아오기도. 가끔 총소리가 들려 알아보니 사람들이 모이는 것을 경고하는 공포탄을 쏘는 것이라고 한다.
현지가이드가 버스 안에서 들려준 몇가지 튀니지 정보가운데 교육은 고등학교와 전문대학까지는 무료이고 대학은 6개월 지원 후에 나머지는 본인부담이며 의료비도 무료라고 한다. 이슬람교가 다수지만 다른 아랍국가보다 엄격한 규율을 적용하지 않는 편이고 술도 판매하며 이슬람국가들이 금요일을 공휴일로 하는 것과 달리 토,일요일을 공휴일로 하는 등 무역과 관광 등 국제사회와의 교류가 원활하도록 개방된 시책을 펴고 있다고.
초대 대통령 부르기바는 독립운동가로 집권하여 31년간 종신대통령직에 있다가 벤 알리 현 대통령에 의하여 건강이 좋지 않음을 이유로 축출되어 13년간 은거하다가 2000년에 사망하였는데 국민적 추앙을 받는 성대한 장례식으로 예우하였다고 한다. 1956년에 독립하여 50년 넘게 두 명의 대통령이 통치해 온 셈이다. 튀니지의 관광 명승지인 토죄르와 카이로완을 못 간것이 아쉽지만 생생한 역사의 현장을 체험하는 것도 쉽지 않은 기회가 아닌가?
앞으로 45~60일 안에 후임대통령을 뽑기로 하는 등 상황이 안정되어 간다니 다행이다. 앞의 일은 불확실하지만 일단 수도에 가까운 큰 도시의 쾌적한 호텔에 머물 수 있음을 감사히 여기고 내일의 상황을 지켜보자. 도로변에는 조림이 잘된 대규모 올리브 밭이 쭉 뻗어있는데 국가가 직영하는 것으로 튀니지는 스페인, 이태리, 그리스에 이어 세계4위의 올리브수출국이라고 한다. 올리브나무와 더불어 아몬드 나무도 많이 있는데 더러 꽃이 피어 있기도 하고
저녁식사(호텔에서 제공하는) 시간에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안전한 곳까지 무사히 도착 한 것을 자축하며 와인 두병을 쏘았다. 모두들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건배를 하며 남은 일정도 무사하고 알차기를 축원하였다. 익산의 오현희, 복희 자매가 추가로 한 병을 더 내고.
저녁식사를 마친 후 카페테리아에서 커피, 맥주 등을 한 잔씩 마시고 옆방의 바에서 10여명의 여성들이 물 담배를 시음하며 즐거운 시간을 갖기도 하였다. 난생 처음으로 나도 한 모금 빨아보고. 젊은 여성들이 구김살 없이 박장대소하며 활발하게 노는 모습이 보기에 좋다.
2011년 1월 15일 저녁
튀니지의 항구도시 수스에서
10.이슬람 성지, 카이로완을 다녀오다
1월 16일(일), 아침에 호텔건너편 해변에 나가 지중해 동쪽에서 떠오르는 일출을 바라보며 불확실한 하루 일정이 순조롭게 진행되기를 빈다. 룸메이트에게 온 한국소식은 튀니지를 여행제한국가로 지정하였다는 연락이고 일행 중 딸이 보낸 문자메시지는 '엄마, 튀니지에 안 계시는 거지? 아빠랑 튀니지 상황이 안 좋아서 걱정하고 있어요.'
오전 9시에 호텔을 나서 수스시내를 돌아볼 예정이었으나 시내의 모든 상점이 문을 닫고 통행인도 별로 없어 한 시간 거리에 있는 이슬람성지 카이로완을 다녀오기로 계획을 변경하였다. 룸메이트는 혼자서 수스 시내를 들러보겠다며 버스에 승차하지 않아서 문자를 보내고 통화를 시도하였으나 연결되지 않아 동행하지 못하고.
시내 곳곳에 불에 탄 상점들이 눈에 띄고 도로에는 무장군인들이 삼엄하게 경계를 펴고 있는 가운데 차량통행이 뜸한 도로를 열심히 달려 11시경에 카이로완의 거대한 성곽으로 둘러싸인 메디나에 도착하였다. 성곽 안에 들어서니 북아프리카에서 가장 크다는 카이로완사원이 웅장한 모습을 자랑한다. 사원 안에는 들어갈 수 없어서 주위를 한 바퀴 돌고 인근의 주택의 2층 옥상에 올라가 사원안의 큰 기둥과 내부모습을 살펴보기도.
사원 옆으로 이어진 거대한 메디나에는 수많은 상점들과 술탄이 잠들어 있다는 무덤, 멀리 사우디아라비아의 메카와 연결되어 있다는 전설이 깃든 우물터 등이 자리 잡고 있다. 메디나를 한 바퀴 돌아 밖으로 나오니 많은 군중들이 운집해 있고 군인들이 이들의 통행을 감시하며 해산을 종용하는 듯 공포탄을 연달아 발사하는 등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길가에는 불에 탄 상점, 벽돌로 유리창을 막아 논 건물, 극장인 듯한 건물의 유리가 박살난 체 쌓여 있는 모습들을 볼 수 있고.
목이 말라 귤을 사니 1디너에 15개쯤, 꽤 많이 준다. 음식이나 과일이 싸다. 두 시간 가량 메디나 일원을 돌아본 후 인근에 있는 식당가를 수소문하여 양고기 갈비 파는 음식점에서 양갈비구이로 점심식사를 하였다. 처음 먹어보는 양갈비구이는 약간 질기면서도 고소한 맛이 괜찮다.
오후 3시경에 카이로완을 출발하여 수스로 돌아오는 길목에는 곳곳에 몽둥이를 든 청년들이 길을 가로막고 통행차량들을 일일이 살핀 후 통과시킨다. 우리가 탄 버스는 외국인관광객인줄 알아보고 별다른 마찰 없이 수스로 돌아올 수 있어서 다행이다. 그중 어떤 사람은 우리를 중국인으로 여겼는지 '차이니즈'라고 말하기도 .
수스의 호텔에 돌아오니 4시가 좀 지났다. 5시부터 통행제한이 있을 것을 감안하여 일행 대부분 버스에서 내려 곧장 해변을 산책하다가 돌아오기도.
튀니지인들이 약간의 흥분상태로 비상시국에 임하는 현장을 살펴보며 예기치 않은 돌발상황에서도 호텔에 파묻혀 있지 않고 튀니지의 또 다른 하루를 잘 보낼 수 잇어 다행이다. 지중해의 날씨는 쾌청하고 햇빛은 강렬하며 꽃은 화려한데 나그네의 마음은 가볍지 않음이여.
저녁식탁에서는 정애경, 김화경 님이 각기 와인 두 병씩을 냈다. 정애경 님은 어려운 상황에서 카이로완을 다녀올 수 있는 것과 그곳에서 긴요한 자료를 얻게 되어서
기쁜 마음으로 와인을 낸다고.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기쁨을 같이 나누고 서로를 아끼는 아름다운 모습이다. 일행들이여, 위축되지 말고 힘을 내자.
2011년 1월 16일 저녁
계엄령이 선포된 튀니지의 수스에서
추신,
혼자 남은 룸메이트 김훈기 교수는 수스 시내를 두루 돌아다니며 비좁은 차안에서 시달리기보다 여유로운 공간이 좋았다고 말한다. 음식점이 모두 문을 닫아 탁자 2개 놓인 작은 식당에서 간신히 점심을 해결하였다며. 미야 씨가 따로 양갈비를 가져와서 맛을 보게 하는 마음씨가 고맙다.
11. 악화된 상황, 하루 종일 호텔에 머물다
1월 17일(월), 아침에 일어나니 하늘에 구름이 잔뜩 끼었다. 오전 8시 반, 행여 비가 올까봐 우산까지 꺼내 휴대용가방에 챙겨 넣고 로비로 나가니 일행들이 웅성거린다. 밤사이에 버스가 사라지고 현지 가이드도 나타나지 않는다. 길잡이 미야 씨가 낭패한 표정으로 현지 여행사와 연락하니 더 이상 버스를 움직이기 어려워 기사와 가이드가 철수하였다며 이틀간 이 호텔에 머물다가 알제리 국경으로 곧장 이동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이라고 전한다.
갑자기 상황이 엄중하여져서 여행사의 의견을 존중하되 튀니지 대사관에 이 사실을 알려주고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호텔 측의 이야기로는 버스와 기차 등 교통편이 중단되고 주유소의 급유도 안 된다며 호텔 밖으로 나가면 위험하다는 의견이다.
룸메이트 김 교수가 기차역까지 택시타고 다녀와서 오후 1시에 튜니스행 기차가 운행된다는 정보를 알아 왔지만 무작정 튜니스로 가기도 어려운 형편이다. 대사관에서는 가능한데로 빨리 공항으로 이동하여 튀니지를 빠져나가라는 권유이나 항공편도 불확실한데 적극적인 안전대책이라고 보기 어렵고.(애당초 대사관에 큰 기대를 걸지 않았으나 국민이 곤궁에 처한 사실은 알려주어야 할 터) 현지 여행사에서 가능하면 내일 오전에 튜니스로 이동 할 수 있도록 교통편을 제공하겠으며 항공편도 알아보겠다니 귀추를 지켜보는 수밖에 없다.
점심시간에는 버너와 먹거리를 가져 온 일행들이 두 세 곳에서 음식을 마련하여 함께 들기도, 여성 중 막내인 엄지연 님이 호텔앞 가게에서 물을 10병 사 와 방별로 하나씩 나눠주어서 고마웠다.
오후4시경에 호텔 옆 바닷가를 잠시 산책하고 돌아와 욕조의 더운물에 몸을 담그며 땀을 빼기도. 호텔시설이 비교적 쾌적하고 아침, 저녁을 제공하니 이런 곳에서 안전하게 대피하는 것을 다행으로 여긴다.
TV에서는 시위와 관련된 상황을 계속 방송하고 있으나 내용을 알아들을 수 없다.
전하는 이야기로는 대통령이 사우디로 탈출하면서 후계자를 지정하여 그를 지지하는 세력과 반대 세력이 대립하는 상태여서 계엄군이 치안을 확보하지 못하고 총기를 든 세력과의 충돌 가능성 때문에 치안이 극도로 혼미한 상황이라고 한다.
TV의 다른 채널에서는 한국의 '추노'가 방영되고 있다. 한국드라마는 이집트, 모로코까지 퍼져 나가고 있다는 보도를 들은 적이 있는데 튀니지의 현장에서 이를 지켜보는 감회가 별다르다. 어제 카이로완의 메디나(시장)에서는 메이드인 코리아라고 적힌 가게를 보기도 하였는데.
