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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대 반 유신운동의 출발
(함성지 사건과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사건을 중심으로)
김정길(6.15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 광주전남본부 상임대표)
70년대는 두 개의 불꽃으로 시작되었다. 하나는 70년 11월 평화시장 노동자 전태일의 몸을 사르는 불꽃과 71년 8월 광주 대단지 주민들의 분노의 불꽃이었다. 박 정권의 2차에 걸친 경제개발 5개년 정책은 저곡가 저임금 정책으로 처음부터 노동자 농민들의 희생의 토대위에서 시작되었다. 그 결과 1차 5개년 계획이 끝나기도 전인 1966년부터 도시가계와 농촌가계의 역전이 시작되고 66년부터 70년 사이 매년 60여만의 농촌인구가 대도시, 특히 서울로 몰려들었다. 농업이 주산업이었던 광주전남은 이중 삼중으로 수탈을 당했다. 쌀을 생산해서 생산비 이하에 팔아야 했으며, 아들딸을 생산해서 공부도 채 마치지 못하고 구로공단이나 평화시장의 값싼 노동자로 공급했다. 급기야는 본인들마저도 보따리를 싸들고 서울 등지로 나가 지게꾼 날품팔이, 식모살이를 하며 청계천 답십리 판자촌 빈민이 되어갔다. 전라도 사투리는 천민의 표상이었으며 답십리 청계천 판잣집에서 쫓겨나 광주대단지(현 성남) 폭동을 일으킨 주축이 전라도 사람들이고 오늘날 성남시에 전라도 사람들이 많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정치적으로는 69년 국민투표에서 3선 개헌에 성공한 박정희는 71년 4.27 대선에서 온갖 부정을 저지르고도 가까스로 승리하자 김대중 후보의 예언대로 영구집권을 위한 총통제를 획책하였다.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의 7.4 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하는 등 희대의 사기극을 연출하면서 유신헌법과 유신체제를 구축하고 70년대 전반에 걸쳐 긴급조치와 최루탄 몽둥이로 정권을 유지하기에 급급한 시대였다.
1. 함성지 사건
72년 7.4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한 박 정권은 통일 시대를 맞이하기 위한 새로운 헌법이 필요하다는 명분으로 10월 17일을 기해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10월 유신을 단행하였다.
유신헌법의 골자는
① 대통령 직선제를 폐기하고 통일주체국민회의를 구성하여 대통령을 선출한다.
② 대통령의 임기는 4년으로 한다.
③ 국회의원의 1/3을 대통령이 지명한다.
④ 대통령은 국회해산권과 긴급조치 발동권을 갖는다.
이 유신헌법은 11.21 국민투표를 통해 91.9% 투표율에 91.5% 찬성으로 통과되었으며 그 해 12.23 장충체육관에서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2359명중 찬성 2357표 무효 2표로 제 8대 대통령에 박정희 유일후보가 당선되었다.
국인들의 총칼 앞에 온 나라가 침묵이었다.
사위가 조용했다. 그 때 광주에서 소리가 나왔다. 전남대 교정과 광주일고, 전남여고, 광주여고, 광주공고에 함성지라는 지하신문이 뿌려졌다.
“대한민국 대통령 박정희 씨와 그 주구들은 권력에 굶주린 나머지 종신집권의 야망에 국민의 귀와 눈에 총부리를 겨누었으며 한국적 민주주의라는 가면을 쓰고 국민의 고혈을 강취하고 있다. 세상은 관절이 빠져나가고 있는데 우리가 아픈 조국을 고치기 위해 태어났다.
자학과 어둠속에 허탈을 일삼고 있는 언론 문화 청년 학생 시민이여! 우리의 함성이 들리지 않는가.
역사적 장전을 소각시키고 한국적 민주주의를 날조한 반민족 반민주세력의 무서운 음모가 그칠 새 없는 독재자의 복마전을 향해 4.19 정신으로 총진격하라“
유신체재와 유신헌법에 대한 최초의 저항의 목소리는 광주의 함성이었고 민중의 함성이었다.
박정희는 진노했다. 광주에 수사본부가 설치되어 그간의 활동가를 중심으로 이 잡듯이 수사가 진행되었다. 이 포위망을 뚫고 이강은 이듬해 3월. 이제는 광주만이 아닌 서울 일원에 뿌리고 전국 활동가에 부칠 고발지를 만들었다.
