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차 叶羽晴川 출판사: 한솜미디어
여기서 공부차는 차나무 품종이면서 잘 만든 암차를 지칭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청나라에 와서 차를 마시는 풍습이 널리 퍼져 암차는 공급이 수요를 따르지 못하였다. 청나라 가경(가경)년 간에 오면 암차와 비슷한 방법으로 만든 반 발효차 종류를 모두 공부차라고 불렀고 이후 공부차는 반 발효차를 지칭하는 말이 되었다.
“공부차는 차 끓이는 법이다.”
“공부차”가 일종의 “차 끓이는 기법”이라는 사실과 아울러, 당시의 음차풍속도를 알 수 있다. 특히 정교한 차 끓이는 기구가 주목되는데, 화로(화로), 솥(솥), 자사호, 무늬 있는 작은 자기 잔, 차판 그리고 차호 받침, 부채, 목탄을 집는 대나무 집게 등이다.
진나라 이후 한나라 시대에 이르면 차에 관한 신뢰할 만한 기록들이 나타난다. 서한(西漢) 초 양웅(楊雄)이 저술한 <방언(方言)>에는 “촉(蜀) 서남인은 차를 설(蔎)이라 한다”라는 기록이 있고, 사마상여(司馬相如)가 지은 <범장(凡將)>에 보면 천차(荈茶)라는 기록이, 왕포(王褒)의 <동약(僮約)>에는 “무양매차(武陽買茶: 무양에 가서 차를 사고) 팽도진구(烹荼盡具: 차를 끓이고 다구를 씻을 것)”라는 구절을 볼 수 있다. 위에 세 사람 모두 서한 시대에 촉 지방에 살았던 저명한 학자들이다.
이런 기록들에서 우리는 기원전 3세기 전후에 이미 장강(長江) 중하류 지방에서 차를 재배하고 차를 마시는 풍속이 퍼져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시기의 차 마시는 방법은 상당히 거칠어서 국처럼 그냥 끓여 마신 것 같다. 아직은 전문적으로 차를 섬세하게 끓여 마시지는 않았고, 다구도 전문적인 다구보다는 일반 솥에서 끓여 밥 먹는 사발에 따라 마셨다.
800여년의 전쟁과 분열의 시대가 지나가고, 통일 국가를 이룬 당나라 시대가 왔다. 당나라는 봉건사회가 바야흐로 꽃 피우던 시기로, 교통이 발달하였으며 차 마시는 풍속도 북쪽 지방까지 전래되었다. 당 태종에서 현종에 이르는 120년 동안은 사회가 안정되고 경제가 발달하였으며 문화도 크게 융성하였다. 이런 사회적 배경 아래서 차를 심고 재배하는 풍습은 기후적으로 차를 재배하기에 적당한 지역에 널리 보급되었고 차 산업도 발전했다. 사람들은 이런 물질적인 안정을 기반으로 하여 일상적인 생활에서 벗어나 정신적인 만족과 예술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하게 되었다. 차 마시는 방법도 이전의 그냥 끓여 마시는 단계를 지나 달여서 그 맛을 음미하는 시대로 들어왔다.
당나라 때에 관리를 선발하는 중요한 수단은 과거제도이며 선비들의 목표는 과거에 급제하는 것이었다. 차를 마시면 잠을 쫓고 머리를 맑게 하며 생각을 집중시킨다. 이런 차의 이점을 문인학사들은 잘 알았다. 더구나 당대(唐代)에는 선종이 크게 유행하였는데, 선종은 참선을 하여 깨달음에 이르는 것이 중요시 되었고 좌선을 할 때 잠을 쫒는 차는 다른 것과 바꿀 수 없는 음료가 되었다.
당나라 봉연(封演)의 <봉씨문견기(封氏聞見記)>를 보면 당시의 풍속을 엿볼 수 있는데, “학승들은 애써 눕지 않고 수행하며 저녁밥도 먹지 않는데 차 마시는 것은 허용되었다. 사람들은 차를 가지고 다니며 어디서든지 끓여 마셨으며 이를 모방하여 차 마시는 풍속이 일어났다.”, “옛 사람들도 차를 마셨지만 지금 사람들처럼 탐익하지는 않았다. 지금 사람들의 풍속은 낮이 다하고 밤이 새도록 마신다. 이 풍속은 중원에서 시작하여 변방까지 흘러갔다.” 이런 시대적인 배경 아래서 육우(陸羽)는 수년간의 노력으로 다도의 이론적인 기초를 정립한 세계 제일의 다서인 <다경(茶經)>을 저술하였다.
