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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18;1-22. 고린도와 겐그레아, 그리고 에베소를 떠나 안디옥으로 2023. 7. 23.
오늘 본문은 바울의 2차전도 여행의 마지막 시기에 일어난 사역의 내용인데 바울은 아덴을 떠나서 고린도에서 일 년 육 개월 복음을 전하고 수리아의 겐그레아에서 이전에 서원을 했던 머리를 자르고 에베소에서 잠시 머무르다가 가이사라를 거쳐 안디옥으로 들어갑니다. 이 것이 오늘 본문에 나오는 바울의 일정입니다. 1절, 아덴을 떠나 고린도에 이르러... 선교사역 일정이라고 할까요? 성령님은 바울을 아덴에서 고린도로 인도하셨습니다. 이는 참으로 죄가 많은 곳과 문제가 많은 곳에 은혜가 풍성할 징조이었습니다. 그래서 본문 1절은 이 후에 바울이 아덴을 떠나 고린도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면 고린도는 어떤 도시이었는가요? 고린도는 당시 인구75만의 도시로 가야바주의 수도입니다. 이곳에서 바울은 일 년 육 개월 동안 머물면서 복음을 전하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니까? 아덴이 당시 최고의 문화와 예술의 도시이었습니다. 하지만 살아있고, 활기가 있고 풍성한 삶의 동기가 되는 최고의 문화와 최고의 예술이 아덴을 우상의 도시로 만들었습니다. 예술과 문화를 가장하여 귀신들을 섬기는, 영적으로 가장 혼탁한 도시이었습니다. 반면 아덴에서 130km 정도 떨어진 고린도는 도시전체가 쾌락과 물질과 향락을 즐기며 여유를 가진 어두움을 상징하는 죄악 된 도시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아덴은 진리의 도시이지만 전혀 사람들을 온전한 진리에 이르게 하는 빛이 없는 어두움의 중심지이었습니다. 생명이 없는 우상이 가득하고, 적용되지 않는 철학이 있고, 빛이 없는 예술이 가득한 도시 이었습니다. 반면에 고린도는 현실주의의 극치인 부패한 생활의 중심지로서 풍유문화가 가득한 도시 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곳에서 사역을 시작한 이후에 아무런, 뚜렷한 이유가 없이 이 곳을 떠납니다. 바울이 선교여행 중에 가장 평안한 가운데 떠난 도시가 바로 이 고린도입니다. 그래서 1년 6개월간 고린도에 있었고 그리고 에베소에 잠깐 머물렀습니다. 바울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남겨두고 에베소를 떠나 가이사라를 거쳐서 예루살렘에 들어갑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서 적극적인 환영을 못 받고 그리고 안디옥으로 내려갑니다. 22절의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고린도는 정확하게 어떤 사람들이 살아가는 도시일까요? 몇 가지가 있습니다.
유럽의 남부 그리스의 정치적 중심지가 고린도입니다. 로마 총독이 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는 헬라의 도시이지만 로마의 통치를 받았습니다. 헬라문화가 존재하지만 진정한 의미의 헬라문화가 없는 도시이었습니다. 그리고 현실적인 삶의 부요 때문에 고린도에는 여러 종족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다문화의 도시이고 상업의 중심지이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를 가리켜서 헬라의 교량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헬라의 교량이라는 표현은 헬라의 남북을 관통하는 교통의 중심지가 고린도라는 표현입니다. 또 헬라의 시장이라고 했습니다. 헬라의 시장이라는 표현은 동서무역의 중심지가 고린도 이었다는 표현입니다. 그만큼 수많은 사람들의 이동과 수많은 상인들의 집결이 되었습니다. 이런 밀물과 썰물이 상존하면서도 교량과 시장 때문에 물질적으로 풍성한 도시이었습니다. 그러니까? 헬라의 아덴이 학문과 예술의 중심이라면 고린도는 상업과 무역으로 이름난 도시이었습니다. 고린도에서 발견된 물품 가운데, 아라비아의 발삼과 이집트의 파피루스와 페니키아의 대추야자와 리비아의 상아와 바벨론의 카펫트와 길리기아의 염소 털과 루가우니아의 모직과 브리기아의 노예가 있습니다. 풍성했습니다. 좋았습니다. 가장 좋은 것으로 치장을 했습니다. 하지만 현실의 풍성함 속에서도 도시민 전체가 해택을 누리지 못하는, 그래서 더욱 사람들의 평안과 안전을 책임지지 못하는, 그리고 적용이 되지 않는 어두운 면이 있었던 고린도 이었습니다. 