“1972년 10월 17일을 기하여 권력에 굶주린 한 사나이의 총칼에 의하여 나라가 무참하게 유린당하고 있다. 4.19 넋으로 무장한 우리의 고발은 여러분의 고막을 울릴 것이요, 탐욕에 어두운 독재자의 눈에는 가시가 되리라. 자유의 적에 대해서는 끝까지 항거하고 투쟁하는 육신으로 혁명할 것을 선언한다. 제사(第死) 공화국 운명의 날은 머지않았다.
젊은 혼은 눈을 떠라. 동학의 얼로 너의 투혼을 4.19넋으로 용맹을 갖추어라. 자유의 전리품으로 쌓아올린 독재자의 불안한 권력. 단 한번의 유혈투쟁이면 ‘와우’보다 쉽게 무너져 버릴 권력.
가난한 민중의 고혈을 빨아 모은 모든 특권층의 모든 것들은 단 한번의 민중봉기면 불타는 대연각보다 더 쉽게 한줌으로 사라진다.
너의 젊은 백골이 반골이 되기 전에 창으로 적의 심장을 염통일 찔러라. 피로써 이 땅에 비를 내리게 할 결전의 그 날. 이 땅을 쓸어버릴 그날. 4월 혁명을 기억하라“
69년 전남대 법대에서 삼선개헌 반대 시위를 주도하다 군대로 끌려갔던 이강은 72년 9월 복학하여 친구인 김남주와 함께 박석무를 찾아가 전남대학교 학생운동 상황을 듣고 71년 시위때 나왔던 지하신문 ‘녹두지’를 한 장 받았다. 그리고 10월 유신이 나자 함성지를 만들어 광주 일원에 뿌리고, 이강은 고발지를 만들어 서울과 전국 일원에 뿌리기 위해 서울로 먼저가 있던 김남주에게 이불보통이 속에 넣어 서울로 부치려다 수상하게 여긴 수화물 회사 직원의 신고로 경찰에 검거되었다.
서울에서 부칠 대학생의 명단 중에 김정길, 김용래, 이정호의 이름이 들어 있었다.
또 다른 한편에는 김남주 이강의 지하신문 제작 살포와는 무관하게. 김정길 김용재 윤강옥 등은 반유신 학생데모를 조직해가고 있었다.
당시에는 비상계엄 하라 극도의 보안 유지가 필요했기 때문에 박석무 이강에게도 이야기 하지 않았고, 교양독서회(전 민족사회연구회)와 김용래가 주도하고 있었던 삼민회(손문의 삼민주의를 본뜸), 윤강옥 이평의 김선옥 등과 논의 등을 진행하고 있었는데 수사선상에서 국가보안법을 적용하기 위해서는 수괴와 조직이 필요했기 때문에 수괴는 석산고 교사였던 박석무가 되고 김정길 김용래 이정호의 조직을 붙여서 국가보안법 사건으로 조작되었다.
사건은 조작되었지만 이강 김남주는 지하신문을 통해서 김정길 김용래 등은 유신반대 학생시위를 준비함으로써 광주가 전국에서 가장 먼저 유신체제에 저항을 시작하였다.
함성지 재판은 73년 5월부터 12월까지 10회 이상 공판이 열렸었는데 공판정에는 전남대법대 학생을 중심으로 대학생들이 방청석을 가득 메웠으며 민주주의 학습장으로서 살아 있는 강의실 역할을 하였다.
함석헌 천관우 등 민주인사들이 방청을 하였고 엠네스티에서도 관심을 표명했으며 홍남순 이기송 변호사가 무료 변론을 맡았다.
박석무(교사) 징역 2년, 자격정지 2년
이 강(전대법대) 징역 3년, 자격정지 3년
김남주(전대영문과) 징역 2년, 자격정지 2년
김정길(전대상대) 징역 1.6년, 자격정지 2년
김용래(전대법대) 징역 1.6년, 집행유예 3년
이정호(전대문리대) 징역 1.6년, 집행유예 3년
이평의(전대상대)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
윤영훈(전대문리대)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
이 황(이강 동생)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
이 정(이강 동생)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
이개석(서울문리대) 징역 10개월, 자격정지 1년, 집행유예 2년
이경순(전대영문과) 징역 6개월, 자격정지 1년, 집행유예 2년
강희순(전대영문과) 징역 6개월, 자격정지 1년, 집행유예 2년
김덕종(김남주동생) 형 면제
이재은(수도여사대) 선고유예
2. 민청학련 사건
유신체재에 대한 저항은 전남대 함성고발지 사건 이후 73년 4월 박형규 목사와 KSCF(한국기독학생총연맹) 남산 부활전 예배 사건을 거쳐, 10월 서울 문리대 사건을 계기로 전국 대학가와 지식인 종교인 재야인사 등 까지 확산된다.
