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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시인의 방 [蒜艾齋 산애재] 원문보기 글쓴이: 松葉
▲시집 [☆곰할머님 고맙습니다☆]의 앞표지(좌)와 뒤표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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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할머님 고맙습니다]
정대구 시집 / 지혜사랑시인선 119 / 도서출판지혜. 계간시전문지애지(2014.11.25) / 값 9,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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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할머님 고맙습니다
정대구
곰할머님 고맙습니다. 이 미련 곰탱이가 아직도 믿는 것은 오직 곰할머님뿐입니다. 지금은 아직 가재도 게도 아니지만 언제고 나름대로 제 이름을 얻겠지요. 요즘 녀석들 참 빨리도 호랑이처럼 나내는데, 난 달라요. 쑥내를 맡으며 백 일간 마늘을 씹겠어요. 궁핍한 동굴 속에서 미련곰탱이 곰할머니가 마침내 인간이 되듯, 환골탈태 나도 무엇인가 달라지겠지요. 어떤 모욕도 참고 견디겠지요. 이 치욕의 시대에 나의 거울이 되어 주신 곰할머님 고맙습니다.
* 알다시피 곰할머니는 우리나라 최초의 할머니입니다. 같은 굴속에서 어둠과 배고픔을 이기지 못하고 밖으로 뛰쳐나가 눈앞에 명리를 탐했던 성급한 호랑이와는 달리, 워낙 느긋하고 신심이 강한 우리들의 곰할머니는 한울님이 주신 쑥 한 줌과 마늘 20쪽으로 그 어두운 굴속에서 100일을 견뎌내고 드디어 아름다운 인간이 되어 한울님의 아들과 결혼하는 영광을 얻어, 우리의 조상 단군 할아버지를 낳았고 할아버지의 아들, 아들의 아들이 아버지를 낳고 나는 그 아버지의 아들임을 믿습니다. 나 그리고 우리를 있게 해주신 곰할머님 고맙습니다 -『삼국유사』권1「고조선」조 참조.』
바우에게 길을 물어
정대구
바우야
나 지금 어쩌면 좋으니
갈대처럼 흔들리는 이 마음
바우야
너도 나처럼 마음이 흔들렸었니
그런데 어떻게 참고 견디니 견뎠니
체념도 하고 기도도 해봤지만
바우야 바우야
나 지금 어쩌면 좋으니
캄캄한 제 몸 속에 들끓는 불
갈피갈피
불살라 길을 연 환한 바우야
나비꿈*
정대구
장주의『장자』를 읽다가 장주 선배와 함께 나도 나비가 되어 꽃밭을 훨훨 날아 다녔습니다. 아이들이 우리를 잡으려고 깡총깡총 뛰어오르기도 하고 살금살금 기어서 접근을 시도했지만 번번이 팔랑거리며 멀리도 아니고 아이들 가까이서 요리조리 맴돌며 재미있어 했습니다
그날 밤 어떤 아이가 어떤 나비꿈을 꾸게 될지 행운으로 그 아이 나비가 되고 나면 나비는 사람꿈 절대 꾸지 않겠지요,. 나비가 된 장주선배를 보세요. 벌서 몇 천 년째 장주로 돌아오지 않고 있잖아요., 나는 졸다가 고만 실수로 다시 사람으로 깨어났지만.
* 나비꿈은 장자 재물편의 호접몽을 패러다디한 것으로 실제 제물편의 내용과는 거리라 있음을 밝힘. 제물편에서 장주는 나비꿈에서 깨어나 인간으로 돌아옴을 후회함.
빈대와 고로쇠나무
정대구
어릴 적 내 살 속의 피를 빨아먹던 그 많던 빈대들 다 어디 갔나 했더니, 지리산기슭 고로쇠나무를 세워놓은 채 거기 붙어 서서 톱날 같은 이빨을 꽂아 넣고 고로쇠나무의 피를 긁어모으고 있었네. TV화면만 아니라면 당장 멱살을 잡고 메다꽂고 싶었는데, 그런데, 놀라운 것은 고로쇠나무의 참을성이라네. 몸이 약한 자, 목마른 자에게 자신의 몸을 내맡긴 채 살보시 피보시의 미덕이라니. 난 그러지 못했는데, 내 피를 빨아먹은 놈은 눈에 불을 켜고 보는 족족 잡아서 배를 터뜨려 짓뭉개버렸는데…
소나무는 보고 있다
정대구
소나무는 보고 있다
시퍼런 소나무는 보고 있다
실퍼렇게 눈을 뜨고