음력으로 보름이 가까워지는가, 창밖으로는 바다위로 둥근 달이 떠오른다. 달아, 달아, 밝은 달아, 우리 사정 헤아려서 어려움을 이겨내고 내일 밤은 홀가분한 마음으로 그대를 맞이할 수 있으면 좋으리라.
2011년 1월 17일 저녁
달이 밝은 수스에서
추신,
1. 위급한 상황 속에서 잘 견뎌낸 것이 한결 대견하게 여겨진다. 일행들에게 '형통할 때는 기뻐하고 곤고할 때는 생각하라'는 성경말씀을 소개하며 어려운 상황일수록 이를 깊이 새겨 잘 이겨 나가기를 권면하였다.
2. '인도로 가는 길' 한국여행사에 가족들의 문의가 쇄도한다고 한다. 더러는 가족들에게 염려하지 말라고 전화와 문자로 소식을 전하기도. 휴대폰에 한국의 문자는 잘 들어오는데 한국으로의 통화는 연결되지 않는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데 아무 소식 없음이 오히려 걱정을 덜어줄지도
12. 수도 튜니스에 입성하다
1월 18일(화), 아침 일찍 사흘간 묵었던 수스를 떠나 튀니지의 수도 튜니스로 향하였다. 출발예정 시간보다 한 시간이나 늦게 나타난 버스를 보며 늦게라도 와준 것이 고마운 형편이다.
현지 여행사에서는 튜니스 공항까지 우리를 태워다주는 것으로 모든 것을 끝낼 심산인 듯, 그러나 내일까지는 튀니지에 체류하여야 할 상황이어서 공항에서 튜니스 시내로 방향을 틀어 원래 튜니스에 머물 때 묵기로 한 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길잡이 미야 씨는 시내에 나가 알제리 행 교통편을 알아보기로 하고 3~4명씩 팀을 이루어 낮 동안에 튜니스 일원을 돌아보기로 하였다. 길눈이 밝은 룸메이트 김 교수와 혼자서도 잘 다니는 정미정 님 셋이서 택시를 타고 메디나로 향하였다. 이슬람의 전통이 남아 있는 구시가지이며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튜니스 메디나(Medina of Tunis)의 언덕길에 올라서니 넓은 광장에 수상 집무실, 교육, 법무부등 중앙부처의 건물이 들어서 있다.
메디나 안에는 오래된 이슬람 사원과 수백 년 된 코란학습관이 고풍스런 모습을 간직하고 있고 골목골목으로 이어진 가게들에는 각종 잡화들과 수공예품들이 진열되어 있으나 별로 사고 싶은 물건이 없다. 한 시간 넘게 메디나를 돌아보고 광장으로 나와 1km가량 큰길을 따라 시계탑부근까지 걸어가는 동안 여러 곳에 군중들이 모여들고 군인과 경찰들이 이들과 대치중이다. 어느 곳에서는 최루탄을 발사하여 메케한 연기가 솟아오르고 공중에는 헬리콥터가 배회하며 상황을 주시하는 모습이다. 경계중인 군인들의 표정이 부드러워 꽃다발이 놓인 장갑차 앞에서 이들과 사진을 찍기도
시계탑 건너 기차역에서 2량으로 연결된 전동차를 타고 카르타지(한니발 장군의 활동무대인 카르타고유적지)로 향하였다. 카르타지에 내려 바르사 언덕에 있는 세계문화유산 카르타고 유적지를 철문사이로 살펴보고 인근에 있는 안토니우스 공중목욕탕도 둘러보았다. 안토니우스목욕탕은 군인들이 경계중이고 바르사언덕의 카르타고 유적지로 올라가는 길에는 부켄베리아 등 화사한 꽃이 아름답게 핀 고급주택들이 늘어서 있다. 김 교수가 이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 것을 목격한 청년 두 명이 뒤따라와 이곳은 장관의 관저라며 찍은 사진 중에서 관저를 배경으로 한 것은 삭제하라고 강력하게 요구한다.
카르타지 한니발 역에서 다시 전동차를 타고 세 정거장을 가면 흰벽에 푸른 창들을 여러 모양으로 두른 민가들이 운집한 전통마을 시디부사이드(Sidi bou side)가 나온다. 한 시간 넘게 오르막길을 따라 등대가 있는 해변 언덕에 이르니 지중해의 푸른 물결과 아스라이 떠있는 섬들이 환상적인 모습으로 다가온다. 김훈기교수와 정미정 님이 계속 카메라를 눌러대며 더러는 현지인들과 포즈를 취하기도 하는 등 기억에 남을 작품 만들기에 열중이다.
시디부사이드에서 우리 일행들과 몇 차례 만나기도 하였는데 마지막에는 정재숙, 정애경 님을 기차역에서 만나 함께 호텔로 돌아왔다. 오는 도중 어느 기차역에서 막 출발하려는 순간 나타난 소매치기가 차창 밖에서 정미정 님의 팔을 낚아채며 손에든 지도(지갑인줄로 착각 한 듯)를 빼앗아가는 활극이 벌어지기도. 같은 칸에 탄 튀니지인과 그의 아들이 소매치기를 향하여 소리를 지르며 꾸짖고 아들은 침을 뱉으며 분한 표정이다. 낯선 외국인이 당한 곤경을 감싸주는 선량한 시민의 마음이 고맙다. 이들 아버지와 오빠랑 함께 탄 어린 소녀에게 김 교수가 작은 선물을 주니 상냥하게 웃으며 우리 일행들에게 양볼을 맞추면서 귀여운 작별인사를 하여 피곤한 몸이 가벼워진 느낌이다.
4시 50분경 종점에 내리니 행인들과 차량의 통행이 뜸하고 거리가 한산하다. 가까스로 택시를 타고 호텔에 돌아오니 5시가 좀 지났는데 호텔주변 거리는 모두 문을 닫고 조용하다.
어제 하루 별로 움직이지 않고 호텔에 머물렀는데 오늘은 평소보다 2배 이상 열심히 걸으며 여러 곳을 알차게 둘러본 셈이다. 내일은 또 어떻게 될지, 우선 쉬고 보자.
2011년 1월 18일 저녁
시위가 벌어지고 있는 튀니지의 수도 튜니스에서
추신,
튀니지의 시위에 이어 이집트에서도 대규모반정부시위가 일어났다. 언론에서 다룬 튀니지와 이집트시위의 의미를 살펴보자.
아랍사태는 문명사적 M 혁명이다
프랑스 현대철학자 질 들뢰즈(1925~95)는 중심부와 주변부(periphery)로 나뉜 사회에서 혁명은 주변부에서 시작된다고 말했다. 23년간 장기 집권한 독재자 벤 알리를 축출해 아랍세계에 혁명의 쓰나미를 일으킨 튀니지의 재스민 혁명도 시디부지드라는, 수도 튀니스에서 남쪽으로 28㎞ 떨어진 이름 없는 한촌(閑村)에서 아주 하찮게 보이는 사건으로 시작됐다. 여자 경찰관이 고졸의 청과물 노점상 무함마드 부하지지의 청과물에 침을 뱉었다. 모욕을 참지 못한 부하지지는 분신자살하고, 그의 가족이 주 청사로 몰려가 격렬한 항의시위를 했다. 시위하는 모습이 휴대전화에서 페이스북으로 전파되고, 순식간에 200만 명의 페이스북 사용자가 시위에 가담했다. 로마에 멸망한 카르타고 이래 그런 일에 깨어진 적이 없는 대중의 침묵의 벽이 무너지자 독재자는 황망하게 국외로 탈출했다.
재스민이라는 향기로운 이름의 혁명은 이제 M(모바일)이라는 가치중립적이고 쿨한 이름으로 바뀌어 불리기 시작했다. 블로그로 반체제 활동을 하다 구속되었던 33세 청년이 튀니지 과도정부의 청년체육부 장관에 임명된 것은 모바일의 힘과 M혁명의 문명사적인 의미를 상징적으로 나타낸다. 분신자살로 민주주의의 순교자가 된 부하지지의 누이가 IHT 칼럼니스트 로저 코언에게 “모든 아랍 국가가 부하지지의 등장을 고대한다”고 말한 것은 과장이 아니다.
이집트는 오래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2011년 1월 25일 이집트의 페이스북 가입자들은 호스니 무바라크 대통령 축출 시위를 벌이자는 호소문을 받았다. 처음에는 반응이 냉랭했다. 그러나 계속된 페이스북과 트위터의 호소에 전국적으로 수십만 명의 젊은 층이 호응하고, 일반 시민과 지식인들이 가세했다. 이집트의 휴대전화 소지자는 500만 명이라는 통계가 나왔다. 아이로니컬하게도 1월 25일은 이집트의 ‘경찰의 날’이었다. 시위대는 이날을 ‘분노의 날’로 선포하고 카이로 시내 곳곳에서 수만 명 단위로 무바라크 물러가라!를 외치는 데모를 했다. 30년 장기 집권으로 심각한 정치적 자폐증에 걸린 무바라크는 모바일 시대의 도래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 그는 경찰을 동원해 시위대에 최루탄과 물대포를 쏘았다. 가장 포스트모던한 모바일로 무장한 반정부 시위대에 전통적인 최루탄과 물대포는 위협이 될 수 없다. 무바라크는 집권 연장과 아들에게로의 권력 세습 포기와 자유선거를 포함한 정치개혁을 약속하여 9월까지의 남은 임기를 채우는 데 안간힘을 쏟고 있다.
그가 즉각 퇴진의 위기를 모면한다고 해도 M혁명의 불길은 줄어들지 않을 것이다. M혁명의 쓰나미는 이미 요르단·예멘·시리아·알제리·바레인을 휩쓸고 사우디아라비아와 쿠웨이트 집권세력의 간담을 흔들어놓고 있다. 아마도 평양의 북한 지도자들도 가슴 졸이면서 M의 위력에 몸을 떨고 있을 것이다.
요르단 왕은 시위대의 요구를 받아들여 내각을 새로 임명하고 각종 개혁을 약속했다. 32년째 집권 중인 예멘의 살레 대통령도 임기가 끝나면 권좌에서 물러나겠다는 말로 높은 실업률과 물가고에 분노한 국민들을 회유하고 있다. 아랍권의 다른 나라 지도자들도 나름대로의 비상구를 찾고 있다. 미국에 이집트는 중동정책 수행에 필요한 특별한 우방이다. 그래서 무바라크의 즉각 퇴진을 요구하던 미국은 술레이만 부통령 체제를 중심으로 정치개혁을 하면서 9월 임기가 끝날 때까지 무바라크의 유임을 받아들이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미국은 무엇보다도 무바라크 퇴진으로 생길 권력의 공백을 무슬림 형제단이 메우는 사태를 걱정해 한발 물러섰다.
