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自我와의 疏通 -자신의 내면을 향한 두 가지 목소리-
姜玟求*
目 次 1. 서론
1. 서론
소통은 자아와 세계 간에 이루어지는 행위다. 그런데 자신을 他者化할경우에는 자신도 엄연한 소통의 대상이 된다. 사람들이 가장 많이 소통하는 것은 의외로 자신이다. 아무리 남과 어울리기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할
自贊은 자신의 화상에 붙이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그림으로 그려진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자신을 타자화하기에 용이하다. 또 自贊 중에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자신에게 말을 하는 것도 있다.
본고는 선행 연구의 결과를 계승하는 한편 自警, 自誡류와 自贊 그리고 自笑, 自嘲류의 글에서 이루어진 자아와의 소통 양상을 분석하여 현대인에게 바람직한 자아와의 소통 방법을 제시하고자 한다. 이에 본고는 고려의 문인으로 이규보, 조선 중기의 문인으로 신흠, 조선 후기의 문인으로 송시열, 윤기를 연구대상으로 설정하였다. 이들은 당대의 문인으로서 대표성을 지닐 뿐만 아니라 自警, 自誡류와 自贊 그리고 自笑, 自嘲류의 3종류 글 중 2가지 이상을 창작하였다. 이들 3가지 글을 동시에 살펴보는 이유는, 그것들의 기능이 본원적으로 다르기에 그 형식과 내용이 명백히 구분되지만, 뛰어난 사상가와 작가들의 경우는 문체적 규범을 넘나드는 현상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자신의 내면과 진솔하게 소통할 때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본고는 이와 같은 점에 착안하여 자신과 소
* 경북대학교 한문학과 교수. 1) 自贊류에 대한 선행 연구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2. 李奎報의 자아 소통 - 진솔과 해학
고려시대의 대문호인 李奎報(1168~1241)는 자가 春卿이고 호는 白雲居士ㆍ止軒ㆍ三酷好先生이며, 벼슬은 정당문학을 거쳐 문하시랑평장사 등을 지냈다. 그는 뛰어난 재능을 갖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뜻을 제대로 펴지 못하고 최씨 무인 정권 하에서 문필로 종사하였다. 그러나 여러 차례의 무고로 인한 면직과 좌천은 이규보의 마음 깊은 곳에 明哲保身을 자리 잡게 하였다.
?自誡銘? 총애하는 처첩도 한 이불을 덮으면서도 생각은 다르다. 하인이라고 말을 경솔히 하지 마라. 겉으로는 뼈가 없는 듯하나 속으로는 어떤 생각이 있다. 더구나 나와 친근한 사람도 아니고 내가 부리는 사람도 아닌 자에게야!3) 3) 無曰親?而漏吾微, 寵妻嬖妾兮, 同衾異意, 無謂僕御兮輕其言, 外若無骨兮, 苞蓄有地, 況吾不?近不驅使者乎!(『東國李相國集』, ?自誡銘?.)
위의 글은 스스로를 경계하는 ?自誡銘?이다. 이규보는 이 글에서 스스로에게 말조심을 하라고 당부하고 있다. 이 글은 여타 사대부들의 自誡와 달리 구체적 경험이 바탕에 깔려 있는 느낌을 강하게 받는다. 일반적인 自誡는 처세에 대한 구체적 지침보다는 원론적 도덕률이 강조되고 있기 때문이다. 위 ?自誡銘?의 주제는 ‘말조심’이다. 自誡의 상당수 작품들은 말조심을 주제로 하거나 일부 내용으로 들어 있다. 그 내용은 경전에 근거하기에 대체로 관념적이다. 그런데, 이규보의 ?自誡銘?에서는 가까운 사람에게 자신의 은밀한 이야기를 하였다가 그것이 빌미가 되어 곤경을 겪고 아랫사람에게 경솔하게 이야기하였던 것이 앙갚음으로 되돌아왔던 경험과 회한이 느껴진다. 그러한 정황은 다음에 소개할 ?自嘲? 시에서 좀 더 분명해진다.
?자조??自嘲? 4)『東國李相國集』, ?自嘲?.