홍수로 거세계 흐르는 물을 보고 있다
시뻘겋게 흐르는 물을 보고 있다
멀리까지 보고 있다
멀리까지 흐르는 물을 보고 있다
사흘 뒤 닷새 뒤
시퍼런 물을 보고 있다
비를 맞아 더 시퍼런 소나무
입동이후
정대구
빗방울이 떨어진다
나뭇잎이 떨어진다
새의 깃털이 떨어진다
또 무엇이 떨어지나
먼지가 떨어지고
타다 남은 불똥이 떨어지고
따다 남은 열매가 떨어진다
그렇다 떨어질 것은
머뭇거리지 말고
이참에 다 떨어져라
떨어져라 작년에 떨어지다가
다 못 떨어진 것들까지
미련 없이 금년이 다 가기 전에
깨끗이 깨끗이 떨어져라
가을비가 떨어진다 눈물이 떨어진다
철적게 사흘을 두고 나흘을 두고
쉬지 않고 떨어진다
좋다 사흘 나흘 닷새 엿새 이레 여드레
아흐레
연속 연달아 떨어진들 어떠랴
지렁이의 비가悲歌
정대구
꿈꾸지 않기 천년을 꿈꾼들 하긴 지렁이 몸에 날개는 어울리지 않겠지요. 적어도 이무기쯤 돼야 용이 되는 꿈도 꾸고 굼뱅이라야 매미가 되지요, 무슨 천형天刑으로 평생을 got볕 피하기 기어서 땅 속으로 파고들기 숨어버리기
만의 하나 광명 찾아 기어 나왔다가는 곧 시뻘건 불벼락 맞고 말라비틀어지기 십상이지요. 죽는 그날까지 지렁이 도사가 진즉에 가르쳐 주었지요 지금도 어쩔 수 없는 한 많은 천추의 함원含怨 감추며 한밤중 땅 속에서 심금을 울어대는 찡한 핏빛 곱고 투명한 맑은 노래 다 이 때문이지요
하지만 주제파악도 못하고 남에게 밟힐 때마다 나는 환골탈태의 꿈을 꾸었지요. 못생긴 징그러운 벌레들도 무슨 무슨 나비 되어 아름다운 나비 되어 하늘 수놓듯 춤추듯 꽃밭을 날아다니지 않던가요. 그만도 못한 뒷간의 더러운 구더기들도 단 며칠 만에 날개를 달고 포롱포롱 사람 약 올리지 않던가요. 하오나 모기나 파리도 아무나 되는 게 아니더군요. 지렁이 도사가 진즉에 온몸으로 보여준 교훈을 지금서 딴 마음 먹으면 지렁이만 못한 놈 그런 인간 되지 않겠어요. 그저 나는 꿈틀거릴 뿐입니다 꿈도 저항도 없이 다만 꿈틀거릴 뿐
내 몸속의 바람
정대구
어디 숨어 있는지
바람이 숨을 죽이고
머리카락 도 보이지 않는다
언제 일어날지 나도 모른다
숨어서 숨죽이고 있는 바람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바람
어떤 모양인지
어떤 기세인지
나의 주치의 안 박사도 그건 모른다
그저 솜털 정도 일으키는 미풍일지
팔랑팔랑 가볍게
옷깃 날리는 나들이 바람일지
아니면 얼얼하게 정신을 치고 내닫는
몽둥이 바람일지
통째로 내 몸을 날려 보릴
A급 태풍이 될지
어쨌든 두려움 속에서도
궁금한 내 몸 속의 바람
오늘밤에 일어날지도
모를, 내 몸속의 바람 주의보!
날밤을 까먹기까지
정대구
꼭꼭 가시 돋친 밤송이가
말끝마다 나의 한계를 건드리고
나의 호기심을 찔러
손끝에 피를 보면서까지
총총한 가면의 가시옷 벗겨 내면
놀라워라 거기 깨물어 주고 싶도록 귀여운
반들반들 얄미운 유혹 세 톨
이걸 까먹어야 하나 말아야i 하나
이빨도 들지 않는 단단함
이걸 칼을 대야 하나 알아야 하나
아니지, 어려운 1차 방어선을 넘어 왔는데
그냥 눈요기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어
여기까지 온 나의 욕망
2차방어선을 넘고 넘어
최종적으로 부딪게 되는 재3의 관문
결코 쉽지 않은 만만찮은 저항
수줍음인 듯 공포인 듯 바르르 떠는
맨살에 꼭 달라붙은 속옷까지 벗겨 내는데
침이 꿀꺽꿀꺽 폭포로 넘어가고
내 눈앞에 드러낸 비릿한 날 것의 향기
아드득 통째로 깨물어 먹는
완성한 나의 식욕 누가 뭐래
누구도 못 말리는 나의 탐미耽味 탐미주의眈美主義
그해 겨울바다
정대구
정신이 번쩍 빛나는 성자처럼
흰 이빨로 제 살 깨무는
겨울바다의 저 단호한 결의
뜨뜻 미지근 우유부단한 머리통 처박고
온갖 오염의 잡동사니 뜯어내어
들끓는 오장육부 쏟아 내어
와르르 달려들어 등골을 향하여
一字로 칼을 꽂는 칼바람
이불 뒤집어 쓴
게으른 꿈을 흔들어 찍어대는
겨울밤바다의 저 사나운 도끼질천둥소리
바람선생
정대구
선생은 잠자고 일어나는
주거가 일정치 않아
바람이 났는지
집안에 있기보다는
주로 집 밖에서 논다
흰 빨래 에 매달려
칭얼칭얼 조르기도 하고