그러면 그 어두운 면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빈부의 격차가 심했습니다. 부자와 가난한 사람이 섞여서 살았습니다. 그런 사람들 속에 부유한 사람들은 어떤 것을 추구하고 삽니까? 사치를 좋아 했습니다. 그래서 일부의 사람들은 그들의 행위를 천박하게 여겼습니다. 깊이가 없고, 생각이 없다고 했습니다. 육체가 이끌고 육체가 요구하는 데로 내버려 둡니다. 상위 몇 퍼센트의 국민이 이 것을 누렸습니다. 로마제국의 허영 된 도시이었습니다. 그래서 주후 1세기에는 영국의 런던과 프랑스의 파리라고 했습니다. 그만큼 고린도는 부유한 사람들의 중심을 따르는 도시이었고 가나한 사람은 짐승의 삶을 살아야만 했습니다. 도덕과 윤리가 땅에 떨어진 도시이었습니다. 많은 부자의 사람들이 사치를 했고, 육신의 온갖 것을 자랑했습니다. 자기들이 1퍼센트라고 합니다. 나머지는 요사이 유행하는 개, 돼지로 보았고 그렇게 대우를 했습니다. 졸부의 근성을 나타냈습니다. 허세가 있었고 추하고, 생각을 넘어선 그런 삶을 살았습니다. 여러분, 고린도 사람같이 행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물질에 취하여 타락한 생활을 하고 있는 고린도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실로 고린도는 온갖 도덕적 오염과 타락으로 가득 찬 도시였습니다. 특히 고린도에 아프로디테(Aphrodite) 여신의 신전이 있었습니다. 아데미 신전입니다. 이 신전의 전성기에는 1,000여 명의 여승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종교적 이름으로 저녁이 되면 저들의 직업을 위하여 도시 거리로 내려옵니다. 종교의 이름으로 정화되기는커녕, 면죄부를 주고 부추켰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런 것들이 영향을 미치는 곳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누구에게요? 모든 사람에게 입니다. 특히 가난한 사람들과 힘에 겨운 사람들과 심지어 노예에게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들이 가난하게 살지만 근본을 선하게 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주위를 보니까?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억울했습니다. 못난 삶을 살았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가치관이 변하고 소유욕이 변했습니다. 사람의 근본이 바뀌고 모든 사람이 물들었습니다. 그래서 아무나 함부로 고린도를 여행하지 말라는 표현이 유행했고, 고린도화 되어간다는 당시의 유행어가 만들어졌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전 6;9-10. 고린도의 죄악을 나열하면서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란 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 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람하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후욕하는 자나 토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고린도의 어두운 내용을 알고 있고 본 바울은 고린도의 특징과 본질을 이렇게 표현을 했습니다. 이런 내용은 고린도 전 후서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를 상대로 책망할 것이 많이 있었습니다. 무엇을 고쳐주려 했을까요? 무엇을 말씀해야 했을까요? 중요한 것을 간추려보면 무엇보다도 파당입니다. 파당이 무엇입니까? 필요 이상으로 자세한 구분을 하는 것입니다. 어울려서 살면 되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철학과 사상과 소유와 생각과 사람과 출신에 따라 상이한 견해나 상이한 강조점이 있었는데 다름과 다양성으로 보지 않고 그 상이한 견해와 상이한 강조점에 따라 구분을 했습니다. 구분의 중심이 무엇입니까? 자기 기준입니다. 공유하는 어떤 사상과 철학이 존재하지 못하는 도시가 고린도 이었습니다. 무엇이든지 자신의 기준으로 적용을 하고 자신의생각과 자신의 판단이 기준입니다. 그래서 공유하지 못하고 공감하지 못했습니다.
