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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하이퍼 칼빈주의'에 대해 연구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하이퍼 칼빈주의의 역사적 배경과 변천 과정에 대해서 연구하는 가운데 특별히 18세기 영국의 침례교 목회자였던 앤드류 풀러의 케이스를 중심으로 조사해 보았습니다. 읽으시는 가운데 내용에 문제가 있거나 오해의 소지가 있는 부분들은 지적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읽으시는 분들께 조금이나마 유익이 되면 좋겠습니다. 아래의 글에서 존칭을 사용하지 못한 점에 대해 양해를 구합니다.
하이퍼 칼빈주의와 앤드류 풀러의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복음'
서 론
하이퍼 칼빈주의는 어느 시대에 어떤 지도자에 의해서 유행했던 운동이 아니라 다채로운 현상이었다. 다시 말하면 알미니안 주의처럼 알미니우스의 신학이 추종자들에 의해 이어지는 식의 신학사조가 아니라는 것이다. 하이퍼 칼빈주의라는 이름은 사실 19세기에 이르러 명명되었다. 하지만 18세기의 고칼빈주의자들(High Calvinists)의 신학을 후대에 하이퍼 칼빈주의라고 이름지어진 것 이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1] 역사 속에서 많은 고칼빈주의자들이 정통 칼빈주의자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이퍼 칼빈주의가 어디서 유래되었는지 어떤 내용들을 가지고 있었는지 알아보고 평가하는 것은 중요한 작업이다.
이름에서도알수있듯이하이퍼칼빈주의는칼빈주의와깊은연관이있다. 그래서하이퍼칼빈주의를이해하기위해서먼저역사적정통 칼빈주의에 대해서간단히살펴볼것이다. 역사적칼빈주의의많은줄기들중에서이글은 특별히영국청교도주의를배경으로한영국침례교의하이퍼칼빈주의에집중하여전반부에서는 18세기에하이퍼칼빈주의가어떠한배경가운데서나오게된것인지알아보고자한다. 그리고 후반부에서는 하이퍼칼빈주의의교리들을앤드류풀러의책인“모든사람이받을만한복음(The Gospel worthy of all acceptation)”을중심으로평가할것이다.
1. 칼빈주의의 개념에 대한 전제
하이퍼 칼빈주의가 역사적 칼빈주의에서 어떻게 파생되었는지 알기 위해 칼빈주의에 대한 바른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그것을 위해 칼빈주의에 대한 개념을 네 가지의 전제를 정리할 것이다. 먼저 용어 정리를 하자면 '고칼빈주의(High Calvinism)'는 칼빈주의 5대 교리(특히 제한속죄)를 모두 믿으며 자유로운 복음의 권고(free offer of the Gospel)의 필요를 믿는 이들의 칼빈주의라고 분류할 것이다(풀러는 이들을 칼빈보다 더 칼빈주의적인 이들이라고 불렀음). '온건한 칼빈주의(Moderate Calvinism)'은 5대 교리를 인정하지만 제한 속죄나 불가항력적인 은혜에 대한 강조를 덜 하는 이들(풀러는 이들을 백스터주의자들이라고 부르기도 하였음)을 말할 때 사용할 것이다. '정통 칼빈주의(Orthodox Calvinism)'는 필자가 이해하는 역사적으로 정통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는 칼빈주의라고 여겨질 것이다.
두 번째로 칼빈주의의 내용을 5대 칼빈주의 교리(TULIP)만으로 축소시켜서는 안된다. 패커(Packer)는 칼빈주의 자체는 강해적이고(expository) 목회적이며 건설적(constructive)인데 칼빈주의 5대 교리는 부정적이고 논쟁적인 형태의 칼빈주의 구원론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지적하였다.[2] 그래서 칼빈주의 5대 교리 중 하나인 제한 속죄론(limited atonement)로 인해서 칼빈주의가 마치 하나님의 신성한 자비를 제한하는 것처럼 여겨지는 것은 커다란 오해인 것이다. 사실 칼빈주의 5대 교리는 16세기에 네덜란드에서 알미니안 주의를 대적하여 이루어진 신학 논쟁으로부터 만들어진 문서의 핵심 내용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 자체보다 훨씬 더 큰 다양성을 가지고 있는 움직임인 칼빈주의를 그것으로 축소하는 것은 문제가 있는 것이다.
세 번째로 칼빈주의는 칼빈의 신학만으로 요약되어 질 수도 없다. 칼빈의 신학을 대표하는 책인 기독교 강요는 역사적인 문맥으로부터 특별한 목적을 위한(ad hoc) 문서였다. 종교 개혁 당시에 칼빈은 부쩌에 의해 영향을 받았다.[3] 하지만 아무도 칼빈의 신학을 부쩌주의(Bucerism)라고 하지 않는다. 칼빈은 동시대의 종교개혁자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하지만 동시대의 종교 개혁자들의 신학들이 칼빈과 판막이는 아니었다. 예를 들면 예정론에 있어서 불링거(Heinrich Bullinger)는 복음의 메시지를 듣는 것과 그리스도를 믿는 것에 실패한 악인들의 최종적인 저주(damnation)를 받는 인상을 남기는 것을 염려하여 이중예정론의 입장을 취하는 것에 온건하였다.[4] 또한 버밀리(Peter Martyr Vermigli)는 최종적으로 잃어버릴 영혼들을 포함하는 예정론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기꺼워하지 않았다.[5] 칼빈를 뒤이은 신학자들이 모두 칼빈의 신학과 완전히 일치하는 것은 아니었다. 예를 들면, 칼빈은 하나님의 신의(decree)의 절차를 추측하는 것을 기피하였다.[6] 하지만 베자는 타락전 선택설(Supralapsarianism)과 타락후 선택설(Infralapsarianism)을 구분지었고 베자와 퍼킨스는 타락전 선택설을 주장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정통 칼빈주의자들이라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므로 칼빈의 신학이 칼빈주의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그의 신학을 칼빈주의라고 요약하는 것은 무리가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칼빈주의는 더 이상 유럽 땅에 묶여 있는 지역적인 신학이 아니다. 칼빈주의는 역사 속에서 다양한 지역에서 다양한 형태를 가지고 발전되었다. 16세기에 칼빈주의는 스위스, 프랑스, 네덜란드, 영국과 스코틀랜드에 영향을 주게 되었다. 유럽 대륙에서는 칼빈을 이어서 베자(Beza)와 잔키우스(Zancius), 버밀리(Vermigli)가 종교개혁을 계속 확장시키면서 보에티우스(Voetius)와 털틴(Turretin)을 통해 개혁 정통주의(Reformed Orxodoxy)를 뿌리내리게 되었다. 영국에서는 퍼킨스(Perkins)와 굿윈(Goodwin) 그리고 오웬(Owen) 등의 청교도들로 구성되었던 웨스트민스터 총회를 통해 만들어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통해서 청교도주의 (Puritanism)로 뿌리내렸다. 영국의 프레스톤(Preston)과 스코틀랜드의 보스톤(Boston)은 유럽대륙의 윗시우스(Witsius)의 언약신학(Federal Theology)의 영향을 받았다. 17세기에 청교도들이 미국으로 건너간 이후에는 조나단 에드워즈와 같은 정통 칼빈주의 신학자에 의해 칼빈주의는 미국에서 부흥을 이루었고 18세기의 선교운동을 통해서 칼빈주의는 전 세계 많은 나라에 전해졌던 것이다. 이러한 칼빈주의의 줄기들 중에 어느 하나가 다른 것보다 더 우월하다고 해서는 안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발전되었기 때문이다.