흔들어 깃폭을 찢기도 하고
숲에 들어 잠자고
눈을 비비고 바다에서 일어나
허공을 헛딛기도 해
천상 바람둥이
그의 크기는 종잡을 수 없어
땅갗의 풀들과 키스를 나누고
순식간에 지붕을 넘어
하늘에 닿기도 해
재미있는 것은 아무도
그의 얼굴 그려낸 화가 없고
어떤 기상대에서도 정확하게
그의 향방은 예측불허
밤새 비를 몰고 바다를 건너 온 선생이
마침내 나의 창문을
크게 노크 덜커덩 덜커덩
지금이 새벽 몇신데,
바람의 자식
정대구
그와 잠자리를 같이 하지 않은 여인이 없다
그는 바람둥이, 바람둥이는 바람둥이를 낳는다
그의 자식들이 지금 세상을 흔들고 있다
나도 어쩔 수 없이 그의 자식이 되어 세상에 물의를 빚고 있다
자본주의 시대에 시의 소원
정대구
나의 시는 우선 돈이 되고 싶은 것이다
그리하여 시가 옷이 되나 밥이 되나 집이 되나 그깟 놈의 시
시지 구독료에 시집 사보랴 동인지 내랴 낭송회 하랴 시집 내랴
돈이나 잡아먹는 시라며 시를 구박하는 우리 마누라님의 입을
소원 없이 그 돈으로 콱 틀어 막아주는 그런 즐거움,
함박꽃잎처럼 입이 활짝 벌어지게 해 주고 싶은 것이다
어느 해이던가 장보러 갔던 아내가 단돈 천원에 샀다며
생전에 큰돈 한번 만져본다며 거의 A4용지 반 만한 만원짜리 한 장을
신나게 흔들고 들어오면서 보여줬던 그 활짝 핀 함박웃음처럼,
시도 돈이 된다는 걸, 큰돈이 된다는 걸, 그리하여
이게 시가 벌어온 돈이요 하고 보란 듯이
마누라님이 이마에 큰돈 한번 척 붙여주고
시도 한번 떳떳해 지고 싶은 것이다
그러자면 우선 시를 엄청 잘 써야 되겠지
하긴 시인 누구는 시를 잘 써서 문예진흥기금을 몇 번씩이나 받고
또 누구는 여기저기 거금이 걸린 문학상도 멸 개씩 몰아서 받고
누구누구는 시집을 팔아 빌딩을 샀다던가
이 정도면 돈과 시의 궁합도 짝짜꿍 칠만한데
(그런데 이런 정보는 제발 아내의 귀에 안 들어가기를 바란다)
그 정도 시를 잘 쓰려면 엄청 시를 잘 써야 하겠지
팔짝 뛰고 뒤로 자빠질 정도로
나의 시는 돈이 되고 싶은 것이다
설령 마누라님이 깜짝 놀라 까무러친다 해도
아내에게 큰돈이 되고 싶은 것이다
그게 안 된다면 나가서 죽든가
자본주의에 딴죽을 걸어 뒤로 자빠뜨릴 그런 힘 있는 시
돈을 잡아먹는 신나는 시를 쓰고 싶은 것이다
나의 시는,
어차피 돈과 시는 엇박자 궁합
돈 앞에 탕 탕 큰소리치고 싶은 것이다
나의 시는, 나는
토끼님 고맙습니다*
- 거북 올림
정대구
토끼님 고맙습니다
느림뱅이 거북이라고 놀려대던
세간의 화살과 야유와 비웃음이
이젠 고스란히 당신의 몫이 되었군요
나와의 달리기에서 낮잠을 주무신
후덕하신 토끼님 고맙습니다
만인 앞에서 당할 창피를 무릅쓰고
오늘까지도 깜쪽같이
그 기막힌 거짓잠의 비밀
나는 알아요. 왜 그랬는지
느림보로 낙인찍힌 나의 천 년 한 풀어주자는
갸륵한 그대의 선심 그대의 연극
너무나 훌륭합니다. 토끼님
자신의 체면을 깎아내고 명예를 떼어서
남에게 그것도 경쟁자에게 걸어주다니
분수에 넘치는
눈물겨운 나의 이 금메달
사실은 토끼님이 양보한 것이지요
오로지 타자만을 위하는 그대의
하해와 같은 배려지덕임을 내가 압니다
토끼님 고맙습니다
* 거북이와 토끼의 경주 이야기는 알다시피 서양 이야기꾼 이솝 할아버지가 지어낸 우화지만 여기서 토끼가 이기지 않고 상식을 초월해서 느림보 거북이가 이긴 걸로 승부를 낸 걸 보면 아마도 이솝 할아버지는 동양계인 듯 싶으이. 그렇지 않고서야 대단히 합리적이고 전투적인 서양인이 어떻게 이렇게 양보의 미덕을 비합리적인 생각을 해낼 수 있었을까 싶으이. ‘져 주는 것이 이기는 것’ 이것은 바로 동양인의 승부철학 특히 이 나라 이 겨레의 삶의 방식이 아니었던가. 그럴 듯도 싶으이. 이솝 할아버지는 고대 대한민국계였을 거야.
용왕님 고맙습니다*
정대구
용왕님 고맙습니다. 당신 아니었으면 나는 꼼짝없이 남편에게 쫓겨나고 말았을 거예요. 다행이 남편을 비롯한 이 땅의 사람들이 예부터 용왕님과 용궁을 철석같이 믿어왔기에 내가 용왕님의 초청을 받아 용궁엘 다녀왔다니까 처음에 의심하던 남편도 오히려 나를 그윽이 바라보며 묻던걸요. 그곳 경치는 어떻고 음식이며 향기는 어떻더냐고.
