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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통하는 자(마 5:4)
할렐루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 4:1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에 두루 다니시면서,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소문이 퍼지자, 갈릴리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과 유대와 요단강 건너편에서도 수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을 따라 다녔습니다.
1절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예수님은 따라다니는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셨습니다. 그런데, 무리들이 모두 다 그 산에 올라온 것이 아니라, “제자들이 나아왔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때로는 수많은 사람들이 구름떼처럼, 예수님을 따라다녔지만, 예수님께서 산에 올라가 말씀하실 때에는 그 많던 사람들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오직 제자들만, 오직 소수의 사람들만 말씀의 자리, 은혜의 자리로 나왔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수많은 무리들 속에, 속해 있는 한 사람이 아니라, 산에 올라가,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던 제자들 중 한 사람이 되어야만 할 것입니다.
시내산에 올라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던 사람은 모세였습니다. 시내산 아래에는 수많은 백성들이 있었습니다. 시내산에 올라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던 모세는 하나님께 쓰임 받은 귀한 믿음의 사람이 되었지만, 모세와 같이, 애굽을 나왔고, 홍해를 함께 건넜지만, 시내산 아래에 있던 사람들은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그 앞에 제사하며, 춤추며, “금송아지가 하나님이다.”라고, 잘못된 신앙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마르다의 동생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 아래에 앉아, 주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은 마르다에게,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눅 10:41-4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살아갈 때에, 여러 가지 일을 하느라, 마음이 분주하기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좋은 편을 택할 수 있어야 합니다.
특별히 귀하고 복된 주일에는 하나님 앞에 나와, 우리의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예배드리며, 하나님의 말씀을 귀 기울여 듣는 좋은 편을 택하여만 합니다.
베드로가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요 6:68)라고 고백했던 것처럼, 영생의 말씀, 은혜와 축복의 말씀을, 우리가 어디 가서 들을 수가 있겠습니까? 영생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는 주님 앞으로 나와야 합니다.
우리는 이리저리 몰려다니는 수많은 무리들 속에 속해 있는 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나님 앞에 나오는 제자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주신 귀하고 소중한 산상수훈의 말씀, 그 중에, 팔복의 말씀은 수많은 그 무리들에게 주신 말씀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을 따르고자 하는 믿음의 사람,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이라고 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듣기는 들어도, 믿음의 사람, 제자가 아니라고 한다면, 이 말씀을 이해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행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3절 말씀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지난 주일에 “심령이 가난한 자”에 대하여 살펴보았습니다.
심령이 가난하다고 하는 것은 물질적인 가난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심령이 가난한다고 하는 것은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텅빈 마음”이요, “그 텅빈 마음을 채우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그 아무것도 없는 텅빈 마음을 무엇으로 채워야 하겠습니까? 세상적이요, 육신적인 것으로 채워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만족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있다가도 금방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텅빈 마음은 오직 예수님으로 채워야만 합니다. 그래야, 만족함을 얻게 됩니다. 영원한 복을 받습니다.
마태복음 12:43-45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쉴 곳을 얻지 못하고 이에 이르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 보니 그 집이 비고 청소되고 수리되었거늘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느니라 이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무것도 없이 텅 비어 있는 상태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 텅빈 마음을 반드시 채워야 합니다. 그러나, 쓰레기로 채워서는 안됩니다. 귀하고,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으로 가득 채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12일 자에, 순천 삼산동에 관련된 뉴스가 있어, 자세히 읽어 보았습니다.
5톤 가량의 쓰레기 더미 집에 갇힌 채, 은둔형 외톨이 생활을 해온 20대 청년이, 행정복지센터의 도움으로, 1년 만에 바깥 세상으로 나왔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지인으로부터, 사기 피해를 당한 청년(24살)이, 지난해 봄부터, 외부와 단절한 채, 바깥 출입을 하지 않고, 홀로 지냈는 것을 알게 된 원룸 집주인이, 행정복지센터에 신고를 했다고 합니다. 즉시 현장으로 뛰어간 직원들은, 직접 보고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놀랐다고 합니다. 청년의 집은 배달 음식물 쓰레기와 1회 용기 등, 각종 묵은 생활 쓰레기로 인해 발생한 날파리와 심한 악취로, 온 집안이 진동을 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지인으로부터 사기를 당한 그 허탈한 마음에 채워서는 아니되는 것으로 채워버렸습니다. 참 안타까운 이야기입니다. 있어서는 아니되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먼나라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세상이 나를 아프게 했다고, 세상이 나를 실망시켰다고, 우리의 마음을 더럽고, 냄새나는, 지저분한 쓰레기로 채워서는 안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으로 채워야 합니다. 그래야, 천국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라고 말씀하셨고, 천국 복음을 전파하셨고, 이무것도 가진 것 없는 그 텅빈 마음에, 예수님으로 채우고자 하는 사람에게, 천국이라고 하는 놀라운 복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이미 우리는 천국을 경험하였고, 천국 가는 길에 들어서서, 천국을 향하여,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중도에, 딴 길로 나아가는 일이 없이, 마지막 날, 반드시 천국에 들어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께 경배와 찬양을 올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자리에 우리 모두 함께 있어야 합니다.