이규보는 위의 ?自嘲?에서 자신을 안타까운 심정으로 꾸짖고 있다. 자신이 말을 하고 있는 사람은 어깨가 도드라질 정도로 야위고 머리는 성근 병자로, 외모부터 애처로운 심정을 자아낸다. 이규보는 자신에게 “도대체 누가 너더러 혼자서만 정직하게 살라고 하여 시류에 영합하여 처신하지 못하게 했는가?”라고 따져 물었다. 잘못한 일이 없고 열심히 노력함에도 불구하고 예상치 불한 불행이 닥치는 이유는 시기하는 이들의 모략과 모함 때문이다. 비록 터무니없는 거짓말일지라도 여럿이 반복해서 말하면 결국 사실로 둔갑한다는 ‘三人成虎’의 고사와 다를 바 없게 된다. 이규보는 모함으로 곤란을 겪은 원인이 자신의 지나친 청렴결백에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는 대부분의 사대부들이 반복적으로 늘어놓는 원론적 도덕률을 말하고 싶지 않았다. 오히려 그러한 원론적 도덕률이 자신을 불행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대머리의 자조??頭童自嘲?
가진 것이라곤 똥똥한 배 하나 徒將一腹? 5)『東國李相國集』, ?頭童自嘲?.
이규보는 해학 넘치는 작품을 즐겨 썼는데, 위의 작품처럼 자신을 소재로 삼은 것이 특히 익살맞다. “해학은 선의의 웃음을 유발한다는 점에서 조롱이나 풍자와 구분되고 인간에 대한 동정과 이해, 긍정적 시선을 전제로 한다.”고 한다.6) 그러나 해학에 대한 이와 같은 설명은 全面的이지 못하다. 6) 이상섭,『문학비평용어사전』, 민음사, 1995.
自嘲와 같이 자신을 조롱의 대상으로 삼을 경우에는 자신에 대한 긍정과 이해뿐 만 아니라 긍정적 시선이 전제되며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않기 때문에 선의의 웃음을 유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기의 단점을 웃음거리로 삼을 때 그것을 듣는 사람들은 그의 단점을 웃음으로 승화시킨다.
위의 시는 이규보가 자신의 대머리를 스스로 조롱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머리가 벗겨지면 부끄러워하고 감추기 마련이건만 이규보는 자신의 단점을 시로 지어 세인들의 웃음거리로 제공하였다. 그는 대머리를 민둥산에 비유하면서 빗질할 필요도 없고 귀밑머리와 수염만 없다면 늙은 중과 다를 바 없다면서 한껏 조롱하였다. 게다가 볼품없는 대머리를 갓으로 가리고 위엄을 부리느라 짐짓 喝道하는 卒奴까지 거느렸지만, 사실은 나라 무능한 대머리가 가진 것이라곤 하는 일 없이 국록만 많이 먹어서 똥똥해진 배 하나 뿐인데다가 낯이 두꺼워
?丁而安이 그린 내 화상에 자찬함? ?丁而安寫予眞, 自作贊.?
엄연히 사람 같구나 儼然似人 7)『東國李相國集』, ?丁而安寫予眞, 自作贊.?
위의 작품은 선비화가인 丁鴻進이 그려준 화상에 붙인 자찬으로, ?頭童自嘲?와 자못 대조적이다. ?丁而安寫予眞, 自作贊.?이나 ?頭童自嘲?나 둘 다 자신을 대상으로 쓴 작품이지만, ?頭童自嘲?는 외모를 선명하게 부각시킨 반면, ?丁而安寫予眞, 自作贊.?은 1,2구에서만 외모에 대하여 말하고 있을 뿐이다. ?頭童自嘲?에서는 대머리에 배만 볼록하게 나온 자신을 통렬하게 비난하고 있지만, 그런 모습을 바라보는 시각은 오히려 따스하다. 반면 ?丁而安寫予眞, 自作贊.?은 그런 단점은 모두 가리고 수염은 호방하게, 입술은 생기 있게 그렸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이규보의 시각은 오히려 냉정하기만 하다. 그림이라는 대상을 바라보고 던지는 말이기에 좀 더 객관적일 수 있다. 이규보는 화상에 그려진 자신의 모습은 60년간 부침을 경험한 보잘것없는 존재로 허망한 꿈과 같다고 말하고 있다. 이처럼 비록 그림이지만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하는 말은 좀 더 관조적이고 냉정한 특성이 있다.