지금서 처음 털어 놓는 얘기지만 사실은 나 점심 먹고 잠시 혼자 있고 싶어서 바닷가에 나갔다가 나의 미모를 노리던 해적들에게 업혀가서 사흘 만에 풀려났던 거예요. 아무리 어린이가 자주 유괴되고 부녀자가 여기저기서 납치되는 흉흉한 세상이라지만 그렇다고 어떻게 해적한테 당한 일을 곧이곧대로 남편한테 털어놓겠어요. 남편 체면도 세워줘야지. 그래서 용왕님, 당신을 끌어들여 시침 뚝 떼고 둘러댔던 건데, 남편이 그냥 넘어가더군요. 사실은 사실을 다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모르는 것처럼 속아 줬는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용왕님, 당신에 대한 우리나라 사람들의 신앙 같은 크나큰 믿음이 아니었었다면 나의 알리바이는 애초부터 성립될 수도 없었고 아무도 믿어 주지도 않았겠지요. 고맙습니다. 용왕님,
* 신라 성덕왕 때에 순정공이 강릉태수로 부임하는 도중에 바닷가에서 생긴 일이었다. 임해정에서 점심을 먹게 되었는데 갑자기 바다에서 용이 나타나더니 수로부인을 끌고 바다 속으로 들어갔다. 순정공이 땅에 넘어지며 발을 굴러봤지만 구출할 방도가 없었다. 그런데 한 노인이 나타나 일러주었다. 사람을 풀어 부인을 내놓으라고 소리 지르며 몽둥이로 일제히 물끝을 치시오. 옛말에도 여러 사람의 말은 쇠도 녹인다고 했습니다. 비록 바닷속의 용인들 어찌 여러 사람의 입을 두려워하지 않겠습니까? 순정공이 노인의 말대로 하였더니 용이 여론에 못 이기어 부인을 모시고 나와 공에게 돌려주었다. 순정공이 부인을 맞아 바다 속의 일을 부인에게 물었다. 부인이 대답했다. 화려한 용궁의 음식은 맛있고 향기롭고 깨끗한 것이 불에 익힌 인간의 음식과는 유가 아닙디다. 부인의 옷에 밴 이상한 향기는 과연 이 세상 것이 아니듯 싶었다. 수로부인은 아름다운 용모가 세상에 뛰어나 깊은 산이나 큰 못을 지날 때도 여러 차례 신물神物에게 붙들리어 갔었다.(후략) -<삼국유사> 권2「수로부인」조 의역
어부님 고맙습니다*
정대구
어부님 고맙습니다. 말도 안 되는 이 혼탁한 세상 살아가는 데 있어서 참으로 당신은 나에게 고마운 거울이지요. 당신과 똑같이 강물이 흐릴 땐 발을 씻고 강물이 맑을 땐 갓끈을 씻으며 8.15 6.25 4.19 5.18 6.29-20세기 지금까지 세월을 낚으며 살아왔지요. 네모 반듯반듯한 행동, 융통성 없는 올곧은 생각만으로는 왕따 당하기 십상이지요. 굴원이가 왜 굴원이 되었습니까. 세상과의 소통부재 잘난 체한 옹고집 때문 아니겠어요.
험한 세상 살아가는 구선생, 굴원을 반면교사 삼아 청탁불문 무리와 함께 놀고 함께 나누는 당신의 지혜를 어떻게 부정할 수 있겠어요. 그런데 굴원이가 감히 당신을 인정하지 않다니, 그가 물에 빠져죽은 건 안타깝지만, 누군들 당신과 타협 않고 눈곱만큼인들 살 수 있겠어요. 굴원 때보다 더 난세를 살아가는 구선생이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다 둥글둥글 모나지 않게 살아가는 어부당신의 처세술을 거울삼았기 때문이죠. 어부님,
* 굴평의 <어부사>를 패러디하여 읽으며 진구렁 같은 현실을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끝내 물고기의 밥이 되었다는 굴원과는 달리 혼탁한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하여 눈감을 땐 적당히 눈감으며 그럭저럭 둥글둥글 한 세상 살아보자는 어부의 입장을 취하는 구선생.
평강공주님 고맙습니다*
- 바보온달 올림
정대구
평강공주님, 나는 바보 온달입니다. 울고 싶어도 바보처럼 실실 웃기만 하고 울 줄도 모르는 비천한 이놈을 공주님의 울음이 선택해 주셨습니다. 공주님, 고맙습니다
안 풀리고 답답할 때, 억울할 때 크게 목 놓아 울어 버릴까요. 무슨 수가 생기던가요, 앞길이 탁 트이던가요. 그때 울보 공중님이 그랬던 것처럼, 떼쟁이아이들의 기를 쓰는 울음처럼
누가 알아요. 소원을 들어주는 울음이라면, 내세엔 내가 공주님처럼 울고 보채어서 다시 내가 공주님께 꼭 장가들게 될지
*·『삼국사기』온달전에 따르면 고구려 평강왕의 딸 평강공주는 어려서 잘 울어 그때마다 왕이 바보 온달에게 시집 보내겠다고 하여 공주의 울음을 달랬다. 어느덧 공주의 혼기를 당하여 명문가(상부 고씨)에 시집보내려고 하자 어려서부터의 약속을 지켜야 한다며 공주는 궁궐에서 나와 바보 온달을 찾아가 그와 혼인하여 뒷날 바보온달은 장군온달이 되어 나라에 공헌했다고 전한다.
