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쌍계사(雙磎寺) 경남 하동군 화개면 쌍계사길 59 ☎ 055-883-1901
경남 하동군 화개면 운수리 207
신라 성덕왕 23년(724)에, 의상의 제자 삼법(三法)이 창건하였고 정강왕 때 쌍계사(雙磎寺))라는 이름을 얻었다. 인조 10년(1632) 벽암(碧巖)스님에 의해 중건된 이래 오늘에 이르고 있다. 경내에는 국보 제 47호인 진감선사대공탑비(眞鑑鮮師大空塔碑)를 비롯하여 보물 제 380호의 쌍계사 부도(浮屠),보물 제 500호의 대웅전 등의 지정 문화재가 있고, 이 밖에 오층석탑, 석등, 일주문, 팔상전, 명부전, 천왕문, 중국의 승려 혜능의 두상을 봉안했다는 금당(金堂)에 있는 육조정상탑(六祖頂相塔)과 나한전, 금강문, 칠불아자방(七佛亞字房)ㆍ마애여래좌상(磨崖如來座像) 등 많은 문화재가 있다.
쌍계사는 우리나라 8대 총림 중 쌍계총림이다.
총림(叢林)은 범어로는 Vindhyavana라고 표기하며, 빈타파나(貧陀婆那)라 음역하며, 단림(檀林)이라고도 한다. 승속(僧俗)이 화합하여 한 곳에 머무름(一處住)이 마치 수목이 우거진 숲과 같다고 하여 '총림(叢林)'이라 부르는 것이다.
총림이 되기 위해서는 승려들의 참선수행 전문도량인 선원과 경전 교육기관인 강원, 계율 전문교육기관이 율원, 염불수행을 전문적으로 전수하는 염불원을 모두 갖춘 사찰을 지칭한다.
쌍계사는 지리산(지리산은 방장산:方丈山이라고도 불리움)의 장엄함과 섬진강의 평화스러움이 절묘한 조화를 이룬 곳에 자리하고 있다. 지리산은 금강산,한라산과 함께 삼신산(三神山)이라 하여 옛부터 영산으로 숭배되어 왔다. 724냔 (신라 성덕왕23년) 의상대사의 제자인 삼법(三法)화상이 당나에서 육조혜능의 정상(頂相)을 모시고 눈 속에 칡꽃이 핀 곳에 봉안한 것이 그 시초이다.
이후 당나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진감혜소국사(眞鑑(慧昭國師가 지리산에 내려와 머물 곳을 찾던 중 범 몇 마리가 옛 삼법스님이 세운 절터로 인도하여 840년(신라 문성왕 2년) 이 곳에 대가람을 중창하고 절 주위에는 중국에서 가져온 차를 심고 옥천사(玉泉寺)라 하였다. 정강왕 때, 바위 사이를 흐르는 두 계곡물이 절 입구에서 만나므로 쌍계사라는 이름을 하사하고 최치원으로 하여금 "쌍계석문(雙磎石門)을 쓰게 하여 바위에 새겼다.
쌍계사는 도의국사와 동시대에 활약한 진감국사가 육조 혜능선사의 남종 돈오선을 신라에 최초로 전법한 도량이자 차의 발상지이며 해동범패(梵唄:불교음악)의 연원이다. 그러므로 쌍계사는 선(禪)ㆍ다(茶)ㆍ음(音)의 성지로 일컬으지며 국사암,불일암,도원암 등의 암자가 있으며 조계종 제 13교구 본사이다.
서산대사의 중창기를 보면 중섬(中暹), 혜수(惠修)스님의 대대적인 중창이 있었으나, 임진왜란으로 폐허가 되었다.
임진왜란 후 벽암(碧巖), 소요(逍遙),인계(印戒),백암(栢庵),법훈(法訓), 용담(龍潭)스님등이 중창을 하였고, 1975년부터 고산스님에 의해 복원, 중수 중창을 거쳐 현재와 같은 대가람의 사격을 갖추고 있다.
쌍계사는 진감선사에 의해 이루어진 금당영역과 임진왜란 이후 벽암 각성스님에 의해 중수된 대웅전 영역으로 금당은 남향을, 대웅전은 서향을 향하여 각을 이루는 파격적인 구도를 나타내고 있다.
산내 암자로는 국사암과 불일암이 있고, 문화재로는 국보 1점, 보물 6종(20점), 지방문화재 12점, 문화재자료 5점, 천연기념물 2곳 등을 보유하고 있다.
쌍계사 석문 - 맨처음 화개천을 가로지르는 쌍계교를 지나 늘어선 상가들을 지나면, 큰 바위 두개가 석문처럼 우뚝 서 있다. 우측에는 '雙磎'와 좌측에는 '石門'이라는 글자가 각각 쓰여 있는데, 전하는 바에 의하면 고운 최치원이 이 곳에 들렀다가 지팡이 끝으로 쓴 것이라 한다.