바울은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다”(딤후 4:7-8)라고 말한 후에,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 그에게 영광이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딤후 4:18)라고 말했습니다.
바울이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킨 이유가 바로 천국에 들어가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 모두, 천국에 들어가, 의의 면류관을 써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기 위해서는, 우선 울어야 할 것입니다. 애통해야 합니다.
“웃으면 복이 와요”라는 아주 유명한 코미디 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마는 오늘 말씀은 “웃으면 복이 와요”가 아니라, “울면 복이 온다”는 말씀입니다. 이래 저래 살아가기 힘든 세상입니다. 날마다 웃으면서 살아가고 싶은데, “우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십니다.
이런 저런 일로 스트레스를 많이 받기 때문에, 우는 것보다, 실컷 웃고 싶은데, 지금 예수님은 “우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4절 말씀입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울어야 합니다. 울 수 있어야 합니다.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다윗은 “여호와여 나의 기도를 들으시며 나의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이소서 내가 눈물 흘릴 때에 잠잠하지 마옵소서 나는 주와 함께 있는 나그네이며 나의 모든 조상들처럼 떠도나이다 주는 나를 용서하사 내가 떠나 없어지기 전에 나의 건강을 회복시키소서”(시 39:12-13)라고 말했습니다. 또한, “내가 탄식함으로 피곤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시 6:6)라고 말했습니다.
한 나라의 왕이었던 다윗이 왜 밤마다 울었습니까? 죄를 범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죄의 용서를 구하면서, 밤마다 눈물로, 침상과 요를 적시며, 울었습니다. 애통해 했습니다.
밤마다, 눈물로,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시 51:11)라고 울부짖었습니다.
예레미야 애가 1:1-2절 말씀입니다. “애가”라고 하는 말은 슬픈 노래라는 말입니다.
예레미야 애가는 예레미야 선지자가 부른 슬프고도 애처로운 노래입니다.
“슬프다 이 성이여 전에는 사람들이 많더니 이제는 어찌 그리 적막하게 앉았는고 전에는 열국 중에 크던 자가 이제는 과부 같이 되었고 전에는 열방 중에 공주였던 자가 이제는 강제 노동을 하는 자가 되었도다 밤에는 슬피 우니 눈물이 뺨에 흐름이여 사랑하던 자들 중에 그에게 위로하는 자가 없고 친구들도 다 배반하여 원수들이 되었도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그들이 내가 탄식하는 것을 들었으나 나를 위로하는 자가 없다”, “나의 탄식이 많고 나의 마음이 병들었나이다”(애 1:21,22)라고 말했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눈물의 선지자였습니다. 남유다 백성들의 죄를 한 몸에 끌어안고, 슬퍼했습니다. 아파해습니다. 울었습니다. 그러나, 그를 위로하는 자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내 눈이 눈물에 상하며 내 창자가 끊어지며 내 간이 땅에 쏟아졌으니 이는 딸 내 백성이 패망하여 어린 자녀와 젖 먹는 아이들이 성읍 길거리에 기절함이로다”(애 2:11)
남유다가 바벨론의 침략을 받아, 핍박을 받는 모습을 보고, 탄식하며 애통해 했습니다.
백성들도, “딸 시온의 성벽아 너는 밤낮으로 눈물을 강처럼 흘릴지어다 스스로 쉬지 말고 네 눈동자를 쉬게 하지 말지어다”(애 2:18)라고 하나님을 향하여 눈물로 부르짖었습니다.
