自由애국단체 회원 40여 명이 5일 소위 「6·25양민희생자위령탑」이 세워진 전북 고창군 공음면 선산마을을 항의 방문했다.
이날 행사에는 「국민행동본부」 서정갑 본부장, 「6·25참전유공자백골유격대」 백한기 대장, 「6·25남침(南侵)피해 유족회」 진진형 회장, 「뉴라이트청년연합」 장재완 대표 등이 참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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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제의 ´빨치산 위령탑´ 앞에서 포즈를 취한 애국단체 회원들. | 문제의 위령탑은 지난 4월 「6·25양민희생자 고창군제전위원회」라는 민간단체에 의해 『6·25때 군인·경찰에 의해 학살된 무고한 마을주민 510명의 영혼을 위로할 목적으로』 건립됐다. 여기는 도비(道費) 8천만 원, 군비(郡費) 2천만 원 등 총 1억 원의 국고(國庫)가 지원됐다.
그러나 군인·경찰에 무차별 학살됐다는 510명의 양민들은 6·25때 교전 중 사살된 빨치산과 좌익협력자들이었던 것으로 확인돼 왔었다. 따라서 도청·군청 등이 被사살자 유족들의 未확인 주장을 근거로 「빨치산 추모탑」 건립에 국고를 지원했다는 비판이 제기돼왔다.
위령탑 아래 비석에는 『국군11사단 20연대 병력이 고창군 상하면 하장리, 자룡리, 용대리, 고리포 등지에서 양민을 지속적으로 무차별 학살했다』며『군사정권 30여 년 동안 말 한마디 못하고 한이 맺힌 채 살아왔다. 한 맺힌 56년 만에 원혼들이 이곳에 안장됐다』는 내용이 새겨져 있었다.
항의 방문에 나선 회원들은 『위령탑의 소위 희생자들은 6·25 당시 빨치산 내지 좌익협력자들로서 교전 중 사망한 사람들』이라며 『위령탑이 대한민국을 수호한 군인·경찰을 학살자(虐殺者)로, 김일성 협력자들을 양민(良民)으로 둔갑시켜 역사날조를 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도 우리 측 민원에 대해 《고창군 일대에 국군 투입 사실 자체가 없으며, 소위 피해자 유족들의 증언 역시 「전해들은 것」 등 불분명하고, 정확하지 않아 신뢰할 수 없다》고 회신해왔다』며 「빨치산추모탑」의 즉각적 철거를 촉구했다.
담당부서인 공음면사무소 관계자는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위령탑은 96년 도의회 진상조사를 바탕으로 한 것으로서 좌우(左右)간에 서로 용서하고, 화해하는 뜻을 담은 것이지 누구를 매도하는 의도는 아니다』며 『비문에 나오는 일부 표현에 대해서는 「피해자」 유족들에게 정정을 요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기자는 이어 △96년 도의회 진상조사라는 것도 주민들의 일방적 주장을 기록한 것이지 위령탑 건립을 목적으로 한 것은 아니지 않는가? △「국군의 양민학살」 등은 국방부 등 관계기관이 공식 확인해 주지 않은 주민들의 일방적 주장인데, 이 같은 위령탑 건립에 국고를 지원한 것이 합법적 행위인가? △ 교전 중 사살된 빨치산·좌익세력들을 추모하는 데 국고를 지원한 것은 합법적 행위인가? 등의 질문을 했다.
이 관계자는 『위령탑 건립에 대한 국고지원은 도의회 등 유관기관 협력 하에 합법적으로 이뤄진 것』이라며 『비문이 만일 문제된다면, 역시 절차를 거쳐 처리할 것』이라고 답했다.
트랙터로 愛國단체 회원들 습격
5일 自由애국단체 회원들이 기자회견을 가진 선산마을 위령탑 일대에서는 회원들과 지역주민들 간의 충돌이 빚어졌다.
이날 오후 3시경 被사살자 유족들로 보이는 70~80여 명의 주민들은 회원들을 태운 버스가 오기를 미리 기다리고 있었다. 버스가 도착하자, 『백한기 나와』『쳐 죽일 XX들』등 욕설을 퍼부으며 일단의 주민이 행패를 부리기 시작했다. 주민들에게 멱살이 잡힌 몇몇 회원들은 『보상금 탈 욕심으로 보이는 게 없구나』는 등 응수했지만, 적극적 대응은 자제했다.
주민들 중 소위 국군의 학살을 목격했다는 金모 씨 등은, 『국군이 양민을 학살한 다른 증거가 있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따로 보관해 놨다』며 『내가 확실한 증인』이라고 답했다.
고성이 오가고 있을 때, 마을주민으로 보이는 청년 한명은 트랙터를 몰고나와 회원들을 향해 돌진했다. 트랙터가 회원들 바로 앞에서 저지당하자, 그는 『내가 너희들 때문에 고아로 살았어.』라며 주먹을 휘둘렀다. 부상자는 발생하지 않았지만, 잠시 후 가해 청년은 주민들 사이로 유유히 사라졌다.
관할 경찰서에서 출동한 형사들은 상황을 방관하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경찰은 사전에 양측의 조우(遭遇)를 인지했지만, 병력을 배치하지는 않았다. 상황은 약 1시간에 걸쳐 이어졌으나, 부상자는 나오지 않았다.
[김성욱 프리렌서 기자]http://www.chogabje.com/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