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내맘님이 올린 글 "지혜가 담긴 人生의 도움말"을 읽었습니다. 그 중 성인에 관해 구절을 읽으니 저에게 가장 큰 영향을 주었
던 어느 한 책이 떠올랐습니다. 토마스 머튼이라는 분이 쓴 「칠층산」이란 책입니다. 간단히 말해 성 아우구스티노의 「고백록」
의 20세기 판이라고 하면 되겠습니다. 그 책에서 '성인이 되기 위해 필요한 것은 그렇게 되기를 원하는 것뿐'이라고 말합니다. 그
구절을 떠올리며 "내가 원하는 것은... 내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20대의 진지함을 50줄에 들어 다시한번 되새겨 봅니다.
※ 밑의 머튼의 생애 같은 글(제법 소중한 자료이긴 합니다)은 관심이 가시는 분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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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었다. 도로는 지하철 공사로 온통 파헤쳐져 흙더미가 양편으로 높이 쌓였고 주의표시로 빨
빌리지를 향하고 있었다. 그때 우리는 걸으면서 무엇에 관해서 토론하였는지 잊어버렸지만 이
야기 끝에 락스가 느닷없이 나를 향해 돌아서면서 질문을 했다.
으로 비약시켜 어물쩡하게 대답하고 말았다.
실이 여지없이 폭로되고 말았다. 락스가 다시 다그쳤다.
성인이라니! 나는 딴 세상 이야기 같은 충격을 받았다.
락스는 간단히 대답했다.
나는 다시 강조했다.
면 죄와 집착을 끊어버리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비겁 - 이 뒤얽혀져서 어찌해야 할지 앞이 캄캄했다.
락스가 다시 말했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도 락스와 같은 말을 했다. 그리고 그것은 ‘복음’을 이해한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명
백한 것이다. 락스와 헤어지고 나서 그 말에 관하여 곰곰이 생각해보니, 과연 옳은 말이었다.
다음날 나는 마크 반 도렌 교수를 찾아갔다.
마크 교수도 간단하게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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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a memorable scene in Merton’s book The Seven Storey Mountain, Lax and Merton are walking down Fifth Avenue
one day when Lax asks: “What do you want to be anyway?”
Merton hesitates, and says, “I guess I want to be a good Catholic.”
“What you should say,” Lax declares, “is that you want to be a saint.”
“How do you expect me to be a saint?” Merton asks.
“By wanting to,” Lax answers. “All that is necessary to be a saint is to want to be one. All you have to do is
desire it. Don’t you believe God will make you what He created you to be, if you consent to let Him do it? All you have to
do is desire 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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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머튼의 생애 (1915 - 1968)
1. 어린 시절
현대 사막의 교부라고 불리는 토마스 머튼(Thomas Merton)은 1915년 1월 31일 프랑스 남부의 작은 마을인 프라데
(Prades)에서 태어났다. 당시는 큰 전쟁이 치러지고 있었으며, 그의 부모는 예술가였다. 그의 아버지 오웬은(Owen)은 뉴질랜드
태생의 화가였고, 그의 어머니 루스 젠킨스(Ruth Jenkins)는 미국 오하이오주 출신으로 역시 그림을 그렸다. 양친의 예술가적인
방랑 기질 때문에 그는 어릴 적부터 여러 곳을 옮겨 다니며 생활했다. 그는 두 형제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남 동생 존 폴(John
Paul)은 1943년 2차 대전 중 영국해협 상공의 공중전투 중 사망했다.
그의 부모가 지닌 특성은 후에 그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그는 그의 부모를 이렇게 말한다.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도 자신들
은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고 믿으면서도 이 세상에 사로잡혀 있는 포로들이었다. 사실 나의 부모는 이 세상 사람들
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그들이 성인이었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부모님은 예술가였다.” 그는 자신을 “나는 아버지에게서
사물을 보는 태도와 고결한 성품을, 어머니에게는 고요함과 다재다능한 성품을 물려받았다.”고 말한다.
