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8년] 퀴리부부, 라듐 발견
← 마리 퀴리와 그를 지켜보는 남편 피에르의 모습 마리 퀴리와 남편 피에르 퀴리가 1898년 7월에 우라늄의 330배나 되는 방사능을 가진 새로운 물질 ‘폴로늄’을 발견한데 이어 12월 26일에도 새로운 방사성 원소 ‘라듐’을 발견함으로써 인류는 희망과 절망의 시대를 동시에 열었다. 라듐은 ‘광선(光線)’을 뜻하는 라틴어에서, 폴로늄은 마리 퀴리의 조국인 폴란드에서 땄다. 두 사람은 이 업적으로 1903년에 노벨상 수상자로 선정됐지만, 프랑스 학술원이 노벨상 후보를 추천할 때 마리 퀴리는 제외하고 남편만 추천했다는 사실이 최근 밝혀지면서 폴란드 여성이자 유태인이었던 그를 차별한 게 아니냐는 의구심을 불러 일으켰다. 1911년 노벨 화학상을 받은 데 이어 이들 부부의 딸도 1935년 노벨화학상을 수상함으로써 퀴리 가(家)는 한 집안에서 노벨상을 3개나 수상하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웠다. 마리 퀴리는 강한 방사선을 내는 동위원소들에 오랫동안 노출되면서 얻은 백혈병으로 1934년 숨졌지만, 사후 그에겐 또 다른 영예가 기다리고 있었다. 사후 61년만인 1995년에 파리의 팡테옹 국립묘지에 묻힌 것이다. 장 자크 루소, 빅토르 위고, 에밀 졸라 등 프랑스를 빛낸 60여명의 유해가 안치돼 있는 곳, 나폴레옹이나 드골에게도 허락되지 않은 이곳에 마리 퀴리가 영면하게 된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모든 저명인사 중에서 명성 때문에 부패하지 않은 유일한 인물”이라며 퀴리를 추모했다./조선
[1996년] 노동법 개정안 기습 처리
← 김영삼 1996년 12월 26일 당시 집권당이던 신한국당은 새벽 6시에 국회 본회의를 열어 여당의원 155명만이 참석한 가운데 쟁점인 노동법 개정안, 국가안전기획부법 개정안 등을 기습 처리했다. 노동법 개정안은 국가 경쟁력 강화를 내세우는 기업주의 요구를 대폭 수용해 변형근로시간제, 정리해고제, 파견근로제 등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위한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후 노동자들은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권영길 위원장을 중심으로 약 2개월에 걸쳐 대대적인 총파업을 전개하였다. 노동법 파동이 마무리되기도 전에 한보사태와 김현철파동이 연이어 터졌다. 도덕적 신뢰를 상실한 김영삼 정권은 연이은 대기업의 부도에 흔들리다가 아시아를 강타한 금융위기가 한국에 상륙하자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지원을 요청하면서 급격한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브리태니커
[1972년] 트루먼 전 미국 대통령 사망
← 해리 투르먼 前 미국 대통령 해리 트루먼 미국 대통령이 1972년 12월 26일 오랜 투병 끝에 8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트루먼 대통령은 1945년부터 1953년까지 8년동안 제33대 미국대통령을 지냈으며 한국전쟁에 미군참전을 결정했고 2차대전 말기에 원자탄을 투하하는 것을 승인하는 등 그 생애에 많은 중요한 결단을 내렸다. 대전 후 `트루먼 독트린`을 발표해 미국의 냉전정책에 기조를 마련했다. 1945년 4월 12일 루스벨트 대통령의 급서로 부통령에서 전쟁중의 미국을 맡은 트루먼은 1948년 예상을 뒤엎고 공화당의 듀이 후보를 물리치고 재선됐다. 트루먼 대통령은 심장과 신장의 병발증으로 중상에 빠져 있었으며 이날 밤 캔사스시 메디컬센터에서 생을 마감했다./조선
[1944년] 윌리엄스의 <유리 동물원> 초연
