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축복의 땅으로 들어가자 (민 13:26~33)
26 바란 광야 가데스에 이르러 모세와 아론과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나아와 그
들에게 회보하고 그 땅 실과를 보이고 27 모세에게 보고하여 가로되 당신이 우리를 보
낸 땅에 간즉 과연 젖과 꿀이 그 땅에 흐르고 이것은 그 땅의 실과니이다 28 그러나
그 땅 거민은 강하고 성읍은 견고하고 심히 클뿐 아니라 거기서 아낙 자손을 보았으
며 29 아말렉인은 남방 땅에 거하고 헷인과 여부스인과 아모리인은 산지에 거하고 가
나안인은 해변과 요단 가에 거하더이다 30 갈렙이 모세 앞에서 백성을 안돈시켜 가로
되 우리가 곧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 하나 31 그와 함께 올라갔던 사
람들은 가로되 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
니라 하고 32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그 탐지한 땅을 악평하여 가로되 우리가 두루 다
니며 탐지한 땅은 그 거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
들이며 33 거기서 또 네피림 후손 아낙 자손 대장부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
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의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
서 론
정신과 의사들이 진단하는 병명 중에 ‘경계선성격장애(borderline personality
disorder)’라는 병이 있습니다. 우유부단(優柔不斷)해서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시간
을 끌다 정체성의 혼란과 정서적 불안정감을 얻게 되고, 이로 인해 분노심을 불합리하
게 표현하는데 그 분노를 통제할 수 없는 정신병적 증상입니다. 독일의 유명한 신학자
였고 나치 정권에 저항을 하다가 추방되어 미국 하버드 대학에서 신학과 철학을 가르
친 폴 틸리히(Paul Tillich) 교수는 「경계선에서」라는 유명한 책을 썼습니다. 폴 틸
리히 교수는 이 책을 통해 “인생이란 경계선상에 서있다. 현실과 상상 사이에 서있
고, 이론과 실제 사이에 서있고, 타율과 자유 사이에 서있고, 교회와 사회 사이에 서
있다. 이런 경계선상에서 하나님께서는 끊임없이 우리에게 바른 결단을 내리도록 요구
하고 계신다”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 인생은 경계선의 삶이므로 경계선상에서
어디로 갈 것인지를 늘 결정하면서 살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민수기 13장과 14장에 나타난 가데스바네아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이야말로 경계선
에 서 있는 백성들입니다. 이들은 더 앞으로 나아가서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도 있
고, 뒤로 돌아가서 다시 애굽땅에서 노예생활을 할 수도 있으며, 정체해서 계속 광야
의 방황생활을 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경계선입니다. 이 가데스바네아라고 하
는 경계선은 한 인간의 인생이나 한 가정의 운명을 결정하는 기로가 아니고 한 국가
의 운명을 결정하는 기로였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민수기 13장과 14장을 잘 읽어보면
유감스럽게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경계선 성격장애의 전형적인 증상을 드러내고 맙니
다. 그들은 우유부단했고, 하나님께서 비전을 주셨지만 그 경계선을 넘어가지 못했으
며, 정체감의 혼란과 정서적인 불안으로 인해 한 장관을 세우고 애굽으로 다시 돌아가
기를 원하였습니다. 가데스바네아라고 하는 경계선에서 스스로를 자해하고 잘못된 결
정을 내리는 바람에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40년 동안 방황하는 벌을 받게
되었습니다. 왜 성경은 이와 같은 실패담을 기록하고 있을까요? 고린도전서 10장 11절
이 그 답을 줍니다.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
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 성도들이 동일한 실패, 동일한 불
신앙을 반복하지 말라는 의미에서 이와 같은 이야기들이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경계선에 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명확한 방향을 제시하셨습니다. “너
희는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라. 전진하라. 가데스바네아의 경계선을 넘어가라!”는 분
명한 비전을 제시하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이 비전을 이루지 못하고
경계선상에서 우물쭈물하다가 그만 뒤로 돌아가고 방황을 계속하는 실패를 겪게 되었
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비전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어떤 비전을 주셨습니까?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사람을 보내어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가나안 땅을 탐지하게 하되 그