쌍계사 일주문
쌍계사 일주문(경남 유형문화재 제 86호) - 일주문은 속세를 떠나 부처의 세계로 들어서는 첫 관문으로, 항상 한결같은 마음으로 수도하고 교화하라는 뜻으로 세운 문이다. 양쪽에 하나씩의 기둥을 세워 지붕을 받치게 한다 하여 '일주문(日柱門)'이라 한다. 그러나 쌍계사 일주문은 보조기둥을 세워 일주문으로서의 성격을 잃어버렸다. 이 문은 1641년(인조 19)에 벽암스님이 지었다고 하며, 1977년 고산스님에 의해 중수되었다
쌍계사 일주문은 겹처마로 이루어진 다포계 팔작지붕 건물이다. 처마를 받쳐주는 기둥머리의 장식은 역삼각형의 거대한 모습을 하면서도, 출목의 간격이 넓고 가늘어 섬세하고 화려한 느낌을 준다. 넓은 지붕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받침기둥(活柱)을 하지 않고, 대신 기둥을 전후에 보조기둥을 설치함으로써 지붕의 안전성을 유지하였다. 일주문으로서는 드물게 팔작지붕인데다가 기둥머리 장식의 부재가 가늘고 섬세하여 장식성이 강하다는 점에서 조선시대의 양식보다는 근대적 성격의 건물이라 할 수 있다.
일주문에는 ‘삼신산쌍계사’‘선종대가람’이라는 두 개의 편액이 걸려 있는데,이는 근대 서화가로 이름을 떨친 해강 김규진(1868~1933)이 쓴 것이다.화려한 다포계 후기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는 일주문이다.
이 일주문은 산신산 외청교(三神山 外淸橋)를 건너면 만날 수 있다.
쌍계사 금강문(金剛門)
쌍계사 금강문(경남 유형문화재 제 127호) - 금강문은 일주문을 지나 절 안으로 들어갈 때 두 번 째로 통과하는 문이다. 여기는 천왕문과 함께 사찰에 들어갈 때 불법을 수호하고 속세의 더러움을 씻어낸다는 의미를 갖는 장소이다. 이 곳에는 불법을 수호하고 악을 물리치는 금강역사(金剛力士)가 모셔져 있다. 이 건물은 840년(신라 문성왕 2)에 진감선사가 창건하였으며,1641년(인조 19)에 벽암스님에 의해 그리고 1979년에 고산스님에 의해 각각 중수되었다.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으로, 기둥의 장식들을 간략하게 처리하였다, 건물의 기둥이 높은데 비해, 겹처마로 이루어진 처마는 그 내밀기가 짧아 균형미를 잃고 있다. 지붕의 양 측면에는 비바람으로부터 건물을 보호하기 위해 풍판(風板)을 달았다. 3칸의 중앙을 통로로 개방하였으며, 좌우 측면의 바닥에는 지면에서 약 45Cm 가량 높여서 마루를 깔았다. 좌측에는 언제는 부처님에게 바짝 붙어, 그를 보호하면서 비밀스러운 내용을 들으려 한다는 밀정금강을 모시고 있고, 우측에는 엄청난 힘을 갖고 있는 신을 뜻하는 나라연금강을 모시고 있다. 이 곳 금강문처럼 금강역사를 모시고 있는 금강문은 흔치 않아 문화재로서의 가치가 높다, 현판은 벽암스님의 글씨이다.
금강역사 옆에는 각각 사자를 탄 문수동자와 코끼리를 탄 보현동자가 모셔져 있다.
이 금강문 좌측에는 죽림(竹林)이 이 있다.
금강문을 지나 내청교(內淸橋)를 건너면 천왕문을 만날 수 있다.
쌍계사 천왕문
쌍계사 천왕문(경남 유형문화재 제 126호) - 천왕문은 절 안으로 들어올 때 일주문과 금강문 다음으로 통과하는 세 번 째 문으로, 사천왕상을 모신 전각이다. 사천왕은 부처에 귀의하여 불법을 수호하고, 수도승과 불자들을 돕는 4명의 수호신이다. 수미산을 중심으로 동쪽은 지국천왕, 서쪽은 광목천왕, 남쪽은 증장천왕, 북쪽은 다문천왕이 다스린다. 수미산이 부처가 거처하는 이상의 세계이고 사찰이 수미산을 이 땅에 재현한 것이라면, 천왕문을 통과했다는 것은 이미 부처의 세계에 들어서게 되었다는 뜻이다. 쌍계사 천왕문은 1704년(숙종 30)에 백봉스님이 창건하였고, 1825년(순조 25)과 1978년에 다시 중수(고산스님)되었다. 정만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의 건물로, 공포를 간략하게 처리하여 소박하고 단아한 느낌을 준다. 천왕문 안에 봉안되어 있는 사천왕상은 조성 기법이 뛰어나 천왕문의 문화재로서의 가치를 더욱 높여주고 있다. 사천왕의 발밑에는 2군데는 생령좌가, 2군데는 탐관오리가 있어서 흥미롭다. 쌍계사 구층석탑 쌍계사 구층석탑 - 이 탑은 고산스님이 인도성지 순례를 마치고 돌아올 때 스리랑카에서 직접 모셔온 석가여래 진신사리 삼과와 산내 국사암 후불탱화에서 출현한 부처님의 진신사리 이과와 전단나무 부처님 일위를 모셨다. 