미국의 대표적 지식인 로버트 캐플런은 튀니지가 아랍권에서는 가장 정치·경제적으로 안정된 나라라는 특성을 지적하면서 튀니지 혁명이 아랍권 전체의 혁명으로 확산될 보편성은 없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포스트모던한 혁명의 성격에 무지하고 주변부 유목민들을 정치적인 요소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유럽과 미국 계몽주의적 합리주의자들의 편견의 전형이다. 미국은 전략적인 이익과 지도자가 없는 M혁명의 특성을 악용해 혁명을 절반의 성공에 눌러두는 데 일시적으로 성공할 수 있다. 그러나 모바일로 무장한 유목민들은 횡단적으로 끊임없이 연결·접속하면서 아랍의 오랜 전제체제와 구악을 하나씩 청산할 것이다. M혁명은 미국과 유럽의 이익 때문에 멈출 수 없는 문명사적인 사건이다. 2009년 이란의 M혁명은 실패했지만 그것은 튀니지 혁명이 아랍인들을 혼곤한 잠에서 흔들어 깨우기 전의 실험이었다.(중앙일보 2011. 2. 9 김영희 국제문제 대기자의 글)
13. 취소된 알제리 여행
1월 19일(수), 일정상으로는 오늘 튀니지 국경을 넘어 알제리로 들어갈 날이다. 그런데 알제리 국경으로 가는 튀니지쪽의 사정이 안 좋아서 육로통행이 불가능하다는 길잡이의 설명이다. 어제밤에 이 사실을 알게 된 일행들이 크게 실망하여 이에 적절하게 대처하지 못한 길잡이에게 항의를 하며 분개하였으나 수시로 변하는 현지 상황에 길잡이로서도 뾰족한 방법이 없어 보인다. 결국 오늘 알제리로 가는 것을 포기하고 하루 더 튜니스에 머물다가 내일 아침 8시 55분 비행기 편으로 다음 행선지인 모로코로 들어가기로 결정되었다.
어제밤 한국의 동생에게서는 '튀니지의 국가비상상태선포'로 순조로운 여행이 진행되는지 궁금하다는 문자메시지가 들어왔다. 재스민혁명(튀니지의 반정부시위가 국제적으로 이렇게 불리는 듯)의 반응이 어떠한지도. 김교수가 전해준 바로는 대학출신의 노동자(중앙일보 기사로는 고졸의 청과물 노점상)가 분신함으로써 갑작스럽게 확산된 시위가 수그러들지 않는 것은 연립내각에 현 집권세력의 총리와 각료가 다수 참여하여서 이에 대한 불만으로 시위가 진정되지 않는다고 한다. 군은 정치적으로 중립이고.
상황이 안좋은 줄 알면서도 내심 알제리행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한 일행들의 불만이 한꺼번에 표출되어 사태를 수습하기가 쉽지 않았으나 하루밤 자고 나서는 모두들 내일 출발하는 모로코행을 수용하는 분위기다. 다만 예정보다 3일 빠르게 모로코에 도착하는 일정을 어떻게 정하는가에 대한 의견이 여러 갈래여서 이를 한데 모으기가 쉽지않다. 모든 조직이 일상적으로 굴러갈 때는 큰 문제가 없다가도 변수가 생기면 갈등과 이견이 있기 마련, 우리도 잠시 그런 시험대에 오른 것이다. 결국은 좋은 방향으로 매듭지어질 터.
알제리행이 취소되면서 22일에 알제에서 만나기로 한 약속도 자동적으로 물거품이 되었구나. 알제리에서 만나기로 한 사람은 3년 전 영국여행 때 기차 안에서 한 시간 여 대화한 적이 있는 일제리인(변호사)인이다. 동양에 관심이 많은 그가 최초로 만난 한국인으로, 나도 최초로 만난 알제리인이어서 서로 호기심을 갖게 되었다.
이 메일로 한두 번 연락한 적이 있어서 이번 여행에 앞서 알제리 방문시 만날 수 있는지 확인하였더니 1월말이나 알제리에 돌아오게 되므로 친한 대리인과 만나도록 하면 좋겠다는 의견이었다. 아내에게서 문자로 다시 전해오기를 22일 11시에 알제리대학 정문에서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한다는 내용이었는데,,,
어제 문을 닫았던 바르도박물관이 열렸다는 소식을 듣고 오전에 바르도박물관으로 향하였다. 대부분 4명 1조로 택시를 다고 갔는데 이석춘 님, 신양희 님, 홍기례 님과 함께 남는 시간도 활용할 겸 박물관까지 걸어가기로 하였다. 여러 차례 길을 물어 1시간이 넘어 박물관에 도착하니 일행 중에는 이미 관람을 마치고 나오는 분도 있다. 튀니지의 루브르라고 부른다는 바르도박물관(Bardo Musum)은 2년 전부터 대대적인 수리작업 중이어서 1-3전시관의 벽과 바닥, 천장에 붙은 모자이크 작품 외에는 볼만한 것이 별로 없어서 실망스럽다. 입장료가 4디너로 비교적 저렴한 편이어서 다행이라고 할까?
박물관에서 나와 이석춘 님과 함께 어제 들른 카스바 쪽 메디나에 들러 시장을 한 바퀴 돌아본 후 슈퍼마켓에서 쌀 두 봉지와 상추를 사들고 호텔로 돌아왔다.(13kg의 쌀이 동 나서 시장을 몇 차례 돈 후 슈퍼마켓에서 쌀을 판다는 말을 듣고 가까스로 납작한 안남미를 산 것이다.)
2시 넘어 호텔로 돌아와 이석춘 님이 지어준 쌀밥으로 점심을 맛있게 들고 방으로 오니 오후 3시, 10일간의 튀니지 일정이 이렇게 마무리되는구나.
사랑하는 일행들이여,
'끝이 좋으면 모든 것이 좋다.'는 말이 있거니와 우리 여정의 마지막을 잘 마무리하여 튀니지에서의 고단한 여행도 즐거운 추억으로 기억하기를.
2011년 1월 19일 저녁
큰 역사의 전환기를 맞은 튜니스에서
제 3 부 녹지와 사막이 조화를 이룬 모로코
14. 튀니지를 벗어나 모로코로
1월 20일(목), 새벽 5시에 일어나 간단한 아침식사를 하고 6시에 공항으로 향하였다. 이른 시간이라 공항은 한산한 편, 출국수속을 마치고 탑승구에서 한 시간 이상 기다려도 탑승구가 열리지 않는다. 예정시각보다 30분 늦게 비행기가 이륙하니 지난 일주일간 불안했던 튀니지를 드디어 벗어나게 되었구나 하는 안도감이 든다. 가장 어린 형민이는 이곳 튀니지에서 곧장 한국으로 가게 되었고.
약 세 시간 여 비행하여 모로코의 카사블랑카에 도착하였다. 비행기에서 내려다보는 모로코 산야가 리비아, 튀니지의 황량한 광야와는 달리 녹색 자연이어서 더 풍요롭게 느껴진다.
공항에서 두 대의 전용차량을 이용하여 중세시대 400여 년간 모로코의 수도였던 페스(PEZ)로 향하였다. 룸메이트인 김훈기 교수는 혼자서 다른 지역을 둘러보겠다며 며칠 후 합류하기로 하고.
8년 전에 스페인과 포르투갈 , 모로코를 패키지 상품으로 여행한 적이 있어서 그때 카사블랑카와 패스를 둘러본 적이 있으나 카사블랑카 -페스간의 5시간에 걸친 고속도로 주변은 처음 보는 듯 낯선 풍경들이다. 도로주변의 짙푸른 목초지와 화사한 꽃밭이 강렬한 햇빛에 반사되어 겨울기분을 느낄 수 없고.
오후 2시, 세 시간을 쉬지 않고 달려 작은 도시에서 점심식사를 하였다. 시장통의 여러 음식점에서 양꼬치구이, 떡갈비 등의 메뉴로 점심을 들고 오렌지, 사과, 토마토, 귤 등 과일과 물을 사기도
두 시간을 더 달려 5시경에 페스에 도착하여 옛 왕궁 옆의 고풍스런 호텔에 여장을 풀고 바뀐 룸메이트 김종년 선생과 함께 호텔주변을 30여 분간 산책하노라니 튀니지에서 오후 5시 이후 발이 묶였던 것과 다른 자유로움이 반갑다. 튀니지에서 즐기지 못했던 밤 문화를 체험 할 수 있음도 즐거움이고.
족쇄를 채운 것처럼 불편했던 곳에서 벗어나 통행이 자유로운 곳에서 숨 쉴 수 있음을 감사하며 잠자리에 든다.
2011년 1월 20일 저녁
모로코의 옛 도시 페스에서
추신
1. 튀니지의 대통령부인이 중앙은행 금고에서 두바이로 빼돌린 금괴가 1,5톤이라는 말이 있는데 현지 불어판 신문에는 벤 알리 대통령이 남기고 간 고급시계와 귀금속들의 사진이 크게 실려 있다. 부귀와 영화도 일장춘몽인 것을.
2. CNN 방송에서 호주와 한국이 아시안컵 8강에 최종 진출하였다는 보도를 보았는데 동생에게서는 일본, 카타르, 우즈베키스탄, 요르단, 호주, 이란, 이라크, 한국이 8강에서 만난다는 문자메시지를 보내왔다.
3. 아내가 춥지는 않는지, 건강하게 지내라는 문자 메시지를 보내왔다. 꿈에는 구순이 넘은 노모가 힘없는 표정으로 앉아있는 모습이 보이기도. 언제 어디서나 가족들의 응원과 유대가 중요한 것을 깨우치는 듯
4. 이틀 전 회의 때 둘째언니 이상희 여사가 알제리행이 무산되는 등 일정에 차질이 생긴 것에 대하여 길잡이를 크게 질책하였는데 밤늦게 길잡이를 찾아가 심하게 말한 것을 사과하고 상한 마음을 풀어주었다고 말하여서 잘하였다고 칭송하였다.
5. 길잡이 미야 씨가 튀니지에서 모로코에 온 후에 '인도로 가는 길'에 올린 글
모로코 페스 입니다.
안녕하세요?
정말 오랜만에 글을 올립니다.
저희 팀은 리비아를 여행하고 튀니지로 들어갔습니다.
제르바와 마트마타를 여행하고 두즈로 가려는 참에 우리는 튀니지의 "재스민혁명"을 맞닥뜨리게 되었습니다.