서울 문리대 데모는 박형규 목사의 제일교회에 다니던 나병식 황인성이 문리대 학생회장 도종수와 함께 주도했는데 서울법대 서울상대가 뒤따랐고 11월에는 연대 고대 이대 한신대 경북대 등으로 급속도로 번져갔으며 급기야 11월 5일에는 서울 YMCA에서 천관우 함석헌 김재준 계훈제 홍남순 지학순 법정 김지하 이재오 이호철 등 15인 지식인 시국선언으로 이어졌다.
이 시국선언은 이후 민주수호국민협의회와 장준하 백기완 주도하에 개헌 청원 100만인 서명운동으로 발전되어 유신체재에 대한 투쟁방식이보다 구체화되고 조직화 되게 된다.
이에 당황한 박 정권은 100만인 개헌 청원 서명운동을 겨냥해 74년 1.8 긴급조치 1, 2호를 선포하고 긴급조치 1호 위반으로 장준하 백기완을 구속했다. 이렇게 70년 후반 긴급조치 9호까지 그 악명 높은 긴급조치 시대는 시작되었다.
긴급조치 1호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대한민국 헌법을 부정 반대 왜곡 또는 비방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한다.
② 대한민국 헌법을 개정 또는 폐지를 주장 발의 제안 또는 청원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한다.
...
⑤ 이 조치를 위반한 자와 비방하는 자는 법관의 영장 없이 체포 구속 압수 수색하여 15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
⑥ 이 조치에 위반한 자와 이 조치를 비방한 자는 비상군법회의에서 심판 처단한다.
73년 후반의 이런 전국적 흐름들 속에서 학생들은 10월 서울문리대 시위를 평가하면서 분산 고립된 투쟁의 한계를 극복하고 전국 대학을 조직화해서 집중된 투쟁을 해야 하며 학생과 지식인들만의 투쟁이 아니라 민중투쟁으로 발전시켜야 이 악독한 유신체재를 무너뜨릴 수 있다는데 의견을 모으고 전국을 서울 대구 광주권으로 나누었다. 서울은 서울대, 대구는 경북대, 광주는 전남대를 중심으로 조직을 해 나가되 전국적으로 강력한 조직적 연계를 갖기로 했으며 여기에 가장 적극적이었던 곳은 여정남이 주도했던 경북대였다.
이에 맞추어 광주의 움직임도 바빠졌다.
민주수호국민협의회 전남지부장을 맡고 있었던 홍남순 변호사 궁동 사랑방에는 박민기 이기홍 등 야당 정치인 등 재야인사들이 모여 홍남순 변호사가 참여했던 지식인 15인 시국선언과 100만인 개헌 청원 서명운동의 실천방안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박석무 양성우 전홍준 등 선배 그룹들은 서울 조영래 장기표 등과 연계를 가지고 움직이고 있었고 인혁계 인사였던 이기홍 김세원 등도 나름대로 활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렇듯 74년 4월, 소위 민청학련으로 가는 길은 단순히 학생들만의 움직임이 아니라 재야 지식인 종교인 등 할 것 없이 전국의 모든 민주세력들이 반 유신투쟁의 깃발아래 뭉치기 시작했다.
73년 11월 20일, 전남대에서는 김세곤(법학과) 이철환(법학과) 등이 시국성토대회를 준비하다 서부경찰서에 연행되었으며 12월 3일에는 전영천(문리대)등이 교내 시위를 주도했다. 윤한봉은 농대를 중심으로 교양독서회 회원들과 만나고 있었고 문리대에서는 제대 후 복학한 김상윤과 윤강옥 등이 움직이면서 자연스럽게 신학기 대규모 조직적 투쟁의 분위기가 모아지고 있었다.
이제 조직적 체계와 골간만 세우면 되었다.
74년 초 나는 윤한봉에게 전국적 흐름을 이야기 하고 전남대를 책임 져 줄 것을 부탁하고, 3월 초 전국조직 연락을 맡은 황인성(서울문리대)과 연결을 시켰다. 이후 전남대 조직은 윤한봉과 김상윤을 중심으로 진행되었고 조선대 의대 안상선, 전남대 의대 심재삼 등을 윤한봉과 김상윤에게 연결시켰다.
3월 20일 경 경북대 시위를 출발 신호로 전국 대학이 시위를 시작하기로 했는데 출발부터 실패였다. 정보기관에서 대학의 움직임을 낱낱이 파악하고 검거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급기야 청와대는 4.3 대통령 긴급조치 4호를 선포해서 소위 민청학련 사건 관련자들 전원 검거에 나섰다.