2. 하이퍼 칼빈주의의 발생 배경
(1)웨스트 민스터 총회에 의해 정죄당해던 신학사조들
칼빈주의에 대한 이러한 개념들을 전제하고서 하이퍼 칼빈주의의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서 17세기 영국의 역사적 정통 칼빈주의의 흐름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영국의 청교도 칼빈주의를 잘 정리해 놓은 문서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이다.[7] 네덜란드의 신학자 알미니우스는 네덜란드의 칼빈주의가 도르트 신조(1618-19) 작성에 이르러 절정에 이르렀다면 영국의 칼빈주의는 웨스트민스터 총회(1643-53)를 통해서 청교도 칼빈주의의 틀을 갖추게 되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1647)는 고칼빈주의 신학과 언약신학과 연합되고 발전된 형태이다.[8] 사실 칼빈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맺으시고 모세에 의해 확증된 은혜언약 외에 다른 언약은 없다고 했다.[9] 즉 칼빈은 행위 언약을 언급하지 않았고 은혜 언약만을 언급했으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는 은혜언약과 행위언약을 직접 언급하고 있다. 윌리엄 에임즈는 극단적인 예정론을 피하기 위해 행위 언약, 구속 언약, 은혜 언약을 구분하였다.[10] 신앙고백서는 구속 언약을 직접 언급하지는 않지만 그리스도의 중보자의 직분을 설명할 때 성부로부터 중보자로써 부르심을 받았다고 표현함으로 구속 언약을 내포하고 있다.[11]
웨스트민스터 총회에 의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이슈가 되어 정죄를 당했던 세가지의 신학들이 있다. 첫 번째로 웨스트민스터 총회는 신앙고백서를 작성하는 과정에서 도르트 신조와 같이 알미니안 주의(Arminianism)를 정죄하였다. 알미니우스는 베자의 타락전 선택설을 거부하고 하나님이 누가 믿고 구원받을지 그렇지 않을지 결과를 미리 아시고 택자와 유기자를 정하셨다고 주장하였다.[12] 예를 들면, 신앙고백서는 10장에서 효율적인 부르심을 설명하면서 구원에 있어서 수동적인 인간에게서 어떤 것을 미리 보고 작정하지 않으셨다는 것을 강조함으로 알미니안 주의를 강하게 부인하였다.[13]
두번째로웨스트민스터총회는신앙고백서를작성하는과정에서아미롤드주의(Amyraldianism)를정죄하였다. 아미롤드주의는소무르(Saumur)에서공부했던카메론(John Cameron)과브론델(David Blondel), 아미로트(Moise Amyraut)가주장한교리인데그리스도의죽음이객관적으로모든사람들을구원하기에충분하였지만주관적으로는자신의죄를회개하고그리스도를믿는사람들을구원하는데만효력이있다는가정적보편주의(Hypothetical universalism)를주장했다.[14] 다시 말하면 모든 인류가 회개하는 한 그리스도는 모든 인류를 위해 죽으셨다는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총회는 신앙고백서 3장에서 오직 택자들을 위해서만 그리스도의 구원의 효력이 미친다고 확언함으로 아미롤드 주의를 정죄하였다.[15]
마지막으로웨스트민스터총회는교리적도덕률폐기론주의를정죄하였다. 1640-60년에유행했던교리적도덕률폐기론주의(Doctrinal Antinomianism)는사트마쉬(John Saltmarsh)와이튼(John Eaton)과크리습(Tobias Crisp) 등의신학자들이택자들이태어나기도전에의롭게되었다는영원칭의(eternal justification)을주장하였는데이러한교리적도덕률폐기론주의는성화의삶을상대적으로가볍게취급하여서웨스트민스터총회에의해정죄를당했다. 예를들어신앙고백서11장에서믿음을칭의의도구라고설명하면서믿음으로의롭게된사람이가진믿음은선행의열매가없는죽은믿음이아니라사랑으로인한선행의열매가동반된다고강조하였다.[16]
(2) 하이퍼 칼빈주의의 직접적인 역사적 배경
웨스트민스터 총회에 의해 정죄 당한 세 가지 신학사조들은 흥미롭게도 역사적 정통 칼빈주의의 교리들에 대한 반응들이었다. 하나님의 작정과 예정, 구속, 회심에 대한 정통 칼빈주의 교리들에 대해 반대하거나 모자라거나 지나쳤던 이러한 신학 사조들이 유행하던 가운데 하이퍼 칼빈주의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던 역사적 배경은 두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첫 번째로 17-8세기의 철학적 배경이 이성을 중요시 하던 때였다는 것이다. 이성을 중요시하던 세대에서 두드러진 인물 세 사람이 있는데 그들은 데카르트(Rene Descartes), 뉴턴(Issac Newton) 그리고 로크(John Locke)였다. 이 세 사람들의 철학의 영향으로 종교적인 믿음 안에서도 이성의 역할을 강조하게 되었다. 툰이 분석한대로 특히 훗시(Joseph Hussey)는 이성적인 경향을 좇아 논리를 엄격히 강조하며 그의 신학에 적용시켜서 영원전 선택과 불가항력적인 은혜의 교리를 강조하며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에 대한 반대를 주장했던 것이다.[17] 길(John Gill)과 웨이만(L. Wayman)과 브라인(John Brine)도 행위언약에 대한 교리에서 논리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문으로 남는 것은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도 존 로크의 영향을 받았지만 그는 이성주의의 잘못된 점을 걸러서 받아들였기에 정통 칼빈주의 노선에 남았다는 것이다.[18]하지만위에서 언급한 이들은그노선에서벗어났다고여겨지기때문에이러한시대적배경의 잘못으로 어쩔 수 없이 하이퍼 칼빈주의가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고 말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두 번째로 신율법주의자들과 도덕률폐기론주의자들 사이의 '신율법주의 논쟁(Neonomian Controversy or Antinomian Controversy)이 중요한 시발점이었다. 