이 탑은 국보 제 48호 월정사 팔각 구층석탑과 유사한 형식으로 불기 2531년(서기 1987년)에 시공하여 불기 2534년(1990년) 3월 15일에 완성하였다. 9층석탑을 지나면 게단이 있고 계단 위에 팔영루가 우뚝 서 있다. 팔영루 좌측에는 범종루이다. 쌍계사 팔영루(八詠樓) 쌍계사 팔영루(八詠樓) - 이 건물은 통일신라 840년(문성왕 2) 진감선사(眞鑑禪師:774~850)가 창건하였다. 그 뒤 1641년(인조 19)에 벽암(碧巖) 각성(覺性)스님, 1978년에 고산스님이 각각 중수하였다. 이 곳은 우리나라 불교음악의 창시잔인 진감선사가 중국에서 불교음악을 공부하고 돌아와 우리 민족에게 맞는 불교음악인 범패(梵唄)를 만든 불교음악의 발상지이자 범패 명인들의 교육장이다. 진감선사가 섬진강에 뛰노는 물고기를 보고 팔음률로서 《어산(魚山)》을 작곡했다고 하여 팔영루라고 한다. 건물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목조와가로서 2층으로 되어 있고 총 건평은 106평이다. 부처나 보살을 봉안하지 않은 곳이어서 공포를 배치하지 않은 민도리양식이다. 팔영루는 통일신라 시대에 진감선사가 처음 세운 뒤 우리 민족에 맞는 불교 음악(범패)을배출한 교육장소로서 의미가 크다. 또 범패의 명인을 교육시켰던 교육장이라고도 전한다. 쌍계사 범종루 쌍계사 범종루 - 범종루는 팔영루 좌측에 위치하며 아래에서 보면 2층의 누각형태이고 안쪽에서 보면 단층 처럼 보인다. 안에는 불전사물인 범종, 법고, 목어 운판이 장엄되어 있다. 팔영루를 지나면 중앙에 진감국사탑비가 있고 우측으로는 설선당 좌측으로는 적묵당이 위치하고 있다. 쌍계사 진감국사탑비 쌍계사 진감국사탑비(眞鑑國師塔碑,국보 제 47호) - 산라말의 명승 진감선사의 높은 덕과 법력을 앙모하여 도를 닦은 옥천사를 쌍계사로 고친 뒤 정강왕 2년(887)년에 건립한 것으로 고운 최치원이 비문을 짓고 썻으며, 승려 빈영이 새겼다. 고운 최치원의 사산비의 하나로 유명하다. 진감선사는 애장왕 5년(804년)에 입당하여 신감대사(神鑑大師) 아래에서 계를 받았고, 각지를 만행한 뒤 흥덕왕 5년(830년)에 귀국하여 역대의 왕에게 숭앙을 받다가, 77세의 나이로 옥천사에서 입적하였다. 선사의 업적은 선(禪)과 차(茶)와 범패(梵唄)를 선양한 것이다. 비의 높이는 3m 63cm, 탑신의 높이는 2m 2cm, 폭은 1m, 귀부와 이수는 화강암이고, 비신은 흑대리석이다. 현재 비신은 우측 상부에 크게 흠락된 부분이 있고, 또 균열이 상당히 심하다. 중앙에 높직한 비좌를 마련하였는데 4면에는 운문이 있고, 상면에는 비신에 맞게 구멍이 뚫어져 있다. 귀두는 짧고 추상적인 동물의 머리로 표현되어 신라 후기의 특징을 잘 보이고 있다. 이수는 양측을 비스듬히 자른 오각형으로 4면에 쟁주하는 용이 있고, 전면 중앙에 방형으로 깊이 판 제액이 마련되어 있으며 비문의 자격은 2.3cm, 자수는 2.323자이다. 쌍계사 설선당 쌍계사 설선당(設禪堂, 경남 문화재자료 제 153호) - 이 건물은 스님들이 기거하고 공부하는 요사채이다. 진감선사가 대웅전과 함께 이 건물을 처음 세운 것은 840년(문성왕2)이며, 이후 1641년과 1801년에 중건, 중수된 것을 1974년 다시 중수하여 지금에 전하고 있다. 본 건물은 정면 7칸, 측면 3칸 들보 5량(樑)으로 구성된 큰 규모의 홑처마 맞배지붕 건물이며, 남측 2칸은 틔워서 부엌으로 사용하고 있고 나머지 온돌방 5칸도 틔워서 강의하는 장소로 쓸 수 있게 되어 있다. 굵은 부재로 구성된 부엌의 상부와 북측면 2칸의 조성방식이 특이하다. 설선당은 현재 스님들이 강의를 듣는 공간과 바루공양하는 곳으로 사용되고 있다. 정면에는 회산 박기돈이 쓴 ‘설선당’ 편액이 걸려 있다. 설선당 우측에는 해탈문이라는 출입문이 있다. 쌍계사 적묵당 쌍계사 적묵당(寂默堂, 경남 문화재자료 제 46호) - 이 건묻은 스님들이 기거하고 공부하는 요사채이다. 진감선사가 대웅전과 함께 이 건물을 처음 세운 것은 840년(문성왕 2)이며, 이후 1641년에 중창된 것을 1978년에 고산 스님이 다시 중수하여 지금에 전하고 있다. 본 건물은 정면 6칸, 측면 3칸에 들보 5량(樑)으로 구성된 큰 규모의 홑처마 맞배지붕 건물이다. 기거할 수 있게 바닥은 온돌로 되어 있지만 남측 2칸은 대청을 깔아서 2층 구조로 만들었다. 그 아래 부분에는 아궁이가 있고 땔나무를 저장하였으며, 위 우물마루 대청은 초심자 스님에게 강의하는 곳으로 사용되었다. 건물 앞 뒤에 툇마루를 두었고,뒤 툇마루 상부는 특이하게 반자로 천장을 만들었다. 