← 브로드웨이 1944년 12월 26일 미국의 극작가 테네시 윌리엄스의 희곡 <유리 동물원 The Glass Menagerie>이 시카고 시립극장에서 초연되었다. 이 작품은 1930년대 경제 대공황의 소용돌이에서 해체되어가는 미국의 하층 가정을 묘사한 작품으로, 윌리엄스의 여러 작품들 중 수작으로 손꼽힌다. 시카고에서 성공을 거둔 이 작품은 이듬해 브로드웨이로 진출한 데 이어 1950년에는 영화로도 제작되었다. <유리 동물원>은 낭만적인 과거의 망상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자부심 강한 어머니 아만다와 냉소적인 아들 톰이 유리로 만든 동물들을 수집해 놓은 환상의 세계 속에서 살면서, 장애인인 여동생 로라를 위해 구혼자를 얻어주려다 실패한다는 이야기이다. 테네시 윌리엄스는 연극평론가상을 4차례 수상했으며, 그의 작품은 전세계에서 널리 번역·공연되었다. 그의 작품은 낭만적인 온화함의 이면에 폭력이 깔려 있는 세계에서 인간이 겪는 좌절을 보여준다./브리태니커
[1893년] 마오쩌둥(毛澤東) 출생
← 마오쩌둥(1966) 1893년 12월 26일 태어남 / 1976년 9월 9일 죽음 "우리 민족은 지금부터 평화와 자유를 사랑하는 세계 여러 민족이 이루는 대가정의 일원이 되어, 용감하고 근면하게 스스로의 문명과 행복을 창조함과 동시에 세계의 평화와 자유를 촉진하기 위하여 일할 것이다. 우리 민족은 더 이상 모욕당하는 민족이 아니다." - 마오쩌둥,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선언연설>(1949)
마오쩌둥은 중화인민공화국이 건립된 1949년부터 대약진 운동의 실패로 1959년 물러날 때까지 국가 주석을 지낸 중국의 군인·정치가이다. 사임 이후 중국공산당 주석으로 지도력을 행사했다. 마오쩌둥은 1920년대 후반 도시지역에서 봉기가 실패한 후 주더[朱德]와 함께 중국 동남부 장시 성[江西省]에서 장시 소비에트를 조직하고 온건한 농지 개혁과 게릴라전을 수행하며 농촌지역을 중심으로 세력을 확장해갔다. 장제스[蔣介石]의 국민당은 이들을 소탕하기 위해 1930~34년 대규모 군사작전을 전개했다. 마오쩌둥과 그가 이끄는 홍군은 우수한 군비와 화력을 앞세운 국민당군에 대항하여 게릴라 전술로 성공적으로 방어했지만 70만 군사가 동원된 5번째 대대적인 공세 앞에서는 궤멸 직전에 이르렀다. 1934년 10월 마오쩌둥은 살아 남은 8만 5,000명의 전투원, 1만 5,000명의 후방요원, 그리고 임신 중이던 자신의 부인을 포함한 35명의 여성을 이끌고, 추격해오는 국민당군과 계속 싸우면서 18개의 산맥을 넘고 24개의 강을 건너는 1만 5,000㎞에 이르는 대장정을 감행하여 서북지방의 산시 성[陝西省]으로 이동했다. 1년이 넘는 장정에서 불과 수천 명만이 살아남았지만 이를 계기로 그는 공산당에서 지도력을 확립했고, 국민당의 지배력이 닿지 않는 근거지에서 홍군의 전열을 가다듬을 수 있었다. 마오쩌둥과 중국공산당은 옌안[延安]을 근거지로 힘을 키운 결과 제2차 세계대전 후 국공내전을 승리로 이끌었고, 마침내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했다.
[1892년] 독립운동가 윤준희(尹俊熙) 출생 1892. 12. 26 함북 회령~1921. 8. 25. 1919년 3·1운동 이후 독립운동에 참가할 것을 결심하고 만주로 건너가 이상설(李相卨)이 경영하는 서전서숙(瑞甸書塾)에 입학했다. 그뒤 용정(龍井) 영신학교(永新學校)에서 교원으로 있다가 한상호(韓相浩)·임국정(林國楨)·최봉설(崔鳳卨) 등과 함께 항일단체인 철혈광복단(鐵血光復團)을 조직, 군자금모금활동을 전개했다. 그뒤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에 입단하여 특파대장으로 조선은행 회령지점에서 간도 용정출장소로 현금수송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1920년 1월 4일 허룽 현[和龍縣] 동양리(東陽里)에서 호송일경을 사살하고 현금 15만 원을 탈취했다. 그후 블라디보스토크의 신한촌을 근거지로 많은 무기를 구입하여 북로군정서에 제공함으로써 10월의 청산리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두는 데 이바지했다. 그러나 같은 해 12월 일제 주구인 엄인섭(嚴仁燮)의 밀고로 한상호·임국정 등과 함께 일본 헌병에게 체포되었다. 1921년 4월 고등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되어, 8월 서대문형무소에서 동지들과 함께 순국했다. 그뒤 용정 일본영사는 15만 원 사건을 구실로 중국경찰과 합동하여 대대적으로 수색과 체포를 자행했다. 1963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2006년] 미국의 제38대 대통령 포드(Ford, Gerald) 사망