1662년에 대부분의 정통 칼빈주의자들이 비국교도가 되기 위해 영국을 떠나 유럽 대륙으로 흩어지면서 영국 내에서는 알미니안주의와 아리안주의가 유행하였다.[19] 또한 시간이 지날수록 온건한 칼빈주의자들(Moderate Calvinists)이 장로교 비국교도들(Presbyterian Dissenters) 사이에서 대세를 이루게 되었다.[20] 반면에 고칼빈주의자들은 독립파와 특정한 침례교들(Particular Baptists)로 축소되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리차드 데이비스(Richard Davies)가 크리습(Tobias Crisp)의 신학을 가르치기 시작하면서 문제가 발생하였다. 1690년도에 고칼빈주의자들과 온건한 칼빈주의자들 사이에 신율법주의 논쟁이 생겼다. 가장 논쟁의 쟁점이 되었던 부분은 복음설교에서의 '구속의 정도(the extent of redemption)'였다. 예를 들면, 데이비스는 그리스도꼐서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셨는데 그 모든 사람들은 구원받을 사람들이라고 주장하였다.[21] 이 논쟁을 통해서 온건한 칼빈주의자들은 백스터(Richard Baxter)와 윌리암스(David Williams)을 따라 신율법주의(Neonomianism)를 따랐다. 그리고 고칼빈주의자들은 과 훗시와 데이비스를 따라 하이퍼 칼빈주의의 교리를 더욱 굳히게 되었다. 필자는 이 논쟁을 통해서 하이퍼 칼빈주의가 더욱 견고하게 형성되었다고 본다.
덧붙여서 신율법주의 논쟁과 유사한 복음의 자유로운 권고(free offer of the Gospel)와 구속의 정도의 사이의 관계에 대한 논쟁이 1720년도에 스코틀랜드에도 있었는데 그것은 매로우 논쟁(Marrow Controversy)라고 불리운다. 이 논쟁에서 에드워드 피셔(E.F.)가 그리스도가 모든 사람들의 죄들을 스스로 짊어지셨다라고 말한 현대신학의 정수(The Marrow of Modern Divinity)의 문장에 덧붙인 각주에서 그리스도께서 오직 택자들을 위해 죽으셨지만 에드워드 피셔가 말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죽음의 정도(extent)를 언급하는 것이라고 토마스 보스톤은 첨삭하였다.[22] 신율법주의 논쟁이 매로우 논쟁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었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비슷한 시기에 유사한 주제의 논쟁이 영국과 스코틀랜드에 있었던 것은 흥미로운 사실이다.
3. 하이퍼 칼빈주의의 교리들에 대한 평가
하이퍼 칼빈주의는 서론에서 언급한대로 다채로운 현상들이었기 때문에 한 가지 체계로 묶어서 평가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18세기에 훗시, 브라인, 웨이만과 길의 하이퍼 칼빈주의에 이의를 제기했던 앤드류 풀러의 책, '모든 사람들이 받을만한 복음(The Gospel worthy of all acceptation)'을 중심으로 하이퍼 칼빈주의의 교리들을 분석하고 평가하고자 한다. 그 책은 크게 세 파트로 되어 있는데 첫 번째 파트에서는 믿음의 본질에 대해서 논의하면서 믿음은 내향적이라기보다 외향적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두 번째 파트에서는 중생하지 않은 자들이 복음을 듣고 믿어야 하는 의무에 대한 여섯가지 이유들을 설명한다. 마지막 파트에서 풀러는 두번째 파트에서 주장한 것을 근거로 몇가지 중요한 교리들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드러내며 하이퍼 칼빈주의를 반박하였다. 필자는 하이퍼 칼빈주의의 교리들을 네 가지로 나누어 분석하고 평가할 것이다.
(1)내재적인성격의교리
하이퍼 칼빈주의의 교리들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들 중 하나는 내재적인(immanent) 성격이 있다는 것이다. 존 길은 그의 교리집에서 내재적인 입양, 내재적인 칭의, 내재적인 믿음이라고 드러나게 표현하고 있다. 먼저 하이퍼 칼빈주의자들은 믿음의 본질을 내향적(immanent)으로 여긴다. 예를 들어Wayman은 믿음의 본질은 하나님의 총애가 자신들에게 있다는 확신(a persuasion of being in a state of salvation)이라고 했다.[23] 그들은 하나님이 그의 관심(interest) 와 사랑을 어떤 특별하고 즉각적인 방식으로 드러내셨다고 믿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총애가 자신에게 있다는 확신이 믿음이라면 믿음의 주체는 특별한 은혜를 받는 자신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믿음의 목적(object)은 자신 안에 멈춰서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광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내재적인 믿음을 가진 사람은 그 믿음의 목적이 단순히 그를 행복하게 하는 그리스도의 중재에 초점을 맞추게 되므로 이기적이고 거짓이 된다고 풀러가 주장하는 것은 타당한 것이다.[24]예수님께서 훌륭한 믿음을 가졌다고 칭찬하셨던 가나안 여인의 믿음(마태복음 15:28)은 자신이 구원의 상태에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예수님께 자신의 귀신들린 딸을 고쳐달라고 요청했던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치료하시는 예수님의 완전함(all sufficiency)를 믿고 구하였던 것이다.