좌우 툇간을 팔작집처럼 대들도 위에 충보(衝樑)를 걸쳐 조성한 것도 흔치 않은 것이다. 정면에는 회산 박기돈(1873~1948)이 쓴 '적묵당'편액이 걸려 있다. 그 좌측에는 여여문이 있다. 쌍계사 석등 쌍계사 석등(石燈, 경남 유영문화재 제 28호) - 대웅전 앞에 서 있는 이 석등은 절 안의 어둠을 밝힐 뿐만 아니라, 빛으로 부처님의 진리를 비춤으로써 중생을 깨우치 선한 길로 인도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쌍계사 석등은 등불을 놓는 화사석(火舍石)이나 지불돌과 같은 중요한 부분이 없어서 원형을 알기 어렵다. 위 받침돌은 여덟 폭의 연꽃부리가 위로 향하도록 조각하였으나, 아래 받침돌은 반대로 꽃부리를 아래로 향하게 하여 서로 대칭을 이루게 하였다.받침돌에 새겨진 연꽃무늬는 입체적이며 사실감 있게 처리하였다. 그에 비해 석등이 중앙부에 서 있는 기둥은 가늘고 길며 단순한 형태로 만들어져 있다. 꼭대기 부분에 있는 위로 향해 핀 꽃잎이나 꼭대구부분 받침대, 둥근 구슬모양 등은 석등과 관계없는 석탑의 재료이다. 원래의 형태를 알기 어렵지만, 받침돌에 새겨진 치밀한 연꽃무늬와 중앙 기둥의 단조로운 처리 등을 볼 때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쌍계사 대웅전(보물 제 500호) 쌍계사 대웅전(보물 제 500호) - 722년에 신라의 대비화상과 삼법화상이 옥천사를 세운 것이 기원이다. 정강왕(886-887)이 두 계곡이 만나는 절의 지형을 보고 이름을 쌍계사로 고쳤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불탔던 것을 1632년에 벽암대사가 다시 고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쌍계사의 중심인 대웅전은 부처(여래)를 모신 법당으로 정면 5칸,측면 3칸 규모이다. 팔자 모양의 팔작지붕은 얹었고, 지붕과 기둥사이는 3단의 목조장식으로 받쳤는데, 밖으로 드러난 목재들이 복잡하면서도 우아한 곡선이 오래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내부의 천정은 모난 우물모양으로 꾸몄고, 부처의 하늘을 상징하는 닫집은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다. 직선에 가깝고 비교적 높은 기둥은 건물을 규모를 느끼게 한다. 기둥 사이에는 위에 장방형 창과 아래에 4짝의 여다이문을 달았다. 여닫이문의 아래에 있는 8각의 창은 대개 조선시대 말부터 대웅전에 채용되기 시작하는 것으로 알려져, 시기적으로 200년 이상 빠른 예에 속하고 있다. 기둥의 전면을 가득 채운 용과 구름무늬, 내부를 빈틈없이 꾸미고 있는 비단무늬, 회화적인 단청 등이 보물로서의 가치를 더하고 있다. 이 대웅전은 조선시대 불교건축의 모습을 잘 보존하고 있어, 우리나라 건축사와 미술사 연구에 아주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안에는 삼불(三佛) 사보살을 모셔 놓았다. 대웅전에는 크게 보아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그 좌우에 약사여래불과 아미타불을 모셔놓았다. 세부적으로 보면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문수보살, 보현보살이 협시 약사여래를 중심으로 좌우에 일광보살, 문수보살이 협시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보현보살, 대세지보살이 협시하는 형태이다. 좌로부터 관세음보살 아미타불 보현보살 석가모니불 문수보살 약사여래불 일광보살의 형태이다. 쌍계사에서는 대웅전 내에는 친절하게도 부처님 명호를 위의 도식으로 안내를 하고 있다. 일반적인 도상으로 보면 약사여래불 좌우에는 일광보살 월광보살이 협시하고 아미타불 좌우에는 관세음보살 대세지보살이 협시하는 형태이다. 이 형식에 맞게 재구성을 해보면 좌로부터 대세지보살 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석가모니불 월광보살 약사여래불 일광보살이 될 터이다. 쌍계사 홈페이지에서는 이 내용으로 설명이 되어 있다. 쌍계사 대웅전 내 감로탱 쌍계사 감로왕도(보물 제 1696호) - 쌍계사 감로도는 현재 쌍계사 성보박물관 2층 진열실에 전시되어 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대웅전에는 복사본인 모양이다. 