1916년에 그의 가족은 미국으로 건너와 롱아일랜드에 살다가, 어머니가 위암으로 돌아가셨다. 그 후 머튼은 한 곳에서 정착하지
못하고, 외가에서 생활하다가 아버지와 합류하여 프랑스와 영국에서 소년기를 보내게 된다. 머튼은 1925년에 프랑스 남부 성 안토
닌 마을에서 정착하게 되고 몽토방에 있는 학교를 다니게 되면서 가톨릭 문화를 만나게 된다. 1926년 머튼은 아버지와 함께 영국
으로 건너가 리폴리 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이때 머튼은 성공회 교회에 다니면서 성가도 부르고, 잠자기 전에 기도도 드리기 시
작했다. 1929년에 그는 영국에 오캄(Oakham) 고등학교에 입학한다. 머튼이 신앙을 가지게 된 시기는 이 무렵이었다. 머튼은 비로
소 교회에 다니게 되었고, 신앙에 대해 알기 시작했으며 식사 기도와 취침 기도를 하는 습관을 익히게 되었다. 그는 간디의 사상을
접하게 된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그의 전 생애에 계속하여 영향을 받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영향으로 평화에 대한 깊은 관심과
열정이 시작되었으며, 비폭력 운동에도 관심을 가지게 된다.
이 기간에 그는 영문학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는데, 윌리암 블레이크(William Blake), 로렌스(D.H.Lawerence), 제임스 조이스
(James Joyce)는 그가 좋아하는 작가들이었다. 이러한 관심은 일생동안 지속되었으며, 머튼의 왕성한 저작활동의 바탕을 이룬
것이다. 이곳에서 생활하던 중 아버지가 뇌종양으로 인하여 몇 차례 수술을 받았지만 별 다른 차도가 없었다. 머튼은 아버지의 병
환의 소식을 듣고 처음 스스로 기도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기도를 하게 되는데 그것을 그는 이렇게 표현했다, “내가 아버지를 위
해 기도했다고 해도 그것은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무신론자라도 위기를 당하면 우러나는 거의 맹목적이고 본능적인 감정에 불
과한 기도였을 것이다. 하느님의 존재를 정확하게 믿은 것은 아니지만 무의식중에 하느님을 인정하고 경배할 필요성을 느끼는 이
러한 감정은, 하느님께 종속된 인간 본성에 깊이 새겨져 있는 인간의 본질에서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투병생활 중이던 아버지의
신앙 모습에 머튼은 깊은 감명을 받았다.
1931년 1월경에 아버지가 숨을 거두게 된다. 머튼은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소식을 듣고 “내 메마른 영혼의 딱딱한 껍질이 드디어
내가 겨우 들여놓았던 종교 세계의 문까지 완전히 닫아 버렸다. 먼지만 쌓여 있는 텅 빈 신전에 어느 하느님이고 발붙일 자리는 없
었다.”라고 자신의 심경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그때 아버지로부터 들었던 윌리엄 블레이크(William Blake)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
었다. 머튼은 콜럼비아 대학에서 학위 논문을 쓸 때 블레이크를 주제로 할 정도로 그는 블레이크의 영향을 많이 받았
다. 머튼은 블레이크에 대해서 이렇게 평하고 있다: “내가 윌리엄 블레이크를 사랑한 것은 하느님의 은총이었다고 생각한다. 그 시
인에 대한 사랑은 내 삶의 발전에 깊숙이 파고든 불멸의 사랑이다. 아버지도 블레이크를 좋아하여 내가 열 살밖에 안 된 어린아이
였을 때 그에 대해서 내게 설명해 주려고 했을 정도다.”
1933년 그는 이탈리아 여행을 하게 되는데 거기서 그는 두 가지 경험을 하게 된다. 하나는 로마에 있는 교회를 순례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의 선친이 호텔방에 나타나신 것이다. 이 경험은 그가 지닌 관심을 새로운 것으로 바꾸어 놓는다. 머튼은 비잔틴 모
자이크를 통하여 그리스도교의 과거 역사를 찾아보기 시작한다. 그는 비잔틴의 모자이크를 통하여 생애 처음으로 한 인간으로서
그리스도에 대한 깊은 관심을 지니게 된다. 그는 신약성서를 읽고 복음서를 공부하기 시작한다. 머튼은 위대한 예술 작품을 관람
하고, 그것들이 가져다주는 내적 충동을 관찰하면서 로마 교회를 이해하기 위해 많은 시간을 보낸다: “이 성당들 벽에 있는 예술이
내게 말을 하였다. 그래서 생전 처음으로 나는 그리스도라고 하는 사람이 대체 누구인가를 조금씩 알기 시작했다.