3. 申欽의 자아 소통 - 시련과 맞선 절대 자유
申欽(1566~1628)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관직은 영의정에까지 이르렀다. 호는 玄軒? 玄翁? 放翁인데, 象村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는 7살의 어린 나이에 부모를 여의었으나, 학문에 전념하여 10대에 주요 전적을 독파하였으며 벼슬하기 전부터 이미 文名을 떨쳤다. 신흠은 장중한 성품과 뛰어난 문장으로 신망을 받으면서 항상 文翰職을 겸하여 외교문서의 제작, 詩文의 정리, 각종 의례문서의 제작에 참여하는 등 文運의 진흥에 크게 기여하였다고 평가되며 조선 중기 한문학의 正宗으로 일컬어진다.
?자찬? ?自贊?
8)『象村稿』, ?自讚?.
위 ?자찬?의 핵심어는 ‘玄’이다. 신흠은 자호를 玄翁이라 할 정도로 ‘玄’에 심취되어 있었다. ‘玄’은 형상할 수 없는 경지이지만, 굳이 玄이 체현된 모습을 그려본다면 어떤 것일까? 안석에 기대어 있을 때는 그 형체가 맥없이 쓰러진 듯하고 갓을 벗고 자리에 누워 있으면 아무런 생각도 없이 멍한 모양이다. 이는 그 무엇도 집착하지 않고 그 무엇에도 구속되지 않은 상태를 묘사한 것이다. 외물로부터 독립된 경지이기에 비록 육체는 세상 사람들과 섞여 무리지어 살고 벼슬살이를 하고 있어도 정신은 물속에 비친 달과 같이 세상 밖에서 노닌다고 하였다. 몸은 현실에서 격리되거나 무리에서 고립되지 않으면서도 절대적 자유를 구가하고 싶었던 신흠이 스스로에게 주는 이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신흠의 그와 같은 바램은 理想, 그 以上이 아니었다.
?玄翁自贊 竝序?
아, 이러하니 어찌 늙지 않을 수 있겠는가! 거울을 가져다 스스로를 비춰 보니 딴 사람 같다. 이로 인해 自贊하였는데 사실은 스스로를 조소한 것이다.
玄翁이라고 한다면 이가 빠지고 머리가 벗겨지고 얼굴이 수척하고 몸이 야위었으니 지난날의 현옹이 아니다. 현옹이 아니라고 한다면 진흙탕에서도 더러워지지 않고 곤궁해도 더욱 형통하니 지난날의 현옹이다. 현옹이 아니라고 한 것이 옳은가? 맞다고 한 것이 그른가? 내가 또 나를 잊어버리면서도 지난날의 나를 잃지 않았으니, 내가 이른바 지난날의 현옹이 아니라고 한 것 천지는 하나의 손가락이고 만물은 한 마리의 말이다. 四大가 비록 합해졌어도 무엇이 진짜고 무엇이 가짜인가? 아! 그대 현옹은 하늘에 대해서는 능하고 인간에 대해서는 능하지 못한 자인가? 하늘이건 인간이건 내 장차 큰 조화 속으로 돌아가련다.9)
9) 余年五十二, 固衰矣, 而然非甚老者也, 而罹文罔已五載, 削仕版矣, 下理矣, 放歸矣, 竄謫矣, 一辜而四律竝矣. 文致不足則又貝錦焉, 噫! 如之何不老? 攬鏡自見如他人也, 因以自贊, 實自嘲也.
以爲非玄翁也, 則泥而不滓, 困而愈亨, 是昔之玄翁, 其非者是耶? 其是者非耶? 吾且忘吾, 而不失其故, 吾所謂非昔之玄翁者, 豈非是昔之玄翁? 天地一指, 萬物一焉, 四大雖合, 孰眞孰假? 噫! 爾玄翁, 能於天而不能於人者耶? 天耶人耶? 吾將歸之大化.(『象村稿』, ?玄翁自贊?.)