두 번째로 하이퍼 칼빈주의의 칭의의 교리도 내재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다. 하이퍼 칼빈주의의 중요한 축을 이루고 있는 크리스피안(Crispian) 칭의의 교리를 툰은 세가지로 요약했다.[25] 첫 번째는 영원한 은혜의 언약 안에서 택자들은 그리스도의 사역의 확실성을 근거로 의롭다 칭함을 받았다. 두 번째는 택자들은 그들의 머리이고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 칭함을 받았다. 세 번째로 택자들이 실제로 믿음을 갖게 된 것은 하나님의 눈에서는 항상 의로왔던 것을 확인하는 것이다. 그래서 존 길은 칭의를 하나님의 내재적인 행동(immanent act)라고 표현한다.[26] 칭의는 영원전부터 하나님의 마음에 자리잡았던 내재적이고 영원한 행동이기 때문에 사람의 어떠한 매력이나 선행에 상관없는 하나님의 자유로운 선물(free gift)이라는 것이다. 길은 믿음이 칭의의 본질에 아무것도 더하지 않는다고 한다. 왜냐하면 칭의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마음에 있는 완전한 행동이기 때문이며 믿음은 칭의의 증거이고 그것의 드러냄(manifestation)이기 때문이다.[27] 다시 말하면 택자 한 사람은 하나님의 판단에는 믿음의 이전에도 이 후에도 의로운 것이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것이 드러난 것일 뿐이다. 이러한 칭의의 교리를 확신하고 있는 청중들은 하나님께서 비밀스런 속삭임 (secret intimation)을 통해 자신의 칭의를 확인할 때까지 기다린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자신의 영원 칭의를 확인하는 것이 믿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서는 하나님이 영원전부터 모든 택자들을 의롭게 할 것을 작정하셨지만 그들은 성령님께서 실제로 그리스도를 정하신 때에 적용하실 때까지 의롭게 된 것이 아니라고 못박아서 표현하고 있다.[28] 다시 말하면 실제적인 칭의는 믿음을 가지는 실제적인 시간 안에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복음으로의 초청을 거부하고 하나님의 총애를 기다리는 것은 성경적인 청중의 모델이 아니다. 그리스도를 믿을 것을 권함 받지 않고 하나님의 총애를 기다리는 하이퍼 칼빈주의 회중들은 마치 요한복음 5:3 에 나오는 무리들과 같다. 즉 베데스다에 있는 호수에서 물이 움직이기를 기다리는 병자들과 같다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이 자신들을 회심시키시면 언제든 자신들이 회심하게 될 것이라고 의기양양해 한다. 풀러는 그들이 물의 움직임을 기다리면서 호숫가에 누워있는 병자들처럼 의자(pew)에 편안히 앉아서(sit at ease)하며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길에 누워서 주님의 시간을 기다리는 것 뿐이라고 말한다.[29] 하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청중의 모델은 오히려 베뢰아 교인들과 같이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는 사람들일 것이다(행17:11).
(2)복음선포에대한제약
칭의 교리에서 살펴 보았듯이 하나님이 누구를 택하였는지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드러내시지 않으셨음에도 택자들은 이미 영원전부터 의롭게 되었기 때문에 택자들만 복음을 듣고 주님께 돌아와야 한다는 것이다. 하이퍼 칼빈주의의 그리스도의 은혜의 선포 금지 교리(the doctrine of no offers of grace of Christ)는 조셉 훗시(Joseph Hussey)에 의해서 발전되었다. 그는 이 교리를 주장하는 이유를 세가지 제시한다.[30] 첫 번째로 성령님의 관점에서 설교(preaching) 은 제공(proffering)과 같은 의미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하나님의 은혜는 비저항적(irresistible grace)이기 때문에 죄인들에게 은혜와 구원을 제안하는 것은 그들이 그리스도인이 되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는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은 택자들을 위해서만 예정되었기(intended)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주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의 핵심적인 이유는 하이퍼 칼빈주의자들은 하나님의 '드러내지 않은(secret) 뜻'과 '드러내신(revealed) 뜻'을 구별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말하면 드러내지 않은 뜻은 하나님만이 아시는 뜻이고 드러내신 뜻은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알게 하신 뜻이다. 툰이 지적한대로 하이퍼 칼빈주의자들은 설교자의 의무를 성경에 나타난 명령과 초대보다 하나님의 작정의 지식으로부터 유래를 찾는다.[31] 하지만 역사적인 정통 칼빈주의는 훗시의 교리에 동의하지 않는다. 예를 들면 칼빈은 참으로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의 회심을 원하신다고 언명하시며,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인 권고를 보내신다고 했다.[32]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서는 은혜의 언약을 설명하면서 하나님이 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것을 요구하시면서 죄인들에게 생명과 구원을 자유롭게 제공하신다고 언급하고 있다.[33] 정통 칼빈주의에서 벗어난 하이퍼 칼빈주의의 이러한 교리가 설교에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에 대한 두가지 적용점이 있다.