Ford (Jr.), Gerald (Rudolph), 1913. 7. 14 ~ 2006. 12. 26 미국의 제38대 대통령. 네브래스카주(州) 오마하에서 출생하였다. 미시간대학교와 예일대학교에서 법학을 전공한 후 1941년 변호사로 일하였다. 1949년 미시간주에서 하원의원으로 당선되어 정치활동을 시작한 후 1965년부터는 공화당 하원 원내총무를 겸임하면서 정치가로서의 기반을 다졌다. 1973년부터 S.T.애그뉴의 후임으로 부통령으로 있다가 1974년 워터게이트사건으로 실각한 대통령 R.M.닉슨의 뒤를 이어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솔직한 인품이 많은 사람들에게 호감을 주었으나 닉슨에 대한 특사, 인플레이션 억제의 실패 등이 원인이 되어 지지율은 급속히 떨어졌고, 1976년 대통령 선거에서 미국민주당 후보 J.카터에게 패하였다. 1974년 한국을 방문하였다. /naver
[1978년] 인디라 간디(Gandhi, Indira) 전 인도 총리 석방 1978년 오늘, 권력남용과 국회모독 혐의로 구속수감됐던 인디라 간디 인도 전 총리가 석방됐다. 간디 여사가 구속된 일주일 동안 여사의 석방을 요구하는 폭동이 일어나 19명이 숨졌다. 총리 재임시절 둘째 아들인 산자이 간디의 사업에 특혜를 줬다는 의혹을 받은 간디 여사! 그러나 여사는 정치적인 모함이라며 결백을 주장했다. 인디라 간디는 일년 전인 1977년 총선거에서 패배했으나 1980년 총선거에서 승리해 총리 자리에 복귀했다. 여사는 4년 후인 1984년 10월 31일 자신의 시크교도 경호원들에게 암살당했다. 간디 가문의 불행은 계속돼 장남인 라지브 간디 역시 1991년 5월 21일 유세 도중 꽃다발 속에 들어 있던 폭탄이 터져 사망했다. /YTN
[1934년] 일본 최초의 직업야구단 ‘대일본동경야구구락부’(요미우리 자이언츠 전신) 탄생 요미우리 자이언츠[讀賣-, Yomiuri Giants]는 일본 센트럴리그에 소속된 야구팀으로, 1934년 12월 26일 창단하였다. 연고지는 도쿄도[東京都]이다. 원래는 도쿄 자이언츠(교진:巨人)라는 팀명으로 창단하였으나 1947년 지금의 팀명으로 바꾸었으며 창단 후 연고지를 변경한 적이 없다. 일본 프로야구의 최고 명문구단으로, 국민의 절반 이상이 팬이라고 할 정도로 인기가 매우 높다. 2002년까지 일본시리즈에 29회 진출하여 20회 우승하고 센트럴리그에서 30회 우승하였다. 2000년까지 팀 통산전적은 3,769승 2,689패 219무, 승률 0.584이다. 1965년부터 일본시리즈와 센트럴리그 9년 연속 우승이라는 대기록을 세웠으며 팀의 모든 경기는 전국으로 생방송되고 시청률도 항상 20% 이상이다. 경쟁관계에 있는 같은 리그의 한신 타이거스는 전적이 훨씬 떨어진다. 팀이 배출한 유명선수는 다른 구단에 비하여 많은데, 투수는 창단멤버로서 노히트노런을 3회 기록한 사와무라, 1978년 최다 세이브포인트와 1979년 최다탈삼진을 기록한 김일융, 20년 동안 통산 400승의 대기록을 세운 재일동포 가네다 마사이치(한국명 김정일)가 있다. 타자는 최우수선수·타격왕·홈런왕에 각각 3·5·2회 선정된 가와카미, 최우수선수·홈런왕에 각각 5·2회 선정된 나가시마, 통산홈런 868개를기록한 왕정치(王貞治), 안타 3,085개로 통산 최다안타기록을 수립한 ‘안타제조기’ 장훈(張勳), 타점왕에 6회 선정된 시바다, 현역 최다승 투수 사이토 마사키, 2002년 리그 최우수선수를 수상하고 메이저리그로 진출한 마쓰이 히데키 등이 있다. 한국 출신의 조성민(趙成珉), 정민철(鄭珉哲)이 활약하였다. 2000년에는 센트럴리그 1위를 차지한 후 일본시리즈에서 6년만에 패권을 차지하였다. 2001년의 2위에 이어, 2002년에는 투수진과 타선 모두의 강력한 전력을 바탕으로 86승 52패 2무, 승률 0.623을 기록하면서 다시 센트럴리그 1위를 차지한데 일본시리즈에서도 세이부 라이온스를 꺾고 승리하였다. 홈구장은 5만 명 수용규모의 도쿄돔(Tokyo Dome)이다.