전체적인 상태는 양호한 편이며, 화면 향우측 하단 雙松 위쪽으로 구름에 흰색의 보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쌍계사 감로도는 구름을 경계로 상단에 구름을 타고 강림하는 불·보살군이 있고, 하단에는 아귀와 제단, 召請儀式을 행하는 승려들 그리고 육도제상의 일들이 전개되어 있다. 우선 상단의 불·보살군을 살펴보면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듯한 구름 위에 모두 답할연좌(踏割蓮座)를 밟고 서 있으며, 제단으로 시선이 모아지는 구도를 이루고 있다. 쌍계사 대웅전 내 삼장탱 쌍계사 삼장보살탱(경남 유형문화재 제384호) - 쌍계사 삼장보살탱은 통일신라시대의 사찰인 쌍계사에 보관되어 있다. 이 탱화는 조선 정조 5년(1781) 5월에 제작되었는데, 금어(金魚) 승윤(勝允), 만휘(萬輝), 홍원(泓源), 지순(智淳) 등을 비롯하여 평삼(平三), 단해(端海), 승문(勝文), 함식(咸湜), 왕연(旺演), 유성(維性), 출정(出定), 왕인(旺仁), 보신(普信), 극찬(極贊), 찰삼(察森), 두찬(斗贊), 거봉(巨奉), 계탁(戒卓), 월현(月賢), 능치(能治) 등 편수(片手)에 16명이나 참여하였다. 쌍계사 동영상 쌍계사 명부전 쌍계사 명부전(冥府殿, 경남 유형문화재 제 123호) - 1974년 12월 28일 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123호로 지정되었다. 지장보살을 본존으로 봉안하여 좌우에 도명존자(道明尊者)와 무독귀왕(無毒鬼王)이 협시하고 그 좌우에 명부시왕상(冥府十王像)을 안치한 곳이다. 명부전은 칠성각, 산신각, 독성각 등과 함께 한국 사찰에서만 볼 수 있는 전각으로 한국 불교의 토착화를 보여주는 증거가 된다. 1687년(숙종 13) 성안대사가 창건하였고 1710년(숙종 36) 신민대사가 중수하였다. 규모는 정면 5칸, 측면 2칸의 5량 구조이며 익공계 맞배지붕집이다. 익공은 출목(出目)이 있는 2익공계이며 옆에는 풍판(風板)을 두어 상부구조를 비바람으로부터 보호하고 있다.
쌍계사 마애불 쌍계사 마애불(磨崖佛, 경남 문화재자료 제 48호) - 배흘림기둥 사이에 좌정하고 계시는 부처님 모습이다. 쌍계다 대욷전에서 오른쪽 명부전 방향으로 보면 커다란 자연암벽에 부처님이 다소곳이 앉아계신다. 커다란 귀에 동그란 상호, 명상에 잠긴 눈과 단정한 자세가 맑은 수행자 같은 인상을 준다. 큰 암석을 깊이 파내고 그 안에서 부처님을 두껍게 양각하였다. 부처님 두상 위를 자세히 살펴보면 얕게 기둥을 새긴 것을 볼 수 있다. 기둥 준간이 볼록한 부석사 무량수전 해블림기둥 같아서 이 부처님을 고려시대에 조성했다고 추정하는 근거가 된다. 부처님이 양 기둥 사이에 앉아 계셔서 암벽이 법당 같아서 편안해 보인다. 부처님이 서북쪽 방향으로 계셔서 오후 3시까지도 햇빛이 비치지 않아 표정이 잘 살아나지 않지만 늦은 오후 해가 황장봉에 걸릴 무렵 부처님 얼굴에 미소가 살며서 피어나서 태양의 각도가 조금씩 떨어질 때마다 표정을 달리하며 천진하면서도 고요한 모습을 보여주신다.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특이한 모습의 마애불이다. 큰 바위에 두터운 돋을새김으로 불상을 새기고, 불상의 둘레를 깊이 파내 감실(龕室)에 모셔진 부처와 같은 느낌을 주고 있다. 머리가 크고 살집이 많은 얼굴에 어깨까지 쳐진 귀는 자비로운 느낌을 주고 있다. 부처의 손은 법의(法衣)로 덮여 있는데, 전체적은 모습이 아주 소박하여 부처라기보다는 승려의 모습과 같은 마애불이다. 쌍계사 첨성각(瞻星閣) 쌍계사 첨성각(瞻星閣) - 첨성은 별의 움직임을 살펴본다는 의미이다. 부처님께서 새벽별을 보고 깨달음을 얻어셨으니 수행자들도 부지런히 공부하라는 의미이겠으나, 현재 쌍계사 첨성각은 어떤 용도로 쓰여지고 있는지에 대한 안내가 없다 쌍계사 나한전 쌍계사 나한전(경남 유형문화재 제 124호) - 쌍계사 나한전은 첨성각 옆에 자리잡고 있다. 나한전은 인간 세계의 온갖 번뇌를 끊고 세상의 이치를 깨달아 부처의 경지에 이른 16나한을 봉안한 곳으로, 응진전이라고 한다. 나한에 대한 신앙은 삼보 가운데 하나인 수도승에 대한 승보 신앙의 결과로 생긴 것이다. 쌍계사 나한전에는 석가여래를 본존불로 하고 그 좌우에 16나한을 모시고 있다. 