머튼은 로마에 있는 호텔방에서 특별한 종교 체험을 하게 된다. 그는 1년전에 돌아가신 그의 선친이 어느 날 밤 갑자기 생생하
게 나타난다. 그 순간 그는 자신의 비참하고 부패한 영혼을 들여다보고 몸을 떨게 되고, 그 비참함에서 벗어나고자 열망하게 되며,
더러워진 그의 영혼으로부터 해방되어 참된 자유를 얻고자 하는 갈망이 생겨나게 된다. 그는 기도를 하기 시작하였고, 로마의 외
각에 있는 트라폰타네라는 트라피스트 수도원을 방문하여 수도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머튼이 깊이 숙
고하고 난 후 결정한 것이 아니라 불안해진 정서의 일시적인 반응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신앙생활에 대한 열망은 후에 그를 20세
기의 가장 널리 알려진 트라피스트 수도자가 되게 했다.
2. 대학생 시절
1933년 캠브리지 대학교의 클레어 칼리지에 입학하지만 고뇌하는 머튼에게는 그 시절이 아주 어려운 시절이었다. 그는 그곳에
서 행복과 만족을 찾지 못한다. 그는 많은 젊은이와 같이 불안정하고 방황했으며 당시 대학과 영국 사회의 지성이 갖고 있던 위선
을 혐오했다. 그는 세속적인 것을 추구하며 헛된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그 시절 그에게 유일한 위안거리는 여행이었다. 그는 여행
을 다니면서 빼놓지 않고 방문하는 곳은 미술관, 박물관과 대학교였으며, 로마 여행 이후에는 성당과 수도원을 찾았다. 그 후 그는
1934년 11월 영국을 떠나 미국의 영구 비자를 받게 된다. 그는 미국으로 가는 동안 “나는 이 세상의 평화와 정의를 위해 헌신하고
싶었다. 나는 이 세상은 또 한 번의 전쟁으로 끌어넣고 있는 세력들의 규합을 적극적으로 방해하고 이들의 관심을 딴 데로 전환하
는 일을 하고 싶었다”라고 선상에서 고백하고 있다.
1935년 콜럼비아 대학에 입학한 후, 공허한 마음을 채울 수 있는 어떤 것을 찾다가 공산주의에 대한 많은 책을 탐독하고 집회에
도 참여하는 열성을 보였다. 머튼은 자신이 안고 있는 문제는 그의 내면에 있지 않고 그가 살고 있는 사회의 책임이라고 결론지었
다. 그는 사회주의에 관심을 깊이 가졌으며 그들의 조직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그가 공산주의에 깊은 흥미를 느꼈던 것은 사회는
악하며, 부패해 있고, 공산주의만이 그러한 부패와 악을 극복하는 유일한 수단이라고 확신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공산주의 청년운
동에 가입하여 학생 기관지 제스터(Jester)의 예술 부장으로 일하기도 했다. 공산주의 운동에 참여하면서 사회 변혁과 사회 참여
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졌다. 머튼은 사회에 대한 인식을 깨닫기 시작했으며, 세계의 평화와 정의를 위해 자신을 헌신하고자 했다.
1936년 공산당이 반전 입장을 옹호하고 나섰다가, 이를 선회하여 1936년 스페인 내란 중에 전쟁을 찬성하는 입장을 취한 사건 등
을 보면서 공산당은 일관성이 없는 집단임을 깨닫는다. 머튼은 이 후에 공산당에 의한 세계 변혁이라는 환상에서 깨어나게 된다.
그는 콜롬비아 대학 시절에 스페인어, 독어, 지질학, 법률, 불문학을 공부하면서 작가로서의 야망을 가지게 되었다. 이 시기에
머튼은 그의 삶의 전환에 핵심적인 계기가 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첫 번째는, 반 도렌(Mark Van Doren) 교수를 만났다.
그는 시인이며 콜롬비아 대학의 교수이고 머튼의 스승이었는데, 환상을 쫓지 않고 사물의 본질에 도달하려는 강한 열망과 진지함
을 지니고 있었다. 반 도렌 교수는 사건과 사물의 외관 안에 있는 존재와 실체를 보고, 사물의 본질을 직접 관찰하는 명료한 정신
과 깊이 있는 학자적 감각을 지닌 사람이다. 반 도렌 교수로부터 머튼은 자신 안에 실재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발견하는데 도
움을 받았다. 그러나 머튼이 그에게 받은 가장 큰 영향은 중세 스콜라 철학과 현대 토미즘에 대한 것이다. 그와 만남을 머튼은 “내
가 그 시기에 마크 교수를 알게 된 것은 천만다행이었다. 왜냐하면 나는 그때 공산주의를 신봉하여 계급 없는 사회라는 이상향을
지향하는 것이라면 어떤 어리석은 것이라도 순순히 받아들일 위험한 상태에 있었기 때문이다.”라고 한다.
