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 6:14~29)
예수의 소문을 들은 헤롯왕이
예수가 자신이 이미 죽인 세례요한의 빙의라고 여긴다.
세례 요한에 대해서는 헤롯왕에게 많은 회한이 있었을 것이다.
오늘 말씀 해설에서 헤롯왕을 매우 간단하고 명확하게 규정한다.
'방탕과 탐욕과 살인,'에 묻혀 살았던 인물이라고.
사람은 죄성을 가지고 있고
죄에 굴복하더라도 어느 정도 내밀하게, 은밀하게 그 죄성을 실행하다가
종국에는 넘치는 물을 감당할 수 없는 저수지 방벽처럼
썩어 문드러짐이 점차 드러나고 이내 흉물 자체를
만방에 노출시키고 만다.
그래서 빙산의 일각처럼 조금의 흉물이 드러날 때 즈음 되면
이미 빙산의 몸체가 존재한다는 것을 암시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아무튼 방탕과 탐욕과 살인을 흔하게 하는 헤롯의 인생은
이미 자신의 흉물스런 죄에 대한 악한 열매들을
여과 없이 드러내는 가장 처참한 수준의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는 일말의 양심이 있었다.
그는 요한을 의로운 사람임을 지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아무리 죄에 썩어 문드러지는 단계에 있더라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심어 놓은 양심의 불꽃은 절대 꺼지지 않는다.
언론에서 천인공로할, 짐승 같은 범죄를 저질러
일체의 교화가 불가능할 것 같은 사람도
감옥에서 변화하는 과정을 봐도 그렇다.
하나님이 심어 놓은 공의와 양심의 생명력은 참 대단한 것이다.
여기서 무서운 것은
그렇게 때문에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에 대한 책임을
우리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양심의 지각이 절대 꺼지지 않는다는 것은
그만큼 단단하게 우리가 하나님의 공의와 양심에 따라
선택하고 행동할 수 있는 충분하고도 남음이 있는 자질을 허락하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 시스템을 때론 비판한다.
왜 천국과 지옥을 만들었냐고, 왜 선택권을 우리에게 부여해서
영원한 죽음에 처할 수 있는 위험한 기로에 서게 했냐고.
모든 것을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가 선량함과 하나님의 공의를 선택할 수 있는
충분한 조건을 허락하셨다는 것이다.
지구와 우주의 거시적인 모든 것과
내 안에 있는 것, 후미진 곳에 보이지 않는 미시적인 것 모두,
정직한 시각으로 보면 거부할 수 없는
하나님의 신비함과 손길이 느껴지지 않는가?
그런 물리적인 것보다 더 impact 있는 것은,
내 안에서 불일듯하게 작용하는 사랑의 추구,
은혜의 경험들이다. 전인격적으로 쏟아지는 하나님을 향한
하나님에 대한 역사들이 충분히 하나님의 공의를 따라야 하는
'이유'를 제공한다.
그러나 불행히도 헤롯은 알면서 그릇되게 행동하다.
첫번째는 변명의 여지 없이 그의 책임이지만
주변의 세상적 유혹과 관성도 큰 역할을 한다.
친인척 중에서 악한 의도를 가진 이가
헤롯을 조종하고, 헤롯은 그 세속적 관성과 세상의 약속에
수갑채워져 악랄하고도 불의한 일을 결정하는 기능을 하는 것이다.
이렇게 세상의 압박과 덫, 관성은 무섭다!
쉽게 이론적으로 이야기 하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감하게 'No' 또는 'Never'라고 말하고 거부할 수 있는
지각과 영적 각성이 되어 있었어야 하는데,
평소부터 준비되지 않고서는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그러니 옳고 그름을 떠나서 죄의 흐름대로 이끌리게 되는 것이다.
오늘 말씀해설 중에서 레베카 피펏이라는 분이 한 말이 있다.
'남들에게 하나님 심판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은, 크리스천으로서
할 수 있는 가장 큰 무례한 행위가 아니라 가장 큰 사랑의 행위다.'
크리스천이 세상에 더 관심을 두니,
세상에서 누리는 복에 대해서 설교와 메시지가 집중되는 경향이 있는데
오늘 헤롯의 이야기를 접하면서
분명하게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도 인식되고 전파되어야 함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다.
심판, 육신의 죽음, 세상에서의 재난과 고통.
이것들은 회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관건은 회피가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어떻게 소화하는가?
온전하게 극복할 수 있는 방도가 무엇인가?를 직면해야 한다 .
그 직면에 가장 적합한 메시지는 '예수님의 부활'이다.
부활은 우리가 그런 고통스런 이슈들로부터 극복을 가능하게 하는
가장 강력한 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