구름님 고맙습니다
정대구
짚신 들메고 휘적휘적
흰 수염 길게 휘말리며
먼 길 떠나신 우리 할아버지
보시오 장마 끝 저기서 다시 돌아오시네요
머물고 떠남이 거침없고 그리고 흔적 없으시던
돌아가신 우리 할아버지의 혼령이
구름새*되어
저 파란 하늘 속 수놓듯
구름모자 쓰시고
* 김영호의 시에서
종이님 고맙습니다
정대구
말도 안 되는 시 쓴답시고 참 많이 종이를 괴롭혔지요
지우개로 얼굴을 박박 문대고 펜으로 찍찍 긋고
그러다가 얼굴을 마구마구 구겨서 휴지통에 던지거나
쫙쫙 찢어 버리기도 하고 참으로 신세 많이 졌어요
덕분에 좋은 시가 되어 두고두고 많은 사람들에게 읽힌다면
그나마 좀 덜 미안하련만 이젠 시집 엮어내기가 두려워요
팔리지 않고 서가에서 먼지 뒤집어쓰다가 파쇄기로 들어가 싹둑싹둑 썰리든가
소각장으로 실려가 공해로 생을 마감하는 건 아닌지
- 아무튼 종이님 고맙습니다
종이를 마구한 죗값으로 내가 죽어 꼭 종이 되어 신세 갚고 싶은데
종이로 태어나기도 쉽지 않군요
우선 나무로 태어나 바람으로 그늘로 봉사하다가
목재로 가구로 땔감으로 살신성인
천재일우로 종이 되는 과정을 거쳐 종이 된다면(종처럼 순종만 않고)
세상을 탕탕 때리는 힘 있는 시를 써서
함부로 종이 못 버리게 경종 울려야지
한국 마누라님들 고맙습니다
정대구
쫀쫀히 살림 잘 한다는 중년의 아내들은
내가 보기에 어느 정도까지는 모두 악처입니다
이점, 소옹의 아내뿐 아니라
구선생의 아내 역시 예외가 아니지요
아내의 그 구구한 참견
일일이 꼬투리 잡아내는 찬찬함
달려드는 가시 돋친 눈길
하나도 틀린 말이 아닌 잔소리를 먹고
구선생, 오늘도 파멸하지 않고 당당히
서고. 이만큼 똑똑해지고 있음
인간이 되어가고 있음
마누라님, 고맙습니다
이 말은 빈 말이거나 아첨 떨자는 비굴함도 아니고
비웃거나 비꼬자 함은 더더욱 아님
눈물겨운 사실을 한 올의 거짓도 없이
사실대로 밝혔을 뿐
보시오 오늘도 구선생
맞불작전으로 고래고래 소리 지르고픈
비인격적 충동을 억누르고
입 앙, 다물고 숨죽이며
발꿈치 들고 벌벌 기는 꼴이나니
절제와 근신의 확인
이 모두가 살림을 잘 산다는 아줌마 효과 아니겠어요
우철동님 고맙습니다
정대구
이런 저런 일로 이래저래 내가 시가 안 될 때
불현듯 나는 어디론가 도망갑니다
가서 보면 원주 사는 우철동씨 집
엉뚱하게도 거기 내가 숨어 있어요
이마에 접힌 주름 속에 영락없는 내가 있어요
평생을 나의 친구가 되어 준 우철동씨
시 쓰기는 자신과의 싸움이라고 하잖아요
그런데 내가 보여야 내가 나와 싸우지요
이런 때, 내가 나를 잃어버렸을 때
나는 우철동씨를 보면서 나를 찾습니다
뒤늦게 집에서 구박 받고 있는 우철동씨
품 안에 손녀를 안고 어르고 있는 우철동씨
까닭 없는 시대를 혼자서 고민하는 우철동씨
부딪고 멍들면서 살아가는 이유와 싸우고 있는 우철동씨
가끔 눈물 같은 너털웃음을 쏟아내는 우철동씨
때론 화필을 잡고 마음을 달래고 있는 우철동씨
내 앞에 더덩실 춤을 추어 안기는 우철동씨
말끝마다 양심의 끝자락이 조금씩 묻어 나오는 우철동씨
우리가 처음 만나던 때의 순수를
아직도 잃지 않고 있는 우철동씨
나의 살 나의 피 나의 얼굴
내 시의 얼굴 우철동씨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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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의 말
지난 세기말 자동차 추돌사고와 연이은 심장수술로 나는 죽었다 살아난 적이 있었습니다. 죽음에서 깨어나 다시 사물을 만날 수 있다는 자체가 낯설고 새롭고 고마워 ‘고맙습니다’라고 인사하고 싶었습니다. 3,4부 연작 은 이때 썼던 것들 중에서 취사하여 가필한 것입니다.
‘고맙습니다’는 요즘도 나의 화두요 양심입니다. 물심양면으로 노상 빚만 지고 살아가는 내가 그 빚을 갚으며 사는 삶의 한 방식이요, 인사입니다. 아내에 대하여 아이들에 대하여 이웃이나 사회에 대하여, 사물에 대하여 시에 대하여 또는 내 몸, 나의 호흡, 나의 하느님, 나의 독자에 대하여 내가 보여드리는 인사고 나의 도리, 내가 걸어가야 할 나의 길입니다.
벌써 전에 냈어야 했을 시집을 게으른 탓으로 이제야 엮게 되었음을 이 자리를 빌려 독자제현의 질책을 구하며 인사에 대합니다. 고맙습니다.
2014년 초겨울
정 대 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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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대구 詩集 [※곰할머님 고맙습니다※]
[ 해설 ] -
당당하고 진실한 참된 시
권 온 문학평론가
1.
정대구 시인의 시편은 소박하고 친근하다. 당신과 나는 유별난 긴장감 없이 편안한 상황에서 그의 시를 읽을 수 있다. 비근한 일상의 세목에서 삶을 위한 통찰을 발견하는 자를 시인이라 일컬을 때, 정대구는 시인이 될 자격이 충분하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언제나 재미와 흥미, 유머와 위트를 잃지 않는 그의 시는 독자에게 큰 위안을 전달한다. 또한 극심한 자본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정대구 시의 당당하고도 진실한 사회풍자는 상당한 격려가 될 수 있다. 시집 『곰 할머님 고맙습니다』의 구체적인 작품 속을 탐색해 보기로 하자.
2.
