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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흔히 그릇에 비유합니다..... 큰 인물은 보통 사람보다 늦게 대성한다는 사자성어가 있지요 ‘대기만성(大器晩成)’의 ‘대기’는 ‘큰 그릇’을 말합니다. 그래서 내 그릇이 넘 작아 속 좁은 사람입니다. 말하기도 하고 내 그릇이 크면 정말! 남을 배려하는 사람이라고 칭찬하기도 합니다.
누구든 마음의 그릇을 자기 눈높이로 볼 수 있습니다. 예배 후 식사를 하게 될 텐데 서로 돕는 섬김의 손길이 미칠 것입니다. 내가 해야 갖다 하여 빈 그릇을 챙며 물을 담으면 물그릇이 됩니다. 반찬을 담으면 반찬그릇 국을 담으면 국그릇이 됩니다. 그러나 아무리 금은보화로 만든 그릇이라도 그 그릇 속에 오물을 담으면 오물 그릇이 됩니다.
사람의 말과 행동에 따라 불만과 불평을 담는 그릇이라면 부정적인 사람이지만 사랑하고 감사하고 또 감사를 담는 그릇이라면 본받을 만한 사람입니다.
사진 이미지....이 사진은 2006년 고인이 되신 일명 ET 할아버지 별명을 가진 채규철선생입니다. 그는 이북태생으로 월남하여 서울시립농업대학을 나와 1961년 충남 홍성에 있는 풀무학교에서 교사직을 시작하면서 농촌에 사는 가난한 농사꾼의 자녀들을 위한 교육에 열정을 가졌습니다. 기회가 주어져 덴마크 하슬렘 대학에서 2년 유학생활을 마치고 조국으로 돌아와 그룬투비가 주장한 국민운동과 협동조합을 배워 우리나라 농촌청소년에게 보급하게 됩니다.
첫 시작으로 경남김해 양계장시설을 견학하고 돌아온 길에 불의의 사고로 차안에 신나통이 불이 붙어 그의 온 몸에 화상을 입었고 27회의 수술을 받고 겨우 살아날 수 있었지만 귀와 한쪽 눈을 잃었습니다...... 입과 손은 화상으로 인하여 들러붙었고, 눈물샘마저 녹아내려 울 수도 없었습니다.
'ET할아버지’로 알려진 것은 온 몸에 화상을 입어 외계인 같다고 하여 아이들이 붙여준 별명입니다. 그의 흉측한 외모 때문에 다방이나 음식점에 사람을 만나기 위해 문을 열고 들어가면 주인이 100원 짜리 동전 한 닢을 주고는 제발 나가달라며 하며 그를 손님이 아니라 구걸하러 온 거지로 착각할 때 자신의 이런 처지를 비관하며 술에 빠져 방황할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남편을 위해 눈물로 헌신한 아내가 있었습니다. 아내는 방황하는 남편에게 성경 욥기 말씀을 반복해서 읽어주었다고 합니다. 그는 욥기의 말씀을 들으며 욥과 같이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감사하는 신앙을 갖고자 하는 열망이 불타게 되었습니다.
그 후 그는 절망의 자리에 다시 일어났고 ‘두밀리 자연학교’를 열어 대안 생태 학교를 시작했습니다.
생전에 채규철 선생은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몸이 말입니다. 수십 명이 달려들어 만든 걸작입니다. 아주 비싼 작품이지요.” 형태는 온전하지 않지만, 한쪽 눈이 살아 있어서 감사하고, 일그러진 손이지만 수저를 들 수 있어서 감사하고, 귀가 다 녹아버렸지만 안경은 걸칠 수 있어서 감사하다는 것입니다. 그는 학교 공부와 입시에 지친 아이들에게 자연 속에 바람과 소중한 흙을 선물하고 2006년 하나님의 품에 안겼습니다......
누구든 살아가는 방법이 다르지만 절망을 딛고 일어나 뜻을 펼치며 범사의 감사로 살아가는 삶이 곧 신앙의 바로 미터입니다.