또 하나는 고린도가 이렇게 되어 진 바탕과 밑 바닦에 고린도의 종교가 그 중심에 있었습니다. 아프로티테 신전입니다. 롬1;21-31에서 고린도를 빗대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으니 곧 그들의 여자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그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그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들 자신이 받았느니라.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습니다.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그렇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우상으로 바꾸었습니다. 순리를 역리로 바꾸었습니다. 좋아지는 상황이아니라, 도리어 그들의 행위대로 상당한 보응을 받았습니다. 교만하고, 능욕하고, 무정하고 무자비하고 악을 도모하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어떻게 여기까지 이르게 되었을까요? 하나님께서 그들의 행위대로 내버려 두셨기 때문입니다. 상실한 마음대로 그대로 두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욕심대로 내버려 두셨기 때문입니다. 이런 내용이 오늘 본문에 나오는 말씀의 내용입니다. 그러면 이런 고린도에 대하여 주님은 어떻게 보시는가? 이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내 생각과 내 믿음이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주님이라면? 주님이시라면? 어떻게 생각을 하시고 어떻게 말씀하시고 어떤 처방을 원하실까? 어떤 말씀과 은혜를 주실까? 이 것이 중요합니다.
1. 이런 어두운 고린도에 대하여 주님이 보시는 시각입니다. 4-10절, 안식일마다 바울이 회당에서 강론하고 유대인과 헬라인을 권면하니라. 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로부터 내려오매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언하니 그들이 대적하여 비방하거늘 바울이 옷을 털면서 이르되 너희 피가 너희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나는 깨끗하니라. 이 후에는 이방인에게로 가리라 하고 거기서 옮겨 하나님을 경외하는 디도 유스도라 하는 사람의 집에 들어가니 그 집은 회당 옆이라 또 회당장 그리스보가 온 집안과 더불어 주를 믿으며 수많은 고린도 사람도 듣고 믿어 세례를 받더라.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이 말씀은 여기에 나오는 핵심적인 말씀입니다. 나머지는 부수적입니다. 고린도가 어찌하여 이런 것 까지? 그러니까? 이런 것 까지도 부수적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고린도의 비밀을 아셨습니다. 이 것을 바울에게 가르쳐주었습니다. 물론 이 말씀은 여러 가지 의미에서 하셨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고린도 사람들이 이렇게 살면서 하는 고민과 고뇌와 고통과 갈등과 번민을 아셨습니다. 그런가 하면 이렇게 살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의 마음을 아셨습니다. 표현하지 못하는 부분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10절의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말씀에 의지하여 사도 바울은 1년 6개월간 고린도에 머물면서 그들을 복음으로 가르치고 세워주며 사랑을 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사도 바울이 1년 6 개월 동안 고린도를 위하여 복음을 전하였을까요?
1-1. 바울이 고린도에 도착한 이후에 고린도의 부패상을 날카롭게 인식을 합니다. 먼저는 인식이 중요합니다. 알고 보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날카롭게 인식을 했습니다. 그럼에도 주의 복음을 열심히 전하는 바울에게 10절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고린도 교회가 세워진 이후의 말씀이 아닙니다. 그 이전입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하다가 어느 정도 한계에 부닥쳐 있을 때에 하신 말씀입니다. 주어진 현실 속에서 두려움과 떨림을 느끼고 있을 때에 주님께서 바울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면 무엇에 대한 두려움일까요? 부패상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습니다. 뼈저리게 느끼는 현실입니다. 복음을 전한다 하더라도 힘들지 않을까? 하는 비관으로 오는 두려움입니다. 일본 선교는 안 돼!!! 일본은 선교사의 무덤이야. 바로 이런 비관 앞에 주님은 소망의 10절의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용기를 얻고 복음을 전합니다.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헬라인과 유대인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거리에서, 디도 유스도의 집에서, 호기심에 찬 군중에게서 주님이 말씀하신 택한 백성을 찾기 위하여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자세와 용기와 위로 속에 복음을 전하는데 주님은 더욱 위대한 말씀을 바울에게 말씀합니다. 