어릴 적 내 살 속의 피를 빨아먹던 그 많던 빈대들 다 어디갔나 했더니, 지리산 기슭 고로쇠나무를 세워놓은 채 거기 붙어 서서 톱날 같은 이빨을 꽂아 넣고 고로쇠나무의 피를 긁어 모으고 있었네. TV화면만 아니라면 당장 멱살을 잡고 메다꽂고 싶었는데, 그런데, 놀라운 것은 고로쇠나무의 참을성이라네, 몸이 약한 자, 목마른 자에게 자신의 몸을 내맡긴 채 살보시 피보시의 미덕이라니, 난 그러지 못했는데, 내 피를 빨아먹은 놈은 눈에 불을 켜고 보는 족족 잡아서 배를 터트려 짓뭉게버렸는데…
-「빈대와 고로쇠나무」전문
범인凡人은 그냥 지나치는 일상의 세부에서 어떤 각성의 계기를 마련하는 사람을 가리켜 우리는 시인이라 부른다. 이 시의 화자 ‘나’는 원래 ‘빈대’를 향한 큰 원한을 품고 살아왔다. 유년 시절 빈대들이 자신의 피를 빨아먹었기 때문이다. 성인이 된 ‘나’는 어느 날 TV를 보다가 ‘고로쇠나무’의 피와 살을 흡입하는 빈대를 발견하고 강한 분노를 느낀다. 그런데 이때 ‘나’는 자신과는 다른 반응을 보이는 ‘고로쇠나무’의 모습에서 놀라움을 체험한다. 그는 빈대를 ‘몸이 약한 자’로 인정하고 ‘목마른 자’로 흡수하는 고로쇠나무의 참을성에 감탄한다. 스스로의 살과 피를 허용하는 고로쇠나무의 “살보시 피보시의 미덕”은 ‘나’의 고정된 인식에 충격을 전달했던 것이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를 신조로 삼았던 ‘나’에게 고로쇠나무의 조건 없는 사랑은 커다란 울림으로 다가왔다. 그런 까닭에 “난 그러지 못했는데”라는 그의 토로는 우리에게 더없이 소중하다.
꿈꾸지 않기 천년을 꿈꾼들 하긴 지렁이 몸에 날개는 어울리지 않겠지요. 적어도 이무기쯤 돼야 용이 되는 꿈도 꾸고 굼벵이라야 매미가 되지요 무슨 천형天刑으로 평생을 햇볕 피하기 기어서 땅 속으로 파고들기 숨어버리기
만의 하나 광명 찾아 기어 나왔다가는 곧 시뻘건 불벼락 맞고 말라비틀어지기 십상이지요. 죽는 그날까지 지렁이 도사가 진즉에 가르쳐주었지요 지금도 어쩔 수 없는 한 많은 천추의 함원含怨 감추며 한밤중 땅 속에서 심금을 울어대는 찡한 핏빛 곱고 투명한 맑은 노래 다 이 때문이지요
하지만 주제파악도 못하고 남에게 밟힐 때마다 나는 환골탈태의 꿈을 꾸었지요. 못생긴 징그러운 벌레들도 무슨무슨 나비 되어 아름다운 나지 되어 하늘 수놓듯 춤추듯 꽃밭을 날아다니지 않던가요. 그만도 못한 뒷간의 더러운 구더기들도 단 며칠 만에 날개를 달고 포롱포롱 사람 약 올리지 않던가요. 하오나 모기나 파리도 아무나 되는 게 아니더군요. 지렁이 도사가 진즉에 온몸으로 보여준 교훈을 지금서 딴 마음 먹으면 지렁이만도 못한 놈 그런 인간 되지 않겠어요. 그저 나는 꿈틀거릴 뿐입니다. 꿈도 저항도 없이 다만 꿈틀거릴 뿐
-「지렁이의 비가悲歌」전문
정대구 시인은 앞에서 ‘고로쇠나무’에게서 ‘참을성’ 또는 ‘살보시 피보시의 미덕’을 배운 바 있음을 독자에게 알려주었다. 시인에게는 하찮은 사물에서도 성찰의 순간을 포착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그런 점에서 인용한 시 「지렁이의 비가悲歌」역시 미물에 불과한 ‘지렁이’에게서 스스로의 나아갈 길을 발견한 시인의 노력이 빛나는 작품이다. 그는 “지렁이 도사”에게서 누구나 “매미”나 “나비”가 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아무자 “모기”나 “파리”가 되는 것이 아님을 깨닫는다. 물론 그도 한때 “용이 되는 꿈”을, “환골탈태의 꿈”을 꾼적이 있다. 그러나 팔순八旬을 눈앞에 둔 지금, 시인은 화자 ‘나’의 목소리를 빌려서 다만 이렇게 말할 뿐이다. “그저 나는 꿈틀거릴 뿐입니다 꿈도 저항도 없이 다만 꿈틀거릴 뿐” “지렁이만도 못한 놈 그런 인간”이 되고 싶지 않아서 시인은 “꿈꾸지 않기”를 선언한다. 그리하여 시인 정대구는 이 시에서 꿈을 상실하고, 아무런 저항도 못한 채, 다만 꿈틀거리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애잔한 자화상을 절절하게 보여준다.
바캉스인지
바카스인지
난, 자주 헷갈려
세계화 시대에
걸맞지 않게
난,구닥다리
사실 난, 동화제약 박카스 마시고도
취하는 체질이거든
그런데 바캉슨 또 뭐야
어지러워
조선시대 선비처럼
어리둥절 기승부리는 찜통더위에
기를 쓰고
세계화에 뒤질세라
어디로든 나도
무리를 따라
떠나긴 떠나야할 텐데
에라, 모르겠다
물 한 동이 길어다가 두 발 담그고
바커스가 기절할
바캉스를 지금 나, 즐기신다네
-「나의 바캉스」전문
시인이 구사하는 외양이 유사한 어휘들의 군무群舞로 독자들은 다소 어리둥절할지도 모른다. “바캉스”와 “바카스”와 “박카스”와 “바커스”의 출현은 정대구 시인의 예민한 시적 촉수를 보여준다. 시의 화자 ‘나’가 바캉스와 바카스 사이에서 방황하는 모습은 그가 “세계화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구닥다리”임을 드러낸다. 모두들 정신없이 달려가는 현대사회에서 “조선시대 선비처럼” 살아가는 ‘나’는 어쩌면 낙오자로 이해될 가능성이 다분하다. 시의 화자가 “어디로든 나도/무리를 따라/떠나긴 떠나야할 텐데”라는 심경을 피력하는 까닭도 타인에게 뒤처지면 안 된다는 조바심 때문일 것이다. 이 시에서 시인의 시인다움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대목은 무엇보다고 7연이 될 텐데 이 부분은 우리에게 강한 호소력을 발휘할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나’가 말하는 “바커스가 기절할/바캉스”는 무엇인가. 주지하다시피 여기에서 ‘바커스’곧 ‘바쿠스’란 술의 신을 가리킨다. “동화제약 박카스”에도 취하는 체질인 ‘나’가 술을 즐길 리는 만무하다. ‘나’가 선택한 바캉스 곧 피서의 방법은 양동이 속 차가운 물에 두 발을 담그는 일이다. 21세기의 진정한 풍류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어디 숨어 있는지
바람이 숨을 죽이고
머리카락도 보이지 않는다
언제 일어날지 나도 모른다
숨어서 숨죽이고 있는 바람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바람
어떤 모양인지
어떤 기세일지
나의 주치의 안 박사도 그건 모른다
그저 솜털 정도 일으키는 미풍일지
팔랑팔랑 가볍게
옷깃 날리는 나들이 바람일지
아니면 얼얼하게 정신을 치고 내닫는
몽둥이 바람일지
통째로 내 몸을 날려 버릴
A급 태풍이 될지
어쨌든 두려움 속에서도
궁금한 내 몸 속의 바람
오늘밤에 일어날지도
모를, 내 몸 속의 바람 주의보!
