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후감 제목 : 주노야, 사보 너 팬
난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2년 동안 아프리카 짐바브웨에서 생활했다. 그 곳 학생과 선생님들은 모두 영어를 썼다. 어차피 내가 다니던 학교는 국제학교라 다른 유학생들도 많았지만 나를 비롯한 영어를 못하는 아이들에게는 훨씬 차별이 심했다. 그럴 때면 때로는 말로 안돼서 다시는 놀리지 말라는 경고로 때리기도 하였다. 내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까닭은 놀림받는 아이들 속에는 동생도 끼어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후로 내가 강하게 나갔기 때문인지 아이들은 다른 한국 아이들에게도 잘 대했다. 그런 나에게 영어를 가르쳐주신 분이 바로 사보선생님이었다. 내가 잘못했어도 내가 영어를 못해 불리해질까봐 내편을 들어주시고, 영어를 못한다고 차별하기는커녕 따로 시간을 내서 공부시키셨다. 다른 유학생들에게도 친절해 향수병에 시달리면서 언어의 장벽과도 싸워야하는 유학생들에게 엄마처럼 느껴졌다.
데쓰조와 고다니 선생님도 이런 관계가 아니었을까? 학생들 사이에 자연스럽게 어울리지 못하고 외톨이로 살고 있는 데쓰조와 피해를 보지 않기 위해 과도하게 경직되어 있었던 나, 그리고 마음이 문을 열기 위해 진심으로 정성을 다한 사보선생님과 고다니 선생님. 낯선 나라에서 깡마른 아이가 온 세상을 향해 적대감을 내비치고 있을 때 문제아로 밀어내지 않고 불리하지 않을까 먼저 살펴주신 선생님처럼 데쓰조를 찾아나선 고다니 선생님은 모두 훌륭한 선생님들이다.
수학여행을 갔다 오는 도중이었다. 버스 안에서 한 아이가 나를 힐끔거리며 “한국인은 꼭 중국인 같지? ”라고 하였다. 그러자 아이들이 "맞아, 맞아.” 하더니 나와 내 주위 친구들을 ‘치노~ 치노~’ 하면서 놀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중국애들이 가장 싫어하는 욕이란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순간 모든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다. 울그락 불그락하는 우리들을 보고 재미가 붙었는지 그 애들은 아예 일어서서 노래를 불렀다. 참다못한 우리들은 그 녀석들을 공격했다. 학교에 도착했을 때 우리 모두는 엉망이었다.
교장선생님이 사보 선생님과 우리들을 불렀다. 우리는 혼날 것을 각오했다. 아무리 변명해도 어설픈 우리 영어가 교장선생님께 통할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역시나 교장선생님은 “유학생들이 집단으로” 시작하는 일장연설을 하시는 듯했다. 우리들은 그 말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교장선생님이 얼마나 화가 나 있는지는 알 수 있었다. 이 때 사보선생님은 집단으로 먼저 놀린 것은 맞은 아이들이라고 하면서 강하게 우리 편을 들어주셨다. 우리들은 깜짝 놀랐다. 사보선생님은 우리를 혼내기는커녕 등을 두드리며 ‘파이팅!’ 해주셨다. 나는 그 때 난생처음 빨간 게를 갖게 된 데쓰조가 ‘나는 고다니 선생님이 좋다’는 말을 비뚤비뚤 써내려간 것처럼 어설픈 영어로 ‘땡큐’가 반이 넘는 편지를 써 선생님 책상에 올려놓았다. 다음 날 내 워커룸에는 선생님의 답장이 있었다. ‘주노야, 사보 니 팬’ 유치원생 글씨보다도 형편없는 한글이 써 있었다. 사보선생님은 어떻게 한글을 알았을까. 내 편이란 말을 쓰고 싶으셨을까, 아니면 내 팬이라는 말을 쓰고 싶으셨을까. 난 선생님이 내 연필이 되었다고 웃었지만 눈물이 핑 돌았다. 그 날 이후 난 아무리 억울한 일에도 쉽게 흥분하지 않고 남은 유학기간을 잘 이겨낼 수 있었다. 그것은 데쓰조와 쓰레기매립장 학생들에게 보여준 선생님의 진심이 마음을 움직여 행동을 이끌어낸 것처럼 일장연설이나 훈계가 아닌 마음으로 다가온 사보선생님에 대한 내 보답이었다.