다음 주일은 추수감사주일을 지키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받은 은혜가 너무 큽니다. 그래서 언제나 감사로 살아갑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떤 믿음의 자세로 감사를 고백하느냐 따라 나의 질 그릇 속에 주님이 베풀어주신 은혜가 넘치는 감사로 채워질 것입니다.
오늘 주신 말씀 바울은 골로새 교회 성도들에게 먼저 이렇게 권면합니다. 6절 말씀을 보면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먼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다고 했어요 여기 받았다는 말은 마음으로 받아 들여서 자신의 것으로 취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다는 말인데 골로새 성도들이 내 인생의 주인으로 영접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000 내가 주인이었습니다. 5분 후의 일을 알지 못하는 내가 내 인생이 모든 일들을 아는 것처럼 내 마음대로 내 생각대로 내가 결정했습니다. 이것이 본질상의 죄의 속성입니다. 이 죄성 때문에 우리는 수많은 실수를 저지르고 자기가 전부인 줄 알고 교만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 아닙니다......나를 구원하신 우리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이 내 인생의 주인이 되셨습니다.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다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내 생명의 주인이 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나의 주인이신 예수님 지시대로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6절 하반절에 “ 그 안에서 행하되” 라고 했어요
그리스도 예수를 주인으로 영접했으면 반드시 행함이 뒤 따라야 하는데 그 행함이 자기 뜻대로 하는 행함이 아닌 나의 주인이신 예수님 사셨던 삶대로 충성을 다하여 살아 가는 것을 말합니다. 분명한 것은 “그 안에서 행하되”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행함이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골 3;17......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무엇을 하든지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라고 했습니다.
내가 누군가를 위해 봉사한다든지 누구를 위해 기도한다든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봉사하고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누구에게 감사할 일이 있으면 보여주기식 감사가 아닌 주님의 이름으로 감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이 하나님나라를 선포하실 때마다 그렇게 사셨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반드시 먼저 하나님아버지께 여쭙고 의지했습니다. 그리고 하신 말씀 중에 하나님이 일하시기에 나도 일한다.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예수님 행하심은 철저히 하나님께 의지하고 감사했던 2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오병이어로 5천명을 먹이신 사건입니다. 요6장 디베랴광야에서 예수님 설교하시는데 말씀을 듣는 무리들이 배고픔을 참고 말씀을 듣고 있는 것을 보시고 주님은 무리들에게 음식을 먹이고 싶어 하셨습니다. 모인 군중이 장정만 오천 명이니, 남녀노소 합하면 2, 3만 명 정도 되었을 것입니다. 한 두 사람도 아니고 2, 3만 명의 사람들이 먹을 음식을 어떻게 갑자기 구하겠습니까? 그 문제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맡겼습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는 것입니다.그때 제자 안드레가 한 어린아이가 가진 도시락을 가지고 옵니다. 그 도시락에는 우리가 알듯이 물고기 두 마리는 좋은 물고기가 아닙니다. 당시 어부들이 상품가치가 없다고 버린 것을 주워 요리한 것입니다. 그리고 보리떡 다섯 개입니다. 당시 서민들이 먹는 최하의 음식이었습니다.예수님은 아주 작은 음식을 보시고 자리를 정돈시켰습니다. 오십 명씩 백 명씩 나눠 주기 좋도록 않게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 어떻게 하셨습니까? 제자들에게 이제 물고기와 보리떡을 나누 주라고 하셨습니까?
예수님은 먼저 하신 것은 감사기도였습니다. 우리가 일용할 양식 밥을 먹기 전에 먼저 감사기도를 드리지 않습니까? 다 예수님 통하여 배운 것입니다.
