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서지리지(漢西地理志)
한서지리지(漢西地理志) / 한서구혁지(漢西溝혁志) 는 한나라의 반고가 지은 한서 총 120권 가운데 제28권과 제29권에 해당하는 도서로서 분량은 많지 않지만 어려운 한자가 자주 등장해 상당히 난해한 편이다.
한서지리지는 한나라 전 200여년 동안의 일을 기록한 역사서로 사기와 더불어 중국사학사를 대표하는 저작이다.
한서구혁지는 동양의 지리서 가운데 가장 오래되었으며,역사서 중에서도 처음으로 지리 부분을 별도로 집약한 귀중한 연구 자료이다. 중국의 전 국토를 구획하고 군(郡)과 현(縣)으로 구분해 놓았기에, 고대 중국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에게는 없어서는 안 되는 유일한 참고서이다.
『한서지리지(漢書地理志)』와 『한서구혁지(漢書溝 志)』는 한(漢)나라의 반고(班固 : 32~92)가 지은 『한서』 총 120권 가운데 제28권과 제29권에 해당한다. 그 분량은 많지 않지만 어려운 한자가 자주 등장해 상당히 난해한 편이다.
그런데도 필자가 『한서』 지리지에 관심을 가진 까닭은, 한국 고대의 지명이 체계적으로 등장하는 최초의 사서이기 때문이다. 한국 고대사를 공부하다 보면 지명(地名)은 꼭 극복해야 할 대상이고, 그러다 보면 『한서』 지리지를 뒤적이게 된다. 그러다가 지난해 초 관훈클럽의 신영기금의 후원을 받게 된 것을 계기로 용기를 내어 『한서』 가운데 지리지와 구혁지를 번역하기로 했다.
『한서(漢書)』는 어떤 책인가?
『한서』는 전한(前漢) 200여 년 동안의 일을 기록한 역사서로, 『사기(史記)』와 더불어 중국 사학사(史學史)를 대표하는 저작이다. 후한 초기의 역사가인 반고(班固)가 지었으며, 모두 120권으로 구성되었다. 『전한서(前漢書)』 또는 『서한서(西漢書)』로도 불린다.
반고의 아버지 반표(班彪)는 일찍이 『사기』에 무제(武帝) 이후의 일이 기록되지 않은 점을 아쉬워해 스스로 역사서 편집에 나섰다. 그래서 『후전(後傳)』 65편을 편집했는데, 일을 완성하지 못하고 죽었다. 반고는 아버지의 뜻을 이어 역사를 편수(編修)하는 일을 시작했으나 ‘국사를 임의로 개작(改作)한다’는 모함으로 인해 투옥되었다. 이에 동생인 반초(班超)가 적극적으로 구명에 나서고, 문화·역사 등에 이해가 깊은 후한 2대 황제인 명제(明帝, 재위 57~75)가 이를 받아들여 석방되었다.
반고는 『한서』 집필에 다시 전념해 장제(章帝)의 건초(建初, 76년) 연간에 완성했다. 다만 8표(八表)와 10지(十志) 중 천문지(天文志) 부분을 완성하지 못하고 죽었으므로 누이동생인 반소(班昭)가 화제(和帝)의 명을 받아 이 부분을 완성했다고 한다.
『한서』는 흔히 『사기(史記)』와 비교된다. 『사기』는 삼황오제(三皇五帝) 등 중국 상고시대부터 한나라 무제까지를 기록한 통사(通史)인데 비해, 『한서』는 전한(前漢)만을 다룬 단대사(斷代史)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한나라 고조(高祖) 유방(劉邦)부터 왕망(王莽)의 신(新)나라 멸망까지를 기록했다. 12제(帝)의 기(紀)를 비롯해 8표(八表), 10지(十志), 70열전(七十列傳) 등은 총 10여만 자로 구성되었다.
『한서』의 제28권인 지리지는 동양의 지리서 가운데 가장 오래되었으며, 역사서 중에서도 처음으로 지리 부문을 별도로 집약한 귀중한 연구 자료이다. 중국의 전 국토를 구획하고 군(郡)과 현(縣)으로 구분해 놓았기에, 고대 중국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에게는 없어서는 안 되는 유일한 참고서이다.
중국은 주(周)나라가 쇠퇴하고 춘추시대(春秋時代)와 전국시대(戰國時代)를 거쳐 진(秦)나라 시황제(始皇帝)가 천하를 통일했다. 시황제는 천하를 군현(郡縣)으로 나누어 다스렸으나 당시 사정을 알려주는 문서화한 지리서는 전해지지 않았다. 그런 까닭에 사마천(司馬遷 : BC 145~86?)이 『사기』를 기록할 때에도 지리 부문은 다루지 못했던 것이다.
반고는 지리지인 제28권을 상·하로 편찬하면서 자서(自敍)에서 말했다.
“곤(坤 : 땅)은 땅의 형세를 만들어 높고 낮은 아홉 등급을 있게 했다. 옛날 황제(黃帝)와 당(唐)의 요(堯)임금 시대까지는 대략 국가가 1만 개 있었다. 화합토록 해 동쪽과 서쪽을 정하고 남쪽과 북쪽 지역도 다스렸다. 하(夏), 은(殷), 주(周)의 삼대(三代)를 손익(損益)시켜 내려와 진(秦)나라와 한(漢)나라에 이르렀다. 다섯 등급으로 갈라서 다스리면서 군(郡)과 현(縣)의 제도를 세웠다. 대략 산과 개울을 표시하고 그 길을 갈라서 밝게 했다. 이에 지리지(地理志)를 기술한다.”
반고가 지리지를 기록하면서 귀중하게 여긴 내용이 바로 ‘산과 개울(川)을 표시하고 그 길을 갈라서 밝게 했다’는 데 있다.