두 번째, 머튼에게 사상적으로 커다란 영향을 준 에띠엔느 질송(Etienne Gilson)의 ‘중세 철학의 정신’ (The Spirit of
Medieval Philosophy)이라는 책을 우연히 접하게 되었다. 그가 질송의 책을 내려놓았을 때의 감정을 “교회에 가고 싶은 소망이
어느 때 보다도 진지하고 뿌리 깊게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제까지 그처럼 심각하게 느껴 본 적이 없었다.”라고 말한다. 머튼은 이
책에서 가장 깊은 인상을 받은 것은 하느님에 대한 개념으로, 하느님의 자존성(Aseitas)에 대한 개념을 충격적으로 받아 들였다.
머튼은 하느님에 대한 잘못된 견해를 수정한다. 이 개념은 머튼으로 하여금 가톨릭 신앙이 비과학적 시대의 미신적인 유물이 아님
을 알게 하였다. 하느님에 대한 전혀 새로운 개념을 발견하게 된다. 하느님을 지성적으로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의 종교적
인 갈망과 경험들을 설명할 명백한 정의를 추구하고 있었으며, 이러한 것들을 질송과 마르땡 등의 네오토미스트들로부터 찾았다.
그리고 세 번째로 그가 영향을 받은 것은 그의 친구들이었다. 로버트 락스, 에드워드 라이스, 세이머 프리드긋 등이다. 그들은
모두 신앙의 위기를 겪고 있었고 세상에서 환멸을 느꼈던 친구들이며 서로 책이나 이념, 음악 등에 대한 일상의 평범한 것들에 의
해 서로 강한 결속을 하고 있었다. 결국 이 친구들과의 모임을 통하여 그는 공동체를 이루어 사는 삶의 가치를 깨닫게 된것이다.
1937년 머튼은 그의 친구 락스로부터 헉슬리의 「목적과 수단」이라는 책 소개 받게 된다. 이 책은 머튼의 영적 성숙에 매우 중
요한 역할을 한다. 머튼은 그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 :
“헉슬리의 요점은 선한 목적을 이루지 못하게 하는 수단
전쟁, 폭력, 보복, 강탈 을 우리 인간이사용하고 있다는 것
이었다. 그리고 헉슬리는 인간의 육체 인간 본성의 비영신
적인 요소 가 물질적 동물적 욕구를 탐닉하고 있다는 사실
에서 인간이 합당한 수단을 사용할 수 없는 원인을 추적해 냈
다. 주요 과제는 이 하급 요소(육체)에 예속됨을 벗어나 자
기 자신의 정신과 의지에 대한 지배권을 되찾는 것, 즉 정신
과 의지가 제 기능을 발휘하게 하기 위하여 행위의 자유를
확보하는 것이다.
머튼은 금욕이나 수덕이란 말에 반감을 일으켰고 전적으로 낯선 것으로 여겼다. 그러나 후에 이 말 속에 단순한 육체적 학대 이
상의 의미가 있음을 깨닫게 된다. 이것으로부터 그는 초자연적 영적 질서와 하느님과의 진정한 접촉의 가능성을 이해하게 된다.
3. 가톨릭으로 개종
머튼은 콜롬비아 대학을 졸업하고, 영문과 대학원에 진학하였다. 그는 대학 교수가 되기를 원하였으며 윌리엄 블레이크(William
Blake)에 대한 작품을 연구하였다. 블레이크는 성스러운 천재의 면모와 영적인 열정을 지닌 예술가였으며, 이에 대한 머튼의 관심
은 이미 학문적인 것을 넘어서 있었다. 그는 블레이크의 예술 안에서 자연과 현실에 대한 태도는 기본적으로 신비적이며 초자연적
이었음을 깨닫는다. 그는 자신의 인생에서 처음으로 자연을 초자연적인 의미로 이해하게 된다. 머튼은 “「윌리엄 블레이크의
자연과 예술」”이라는 석사 논문을 쓰던 중 가톨릭으로 개종하게 된다.
