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범(白凡) 김구(金九)선생
나의 소원
네 소원이 무엇이냐 하고 하느님이 내게 물으시면, 나는 서슴지 않고, "내 소원은 대한 독립이오."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 다음 소원은 무엇이냐 하면, 나는 또 "우리 나라의 독립이오."할 것이요, 또 그 다음 소원이 무엇이냐 하는 세 번째 물음에도, 나는 더욱 소리를 높여서 "나의 소원은 우리 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 독립이오."라고 대답할 것이다. -김구
백범 김구(金九, 1876년 8월 29일(음력 7월 11일) ~ 1949년 6월 26일)
김구(金九, 1876년 8월 29일(음력 7월 11일) ~ 1949년 6월 26일)는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통일운동가·교육자·정치인이다.
동학농민운동에 참가하였고, 교육·계몽운동 중 일본 경찰에 수감되기도 하였다. 1919년 이후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 참여하여, 의정원 의원, 경무국장, 내무총장, 국무총리 대리, 노동국 총판 등을 지냈다. 1921년 이후 사회주의에 입각한 일부 독립운동가들이 대한민국 임시 정부와 결별하고, 만주 사변 이후에 일본의 중국 침략이 본격화되면서 중국 내 여러 지역으로 임시 정부를 옮겨다니는 수난을 겪기도 하였다.
1926년 12월부터 1927년까지 1930년부터 1933년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령을, 이후 국무위원을 거쳐 1940년 3월부터 1948년 8월 15일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회 주석을 지냈다. 1945년 광복 이후에는 신탁 통치 반대 운동과 임시정부 법통 운동을 하였으며, 1948년 1월부터 남북 협상에 참여하였다.
자(字)는 연하(蓮河), 처음 이름은 창암(昌巖)이고, 호(號)는 백범(白凡), 연상(蓮上)이다. 호는 미천한 백성을 상징하는 백정의 ‘백(白)’과 보통 사람이라는 범부의 ‘범(凡)’ 자를 따서 지었다. 김구는 자신의 호인 백범의 유래에 대해서 "독립국을 이루기 위해서는 가장 천하다는 백정과 무식한 범부까지 전부가 적어도 나만한 애국심은 가진 사람이 되게 하자는 원(願)을 표한 것"이라고 풀이하였다.[1] 19세 때 이름을 창수(昌洙)로 바꾸었다가, 37세(1912년)에 거북 '구'(龜)였던 이름을 아홉 '구'(九)로 바꾸었다. 젊어서 동학교도 였고,불교에 귀의해서 법명,원종을 얻은 승려였으며[2],개신교 신자였던 김구는 후에 천주교 신자가 되었고, 죽기전에 병자성사를 받았다. 천주교 세례명은 베드로[3]이다. 본관은 안동이며, 황해도 해주(海州) 출신이다.
보성에 있는 백범 김구선생 은거의 집
백범이 은거하던 집 황해도에서 일본 왜병 중위 쓰치다를 살해한 죄목으로 체포되었다가 탈영하여 삼남지방을 유랑하던 중 칩거했던
득량면 삼정리 쇠실마을 김광언씨의 집. 김씨의 후손들이 살고 있다.
은거내용: 1898년 초여름
1898년 5월경 김두호라는 건장한 청년이 이 집에서 달포쯤(45일) 기거 했는데, 그 청년이 나중에 온 겨레가 민족의 지도자로 숭앙하는 백범 김구선생이었다. 백범선생은 일제의 민비 시해를 응징코자 일본군 장교를 살해하고 옥고를 치르다가, 1898년 3월9일 인천감옥에서 탈옥하여 피신의 은신처를 찾던 중, 그 해 5월 이 곳 쇠실 마을을 찾아든 것이다. 백범 선생은 이 집(종친 김광언의 집)에 머물면서 종친 광언,덕언,사중과 더불어 학문과 시대를 논하고, 중국역사가 아닌 우리 역사를 공부하며 민족정기를 일깨웠다.
떠날 때 그간 보살펴 준 은덕에 감사하며 이 집의 종친 김광언(金光彦)에게 한국 역사책을 남겼는데, 이 책의 속표지에는 이별을 아쉬워 하는 한시 한 수와 김두호(金斗昊)라는 서명이 있다.