또 ‘지리지’는 『서경(書經)』의 우공(禹貢)편을 기초로 해 저술했는데 고대 중국에서는 전세(田稅)를 부(賦)라 했고, 제후들이 바치는 토산물을 공(貢)이라고 했으며, 두 가지를 통틀어 공물이라고 기록했다. 역사를 거쳐 오는 동안 고대에는 행정구역이 자세하지 않았고 국경도 대충 구획했으나, 이 지리서를 토대로 그 뒤의 제후국, 군국(君國), 현(縣)의 경계가 확실해져 일목요연하게 되었다.
아울러 지리지를 완성함으로써 그 동안 중국의 전체 인구와 각 군(郡)의 인구는 얼마인지, 전체 가구 수는 얼마인지, 지역 특산물은 무엇인지, 기후·풍토·토지의 특성은 어떠한지 등등 각 지역의 장단점이 확연하게 파악되었다.
각 지역의 생활습관과 풍속, 나라의 경계구역(境界區域)이 어디까지인지도 자세히 기록되었다. 뿐만 아니라 고대의 중국 국가들은 명칭만 존재하고 실제로 어느 지역에 존재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지리지가 완성된 후로는 각 왕조의 궁궐·누대(樓臺) 등과 각 제후국의 궁(宮)·대(臺)와 수도(首都)의 소재가 확실하게 드러났다.
기록만으로 남은 고대의 수많은 제후국과 각 왕조가 실제로 존재했다는 사실이 지리상으로 확인된 것이다.
한(漢)이 우리 옛 땅에 설치했다는 한사군(漢四郡)의 위치에 대해서는 지금도 사학계에서 논란이 되고 있지만, 이 지리서는 한사군인 현토·임둔·낙랑·진번 역시 기록해 연구에 단초를 제공하고 있다.
‘지리지’에는 구혁(溝洫 : 봇도랑)지가 필수적으로 따라야 했다. 당시의 강은 지리를 인식하는 데 중요한 요소였다. 강의 위치를 확인해야 땅의 위치도 확인할 수 있기에 말미에 구혁지(溝洫志)를 번역해 함께 엮었다.
반고는 구혁지를 찬술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중국이 사재(四載 : 의복, 음식, 침구, 탕약)를 옮기는 데 온갖 개울[川]이 이를 인도했다. 오직 하수(河水)만이 어려움을 주어 재앙이 후대에 이르렀다. 상(商 : 殷)나라가 운명이 다하고 주(周)나라로 천명이 옮긴 뒤 다시 진(秦)나라에 이르러 남쪽의 물가를 텄다. 한(漢)나라에 이르러서는 북쪽으로 하수의 여덟 가지 지류(支流)를 없앴다. 문제(文帝)는 하수를 산조(酸棗)에서 막았고, 무제(武帝)는 호가(瓠歌)를 지었다. 성제(成帝)때 하평(河平)의 연호(年號)가 있은 뒤에 드디어 비가 주룩주룩 내렸다. 이 때문에 구혁(봇도랑)을 파 이르도록 해 나라를 이롭게 했다. 이에 구혁지를 기술한다.”
이와 같이 지리지에는 필수적으로 구혁지가 따르게 마련이다. 본래는 지리지만을 번역하려 했으나 지리와 구혁은 바늘과 실과 같은 존재임을 알고는 구혁지도 함께 했다.
그렇다면 『한서(漢書)』 120권을 편찬한 반고(班固)는 어떤 사람인가?
반고(班固)는 후한 초기의 사람이다. 자는 맹견(孟堅)이며, 사마천(司馬遷)보다 약 180년 후에 출생했다. 사가(史家)인 반표(班彪)의 아들이다. 그의 아우는 서역도호(西域都護)인 반초(班超)이며, 반소(班昭)는 여동생이다. 섬서성(陝西省) 함양(咸陽)이 고향이다. 그의 가계는 선비 집안으로 이름을 날렸으며, 아버지 반표는 당대의 저명한 사학자였다. 그러나 기록에 의하면 반고의 가정은 그리 넉넉하지 못했다. 동생인 반초는 처음 학문에 뜻을 두고 후한의 수도인 낙양(洛陽)으로 갔으나, 공부를 계속하려면 필사(筆寫)를 하면서 어머니를 봉양해야 하는 가난에 시달릴 수밖에 없음을 깨닫고 학문을 포기, 무인이 되었다고 했다.
반면 반고의 학문적 재질은 일찍부터 드러났다. 16세에 수도 낙양의 최고 교육기관인 태학(太學)에서 학문을 닦았다. 아버지의 죽음을 계기로 낙향해 본격적인 『한서』 편집 작업에 들어갔다. 그러나 62년경 국사를 개작한다는 모함을 받아 투옥되었다. 아우 반초의 노력으로 명제(明帝)의 용서를 받은 뒤 20여 년을 매달려 『한서』를 완성했다. 화제(和帝) 때 두헌(竇憲)의 중호군(中護軍)이 되어 흉노 원정에 수행한 뒤 92년 두헌의 반란사건에 연루되는 바람에 옥사했다. 이러한 죽음에도 불구하고, 반고는 60여 년의 생애에서 『한서』라는 불멸의 사서(史書)와 함께 자신의 이름을 남긴 것이다.
필자는 한학에 천학비재(淺學菲材)함에도 욕심만 많아 3년여 각고(刻苦) 끝에 어렵사리 지리지와 구혁지를 함께 묶어 내놓았다. 완벽을 구하지 못한 점이 그저 송구할 따름이다. 오로지 강호(江湖) 제현(諸賢)의 질책을 구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