튀니지 중부의 (우리가 가려는 도시근처)에서 대졸 노점상의 생계보장을 요구하며 자살시위를 한 덕분에 촉발된 재스민 혁명으로 우리는 목적지인 두즈로 가지도 못하고, 토죄르로도 가지 못했습니다.
이래저래 어떻게든 가보려 했지만 그때 이미 70여명이 사망한 관계로 그길로 가는 건 너무 위험한 상황이었죠. 결국 튀니스로 올라가기 위해 위쪽의 도시인 수스로 힘겹게 이동했습니다.
하지만 수스도 혁명의 여파로 쉽게 나돌아 다닐수도 없었고 가게들은 모두 문을 닫았습니다. 시내중심지인 버스정류장에는 많은 사람이 모여 시위를 하고 있었고 경찰이 시위대를 저지하기 위해 발포를 한 후라 어떤 일이 있을지 몰랐죠. 대형슈퍼마켓들은 약탈을 당하고 불이 질러졌습니다.
하지만 다행히 대통령이 도망간 후라서 튀니스는 급격히 안정을 찾아갔습니다. 다른 나라의 관광객들은 모두 철수한 상태라 우리가 힘겹게 튀니스로 왔을 때는 관광객이라고는 우리밖에 없었습니다.
TV에 나오는 시위현장과 시계탑 주변을 시위대와 함께 하고 시민들에게 발포를 하지 않은 군에 애정의 표시로 꽃을 선물하는 현장에 우리는 함께하며 사진을 찍었습니다. 현지인들은 친절하게도 관광객인 우리를 보호하기위해 많은 노력과 친절을 보여주었습니다.
알제리일정을 진행할 수 없게 되어 모두 굉장히 실망하셨지만 혁명을 실감하고 함께 있었다는 특별한 경험으로 위안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희는 항공편을 이용해 오늘 튀니스에서 카사블랑카로 와서 전용차량을 타고 페스로 왔습니다. 호텔도 멋스럽고 메디나 바로 앞이라서 지금은 모두 메디나를 열심히 돌아다니고 계십니다.
지금까지의 아쉬움을 만회라도 하듯이요 ^^
내일은 가이드를 고용해서 페스 메디나를 자세히 돌아보고 역사와 유적의 도시 메크네스로 이동할 예정입니다. 일정이 제대로 진행될 수 없었음에도 이해와 격려를 보내주신 팀원들께 감사드립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많은 도움을 주신 북아프리카 담당자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럼 다음에 또~
15. 모로코의 영혼이 깃든 패스 (PES)
1월 21일(금), 어제 밤 욕실에서 샤워를 끝낸 후 욕조 밖으로 나오려는데 발이 미끄러져 욕탕 벽에 머리를 부딪쳐 크게 다칠 뻔 했다. 튀니지의 불안정한 상황 때문에 안전을 걱정하였는데 평지에서 낙상한다는 말처럼 안전지대라도 불의의 사고를 당할 수 있음을 일깬다. 아무쪼록 일행 모두 안전에 유의하기를
아침 7시에 3층의 벽난로 장작불이 따뜻하게 타오르는 식당에서 아침식사를 들었다. 9시에 체크아웃을 하고 가방을 호텔 수하물 보관소에 맡긴 후 현지가이드 와피의 안내로 메디나와 전망대를 돌아보았다. 모로코인의 일부를 이루고 있는 베르베르족 출신의 와피(33세)는 훤칠한 키에 능숙한 영어로 페스의 역사와 문화를 개략적으로 설명하며 미로처럼 얽혀있는 메디나의 내부구조까지 샅샅이 안내한다.
모로코는 '해가 지는 곳'의 의미를 지닌 말로 북아프리카의 북서쪽 끝에 지중해를 사이에 두고 유럽과 경계하고 있다. 기원전 12세기 페니키아 상인들이 지중해 연안에 교역소를 세웠고 기원전 5세기에는 카르타고 인들이 대서양연안에 거점을 만들었으며 기원전후에는 로마의 충실한 동맹국이었다가 속주가 되기도 하였다. 7세기말에는 동쪽에서 온 이슬람교도의 침략을 받았으나 11세기부터 300여 년 간, 베르베르족 동맹이 모로코 뿐 만 아니라 이슬람권의 스페인 지역까지 통치하기도 하였다. 14세기에 스페인의 그라나다 지역의 이슬람세력이 쇠퇴하면서 이 지역에 살던 유대인과 이슬람들이 페스에 정착하여 지금도 페스에는 유대인과 이슬람의 두 구역으로 나누어 살고 있기도 하다.
페스는 1200년 전 이슬람왕조시대의 건물과 정취를 느낄 수 있는 고대도시로 1100년 전에 세계최초의 대학이 세워졌고 그곳이 지금은 세계에서 네 번째로 큰 모스크(메카, 이스탄불, 카사블랑카에 이어)로 오늘이 마침 금요일이어서 많은 신도들이 넓은 사원의 곳곳에서 발을 씻기도 하고 엎드려 절하기도 하며 큰 소리로 코란을 낭송하기도 한다.
9,400여개의 골목길이 있는 세계최대의 미로로 유명한 페스메디나를 세 시간 여 돌아보며 도자기 만드는 곳, 피혁가게, 염색공장, 청과시장 등을 자세히 살필 수 있었다. 메디나 안에서 한국의 관광객들과 조우하기도 하였고 리투아니아에서 왔다는 젊은 여성은 서울의 경기대학에서 4개월간 한국어를 공부하였다며 '안녕하세요, 감사합니다'로 반가움을 표시하기도 한다.
메디나의 미로를 벗어나 호텔로 돌아오니 오후 2시, 처음에는 모두 함께 출발하였다가 도중에서 한 두 명씩 흩어져 끝에는 7명이 남았다. 남은 일행에게 왕언니가 점심을 사겠다고 하여 호텔인근의 메디나 골목식당에서 양고기와 닭고기 메뉴의 식사를 한 후 현지가이드 와피와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메디나의 미로는 차량이나 마차가 나닐 수 없는 좁은 골목이어서 나귀나 말의 등위에 물건을 실어 나른다. 장판지처럼 얇게 민 밀반죽 비슷한 부치게를 달궈진 봉긋한 돌 판에 구워 낸 먹거리가 고소한 맛이고 갓 구워낸 빵이 약간 달면서 부드럽게 씹히는 맛도 괜찮다. 어디서나 입을 즐겁게 해주는 것이 좋은 일.
열심히 돌아다니는 일행들과는 달리 일찍 호텔에 돌아오니 두 시간여의 시간 여유가 있다. 로비의 탁자에서 잠시 기록을 하고 있으려니 밖으로 연결된 그늘진 곳이라서 옷을 꽤 두껍게 입었는데도 찬 기운이 든다. 호텔에서 멀지 않은 작은 광장으로 나가니 많은 사람들이 양지 바른 곳 에서 해바라기를 하며 담소를 즐긴다. 열 살 전 후의 어린이들이 낯선 이방인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기에 껌을 한 개씩 나눠주며 눈웃음을 보내니 사양하지 않고 받아 씹는다. 그 중 귀여운 소녀가 악수하듯 손을 잡더니 입맞춤으로 인사하기도
오후 5시에 페스를 출발하여 서쪽으로 약 60Km 떨어진 메크네스로 향하였다. 6시 반에 메크네스의 이비스(ibs)호텔에 도착하여 여장을 풀고 페스의 메디나에서 산 빵과 장재숙 님이 준 귤, 한국에서 가져온 김과 땅콩 등으로 간단히 저녁식사를 대신하였다. 일부러 체중조절도 하는 터에 저칼로리 음식으로 대처함도 괜찮은 듯.
2011년 1월 21일 저녁
모로코의 메크네스에서
추신
1. 3년 전 에 영국에 체류하면서 아들과 함께 아일랜드, 프랑스 등을 여행하며 ibs호텔을 이용한 적이 있다. 저렴하면서 실용적인 느낌이 들었다.
2. 페스의 현지가이드를 통하여 모로코와 페스의 역사와 문화 등을 익힐 수 있었다. 나는 여행을 통하여 눈으로 보는 관광(관광), 귀 로 듣는 관음(관음), 책으로 보는 관서(관서) 인격을 수양하는 관덕(관덕)의 단계를 체득하면 좋으리라 여긴다.
이에 관하여 내가 쓴 책 '여행에서 배우는 삶과 문화'에 실은 내용을 소개한다.
'나는 여행을 통하여 첫 단계로 관광을, 그리고 다음 단계로서 관음, 관서, 관덕의 경지에 차례로 이르는 것이 좋겠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관광은 눈에 들어오는 풍광을 즐기는 깃이며, 역사와 문화를 듣고 아는 것이 관음이다. 나는 영월 청령포의 단종유배지에서 관음송을 보며 이를 새겼다. 그리고 관서는 책을 통하여 깊이를 더하는 것이다. 안동 도산서원에 들렀을 때 성리학자 주자가 쓴 글에서 따왔다는 어느 해설문을 보며 터득했다. 마지막으로 관덕은 기술에 앞서 마음의 수양과 기품을 갖추어야 한다는 뜻인, 제주시의 옛 무예수련장인 관덕정을 돌아보며 그 의미가 적절한 것을 깨쳤다. 인생은 나그네라는 말도 있거니와 삶의 과정을 통하여서도 이러한 경지에 이르면 좋지 않겠는가?'
16. 로마유적지와 시골 장터가 볼만한 메크네스 인근
1월 22일(토), 아침에 일어나 창밖을 보니 바람이 많이 분다. 오전 8시 반에 메크네스 북쪽 33km 지점에 있는 카르타고와 로마시대의 유적지 볼루빌리스(Volubilis)로 향하였다. 도로변의 구릉지에 올리브, 선인장, 용설란 등이 무성하게 자라고 검붉은 색의 밭이랑이 기름진 땅들이어서 마치 고향(전라북도 고창)의 누런 황토밭을 연상케 한다.
1500년대 리스본 지진 때 파괴되어 폐허가 된 유적지의 한 가운데 약간 높은 봉우리에서 사방을 살펴보니 꽤 넓은 지역에 촘촘히 들어선 기둥과 벽들의 잔해가 2000년 전에 융성한 도시였음을 실감케 한다. 길잡이 미야 씨도 처음 와 보는 곳이라며 리비아의 렙스타 마그나 다음으로 인상적인 장소라며 만족감을 표시하고. 특히 폐허가 돤 벽돌 사이의 바닥에 새겨진 모자이크가 볼만하다.