페르시아의 술 관원이었던 느헤미야는 유다를 다녀온 사람들에게,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아 있는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들의 형편을 물었습니다. 돌아온 사람들이 “남아 있는 사람들이 큰 환난을 당하고, 능욕을 받으며, 예루살렘 성은 허물어지고, 성문들은 불탔다”라고 말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느헤미야는 그대로 그 자리에 주저앉아, 울었습니다.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했습니다.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언약을 지키시며 긍휼을 베푸시는 주여, 간구하나이다. 우리 이스라엘 자손이 주께 범죄한 죄들을 자복하오니, 종의 기도를 들어주옵소서. 나와 내 아버지의 집이 범죄하였습니다. 주를 향하여 크게 악을 행하여 주께서 주의 종 모세에게 명령하신 계명과 율례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였나이다”
느헤미야는 자기 자신의 죄가 아니라, 그의 조상들이 지은 죄를 위하여, 용서해달라고, 하나님께 울면서, 눈물로 부르짖었습니다.
여러분! 팔복 가운데, 첫 번째 복이,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가난”은 “아무것도 없는 텅빈 마음”이요, “그 텅빈 마음을 채우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무엇으로 채워야 한다고 했습니까? 세상 것, 육체적인 것, 쾌락적인 것으로 채워서는 아니되고, 오직 예수님으로 채워야 합니다.
이제껏 주님의 뜻대로 살지 않고, 내 마음대로, 내 고집대로 행동하며, 알고 지은 죄, 모르고 지은 죄를 주님 앞에 고하면서, “주님, 저는 예수님 없으면, 소망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로 저의 죄를 용서해 주세요.”라고 부르짖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때 실실 웃으면서, 말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다윗처럼, 자신의 죄를 고백하면서, 밤마다 눈물로, 침상을 적시고, 요를 적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주님, 지금껏 내 뜻대로 살아왔습니다. 이제부터는 주님 뜻대로 살겠습니다.”라고, 눈물 흘리며, 슬퍼하며, 부르짖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무엘상 15장을 보면, 사울 왕이 “아말렉을 전멸시키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죄를 범한 것을 보게 됩니다.
사무엘 선지자가 사울 왕에게, “하나님께서 죄인 아말렉 사람을 진멸하되 다 없어지기까지 치라 하셨거늘 어찌하여 왕이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하고 탈취하기에만 급하여 여호와께서 악하게 여기시는 일을 행하였나이까?”라고 말했습니다.
그때 사울왕이 사무엘 선지자에게, “내가 범죄하였나이다 내가 여호와의 명령과 당신의 말씀을 어긴 것은 내가 백성을 두려워하여 그들의 말을 청종하였음이니이다 청하오니 지금 내 죄를 사하고 나와 함께 돌아가서 나로 하여금 여호와께 경배하게 하소서”라고 말했습니다. 비록 사울 왕이 “내가 범죄하였나이다”라고 말했지만, 그것은 죄에 대한 진정한 애통이 아니었습니다. 눈물로 회개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윗처럼, 죄에 대하여 애통했다면, 어쩌면, 사울 왕조가 계속되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마는 그의 애통은 진정한 애통이 아니었기에, 왕조가 끊어지고 말았습니다.
겟네사렛 호숫가에서, 베드로가 밤새도록 그물을 던져 고기를 잡았지만, 별로 잡은 것이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라고 말씀하셨고,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그물을 던졌습니다. 고기를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질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예수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때, 베드로의 마음이 바로 죄에 대하여 애통하는 마음이었습니다.
“나는 죄인입니다.”
예수님을 그런 베드로에게, “무서워하지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눅 5:10)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해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께서 잡히실 때, 베드로는 예수님을 멀찍이 따라갔습니다. 그날 밤, 사람들이 대제사장 집 뜰 가운데, 불을 피우고, 함께 앉아 있었을 때, 베드로도 그들과 함께 앉아 있었습니다. 한 여종이 베드로를 알아보고, “이 사람도 그와 함께 있었느니라”고 말했습니다. 베드로는 “이 여자여 내가 그를 알지 못하노라”라고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바로 그때, 닭이 울었습니다.
그 순간,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바라보셨습니다. 눈이 마주쳤습니다. 베드로는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베드로는 밖으로 뛰쳐나가 심히 통곡했습니다. 울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눈물을 기억하셨습니다. 그를 위로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사람을 낚는 어부로 사용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디베랴 호수가에서 고기 잡고 있는 제자들에게 나타났습니다.