첫 번째로 권면이나 초청이 아닌 기술적인 성격의 설교는 성경적인 설교가 아니다. 브라인(John Brine)은 마가복음 16:16를 주석하며 특별한 믿음의 획득을 구원을 얻는 원인으로, 혹은 그러한 믿음의 부족을 저주의 원인으로 내포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34] 하지만 이것은 바른 해석이 아니다. 브라인은 그저 주님의 말씀을 위협의 표현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풀러는 브라인의 해석이 단지 구원받고 저주 받는 이들의 기술적인 성격(descriptive characters)만 포함하고 있다고 비판한다.[35] Brine의 해석처럼 창세기 2:17을 해석하면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for in the day that you eat of it you shall surely die)”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은 위협으로만 그치고 심판은 없었어야 하는 것이다. 이런 기술적인 성격의 설교는 중생하지 않은 자들에게 그저 겉으로 드러나는 은혜의 수단에의 참석만 권하고 호수에서 물이 움직이기를 기다리라고 말하는 설교이다. 이러한 설교는 진리의 사랑(살후 2:10)을 전하는 것이 아니고 회중들이 진리의 사랑을 받기를 거부하고 불의한 삶을 지속하는 원인이 되며 그들의 멸망을 수반하는 것 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
두 번째로 중생하지 않은 자들에게 은혜의 복음을 전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성경이 말하는 설교가 아니다. 요한복음 6:29에 대하여 브라인(Brine)은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영생을 즐기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데 필수적이지만 중생하지 않은 자들에게 그것을 요구하는 것에 관한 근거는 없다고 주장한다.[36] 다시 말하면 그는 예수님이 중생하지 않은 자들에게 그 말씀을 하신 것이 아니었고 중생하지 않은 자들에게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그리스도를 믿는 것을 요구하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하지만 요한복음 6:26에 예수님을 찾는 자들이 빵을 먹고 배부른 까닭에 그렇게 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으로 보아 분명히 그들은 중생하지 않은 자들이었을 것이다. 풀러는 그들이 주님께 물은 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그들이 무엇을 “해야” 하는가 였기 때문에 주님은 중생하지 않은 자들에게 그리스도를 믿어야 하는 의무를 이야기하신 것이라고 바르게 주장한다.[37]
한 가지 주의해서 구별해야 할 점은 존 길은 복음 권면에 관한 입장이 훗시(Hussey)나 브라인(Brine)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면에서는 존 길을 완전한 하이퍼 칼빈주의자라고 보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첫번째 차이점은 훗시와 그를 따르는 하이퍼 칼빈주의자들은 타락전 예정론(supralapsarian)을 택한 반면에 길은 타락후 예정론(infralapsarian)을 믿었다. 두번째로 전자는 모든 사람들을 향한 복음의 선포(free offer of the gospel)를 반대하였지만 후자는 복음이 '민감한 죄인들(sensible sinners)'에게는 선포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38] 길의 주장이 다른 하이퍼 칼빈주의자들보다 은혜의 복음 선포에 대해서 더 긍정적인 면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 또한 성경적인 입장이 아니다. 사실 스펄전은 이런 입장에 대해서 강하게 부정하였다. 스펄전은 정통 칼빈주의와 하이퍼 칼빈주의의 차이는 건물의 천장이 높고 낮은 정도로 어느 교리를 강조하는 정도의 차이라는 의견을 강하게 반대하였다. 그는 하이퍼 칼빈주의를 '거짓(false) 칼빈주의'라고 주장하였다 (Iain H. Murray, Spurgeon Vs Hyper Calvinism: The Battle for Gospel Preaching (Edinburgh: Banner of Truth Trust, 1995) 참고). 필자는 존 길의 입장을 다음과 같은 이유로 반대한다. 첫 번째로 구약의 선지자들은 민감한 죄인들에게만 복음을 전하지 않았다. 칼빈은 호세아 13:14를 주해하며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실 준비가 되어있음을 보여주셨다고 언급하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기꺼이 그리고 풍성히 은혜를 권하셨다고 하였다.[39] 두 번째로 신약의 예수님과 사도들은 민감한 죄인이고 누가 민감하지 않은 죄인인지 구체적으로 분별해서 복음을 전하라고 하지 않았다. 사실 예수님은 죄인들의 친구(마태복음 11:19)라고 불리웠다. 뉴파크 스트리트를 목회했던 시절에 스펄전은 이 구절을 설교하며 민감한 죄인들만 예수님께 올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죄인들이 예수님께 올 수 있는 것이라고 강조했다.[40]
(3) 인간의 무능력에 대한 이해
타락으로 인해 무능력해진 인간은 도덕적 무능력으로 인한 무능력이지 자연적인 무능력이 아니다. 풀러는 만약 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에 대한 무능력이 죽어서 무덤에 있는 시체가 일어나서 걷는 것과 같은 성격이라면 그들이 하나님의 거룩한 책망 아래 있다고 하는 것은 모순이라고 말한다.[41] 아무도 자연적으로 할 수 없는 것은 하지 않은 것으로 비난 받지 않는다. 하지만 죄인들은 그들의 무지와 교만 부정직함과 하나님께 대한 혐오에서 비롯된 불신으로 믿지 않는 것이므로 책망을 받는다. 이러한 그들의 불신은 자연적 무능력이 아니라 도덕적 무능력인 것이다. 이러한 풀러의 신학은 조나단 에드워드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에드워드는 도덕적 무능력(moral inability)와 자연적 무능력(natural inability)를 구분한다. 그는 우리가 하길 원해도 외부적인 결함 혹은 장애나 몸의 기능의 무능력으로 자연적으로 그것을 할 수 없을 때 자연적 무능력이라고 한다.[42] 도덕적 무능력은 어떤 사람이 동기의 결함이나 경향 혹은 상황의 부족으로 인해 어떤 것을 할 수 없는 것을 말한다.[43] 에드워드는 마음의 기능과 본성의 능력 등의 모든 기능이 충분할 때 어떤 일의 불이행은 할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하고자 하는 뜻이 부족한 것이라고 주장한다.[44]
하지만 브라인(Brine)은 중생이 마음에 관한 것이지 마음의 원리에 관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45] 만약 중생이 자연적 무능력(natural inability)을 새롭게 하는 것이라면 인간은 자연적 기능들(natural faculites)을 사용할 수 없고 중생을 통해 그것들이 새롭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중생이 도덕적 무능력(moral inability)을 새롭게 하는 것이라면 마음의 기질(disposition of mind) 혹은 심령(the spirit of minds, Eph. 4:23)을 새롭게 하는 것이다.(이것들은 마음의 원리(a principle of our minds)과 같다.) 즉 브라인은 중생이 자연적 무능력을 새롭게 하는 것이라서 그것을 위해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이 없다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이퍼 칼빈주의자들은 요한복음 6:44 에 대해서 그리스도께 올 수 없는 이유가 자연적 무능력 아래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풀러는 장님임에도 예수님께 부르짖었던 바디매오의 예를 들면서 눈으로 볼 수 없는 자연적 무능력이 있어도 기꺼이 그리스도께 찾아올 수 있다고 주장한다.[46] 에드워드가 주장한 것처럼 행동이나 몸의 상태는 영혼에 종속되어 있기 때문이다.[47] 그들이 믿지 못하는 것은 자연적인 무능력 때문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이끄시는 것을 싫어하고 망설이는 그들의 도덕적 무능력이 원인이라는 풀러의 주장이 옳다. 그들의 도덕적 무능력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책임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존 오웬은 내재하는 죄악이 사람들을 믿지 못하게 한다고 주장하는데 그 이유는 그들의 소경과 같은 마음과 의지의 완고함, 감정의 육욕이 그리스도와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을 동의하기 때문이라고 했다.[48] 여기서 오웬이 말하는 소경과 같은 마음과 의지의 완고함, 감정의 육욕은 자연적 무능력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도덕적 무능력에서 비롯된 것이다.