9시 10분부터 11시 반까지 두 시간 넘게 고즈넉한 유적지의 이곳저곳을 여유 있게 돌아보는 사이에 40여명의 초등학생들이 여러 선생님들과 함께 견학을 하고 중국인과 서양인들도 여러 그룹이 뒤를 이어 들어온다. 같이 폐허를 둘러본 이상희 여사는 황성옛터의 노래 가락이 생각난다며 따뜻한 햇볕 아래 한숨 자고 싶다고 말하기도. 나도 황성옛터를 떠올리던 참이라 이심전심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11시 반에 이곳을 출발하여 인근 언덕받이에 있는 모우레이(Moulay)라는 시골도시에 들어서니 마침 장날이기라도 한 듯 수많은 사람들이 1km쯤 되는 거리에 쏟아져 나와 발 디딜 틈이 없을 마만큼 붐빈다. 어느 곳이나 북적이는 시장에서 삶의 활력을 느끼기 마련, 삼삼오오 떼를 지어 문전성시를 이룬 시장터를 30여 분 간 돌아보며 모로코인들의 생동하는 삶의 모습을 살필 수 있어서 좋았다.
12시 넘어 이곳을 출발하여 메크네스의 신시가지에 있는 음식점에 도착하니 오후 1시, 통닭과 따진 등의 음식을 시켜먹고 규모가 큰 메디나로 향하였다. 17세기에 수도이기도 하였다는 메크네스의 메디나는 왕궁같이 여겨지는 큰 성벽이 인상적이고 생필품이 수북하게 쌓인 시장터를 한 바퀴 돌아보니 어느덧 오후 3시가 넘었다.
메디나 광장의 한 복판에 사람들이 모여서 웅성대는 곳을 들여다 보니 약장수가 한판 벌인 듯, 사람 사는 속내가 어디나 다를 바 없구나.
'바람 불어 좋은 날'이라는 영화가 있었던가, 아침에 불던 바람이 유적지에서는 잠잠하다가 메크네스에 들어오니 또 다시 강해진다. 무슨 좋은 일이 있으려나.
오후 4시에 메크네스를 출발하여 8시경에 카사블랑카의 중심가에 있는 호텔에 찾아드니 첫날 리비아의 호텔처럼 시설이 허술하다. 이방저방에서 불평하는 소리가 들리는데 원래 배낭여행이 이런 것이라니 감수할 수밖에. 그러나 저러나 우리의 경제력에 맞추어 소득수준이 우리보다 훨씬 낮은 나라에서 한국의 여인숙보다 못한 곳을 택하여서는 안 되지 않겠는가, 여행사들의 성찰이 요구된다.
동생에게서 메시지가 들어왔다. 아시안컵 축구대회 8강전에서 대한민국이 이란을 1:0으로 이기고 4강에 진출하였다고. 난방도 잘 안 돼 쌀쌀한 저녁에 훈훈한 승전보로 따뜻함을 채우자.
2011년 1월 22일 저녁
카사블랑카의 허술한 모텔에서
추신,
알제리 여행을 끝으로 23일에 귀국할 예정이던 송태정, 이성숙 부부가 알제리에 입국하지 못하여 모로코에 동행하였다가 내일(23일) 오전에 귀국길에 오른다며 작별인사를 고하였다. 평안히 잘 가시라.
17. 카사블랑카에서 만난 한국인 근로자
1월 23일(일), 아침에 식당에서 만난 길잡이 미야씨가 오전 9시 반에 호텔을 옮긴다고 이야기한다. 어제 묵은 호텔이 항구 바로 앞이어서 아침 식사 후 항구 쪽으로 걸어가니 경찰이 바다 쪽은 출입금지라고 제지한다.
9시 반에 여행사에서 계약 당시 약속했던 4성급 호텔인 OUM PALACE호텔로 옮긴 후 11시가 다 되어 시내 관광에 나섰다. 일반택시는 3인승이어서 4명이 탈 수 있는 요금이 더 비싼 큰 택시를 잡았더니 먼저 기다리고 있던 운전사와 우리가 탑승한 기사 사이에 실랑이가 벌어져 그대로 내려서 2명 씩 일반택시를 타고 왕궁 쪽으로 향하였다. 택시기사와 영어가 통하지 않아 정확한 목표지점을 설명하기 힘들어 호텔에서 가지고 나온 지도를 보여주어 내려준 곳에 왕궁이 보이지 않아 당황스럽다. 잠시 두리번거리는데 지나던 두 사람이 '한국에서 오셨어요?'라며 반갑게 인사를 건넨다. 대우건설이 시공 중인 화력발전소 건설요원으로 모로코에 온지 3개월 되었다는 이들의 안내로 인근에 있는 왕궁 쪽으로 걸어가니 먼저 택시 타고 간 일행이 왕궁 옆 카페에 앉았다가 우리를 부른다. 차 한 잔 나누며 한국인 근로자들과의 대화에서 모로코 사정을 이해하는 정보를 얻을 수 있어서 좋았다.
모로코에서 한국인을 만나기가 쉽지 않으며 삼성의 휴대폰과 현대 산타페 등이 현지에서 최고급품으로 선호도가 높다는 것, 현지근로자들의 임금은 월 30만원 수준이고 외국기업(대우건설 같은)에 취업하면 그보다 더 많이 받게 된다는 것, 인접국가인 알제리에도 대우건설의 현장이 있어 가볼 기회가 있는데 모로코보다 환경이 열악하여 볼만한 것이 별로 없다는 이야기 등을 들려준다.
멀리 아프리카 지역까지 진출하여 일하는 한국인근로자와 기업들이 우리 경제를 이만큼 일으켜 세우는데 큰 몫을 담당하고 있음을 현지에서 확인하는 것도 외국여행에서 얻는 소득이라 할 것이다. 막내 엄지연 님이 그들의 찻값까지 치렀으니 고국의 동포들이 해외근로자들의 노고를 치하해 준 셈.
왕궁에서 우리 일행들과 여러 차례 만난 후 이상희 여사, 한서연씨와 택시를 타고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하는 해변으로 향하였다. 미야씨가 시내 어느 곳이든 10디르함(약 1천 5백 원)이면 충분하다기에 해변까지 10디르함에 가자고 하였더니 운전사가 단호하게 NO라고 답한다. 나중에 미터기에 나온 요금이 22.7디르함, 무식한 외국인이라고 욕하지 않았는지?
다시 잡은 택시 기사가 센스가 있는 편, 우리가 맥도날드 햄버거로 점심을 먹자고 한 이야기를 알아듣고 해변의 맥도날드 식당 앞에 차를 멈춘다.
한동안 줄을 서서 햄버거를 주문하여 해변의 탁자에 앉아 점심을 든 후 택시를 타고 좀 더 안쪽으로 들어가니 8년 전 패키지 여행 때 내려 거닐던 바다 쪽에 하얀 건물이 있는 해변이 나타난다. 그곳에서 내려 잠시 산책하다가 오후 3시경에 택시를 타고 메디나로 향하였다. 3명의 일행이 메디나에서 한 가지 씩 쇼핑을 한 후 출구를 물어 박으로 나오니 오후 4시, 우리가 묵는 호텔 가까운 곳에 있는 시계탑이 바로 코앞이다. 경찰에게 정확한 호텔위치를 물어 프런트에 들어오니 모로코에서 새로 합류하기로 한 멤버들 중 일부가 공항에서 직행하여 체크인을 하고 시내에 나갔던 일행들도 들락날락하는구나.
호텔에서 잠시 쉬었다가 김종년 선생과 함께 다시 메디나로 나갔다. 잡화와 옷가지들이 지천으로 진열된 시장골목을 오가는 행인들이 크게 붐비고 어느 가게 앞에서는 멱살잡이 싸움판이 벌어지기도. 젊은 노점상에게서 달팽이 삶은 것과 국물을 사먹기도 하였는데 프랑스에서 달팽이 요리를 먹은 지 십 몇 넌 만에 이를 맛본다. 따끈한 국물이 구수하고 뱃속이 훈훈해지는 별미다.
메디나를 한 바퀴 돌고 난 후 허름한 음식점에서 닭고기 따진으로 저녁을 든 후 귤을 한 봉지 사들고 들어오니 7시가 훌쩍 넘었다. 메디나에서 만난 일행은 낮에 모스크에서 동시에 휴대폰을 날치기 당했다며 조심하라고 일러준다. 옛날에 시골 사람이 서울에 가면 코를 밴다더니 한국인이 모로코에 와서 눈뜨고 당한 셈인가?
하루 동안 다양한 체험 한 것을 보람으로 여기며 더 좋은 내일을 기다린다.
2011년 1월 23일 저녁
하얀 건물이 즐비한 카사블랑카에서
추신,
1. 동생에게서 '알제리 여정은 재미 있으셨겠지요? 카사블랑카의 입성을 축하합니다.'는 문자메시지가 왔다. 알제리 행이 취소된 사연을 알지 못한 터. 원래 일정으로는 오늘 알제리에서 카사블랑카로 오게 되어 있어서,,,
2. 여동생에게서 '건강하게 잘 지내세요. 오빠가 안계시니 카페가 썰렁해요.'라고 문자가 왔다. 자주 글을 올리는 집안 카페에 3주째 소식이 없어서,,,
18. 카사블랑카에 비가 내린다.
1월 24일(월), 아침에 일어나니 비가 내린다. 산천에 초목이 푸르른 것을 보면 비가 적당히 내리는 지역인 듯.
오늘부터 일행이 11명 늘어나 32명의 대식구가 되었다. 일부는 한국에서 모로코여행을 온 사람도 있고 일부는 다른 지역을 겸하여 합류한 분도 있다. 리비아에서 입국이 좌절된 조성희 님이 한국에서 온 모로코 여행팀과 함께여서 반가웠다.
아침식사 후에 더러 밖으로 나가기도 하는데 비가오고 어제 많이 돌아다녀서 11시까지 호텔방에서 휴식을 취하였다. 11시 넘어 밖으로 나가보니 비가 멎고 파란 하늘이 보인다. 호텔부근에 있는 시장을 둘러보고 생선튀김으로 점심을 들었다. 일행 중에는 시장에서 라면과 국수를 사는 이들도 있고. 어떤 상점의 남성은 동양여성이 매력적일까 반갑다고 까칠한 수염을 얼굴에 비비는 인사를 하여서 당혹해 하기도 하였다. 어제 휴대폰을 날치기 당한 이들은 경찰서에 가서 도난신고를 하고.
오후 4시 50분에 다음 행선지인 마라케쉬(Marracach)로 출발하는 기차를 타기위해 3시 반에 호텔을 나섰다. 기차가 40여분 연발하는 바람에 마라케시에는 예정시각보다 늦은 저녁 9시경에 도착하였다. 2등석의 기차는 좌석이 지정되지 않아서 혼란이 예상되었으나 외국인이라고 특별배려 함일까, 제일 뒤쪽의 한 칸을 별도로 배정해 주어서 편안하게 올수 있었다.