이별하기 어렵구나 이별하기 어렵구나
헤어지는 곳에서 일가의 정이 솟는다
꽃 한가지를 반씩 나누어
한 가지는 종가에 남겨 두고 떠나네
이 세상 살아 언제 만날 것인고
이 강산을 떠나기 또한 어렵구나
넷이 함께 놀기 한 달이 넘었는데
일이 어긋나 아쉽게 헤어지며 떠나는구나.
해방 후 상해에서 귀국하자 김구 선생은 김기옥(金奇玉 김광언의 손자)에게 안부를 묻고 한번 방문하겠다는 편지를 보낸다. 그리고 이 마을을 떠난지 48년이 지난 1946년 9월 백범 김구 선생은 김두호가 아니라 민족의 지도자가 되어 이 쇠실 마을을 다시 찾았다. 김구 선생은 당시 쇠실 마을을 다시 찾은 소감을 "감격에 넘치었다"고 백범일지에 적고 있다.
김구 선생이 이 마을에 피신을 왔을 당시는 22세의 청년이었다. 이런 젊은이를 이 이집의 할아버지를 비롯해 마을 사람들이 융숭한 대접을 하였다. 이는 당시 김구 선생이 비록 떠돌이 신분이었지만 누가 보아도 범상한 사람이 아니었음을 추측케 한다.
김구 선생이 이 집에 머문 기간은 45일 정도다. 선생의 파란만장한 인생을 생각하면 매우 짧은 기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방 후 짧은 인연을 잊지 않고, 편지를 보내고 또 직접 마을을 방문해 마을 사람들과 정담을 나누는 시간을 갖는다. 요즘의 사회적 풍조에서 보면 이처럼 짧은 인연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작은 은혜에 진으로 감사하는 김구선생의 모습이 너무나 고귀하게 느껴진다.
-글쓴이:김태권.김태기
The Sound Of Silence - Simon Garfunkel
(더 싸운드 오브 싸일런스-사이몬 가펑클)
침묵의 소리
Hello darkness, my old friend I've come to talk with you again /Because a vision softly creeping left its seeds while I was sleeping
(헬로 다크니스, 마이 올드 프렌드 아이브 컴 투 턱 위드 유 어겐 /비커즈 어 비젼 소프틀리 크리핑 레프트 씨즈 와일 아이 워즈 슬리핑) 내 오랜 친구 어둠이여. 자네랑 이야기하려고 또 왔다네 /왜냐하면 내가 잠들어 있는 동안에 어떤 환상이 자기 씨를 심어놓았기 때문이지
And the vision that was planted in my brain still remains /within the sound of silence
(앤 더 비젼 댓 워즈 플랜티즈 인 마이 브레인 스틸 리메인즈/위드인 더 싸운드 오브 싸일런스)
내 뇌리에 깊히 박힌 그 환상은 아직도 여전히/침묵의 소리로 남아있다네
In restless dreams I walked alone narrow streets of cobble stone /Neath the halo of a street lamp I turned my collar to the cold and damp
(인 레스트레스 드림즈 아이 왁트 얼론 내로우 스트릿츠 어브 코블스톤/닛쓰 더 헤일로우 어브 어 스트릿 램프 아이 턴드 마이 칼라 투 더 콜드 앤 댐프)
불안한 꿈속에서 자갈이 깔린 좁은 길을 혼자 걸었지 /가로등불 밑에 다다랐을 때 차갑고 음습한 기운 때문에 옷깃을 세웠다네
When my eyes were stabbed by the flash of a neon light /that split the night and touched the sound of silence
(웬 마이 아이즈 월 스탭드 바이 더 흘래쉬 어브 어 네온 라이트/댓 스플리즈 더 나이트 앤 터취드 더 싸운드 어브 싸일런스)
그때 반짝이는 네온 불빛이 내 눈에 들어왔고/그 네온 불빛은 밤의 어둠을 가르며 침묵의 소리를 감싸안았다네
And in the naked light I saw ten thousand people, maybe more /People talking without speaking, people hearing without listening
(앤 인 더 네이키드 라이트 아이 써 텐 따우전드 피플, 메이비 모얼/피플 턱킹 위드아웃 스피킹, 피플 히얼링 위드아웃 리쓰닝)
적나라한 불빛가운데서 만명 정도? 아니 어쩌면 더 많은 사람들을 나는 볼 수 있었다네/그사람들은 마음에도 없는 이야기를 하고 듣는체 하지만 실제로는 듣지않고
people writing songs that voices never share/And no one dare disturb the sound of silence
(피플 롸이팅 쏭즈 댓 보이스 네벌 쉐얼/앤 노 원 대얼 디스텁 더 싸운드 어브 싸일런스)
심금을 울리지도 못하는 노래들을 부르고 있었다네/그 어느 누구도 감히 침묵의 소리를 깨뜨릴 엄두를 내지 못했다네
"Fools" said I, "You do not know silence like a cancer grows, /Hear my words that I might teach you, Take my arms that I might reach you."