머튼은 대학원 1학년 때 만난 힌두교의 수도승 브라마카리(Bramachari)의 만남은 그의 개종에 또 하나의 이유를 제공한다.
그는 단순한 생활로 머튼의 마음에 커다란 감동을 주게 되었고 후에 동양 사상에 대한 동경을 갖게 되었다. 브라마카리는 수도승
이면서도 머튼에게 영향을 주었는데, 특히 그는 기독교 신비주의에 대해 머튼의 주의를 환기시켜 주었다. 브라마카리는 아우구
스티누스의 책을 읽어 보라고 권유하였다. 머튼은 그와의 만남을 통하여 아우구스티누스를 접하게 된 것은 하느님의 섭리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홉킨스의 책을 읽게 되는데 이는 그의 개종에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머튼은 홉킨스의 시와 그의 필기장에 심취되어 예수
회의 생활은 어떤 것인가? 예수회 회원들은 대체 무엇을 하는 사람들인가? 사제는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사는가? 하는 물음을 가지
고 이런 것에 신비스러운 매력을 느끼기 시작했다. 홉킨스 역시 가톨릭 신자가 되길 주저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마음속에서 가
톨릭 신앙을 가지도록 종용하는 한 목소리가 들림을 느끼게 된다. 그는 더 이상 주체할 수 없어서 그리스도 성체 성당에 가서 가톨
릭 신자가 되고 싶다고 말한다. 그는 1938년 11월 16일 세례를 받고 가톨릭 신자가 된다. 그는 이 무렵 자신이 신앙의 개종이 의지
까지도 완전히 하느님께 예속되지 않고는 자신의 개종이 불안정하고 어설픈 것임을 절실히 느끼게 되었다.
4. 겟세마네 수도원 입문 이후 시절

머튼은 이어 박사과정에 진학했고, 새로 발견한 신앙생활과 더불어 변함없이 술과 담배, 영화, 재즈 등을 즐기면서 지냈다. 그러
던 중 그는 점차로 자신이 진정으로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된다. 1939년 그는 고독 속에서 하느님을 만나는 길, 곧 사
제가 될 것을 결심하고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입회 허가를 기다렸다. 1940년 9월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입회가 거절되고 성 보나벤
투라 대학의 영어 강사로 일하게 된다. 1941년 머튼은 미국 켄터키의 겟세마네 트라피스트 수도원에 피정하러 가기도 하면서 수도
원 생활과 다름없는 삶을 영위한다. 머튼이 경험한 겟세마네 수도원에서의 미사들은 장엄함과 존엄 그리고 기도하는 열렬한 분위
기였다. 겟세마네 수도원에서의 피정은 그에게 있어서 신비였고 기쁨이었지만, 또한 사제직에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한 그에게 아
픔이자 커다란 슬픔이었다.
겟세마네 수도원에서 돌아온 후 그는 캐더린 드 휴크(Baroness Catherine de Hueck)여사를 도와 할렘의 흑인가에 있는 “우정
의 집”에서 봉사 활동을 하였다. 그곳의 상황은 그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때까지 머튼은 세상에 대한 두 가지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하나는 그가 대학 시절에 지니고 있었던 현실에 대한 긍정과 능동적인 참여이고, 다른 하나는 겟세마네 수도원에서 받은
피정에서 느꼈던 현실에 대한 혐오와 포기의 자세이다. 머튼에게 있어서 “우정의 집”은 사회 구조적인 문제에서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자신의 자리에서 그들의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한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하는 것이었다. 그때 휴크 여사로부터 “사제가
될 생각이 없느냐”는 질문을 받는다. 그리고 마크 교수로부터“성소가 없다는 말을 들었을 때 모든 것을 포기해 버린 그 사실
이 바로 자체가 성소가 있다는 증표일지도 모른다.”는 말을 듣는다. 그는 이것이 하느님의 섭리라 생각하고 그 속에 사제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필로테오 신부에게 이야기를 했고 필로테오 신부는 그의 소명을 확인해 주었다.
겟세마네 수도원에 2번째로 방문한 후 그는 그 수도원에 가입하기로 결심했다. 이때 그의 마음은 세상을 철저히 부정하였고 거
기에서 단절되기를 바랐으며 엄격하게 모든 욕망을 끊어버림으로써 속죄하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는 수도원에서 하느님의
참된 자유와 사랑을 경험하면서, 지금까지의 자신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존재가 되기를 원했던 것이다. 그는 자기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이해하게 되었고, 그는 트라피스트 수도자가 되고 싶었다. 그때 징집영장이 나왔을 때 머튼은 마음을 더욱 확고하게 정
하고 겟세마네 수도원에 들어갔다.