예수님께서 떡을 가져다가 제자들에게 주시고, 생선도 구워주셨습니다.
조반을 먹은 후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베드로는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내 어린 양을 먹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신의 잘못과 죄를 알고, 뉘우치고, 눈물로 애통해하는 베드로를 예수님은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찾아와, 위로하셨고, 그에게,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어린 양을 돌보라고 하셨습니다.
세상 살아가는 동안, 날마다 웃으며 살기를 원하지만, 웃을 일보다는 울 일이 많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여기서 “애통”은 세상 힘들고 어려운 일 때문에, 남몰래 우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죄 때문에 우는 것을 말합니다. 자기 자신의 죄 때문에 울었던 다윗과 베드로, 백성들의 죄 때문에 울었던 예레미야와 느헤미야처럼, 우리 자신을 되돌아보면서, 울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복이 임한다고 하셨습니다.
애통하는 자가 받는 복이 어떤 복입니까?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위로가 무엇입니까? 여기 “위로받다”라는 말은 헬라어 “파라칼레오”로서, 이 말은 마치 마라톤 선수가 숨을 헉헉거리며 달릴 때, 누군가가 옆에 가서 함께 달려주며, 물병도 주고, 힘을 북돋아 주는 것처럼, 성령님께서 곁에 오셔서, “격려해주시고, 도와주시고, 힘을 주시면서, 기쁘게 해 주신다.”라는 뜻입니다.
요한복음 15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내가 떠나가면 너희에게 보혜사, 진리의 성령을 보내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 “보혜사”라는 헬라어가 “파라클레토스”입니다.
“보혜사”의 “파라클레토스”와 “위로하다”의 “파라칼레오”는 같은 어원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왜 예수님께서 “파라클레토스”, 즉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겠다”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이제 주님이 떠나시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라고 걱정하는, 힘 없고 연약한 제자들에게, 힘을 주시고, 용기를 주시고, 믿음에서 승리하도록 돕기 위해서,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주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성령님은 위로의 영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순간마다, 내 속에 있는 죄를 아파하며 탄식할수록, 위로의 성령님께서, 내 곁에 오셔서 격려해주시고, 붙잡아 주신다는 것입니다.
“염려하지 마라. 두려워하지 마라. 괜찮아. 이제 너는 용서받을 수 있어. 이제 너는 소망이 있어. 이제 너는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영생 복락을 누릴 수 있어. 천국에 들어갈 수 있어.”
성령님께서 우리를 위로하여 주신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의 고달픈 삶을 힘차게, 이기며 살아가도록, 성려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여 주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다윗은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 하시고 충심으로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시 34:18, 51:17)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위로를 받아본 사람이 아니면, 말할 수 없는 아름다운 믿음의 고백입니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다윗은 하나님의 위로를 받았습니다. 씻을 수 없는 큰 죄를 범하였지만, 밤마다 눈물로 그 침상을 적시며, 그 죄의 용서를 구하였기에, 하나님의 용서를 받고, 위로를 받고, 하나님의 은혜 속에 성군이 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요즘 무엇 때문에, 마음 아파하고 슬퍼하십니까? 내 안에 있는 죄와 허물을 아파하며 애통해 보신 적이 언제입니까? 먼나라, 남의 이야기입니까?
우리는 애통의 자리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할 때, 위로의 성령님께서 우리 곁에 오셔서, 우리를 위로하여 주시고, 우리에게 새 힘을 주시는 것을 경험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때로는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통하여, 우리는 큰 위로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위로는 잠시 잠깐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들은 우리와 영원히 같이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하여 주십니다.
여러분! 우리 곁에서, 우리를 위로해주실 분은 오직 예수님뿐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고, 애통의 자리로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죄에 대하여 아파하는 우리의 눈물을 기억하시고, 우리를 위로하여 주시고, 회복시켜 주실 것입니다.
기도합니다.
우리와 항상 함께 하여 는 임마누엘이신 하나님 아버지,
오직 주님 뜻대로 살겠다고 하면서도, 내 뜻대로 살아갈 때가 많음을 고백합니다.
정직하고 진실된 삶을 살아가겠노라고 다짐하지만, 죄악에 빠져 있을 때가 많습니다.
주여,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우리의 죄에 대하여 아파하며, 눈물로 회개할 수 있는 은혜를 베풀어 주옵시고, 주님의 위로를 날마다 경험하며 살아가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