이 전각은 840년(신라 문성왕 2년)에 진감선사가 창건하였으며, 1641년에 벽암선사가 중수하였다고 한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서, 마주보고 있는 명부전과 흡사한 양식이다. 기둥은 배흘림이 거의 없이 가늘며 높이도 낮으므로 건물을 더욱 왜소하게 보이게 한다. 이러한 왜소함 때문에 건물의 기단을 화강암으로 높게 쌓음으로써, 주변의 대웅전 및 명부전과 균형을 맞추고 있다. 건물 규모가 작고 사용된 목재의 치수도 작으며 장식도 생략되어 전체적으로 소박한 느낌을 준다. 우리가 쌍계사를 참배하는 날은 나한전 문이 굳게 닫혀 있어 내부를 참배할 수 없었다. 쌍계사 화엄전 쌍계사 화엄전(華嚴殿) - 화엄전은 쌍계사 불경 목판을 보관한 전각이다. 중앙에 비로자나부처님을 모시고 그 좌우에 불경 목판을 보관하고 있다. 하동 쌍계사 불경 목판(경남 유형문화재 제 185호) - 불경 목판은 1603년에서 1903년까지 여러 차례 제작된 것이다. 수량은 불경과 불교 관련 서적 등으로 총 36종, 1,743매이다. 우리나라에서 쌍계사는 해인사 다음으로 많은 경판을 보관하고 있는 셈이다. 쌍계사의 말사인 능인암(能仁庵)에서 간행하여 쌍계사로 옮겨온 것이며, 나머지는 쌍계사 본사와 국사암, 칠불암 등에서 간행한 것이다. 능인암판은 대부분 1603년~1604년에, 국사암판은 1903년에 간행되었으며, 그 나머지는 17세기와 18세기에 간행되었다. 쌍계사 화엄전에 보관된 불경 목판은 쌍계산의 오랜 역사와 함께 하여 400여년에 걸친 목판의 변천사를 보여준다. 한편, 국보 제 47호인 쌍계사 진감선사 탑비가 훼손되어 있지만, 1726년(영조2)의 "유당신라국지리산쌍계사교시진감선사비명병서음각판(有唐新羅國智異山雙磎寺敎諡眞鑑禪師碑銘幷序陰刻板)"의 목판이 있음으로 그 내용을 온전히 파악할 수 있다. 쌍계사 불경 목판을 통해 각 시기 많이 읽힌 불경의 종류와 당대를 살았던 고승의 자취를 느낄 수 있다는 점에서 우리 불교 문화유산의 가치를 더해준다. 쌍계사 금강계단 쌍계사 조실 고산스님 금강계단 조성기문 엎드려 들으니 선사 대은율사께서 칠불사에서 7일간 용맹기도 중에 서상수계하시고 전수계맥하되 계단을 정하지 않으시니 산승이 1988년 무진년 음력 7월 17일에 쌍계사 대웅전에서 7일간 용맹기도를 시작하여 제5일인 7월 21일 오후 기도 중에 석가모니불과 문수보살,미륵보살이 오색구름 위에서 나투시고,삼존불 아래 허공 중에 금자사구가 나타나니 심직명지계 심곡명훼범心直名持戒 心曲名毁犯 하리라는 서상계를 받고는 불은에 보답코져 국내,국외의 크고 작은 사암을 가리지 않고 보살계 전계전법에 전념하여 쉬지 않았으며 또한 대은율사서상계맥을 국내외 승속불자가 전수 받지 않음이 없으나 근본계단이 없음을 통탄히 여기고,나 또한 서상수계하였으나 근본계단이 없는 연고로 2007년 정해년에 불현듯 뜻을 내어 바로 대시주자를 만나 대은고산율맥계단을 원만조성하여 부처님 혜명이 영원히 끊어지지 않게 하니 유정들도 무정들도 모두 정계를 받고 번뇌를 여의고 보리를 이루어서 널리 중생을 제도하며 사바세계가 극락으로 바뀌어지고,이것을 보고 듣는 이는 부처를 이루어서 중생계가 다하도록 모두 다 상락아정을 즐길지어다 쌍계사 마애삼존불 쌍계사 마애삼존불 - 쌍계사 마애삼존불은 모셔져 있기는 하지만 이에 대한 안내문이 전혀 없어 아쉽다. 다만 서울 이태원에 거주하는 신춘호 거사님과 김덕성화 보살님 부부의 시주로 조성된 것만 확인되고 있다. 쌍계사 삼성각 쌍계사 삼성각(三聖閣) - 쌍계사 삼성각에는 칠성탱 산신탱 독성탱을 모셔놓았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쌍계사는 크게 대웅전영역과 금당영역으로 나뉜다. 대웅전영역 참배를 끝내고 금당영역을 참배한다. 금당역역은 옥천교(玉泉橋)를 건너서 108계단을 이용하여 오를 수 있다. 금당 돈오문(頓悟門) 돈오문에는 출입금지 표시가 붙어있어 금당영역의 참배는 다음으로 미루어야 했다. 금당(金堂) - 금당은 육조혜능대사의 정상(頂相, 머리)을 오신 곳으로 대한불교조계종의 근본도량이라 할 수 있다. 724년 삼법화상이 당나라에서 육조혜능의 정상을 모시고 눈속에 칡꽃이 핀 곳을 찾아 봉안한 것이 그 시초이다. 금당은 원래 부처님을 모신 전각을 의미하는데, 육조혜능대사의 정상을 봉안하고 금당이라고 이름한 것은 조사의 가르침을 중시한 선종사찰의 특징이다. '금당(金堂)과 세계일화 조종육엽(世界一花祖宗六葉)'이라는 현판은 추상 김정희의 글씨로 알려져 있다. 