더러는 담소하며 어떤 팀은 술판이 벌어지기도 하고 독서와 수면 등 각기 취향대로의 기차여행이 운치가 있다. 출발시간을 좀 더 앞당겨 창밖의 풍광을 즐길 수 있었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
나흘 전에 따로 떨어진 김훈기 교수가 마라케시의 호텔에서 일행들과 반갑게 재회하였고. 카사블랑카역에서 기다리는 중에 몇 차례 천둥 벼락이 쳐서 비가 쏟아지려나 염려가 되기도. 비가 오면 오는 데로, 바람 불면 부는 데로, 여행이나 인생의 길이 그러한 것 아닌가? 최희준의 '인생은 나그네길'이란 가사를 떠올리며.
2011년 1월 24일 저녁
모로코의 남쪽도시 마라케쉬에서
추신,
권봉주 선생이 이국적인 마라케쉬의 정취를 아름다운 시로 적었다.
Marrakesh에서
권봉주
마라케쉬에 도착한 어두운 밤에는
별빛이 반짝이던가?
눈 덮인 아틀란트 산맥을 바라보며
황토빛 붉은 담장을 따라 도심 속으로 걸어가면서
간밤의 별빛은 잊는다.
나는, 마침내
자마 엘프나 광장에서 하나의 점이 되어
허공에 매달린 야자나무 우듬지 사이로 사라지는
살아 있는 사람들의 숨결을 느낀다.
말 발꿉 소리로 떠나가는 관광마차에는
내 젊은 날의 그리움이 실려 가고
피리소리에도 춤추지 아니하는 코브라는
어린 시절의 동화를 살려낸다.
그리움이여,
먼 이국 땅 북아프리카 모로코 마라케시에서
나는
멀리 떠나버린 당신의 그리움이
길게 내뿜는 날숨으로 살아난다.
마라케쉬에 도착한 어두운 밤에는
별빛이 반짝이던가?
19. 남국의 정취가 물씬 풍기는 마라케쉬
1월 25일(화), 아침식사 때 룸메이트 김종년 선생이 배가 아파서 이석춘 님 방에서 누룽지를 든 후 9시경에 방으로 돌아왔다. 서둘러 로비로 내려오니 일행들이 대부분 시내로 나가서 동행할 이가 없다. 길잡이 미야씨에게 마라케쉬의 중심부인 엘프나(Elfna)광장으로 가는 길을 물어 혼자서 걸어갔다. 한 시간 넘게 걷는 동안 광장 조금 못미처에 있는 모울레이공원(Cyber Parc Arsat Moulay Abdeslam)을 한 바퀴 둘러보고 광장인근에 이르렀으나 넓은 광장이 보이지 않는다. 경찰관에게 물어서 광장에 이르니 많은 사람들이 곳곳에 무리를 지어 웅성거리고 사물놀이의 북과 장구에 피리가 덧붙여진 듯 요란한 악기소리가 웅장하게 울려 퍼지고 요란한 복장의 물장수들이 손님을 부른다.
광장 쪽에 시선을 두고 있는데 룸메이트 김종년 선생이 반가운 표정으로 다가선다. 광장주변을 둘러보며 행여 일행들과 맞닥뜨리기를 기대하였는데 역시 룸메이트와 의기가 투합 되었을까? 뒤늦게 광장에 나온 권봉주, 이석춘 님 등 세 분과 만나니 전쟁터에서 지원군을 만난 듯 힘이 난다.
풍물패들이 호객하는 곳에 가까이 다가서니 뱀을 이마에 대거나 목에 걸고 사진을 찍으라고 권한다. 한 외국여인이 기겁을 하며 지갑에서 지폐 한 장을 꺼내주고 얼른 피하기도. 풍물패의 일원인 듯한 청년이 다가서며'차이나(China)'? 하고 묻는다. '코리아'라고 답하니 평양(Pyungyang을 평경이라 발음하여 잘 알아듣지 못하였다)을 들먹인다. '서울'이라고 말하니 악수를 청하면서 원더풀을 외치기도. 핵문제로 세계의 주목을 받는 북한이 익숙한 듯 코리아하면 평양을 먼저 언급하는 이들이 꽤 많다. 아파트 벽에는 LG 로고가 선명한 에어컨이 많고 고급승용차는 현대, 기아제품을 선호하면서도 그것이 '메이드인 코리아'인 것을 잘 모르는 것과 연결되는지.
김종년 선생이 메모해 온 종이쪽지를 펴 보이며 광장주변의 아랍, 히스페닉계 건축에서 최고로 손꼽히는 꾸투비아사원(Koutoubia mosque), 대리석과 금으로 치장하여 화려함을 자랑하는 사아디안능(Tombeaux Saadiens)과 술탄의 여인들이 머물렀던 별실과 정원이 아름답게 꾸며진 바히야 궁전 (Palais de La Bahia) 등을 둘러보고 나니 오후 1시가 가까워진다.
엘프나광장 주변 탐방을 마치고 호텔에 돌아와 휴식을 취한 후 오후 3시경에 권봉주선생과 함께 프랑스의 장식미술가 마크렐이 설계한 마조렐정원(Jardin Majorelle)으로 향하였다.
호텔에서 도보로 20분 넘게 걸리는 마조렐정원에 가는 도로 양편의 건축물과 아파트의 색상이 붉은 황토색으로 독특하고 아파트와 빌딩들이 각기 특성을 지닌 설계에 의한 듯 다양함 속의 조화를 이루고 있어 보기에 좋다. 식물원 가는 도중에 담벼락위에 철조망이 쳐진 건물에 다가서니 교도소, 많은 이들이 면회순서를 기다리는 듯 줄서 있기도 .
마조렐 정원 안에는 프랑스의 입생 로랑(Yves Saint Laurent)의 별장과 그를 기념하는 비석이 세워져 있기도. 왕언니 이행경 여사가 청색과 노랑이 조화를 이룬 입생 로랑의 별장을 가리키며 그의 전매특허인 청색머플러를 목에 건 여인을 가리킨다. 멀리 북아프리카의 마라케쉬에서 입생로랑의 사랑을 주제로 한 소묘들을 보며 그가 추구하는 사랑이 일반인들과 다른 특별한 의미를 지닌 것일까 반문해본다.
매일 읽는 잠언의 교훈에는 '내가 전에 게으른 자의 밭과 지혜 없는 자의 포도원을 지나며 본즉 가시덤불이 퍼졌으며 거친 풀이 지면에 덮였고 돌담이 무너졌기로 내가 보고 생각이 깊었고 내가 보고 훈계를 받았노라'(잠언24장 30~32절)는 구절이 있는데 오늘 꾸뚜비아사원의 무너진 돌벽과 돌기둥을 보며 이를 떠올렸다. 여러분은 한때의 화려함과 영화를 상징하는 왕궁과 사원, 왕릉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하였나요?
추신,
1. 마조렐 정원을 돌아보며 제주도의 여미지 식물원이 떠올랐다. 그 규모와 내용에 있어서 남국의 정취를 느끼기에 여미지 식물원이 크게 뒤지지 않는 것을 현지의 식물원에서 확인 할 수 있다. 다만 더 오래되고 큰 나무들이 있는 차이는 있지만
2. 엘프나 광장의 저녁 야경이 볼만하다고 하여 6시 반에 택시를 타고 나갔다. 어두운 광장에는 구름 같은 인파들이 모여들어 북적대고 환한 불을 밝힌 음식점과 상점들이 불야성을 이루고 있으나 이방인에게는 낯선 풍경, 그 속내를 제대로 음미하기 어렵다.
3. 택시요금을 정액제로 지불하면 편리 할 텐데 탈 때마다 흥정을 하는 것이 번거롭다. 형편이 어려워 손을 내미는 이가 많고 길거리의 교통도 혼잡하다. 우리도 3~40년 전에는 외국인에게 그런 모습으로 비쳤을 터.
20. 아틀라스 산맥을 넘어 다데스 계곡으로
1월 26일(수), 아침 7시에 마라케쉬를 출발하여 모로코 남부의 사막지대로 향하였다. 마라케쉬 시내를 벗어나 평원지대를 달리니 황토 빛 건물의 마을들이 군데군데 나타나고 무성한 올리브 밭과 울창한 선인장 가로수가 이색적이다.
한 시간여 지나 웅장한 아틀라스 산맥에 접어든다. 굽이굽이 고개 길을 달려 전망이 좋은 지점에 이르니 눈이 쌓인 높은 산들이 한눈에 들어오고 아련히 펼쳐진 평원 쪽이 아스라이 시야에 잡힌다. 30여분을 더 달려 가파른 고개에 멈춰서니 햇빛 사이로 가랑비가 내리는 가운데 아름다운 무지개가 선명하게 나타나고 우람한 산맥의 몸통과 계곡이 현란하다. 아열대지방이라서 그런지 2000미터 고지에도 쭉쭉 뻗은 큰 나무가 계곡에 우뚝 솟은 모습이 인상적이고 조금 더 남쪽으로 내려오니 황량한 바위산들이 사막지대로 접어드는 것을 알려주는 듯. 그렇게 척박한 땅에서도 낙타 풀을 더듬으며 먹이를 쫒는 양들의 모습이 안쓰럽다. 멀지 않은 곳에서는 푸른 풀밭에서 잘 먹는 양들이 놀고 있는데. 사람 사는 이치도 비슷할 터.
평원으로 내려와 사막지대를 한참 달리니 원시 사하라인들이 지은 성벽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아인트 벤 하도우 카스바(Kasbah ait Ben Haddou)마을이 나타난다. 발을 벗거나 조랑말을 타고 건넌다는 개천에 다리를 건설하는 공사가 한창이다. 1950년대에 시골초등학교와 면사무소를 잇는 도로 사이에 개천이 있는 곳을 시멘트다리로 연결하는 공사를 보며 신기하게 여겼는데 큰 마을과 개울 건너 도로로 이어지는 다리공사를 보는 주민들의 형편이 그때의 우리 형편과 비슷한 것일까?