신흠은 ?玄翁自贊?이 52살(1617)에 지은 글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는 이글에서 “5년 전에 법망에 걸려서 한 가지 죄에 적용된 벌이 무려 4가지나될 뿐만 아니라 그것도 모자라서 참소와 모함이 이어지고 있으니 어떻게 늙지 않을 수 있겠냐?”고 되물었다. 시간을 따져본다면, 신흠이 선조로부터 永昌大君의 보필을 부탁받은 遺敎七臣이었던 까닭에 1613년 계축옥사에 연루되어 파직된 사건을 이르는 듯하다. 또 1616년에 신흠은 仁穆大妃의 폐비 및 이와 관련된 金悌男에의 加罪와 함께 다시 논죄된 뒤 춘천에 유배되었다. 그리고 1621년에 이르러서야 사면되었다. 그러므로 이 ?玄翁自贊?은 신흠이 자신의 생에서 가장 어려웠던 시기에 지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더구나 그는 당면한 현실이 너무도 고달프지만, 그것은『莊子』 ?齊物論?에서 ‘비록 커다란 천지라도 손가락 하나로 가릴 수 있고 수없이 많은 만물이라도 말 한 마리가 그 이치를 다 할 수 있으므로 시비득실을 따질 수 없다.’고 한 말과 같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불가에서 인간의 몸을 地ㆍ水ㆍ風ㆍ火로 이루어진 四大라고 표현하지만 그것의 존재 여부를 따져 묻기보다는 커다란 조화 속으로 들어가고 싶다고 하였다.
序에서 “自贊의 형식을 빈 글이지만 사실은 自笑”라고 밝힌 것처럼, 신흠은 자신의 우스꽝스런 모습을 숨김없이 드러내 비웃고 있다. 그러나 글의 내용을 전반적으로 잘 살펴본다면 自笑라고 표명한 것과는 달리 혹독한 시련과 장기간 맞서 신념을 굽히지 않고 이겨낸 자신의 모습을 오히려 대견스럽게 생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자찬?에서 드러낸 자부심과 다르지 않다. 그의 자부심은 또 한 편의 자찬인 ?自贊 幷序?에서 더욱 선명하게 볼 수 있다. 신흠은 이 글에서 黃庭堅과 蘇軾의 반열에 자신을 끼워 넣을 수 있다고 하였으며 그 근거로 “유한한 생명을 가지고 무한한 지식에 장애를 받지 않는 자는 이 玄翁과 二子가 짝을 한다네.”10)라고 하였다. 이처럼 신흠은 평소뿐만 아니라 고난 속에서도 玄妙한 경지에서 노닐고 싶었기에 혼탁한 세상과 시련으로부터 초탈할 수 있었다. 또 자신의 초라해진 모습을 보고도 참된 자아를 지켰기에 그 역시 진정한 자신이라고 일깨우고 있다.
10) 嘗見黃魯直贊東坡及自贊文, 奇古超卓, 竊喜之, 且素好兩公爲人, 作小贊以自列於二子之後, 當世者固莫之許, 後豈無子雲, 亦漆園之朝暮遇者夫!
4. 宋時烈의 자아 소통 - 自警에 담긴 悔恨의 自嘲
宋時烈(1607~1689)은 조선 후기의 학문?사상?정치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로, 자는 英甫이고 호는 尤庵ㆍ尤齋다. 당시의 여론은 山林에 있는 그에게 좌우되었고 국정도 그에게 물어 결정될 정도였다. 그러나 그는 두 차례의 禮訟, 壬申三告變, 己巳換局 등 정쟁의 중심에 있었고 결국 賜死되었다. 이처럼 파란 많은 삶을 살았던 송시열은 자신에게 어떤 말을 하였을까?
?또 스스로 일깨워 정정을 구하다??又自警求訂?
주자가 『孟子』의 “大人에게 유세할 때는 그를 하찮게 보아야 한다.”는 말에 대해 논하기를 “이는 하나의 英雄이니 모름지기 두려워하고 조심하는 데에서 나온다. 만약 혈기의 거칠고 제멋대로 하는 것이 한 점이라도 있다면 이루어지지 않는다.”라고 하였다.11) 11) 朱先生論孟子說大人則?之語曰: “此一種英雄, 須從戰兢臨履上做出來, 若是血氣?豪一點使不著也.”(『宋子大全』, ?又自警求訂?.)