금당성지는 수행자의 공간으로 일반인들의 출입이 제한되며 하안거, 동안거 해제 후 3개월만 가능하고 한다. 금당 참배 가능일자 - 동안거 해제 후 음력 1월 16일 ~ 음력 4월 14일 - 하안거 해제 후 음력 7월 16일 ~ 음력 10월 14일까지 가능함. 금당영역에서 내려다본 쌍계사 쌍계사 도량배치도 16.반야실(주지실) 18.육화료 19.해행료 20.종무소 21.방장실 25.봉래당 26.영주당 28.동방장 29.서방장 31.범종루 32.해우소 33.공용화장실 34.샤워실 35.시민선방 쌍계사 참배를 마치고 대구불교대학총동문회 53선지식 단원들은 팔영루에 모여 108대참회기돋법회를 하였다. 무량행 김명숙 수석부단장의 사회로 진행된 법회에는 선지식 단원의 모두가 지극한 마음으로 기도에 임하였다. 108대참회기도가 끝나고 3년간 수고하신 집행부님들께 감사의 선물을 전달하는 전달식이 있었다. 다선 정종국 전임단장님 청백 최영찬 전임 총무국장님(다인수 김종순님이 대신 수상) 범공 임동명 전임 기획국장님 무량화 진정옥 전임 홍보국장님 오조 서상호 전임 총무차장님 경담 김영호 전임 기획차장님 법안 박재기 전임 감사님 다음은 지난 1년간 수고하신 집행부에 대한 감사의 선물 전달식이 있었다. 안연화 최영옥 전임 재무국장님 청수 오희수 전임 재무차장님(도반 총무인 고정란님이 대신 수상) 심향 김용선 전임 홍보차장님 지난 3년간 또는 1년간 참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이어서 새로운 집행부의 소개 및 인사가 진행되었다. 우담 이경태 신임 단장님의 인사 무량행 김영숙 부단장님의 인사 범공 임동명 총무국장님의 인사 초연성 김해숙 재무국장님의 인사 경담 김영호 기획국장님의 인사 심향 김용선 홍보국장님의 인사 새로이 집행부를 맡으신 분들 앞으로 많은 활약 부탁합니다. 신임 집행부 소개 및 인사가 끝나고 축사와 축시가 계속되었다. 대웅 김상수 고문님의 축사 다선 정종국 전임 단장님의 축시 초연성 김해숙 재무국장님의 재무보고 법회를 마치고는 남원의 춘향테마파크로 이동을 하였다. 변사또의 수청을 거절해서 옥에 갇혔던 춘향이가 암행어사로 돌아온 이몽룡과 재회의 기쁨을 나누며 오래 오래 잘 살자는 약속을 다짐하는 장면이다. 이몽룡은 말을 타고 춘향은 가마를 타고 가고 있다. 우리 53단원들을 위해 험한 가시밭길을 택하신 우담 이경태 신임단장님께 진심으로 감사하다는 말씀을 전하면서 모든 동문들이 일심으로 동참하여 순조롭게 운영되길 두 손 모아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향우측에는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과 지장보살(地藏菩薩)을 중심으로 세지보살(勢至菩薩)과 목건련존자, 아난존자가 한 그룹을 이루고 그 앞으로 칠여래(七如來)가 있으며, 그와 나란히 석가모니(釋迦牟尼)를 중심으로 사여래(四如來)와 삼보살(三菩薩), 그 뒤로 번을 들고 천의자락을 흩날리는 인로왕보살 등의 한 그룹이 있다. 향좌측 최상단에는 망자의 영혼을 극락으로 인도한다는‘벽련대반(碧蓮臺畔)’이 푸른 천공에 떠 있는데, 벽련대반은 18세기 감로탱에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도상의 하나로 修道寺 감로도(1786)와 같이 여러 무리들에 의해 호의를 받으며 운반되는 되거나 백천사 운대암(白泉寺 雲臺庵) 감로도(1801)과 같이 별도의 공간을 만들어 도상을 더욱 부각시키는 등 18세기 중·후반 이후에는 더욱 강조되어 표현되기도 한다.
하단의 화면 가운데에는 음식과 꽃 장엄이 베풀어진 제단과 도재를 거행하고 있는 야외법회장면이다. 연당초가 그려진 천을 덮고 자주색 천판의 시식대 위에는 흰쌀을 수북하게 쌓아 올린 제기와 감로수가 담긴 작은 종지가 제일 앞 열에 놓여 있고, 그 뒤에는 각종 과일을 담은 그릇과 그 사이사이에 초가 타오르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 3번째 열에는 화지(花紙)와 지전(紙錢)이 꽂혀 있으며, 시식대 양측에는 꽃이 담긴 큰 화병으로 장식되어 있다. 제단의 좌측으로 의식을 행하고 있는 승려들은 다른 군상들보다 좀도 부각되게 묘사되어 있는데, 의자에 앉아 금강령을 흔들며 고혼을 부르면서 재를 주도하고, 그 뒤로 각각의 손에 바라, 나발, 법고를 치는 범패승들이 있으며, 그 옆으로 재주(齋主)들이 녹색, 적색, 청색의 복식을 갖추고 시식대를 향해 절을 올리고 있다.