아인트 벤 하도우 카스바마을을 한 바퀴 돌고 마을 앞에 있는 작은 봉우리에 올라 사방을 살펴보니 마을과 그 주변 경관이 아름답다. 12시 반에 이곳을 출발하여 영화 글테디에이터, 스타워즈 등의 촬영지로 알려진 와르자잣(Ouarzazate)에 이르니 오후 1시 반, 이곳에서 점심을 들고 성채주변을 한 시간 가량 돌아보았다. 오후 3시경에 와르자잣을 출발하여 한 시간여를 달리니 광활한 사막지대인데도 군데군데 큰 도시들이 나타나고 큰 건물과 호텔들이 많이 들어서 있다. 오후 4시 반쯤, 사막지대에 어울리지 않는 강줄기가 나타나고 무성하게 자란 나무들이 들어찬 계곡이 눈에 들어온다. 지금은 겨울이라 꽃이 피지 않았지만 강 주변에 하얀 색깔의 장미나무들이 늘어서 있어서 이곳을 장미의 계곡이라 부른다고. 도로변의 가게에서 장미향이 들어간 오일들을 사기도.
이곳에 머무는 사이에 문제가 생겼다. 일정에 들어있는 한 곳을 운전기사의 착오로 그대로 지나쳐 왔다는 것, 다시 돌아가려면 한 시간 이상 걸리게 되니 목적지로 가는 길에 전망 좋은 곳을 안내하겠다는 여행사의 제의가 있었는데 그에 따르자는 의견과 원래의 코스대로 되돌아가자는 의견으로 나뉘었다. 앞차는 그대로 나아가기로 하고 뒤차는 지나친 곳으로 되돌아가기로.
벌써 일몰이 가까운 오후 5시, 서둘러 가더라도 어둡기 전에 호텔에 도착하기 어려운 시각이다. 앞차로 몇 군데 전망 좋은 곳을 둘러보고 호텔에 도착하니 6시 반, 뒤차는 이보다 한 시간 이상 늦어졌다.
호텔에서 제공하는 저녁 식사는 콩죽에 꾸스코(조밥)와 닭요리, 음식의 양이 많아 꾸스코가 잘 팔리지 않는다. 계곡에 들어오니 추운 날씨다. 호텔방이 난방이 안 되어 춥고 불빛도 어두워서 식당에 나와 이글을 적는다.
2011년 1월 26일 저녁
날씨가 찬 다데스 계곡의 호텔에서
추신,
1. 애틋한 여대생들이 2박3일의 사막투어에 참여하여 우리 일행과 같은 코스를 달려 이 호텔에 묵는다. 스페인을 여행하다가 모로코에 들어와 일주일을 보낼 예정이라는데 한국의 젊은이들이 활달하고 당당하게 세계를 누비는 모습이 믿음직스럽다.
2. 와르자잣에서 점심 먹고 잠시 쉬는 시간에 왕언니 이행경 여사가 현지의 피리 부는 사나이와 박자를 맞추어 추는 춤이 일품이었다. 연장자이면서도 부지런히, 열심히 탐방하고 즐기는 모습이 본받을 만하다.
21. 별이 쏟아지는 사하라의 밤
1월 27일(목), 아침 7시에 식당에 모인 일행들이 이구동성으로 호텔방이 추워서 힘들었다고 말한다. 사막지대의 밤낮 기온차가 크다더니 호텔 주변의 산자락에 눈이 보인다.
7시 반에 호텔을 출발하여 어제 지나왔던 천개의 성채가 있다는 다데스 계곡을 되짚어 돌아보며 경관이 좋은 것에서 사진을 찍기도 하였다. 같은 장소의 풍광이 어제 일몰 때의 모습과 아침 해가 솟아오를 때의 느낌이 다르다.
다데스계곡이 끝나는 지점의 꽤 큰 시골도시에서 어제 왔던 길과 다른 방향으로 접어드니 광활한 사막의 초입에 들어서는 듯. 어떤 때는 지평선이 펼쳐진 평원을 어떤 때는 견고한 성채처럼 웅장한 능선이 등장하는 사막지대가 이어진다.
10시 넘어 티니빌이라는 오아시스마을의 들판을 가로질러 시냇가에서 빨래하는 모로코여인들과 맞닥뜨리기도 하면서(사진을 찍으려면 손을 가로저으며 피한다) 집들이 빽빽이 들어선 골목길을 한 바퀴 돌아 나왔다. 관광객을 맞이하느라 꾸민 가정집에 들러 한 여인이 베 짜는 것과 비슷한 작업하는 모습을 지켜보기도.
그곳에서 약간 좁은 길로 들어서니 깊은 계곡에 숲이 무성한 오아시스마을이 여럿 나타나고 높은 산등성이를 넘어 수직으로 가파르게 뻗어난 토드라(TOUDRA)협곡이 나타난다. 요르단의 유명한 페트라를 연상시키는 토드라고지의 수직 암벽에는 자일로 등반하는 이들이 여럿 보이고 넓은 협곡의 암벽은 페트라보다 높아 보인다. 아름다운 풍광은 페트라만 못하지만 웅장함은 이를 능가할 듯, 관광지로 개발하면 더 볼만하리라.
12시경에 토드라고지를 출발하여 들어갔던 계곡길을 되돌아서 오전에 돌아본 티니빌 마을에서 다시 사하라 쪽으로 향하였다. 광활한 사막지대가 이어지다가 이제는 큰 마을은 없으려니 하면 큰 고을들이 또다시 나타나곤 한다. 오후 1시 넘어 시장터의 음식점이 늘어선 고을에서 점심을 들고 사막 길을 계속 달리니 사하라입구 쯤 되는 곳에 꽤 큰 도시가 또 보인다.
오후 4시 넘어 포장도로에서 사막의 자연도로로 접어드니 차의 속도가 현저히 줄어든다. 꽤 오래 사막의 모래도로를 달려 목적지에 거의 다다를 무렵, 뒤차가 모래밭에 빠져 움직이지 않는다. 어제는 뒤차의 타이어가 펑크 나서 30여분 지체하였는데 오늘은 모래밭에서 빠져 나오는데 30여 분을 소비하여 일몰시간이 다 되어서야 메르조카 오아시스호텔에 도착하였다.
큰 가방을 호텔에 맡기고 사막의 텐트에서 하루 밤 묵을 채비를 하여 30여 마리의 낙타에 올라 푹푹 빠지는 모래사막의 능선을 따라 한 시간 여 행진을 하였다. 해는 이미 저물어 어둑한 길을 낙타몰이 길잡이의 인도로 텐트까지 가는 길이 꽤 멀다. 이전에 낙타를 두 번 타본 경험이 있어서 한 시간쯤 타는 것은 힘들지 않으리라 여겼는데 허벅지가 뻐근하고 몸의 중심이 자꾸 흔들려 생각보다 고달프다. 나만 그런가 했더니 모두들 매우 힘들었다는 이야기.
7시 20분쯤 별들이 하나 둘 나타나기 시작하더니 텐트에 도착했을 때는 꽤 많은 별들이 하늘에 총총하다. 한 텐트에 5~6명씩 방을 배정받고 모래밭에 누워 하늘을 바라보니 수많은 별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별빛을 감상하며 음료를 한잔씩 마신 후 텐트에서 준비한 저녁식사를 4~5명이 한상에 둘러 앉아 맛있게 들고 보니 저녁 9시다.
텐트 한 가운데 모래밭에 모닥불을 피워놓고 현지인들과 함께 여러 개의 북을 손바닥으로 두드리며 흥겨운 노래 가락이 밤하늘에 울려 퍼진다. 그러는 중에 갑작스럽게 지명을 당하여 유심초의 '사랑이여'를 선창하기도 하였다.
소년시절에 동경하던 사하라의 별빛아래 하루 밤 묵는 소원이 노년에 이루어지는구나. 한국에서 가장 먼 서쪽나라 모로코의 사하라까지 달려와 피곤한 몸을 눕히며 평생에 바라던 소박한 꿈을 이룬 충만함으로 마음이 가뿐하다. 꿈 많은 일행들이여, 사하라의 좋은 밤을 마음껏 즐기시라
2011년 1월 27일 저녁
별이 총총한 사하라의 텐트에서
추신
1. 모닥불 파티에 맥주, 소주 등 여러 가지 술이 나오고 애국가로부터 동요, 가곡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레파토리의 노래잔치가 밤늦게까지 벌어졌다, 잔치는 밤 12시경에 파했으나 새벽 2~4시 까지 별밤을 즐기는 정열을 가지신 분들도 있었고.
2. 텐트 안에 용변을 위한 좌변기가 설치되고 식당도 따로 마련되는 등 불편한데로 하루 밤 묵기에 적절한 시설을 갖추었다.
22. 사막의 일출을 감상하고 종일 달리다
1월 28일(금), 아침 6시에 기상하여 간단히 행장을 꾸리고 아직 동이 트기 전에 서둘러 낙타 등에 올랐다. 30여 분 간 여러 개의 모래언덕을 넘어 일출장면을 보기에 알맞은 능선에서 내려 좀 더 높은 모래 산에 올라 구름사이로 찬란하게 떠오르는 햇살을 맞이하는 기분이 상쾌하다. 그제 저녁 다데스계곡의 추위에 놀라 겹겹이 껴입고 잔 탓인지 추위에 고생한 분은 없는 듯. 사막의 아침기온이 매섭지 않고 따스한 감이 든다. 어떤 이는 모래 산의 정상까지 오르기도 하는 등 1시간여 사막의 해맞이를 기분 좋게 마치고 다시 낙타 등에 올라 호텔로 향하였다.
텐트에 동행하지 않고 호텔에서 묵은 이석춘 님이 하루 밤을 지세고 돌아오는 일행을 두 손 벌려 환영하며 낙타에 탄 일행의 모습을 동영상에 담고. 호텔에 도착하자 손을 씻고 식당에 마련된 아침식사를 끝낸 후 더러는 샤워 룸에서 몸을 씻기도 하였다.
9시 반에 호텔을 출발하여 꽤 먼 거리의 페스로 향하였다. 메르조카 오아시스는 알제리 국경에 가까운 모로코 남동쪽인데 페스는 모로코의 북동부지방이어서 11시간이 지난 저녁 8시 반에야 페스의 호텔에 도착할 때까지 점심 먹는 1시간을 제하고는 경관이 좋은 곳에서 잠시 촬영하는 외에 하루 종일 버스로 이동한 셈이다.
앞차의 운전기사 무스타파는 치통에 시달리며 운전하느라 고생하였고 뒤차는 타이어를 교체해야 한다고 머뭇거리다가 끝까지 잘 달려 주어서 다행이었다.
모로코에서 알제리를 거쳐 리비아까지 이어진다는 아틀라스산맥과 소아틀라스 산악지대를 거쳐 북쪽에 이르니 산야에 제법 많은 눈이 내렸고 사진을 찍으려 차 밖으로 나오니 바람이 매우 차고 거세다. 더 북쪽으로 올라오니 비가 내리기 시작하고 6시가 넘으니 밖이 어두워지기 시작하여 경관이 좋다는 삼나무 숲길과 썰매타기 등 위락 시설이 있는 주변 경관을 제대로 볼 수 없어서 아쉬웠다.