요6:11....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아 있는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물고기도 그렇게 그들의 원대로 주시니라
우리 예수님 빈들에 있는 무리 들 앞에서 하나님께 우러러 축사하셨는데 축사(바라크)란 감사기도를 먼저 드린 것입니다. 비록 작은 것이지만 하나님아버지 원 하신대로 이 물고기로 보리떡으로 저들을 먹이게 하옵소서 구체적인 기도는 자세히 기록되지 않았지만 하늘을 향한 축사기도가 진실이 가득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기도 후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이제 제자들이 소량의 물고기와 떡을 무리들에게 조금씩 나눠주고 또 나눠줘도 줄지를 않았습니다. 모인 군중이 다 배불리 먹고 남은 것만 거두었는데도 열 두 바구니에 가득하였습니다. 우리 예수님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먼저 드렸기에 비록 작은 것이지만 넘치는 축복으로 역사한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사건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11장 나사로의 죽음을 생각해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실 때마다 들렸던 곳이 <베나니> 나사로의 집이었습니다. 당시 나사로는 예루살렘에 살지 못한 서민들이 하층민이 살았던 곳입니다. 그곳에 살았던 나사로, 마르다 마리아의 가정을 예수님은 좋아하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자주 들렸습니다.그렇게 예수님의 사랑을 받았던 나사로가 병들었습니다.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예수님도 들었습니다. 와 주십사 하는 마르다와 마리아의 요청도 들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즉시 가지 않았습니다. 결국 나사로는 병으로 인해서 세상을 떠납니다.장례식이 치러졌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문상을 갈 생각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장례 치른 지 4일이 지났을 때였습니다. 그때서야 예수님은 나사로의 무덤을 갔습니다. 사람들을 시켜서 막혀있는 무덤 문을 옮겨놓으라고 시켰습니다.아마 무덤 속에서 시신이 썩는 냄새가 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예수님 전혀 개의치 않고 눈을 들어 하늘을 보며 먼저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요11 : 41....." 돌을 옮겨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무덤앞에서 먼저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했습니다. 그리고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나사로야 나오라> 그랬더니 죽었던 나사로, 수의를 입은 나사로가 수의를 입은 채 밖으로 나온 것입니다. 죽은 나사로가 나흘 만에 살아난 것입니다.두가지 사건을 통하여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본을 보이신 것은 모든 것 다 하실 수 있는 우리 예수님이지만 “당신” 자신의 뜻대로 먼저 행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리는 자세가 먼저였습니다. 그 후에 나타난 것이 바로 넘치는 축복이 뒤따라 온 것입니다.
다음 7절을 보십시오....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그 안에서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았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내 앞에 어떤 문제든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어도 예수님이 나의 주인 되심을 포기하지 않고 뿌리 내리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야 주님 안에 거하는 믿음이 더욱 굳어져 감사가 넘치는 자리까지 이르게 됩니다. 이것은 나무에 비유한 말입니다. 나무가 쓰러지지 않고 계속해서 자라기 위해서는 땅 속 깊이 뿌리를 내려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께 절대 복종하고 충성하고 살려면 예수님 안에 깊이 뿌리를 내려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쓰러집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라지 못합니다.
예수 안에 뿌리를 깊이 내리고 예수님이 주시는 영양분을 공급받고 예수님으로부터 생명을 이어받아야 주님이 원하시는 감사가 넘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뿌리내린 나무처럼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살았던 한사람 다니엘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다니엘은 유다의 귀족 자제로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청소년 시절 조국 유다가 멸망하는 것을 눈으로 보고 나라 없는 서러움을 안고 포로가 되어 바벨론으로 끌려갔습니다. 청년 다니엘은 신앙의 자유를 빼앗긴 채 바벨론에서 하나님께 예배할 수 없었습니다. 바벨론은 포로로 잡혀온 유대청년들을 바벨론 문화방식대로 교육시켜 하나님을 잊어버리도록 가르쳤습니다.그러나 포로로 잡혀온 다니엘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서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단 1:8절........“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음식와 그가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도록 환관장에게 구하니”
다니엘이 뜻을 정한 것은..... 나라를 잃고 이방나라에 포로로 왔지만 하나님을 믿는 신앙만큼은 좌로나 우로나 흔들리지 않겠다는 굳은 결심입니다. 어느날 느부갓네살왕이 꿈을 꾸는데 그 꿈을 다니엘이 해몽해줍니다. 하나님께서 뜻을 정하여 흔들리지 않는 신앙생활을 하니까 하나님께서 다니엘을 통해 바벨론 점술가들이 꿈해몽을 하지못한 것을 하나님께서 다니엘을 통하여 해석해줍니다. 번민에 쌓여 있는 느부갓네살왕이 명쾌하게 꿈을 해석해주니까 다니엘은 이반나라에서도 높은 벼슬자리에 올라 느부갓네살왕의 총애를 한몸에 봤습니다.