[1900년] 엔리코 카루소(Caruso, Enrico) 성악가, 푸치니의 오페라 ‘라 보엠’의 로돌프를 불러 밀라노 스칼라좌에 데뷔
← 카루소, Giuseppe Verdi의 〈Aida〉에서 라다메스로 분장한 모습 화려한 음색과 풍부한 성량, 압도적인 연기력으로 세계에 이름을 떨친 카루소는 1873년 나폴리의 한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집안이 어려워 이렇다 할 음악교육을 받지 못했으나 어려서부터 남다른 음악적 재능을 보인 카루소가 그나마 노래를 체계적으로 교육받을 수 있었던 곳은 나폴리 성당의 소년 성가대였다. 여기서 그의 소질을 발견하고 체계적인 공부를 할 수 있도록 해준 이가 굴리엘모 베르기네였다. 그의 도움으로 카루소는 1894년 11월 모렐리의 오페라 '라미코 프란체스코'로 데뷔할 수 있었고 1900년 마침내 스칼라 무대를 밟았다. 그는 무대마다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고 명성은 유럽전역을 열광시켰다. 결국 카루소 붐은 대서양을 건너 뉴욕 메트로폴리탄으로 전해져 메트는 카루소와 1902년부터 1920년까지 계속해서 계약을 경신했다. 이 기간동안 무려 607차례의 공연에 출연함으로써 '카루소 신화'를 더욱 공고히 했다. 그가 마지막으로 무대에 선 것은 1920년 12월 24일. 늑막염이 심해 더이상 노래하기가 어려워졌기 때문이었다. 카루소는 1902년 3월 세계최초로 음반을 녹음, 본격적인 오디오 시대를 열었다. /조선 (8월 2일자)
[1716년] 영국의 시인 그레이(Gray, Thomas) 출생
← 그레이, John Giles Eccardt가 그린 유화(부분) 1716. 12. 26 ~ 1771. 7. 30 런던 출생. 이튼교(校)를 거쳐 케임브리지대학에서 배웠다. 1739년부터 2년 남짓 H.월폴(1717~1797)과 함께 유럽을 여행하고 다녔으며, 귀국 후에는 케임브리지의 기숙사 안에서 은자(隱者)와 같은 생활을 하였다. 정신활동의 폭은 넓었으며, 시 이외에 역사·식물·곤충·건축·음악 등에 조예가 깊었다. 그러나 선천적인 우울한 기질로 인하여 세상과의 접촉을 피하였으며, 1757년에 계관시인으로 천거되었으나 사퇴하고 1758년에 케임브리지의 근대사 교수로 임명되었는데도 강의는 하지 않았다. 작품은 적지만, 친구인 R.웨스트가 죽은 무렵에 쓴 《봄의 노래》 《멀리 이튼교를 바라보는 노래 Ode on a Distant Prospect of Eton College》(1742) 등에서는 자연과 사회에 적응할 수 없는 고독감과 무상감이 흐르고 있다. 몇 년의 개고로 다듬은 끝에 완성한 《시골 묘지에서 읊은 만가 Elegy Written in a Country Churchyard》(1751)는, 명성도 재산도 얻지 못한 채 땅에 묻히는 서민들에 대한 동정을 애절한 음조로 노래한 걸작이며, 이 작품으로 l8세기 중엽을 대표하는 시인이 되었다. 핀다로스풍의 송가(頌歌) 《시가(詩歌)의 진보 The Progress of Poesy》와 《시선(詩仙) The Bard》(1757)에서는 풍부한 역사적 감각을 나타내었고, 또 북유럽의 고시(古詩)를 번역하여, 시대를 앞선 낭만적 경향을 나타내었다. 선례(先例)를 가진 표현을 존중하는 그의 고전주의적 시풍은 난해한 편에 속한다. 사후(死後)에 출판된 일기와 편지는 우수한 산문으로 평가되고 있으며 당시의 전형적인 학자시인의 문체와 생활을 전하고 있다.