종족의 각 지파 중에서 족장 된 자 한 사람씩 보내라. 모세가 여호와의 명을 좇아 바
란 광야에서 그들을 보내었으니 그들은 다 이스라엘 자손의 두령 된 사람이라”(13:1-
3).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처럼 명령하신 것입니다. “모세야! 너희에게
열 두 지파가 있으니까 두령 한 사람씩을 뽑아서 먼저 가나안 땅을 탐지 해봐라. 가나
안 땅이 얼마나 좋은지 아니? 그 곳을 한 번 보기만 해도 너희가 차지하고 싶은 마음
이 들테니 그 곳을 한번 탐지하고 오너라.”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은 목적을 가지고
12정탐꾼을 보내신 것입니다. 모세가 보낸 것이 아닙니다. 모세는 여호와의 명에 순종
해서 보냈을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하셨을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확실
한 비전을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요, 그 땅은 한 사
람이 들고 가기에는 무겁고 두 사람이 나무에 꿰어서 메고 가야하는 거봉포도를 생산
하는 복된 땅이라는 것을 하나님께서 직접 눈으로 보여 주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앞에 시시한 것을 놓고 가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고린도전서 2
장 9절을 보면 “기록된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
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고 했습니다. 우리 성도들을 위해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천국은 눈으로 본적
도 없고 귀로 들어 본 적도 없는, 사람이 마음으로는 생각 할 수조차 없는 지복(至福)
의 장소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이 땅을 살아가
며 조금 괴롭고 어려운 일을 겪어도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
해 어마어마한 축복을 예비해 두셨다는 사실로 인해 용기를 가지십시오. 성도들은 지
금 잠깐 쓰러져 있어도 망하지 않습니다. 결코 패하지 않습니다. 우리 앞길에는 하나
님께서 예비하신 가나안 땅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가나안 땅, 지복(至福)
의 땅을 바라보면서 늘 용기를 얻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명을 받아 12정탐꾼을 파송했습니다. 파송 할 때에 이들에게 세 가
지 사명을 주었습니다. 첫째로 그 땅이 비옥한지 척박한지를 살피라고 했습니다. 둘째
로 그 땅의 농산물을 탐지하라고 했습니다. 그 땅 위에 수목들이 제대로 자라고 있는
지를 살피고 실과가 있다면 그 실과를 한번 가지고 와보라고 명했습니다. 세 번째로
땅의 거민들을 살펴보라고 했습니다. 거민이 강한지, 약한지, 많은지, 적은지, 그들
이 사는 성이 산위에 담이 있는 성인지, 없는 성인지 이 모든 것들을 다 살펴보고 오
라고 명했습니다.
12정탐꾼들이 40일 동안 탐지한 후에 돌아와서 모세에게 보고를 합니다. 그 내용이 27
절입니다. “모세에게 보고하여 가로되 당신이 우리를 보낸 땅에 간즉 과연 젖과 꿀
이 그 땅에 흐르고 이것은 그 땅의 실과니이다” 두 사람이 포도송이를 나무에 꿰어
서 메고 왔습니다. 에스골 골짜기에서 메고 왔는데, 에스골이란 이름은 히브리어로
‘포도송이’라는 뜻으로, 포도송이가 워낙 커서 동네 이름을 ‘포도송이’라고 지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비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
게 약속하신 땅은 틀림없이 축복의 땅이요, 부요의 땅이요, 풍요의 땅이요, 젖과 꿀
이 흐르는 땅이었음을 이들은 눈으로 보고 귀로 확인했습니다.
그런데 정탐꾼들의 보고가 27절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28절을 읽어보면 “그러나 그
땅 거민은 강하고 성읍은 견고하고 심히 클 뿐 아니라 거기서 아낙 자손을 보았으며”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28절의 ‘그러나’라고 하는 접속사는 불신앙의 접속사입니
다. 이 ‘그러나’ 접속사가 한번 들어와 버리면 앞에 나온 모든 축복들을 다 뒤집어
엎어버리게 됩니다. 이들이 말하는 요점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비전은 분명히
크고 아름다운 것이지만 그 비전을 이루기 위해서 뛰어넘어야 할 장애물은 우리가 감
당하기 어려운 것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런 장애도 거치지 않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신 적이 없습니다. 믿음으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사람은 장애가 있어도, 방해요인이 아무리 많아도 그것을 뚫고 들어가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신 것이지, 장애도 없고 방해도 없고 환란과 근심도 없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
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신 것은 아닙니다.