그런데 세상권력을 다 가졌던 느부갓네살 왕도 죽고 손자 벨사살 왕이 나라를 다스리는데 어느 날 왕궁에서 화려한 연회가 베풀어졌습니다. 먹고 즐기고 쾌락의 난장판입니다. 결국 이웃나라 메대 바사나라가 연합하여 처들어와 그렇게 강성한 바벨론을 멸망시킨것입니다.
역사가 말하지만 나라가 망하면 신하들이 죽든지 좌천됩니다. 그런데 다니엘은 페르시아 새 왕 다리오에게도 신뢰를 받았습니다. 다리오왕은 전국에 통치자 120명을 세우고 그 위에 3명의 총리를 세웠습니다. 그런데 다니엘의 뛰어남을 알아본 다리오는 다니엘을 모든 총리들 위에 세우려고 했습니다.그러자 다른 신하들이 시기와 질투를 합니다. 그래서 다니엘을 모함하여 끌어내리려고 온갖 수단방법을 동원하여 뒷조사를 하는데 아무 허물과 실수를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권력을 남용하여 사리사욕을 채운 일도 없고, 왕에게 거짓을 아뢴 적도 없고 나라에 손해를 입힌 적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신하들이 계책을 세우는데 다니엘의 신앙을 가지고 넘어뜨리려고 왕에게 찾아가 아첨을 합니다."왕이시여 만수무강을 하옵소서. 왕께서는 신과 같은 존재이십니다. 그러므로 왕의 신하와 백성 중에서 앞으로 30일 동안 왕 이외에 어떤 신에게도 기도를 하면 왕을 무시한 일이므로 중죄인으로 인정하여 사자 굴에 던져 넣기로 법을 정하옵소서.".......... 그런데 다리오 왕이 신하들의 계책을 깊이 헤아리지 않고 그냥 도장을 꽝 찍고 맙니다. 이런 간신배의 중상모략을 다니엘이 모르리가 없어요......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면 왕에게 찾아가 자기의 결백을 말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니엘 보세요 사람에게 아첨한다든지 자신의 결백을 주장한다든지 이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다니엘은 집에 돌아와서는 예루살렘 쪽 창문을 열고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렸습니다.
단6:10.....다니엘이 이 조서에 왕의 도장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윗방에 올라가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고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의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
다니엘의 감사기도는 '이 위험에서 건져 달라는 기도가 아닙니다..... 간신배들을 심판하여 주십시오 기도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 감사합니다."
성경을보면 다니엘이 무엇을 감사했는가를 자세히 기록하고 있지는 않지만 '오늘까지 지켜주신 것도 감사요 '온갖 악한 이들 속에서 앞으로도 지켜주실 줄 믿고 감사합니다. 그렇게 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어떤 어려움을 당하고 헤쳐 나갈 일이 막막해도 다니엘 같은 감사를 드릴 수 있는 것이 넘치는 감사기도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일제시대 때 평양에서 목회를 하시던 유 석홍 목사님이라는 분이 있었습니다.그 시대에 목사님들은 항상 끼니 걱정을 해야 하는 가난한 생활을 했습니다.어느 날 유 석홍 목사님 집에 친구 목사님이 찾아 왔습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 목사님이 정말 반가웠습니다. 그런데 집에는 먹을 것이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 때 유 목사님이 밖에 있는 사모님에게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여보! 손님이 오셨으니 무엇 좀 있는 데로 가져오시오." 하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자 한 참 후에 쟁반에다가 큰 사발 두 개를 담아가지고 들어왔습니다. 큰 사발에는 맑고 시원한 냉수가 가득 담겨 있었습니다. 두 사람은 서로가 난처하고 미안 해 했습니다. 그래도 두 목사님은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맑고 깨끗한 물을 값없이 주시니 감사합니다." 하고 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먹을 것이 없어서 냉수 한 그릇 앞에 놓고 감사기도를 드릴 수 있는 감사야말로 진정한 감사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올해도 우리의 신앙의 그릇이 주님안에서 넘치는 감사그릇으로 채워지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