[1536년] 조선 중기의 학자, 정치가 이이(李珥) 출생
← 이이의 동상(서울 사직동) 1536 ~ 1584 본관 덕수(德水), 자 숙헌(叔獻), 호 율곡(栗谷)·석담(石潭), 시호 문성(文成), 강원도 강릉 출생이다. 사헌부 감찰을 지낸 원수(元秀)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사임당 신씨이다. 1548년(명종 3) 진사시에 합격하고, 19세에 금강산에 들어가 불교를 공부하다가, 다음해 하산하여 성리학에 전념하였다. 22세에 성주목사 노경린(盧慶麟)의 딸과 혼인하고, 다음해 예안의 도산(陶山)으로 이황(李滉)을 방문하였다. 그해 별시에서 <천도책(天道策)>을 지어 장원하고, 이 때부터 29세에 응시한 문과 전시(殿試)에 이르기까지 아홉 차례의 과거에 모두 장원하여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 일컬어졌다. 29세 때 임명된 호조좌랑을 시작으로 관직에 진출, 예조·이조의 좌랑 등의 육조 낭관직, 사간원정언·사헌부지평 등의 대간직, 홍문관교리·부제학 등의 옥당직, 승정원우부승지 등의 승지직 등을 역임하여 중앙관서의 청요직을 두루 거쳤다. 아울러 청주목사와 황해도관찰사를 맡아서 지방의 외직에 대한 경험까지 쌓는 동안, 자연스럽게 일선 정치에 대한 폭넓은 경험을 하였고, 이러한 정치적 식견과 왕의 두터운 신임을 바탕으로 40세 무렵 정국을 주도하는 인물로 부상하였다. 그동안 《동호문답(東湖問答)》 《만언봉사(萬言封事)》 《성학집요(聖學輯要)》 등을 지어 국정 전반에 관한 개혁안을 왕에게 제시하였고, 성혼과 '이기 사단칠정 인심도심설(理氣四端七情人心道心說)'에 대해 논쟁하기도 하였다. 1576년(선조 9) 무렵 동인과 서인의 대립 갈등이 심화되면서 그의 중재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고, 더구나 건의한 개혁안이 선조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자 벼슬을 그만두고 파주 율곡리로 낙향하였다. 이후 한동안 관직에 부임하지 않고 본가가 있는 파주의 율곡과 처가가 있는 해주의 석담(石潭)을 오가며 교육과 교화 사업에 종사하였는데, 그동안 《격몽요결(擊蒙要訣)》을 저술하고 해주에 은병정사(隱屛精舍)를 건립하여 제자교육에 힘썼으며 향약과 사창법(社倉法)을 시행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당시 산적한 현안을 그대로 좌시할 수 없어, 45세 때 대사간의 임명을 받아들여 복관하였다. 이후 호조·이조·형조·병조 판서 등 전보다 한층 비중 있는 직책을 맡으며, 평소 주장한 개혁안의 실시와 동인·서인 간의 갈등 해소에 적극적 노력을 기울였다. 이 무렵 《기자실기(箕子實記)》와 《경연일기(經筵日記)》를 완성하였으며 왕에게 '시무육조(時務六條)'를 지어 바치는 한편 경연에서 '십만양병설'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런 활발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선조가 이이의 개혁안에 대해 계속 미온적인 태도를 취함에 따라 그가 주장한 개혁안은 별다른 성과를 거둘 수 없었으며, 동인·서인 간의 대립이 더욱 격화되면서 그도 점차 중립적인 입장을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그 때까지 중립적인 입장을 지키려고 노력한 그가 동인측에 의해 서인으로 지목되는 결과를 가져오고, 이어서 동인이 장악한 삼사(三司)의 강력한 탄핵이 뒤따르자 48세 때 관직을 버리고 율곡으로 돌아왔으며, 다음해 서울의 대사동(大寺洞) 집에서 죽었다. 파주의 자운산 선영에 안장되고 문묘에 종향되었으며, 파주의 자운서원(紫雲書院)과 강릉의 송담서원(松潭書院) 등 전국 20여 개 서원에 배향되었다.
[1504년] 도성 내 원각사(圓覺寺) 폐지 서울 종로2가 파고다공원 자리에 있던 사찰. 흥복사(興福寺)라는 이름으로 고려시대부터 내려온 고찰(古刹)이었는데, 조선 태조 때 조계종(曹溪宗)의 본사가 되었다가 후에 폐지되었다. 1464년(세조 10) 중건하고 원각사라 하였으며, 이때 대종(大鐘)도 함께 만들었다. 도성 내의 3대사찰의 하나로 번창하다가 1504년(연산군 10) 폐사되고, 장악원(掌樂院) 또는 연방원(聯芳院)이라는 기생방(妓生房)이 되었다가 1514년(중종 9) 폐사의 재목을 공용건물 영선(營繕)에 사용함으로써 사찰 건물은 자취를 감추었고, 대종은 1536년 남대문으로 옮겨졌다. 그 터는 지금 파고다공원으로 되어 있으며, 국보 제2호인 원각사지 십층석탑과 보물 제3호인 원각사비가 남아 있다. /naver
그 밖에 2004년 동남아시아 대지진 1999년 스포츠용품 회사 나이키 설립자 빌 보워먼 사망 1996년 신한국당 노동관계법-안기부법 변칙 개정 1994년 가양대교 착공 1994년 옐친, 체첸 공격 중지 명령 1990년 대법원, 이름에 쓸 수 있는 한자를 2,731자로 제한하는 개정호적법 시행규칙을 확정 1989년 루마니아 구국위원회, 일리에스쿠를 대통령에 선출 1983년 한일경협 2차년도 규모 495억엔으로 합의 1983년 일본 나카소네 2차내각 발족 1980년 입법회의, 언론기본법 대통령선거법 의결 1974년 동아일보 광고해약사태 시작 1969년 제3한강교 개통 1962년 제5차 개헌안(대통령중심제-단원제) 공포 1962년 워커힐 준공 1961년 아랍연맹, 예멘과의 연방 해체 1957년 뉴델리에서 제2회 아시아-아프리카(亞阿)회의 개최 1950년 맥아더 원수, 중공군의 한국전개입에 관한 성명 발표 1949년 아인슈타인 통일자장의 원리 발표 1948년 소련, 북한에서 철수 완료 1945년 국군준비대회 개최 1941년 미국-영국-중국 군사동맹 체결 1932년 중국 칸수 대지진으로 7만명 사망 1916년 인도 국민회의파와 인도 이슬람교도연맹 공동전선 결성 1904년 쿠바 소설가 겸 민속 음악학자 알레호 카르펜티에르 출생 1799년 나폴레옹, 쿠데타로 통령정부 수립 1771년 프랑스 철학자 엘베시위스 사망 1670년 유형원, 반계수록 지음 1542년 일본의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출생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초상 1543. 1. 31 일본 오카자키[岡崎] ~ 1616. 6. 1 슨푸[駿府]. 일본의 마지막 바쿠후인 도쿠가와 바쿠후[德川幕府 : 1603 ~ 1867]의 창시자. 본명은 도쿠가와 다케치요[德川竹千代].