시식대 앞으로는 합장하는 아귀와 흰쌀을 수북이 담은 사발을 든 아귀가 있다. 발우를 든 아귀의 옆으로는 벌거벗은 아이의 모습으로 8명의 고혼(孤魂)이 표현되어 있는데, 고혼을 사람의 모습으로 묘사한 사례는 벌거벗은 3명의 소아가 불안한 모습으로 있는 약선사(藥仙寺)소장 감로도(1589)나 주색의 몰골법으로 사람의 형상을 그린 조전사(朝田寺) 소장 감로도(1591)에서 이미 보이고 있어 이러한 묘사법의 전통을 잇고 있는 것이 쌍계사 감로도(1728)라고 할 수 있다. 하단은 시식대와 아귀를 빙둘러 육도제상들이 묘사되어 있는데, 향좌측에는 유희를 즐기는 사당패와 재주를 넘는 아이들, 사미승을 질책하는 승려, 인간의 각종 죽음, 객사나 횡사자의 생전의 모습 등 다양한 모습들이 전개되어 있다. 제단의 좌측은 제단에 가깝게 배치된 장면에는 장수가 스스로 목을 자르는 모습과 好佛先王과 후비와 관료, 이에 관련된 인물들이 묘사되어 있고, 화면의 외곽과 아래에는 들불이 일어나 사람이 불길에 휩싸여 있는 모습이나 말발굽에 깔려 죽는 사람, 호랑이에 물려 죽는 사람 우물에 빠져 이를 보고 슬퍼하는 유가족 등 예기치 않은 죽음을 묘사하고 있다.
등장인물은 모두 중국식의 복제를 따르고 있으며, 이들 각각의 장면은 흰 구름이나 구릉산 위에 그려진 두 그루의 소나무로 구분되어 있다. 색채는 황색의 바탕 위에 붉은색과 녹색, 청색으로 진채의 색감을 살리고, 군데군데 인물들은 황백의 옷을 입어 화면의 단순함을 피할 뿐 아니라 부드러운 느낌도 주고 있다. 한편 화면의 상단과 하단을 구분하는 기괴하게 솟은 산들은 준법을 사용하여 높고 험한 산을 나타내었으며, 암산에 걸린 엷은 비취색, 황색, 자주의 구름은 먹선으로 윤곽선을 긋고 그 선을 따라 흰색으로 선염하여 입체적인 느낌은 물론 서운(瑞雲)의 분위기를 나타내었으며, 높은 천공의 이미지를 표현하기에도 손색이 없다.
가로가 긴 직사각형(243.7cm×373cm)인 1폭(11부(副) 1포(鋪))으로 원래 쌍계사 대웅전 신중탱(神衆幀) 옆에 봉안되어 있었으나 현재는 성보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쌍계사 삼장보살탱은 중앙에 천장보살(天藏菩薩)과 그의 권속들이 그려져 있고, 향우측(向右側)에는 지지보살(持地菩薩)과 그의 권속들, 향좌측(向左側)에는 지장보살(地藏菩薩)과 그의 권속들로 배치되어 있다. 탱화의 전체적인 구도는 2단으로 상단에는 천장·지지·지장보살이 표현되고 하단에는 대좌와 그 양옆에 권속들이 표현되어 있다. 쌍계사 삼장보살탱은 주로 적색과 녹색을 위주로 채색되어 흰색과 황색, 청색 등이 사용되었다.
탱화의 가장자리에는 붉은 선으로 테두리를 두르고, 그 외곽에는 호분을 바르고 있다. 특히 양록색의 사용이 돋보이는데, 이 색은 18세기 지리산일대와 전라도를 중심으로 활발하게 불화제작을 했던 의겸(義謙)이 즐겨 사용하던 색으로 호남지역 불화의 한 특징을 이루고 있다. 쌍계사 삼장보살탱은 양식적 특징과 구도 및 도상이 선암사 삼장보살도에도 그대로 계승되어 19세기 전라도지역 삼장보살도의 모본이 될 정도로 조선시대 불교회화사 연구에 중요한 학술적 자료이다.
직심근수행 이리구원성 直心勤修行 理利俱圓成
-----------------------------------
|
첫댓글 감사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고맙습니다
사진과 함께 상세한설명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준함님 수고 하심에 찬사를 보냅니다.
순례사진과 설명 글 상세하게 함께 올려 주시어
생동감 넘치는 순례 다시 한 번 더 볼 수 있어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나무 마하 반야 바라밀
수고 했습니다.
감사 해요...
감사합니다
사진과 글 고맙습니다 ㅎ
새벽 3시에 시작한 작업이 이제야 대충 끝났습니다.
읽어보시고 오자나 탈자, 내용상 오류 등이 있으면 댓글 부탁합니다.
상세한 설명과 사진 너무 감사 합니다!
정말 오래 남을 기록이 아닌가 싶습니다.
제가 본중엔 축시 낭독을 하신 전임단장님
법명이 다산이 아니고 다선인데요^^
급하게 하다 보니 몇 군데 오류가 있어서 수정하였습니다.
지적해주심에 감사합니다.
준함님도 엄지 척!!
바쁘신 와중에도 꼼꼼히 기록해 주신님
감사드립니다.
준함님 대단 하십니다..
보통 실력과 정성과 노력이 아니고는
만들수 없는 작업인데.. 세밀하고 그 많은 자료들을..
정말 감사하고 ..좋은 지식을 갖고 갑니다 ..
상세히도 기록하셨읍니다 감사하고 수고하셨읍니다
감사합니다. 사진과 설명이 함께 하니 더 재미나게 봅니다. _()_
수고 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