-「내 몸 속의 바람」전문
이 시가 다루는 내용은 진지하고 심각한 성격을 갖는다. 시인은 시집의 후기에서 독자에게 “지난 세기말 자동차 추돌사고와 연이는 심장수술로 나는 죽었다 살아난 적이 있었습니다”라는 발언을 전한다. 이 작품은 다행스럽게 죽음의 문턱을 넘지 않고 여전히 삶의 끈을 붙잡을 수 있는 행운 거머쥔 자의 조심스러운 고백일 수 있다. “내 몸속의 바람”은 시의 화자 ‘나’를, 시인을 소멸로 인도할 수 있는 무시무시한 힘일 것이다. 시인 정대구의 힘은 진지하고 심각한, 절망에 가까운 상황에서도 유머와 위트를 잃지 않는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머리카락도 보이지 않는다”나 “나의 주치의 안 박사도 그건 모른다”는 발언, 무엇보다도 “어쨌든 두려움 속에서도 /궁금한 내 몸속의 바람”이라는 표현 등이 이를 입증한다. 재미와 흥미가 내재되어 있는 시, 그런 까닭에 정대구의 시는 우리를 설레게 한다.
나의 시는 우선 돈이 되고 싶은 것이다
그리하여 시가 옷이 되나 밥이 되나 그깟 놈의 시
시지 구독료에 시집 사보랴 동인지 내랴 낭송회 하랴 시집 내랴
돈이나 잡아먹는 시라며 시를 구박하는 우리 마누라님의 입을
소원 없이 그 돈으로 콱 틀어막아 주는 그런 즐거움
함박꽃잎처럼 입이 활짝 벌어지게 해주고 싶은 것이다
어느 해이던가 장보러 갔던 아내가 단돈 천원에 샀다며
생전에 큰돈 한번 만져본다며 거의 A4용지 반 만한 만원짜리 한 장을
신나게 흔들고 드러오면서 보여줬던 그 활짝 핀 함박웃음처럼
시도 돈이 된다는 걸, 큰돈이 된다는 걸, 그리하여
이에 시가 벌어온 돈이요 하고 보란 듯이
마누라님의 이마에 큰돈 한번 척 붙여주고
시도 한번 떳떳해 지고 싶은 것이다
그러자면 우선 시를 엄청 잘 써야 되겠지
하긴 시인 누구는 시를 잘 써서 문예진흥기금을 몇 번씩이나 받고
또 누구는 여기저기 거금이 걸린 문학상도 몇 개씩 몰아서 받고
누구누구는 시집을 팔아 빌딩을 샀다던가
이 정도면 돈과 시의 궁합도 짝짜꿍 칠만한데
(그런데 이런 정보는 제발 아내의 귀에 안 들어가기를 바란다)
그 정도 시를 잘 쓰려면 엄청 시를 잘 써야 하겠지
팔짝 뛰고 뒤로 자빠질 정도로
나의 시는 돈이 되고 싶은 것이다
그게 안 된다면 나가서 죽든가
자본주의에 딴죽을 걸어 뒤로 자빠뜨릴 그런 힘 있는 시
돈을 잡아먹는 신나는 시를 쓰고 싶은 것이다
나의 시는
어차피 돈과 시는 엇박자 궁합
돈 앞에 탕 탕 큰소리치고 싶은 것이다
나의 시는, 나는
-「자본주의 시대에 시의 소원」전문
잘 알다시피 우리는 자본주의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자본주의시대의 핵심은 다른 무엇도 아닌 돈이다. 정대구 시인의 이 시는 “자본주의 시대”와 “돈”과 “시”의 문제를 정면으로 돌파하는 역작이다. 우리가 이 작품에서 무엇보다도 높게 평가하고 싶은 대목은 시인의 직설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나의 시는(우선) 돈이 되고 싶은 것이다”라는 그의 발언은 얼마나 당당하고도 멋진가. 21세기 자본주의시대에는 “옷”이 되고 “밥”이 되고 “돈”이 되는 시가 필요하다는 시의 화자 ‘나’의 발언은 통쾌하기까지 하다. ‘나’도 누구처럼 “문예진흥기금”이나 “문학상”을 받고 싶고 “시집을 팔아 빌딩을”사고 싶다. ‘나’의 시도 “마누라님” 또는 “아내”에게 “한번 떳떳해 지고 싶은 것이다” 그에게는 간절한 소망이 하나 있다. “자본주의에 딴죽을 걸어 뒤로 자빠뜨릴 그런 힘 있는 시/돈을 잡아먹는 신나는 시를 쓰고 싶은 것이다” 특히 이 작품의 마지막 행인 “나의 시는, 나는”에 제시되는 시인의 진솔한 사회풍자는 아프지만 아름답다. 돈이 지배하는 이 사회에서 떳떳하고 큰 소리 칠 수 있는 ‘나의 시’는 다름 아닌 ‘나’의 진정한 이름일 것이기 때문이다.