("풀즈" 쌔드, "유 두 낫 노 싸일런스 라이크 어 캔설 그로우즈/히얼 마이 워즈 댓 아이 마이트 티취, 테이크 마이 암즈 댓 아이 마이트 리취 유.")
그래서 나는 바보들 암과도 같은 침묵이 자라고 있음을 당신들은 알지 못하나요?/당신들을 깨우치는 내 말을 들으세요 당신들에게 내미는 내 손을 잡으세요'라고 말했지
But my words like silent raindrops fell and echoed in the wells of silence
(벗 마이 워즈 라이크 싸일런트 레인드랍스 펠 앤 에코드 인 더 웰즈 어브 싸일런스)
하지만 그러한 내 말은 소리없는 빗방울처럼 떨어져 침묵의 샘 가운데에서 공허한 메아리같을 뿐이었다네
And the people bowed and prayed to the neon god they made /And the sign flashed out its warning in the words that it was forming
(앤 더 피플 바우드 앤 프레이드 투 더 네온 갓 데이 매이드/앤 더 싸인 플래쉬드 아웃 이츠 워닝 인 더 워즈 댓 잇 워즈 포밍)
사람들은 자기들이 만든 네온 神에게 허리굽혀 기도했다네 /그러자 네온이 만들어내는 단어중에 경고의 문구가 번쩍이었지
And the sign said,/ "The words of the prophets are written on the subway walls and tenement halls."
(앤 거 싸인 새드/"더 워즈 어브 더 프라핏츠 아 리튼 언 더 써브웨이 월즈 앤 테너먼트 핼즈.")
네온은 이렇게 말했어/'예언자의 말은 지하철의 벽이나 '싸구려 아파트 현관에 적혀있다'라고...
And whispered in the sounds of silence
(앤 위스펄드 인 더 싸운드 어브 싸일런스)
침묵의 소리 가운데에서 그렇게 속삭이더군...
선구자 - Various Artists
先驅者
일송정 푸른 솔은 늙어 늙어 갔어도/한줄기 해란강은 천년 두고 흐른다
지난날 강가에서 말 달리던 선구자/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용두레 우물가에 밤새소리 들릴 때/뜻 깊은 용문교에 달빛 고이 비친다
이역하늘 바라보며 활을 쏘던 선구자/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용주사 저녁종이 비암산에 울릴 때/사나이 굳은 마음 길이 새겨 두었네
조국을 찾겠노라 맹세하던 선구자/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선구자(先驅者)는 윤해영 작사 조두남 작곡의 가곡이다. 이 곡은 작곡가 조두남이 1933년에 목단강 부근에 머물고 있을 때에 함경도 사람인 윤해영의 청에 따라 작곡한 것으로 밝혔으나 작곡 시기에 대한 논란이 있다. 가사는 《용정의 노래》라는 제목이 붙어 있었으며, 내용은 룡정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2절과 3절의 내용은 이후에 변경되었다.
룽징(중국어간체:龙井, 정체:龍井, 병음:Lóngjǐng, 문화어·중국조선말:룡정, 표준어:용정)은 중화인민공화국지린 성옌볜 조선족 자치주에 있는 도시이다. 면적은 2591km²이고 인구는 26만명이다. 가곡 〈선구자〉로 알려진 정자 일송정이 있다. 시인 윤동주의 고향으로 그의 무덤이 룽징에 있다.
동남쪽으로는 두만강과 북조선에 접해 있다. 동북쪽으로는 옌지, 투먼, 서남쪽으로는 허룽, 서북쪽으로는 안투 현에 접해 있다. 백두산동쪽 기슭에 자리잡고 있으며 도시 가운데로 두만강의 지류인 하이란 강이 흐른다.
용정(龍井): http://ko.wikipedia.org/wiki/%EB%A3%A1%EC%A0%95 (위키백과)