1942년 12월 10일 토마스 머튼은 가톨릭 관상수도회 중에서 가장 엄격한 고행과 침묵 생활을 하는 겟세마네 수도원
에 들어간다. 트라피스트 수도사들은 날마다 전통적으로 드리는 일곱 차례의 기도를 실시하며, 침묵서원을 지켜 서로
에게 말을 걸지 않는다. 그것은 육체노동과 기도와 경건서적을 읽는 베네딕트의 규율을 따르는 생활이다. 머튼에게 이 일이 그
다지 쉽지 않았지만 그는 기쁘게 받아 들였다. 수도원에서 단순한 생활과 노동 그리고 기도의 기쁨은 머튼에게 큰 기쁨을 안겨 주
었다. 머튼은 루이스(Louis) 수도사라는 이름으로 불리면서 하느님께만 자신을 바치는 삶을 선택했다. 그는 침묵 생활 속에서 절
대자의 존재를 더 깊이 인식하게 되었다. 그는 감격에 넘쳐 이렇게 고백한다. “굉장한 생활이지요. 그 분의 단순함이 우리의 생명
입니다. 우리는 그 분의 유일성 안에서 살아갑니다. 즉 우리는 오직 그 분께 집중하여 살아갑니다.” 머튼은 수도원 안에서 많은 독
서와 기도를 통하여 영성가들과 만나게 되고 이를 자신의 영성 형성의 기초로 삼았다.

머튼은 1949년 사제 서품을 받고, 수도원 생활 속에서 점점 더 깊이 하느님을 체험하게 되었다. 그는 그의 자서전 「칠층산」
(The Serven Story Mountain)을 쓰기 시작했다. 이 책은 1948년에 출판된 후 예상치 못한 호평으로 일약 세계적인
영성 대가의 위치에 올려놓는다. 그의 자선전의 영향으로 인하여 수도원을 동경하는 사람들이 많이 생겨나게 되었다.
세상과 단절하기를 원했던 머튼은 다시금 세상과 관계하게 된다. 사람들과의 서신 왕래를 통하여, 세상에 대한 경멸은 사라져갔으
며 전통적인 그리스도교 관상을 넘어서서 세상 안에서의 관상 체험으로 세상을 끌어안는 구도자의 길을 걸어가게 된다.
머튼은 수도원 밖의 사람들과 접촉과 대화를 통로를 넓혀 갔다. 하느님 안에서 집요하게 고독을 추구하던 머튼은, 하느님 안에
서 다시 세상으로 불리어졌다. 그는 수도원 밖의 사람들도 수도원 사람들처럼 영적인 갈증을 느끼며 하느님을 간절히 찾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또한 수도자들도 언제나 세상 가운데 살아 있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일깨워 주었다.
머튼은 수도원 밖에 있는 사람들과 서신 왕래를 시작했다. 그 중에 가톨릭 노동 운동의 창설자인 도로시 데이(Dorothy Day)와
니카라과의 혁명적 신부 에르네스트 카르데날(Ernesto Cardenal)도 포함 되어 있었다. 머튼이 세상을 등진 가톨릭의 대표적인 인
물이라면, 도로시 데이는 세상사에 전심전력을 기울인 가톨릭 인이다. 그 당시 도로시 데이는 가톨릭의 유일한 반전 출판물이던
가톨릭 노동자 신문을 출간하였다. 또한 그는 전쟁에 반대하는 글을 쓰기 시작했다.
머튼의 사회에 대한 관심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 일으켜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 머튼은 인류를 구원 할 길을 모색
했다. 세계 문제와 인류 문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이다. 비폭력에 대하여 더욱 강렬하게 자신의 생각을 펼쳐 나갔다. 그에게
있어서 비폭력은 원수에게서도 인간의 모습을 찾아내고, 그와 대화를 나누는 적극적인 저항을 의미했다.
머튼은 “세상 안의 관상 체험‘이라는 통찰력을 가지고 현대인의 인간성을 회복하고자 했다. 그는 전쟁과 평화의 문제로
서, 전쟁 반대, 핵폭탄 사용 반대, 베트남 참전 반대를 외쳤다. 인종 차별에 대해 반대하며 마르틴 루터 킹 목사의 인권운동을 도왔
다. 산업 사회의 문제점을 경고하면서 생태계의 보존과 현대인의 정신적 위기에 대해 지적하는 등 예언자적 활동을 하기도 했다.