저녁 9시에 호텔에 여장을 풀고 TV를 켜니 CNN뉴스에 이집트의 무바라크 정권에 반기를 든 시위관련뉴스가 계속 나온다. 이번 여행코스인 북아프리카의 여러 나라들이 튀니지사태의 영향을 받는 국가들이다. 우리의 여행시기가 현지의 돌발상황과 맞물려서 예정된 스케줄에 펑크가 난 것은 아쉬운 일이지만 세계가 민주화의 물결에 휩싸이는 추세를 거스르는 나라와 지도자들에게 각성과 경고의 메시지를 실감나게 체험하는 것도 의의가 있지 않겠는가? 우리 북쪽에도 그런 변화의 바람이 불면 더욱 좋으리라.
2011년 1월 28일 저녁
패스의 신시가지에 있는 호텔에서
23. 현지인에게 들은 모로코의 복지
1월 29일(토), 페스의 신도시에 자리 잡은 4성급 호텔은 비교적 쾌적한 시설에 아침식사도 괜찮은 편이다. 아침부터 비가 내리고 8일 전에 주요 관광지를 돌아 본 터라 오전에는 메디나에 나가는 일행들과 합류하지 않고 휴식을 취하면서 TV의 여러 채널을 시청하였다.
이집트의 시위사태가 CNN과 현지 방송의 주요뉴스로 집중 보도되고 오락 문화 프로그램도 현지의 삶과 문화를 엿볼 수 있는 흥미로운 장면들을 살필 수 있다. 4강까지 오른 아시안컵 축구경기의 후속상황이 궁금하였는데 일본과 호주가 결승에 진출하였다는 스포츠뉴스를 통하여 4강에서 패배한 것을 확인하기도.(축구경기 상황을 문자로 알려주던 동생에게서 승전보를 알리는 메시지가 오지 않아 결승진출이 좌절된 것으로 짐작하고 있었다.) 호텔객실의 TV가 LG제품이고 CNN 광고시간에 KIA의 광고 선전이 여러 번 반복되어서 먼 이국에 나와 이를 지켜보는 마음이 뿌듯하다.
낮 12시에 체크아웃을 하고 룸메이트 김종년 선생과 함께 메디나 쪽으로 향하였다. 한 시간 반가량 메디나와 주변을 돌아본 후 지난번에 묵은 구시가지 호텔인근의 스넥 음식점에서 스파게티를 시켜먹었는데 연일 따진 종류 음식으로 점심을 먹던 때보다 더 맛있게 들었다. 김 선생은 지금까지 먹었던 점심 중에서 제일 좋았다며 만족스런 표정이고. 음식점에 뜨거운 물을 청하여 한국에서 가지고 온 컵라면으로 입가심을 한 것도 일조를 한 셈일까? 주변의 여성들에게 줄 선물을 고르기 어려워 메디나에 가는 편에 부탁하였더니 엄지연 선생이 스카프를 여러 개 사다 주어 감사하다.
오후 3시에 페스를 출발하여 카사블랑카로 향하였다. 24일에 카사블랑카를 떠나 남쪽의 마라캐쉬와 사막지대를 거쳐 북쪽의 페스를 돌아보고 다시 카사블랑카에 이르는 5일간의 모로코 대장정을 마친 셈이다.
앞차에 동승한 사막투어의 현지여행사 직원 알리에게서 들은 모로코의 교육과 의료제도 등이 흥미로웠다. 그가 말한 모로코의 교육제도는 초등학교에서 대학까지 무료이고 (다만 일부 사립학교는 유료인데 페스 인근의 위락지역에 있는 모로코에서 가장 좋은 사립대학의 1년 학비가 5,000유로 쯤 된다고 함) 초, 중. 고등학생에게는 년간 1,300디르함(약20만원)의 교육보조금이 주어진다고 한다. 학교와 거리가 먼 산간, 오지의 학생들에게는 학교주변에서 다닐 수 있도록 숙식을 제공해 준다고.
전 국민에게 병원의 의료비도 무상 지원해 주는 등 국민의 복지에 크게 중점을 두는 시책으로 모로코국왕은 국민들로부터 신뢰와 존경을 받는다고 말하기도. 직장에서 일하는 사람의 급여에 대하여는 교사들이 4,000디르함(약60만원)쯤 받는다고 하는데 일반근로자의 임금수준은 정확히 모르는 듯.(지난 일요일에 카사블랑카에서 만난 한국인 근로자의 이야기로는 외국계 회사에서 약 5~60만원, 국내회사에서는 30만원수준의 급료를 받는다고 말하였다.)
페스에서 카사블랑카에 이르는 300여km의 길은 좌우에 푸른 녹지가 이어지고 곳곳에 하얗게 핀 아몬드 꽃이 한국의 봄꽃처럼 아름답다. 저녁 8시가 좀 지나 카사블랑카의 호텔에 도착, 연 4일간 하루 10여 시간 씩 버스를 타는 강행군의 여정을 무사히 마치고 평안한 마음으로 여장을 풀게 되어 감사하다.
2011년 1월 29일 저녁
다시 돌아온 모로코의 카사블랑카에서
추신
1. 페스의 구시가지가 옛 모습을 보존하고 있는데 반하여 신시가지의 곳곳에서 큰 건물을 짓는 등 1,200년 전통의 도시도 새로운 물결의 변화가 속도를 내고 있는듯하다.
2. 우리보다 소득수준이 낮은 나라에서 교육과 의료혜택이 앞서가는 점은 본받을만하다. 그러나 세계적인 민주화의 추세에 언제까지 왕정으로 통치할 수 있을까?
24. 순례를 마치고 귀국길에 오르다.
1월 30일(일), 모로코여행 10일의 여정을 마치고 오후 2시 15분 비행기로 귀국길에 올랐다.
아침식사를 마치고 일부는 시내관광에 나서기도 하는데 룸메이트인 김종년 선생과 객실에서 서로의 가정사정과 노후의 삶에 대한 대화를 나누었다. 11시 반에 짐을 챙겨 로비로 나가니 밖에는 세찬비가 내린다. 4명씩 조를 짜서 공항까지 택시로 이동하기도 하였는데 3일간 우리를 태워 준 버스가 오늘로 예약된 스케줄이 취소되었다며 택시 대신 단체로 공항까지 데려다 주기도 하여 서로 간에 유익하게 되었다.
공항에서 티케팅을 마친 후 길잡이 미야 씨와 작별하고(그녀는 모로코에서 10여일 뒤 후속 팀을 맞아 가이드 한 후 유럽으로 건너가서 여름에 귀국할 예정이라고 한다) 서둘러 출국장으로 들어갔다.
탑승 후 2시간이 지나서 늦은 점심 겸 저녁식사를 들고 나서 이글을 적으니 카사블랑카에서 두바이까지 6시간 넘는 비행시간 중 절반이 지나고 이제 세 시간 후면 두바이에 도착한다고 스케줄 판에 표시된다.
아랍에미리트 항공승무원 가운데는 키가 훤칠한 한국남성이 탑승하여 친절하게 서비스해주고.(이코노미석에는 서비스하지 않는 케이크를 특별 서비스하였다.) 29세에 아직 미혼이라는 그는 1년에 서너 차례 한국에 들어간다는데 외국을 넘나들며 열심히 일하는 청년의 앞날에 서광이 비치기를. 어려운 점을 물으니 부모님이 계시는 한국에 자주 갈수 없는 점이라고.
6시간 좀 넘어 두바이 인근에 이른 비행기는 착륙허가가 나지 않는 듯 20여 분 간 주변을 선회하다가 현지시각 새벽 1시 20분에 두바이 공항에 착륙하였다. 청사에 연결된 통로가 아닌 공항 계류장에서 내려 버스를 타고 꽤 먼 거리를 이동하여 공항청사로 들어섰다.
인천행 비행기(A380-800 대형비행기로 400석이 넘는 좌석이 꽉 찬다.)는 3시 30분 출발, 갈아타기에 충분한 시간여유가 있어서 많은 이들이 면세구역에 들러 필요한 물건들을 사기도 하였다. 한국까지는 7시간 30분이 소요된다니 인천에서 올 때보다 1시간 이상 빨리 가는 셈이다. 편서풍의 영향 때문이라고. 모로코에서 한국까지 18,000km 비행시간만 14시간, 먼 길을 달려온 셈이다.
바른말을 잘 하는 장재숙 님이 카사블랑카공항으로 가는 차 안에서 '잃은 것은 물질이요 얻은 것은 정신이다.' 라고 이번 여행소감을 표현하였는데 적지 않은 시간과 돈을 투자하여 더 풍요롭고 충만한 마음과 영혼의 충전이 이루어졌다면 우리 모두 분명 큰 소득을 얻지 않았을까?
2011년 새해벽두에 장도에 올라 1월이 다 지나가는 31일 오후, 이제 한 시간 후면 인천공항에 도착한다. 열심히 다녀온 일행 모두, 더욱 건강하고 보람된 내일을 맞이하세요.
2011년 1월 31일 오후
인천공항 착륙을 앞둔 아랍에미리트 기내에서
추신,
귀국 후 며칠 지나서 부지런한 장재숙 님이 메일주소와 함께 다음과 같은 글을 보냈다.
'저만 그런가요? 여행 다녀오면 최소 한 달은 뿌듯하고 일상이 즐거운데...
지금 저는 일주일째 푹 쳐져 있습니다. 만사 귀찮고...말이죠... 참 ~ 못났죠?
제 주변엔 제가 설명해도 이 아픔과 상실감을 이해하지 못하는 듯 하더군요.
우리끼리라도 푸념삼아 떠들고 풀어야할 듯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번뇌를 배려치 않고 여기 이 자리에서라도 마구 떠들어대고 싶은 마음에 주절주절 지껄어 댑니다. 용서하시길...
돈보다 물질적 손해보다 정신적 타격이 더 크다는 것을 여러분과 헤어지고 나서야 쓰디쓰게 알게 되었습니다.
허탈감, 패배감, 좌절감, 답답함...분노,,,,,,
함께 있었기 때문에 덜 느꼈던 것임을,,,,
혼자되는 순간에 감당할 수 없는 밀물이 되어 이토록 뼈져리게 다가올 줄은 짐작도 못했지요.
헤어지고 나서야 우리 모두가 서로에게 힘이 되고, 서로에게 얼마나 소중한 인연이었음을 느끼게 됩니다.
이제 하루빨리 건강한 생활인이 되어 다시 활짝 웃을 수 있는 그날이 오기를 빌어야겠습니다. 화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