사도 바울도 1차 선교여행을 할 때에 루스드라에서 큰 환란을 당했습니다. 유대인 불
신자들이 와서 바울을 돌로 쳐서 죽였습니다. 바울이 죽은 줄 알고 유대인들이 끌어다
가 성 밖에다 내쳤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로 그 자리에서 다시 살아나
게 되었고 다시 제자들을 모아놓고 이와 같이 말했습니다.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
여 이 믿음에 거하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
야 할 것이라”(행 14:22)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란을 겪어야 합니다.
20세기에 출현한 종말론은 우리 성도들에게 환란 도피사상을 심어주었습니다. 세대주
의적 종말론자들은 7년 환난이 우리에게 다가올 것을 경고하고 있지만 미래에 있을 환
란은 오히려 큰 문제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지금 이 세상에서 환란을 당하
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께서는 “너희가 세상에서 환란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
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란을 겪어야 하겠지만, 환란과 장애물이 있다고 할지라도 우리
성도들은 믿음으로 환란과 장애물을 뚫고 들어가서 하나님 나라의 지복을 누리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휴거라는 개념은 성경에 있지도 않은 개념이에
요. 공중에서 주를 만난 후, 영원토록 주님과 함께 일을 것이라고 했지 공중에서 만
난 주님께서 다시 올라 가버리신다는 가르침은 대체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아무튼 그
것이 맞느냐 틀리느냐를 따지기보다도 이러한 종말론이 우리 성도들에게 환란 도피사
상을 심어주었다는 사실이 더 중요합니다. 이런 사상은 올바르지 않은 사상이에요. 우
리 성도들은 이 세상을 살 때 괴로움과 환란도 겪고 장애도 겪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
가 믿음을 가지고 살다보면 이 장애물을 능히 헤치고 나가서 약속의 땅, 축복의 땅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달리기를 하던 사람이 저 멀리에 있는 50캐럿짜리의 다이아몬드
를 발견했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이 사람이 장애물에 걸려 조금 넘어졌다고 해서 그
다이아몬드를 포기하겠습니까? 반드시 다시 일어나서 그 다이아몬드를 향해 계속 전진
할 것입니다. 천국은 50캐럿 다이아몬드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위대한 곳입니다. 그
러므로 장애가 있다고 할지라도 주저앉지 마시고 다시 일어서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비전 성취의 장애물
민수기 13장과 14장을 통해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직면한 세 가지 장애물을 발견
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부정적인 태도입니다. 31절 말씀을 보면 “그와 함께 올라갔
던 사람들은 가로되 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람의 태도가 부정적이면 “못하리라. 안되리라.
어려우리라”는 말이 쉽게 나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언제 강해서 이겼습니까? 아
닙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셔서 이긴 것이지 이스라엘 백성들의 힘이 강해서 이긴 것
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단 한 번도 저들의 힘이 강하다고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
다. 우리 한국 사람들의 언어에는 특별히 부정적인 요소가 많은 것 같습니다. 배고프
면 배고파 죽겠네, 배부르면 배불러 죽겠네, 좋으면 좋아 죽겠네, 싫으면 싫어 죽겠다
고 합니다. 다 죽겠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이 부정적인 태도를 고쳐야 합니다.