초기생애 지금의 나고야[名古屋]에서 동쪽으로 꽤 멀리 떨어진 곳에 위치한 한 무사가문에서 태어났다. 당시 이 지방 무사가문들은 끊임없이 지속되는 내전 속에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해야만 했다. 이에야스의 유년시절은 평화롭지만은 않았는데, 아버지는 연형합종(連衡合從)의 그물에 빠져들어 끊임없이 전투에 참가해야만 했다. 그가 2세였을 때 동맹관계의 변화로 인해 어머니는 영원히 그의 가문과 결별하게 되었고, 7세 때에는 군사적 상황이 어려워져 어린 이에야스는 슨푸(지금의 시즈오카 시[靜岡市])에 근거지를 두고 있는 강력한 가문인 이마가와 씨[今川氏]의 인질이 되어야 했다. 슨푸에서의 훨씬 안정된 생활 속에서 그는 군사·행정 기술을 익혔고 특히 매사냥을 즐기게 되었다. 1550년대 후반에는 결혼하여 첫아들을 낳았고 이마가와 씨를 위해 군대를 통솔함으로써 군사적 경험을 쌓기 시작했다. 그러나 슨푸에서 보낸 몇 해 동안 그는 일신상으로는 편안했지만 늘 근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아버지가 1549년 측근의 가신(家臣) 손에 의해 살해당했다는 소식을 접했고,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자신의 가문이 몰락해가는 것을 속수무책으로 지켜보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도쿠가와의 지도력 1560년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義元]는 서부의 강자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와의 전투에서 사망했다. 젊은 도쿠가와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고향인 오카자키로 돌아가 생존해 있던 친척과 가신들을 수습하여 가문의 영주(領主)가 되었다. 몇 달 뒤 노부나가와 동맹관계를 맺는 한편 이마가와 씨의 무능한 신임(新任)영주를 오랫동안 잘 달래 슨푸에 있는 아내와 아들을 불러들였다. 그뒤 몇 년 동안 다른 가문들과 싸우는 일이 없게 되자 그는 자기 영지(領地) 내의 반란세력이었던 불교 종파들을 분쇄하는 데 온 힘을 기울였다. 또한 자신의 소규모 군대의 지휘체계를 개선하고 행정관을 임명했으며, 과세·소송·치안 절차를 규정하고 시행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1560년대 후반 이마가와 씨가 몰락하자 이에야스는 이 기회를 이용해 동쪽으로 세력을 확장해나갔다. 그 결과 1570년에는 본거지를 작은 연안도시인 하마마쓰[浜松]로 옮기고 이곳을 자신의 영지 내의 상업적·전략적 요지로 개발했다. 그는 유력한 무장인 노부나가와의 동맹에 의존해 계속되는 내전의 역경을 이겨내는 한편 서서히 영토를 확장하여 1580년대 초반에는 강력한 다이묘[大名]가 되었다. 이때 오카자키를 비롯하여 하코네[箱根]의 산간지방까지 펼쳐진 비옥하고 인구밀도가 높은 지역을 영지로 두게 되었다. 1582년 노부나가가 자신에게 반기를 든 부하의 습격을 받고 상처입은 몸으로 자결하자 노부나가 휘하의 가장 유능한 무장이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신속하게 노부나가의 죽음을 설욕한 뒤 노부나가가 이룩했던 정치적 지위를 그대로 계승했다. 당시 전성기를 구가했던 이에야스는 히데요시의 최대 정적(政敵)으로 부각되었으며 두사람 사이에 피비린내 나는 전투가 여러 차례 벌어졌으나 승부는 결정나지 않았다. 그러나 신중한 이에야스는 히데요시에게 충성의 맹세를 했고 히데요시는 만족하여 이에야스의 영지를 그대로 인정해주었다. 1580년대 후반 히데요시가 일본 남서부의 다이묘들에 대해 영향력을 넓혀나가는 동안 이에야스는 착실히 자신의 기반을 강화해나갔다. 그는 가신들의 세력을 강화하고 영지의 농업생산성을 높였으며 행정의 신뢰성을 향상시켰다. 1586년 이에야스는 영지의 방비를 굳건히 다지기 위해 히데요시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고 좀 더 동쪽에 위치한 슨푸, 즉 그가 인질로 유년시절을 보냈던 곳으로 근거지를 옮겼다.