데쓰조는 마음이 아픈 아이였다. 파리가 유일한 친구였던 것은 아무도 데쓰조에게 손을 내밀지 않았기 때문이다. 좋은 환경에서 어려움 모르고 자란 고다니 선생님에게 데쓰조는 이해할 수 없는 아이였을 것이다. 요즘은 가정방문도 하지 않는다. 하기 초면 하게 돼 있는 가정방문은 선생님도 학생들도 원하지 않는 행사이기도 하다. 쓰레기장 아이들에게 진정으로 다가가는 것은 어떤 선생님에게도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 같다. 그러나 진심은 소외로 높이 쌓인 아이들의 벽을 허물었다.
고다니 선생님이 사랑이 아픔없는 가운데 노력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아다치 선생님의 사랑은 아픔을 딛고 선 사랑이다. ‘형의 목숨을 먹고 자랐다’고 말하는 아다치를 보자마자 반 고흐가 생각났다. 자기 형이 죽은 날에 태어나 형의 이름을 물려받고 권총으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고흐의 뒤를 따라다닌 것은 형의 그림자였다. 아다치 선생님에 형의 죽음은 평생토록 갚아야 할 부채가 되었다. 형의 삶을 대신 산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자신에게 이롭고 편한 삶보다는 타인을 위해 희생하는 삶을 선택했던 것이다. 고흐가 형의 그림자를 그림으로 승화시켰으나 스스로 운명에 승복하고 말았다면 아다치 선생님은 더 많은 아이들에게 형의 사랑을 전파해 몇 배의 목숨을 사는 것으로 그 슬픔을 승화해내고 있었다.
고지의 선택도 가슴을 울렸다. 쓰레기처리장이 이전해 더 이상 예전 학교를 다닐 수 없었지만 고지는 가까운 학교를 놔두고 멀고 먼 학교로 다시 온다. 놀기 좋아하고 편한 게 좋은 아이들, 위험한 대로를 건너서 몇 시간이 걸리는 학교를 선택한 고지를 보통 사람이라면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부모님까지도 위험하다고 말렸지만 아무도 고지마음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자신을 인정해 주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이 무섭기도 하지만 자신을 처음으로 이해해주고 감싸준 선생님들이 있기 때문에 다시 돌아온 것이다. 사람의 마음은 어떤 힘으로도 강제로 끌 수는 없다. 돈보다도 힘보다도 더 강한 ‘진심’의 위력을 확인할 수 있었다. 어쩌면 비뚤어지기 십상이었던 유학시절, 사방에 유혹거리는 많았다. 부모님에 대한 그리움과 원망, 높은 기대에 대한 부담과 내 힘으로 어쩌지 못하는 주변상황이 모두 내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던 시절이었다. 데쓰조에게 파리와 고다니 선생님이 없었다면 데쓰조는 문제아가 되었을지 모른다. 고다니 선생님과 아다치 선생님은 내가 그동안 잊고 지냈던 사보선생님을 떠올리게 했다.
곧 스승의 날이다. 사보 선생님과 헤어진 지 3년이 되었다. 내 앨범 어느 구석에 비뚤비뚤 낙서한 것 같은 ‘ 주노야, 사보 니 팬’이 꽂아 있을 것이다. 그것은 내가 힘들 때마다 나를 웃게 만들던 편지였다. 그런데 벌써 나는 그런 기억마저도 잊고 그 편지가 지금의 나를 있게 했다는 것도 잊을 뻔했다. 이 땅의 모든 고다니, 아다치 선생님, 그리고 멀리 남아프리카에 살고 계시는 사보 선생님,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