이로 인하여 수도원에서 그의 글과 편지는 자주 검열의 대상이 되고 문제시 되곤 하기도 했다.
머튼은 콜롬비아 대학 시절부터 동양 사상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의 관상체험이 심화되기 시작한 50년대 말에
이르러 동양 사상을 깊고 진실하게 이해하기 시작했다. 이 당시 미국의 관심은 교회로 부터의 명상 자체, 요가 등으로 옮겨가
고 있었다. 특히 머튼의 선(zen,禪)에 대한 관심은 지대했다. 머튼은 스즈키(D.T.Suzuki) 박사를 비롯한 일본 학자들의 글과 또
직접 만남과 대화를 통해 불교와 선(禪)에 깊이 접하게 되었다. 이를 통해 동양과 서양의 영성 신학의 교류와 상호 이해와 성장을
위해 공헌하게 되었다. 이런 변화과정 속에서 선의 관점을 수용하여 12년전에 내 놓은 「명상의 씨」를 수정하여 「새 명상의
씨」를 내 놓았다. 이러한 선에 대한 이해는 「선과 욕망의 새」,「동서관상」등에 잘 나타나 있다. 머튼은 5년간 장자를 읽고 연
구하고 주석을 달아 묵상한「장자의 길」(The Way of Chuang Tzu)을 펴내기도 했다. 선(禪)과 관련해서 머튼의 사상은 무위(無
爲)의 자유를 추구하게 되었다.
머튼은 1968년 방콕에서 열린 아시아 수도승 연합회에 참석으로 이어진다. 그는 이때 동양의 영성을 접하기를 희망했다. 그는
말이나 책으로만 대하던 동양을 직접보고 느끼고 싶어 했던 것이다. 이 여행에서 그는 동양 종교의 여러 형태의 영성 경험과 신앙
과의 보다 깊은 대화를 위해 동양의 여러 나라들을 여행하였고 달라이 라마를 비롯한 종교 지도자들과 만났다. 그들을 통하여 머
튼은 그들 사이에 있는 오래된 통일, 하나로서의 일체감을 발견한다.
1968년 12월 10일 머튼은 방콕에서 있었던 학술대회 강연에서 “맑시즘과 수도원적 관심”을 주제로 강연을 하고 호텔로 돌아와
선풍기 감전 사고로 52세의 일기를 마친다. 우연히도 12월 10일은 41년에 머튼이 수도원에 들어간 날짜이므로 정확히 27년간의
수도적 삶을 산 것이다. 머튼은 입회한 후 1968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겨우 3차례의 외출(첫 번째 외출: 1948년 8월 7
일, 7년 만에 루이스벌로 외출 (외출 시간은 고작 6시간 정도) ; 두 번째 외출 : 1949년 1월 루이스벌로 외출. 관상의
열매를 세상과 나누어야 함을 발견 ; 세 번째 외출: 1968년 방콕으로 학술 여행)을 하였을 뿐이고, 그의 생애 마지막
3년간은 오로지 은둔 생활이었다 .

머튼은 예술가 부모의 영향과 세계 1,2차 대전과 전쟁에서 동생의 죽음, 그리고 시대적 대공 황(기아)을 경험하면서 고독과 개방
의 양 극단을 넘나들었다. 하느님과 또 이웃과의 일치를 향한 열망에 전 생애를 불태웠으며, 그의 치열한 영적 여정은 관상생활을
원하는 모든 이들 에게 풍부한 원천이 되고 있다. 머튼은 영성을 이론으로 익힌 것이 아니라, 실제로 영성생활을 하면서 경
험된 진리 만을 토해 내었다.