위의 작품은 『맹자』가 “대인에게 遊說할 때에는 하찮게 여기고 그 드높음을 보지 말아야 한다.”12)라고 한 말에 대하여 주자가 해석한 것을 송시열이 수용하여 자신을 경계하기 위해 만든 自警詩이다. 맹자의 위와 같은 유세법에 대하여 趙岐는 “존귀한 사람을 유세할 때 그의 富貴와 高賢을 하찮게 여기고 두려워하지 않아야 자신의 뜻을 온전히 펴서 다 말할 수있다.”13)라고 주석을 하였다. 이 주석만 본다면 상대의 지위와 재력에 기죽지 않는 호방한 기운이 있어야 大人을 유세할 수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주자는 戰戰兢兢하는 극도의 조심성에서 나오는 힘이라고 설명하였다.14)
12) 孟子曰: “?大人則?之, 勿視其巍巍然.”(『孟子』, ?盡心 下?.) 14) 朱晦翁告陳同父曰: “眞正大英雄, 却於戰戰兢兢臨深履薄得之, 若氣血粗豪一?使不著也, 與孟子浩然之旨, 正相發. (明 海瑞, 『備忘集』)
송시열은 北伐論을 주창하였고 평생 수많은 논적과 논쟁을 하였다. 후대에 그의 북벌론은 현실성이 결여된 공허한 선동으로 폄하되었고 그의 논쟁은 소모적 정쟁으로 비난 받았다. 그와 같이 두려움 모르는 사자후는 맹자가 “대인을 설득할 때 그를 하찮게 여겨야 한다.”는 말에 토대한 것이 또『周易』 ?咸卦?의 “上六은 감동함이 광대뼈와 뺨과 혀다.”15)라는 말에서 용사하여, 다른 사람을 口舌로 감동시키려고 하는 것은 소인의 태도라고 스스로를 경계하였다. 이처럼 ?又自警求訂?은 말을 할 때 두려워하고 삼가며 진심을 다하라고 자신에게 다짐한 글이라고 할 수 있다. 15) 上六, 咸其輔頰舌.
?스스로 경계하는 시? ?自警吟?
그들의 허물을 덮어주지 못했네 不能庇其累
16)『宋子大全』, ?自警吟 丙寅?.
위의 ?自警吟?은 송시열이 80세 되던 해(1686, 숙종 12년)에 지은 것이다. 만년의 송시열은 여러 가지 어려움에 처해 있었다. 1682년 金錫胄?金益勳 등 훈척들이 역모를 조작하여 남인들을 일망타진하려고 했던 壬申
노론의 영수로 여론을 좌지우지하며 世道를 바로잡겠다고 자임하였지만, 신중하지 못한 언행으로 오히려 남의 조롱만 받게 되었다고 후회하였다. “영웅은 戰戰兢兢하는 데서 나온다.”라고 하였으니, ?又自警求訂?에서 강조한 것과 같은 맥락의 말이라고 하겠다. 송시열은 치열한 논쟁의 중심에 서 있었기에, 그와 같은 다짐은 결코 공허한 말이 아니었다.
?스스로 경계하는 시??自警吟?
이 말은 邵雍이 나를 심하게 속인 것인 줄을 此語堯夫欺我深
위의 ?自警吟?도 송시열이 노년에 지은 것인데, 나이가 들어도 일이 많아 쉴 수 없다면서 피로감을 드러내고 있다. 그가 노년에 피곤한 이유는 병과 저술 때문이었다. 특히 그는 저술 때문에 심신이 고달프다고 하였다. ?自警吟 丙寅?에서도 토로한 것처럼 그는 世道를 자임하였다. 그러나 질병의 치료, 서적의 교감?저술로 분망하면서, 어떻게 더 큰 일에 눈을 돌릴 겨를이 있겠는가?
??像에 쓴 自警? ?書?像自警?
네 모습은 파리하고 爾形枯? 18)『宋子大全』, ?書?像自警?.
위의 작품은 ‘自警’을 표방하고 있지만 실상은 ?像自贊이다. 주자가 ?書?像自警?이란 제목으로 화상자찬을 지은 전례를 송시열이 따른 것이다. 그림 속에는 야위어 앙상한 사람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평생 연찬한 학문도 엉성하기 짝이 없다. 그는 현인
5. 尹?의 자아 소통 - 自嘲가 품은 自負
無名子 尹?[1741~1826]는 당대의 세태를 잘 알 수 있는 다수의 흥미로운 글을 남겨 주목받는 조선 후기의 문인이다. 그는 가세가 기울어 서울의 변두리로, 변두리에서 다시 경기도로 이사를 가야 할 정도로 빈한하였다. 그는 33세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51세에 대과에 급제할 때까지 무려 20여 년간 성균관을 출입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57세의 나이에 藍浦縣監이 되었으나 불과 100일 만에 파직되고 감옥에 갇히기까지 하였다. 또 60세에는 黃山察訪에 임명되었으나 역시 1년을 겨우 넘기고 해직되었다.19)
?自警??自警?
입은 여전히 뚫렸고 口尙通
비록 공부를 해도 縱着工 20)『無名子集』, ?自警?.