흥미롭게도 조나단 에드워즈는 인간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이 명령으로 요구하는 것은 모순이라고 하는 알미니안의 주장에 반론하기 위해 도덕적 무능력과 자연적 무능력을 구별하였는데 풀러는 같은 원리를 사용해서 하이퍼 칼빈주의자들의 주장에 반론을 제기한 것이다. 알미니안은 믿음이 중생하지 않은 자들의 의무라고 주장하면서 하나님의 주권적인 개입(a Divine change)의 필요성을 부인하고 하이퍼 칼빈주의자들은 믿음이 중생하지 않은 자들의 의무임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주권적인 개입의 필요성만 인정한다. 그래서 두 그룹의 공통점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개입과 죄인의 의무가 서로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개입(Divine influence)의 필요가 믿음보다 앞선다고 해도 그것은 중생하지 않은 자의 즉각적인 의무와 조화를 이룬다는 풀러의 주장이 하이퍼 칼빈주의자들의 주장보다 성경적이고 더 설득력이 있다.[49]
(4) 복음과 율법에 대한 입장
풀러는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신명기 6:4)는 율법은 타락 이전의 아담이 지켜야 했고 모세가 율법을 받은 이후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켜야 했으며 그리스도의 죽음 이후의 모든 죄인들이 지켜야 하는 말씀이라고 믿는다.[50] 중생한 자들에게는 중생하지 않은 자들에게는 흔하지 않은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는 호의(Favours)가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모든 이에게 충분한 양의 하나님께 감사할만한 이유가 주어져 있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요구된다고 그는 주장하는 것이다.[51] 여기서 풀러는 백스터처럼 복음이 새로운 율법이기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중생하지 않은 자들에게도 요구된다고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풀러는 율법과 복음의 구분을 존중하면서도 사람들이 율법을 지킬 의무가 있고 또한 복음에 반응해야 할 의무도 있다고 주장하였다.[52]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율법은 그들에게도 동일하게 요구된다고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하이퍼 칼빈주의자들은 진정한 거룩(true holiness)를 강조하였다. 풀러가 하이퍼 칼빈주의자들의 가르침 안에 있을 때에(풀러는 하이퍼 칼빈주의적인 교회에서 성장하였다) 그는 거룩을 두 종류로 구분하였다. 하나는 무죄한 상태에 있는 인간에 의해 소유되어 모든 그의 후손들에게 전해지는 거룩이고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로부터 파생되어 오직 택자들에게만 전해지는 진정한 거룩이라는 것이다.[53] 그는 중생하지 않은 자들이 하나님을 창조주와 은인으로써 사랑하는 것은 영적인 활동(spiritual exercise)은 아니고 그것이 자연적인 자기 사랑의 효과라고 배웠던 것이다. 하지만 풀러가 언급한 것처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 회개와 겸손은 중생한 자들에게 뿐 만 아니라 중생하지 않은 자들에게도 여전히 요구되는 것이다.그러기에 복음은 그들에게도 전해져야 하고 그들은 복음을 믿어야 하는 의무가 있는 것이다.
풀러가 주장한 중생하지 않은 자들의 복음을 믿어야 하는 의무는 그의 개인적인 입장이 아니라 정통 칼빈주의에서 굳게 믿어온 교리이다. 칼빈은 기독교 강요 3.23.13. 에서 하나님이 모든 사람에게 그를 믿으라고 명령하셨기에 요한복음 6:65는 거짓이 아니라고 하며 복음을 전하는 설교자의 역할을 강조하였다. 아더 핑크는 그의 저널 'Studies in the Scriptures (vol. 15)'에서 의무적인 믿음(Duty-Faith)라는 제목으로 종교개혁자들과 정통적인 칼빈주의 입장에 있는 청교도들의 글들을 인용하여 '모든 사람이 복음을 믿어야 하는 의무가 있다는 것'이 정통 칼빈주의의 입장임을 강조하였다.