전다(煎茶)는 그 과정이 상당히 복잡하고 여러 가지 전문적인 기구가 필요하다. 그 과정은 비기(備器: 기구를 준비함), 자다(炙茶: 차를 굽고), 연라(碾羅: 차를 갈고 체로 친다), 택수(擇水: 물을 선택하고), 취수(取水: 물을 떠서), 후탕(候湯: 물이 끓는 것을 기다려), 전다(煎茶: 차를 끓여), 작다(酌茶: 잔에 나눠), 철음(啜飮: 마신다).
육우(陸羽)는 풍로(風爐)와 솥을 스스로 설계했다. 풍로는 옛날 솥처럼 생겼는데 다리가 세 개이고 세 발 사이에 구멍을 세 개 만들었다. 풍로 바닥에는 구멍을 만들어 공기가 통하고 재를 털어 낼 수 있게 했다.
다만 전다용(煎茶用) 솥은 차츰 점다용(点茶用) 병(甁)으로 대체되었다.
송나라 사람들이 사용했던 음다기구(飮茶器具)는 당나라 사람들이 사용했던 음다기구에 비해서 수량이나 종류가 많지는 않지만 더욱 법도를 중시하고 정교하게 만들었다. 특히 찻잔(盞)이나 물을 담는 호(壺)나 차를 굽는데 사용하는 꼬지() 등은 그 재질도 좋아지고 훨씬 정교하게 만들어졌다.
송나라 사람들은 점다(点茶)를 할 때 “투다(鬪茶: 차 겨루기)”를 좋아했는데, 그 승부를 정하는 기준은 첫째, 차 표면에 생긴 거품의 빛깔과 균일도룰 보고, 둘째는 잔의 안쪽 면과 거품이 만나 생기는 흔적(水적)이 있는지 없는지를 살피는 것이다.
송나라 시대에 점다(点茶)할 때는 병에 물을 끓여, 다완에 부어 사용했는데 이것은 중국 차 문화사에 있어서 일대 혁명이었다.
몽고인들의 습관은 복잡하지 않고 자연스러운 것을 좋아하여, 차에 있어서도 당 • 송 시대에 성행하던 병차를 굽고 갈아서 마시던 풍속은 점점 쇠퇴하고, 당 • 송 이전의 잎차(잎茶)를 솥에 넣고 끓여 마시는 풍속이 되살아났다.
덖어서 만든 초제(炒製) 차가 주류를 차지하게 되었다. 명나라 사람들은 이전의 기초 위에, 이전의 차를 갈아서 가루에 끓는 물을 부어서 마시는 방법을 탈피하여 덖은 산차(散茶)를 우려 마시는 방법을 채용했다.
우려마시는 방법은 중국 차 문화에 있어서 중요한 이정표이며, 포다법(泡茶法)이라고도 한다.
공부다예(工夫茶藝)의 형식은 청대의 기본 정형(定型)으로 조주(潮州)사람들의 성숙 단계에 이른 차 마시는 풍속을 정리한 것으로 오늘 날의 공부다예와 비교해도 이미 절정에 도달하였다고 할 수 있다.
다구의 정교함과 아름다움은 공부다예의 요체이다.
소(小) : 용량이 크지 않고 적당해야 한다.
천(淺) : 호가 작고 깊지 않아야 차를 따르고 나면 호에 물이 남지 않고 차의 맛과 향도 잘 우려 나온다.
제(齊) : 자사호의 손잡이, 물이 나오는 부리(부리)가 뚜껑과 맞물리는 입이 수평을 이뤄야하고 간결하고 정교해야 한다.
로(老) : 오래되고 오래 쓴 것일수록 귀하게 친다.
소(小) : 한 두 모금에 다 마실만한 크기를 말하고
천(淺) : 마셨을 때 잔 바닥에 남지 않아야하며
박(薄) : 얇아야 향이 잘 살아나며
백(白) : 차탕 색을 잘 볼 수 있어야하며 청화무늬가 있으면 더욱 아름답고 바닥이 좁고 입이 넓은 것이 좋은 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