검찰 발표문을 통해 민청학련은 이 철 유인태 등 평소 공산주의 사상을 가지고 있던 몇몇 불순 학생들이 핵심이 되어 서도원 도예종을 중심으로 한 인민혁명당계 지하 공산세력의 사주를 받아 일부 종교인과 반정부인사들이 결탁하여 유혈 폭동으로 정부를 전복하고 과도 연립정부를 거쳐 공산정권을 수립하고자 했다고 발표했다.
전남대는 4월 9일 오전 경찰들이 쫙 깔린 전남대 교정에 유인물을 뿌리다 학내에 있지 않았던 이 강 김정길을 제외한 대부분이 검거되었다.
민청학련은 학생시위나 민중봉기로서 실패한 투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민족민주운동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첫째. 4.19 이후에 최초로 학생들만이 아닌 지식인 종교인 혁신계 인사 등 전민주세력이 연합하여 반유신 투쟁을 전개했다.
둘째. 투쟁의 공간을 캠퍼스와 거리만 아니라 감옥과 법정에까지 넓혔다. 민청학련 사건은 1024명이 조사를 받았고 그 중 253명이 군법회의에 송치되었다. 이제 감옥은 고립 격리된 공간이 아니라 동지를 확인하는 공간이고 운동가로서 단련과 학습의 장이 되었다.
셋째. 대량의 직업 운동가가 배출되었다. 단순한 민주화 운동의 영역을 넘어 민주주의와 민족통일, 사회변혁까지 운동내용을 심화시키고 낭만적 일시적 운동이 아닌 전 생애를 걸고 투신 결단하는 운동가들이 양산되었다.
넷째. 유신체재가 정치적 도덕적으로 무너지기 시작했다. 박 정권은 민청학련 사건을 통해 전 민주세력을 용공분자로 몰아 발본색원 하려고 했다. 이 과정에서 인혁계 인사와 학생 주모자들에 대한 무자비한 고문이 전 세계에 폭로되고, 지학순 주교 박형규 목사 등 종교계 인사까지 모두 구속 하면서 세계 양심들의 분노를 샀다. 때 마침 미국 카터 행정부의 인권정책과 맞물려 국내외적 고립을 자초하고 결국 사형 무기형 20년형을 언도하고도 인혁계 인사를 제외하고는 1년도 못되어 풀어 줄 수밖에 없는 독재 권력의 급속한 이완을 가져왔다.
<대통령 긴급조치 제 4호>
1.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과 이에 관련되는 제 단체를 조직하거나 또는 가입하거나 단체나 그 구성원의 활동을 찬양 고무 또는 이에 동조하거나 그 구성원과 회동 또는 통신 기타의 방법으로 연락하거나 연락, 그 구성원의 잠복 회합 그 밖의 활동을 위하여 장소 물건 금품 기타의 편의를 제공하거나 기타 방법으로 단체나 구성원의 활동에 직접 간접으로 관여하는 행위를 일체 금한다.
4. 이 조치 선포전에 1항 3항에서 금한 행위를 한자는 4월 8일까지 그 행위 내용 전부를 수사기관에 고지 하여야 하며 고지한 행위에 대해서는 처벌하지 아니한다.
8. 위 항을 위반한 자는 사형 무기 또는 5년 이상의 유기 징역에 처핱다.
9. 이 조치를 위반한 자는 법관의 영장없이 체로 구속 압수 수색하여 비상 군법회의에서 심판 처단한다.
전남대 민청학련 관련자 명단
김정길(전대상대) 징역 15년, 자격정지 15년
이 강(전대법대) 징역 15년, 자격정지 15년
윤한봉(전대농대) 징역 15년, 자격정지 15년
김상윤(전대문리대) 징역 12년, 자격정지 12년
박형선(전대농대) 징역 10년, 자격정지 10년
윤강옥(전대문리대) 징역 10년, 자격정지 10년
하태수(전대문리대) 징역 10년, 자격정지 10년
유선규(전대사대) 징역 10년, 자격정지 10년
최 철(전대농대) 징역 10년, 자격정지 10년
정환춘(전대공대) 징역 10년, 자격정지 10년
이훈우(전대상대) 징역 10년, 자격정지 10년
문덕희(전대농대) 징역 10년, 자격정지 10년
이학영(전대문리대) 징역 7년, 자격정지 7년
김윤봉(전대농대) 기소유예
이현택(전대농대) 기소유예
*성찬성(전대문리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