결 론
하이퍼칼빈주의는역사적정통칼빈주의에서벗어난형태의시스템을가지고있다. 풀러가지적한것처럼믿음의본질에대한내재적입장과복음선포의제약에관한부분은특히역사적칼빈주의와크게다른점이다. 하지만역사속에서고칼빈주의자들이하이퍼칼빈주의자들이되었다고하기에는어려움이있다. 오히려하이퍼칼빈주의는구속의정도에대한교리에서알미니안주의와아미롤드주의, 그리고신율법주의에대해서정통을고수하려는반응으로나타났다고볼수있다. 하지만고칼빈주의자들과하이퍼칼빈주의자들이다른점은복음의선포에대한입장의차이라고볼수있으며 하이퍼 칼빈주의의 교리들은 분명히 비성경적이며 정통에서 벗어났음이 분명하다. 훗시(Hussey)로인해시발된복음선포금지(No offer of grace)의적용점은이성주의가신학에지나치게적용되어나타난부작용이라고볼수있다. 존 길이 주장한 민감한죄인들에게만복음을전하는것또한정통칼빈주의의교리와 실습(practice)에서벗어난것임에분명하다. 오늘날에도여전히하이퍼칼빈주의를정통으로고수하고있는교회들이남아있다. 미국의 '원시침례교(Primitive Baptist church)'와영국의'복음기준엄밀한침례교(Gospel Standard Strict Baptist church)'가그러한예들이다. 그들의신학과실습들이 기독교에서 벗어난 이단적이라고정죄할수는없지만풀러가주장했듯이하나님의복음의자유로운선포는설교자의의무이고, 복음은 모든이에게하나님께서허락하신선물이며, 중생하지 않은 자들도 복음을 믿어야 한다는 것이역사적정통칼빈주의를따르는바른성경적원리이다. 오늘날에도 하이퍼 칼빈주의적인 경향은 어디서나 찾아볼 수 있다. 이성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은 믿지 않으려는 경향이 인간의 죄악된 본성이기 때문이다. 앞에서 살펴본 하이퍼 칼빈주의적인 교리들과 경향을 늘 주의하고 깨어서 바르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우리에게 남겨진 과제일 것이다.
[1]피터툰은그의책의두번째파트를 ‘High Calvinism becomes Hyper-Calvinism.’라고이름지었지만자세하게그의주장을풀어내는것에부족함이있다. See Peter Toon, The Emergence of Hyper-Calvinism in English Nonconformity, 1689-1765 (London: Olive Tree, 1967), 47.
[2] J. I. Packer, ‘introductory Essay’ in John Owen, The Death of Death in the Death of Christ (Edinburgh: Banner of Truth Trust, 2007), 5.
[3] ‘Calvin’ in Frank Leslie Cross and Elizabeth A. Livingstone, eds., 옥스포드 사전-교회 (The Oxford Dictionary of the Christian Church)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2005), 266?7.
[4] Cornelis P. Venema, 하인리히 불링거와 예정 교리 (Grand Rapids: Baker, 2002), 54.
[5] Kenneth J. Stewart, Ten Myths About Calvinism: Recovering the Breadth of the Reformed Tradition (Nottingham: Apollos, 2011), 59.
[6] ‘But it is right to treat this whole question (of God permitting the fall of man) sparingly, not because it is abstruse and hidden in the inner recesses of the sanctuary of God, but because an idle curiosity is not to be indulged.’ See John Calvin, 하나님의 예정에 관하여 (Louisville: Westminster John Knox Press, 1997), 125.
[7]켄달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가 칼빈의 타락한 버전(a corruption of Calvin)이라고 주장하며 그 문서는 칼빈의 신학을 반영하기 보다 베자의 신학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동의할 수 없는 부분들이 많이 있다. See R. T. Kendall, Calvin and English Calvinism To 1649 (Carlisle: Paternoster, 1997); Paul Helm, 칼빈과 칼빈주의자들 (Banner of Truth Trust, 1998).
[8] ‘The great Puritan document, the 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 combined both High Calvinism and Federal Theology, and the same fusion of dogma is found in the writings of such leading Puritans as William Ames and John Owen.’ See Toon, 앞의 책, 143.
[9] John Calvin, 예레미야 주석 (vol. IV; Edinburgh: Banner of Truth Trust, 1989), 127.
[10] Toon, 앞의 책, 21?2.
[11]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8.3. “신성과 결합된 인성을 입으신 주 예수는 성령으로 성화되고 한량없이 부음을 받았으며, 그에게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있었고, 성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그 안에 거하게 하시기를 기뻐하셨다. 이는 그가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고, 은혜와 진리로 충만하여, 중보자와 보증인의 직분을 수행하는 데 부족함이 없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이 직분은 그가 스스로 취하신 것이 아니요, 성부께서 그를 부르셔서 맡기신 것이다. 성부께서는 모든 권세와 심판을 그의 손에 맡기시고, 그것을 수행하도록 명령하셨다.”
[12] Toon, 앞의 책, 18?9.
[13]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10.2. “이유효한부르심은하나님의값없고특별한은혜로만되어지는것이며, 결코사람안에있는어떤것을미리하나님이보시고서하는것이아니다. 그점에서인간은전적으로수동적이다. 성령으로말미암아소생하고새롭게된연후에는, 이부르심에응답할수가있게되며, 또한이부르심가운데서제공되며전달된은혜를받아들일수있게된다.”
[14] Toon, 앞의 책, 22?3.
[15]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3.4. “이천사들과사람들은이와같이예정되어있기때문에, 특별히그리고변치않게계획되어있는것이며, 그래서그들의수효는확실하고확정적이므로, 그것은더하거나뺄수가없다(Neither are any other redeemed by Christ, effectually called, justified, adopted, sanctified, and saved, but the elect only).”
[16]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11.2. “이같이그리스도와그의의를받아들이고의존함에있어서믿음은칭의의유일한방편이다. 그렇지만믿음은의롭다함을받은사람안에서단독으로있는것이아니라, 언제나모든다른구원의은사들을수반하고있는것이며, 그것은죽은믿음이아니라, 사랑으로역사하는믿음이다. ”
[17] Toon, 앞의 책, 147.
[18] Paul Helm and Oliver Crisp, Jonathan Edwards: Philosophical Theologian (Aldershot: Ashgate Publishing, Ltd., 2003), 52.
[19]윌리암휘스턴(William Whiston)과사무엘클락(Samuel Clarke) 아리안주의(Arianism)를주장했던대표적인인물들이었다. See Toon, 앞의 책, 37.
[20]필립 도드리지(Philip Doddridge)는 온건한 칼빈주의를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그는 존 로크의 철학에 영향을 받았고 예정과 제한 속죄 혹은 불가항력적인 은혜에 대한 비중을 덜 두었다. See Toon, 같은 책, 41.