곰할머님 고맙습니다. 이 미련 곰탱이가 아직도 믿는 것은 오직 곰할머님뿐입니다. 지금은 아직 가재도 게도 아니지만 언제고 나름대로 제 이름을 얻겠지요. 요즘 녀석들 참 빨리도 호랑이처럼 나내는데, 난 달라요. 쑥내를 맡으며 백 일간 마늘을 씹겠어요. 궁핍한 동굴 속에서 미련곰탱이 곰할머니가 마침내 인간이 되듯, 환골탈태 나도 무엇인가 달라지겠지요. 어떤 모욕도 참고 견디겠지요. 이 치욕의 시대에 나의 거울이 되어 주신 곰할머님 고맙습니다
-「곰할머님 고맙습니다」전문
정대구 이번 시집 3부와 4부는 연작시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시도 그 중 하나이다. 시인은 친절하게도 인용 부분 하단에 참조문헌을 포함한 주석을 달고 있는데, 이는 일종의 형식 실험에 상응한다. 이 작품은「삼국유사」에 수록된 ‘고조선’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시인은 성급한 “호랑이”와 대비되는 “곰할머님”의 참을성과 인내를 강조한다. 스스로를 “미련 곰탱이”로 규정하는 시의 화자 ‘나’에게 “곰할머님”의 견인주의는 하나의 표상이자 “이 치욕의 시대”라는 거대한 물결을 헤쳐나갈 수 있는 유일한 구명보트이다.
3.
정대구 시인의 시집『곰할머님 고맙습니다』의 3부와 4부는 ‘고맙습니다’라는 제목을 단 24편의 연작시가 수록되어 있다. 아마도 시인은 죽음의 고비를 딛고 삶의 터전으로 복귀한 감사의 마음을 담아 일련의 연작시를 창작한 것으로 보인다. 시집의 후기에 따르면 그는 아내, 아이들, 이웃, 사회, 사물, 자신의 몸과 호흡, 하느님, 독자 등에 대한 하나의 인사이자 도리로써 이러한 연작시를 기술한 것이다. ‘구선생’ 또는 시인 정대구는 치욕을 강요하는 자본주의 시대를 견디는 하나의 무기로써 시를 선택했고, 이는 시「어부님 고맙습니다」에 제시되어 있듯이 “둥글둥글 모나지 않게 살아가는”, “처세술”로 구현되었다. 앞으로 소박하면서도 친근한, 재미와 흥미를 갖추면서도 사회를 향한 당당한 비판도 서슴지 않는 멋진 시인의 행보가 더욱 넓고 깊게 나아가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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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사의 글 ◆
자신을 내려놓을 때 세상이 더 잘 보인다고 한다. 정대구 시인은 어느 누구보다 자신을 내려놓고 사는 분이다. 그래서 그런가, 정대구 시인의 시를 읽으면 작고 하찮은 것들로부터 울려오는 진실의 목소리를 만날 수 있다. 이 진실의 소리가 더욱 질실하게 다가오는 것은 다름 아니라 세상의 하찮고 작은 것에도 고마워하는 시인의 소박한 마음이 담겨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말하듯이 진솔한 목소리로 써 내려간 시행들이 시적인 긴장을 이루고 있는 것은 시행마다 바로 이 진실의 절절함을 담고 있기 때문이리라. 말하듯, 그러나 시적 긴장을 절대로 놓치지 않는, 시적 진정성을 만날 수 있는 시집이라고 생각한다.
- 윤석산 시인, 전 한양대학교 교수
정대구 시인의 시집『곰할머님 고맙습니다』의 3부와 4부는 ‘고맙습니다’라는 제목을 단 24편의 연작시가 수록되어 있다. 아마도 시인은 죽음의 고비를 딛고 삶의 터전으로 복귀한 감사의 마음을 담아 일련의 연작시를 창작한 것으로 보인다. 시집의 후기에 따르면 그는 아내, 아이들, 이웃, 사회, 사물, 자신의 몸과 호흡, 하느님, 독자 등에 대한 하나의 인사이자 도리로써 이러한 연작시를 기술한 것이다. ‘구선생’ 또는 시인 정대구는 치욕을 강요하는 자본주의 시대를 견디는 하나의 무기로써 시를 선택했고, 이는 시「어부님 고맙습니다」에 제시되어 있듯이 “둥글둥글 모나지 않게 살아가는”, “처세술”로 구현되었다. 앞으로 소박하면서도 친근한, 재미와 흥미를 갖추면서도 사회를 향한 당당한 비판도 서슴지 않는 멋진 시인의 행보가 더욱 넓고 깊게 나아가기를 소망한다
- 권 온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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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대구 시인∥
∙ 1936년 경기도 화성에서 태어났고,
∙ 1972년《대한일보》신춘문예로 등단했다.
∙ 시집으로는『나의 친구 우철동씨』『겨울기도』『무지리 사람들』『양산일기』 등 10여 권이 있고,
∙ 수필집으로는 『녹색평화』『구선생의 평화주의』가 있으며,
∙ 연구서로는『김수영 연구』『김삿갓 연구』등이 있다.『
정대구 시집『곰할머니 고맙습니다』는 자본주의 시대의 치욕을 견디는 시집이며, 언제, 어느 때나 의연하고 당당한 ‘곰할머님’의 삶에 대한 찬가라고 할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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