9-10절,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 그런데 바울에게 들려 진 이말씀,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느니라. 그렇기 때문에 아무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느니라. 이 말씀은 그냥 하는 음성이 아닙니다. 실제적입니다. 얼마나 위로가 됩니까? 다시 리바이벌 되고 다시 동서남북의 은혜의 새 길이 열리는 음성 아닙니까? 그러면 위로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1-2. 인식을 하고 복음을 전하지만 상황은 쉽게 돌아오지 않습니다. 하지만 염려할 것이 없습니다. 12-17절. 갈리오가 아가야 총독 되었을 때에 유대인이 일제히 일어나 바울을 대적하여 법정으로 데리고 가서 말하되 이 사람이 율법을 어기면서 하나님을 경외하라고 사람들을 권한다 하거늘 바울이 입을 열고자 할 때에 갈리오가 유대인들에게 이르되 너희 유대인들아 만일 이것이 무슨 부정한 일이나 불량한 행동이었으면 내가 너희 말을 들어 주는 것이 옳거니와 만일 문제가 언어와 명칭과 너희 법에 관한 것이면 너희가 스스로 처리하라 나는 이러한 일에 재판장 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고 그들을 법정에서 쫓아내니 모든 사람이 회당장 소스데네를 잡아 법정 앞에서 때리되 갈리오가 이 일을 상관하지 아니하니라. 아가야의 총독인 갈리오가 이 일에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복음을 전하는데 유대인들이 바울을 대적하고 잡아서 법정에 세웠습니다. 그리고 총독에게 재판을 청하고 죄악을 물으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복음을 전파하는 사람을 정죄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총독인 갈리오는 사랑스럽고 호감이 가고, 신사적인 사람입니다. 그런 갈리오가 아가야의 총독으로 부임했습니다. 그러면 당연히 유대인들을 마음에 두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을 제거할 기회로 보았습니다. 그런데 갈리오가 유대인의 이런 계획에 맞서서 바울을 보호했습니다. 송사를 거절했습니다. 재판장 되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복음으로 변화된 회당장 소스데네를 붙잡는 일에도 관여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재판을 청구하고 송사를 하는 유대인들을 내어 쫓았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런 일이 일어나기 전에 이미 주님께서 바울에게 말씀입니다.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느니라. 그렇기 때문에 아무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느니라. 왜냐하면 이 고린도에 내 백성이 많기 때문입니다. 위험한 상황 속에서도 미리 이 것을 보여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새로운 길을 모색하고 동서남북의 은혜를 사모하고 다시 일어서려고 하는데 다시 부흥을 꿈꾸는데 막힘이 있습니까? 사방팔방이 막혀 있습니까? 가장 가까운 사람이 송사하려 합니까?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느니라. 그렇기 때문에 아무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다는 주의 음성이 들려지고 더욱 담대하게 소망하며 앞으로 나아가시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1-3. 상황에 따라 주시는 위로가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위험직전에 보호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항상 이렇지 않습니다. 루스두라에서는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죽은 줄 알고 버렸습니다. 그리고 난 이후에 살려 주셨습니다. 오늘은 아가야의 총독, 갈리오를 통해서 바로 위로를 주셨습니다. 들려진 음성을 확정하셨습니다. 무슨 말씀일까요? 상황에 따라 보호하시고 살리는 것이 다릅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주님의 목적에 따라, 주님의 경륜 안에서, 적대하는 세력을 막고, 말씀 전파를 위하여 때를 따라 건지십니다. 특별히 부패한 도시에서 주의 강력한 능력이 나타납니다. 지금까지 역사는 그렇습니다. 상황에 따라 위험의 대처도 다릅니다. 구원하시는 방법도 다릅니다. 도와주시고 건지시고 은혜를 주시는 내용도 다릅니다. 크기와 넓이와 깊이가 다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중요한 것은 언제 어디서나 주의 음성만을 인식하고 기억하고 기대하고 소망하면 됩니다. 무엇입니까?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느니라. 그렇기 때문에 아무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다는 주의 음성입니다. 상황에 따라 주시는 위로가 다릅니다. 주님은 여러분의 사장과 상황을 잘 알고 계시고 보고 계십니다. 한 순간도 주의 눈동자가 떠나지 않습니다. 알고 계시고 보고 계신 주님께서 여러분의 모든 것을 보호하시고 지키십니다. 그런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2. 그러면 오늘 본문에서 주께서 주시고 더 주신 위로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고린도에서 바울에게 큰 위로와 격려를 더하셨습니다. 미이 준비하신 사람을 붙여 주셨습니다. 얼마나 자상하고 세밀한지요?