윤기는 위의 ?自警? 첫머리에서 슬픔과 안타까움이 뒤섞인 탄식을 내뱉고 있다. 그리고 “나란 사람은 누군가?”라고 自問하였다. 윤기는 자신의 타고난 자질이 미련하고 후천적 습관은 게을러서 속이 텅텅 비었고 어느 순간에 노인이 되고 말았다고 개탄하였다. 그리고 노인이 되어버린 자신의 육체가 얼마나 볼품없는지 진솔하게 묘사하였다. 대머리에, 눈이 흐릿하여 잘 보지도 못하고 코에서는 콧물이 줄줄 흐르며 耳鳴 증상도 있다. 즉 口舌로 인하여 문제가 야기되기 때문에 말조심을 하자고 스스로에게 다짐을 하고 있다.
?自贊??自贊?
21)『無名子集』, ?自贊?.
위의 ?자찬?은 ?자경?보다도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 한층 더 냉정하다. 윤기는 자신을 찾아오는 이가 없어 고독한 이유는 외모가 남에게 호감을 주지 못할 만큼 못생기고 말도 재미가 없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렇다고 자신이 밖으로 다니며 사교를 하지도 못하고 다른 사람의 비위를 맞추는 말을 하지도 못하기에 자신을 아는 사람도 많지 않다고 하였다. 또 빈궁하여 늘 춥고 배고픈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이익을 추구하는 일을 도모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또 이익을 도모하려고 애쓰지도 않았고, 安貧樂道하라는 성현을 말을 따른 결과, “얼굴빛은 근엄하면서 마음이 유약한 것을 소인에게 비유하면 벽을 뚫고 담을 넘는 도적과 같으리라.”22)라고 한 공자의 말에 부합된 인간형이 되었다고 자부하고 있는 것이다. 22) 色?而內荏, 譬諸小人, 其猶穿?之盜也與!(『論語』, ?陽貨?.)
윤기의 자부심은 다음의 글을 보면 더욱 명확히 확인할 수 있다.
?거울에 비춘 모습의 자찬?
23) 色溫而目瞭, 其外柔而內剛者與! 口若不出而耳白?疎, 其言訥而行方者與! 剛而 然未得裁之於聖人, 吾其不免於鄕人之憂也與!
(『無名子集』, ?照鏡自贊?.)
위의 글은 윤기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쓴 自贊이다. 더러 보이기는 하지만, 일반적으로 자신의 화상에 찬을 붙이는 것을 감안한다면, 다소 독특한 글이라고 할 수 있다. 또 거울에 비치는 얼굴의 생김새를 통하여 내면의 성격을 추정하는 내용도 하나의 특색이다. 윤기는 자신이 外柔內剛하며 말이 어눌하면서도 행동이 方正하여 하지 않는 일이 있는 ?者의 부류라고 단정하였다. 그리고 그 근거로 제시한 것이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다. 공자는 “中道에 맞는 사람을 얻어서 함께 하지 못한다면 반드시 狂者나 ?者와 함께 할 것이니, 광자는 진취적이고 견자는 하지 않는 일이 있다.”24)라고 하였으니, 윤기는 비록 자신이 中道를 행하는 경지에는 도달하지 못하였지만 절조를 지켜 하지 않는 일이 있는 견자의 수준에는 도달하였다고 자부하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맹자에서 “순 임금도 사람이고 나도 사람이건만, 순 임금은 천하에 모범이 되어 후세에 전할 만하거늘 나는 아직도 촌사람이 됨을 면치 못하니, 이 점은 걱정할 만하다.”25)라고 한 말에 의거하여 자신이 성현을 지향하면서도 그 경지에는 도달하지 못한 한계를 인식하며 아쉬워하고 있다.
24) 不得中行而與之, 必也狂?乎! 狂者進取, ?者有所不爲也.(『論語』, ?子路?.)
6. 결론
타인과 올바른 소통을 하기 위한 전제 조건은 자신에 대한 객관적 파악이다. 그리고 자신에 대한 객관적 파악은 자아와의 소통을 통하여 가능하다. 자아와의 건강한 소통은 세계와의 격리를 의미라는 것이 아니라 세계
원론적 도덕률을 추상적이고 관념적 차원에서 나열하는 글이 대다수이지만, 구체적 경험을 기반으로 한 글도 다수 있다. 자신의 구체적 경험이 배경이 된 글에는 자신의 단점이 언급되기도 한다.