호조 씨[北條氏] 정벌 1589년 히데요시는 하코네 산지동쪽에 대규모 영지를 가지고 있던 다이묘 가문인 호조 씨로부터 충성의 맹세를 받아내기로 결심했다. 호조 씨가 이를 거부하자 히데요시와 이에야스는 대규모 육·해군을 동원하여 해변에 위치한 오다와라 성[小田原城]에 근거를 둔 호조 씨의 군대를 봉쇄했다. 끈질긴 지구전과 포위전 끝에 호조 씨는 식량부족으로 끝내 항복했다. 히데요시의 권유에 따라 이에야스는 하코네 서쪽의 5개 연안지방을 반납하는 대신 동쪽에 있는 호조 씨의 영지를 물려받았다. 이에야스는 어촌인 에도[江戶 : 지금의 도쿄] 가까이에 있던 작은 요새와 농경지에 수천 명의 가신들과 그들의 군사장비 및 식솔들을 신속히 이주시켰는데, 이곳은 교토[京都] 근처에 있던 히데요시의 근거지에서 걸어서 한 달 가량 걸리는 위치에 있었다. 1590년대에 이에야스는 서부 일본에 근거를 둔 몇몇 유력 다이묘들과는 달리 실패로 끝나버린 히데요시의 2차례에 걸친 조선 침략에 참가하지 않았다. 대신 동쪽에 있는 새 영지로 옮겨가게 된 것을 계기로 삼아 군대를 적재적소에 배치하여 자신의 영지가 가능한 한 안전하게 방비되도록 했고 정예군은 영지의 외곽과 주요 접근도로에 배치하고 가장 세력이 약해 위험이 없는 군대를 에도 가까이에 배치했다. 한편 에도 부근의 대규모 농경지를 자신이 임명한 관리의 직할하에 두도록 함으로써 에도 성(城)에 사는 주민들에게 가능한 한 많은 식량이 보급되도록 했으며 균일한 과세를 위해 토지조사를 세밀히 실시했다. 또한 모든 농민들의 무기를 몰수하여 농민반란의 가능성을 감소시켰으며 장인(匠人)과 상인들을 에도 성으로 불러모았다. 성을 확장·개축하고 도시의 성장을 촉진시켰으며 주민들의 원활한 식수보급을 위해 토목사업을 벌였다. 그리하여 1598년 히데요시가 세상을 떠났을 당시 이에야스는 일본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강력한 군대와 가장 생산성 높고 잘 정비된 영지를 운영하고 있었다. 히데요시가 죽자 유력 다이묘들 사이에 다시 권력투쟁이 일어났는데, 히데요시의 가신들 중에 가장 강성하고 존경받던 이에야스는 권력투쟁 속에서 동군(東軍)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1600년 가을 교토에서 북동쪽으로 약 80㎞ 떨어진 곳에 있는 세키가하라[關ケ原]에서 벌어진 대규모 전투에서 이에야스는 승리를 거두었다.