2-1. 주 안에서의 형제 아굴라 부부를 만나게 하신 위로입니다. 2절, 아굴라라 하는 본도에서 난 유대인 하나를 만나니 글라우디오가 모든 유대인을 명하여 로마에서 떠나라 한 고로 그가 그 아내 브리스길라와 함께 이달리야로부터 새로 온지라 바울이 그들에게 가매. 여러분, 아굴라 부부는 이미 바울을 만나기 전에 로마에서 그리스도 안에 있던 신앙인이었습니다. 이 부부는 유대인으로서 바울과 동족이었고(18:2),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앙의 동지이었고, ③ 바울과 같은 장막 제조업자이었습니다(18:3). 그런데 왜 바울이 고린도에서 장막 제조업의 일을 하면서 복음을 전했을까요? 고린도가 상업도시입니다. 모든 활동은 물질과 관계가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고 사람을 만나는 모든 동기가 상업이고 거래이고 관계이었습니다. 그래서 성실하게 사는 것을 보여 줌으로서 복음을 순수하게 받아들이도록 했습니다. 이들은 로마에서 살다가 유대인을 추방하라는 추방령을 받아 고린도에 왔는데, 마침 바울이 올 무렵에 고린도에 와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저들에게 가서 만나고 함께 동행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고린도에서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를 만나게 해 주신 것은 바울의 전도 여행에 큰 힘과 용기와 위로가 되었습니다. 이 만남이 연고가 되어 저들 부부는 바울의 복음 사역에 위대한 동역자가 되었습니다. 18절, 바울은 더 여러 날 머물다가 형제들과 작별하고 배 타고 수리아로 떠나갈새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도 함께 하더라 바울이 일찍이 서원이 있었으므로 겐그레아에서 머리를 깎았더라. 롬 16:3, 고전 16:19, 딤후 4:19에 바울과 함께한 내용이 나옵니다.
2-2. 실라와 디모데를 준비하여 합세한 위로입니다. 5절, 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로서 내려오매, 디모데는 데살로니가에서, 실라는 빌립보에서 왔습니다(17;14-16). 이때 실라는 빌립보 교회로부터 사랑의 연보를 가지고 와서 바울에게 전하므로 저들은 복음사역에 큰 힘이 되었습니다(고후11:9, 빌 4:15). 복음의 영적 전투에서 믿음의 동지가 합세하여 복음을 전하고 영적전투를 감당하는 일이야말로 그 무엇보다도 고무적인 위로입니다. 그래서 장막을 깁는 일을 하지 않아도 복음을 증거 할 수 있는 여건이 되었습니다.
2-3. 힘 있는 말씀사역의 위로입니다. 여러분, 힘과 능력 있는 삶이시기를 원하십니까? 4-5절, 안식일마다 바울이 회당에서 강론하고 유대인과 헬라인을 권면 하니라. 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로서 내려오매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거하니. 힘과 능력이 나타나는 말씀은 어디서 나옵니까? 실라와 디모데가 내려와 바울과 합세한 이 후로부터 고린도 전도를 본격적으로 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5절에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혔다는 표현은 말씀의 포로가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는 기록된 성경 밖에서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밝히 증거 하였는데 이는 사도 바울의 전도의 주제입니다. 여기서 밝히 증거하다는 표현은 결정적인 선포와 단언입니다. 이 용어는 법정 증언에 사용되는 말인데 들은 것과 본 것을 사실대로 확신 속에서 담대하게 분명히 증명하는 것을 뜻합니다. 바울의 증언이 주체가 아니라 성령님께서 바울을 증언의 도구로 붙잡고 사용하셨습니다. 여러분, 사람은 무엇을 붙잡느냐에 따라 인생의 결론이 달라집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혔고 예수님께 붙잡혔습니다. 바울의 인생목표는 복음을 전하는 것이고, 교회를 세우는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을 대적하고 훼방 하던 유대인들은 복음전도를 가로막고, 교회설립을 훼방했습니다. 적들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힘과 능력에 사로잡혀 말씀을 전파하도록 준비되고 준비된 신앙의 동역 자와 준비된 물질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사단과의 영적전쟁에서 잘 싸워 이겼습니다. 고전2;4-5,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인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바울은 전도할 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였습니다. 