그의 자서전 『칠층산』 은 2차 대전 이후의 세계에 새로운 이상을 제시했고, 그를 통하여 많은 젊은이들이 수도자
의 생활을 택하였으며, 가톨릭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의 참 맛을 음미하게 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머튼은 교부적
입장으로, 평화 문제의 대변가로서 미국 내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지니게 되었다. 비록 그는 현실세계를 떠난 수도자였지만,
사실은 세상 가장 깊은 곳에서 살았다. 그에게 있어서 중심사상은 하느님으로부터의 소외에서 오는 현대인의 정신적 문제였으
며, 이를 극복하기 위한 인간의 내면적 자기성 찰과 영성적 삶의 중요성을 말하는 데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그의 영성은 수도
생활이 세상을 떠나 광야로 가는 것 이상인 것을 역설했다. 그에게 있어서 영성은 결코 행동과의 분리가 아니었다. 때문에
머튼은 우리 사회에 가장 적절한 표징을 던져준 한 사람의 인간임과 동시에 하느님과의 직접적이고 깊은 관계를 추구한 하느님의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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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특정 종교인의 글을 올리는게 좀 부담이 가긴 합니다. 토마스 머튼은 가톨릭 수도자이긴 하지만 불교와 선, 장자에 이르기
까지 이해의 폭이 무척 넓은 분 이었습니다. 종교를 떠나서 글 자체만 보시면 되겠습니다. (내용이 종교와 무관하진 않네요.
내키지 않으시면 그냥 스킾하시길)
대학 1학년 때 저 책을 읽고 운명이라 할 정도로 일생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라 말할 수 있겠네요. 머튼에 빠져 학위논문조차
머튼과 같은 작가를 택하게 되었고... 또한 참으로 이상하게도 저 역시 머튼이 겪었던 수도자의 꿈과 영문학자의 꿈 사이의
갈등, 사랑과 성직의 갈등 또한 꼭 같이 겪게 되었으니... 저에게 삶의 신비는 아직도 어렵기만 하네요.
토마스 머튼에 대해서 잘은 모릅니다.
부모님이 두 분다 화가고 머튼이 카톨릭신자고 노벨 경제학 상을 받았지 싶네요
선풍기인가~아님 전선인가 아무턴 감전되어서 생을 마감한 사람이지 싶어요~에이 헷갈려~ㅎㅎ
예전에 친구가 존경했었는데~ㅎㅎㅎ
십자가의 성요한을 통해서 "영혼의 어둔밤"을 인식하구 리지의 소화 테레사를 통해 일상속에서도
성인됨과 관상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고 되어 있네요
먼저 제것을 알아야만 한다는 암시죠?
서로 너무 많은 것을 기대 하면 서로에게 해를 끼치니 자신을 하나님에게로
인도하는 이정표로 보았다지요
"자기를 비운 사람만이 진정한 혁명가"라고 한 말이 마음에 들었어요
창진엄니님, 답글 달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니 먼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글이 그리 편하지 않은 글일 수도 있는데...
토마스 머턴이던 로버트 머턴(1997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이던... 보통은 생소한 인물이죠. 헷갈리시는게 당연한 겁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과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가 16세기, 소화 데레사가 19세기의 영성가라면 머턴은 현대의 탁월한 영성가죠.
"사람들이 괴로워하는 이유는 과거와 미래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한 순간 한 순간만을 살아갑니다." 소화데레사의 말인데요.
말은 쉽지만... 행한다는 자체가 영성의 대가라는 말이겠죠. 한 순간 한순간만 살아간다는게 자기를 비워야 가능한 것 아닐까요...
어떠한 종교적인 문제가 아닌,,,,,,,,제겐 너무 어려운 주제네요,,,,,,
자신의 안위만을 생각했던 마음이 먹먹할뿐,,,,,
어렵지만 귀한 자료,,,,, 너무나 감사하게 담아 갑니다,,,,,
"무의식중에,,,,,,하나님을 인정하고 경배할 필요성을 느끼는 이러한 감정은,,,,,
하느님께 종속된 인간본성에 깊이 새겨져있는 인간의 본질에서 분리될 수 없다는것",,,,,
내맘님 덕분에 머튼을 떠올리고 저 자신을 다시 돌이켜 볼 기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감사드립니다.
머튼에게 위의 성인 이야기를 한 로버트 락스도 당시는 유태교인이었고, 머튼에게 기독교 영성을 눈 뜨게 한
안내자였던 브라마카리는 힌두교 수도승이었죠. 타종교인이던 비종교인이던 서로 배울 점이 많다고 봅니다.
칼 라너라는 신학자는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을 하기도 했고, 성경에도 "착한 사마리아 인"의 비유가
있듯이... 신앙인이 꼭 모범적인 삶을 산다는 게 현실도 아니고... 비신앙인으로 선하게 사는 분도 엄청 많고...
내맘님께서 위의 글로 어떤 경건함을 느꼈다면 그건 내맘님 본성에 이미 경건함이 있어서가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