[21] ‘Christ died for all those who will be saved.’ See Richard Harding Davis, The True Spring of Gospel-sight, and Sense of Sin, 1693, iv; Curt. D. Daniel, ‘하이퍼 칼빈주의와 존 길(Hyper-calvinism and John Gill)’ (Ph.D., University of Edinburgh, 1983), 535.
[22] ‘Our Lord Jesus Christ died not for, nor took upon him the sins of all and every individual man, but he died for, and took upon him the sins of all the elect...no other doctrine is here taught by our author touching the extent of the death of Christ.’ See Edward Fisher and Thomas Boston, 현대신학의 정수 (Edinburgh: John Boyd, 1828), 85.
[23] L. Wayman, A Defence of the Further Inquiry after Truth, 1739, 13; Andrew Fuller, The Gospel Worthy of All Acceptation (Grand Rapids: Sovereign Grace, 1961), 13.
[24] Fuller, 같은 책, 15.
[25] Toon, 앞의 책, 60.
[26] John Gill, A Body of Divinity (Grand Rapids: Sovereign Grace, 1971), 203.
[27] Gill, 같은 책, 204.
[28]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11.4. “하나님께서는, 영원전부터택함받은모든사람들을의롭다하시려고작정하셨다. 그리고그리스도께서는, 때가차매그들의죄를위하여죽으시고그들을의롭다하심을위하여다시살아나셨다. 그렇지만, 그들이의롭다함을받는것은성령께서때를따라실제로그리스도를그들에게적용시키실때에비로소가능하다.”
[29] Fuller, 앞의 책, 67.
[30] Joseph Hussey, God’s Operations of Grace, 1792, 37, 84, 91; Toon, 앞의 책, 80.
[31] Toon, 같은 책, 130.
[32] Institutes 3.3.21. See John Calvin, 기독교 강요 (Massachusetts: Hendrickson, 2008), 399.
[33]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7.3. “인간이타락함으로말미암아행위언약으로는생명을얻을수가없게되어버렸기때문에, 주께서두번째언약을맺으시기를기뻐하셨다. 이언약은일반적으로?은혜언약?이라고불리운다. 그언약에의하여주님은죄인들에게예수그리스도로말미암아생명과구원을값없이주셨다. 그러나그들이구원받도록하기위해서, 그리스도를믿는신앙을그들에게요구하시고, 생명에이르도록작정되어있는모든자들에게그의성령을주시어, 그들로하여금기꺼이그리스도를믿을수있게하실것을약속하셨다.”
[34] John Brine, Motives to Love and Unity Among Calvinists, who Differ in Somepoints (by John Ward, George Keith and John Eynon, 1754), 31?2; Fuller, 앞의 책, 38.
[35] Fuller, 같은 책, 39.
[36] Brine, Motives to Love and Unity Among Calvinists, who Differ in Somepoints, 42; Fuller, 같은 책, 25?6.
[37] Fuller, 같은 책, 26.
[38] ‘True faith, in sensible sinners, assents to Christ, and embraces him not merely as a Saviour of men in general; but as a special, suitable Saviour for them in particular.’ See Gill, 앞의 책, 736.
[39] ‘God does not here simply promise salvation, but shews that he is indeed ready to save... but that the obsinacy of man rejects the grace which has been provided, and which God willingly and bountifully offers...’ See John Calvin, 호세아 주석 (Edinburgh: The Banner of Truth Trust, 1986), 476?7.
[40] ‘It is as sinners, not as sensible sinners, not as repenting sinners, that Jesus died for us. Sinners as sinners, Jesus Christ has chosen, redeemed, and called; in fact, for them, and for only such, Jesus Christ came into the world.’ See Charles Haddon Spurgeon, 1862년 메트로폴리탄 터버너클 설교집 (Edinburgh: Banner of Truth Trust, 1991).
[41] Fuller, 앞의 책, 35.
[42] ‘We are said to be naturally unable to do a thing, when we can’t do it if we will, because what is most commonly called nature don’t allow of ti, or because of some impeding defect or obstacle that is extrinsic to the will; either in the faculty of understanding, constitution of body, or external objects.’ See Jonathan Edwards, The Freedom of the Will (ed. Paul Ramsey; New Haven: Yale University, 1957), 159.
[43] Edwards, 같은 책, 159?60.
[44] ‘Therefore, in these things to ascribe a nonperformance to the want of power or ability, is not just; because the thing wanting is not a being able, but a being willing. There are faculties of mind, and capacity of nature, and everything else, sufficient, but a disposition: nothing is wanting but a will.’ See Edwards, 같은 책, 162.
[45] ‘This renovation is spoken of the mind, and not of a principle in the mind.’ See Brine, Motives to Love and Unity Among Calvinists, who Differ in Somepoints, 22; Fuller, 앞의 책, 50.
[46] Fuller, 같은 책, 57.
[47] ‘The motions or state of the body are matter of command, only as they are subject to the soul, and connected with its acts.’ See Edwards, 앞의 책, 302.
[48] ‘Blindness of mind, stubbornness of the will, sensuality of the affections, all concur to keep poor perishing souls at a distance from Christ.’ See John Owen, The Works of John Owen (ed. William H. Goold; vol. VI; Edinburgh: The Banner of Truth Trust, 1987), 301
[49] Fuller, 앞의 책, 61.
[50] Fuller, 같은 책, 31.
[51] Fuller, 같은 책, 39.
[52] ‘The goodness of God, for instance, though it is not a law or formal precept, yet virtually requires a return of gratitude...and the law of God formally requires it on his behalf. Thus it is with respect to the gospel, which is the greatest overflow of Divine goodness that was ever witnessed.’ See Fuller, 같은 책, 32?3.
[53] Toon, 앞의 책, 151.
첫댓글 대단하십니다. 저는 풀러 목사님의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복음’을 너무 읽고 싶은데 영어가 어려워 못읽고 있었습니다. 지평서원에서 아마 번역을 해 놓으셨는데 출판은 안하는거 같습니다ㅠ 직접 원어로 읽으신건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