부정적인 사람들은 과장도 잘합니다. 32-33절 말씀을 보면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그 탐지한 땅을 악평하여 가로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탐지한 땅은 그 거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거기서 또 네피림 후손 아낙
자손 대장부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의 보기에도 그
와 같았을 것이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가나안 땅에 거인들이 있었을까요? 물론 블
레셋에도 조금 있었고 가나안 땅에도 조금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의 과장을 주
목하십시오.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이 “모든”이라는
단어를 과장해서 쓰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백성들이 신장이 장대했을가요? 그렇지 않
습니다. 그 당시에도 그렇지 않았고 지금도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거인들이 몇 명쯤
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심각한 문제는 거인 몇 명 있는 사실을 가지고 과장해서
모든 백성이 다 거인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야기할 때도 과장해서 말하
는 경향이 강합니다. “목사님. 우리 교회에 이런 문제가 있고, 어렵습니다. 모든 사
람들이 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저는 일단 그렇게 말하는 사람의 말은 쉽게 믿지를
않습니다. 그 사람이 상당한 과장법을 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이 언제 교인들
에게 여론조사를 다 했겠습니까? 여론조사하면 일반적으로 6대 4, 혹은 7대 3으로 결
과가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동의하는 일은 인류 역사상 존재하지 않
을지도 몰라요. 열 명의 정탐꾼들은 이처럼 과장법을 악용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을 낙
망하게 만들고 말았습니다.
더불어 이들은 스스로 보기에도 자신들이 메뚜기 같다는 자기 비하에 빠지고 말았습니
다. 자기를 스스로 메뚜기 같다고 했을 뿐만 아니라 있지도 않은 사실까지 사실인양
생각했습니다. 가나안 거민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메뚜기처럼 생각하는지 알게 뭡니
까? 그런데도 이들은 남의 생각을 자기가 아는 것처럼 이야기합니다. 이와 같은 태도
는 과장이요, 자기 비하요, 한마디로 불신앙입니다. 신앙 있는 사람들의 태도는 언제
나 밝고, 긍정적이고, 진취적입니다. 부정적인 태도로는 아무 것도 이룰 수가 없습니
다. 여러분 이왕에 신앙생활하면서 부정적인 태도로 하지 마시고, 밝고 진취적이며 긍
정적인 태도로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왜 우리가 밝고 진취적일 수 있
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예비해 주신 천국의 비전이 50캐럿 다이아몬드보다 더
반짝반짝 빛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장애가 있고 어려워도 넘어갈 수 있을 줄
로 믿습니다.
둘째는 두려움의 장애물입니다. 14장 1절부터 3절까지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온 회
중이 소리를 높여 부르짖으며 밤새도록 백성이 곡하였더라 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세
와 아론을 원망하며 온 회중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
에서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망하
게 하려 하는고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
참으로 불신앙적인 슬픔입니다. 이들은 울면서 두려워했습니다. 우리가 죽을까봐, 우
리 처자가 죽을까봐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걱정하
는 분들이 있다면 두려움을 물리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윗도 생애 중
에 죽을 고비가 얼마나 많았습니까? 그래도 두려움이라는 장애물에 걸려 넘어지지 않
았습니다. 시편 27편 1절에도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라고 기록되
어 있습니다. 다윗은 적극적으로 두려움을 밀어냈습니다. 시편 27편 3절에서도 “군대
가 나를 대적하여 진 칠지라도 내 마음이 두렵지 아니하며 전쟁이 일어나 나를 치려할
지라도 내가 오히려 안연하리로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이런 담대함을 가
지고 살아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려움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마음이 아닙니다. 두려움은 마귀가 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디모데후서 1장 7절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
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살다
가 내가 이러다가 망하면 어떡할까? 내가 이러다가 병들면 어떡할까? 이러다가 우리
자식들이 잘못되면 어떡할까? 하는 두려움이 생길지라도 떨지 마시기 바랍니다. 신앙
의 위인들은 모두 두려움의 장애를 극복한 사람들입니다. 여러분들도 잘 아시다시피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사람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Christopher Columbus)입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인도에만 가면 부자가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인도는 금이
많은 나라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에 인도를 가기 위해서는 육로를 이용해야
만 했습니다. 해상으로는 불가능하다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콜럼버스는 배로 인도에
가야겠다고 생각하여 스페인 국왕에게 배와 선원을 지원해 달라고 8년 동안을 졸랐습
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지구가 평평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배를 타고 먼거리에 나
가는 것을 꺼렸습니다. 바다 끝에 있는 낭떠러지에 떨어져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
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콜럼버스의 생각은 어리석은 것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간신
히 스페인 국왕을 설득하여 항해를 시작했을 때도, 선원들이 매일 같이 두려워하며 콜
럼버스를 설득했습니다. 심지어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1492년 10월 12일의 하루 전
인 11일까지도 선원들은 두려움에 떨며 되돌아가자고 난동을 부렸다는 사실을 항해기
록을 통해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두려움 앞에 당당히 맞선 콜럼버스는 결국 신대
륙을 발견하는 신기원을 이루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두려움이 이루어낼 수 있는 것
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직 믿음의 용기만이 경계선을 넘어서 축복으로 나아가는 비
결이 된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세 번째 장애물은 반항정신입니다. 때때로 아이들이 가출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부모들에게 반항하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은 좋은 일이 아닙니
다. 그러나 하나님께 반항하는 것은 가출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결정적인 악행입니
다. 14장 4절 말씀을 보면 “이에 서로 말하되 우리가 한 장관을 세우고 애굽으로 돌
아가자 하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자 여호수아와 갈렙이 옷을 찢고 9절과 같
이 말합니다. “오직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
들은 우리 밥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
라 그들을 두려워 말라” 여호수아와 갈렙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돌아가자고 요구 하
는 것이 하나님을 향한 반항인줄을 안 것입니다.
