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수의 행복을 비는 타자의 새벽 (외 3편)
성미정
잠에서 깨버린 새벽 다시 잠이 오지 않아
뒤척이다가 생뚱맞게 김혜수의 행복을
빌고 있는 건 인터넷 메인 뉴스를 도배한
김혜수와 유해진의 열애설 때문만은 아닌 거지
김혜수와 나 사이의 공통분모라곤
김혜수는 당연히 모르겠지만
신혼 초 살던 강남 언덕배기 모 아파트의
주민들이었다는 것
같은 사십대라는 것 그리고
누구누구처럼 이대 나온 여자
가 아니라는 것 정도지만
김혜수도 오늘 밤은 유해진과 기자회견
사이에서 고뇌하며 나처럼 새벽녘까지
뒤척이는 존재인 거지 그래도 이 새벽에
내가 주제 높게 나보다 몇 배는 예쁘고
돈도 많은 김혜수의 행복을 빌고 있는
속내를 굳이 밝히자면
잠 못 이루는 밤이 점점 늘어만 가고
오늘처럼 잠에서 깨어나는 새벽도
남아도는데 몽롱한 머리로 아무리
풀어봐도 뾰족한 답이 없는 우리 집
재정 상태를 고민하느라 밤을 새느니
타자의 행복이라도 빌어주는 편이
맘 편하게 다시 잠드는 방법이란 걸
그래야 가난한 식구들 아침상이라도
차려줄 수 있다는 걸 햇수 묵어
유해진 타짜인 내가 감 잡은 거지
오늘 새벽은 김혜수지만 내일은 김혜자
내일모레는 김혜순이 될 수도 있는
이 쟁쟁한 타자들은 알량한 패만
들고 있는 나와는 외사돈의 팔촌도 아니지만
그들의 행복이 촌수만큼이나 아득한 길을
돌고 돌아 어느 세월에 내게도 연결되지
말라는 보장도 없지 않은가
그러니 사실 나는 이 꼭두새벽에
생판 모르는 타자의 행복을 응원하는
속없는 푼수 행세를 하며 정화수 떠놓고
새벽기도 하는 심정으로 나의 숙면과
세 식구의 행복을 간절히 빌고 비는
사십 년 묵은 노력한 타짜인 거지
읽자마자 잊혀져 버려도*
쓰자마자 지워져 버려도
사이에
무명의 슬랩스틱 코미디 콤비
시인과 고통이 존재하느니
시인에겐 오래된 변비의 고통
이 고통에겐 배배꼬인 시인
이 시인에겐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기의 고통
이 고통에겐 이런 뻔뻔한 시
한 편조차 혼자서는 완성하지 못하는
시인이
제대로 교통하지 못해 스텝이 뒤엉킨 채
무명의 종이 위에 자빠지고 나뒹구는 밤
아무 쪽에도 쓸모없는 시를 긁적거리며
살아가는 주제로 고통은 늘 새롭고
시는 항상 진부하나니
시인과 고통은 항상 그렇게
엇박자의 코미디 콤비
웃자마자 눈물이 맺혀도
읽자마자 잊혀져 버려도
시인과 고통은 오늘도 한 편
건졌으리니
건졌으려나
————
* 읽자마자 잊혀져 버려도 : 일본 소설가 다카하시 겐이치로의 만화평론집 제목에서 빌려왔습니다.
뿔개울 옆 봄나무 사무소* 1
귀 먼 자들의 도시에서 나는
귀 파주는 가게나 하며 살고 싶다
장난질 같은 장난감 가게도
척하는 책 장사도 다 때려치우고
어딘가 존재한다는
뿔개울 옆 봄나무 사무소
한켠에 조그맣게 귀 파는 가게를 열어
우선은 일흔 하고도
네 살 겁 많은 아이가 돼버린
아버지의 귓속에 살기 시작한
이명씨를 살살 달래서 내보내고
자식들 모르게 순하디순한 엄마
귓속에 4 년 동안 세 들어 살았다는
망치 소리씨와 둥당 소리씨가
다시는 엄마 귀 근처에 얼씬도
못하도록 막아주고
스마트한 여고 동창 오수정의 29살
귓속에 1 년이나 살았다는 소음씨의
기억도 깨끗하게 파주고 싶은데
그래서 벌써 작은 은수저 모양의
귀이개랑 대나무 국자 같은 귀이개
지친 귀도 반드시 미소 짓게 만들
보드라운 솜털 달린 귀이개
까지 준비해 놓았는데
가 어딘지 아는 사람 아무도 없단다
그곳만이 귀 파주는 가게가 세 들기에
가장 이상적인 곳이라는데
천년에 한 번 뿔개울에서 떠내려왔다는
복숭아 꽃잎 한 장 보았다는
전설만 전해지고
아아 나는 당분간 이
귀 먼 자들의 도시에서
귀 달린 장난감과 귀 없는 책을
팔며 꿈속에서라도
로 향하는 길을 더듬어 보아야겠다
밤마다 두 뿔을 곤두세우고
멀리서 아련하게 물결에 밀려오는
분홍 복숭아 꽃잎 소리
를 가늠해 보며
* 일본의 출판사 角川春樹事務所를 풀어 읽음
뿔개울 옆 봄나무 사무소 2
아버지와 함께 이명 클리닉에 갔지요
눈을 감고 머리에 군데군데 전기 줄 연결하고 아버지는
뿔개울 옆 봄나무 사무소 가는 길을 더듬기 시작했지요
어떠세요 귀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세요
큰소리의 의사가 물었지요
가끔 지직 지직 소리도 들리고
쏴아 쏴 바람소리 같은 거
아주 가는 실개울 흐르는 소리 같은 것도 들리고
또 가끔 맴맴 소리도 들려요
사십 년을 한 베개 베고 잔 마나님 귀에도 들리지 않는
바람소리 곤충채집 좋아하는 귀 밝은
어린 손주들도 듣지 못하는 매미소리 들리며
그렇게 아버지의 유난히 커다란 귓속에서
계절이 뒤엉키기 시작했지요
귀만 큰 게 아니라 눈까지 커서 겁 많은
아버지 동무나 해드리려고 함께 간 이명 클리닉에서
아버지의 귀가 찾아가는 소리를 더듬어 보려고
아버지 귀 그림자 쪽으로 제 딴에 귀를 기울여 봤지요
그러나 저 뿔개울 옆 봄나무 사무소 앞
천년 동안 지지 않는 복숭아 꽃잎 한 장
쓸쓸히 개화하는 소리
그 소리 찾아가기엔 제 귀가 아직 좀 멀어
맘속에 쏴아 쏴 속절없는 바람만 일었지요
—시집 『읽자마자 잊혀져버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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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미정 / 1967년 강원도 정선 출생. 1994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대머리와의 사랑』『사랑은 야채 같은 것』『상상 한 상자』『읽자마자 잊혀져버려도』
출처: 푸른 시의 방 원문보기 글쓴이: 강인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