주님의 도우심과 위로로 하였습니다. 준비 된 동역 자와 함께한 사역 위에 성령의 나타남과 주님의 위로가 있습니다. 여러분들에게도 이런 능력의 삶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2-4. 회당장 그리스보의 가족과 또 다른 신앙인들을 얻은 위로입니다. 8절에 또 회당장 그리스보가 온 집으로 더불어 주를 믿으며 수다한 고린도 사람도 듣고 믿어 세례를 받더라. 이것은 말씀에 붙잡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설교한 결과이었습니다. 7절. 하나님을 공경하는 디도 유스도는 태도를 밝히지 않았으나, 자기 집으로 바울 일행을 영접했습니다. 그는 로마인으로 개종한 유대교 교인이었습니다. 더 적극적인 결과는 회당장 그리스보가 온 집으로 더불어 주를 영접했습니다. 회당장이 누구입니까? 유대의 지도자가 아닙니까? 그렇게도 박해하는 유대교의 회당을 이끌어 가는 장이 그리스도인이 되고, 그 가족이 성도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얼마나 놀랍습니까? 주님의 역사는 반대하는 사람과 대적했던 사람과 원수까지도 돌려놓습니다. 수다한 고린도 사람들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들의 삶에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교만하고, 능욕하고, 무정하고 무자비하고 악을 도모하는 사람들인 이방인 헬라 사람들이 돌아 왔습니다. 모든 불의와 추악과 탐욕, 그리고 악의가 가득하고 시기와 살인과 분쟁과 사기와 수군수군하고 비방하는 헬라 사람들이 예수를 믿었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되었습니까? 주님께서 나타나셔서 환상가운데 하신 말씀 때문입니다. 9~10절,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아무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 여러분, 환상이 무엇입니까? 초자연적 계시 현상입니다. 그 환상의 내용은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격려와 용기를 자극하시는 음성이었습니다.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계속되는 행동 지침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내가 너와 함께 한다고 했습니다. 이는 두려워하지 말고, 잠잠하지 말고, 계속적인 전도행위를 해야 할 이유를 밝히는 말씀입니다. 아무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해롭게 하다는 이 말은 덮쳐 쓰러뜨리고 공격하다는 의미입니다. 안전보장의 약속입니다.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고 했습니다. 이는 고린도에 하나님이 택한 백성이 많이 있다는 예고이면서도 고린도 지역의 전도의 열매를 알려 주는 즐거운 소식입니다. 참으로 놀랍고 신기로운 격려입니다.
여러분, 바울은 이미 다메섹, 예루살렘, 비시디아 안디옥, 이고니온, 루스드라, 더베, 데살로니가 그리고 베뢰아 등지에서 살인적인 유대인들의 폭동을 경험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고린도에서도 저들이 훼방을 보았습니다. 예기치 못한 유대인들의 폭동으로 인하여 어찌해야 하는가? 바로 그 때에 주께서 밤에 바울에게 환상으로 나타나서 바울이 아직까지 죽을 수 없는 이유를 알려 주면서 격려하고 위로했습니다. 대단한 격려와 위로 아닙니까? 11절, 일 년 육 개월을 고린도에 유하며 그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에베소에서 3년을 머물렀습니다. 로마에 가서 시위대 안에서 2년 동안 셋집에 살면서 담대히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했습니다(행 28:30). 특히 주님은 혼미하고 혼란한 고린도에 바울을 1년 6개월 간 체류하게 하였습니다. 그가 1년 6개월을 고린도에 머물렀던 결정적인 이유는 바로 그 성중, 고린도에 하나님의 자기 백성이 많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이, 바울이 환상 중에 받은 고린도 체류의 이유요, 목적이요, 내용입니다. 이것은 바로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에 체류하는 궁극적인 이유요, 내용이요,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떠한 상황과 어떠한 처지에서도 여러분을 향한 주님의 위로와 살핌과 용기 주심을 통하여 여러분에게 맡기신 사역과 삶을 능력 있게 전개하시는 그래서 아름다운 열매가 가득한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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