또한 여호수아와 갈렙은 세 가지 장애물을 뛰어넘자고 말하고 있습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반항하지 말며, 메뚜기 의식을 갖지 말자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우리
의 밥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세상은 믿음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밥입니다. 밥은 먹
는 것이지, 두려워하는 대상이 아닙니다. 한번 뿐인 인생인데 우리가 왜 메뚜기 의식
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까? 믿음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세상이 밥이라는 사실을 기억하
시고, 잡수시면서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비전 성취의 원리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장애물에 걸려 넘어져서 부정적이고, 반항하며, 두려
워할 때 당신의 영광을 나타내십니다. 14장 10절에 “온 회중이 그들을 돌로 치려하
는 동시에 여호와의 영광이 회막에서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 나타나시니라”고 했습
니다.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면서 돌로 치려 하는 것을 막으시고, 믿음의 신앙인인
여호수아와 갈렙을 축복하셨으며, 믿음 없는 모든 사람들은 광야에서 방황하다가 그대
로 죽게 하신 것입니다. 이 여호수아와 갈렙은 다른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경계선에 섰
지만 우물쭈물하지도, 뒤로 돌아가지도 않았습니다. 장애물에 걸려 넘어지지 않고, 가
데스바네아란 경계선을 뛰어 넘었습니다. 우리도 우물쭈물하지 말고 경계선을 넘어야
합니다.
경계선을 뛰어 넘으려면 세 가지 태도를 지녀야 합니다. 첫째는 긍정적인 태도입니
다. 14장 7-8절에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일러 가로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탐
지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
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여호수아와 갈렙은 언제나 긍정적인 태도를 가졌습니다. 부
정적인 말을 하는 사람이 성공하는 법은 없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처럼 여러분의 입
술의 언어와 생각이 모두 긍정적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
그들은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니 내가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라
고 고백하였습니다. 두려움으로 극복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그 결과는 좌절
뿐이고 실패뿐입니다. 세 번째로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였습니다. 그래서 하
나님께서는 민수기 14장 24절에 “오직 내 종 갈렙은 그 마음이 그들과 달라서 나를
온전히 좇았은즉 그의 갔던 땅으로 내가 그를 인도하여 들이리니 그 자손이 그 땅을
차지하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결론
오늘 경계선에 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선택할 수 있는 옵션은 오직 세 가지 뿐입니
다. ‘전진해서 축복을 받을 것이냐? 후퇴해서 노예가 될 것이냐? 아니면 정지해서 방
황을 계속할 것이냐?’ 세 가지 중에 다른 옵션은 없습니다. 그리고 이들이 나아갈 방
향은 분명합니다. 전진해야 합니다. 가데스바네아라고 하는 경계선을 넘어가야 합니
다.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영광과 부요의 축복을 넘어가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 강남
중앙침례교회도 지금 경계선에 서 있습니다. 여러분의 가정도, 교회도, 우리의 국가
도 전진해야 합니다. 뒤돌아보지 마시고, 머물러 서있지도 마시고, 믿음과 용기로 당
당하게 전진해서 하나님께서 주신 위대한 비전을 이루시는 교회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피영민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