自嘲?自笑류의 시문은 외모, 능력 등에 대한 단점을 숨김없이 폭로하고 통렬하게 비웃음으로써 열등감을 완전 연소시키는 글이다. 그와 같은 통렬한 반성을 통하여 이상적 인간상에 도달하고자 하는 것이다. 자아와 소통하는 시문들이 자신의 단점에 대하여 통렬하게 반성하고 있지만, 그것을 잘 살펴보면 자부의 교묘한 표현인 경우가 많다는 사실에 각별히 주의할 필요도 있다.
◆ 참고문헌
宋時烈,『宋子大全』.
김기완, ?노론의 학통적 맥락에서 본 송시열 초상화찬?, 『열상고전연구』제36집,열상고전연구회, 2012.
투고일 2015. 10. 29 심사시작일 2015. 11. 9 심사완료일 2015. 11. 27
Abstract Communication with the Ego -The two voices to inner side oneself- Kang, Min-gu This paper is compiled for suggesting the desirable method of communication with the Ego to modern people, through analysing aspect of communication with the Ego in the texts of self-warning, self-discipline type and self-admiration type and smiling self-deprecatingly, self-mockery type. Not only did Goryeo Lee Kyu-Bo(李奎報), in the middle of the Joseon Dynasty Sin- Heum(申欽), the late Joseon Dynasty Song Si-Yeol(宋時烈) and Yoon-Ki(尹?) have representativeness as writers of the day, they wrote more than two works among three varieties of self-warning, self-discipline type and self-admiration type and smiling self-deprecatingly, self-mockery type. The reason why this paper examines these three texts at once, the form and content were clearly divided because of the fundamentally different function, but the outstanding thinker and writers honestly communicated with their inner side, crossing the style of writing standard. Lee Kyu-Bo(李奎報) requested to be careful of one´s speech beyond the theoretical and ideological level in ?Jagyemyeong(自誡銘)?. In ?Self-mockery (自嘲)? and ?Self-admiration(自贊)?, he sublimated with a laugh and prepared developmental turning point by scathingly and humorously exposing his flaws. He severely criticized the incompetence of him who had a bald head and potbelly, but his perspective on such feature was warm in ?Dudonggago (頭童自嘲)?. on the other hand, in ?丁而安寫予眞 自作贊?, he talked to his existence with a little more contemplative and calm tone, looking at his figure himself. Sin-Heum(申欽) concentrated on telling the psychological aim and desire in ?Self-admiration(自贊)?. It is an ideal that he gave himself who wanted to sing the praises of absolute liberty without not being isolated from the reality and group. Because he wanted to take a stroll on the profound realm in trouble as well as in usual, he could transcend from the corrupt world and ordeal. Also, in ?Hyeonong Self-admiration(玄翁自贊)?, he awakened himself that was true self too, looking at his humbled figure and then he maintained the his real ego. Song Si-Yeol(宋時烈)’s ?Wuzhagyeonggujeong(又自警求訂)? is the article of pledge that when you speak, be afraid of, be careful in and fulfill sincerity. Also, ?Jagyeongeum Byoungin(自警吟 丙寅)? is the article of deep remorse that he talked to himself about the discord and enmity which were caused because of stubborn conviction. Because he had been in the center of fierce arguments, such pledge and remorse were not empty words. And in ? Jagyeongeum(自警吟)?, he requested to devote himself even in old age. ? Jagyeongeum Byoungin(自警吟 丙寅)? and ?Jagyeongeum(自警吟)? all expressed ‘Self-warning’ but they were more of the ‘Smiling self-deprecatingly’ and ‘Self-mockery’ in substance. Though Yoon-Ki(尹?) was poor, also his government service and government position were late and rough, he opposed the ordeal by reflecting and encouraging himself. In ?Self-warning(自警)?, he bitterly reflected himself, meanwhile, he sternly took warning. His ?Self-admiration(自贊)? is self-mocking but it gives off self-preserving and pride. He obtained health in communication with the ego, through honestly expressing the sense of inferiority. Keyword Communication(疏通), Self-warning(自警), Self-discipline(自誡), Self-admiration(自贊), Smiling self-deprecatingly(自笑), Self-mockery(自嘲), Lee Kyu-Bo(李奎報), Sin-Heum(申欽), Song Si-Yeol(宋時烈), Yoon-Ki(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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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마음의 정원 원문보기 글쓴이: 마음의 정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