천하통일 세키가하라 전투의 승리로 명실상부한 패자(覇者)가 된 이에야스는 그 패권을 영속시키기 위한 조치를 신속히 취했다. 새로운 요구에 부응하는 행정적 조치를 단행함으로써 군사적 이득을 굳건히 다졌던 이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에야스는 세키가하라 전투 후 다이묘들에 대한 대폭적인 인사조치를 단행했다. 이 과정에서 여러 명의 적대적 다이묘들로부터 영지를 빼앗았을 뿐만 아니라 아직 복속시키지 못한 다이묘들의 근거지 가까이에 있는 전략적 요충지에 자신의 심복들을 배치했다. 또한 자신과 자신의 충성스런 가신들을 위해 중부 일본의 거의 전역을 직할지로 만들었다. 전략적 요충지를 확보한 뒤에는 여러 해에 걸쳐 다이묘·궁중세력·승려·가신들을 견제할 수 있는 법률을 만들고 감독기관을 두었다. 당시 실권은 없으나 의례적인 권위는 가지고 있던 황실은 그동안 이에야스에게 그의 세력을 반영하는 직책명을 수여해왔는데, 마침내 1603년 쇼군[將軍]이라는 칭호를 부여하기에 이르렀다. 이로써 일본 최강의 다이묘인 이에야스는 천황의 이름 아래 평화를 유지하는 임무를 공식적으로 맡게 되었다. 2년 뒤 정식으로 은퇴한 그는 에도를 떠나 옛 고향인 슨푸로 돌아가 쾌적한 생활을 보냈다. 이때 쇼군의 지위를 아들 히데타다[秀忠]에게 물려줌으로써 이 지위가 도쿠가와 가문의 세습적 특권임을 확고히 했다. 쇼군 시절이나 은퇴 후에나 그는 외교문제에 있어 전권(專權)을 휘두르기를 좋아했다. 당시 중국의 명(明)조는 붕괴 직전에 있었으므로 해외에 영향력을 미치지 못했다. 그러므로 주로 중국을 상대해왔던 일본은 포르투갈·네덜란드·영국 등의 무역 요구와 네덜란드나 스페인 등의 포교(布敎) 요구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는 무역을 병기, 상업적 이득, 그리고 폭넓은 정보를 얻는 수단으로 여겼기 때문에 이를 환영했다. 그러나 1612년 외교사건의 발생을 계기로 그는 선교사들을 자신이 힘들여 만들어놓은 정치체제에 도전하는 위협적 요소로 보기 시작했다. 그 뒤 2년 동안 선교활동을 중지시키고 그리스도교의 포교를 탄압했으며 후계자들 역시 30년 동안 이에야스의 반(反) 그리스도교 정책을 충실히 수행했다. 그결과 일본 내에서 그리스도교는 거의 자취를 감추었으며 무역도 나가사키[長崎]를 통해 제한적으로 이루어졌다. 세키가하라 전투 후 이에야스는 다이묘들을 인사이동시키고 수년에 걸친 정치개혁을 통해 입지를 강화시켰으나 다이묘들에 대한 경계를 계속 늦추지 않았다. 1604~14년에는 아들 히데타다로 하여금 다이묘들을 동원해 에도 성을 증축·개축시키는 일을 벌였다. 멀리 떨어진 곳에서 커다란 석재와 목재를 운반하기 위해 수천 척의 배와 수만 명의 인원이 수년 동안 끊임없이 동원되었다. 그가 죽었을 때 에도 성은 넓은 해자(垓字), 높은 석벽(石壁), 나무로 된 긴 흉벽(胸壁), 큰 문루(門樓), 곡식과 동전이 가득찬 넓은 내화(耐火)창고 등이 그물처럼 엮어져 있는 세계 최대규모의 성이 되었으며 주변 주택에서는 다이묘들이 인질생활을 했다. 이제 에도는 장인·상인·관리·노동자들이 활발히 움직이는 도시·항구로 번영하기 시작했다.
남은 정적들의 제거 이러한 대규모 공사(工事)를 통해 이에야스는 더욱 강성해진 반면 그 비용을 부담해야 했던 다이묘들은 훨씬 가난해졌다. 그러나 이에야스는 도쿠가와 가문의 강성한 군사력이 절대적 정치권력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가문의 기반이 굳건하다고는 느끼지 않았다. 비록 히데타다가 쇼군이 되긴 했지만 그것이 반드시 정통성의 문제를 해결해주는 것은 아니었다. 이는 히데요시의 아들 히데요리[秀賴]가 아직 살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사카 성[大阪城]에서 성장한 히데요리는 점차 추종 무사들을 모아들여 도쿠가와의 정통성을 위협하는 인물로 부각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1614년까지 히데요시를 따랐던 세력들이 대부분 죽자 이에야스는 마지막 정적인 히데요리를 별 위험없이 제거해낼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두 진영의 오랜 긴장상태가 지속된 뒤 이에야스는 군대를 동원해 산발적이고 특기할 것 없는 싸움을 2차례 치른 끝에 마침내 오사카 성을 함락시키고 히데요리 등 성의 실력자들을 제거했다. 그는 도쿠가와 세력들에게 유리하게 영지를 배분한 뒤 고향인 슨푸로 돌아가 이듬해인 1616년 병사했다. 그는 100여 년 동안 무사들이 이루려 했으나 실패한 일, 즉 자신의 가문들을 영원한 권력의 자리에 오르게 하고 일본 전역에 지속적인 평화를 가져오는 일을 성공적으로 이룩해냈다./C. D. Totman 글 | 李鍾麟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