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보(業報)와 윤회(輪廻)
업(業)’이란
인도 힌두교와 불교에서 사용되는 카르마(karma)라는
어휘를 한역한 것으로, ‘행위(行爲)’를 의미한다.
그런데
그냥 단순한 해위가 아니라 ‘의도적인 행위’, ‘의도된 행위’,
즉 ‘마음먹고 행한’ 행위를 뜻한다.
의도해서
(마음먹고) 몸으로 행위하고, 입으로 말하고, 마음으로
생각하는, 그 모두가 업의 영역에 포함된다.
그래서
신(身)⋅구(口)⋅의(意) 삼업(三業)이라 한다.
그런데 ‘의도된 행위’는 반드시 그에 따른 어떤 결과를 낳는다.
이 결과가 소위 업보(業報=과보)라는 것이다.
좋은 의도의 행위는 좋은 결과(善果)를 낳을 것이고,
나쁘게 의도된 행위는 나쁜 결과(惡果)를 낳을 것이다.
선업은 선과를 낳고, 악업은 악과를 낳는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업이란 행동 혹은 행위를 의미하고,
또한 더 나아가서는 그 행위에 대한 책임까지도 의미했다.
즉,
업의 과보인 업보(業報)까지도 책임져야 한다는 말이다.
이를
세분해서 말하면, 업(業)은 원인, 보(報)는 결과를 의미한다.
모든 지각 있는 존재,
불교식 용어로 유정(有情)들은 이처럼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행위와 결과와 원인의 연쇄에 묶이게 된다는 것이다.
심지어 태어남 자체 또한 결과를 부르는 한 가지 행위로 볼 수 있다.
게다가
인도철학의 관점에서는 한 개체가 죽더라도
그대로 소멸하지 않고 윤회하므로,
살면서지은 업으로 인한 업보는
죽음 이후까지도 영향을 미친다고
유정들은
저마다 자기의 습관과 생각에 따라,
어떤 행위를 해야 하는 매 순간마다 선택을 한다.
선택함으로써 새로운 행위가 발생한다.
새로운 행위는 행한 즉시 과거의 것이 되고,
그것은 미래에 영향을 끼치는 업으로 쌓인다.
물론 사람은 이러한 업을 헤아릴 수 없지만,
불교나 힌두교
등에서는 어떤 경지를 성취한 자들은 신통력으로 과거에 쌓은
업과 그로 인해 미래의 영향까지 모두 헤아릴 수 있다고 한다.
따라서
업이란 ‘의도된 행위’이지만 반드시 어떤 결과를 낳으므로,
결국 업이란
“어떤 결과를 낳는 원인이 되는 의도된 행위”라고 정의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업이란 어떤 행위의 결과(과보/果報)가 나타날 때,
그 결과의 원인이 된 행위라 할 수 있다.
윤회(輪廻)란
간단히 말해서 수레바퀴가 돌 듯 우리 인생이 한없이 과거로부터
무궁한 미래를 향하여 나(生)고 죽음(死)을 반복한다는 뜻이다.
이렇게
윤회를 하는 데는 반드시 윤회의 주체가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업(業)이다.
모든 존재는
다 자기가 지은 업이 주체가 되어 그것을 인(因)으로 하고
다른 조건을 연(緣)으로 해서 윤회를 한다.
업(業)이란
세력 또는 행위란 뜻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하는 일체의 행위는 세력으로 잠재했다가 다른 조건을 만나면
결과를 낳으며 다시 그 같은 순환과정을 반복적으로 이끌어간다.
즉, 윤회설은
생명체가 ‘욕계, 색계, 무색계’의 삼계라든가,
또는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인간, 천상’과 같은
육도를 번갈아
탄생과 죽음을 거듭하는 과정을 의미하는데, 원시 신앙의
형태로 원시시대부터 있어왔던 것이다.
불교에서는
이를 수용해 업보와 윤회사상을 결부시켜
업보 윤회사상을 창조했던 것이다
그런데
업보 사상에서는 원인과 결과와의 연쇄가
반드시 동일 인격 내에 한정되는 것으로
자기 일신에
한정되는 것으로서, 스스로 행해 스스로 그 결과를 부른다고
하는 자업자득(自業自得)의 원칙이 있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원인으로서의 선악의 행위가 그 결과를 이끄는 것은
그 사람이 살아있는 동안에만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인과의 연쇄는
전세(前世) ‧ 금세(今世) ‧ 내세(來世)라고 하는
삼세에 걸쳐서 행해지는 것으로 돼 있다.
즉, 윤회설은
삼세에 걸쳐 다시 태어나고 다시 죽음으로 해서
여러 세계를 거쳐 가는 것을 의미한다.
불교에서는
삼계(三界)와 육도(六道)에 걸쳐 윤회한다고 한다.
업보 윤회설에는
많은 장점이 있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것을 숙명론적으로
이해하고 체념할 수 있는 소지도 많다.
현재의
상황은 과거의 행위로 설명될 수 있지만 그러나
현재의 삶은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자유의지와 노력에 따라 운명도조금 씩 변화할 수 있다.
즉, 수행 해탈(修行解脫) 사상이다.
그리고
이러한 윤회설에 있어서, 윤회의 주체로서 영혼을
인정하지 않고, 업 자체가 윤회한다고 하는 것이다.
그것이 업보 윤회(業報輪廻) 사상이다.
붓다는
삶의 지침으로 '십선(十善)'과 '십악(十惡)'
이라는 가르침이 전해진다.
우리가
열 가지 행위를 따라 선을 짓기도 하고
악을 짓기도 한다고 하였는데
이 열 가지는
몸으로 짓는 셋, 입으로 짓는 넷, 뜻으로 짓는 셋으로 나눈다.
몸으로
짓는 악은 살생, 도둑질, 음행이고, 입으로 짓는
악은 거짓말, 꾸며낸 말, 이간질, 욕설이고,
마음으로 짓는 악은 탐욕, 성냄, 어리석음이다.
이 열 가지를 저지르면 '십악',
하지 않으면 '십선'이라 부른다.
악업의 반대는 선업(善業)이 된다.
속담에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라는 말이 있듯이
선인(善因)은 반드시 선과(善果), 악인(惡因)은 악과(惡果)를 가져온다.
그러나
우리 주위에는 못된 짓을 하고도 잘 사는
사람이 있는데 그것은 어찌 된 일인가.
인과는 없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과보를 받는 시기가 다르다.
예를 들면
비옥한 땅에 좋은 씨를 뿌리면 좋은 열매가 맺는다.
그러나
씨는 좋으나 밭이 나쁘면 열매가 좋지 않다.
또 밭은 좋으나 씨가 나쁜 경우,
씨도 밭도 다 나쁜 경우도 있을 것이다.
좋은 일을 했든
나쁜 일을 했든 과보를 바로 받는 것도
순현업(順現業)이라고 한다.
그리고
내 생에 받는 것을 순생업(順生業)이라 하고, 그보다 더
나중에 받는 것을 순후업(順後業)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위에서 언급했듯이 종자(因)와 밭(緣)이 어떻게 결합하고
작용하느냐에 따라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렇게 업(業)을 짓게 하는 원동력은 무엇인가.
이 업을
도와서 고통의 과보를 낳게 하는 것은 다름 아닌 미혹이다.
우리의
마음이 밝지 못하고 흐려서 악업을 짓고 악업으로
말미암아 괴로움의 결과를 받는 것이다.
미혹(迷惑)은 다른 말로 번뇌라고도 한다.
인간의 심신을 어지럽히고 괴롭히기 때문이다.
번뇌는 성질로 보아 선천적인 것과 후천적인 것이 있다.
선천적인 것은 구생혹(俱生惑)이라 하고
후천적인 것은 분별 혹(分別惑)이라고 한다.
이 두 가지
번뇌는 다시 1백8가지로 세분되어 흔히 108번뇌라고 한다.
염주알을
108개로 만들어 돌리는 것은 마음을 정화시켜
108의 번뇌를 끊고자 하는 뜻이다.
이처럼
인생은 혹(惑), 업(業), 고(苦)를 되풀이 하면서 살아가는데
시간적으로 전생(前生), 금생(今生), 내생(來生)을 되풀이한다.
또는 어제, 오늘, 내일로 생각할 수 있다.
어쨌든 무한한 과거에서 미래로 반복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공간적으로 육도(천상, 인간, 아수라, 축생, 아귀, 지옥)을 윤회한다.
다시 말하면
감옥이 지옥이요, 투쟁이 아수라요, 굶주림이 아귀요,
쾌락이 천상이요, 본능에 의한 행동이 축생이다.
이성에 의한 행동이 인간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인간은 실제로 하루에도 몇 차례씩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의 삶을 반복하고
천상과 인간은
실제로 하루에도 몇 차례씩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의 삶을
반복하고 천상과 인간의 모습을 갖는다.
그리고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이 같은 삶은 반복적으로 계속된다.
삼세 육도의 윤회란 사후의 세계에서나 있는 것이 아니다.
불교의
가르침은 삼세 육도의 윤회에서 벗어나자는 것이다.
삼세 육도의 삶이란 곧 고통의 삶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선을 행하고 싶어 하지만, 무심결에 악을 짓는 일이 많다.
말을 할 때도, 생각을 할 때도, 행동할 때도
자신을 돌아보지 않으면 금방 욕망에 따라,
화를정당화하기 위해서 또는 어리석기 때문에 악한 행동을 저지르게 된다.
선을 짓기 위해서는 먼저 악을 멈추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선행은 거창한 것이 아이다.
생명을 해치지 않고, 남의 것을 탐내지 않으며,
욕망을 제어하는 것부터 시작된다.
진실을 말하고,
험담을 멀리하며, 욕설을 삼가고, 꾸며낸 말로 사람을
미혹시키지 않는 것 또한 중요한 수행이다.
현대사회에서도 이 가르침은 여전히 유효하다.
살생이나 도둑질만이 악이 아니다.
온라인에서 남을 해치는 말, 이간질하는 댓글,
확인되지 않은 정보를 퍼뜨리는 일도 모두 십악 가운데 하나이다.
마찬가지로
진실한 말 한마디, 누군가를 이해하려는 마음,
무심한 욕설을 멈추려는 노력도 모두 십 선의 길이다.
선도 악도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이 자리,
내가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는가에 달려 있다.
매 순간 선택이 나의 정신적, 영적 웰빙을 결정하는 것이다.
오늘
하루만이라도 한 가지 악을 멈추고, 한 가지 선을 짓는다면,
그만큼 진실에 다가선 것이고 그리고 그렇게
살아야 내 마음이 평화롭다.
고맙습니다
[출처] 업보(業報)와 윤회(輪廻)|작성자 화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